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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년사

1945년. 광복

by 싯딤 2009. 9. 2.
8월12일. 38선 설정


얄타회담에서 전후 대책을 논의하는 미·영·소 연합국 수뇌들.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얄타 비밀회담 이후 5개월이 지난 1945년 7월 17일에서 8월 2일에 제2차 세계대전 중 마지막 연합국 수뇌회담이 포츠담에서 열렸다.

이때 미국은 시험에 성공한 원자폭탄의 사용에 대해 협의하였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소 양측의 군사대표들은 한국, 만주, 동해를 두 개의 작전지역으로 분할하는 계획을 발전시키고 이때 한반도의 작전경계선으로 38도선과 유사한 선이 고려되었다.

이렇게 직접 38선이 언급되기 이전에 미국의 전쟁성 합동정보처에서는 1945년 5월, 한반도 내 40도선을 소련군의 남하를 막는 한계선으로 고려한 안이 있었는데 이 40도선은 신의주와 함흥을 잇는 선이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으며, 소련도 8월 8일 대일선전포고와 동시에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2. 38도선 분활 획정 과정

45년 8월 10일 일본이 갑자기 항복의사를 표명하자 미국은 한반도를 소련이 단독점령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한반도 지역에 대한 신속한 군사적 개입이 필요했다고 판단했다.

8월 10일, 11일에 걸친 '3성 조정위원회'(미 국무,국방,해군성의 정책조정회의)를 열었다.

38선의 분할이 잠정적으로 확정된 일반명령 제1호의 초안은 본스틸과 그 일행의 밤샘작업으로 완성되었고 8월 11일 이른 새벽에 합동기획처로 넘겨져 토의되었다. 이때 가드너 제독은 항복선을 39도선으로 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5년 잠정 그어진 38도선이 포함된 일반명령 제1호는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자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미국은 이 일반명령 제1호를 즉각 스탈린 수상에게 보냈으며, 긴장된 가운데 스탈린의 답신을 기다리던 중 8월 16일, 스탈린 수상에게서 별다른 의의가 없다는 답신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38도선으로 최종적인 분계선이 획정되었는데, 소련으로서는 의외의 배려를 미국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때 미국 측에서는 만약 소련이 이를 거부한다면 할 수 없이 부산까지라도 내려가서 미군을 상륙시킬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내 북위 38도선을 미.소간 점령분할선으로 결정하고 본 내용의 전문을 8월 15일 소련,영국 등 연합국에 타진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 소련의 묵시적 동의로써 한반도의 군사적 분계선이 확정되었다.

스탈린은 답신에서 38도선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고, 북해도의 분할점령 요구와 대련.여순을 포함하는 요동반도는 만주의 일부로서 당연히 소련군 점령지역에 속한다는 것만을 상기시켰다고 한다.

북해도의 분할점령 요구는 미국이 묵살했지만, 한반도의 분할은 말없이 확정되고 말았다.

미국은 이 분계선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이룩될 때까지의 잠정적인 경계선으로 보았으나, 소련은 한반도 진주와 동시에 북한을 공산화하는 일에 주력하면서 남북한간의 교류를 차단하고 38도선에 군사적인 진지를 구축하는 등 분단 고착화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그러므로 분계선의 설정은 한국 국민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지형이나 사회, 문화, 경제, 산업, 행정 등 모든 분야에서 한반도의 특성을 전혀신경쓰지 않고 강대국들이 멋대로 정한 것이었다.*<위키백과>

 

8월 15일. 광복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 네거리로 몰려나온 서울시민들.



해방 직전 조선의 상황

태평양전쟁 말기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했고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2발의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전의를 상실했고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 다음날 미국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8월 10일에 일본이 내세운 항복조건은 부분적 항복이었는데 미국은 이를 거절했고 일본은 결국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기에 이른다.그리고 일본의 수뇌부는 종전 후 조선거류 80만 일본인의 안정적 귀환대책을 수립해야만 했다.

한 편, 일본이 항복을 미국에게 표명하던 8월 10일에 몽양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수립하고 조선총독부와 치안유지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8.15 해방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왕은 원자탄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한다고 국내외로 방송하였다.

이로서 35년 간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은 해방될 조국을 위한 정책이나 대책을 전혀 준비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해방은 식민지 내의 조선의 정치세력과 독립운동단체에 큰 혼란을 주었다.

아무도 재대로 준비하지 않았고, 무엇 하나 재대로 준비된 게 없는 상황에서 손만 뻗으면 권력을 쥘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망상을 이들에게 심어둔 8월 15일은 앞으로의 격심한 혼란과 대립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고 그 다음날, 조선 8도의 백성들은 비로서 해방이 된 것을 알고 너도나도 손에 태극기를 들고 해방된 조국을 위한 만세를 불렀다. (*실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만세를 부른 것은 8월 15일이 아니라 16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엔도(遠藤隆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회견을 마치고 돌아온 여운형(呂運亨)은 그 다음날에 휘문중학교 교정에 모인 수천 시민들앞에서 정무총감 엔도와 전날 있었던 협상 내용을 알리고 새 나라를 세우기에 동참하자고 열변을 토하여 군중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중권력의 시기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마지못해 정권을 넘겨주었던 일본은 미군과 접촉해 치안권을 다시 회수하려고 기도하는 등 한국인들에 의한 해방을 끝까지 방해했다.

8월 16일 건준 소속의 치안대가 경찰관서를 접수해 나가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행정권 이양을 거부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8월 28일 아베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은 미국의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질서를 교란하고 있으므로』 치안유지의 권한을 일본측에 확립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한국의 사정을 잘 몰랐던 맥아더는 『우리 군대가 떠맡을 때까지 38선 이남의 질서유지 권한을 귀측에 부여한다』는 해답을 보냈다.

9월 1일에는 조선관구 사령관 코오즈키 요시오가 『조선 안에는 법질서 파괴로 덕을 보려는 공산당과 독립운동가들이 많고 그 때문에 태업이나 폭동이 있을 것이 예상된다』는 의도적 보고를 미군에 보냈다.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던 하지(John R. Hodge)중장은 일본군의 정보를 그대로 믿고 『조선 안에서의 법과 질서유지를 위해 미군 진주 후에도 일본군을 이용하거나 그 무기를 사용할 것』을 맥아더에게 요청, 승인받았다.

해방은 되었지만 「총체적 해방」을 맞이하지는 못한 기형적 상황이 미군 진주 이전의 역사적 조건이었던 것이다.

일본인은 세상이 바뀌었음에도 자신들의 이익보전을 위한 공작을 성공시켜 미군의 계속적인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한국인을 정권이양의 과정에서 배제시키는데도 성공했다.
한국인은 해방된 후에도 주권을 쟁취하지 못했고 일장기가 휘날리는 총독부에서 일군이 미군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모순을 감내해야만 했다. 8월15일부터 9월 8일까지 총독부에 태극기가 게양된 적은 하루도 없었으며 일장기가 내려진 후 바로 성조기가 올라갔던 것이다.
이는 해방을자신의 힘으로 얻지 못한 한국인이 겪어야만 했던 시련이었다.

건준이 통치하려고 노력했던 20여일간은 일본군의 훼방에 의해 이중권력의 시기로 왜곡된 것이다.

* 발췌: 이완범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8월16일. 한국민주당 결성

1945년 9월 4일 우익진영의 대표자 82명은 서울 종로국민학교에 모여 한국민주당(한민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한민당 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8일 성명을 내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1945년 9월 10일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등은 미 군정장관 등을 만나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였다. 1945년 9월 16일, 이미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민당이 천도교 강당에서 일천육백여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했다.

한민당은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이 그들이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16일 한민당은 정강과 정책을 발표하였다. 정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공주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경제조항은 사회주의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다.

한민당은 1945년 9월 21일 중앙부서를 확정하였는데, 당수제 또는 최고위원제를 채택하지 않고 총무제를 채택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북의 백관수, 경북의 서상일, 경기의 김도연, 경남의 허정, 충남의 조병옥, 황해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는 수석 총무,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10월 20일 송진우의 주도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일명 환국지사후원회)라는 외곽단체를 조직하여 해외에서 귀국하는 독립지사들, 사실상 임정 요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1945년 10월 23일 개최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개최 대회에 대표를 참석시켜 이승만의 의견에 동조하였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이후 한민당은 이승만에 반발하여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1949년 1월 26일 대한국민회, 대동청년단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흡수해체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민주당의 모태가 되었다.* 위키백과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신탁통치안 발표

 ^ 1945년12월 16~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의 외무장관 회의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

1.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 원칙 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농업?교통?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임시조선민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조선임시정부 수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의(適宜)한 방책을 고출(考出)하기 위하여 남조선 합중국 관구(南朝鮮合衆國管區), 북조선 소련 관구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이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가진 정부가 최후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 제국(諸國) 정부에 그 짐작(斟酌)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조선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과 또는 조선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 후견(後見)할 방책을 작성할 것도 또한 임시조선민주주의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 하에 공동위원회가 수행할 과업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개년 기간의 4개국 후견(Trusteeship)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 제국 정부의 공동 짐작에 이바지하도록 조선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諸)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 관구의 행정?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써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12월 16~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소련.영국.미국 3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전후처리 문재를 협희한 회의이다. 이 중 조선과 관련한것은 대략 3가지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 즉각 독립을 위한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미국이 요구한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하도록 한다. 셋째 위와 같은 조선의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조선에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
위의 내용에서 보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매우 긍정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좌익을 비롯해 대다수 사람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 하였다. 그런데 왜 이것이 조선의 분단으로 이어 졌으며 당시 극렬한 좌우대립이 있었는가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으며 이는 소련이 주장한것이고 미국은 조선의 즉각 독립을 주장 하였다. 신탁통치 결정으로 인해 좌익과 우익 모두 반탁운동을 거세게 진행 하였으나 평양을 방문한 박헌영이 변절하면서 좌익은 찬탁운동을 하였고 조선사람들은 이러한 좌익의 행동에 실망 하였다.
지금은 이미 진실이 많이 알려졌고 교과서도 바뀌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위와 같은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으며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것은 위와 같은 내용을 주장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한다는것이다. 자신이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란 말인가? 역사왜곡은 우리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역사왜곡을 중단하기 위해 하나하나 낱낱히 밝혀보겠다. 물론 필자의 글은 기간 필자가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것이지만 블로그에 글쓰는것이며 또한 이 블로그에 전념하기에는 필자가 바쁜 몸이므로 참고문헌 및 자료의 출처를 쓰지 못한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자료들은 이후 블로그를 통해서도 제출할 생각이며 이후 꾸준히 출처와 참고문헌을 블로그에 옮겨놓도록 하겠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한다.

1.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나?

먼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내용은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조선의 즉각 독립을 위한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것이었다. 이는 소련의 입장이 반영된것으로 미국은 신탁통치(최고 30년)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미국측의 요구가 조금 받아들여져 최고 5년간 중.영.소.미 4개국의 신탁통치를 협의한다는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논의하기 위해 조선에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는것이다.

정리하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 된 것은 조선의 즉각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이었다. 신탁통치는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 민족이 원하지 않는다면 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신탁통치는 결정되지 않았다.

그나마 신탁통치의 내용도 길어봐야 5년이다. 신탁통치를 처음 주장한 미국의 제안은 30년이다. 따라서 미국의 요구에 비해 겨우 1/6이었던것이다.

2.좌우대립의 진실

위와 같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12월말동아일보를 통해 전해졌다. 동아일보는 미국의 AP통신을 통해 전한것이다. 동아일보는 1면에 조선, 신탁통치 결정 소련이 신탁통치 주장...미국은 즉각독립 주장... 이라는 대문짝만한 기사의 신문이 나왔다. 우리나라 신문 역사상 최대의 오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사실과 다른 오보이다. 이를 통해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든 조선사람들은 반탁운동 이란것을 하였다. 이는 반소감정이 더해져반소.반공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되면 가장 분노할 집단은 소련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즉각독립을 주장하고 미국.영국과 회의에서 이것을 관철시켰음에도 조선 사람들이 도리어 반소.반공운동을 한다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겠는가?

결국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회의 과정 전문을 공개 하였다. 그것을 본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당황하였다. 반탁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있지도 않은 신탁통치에 반대를 하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3상회의는 조선의 즉각독립을 합의했다. 따라서 상식을 갖았다면 당연히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해야 하는것이 아닌가?

특히 공개된 회의 과정을 보면 신탁통치를 요구한것은 소련이 아닌 미국이었다. 그것도 미국의 주장대로라면 신탁통치를 30년간, 특히 미국식으로 하게 되어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에 분노하고 특히 오보를 낸 동아일보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익을 비롯한 지식인 집단과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이후 모스크바 3상결정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오보로 인한 반소.반공감정을 한번에 되돌리기는 매우 어려웠다. 김구선생 등 우익들는 계속 반탁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38선 이남 점령을 통해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친일파들은 있지도 않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하였고 김두한과 서북청년단 등 깡패들을 동원해조선의 즉각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타나 폭력을 휘둘렀다.

김구선생과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이런 깡패들의 폭력을 접하고 또한 시간이 지나며 3상 결정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반탁은 점차 줄어들었고반탁운동은 시간이 지나 깡패들의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김구선생은 이때의 과오를 반성하며 이후 48년 단독선거 반대운동까지 기나긴 침묵을 갖는다.

3.좌익은찬탁을 하였나?

이러한 상황에서 좌익은 모스크바 3상결정 지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왜곡의 출발점이다. 동아일보를 비롯해 친일파및 한민당(이승만)세력 등은 모스크바 3상결정=신탁통치 라는 도식화를 하고 3상결정에 찬성하니까 찬탁이라고 우겼던것이다.

특히 몇년전 SBS에서 방송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보면 정진영역이 "우리는 신탁통치에 찬성한다~ 찬성한다~" 라고외치며 데모를 한다. 어처구니 없는 드라마가 아닐수가 없다. 또 드라마 내용에 의하면 정진영이 김두한에게 "우리는 독립정부를 구성할 능력이 없으니까 강대국이 도와주는것이다"라고 말하며 김두한을 설득한다.

필자는 이 드라마를 호쾌한 액션장면이 많아 보다가 배경이 일제에서 해방이후로 바뀌면서 위와 같은 역사왜곡이 나오며 시청을 거부하였다. 어쨋든 저 역사왜곡의 문제를 낱낱히 밝혀보겠다.

먼저 좌익은 찬탁을 하지 않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것은 찬탁이 아니다.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운동을 한것은 사실이나 단 한번도 단 한사람도 찬탁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드라마 야인시대는 엄청난 역사왜곡을 하였다.

그리고 좌익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있지도 않은 신탁통치에 반대한다고 데모를 하였던 친일파.친미파.깡패들의 행동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4.왜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려 하였는가?

이렇게 얘기를 하면 분명히 사실에 근거하여 이야기 하였음에도 너무 친소적이고 반미적인 내용이라고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독자들이 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고자 한다.

조선에 사회주의가 들어온것은 1920년대이다. 1919년의만세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반대하는 조선사람들의 거족적인 저항이었고 이것은 중국의 5.4만세운동에 영향을 줄 정도로 세계에 널리 퍼졌다. 이때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고자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왔고 이때부터 조선에도 공산당 창당운동이 있었다.

대학에서 역사학이나 정치학(필자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정치학도이다.)을 공부하면 엄밀하게 다른 이야기지만 대략 사회주의를 좌익, 자유주의를 우익이라 보면된다.좌익은 그 특성상 일본 제국주의(이하 `일제`라 한다.)에 협력할 사람들이 아니었다.따라서 좌익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였고 멀리 중국 땅에서도 중국 공산당과 함께항일 무장투쟁을 전개 하였다.

반면 우익은 다르다. 우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일제에 협력하거나 타협하였다. 우리가 말하는 친일파이다. 물론 우익 중에서도 일제에 저항하여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래서 이들을 구분하는데 전자와 같이친일파들은 그냥 우익이고,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한우익들을 `비타협 우익`이라 한다.

잠깐 중국의 예를 들어 보면 중국도 우리와 같이 일제의 침략을 받았고 공산당(현재의 중국)과 국민당(현재의 대만)이 있었다. 공산당은 화북지방에서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였고 국민당은 남쪽에 있었다. 결국 일제의 폐망후 450만의 대군을 거느린 국민당은 30만여의 공산당에게대만으로 쫒겨났다. 이것이 우리가알고 있는 중국 공산혁명이다. 일제에 저항한 공산당에 대해 중국 인민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해 준 것이다.

우리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좌익들이 일제에 저항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비타협 우익들 역시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 하였으나 우익들은 시간이 가면서 친일파가 되었을 뿐이다.조선이 해방된 1945년의 상황에서는 당연히 조선사람들은 좌익을 지지했고 당시 민족지도자라고 하는여운형 선생과 박헌영.김일성 등은 모두가 좌익이거나 좌익에 가까웠다. 우익은 김구선생이 민족지도자라고 할 수 있었고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김규식이 있었을 뿐이다.

해방이 되었을 때여러모로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해 미국은 소련에게 38선을 기준으로 분할점령 하자고 하였다. 왜냐하면 소련은 이미 한반도르 들어왔고 당시 가장 가까운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미군은38선 이남을 점령하였다. 이것이 비극적인 민족분당의 과정이다.

어쨋든 조선에 들어와서 보니 미국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미국에 우호적인 자유정권을 세우려고 하는데 선거를 하면 100% 좌익이 당선 될 상황이었다. 미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모두가 친일파들이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밥은 굶어도 친일파는 때려잡자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선거를 최대한 늦추고 싶었던것이다. 그래서 30년간신탁통치를 하면서 분위기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지금의 이라크 상황과 다른것이 이것이다. 당시 조선은 거의가 좌익이었으며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은 성립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이라크는 숫자상으로 가장 많은 종파인 시아파와 수니파와 대립관계인 쿠르드족이 미국에 우호적이면서 미국은 점령 1년도 안되어 선거를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이남의 단독선거로 치러진 5.10선거는 폭력선거와 부정선거가 엄청나게 자행되었음에도, 좌익과 비타협우익이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았음에도 무소속 당선자가 수도 없이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신탁통치를 하려고 하였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미국이 나쁘지만 문제는 신탁통치 및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미국이 한 짓들이다.미국은 신탁통치 및 조선의 즉각독립을 요구하는 조선사람들의 시위를 총칼로 무참히 짓밟았다. 아니, 미국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이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죽였고이후 한국전쟁중에는 조선의 수많은 양민을 학살 하였다. 비록 신탁통치는 아니지만 38선 이남의 지역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아직까지도 주한미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신탁통치 아닐까? 참고로 소련군은 한국전쟁 한참전에 이북에서 철수하고그 이후 (한국전쟁 중에도)우리땅에 군대가 들어온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소련의 입장을 간단히 말하자면 당시조선의 상황으로는조선이 스스로 정부를 구성할 경우 십중팔구 소련에 우호적인 정권이 세워 졌을것이다. 그래서 소련은 조선의 즉각독립을 요구 했었던것이고 이북에서도 일찍 철수 했다.

이상과 같이 소련과 미국은 서로 자국의 이익에 의해 행동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이 조선사람들을 학살한것은 사실이고 그럴 이유가 없었던 소련은 한반도에서 `나쁜짓`이란것 거의 하지 않았고 군대도 금방 철수 하였다. 따라서 이유야 어쨋건 결과가 분명하므로 미국의 잘못을 말하는것이고 미국을 반대하는것은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5.한반도는 어떻게 분단 되었나?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이 만들어 낸 것이다.

1945년 일제가 폐망한 당시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이미 조선땅에 들어와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군은 일제가 폐망하고서도 한참 지난 9월 8일 이땅에 들어왔다. 더 놀라운건 미국이 자신들의 군대가 한반도로 들어온 이유를 솔직하게 밝혔다는것이다.

다음은 그 유명한 맥아더의 포고문 1호의 내용을 발췌한것이다.

조선 인민에게 고함.

본관은 태평양 미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으로서 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및 조선 인민에 대한 군정을 펴면서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 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2조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

3조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4조 주민의 재산권을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직무에 종사한다.

5조 군정 기간에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6조 앞으로 모든 포고, 법령, 규약, 조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될 것이며, 주민이 이행해야 할 사항들을 명기하게 될 것이다.

일본 요꼬하마에서 1945년 9월 7일
대평양 방면 미육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

위 포고문은 시간이 지나 비밀이 해제된 미국 국무성의 비밀외교문서이다. 위 내용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각지에 있는 주한미군은 점령군이다. 또한 미국은 한글이 아닌 영어를 사용하도록 하였고 친일파들을 기용했다. 해방되자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던 친일파들은 이 삐라를 읽고 다시 나와 아직까지도 떵떵 거리며 살고 있다.

어쨋든 이러한 상황 뒤에 앞서 살펴본 모스크바 3상회의가 있었고 남과 북에는 서로 다른 외국군이 있었지만 그래도 조선 사람들은 분단될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초대 대통령이라고 알고 있는 이승만이 남북의 분단을 주장하여 전민족의 욕을 먹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읍발언이다.


이상 모스크바 3상회의와 그와 관련한 당시 역사를 돌아보았다

 

 

12월 30일. 송진우 암살사건

 ^ 고하 송진우

송진우(宋鎭禹, 1889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군 - 1945년 12월 30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에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1920년에는 학교설립 모금운동을 하다가 감시하던 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그뒤 동아일보사장, 고문 등을 역임하며 언론활동에 종사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며 참여를 거부하다가 9월 16일 한국민주당 창당에 가담했고 한민당 초대 수석총무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론의 입장을 펼쳤다가 한현우 등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하였다. 아호는 고하(古下)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 출신. 아명은 옥윤, 애칭 금가지.

출생과 유년기

1890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에서 송훈과 양씨의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4세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1896년 7세에는 성리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기삼연에게서 유학(儒學)을 수학하였다 그후 김직부(金直夫)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4세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하고 15세 되던 1904년 고흥 유씨와 결혼하였다. 이후 1905년 장성 백양사에 들어가 김직부에게 수학하였다. 1906년 4월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인촌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 송훈은 교육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담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분노한 그의 부친은 15세 소년이었던 송진우에게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07년 전라북도 변산 내소사 청련암에 들어가 수학하고 백관수를 만났다. 이때 일본 유학을 결의하여 하산하고 위계후를 찾아가 일어를 수학하였다. 1907년 다시 창평의 영학숙에 들어가 고광준(高光駿), 김성수(金性洙) 등을 만나, 이들과 함께 영어 등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뒤 김성수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학창시절

1908년 10월 송진우는 삭발후 김성수와 함께 일본에 유학, 1908년 10월 동경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금성중학교에 편입학 하였다. 1910년 4월 일본 와세다 대학교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그는 와세다 대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일합병이 체결되어 국권이 침탈되자 송진우는 충격을 받고 다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송진우는 바로 스승 기삼연을 찾아갔으나 기삼연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질 무렵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1908년 일본군에 의해 피살당한 후였다. 송진우는 분노하였고 아버지 송훈은 흥분하는 아들에게 실력을 키워야 된다며 실력배양론 전술의 하나인 기회론을 주장하며 아들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송진우는 다시 일본에 건너가 1911년 와세다 대학에 복학하였으나 그만두고 일본 메이지 대학교에 다시 편입학하여 수학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실력배양론, 자강운동론이라는 사상을 형성하였다 . 와세다 대학과 메이지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그는 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친목회 총무에 선출되었다. 이어 호남유학생다화회장에도 선임되었으며,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되어 발간한 잡지 '학지광'의 편집인 역할을 하였다.

1915년 7월메이지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활동

1916년 친구인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인수하는 것을 도와주고 조력하였다. 김성수는 그를 중앙학교 학감으로 초빙하였다. 1917년 단군·세종대왕·이순신을 모시는 삼성사건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미국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오랜 친구였던 김성수의 초청으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감이 되었다가 곧 제10대 중앙보통학교 교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하자 그는 학생들에게 훈시를 통해"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를 엿보자"며 학생들에게 실력 양성론을 전파했다 1918년 12월이후부터 1919년 1월 사이 송진우는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일본에 있던 송계백으로부터 일본 도쿄의 전황과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의 준비과정 중 종교계와 연락하여 기독교세력과 천도교세력의 협력을 위한 밀담을 준비하여 성사시켰다가 일경의 첩보망에 걸려 투옥당하였다.밀정의 밀고로 3월 중순 송진우 등은 중앙학교 교내에서 연행된 뒤 투옥되었고 김성수까지 체포되었으나 그는 옥중에서 만난 김성수에게 어떻게든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있다며 김성수를 설득하였다. 송진우는 총독부 일본 경찰에게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견뎌내며, 김성수와의 관련성을 적극 부인하고 자신만의 단독소행인 것처럼 진술하여 홀로 1년 7개월형을 살고 이듬해 풀려났다.1920년 8월 14일 옥중에서 모친 양씨의 사망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의 재심결과 무죄판결가 나면서 송진우는 다시 출옥하였다. 출감한 송진우는 전라남도 담양군 일대에서 학교설립 모금운동을 벌이다가 1919년 겨울 그의 동태를 수상하게 여기고 추적한 총독부 경찰에 의해 붙잡혀 담양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겨울을 보낸다. 유치장 안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추진할 때는 단독 추진보다는 항상 국제정세 흐름 속에서 치밀한 준비와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해야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1921년 2월 동아일보사 설립을 위한 주식공모하고, 창립총회를 준비, 기획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김동성 기자를 10월 2일 열리는 만국기자단의 한사람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922년 하반에는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의 귀국환영회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1921년 9월 15일부터 1924년까지 동아일보 제3대 사장이 되고, 1923년 1월이후 조만식등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김성수와 함께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이광수에게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유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천거하였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바꾸어 교육중심주의, 계몽주의, 신중론 등을 주장하였다. 1924년 4월 25일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퇴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사 고문이 되었고, 25년 사임한 홍명희를 대신하여 동아일보 주필로 있다가 1926년 3월 5일국제농민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3·1운동 기념사를 게재하였다. 이 일로 3월 7일 동아일보는 제2차 무기정간 처분을 받고, 주필이었던 그는 발행인 김철중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 징역 각 6월, 4월 실형을 언도받고, 곧 항소하였다. 11월 13일 이해 3월의 정간관계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1927년 2월 일본 신임 천황(裕仁) 즉위기념 특사로 출옥하였다 7월부터 8월 '동아' 전조선수리조합답사 특별 기획을 주관하였고, 1927년 10월부터 동아일보 6대 사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6월 송진우는 편집국장 이광수동아일보 편집고문으로 임명하고, 편집국장에 김준연을 임명했다. 그해 12월부터는 기자를 파견해 재만동포들의 사정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12월 동아일보 함북지국장의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회의 참석중, 신간회내의 공산주의계열의 조종을 받은 하수인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하였다. 이어 장진강 수전공사에 따른 조선총독부의 강제 토지수용 반대운동을 지지하였다] 1928년 4월 문맹퇴치운동에 동참하였으나, 총독부의 압력으로 중단하고 말았다. 10월 중국주석에 국민당 장개석이 취임하자, 취임식취재차 주요한난징에 특파하였다.1929년 9월 제1회 전국학생수상 경기대회를 창설하였고, 제1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도 기획, 개최하였다. 1929년 11월 김준연이 피검되면서 공석중인 편집국장에 주요한을 임명하였지만 다음달 주요한 편집국장도 광주학생사건에 관련되어 피검 복역하였다. 이무렵 일제의 감시속에 동아일보를 홀로 이끌어가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1930년 4월 제1회 동아마라톤대회를 주관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취소되고 이는 해방뒤에 다시 이어졌다.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한 특집기념호에 미국 '네이션'지 주필 축사를 개제했는데 일본은 이 게재를 구실삼아 4월 16일 다시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다.[11] 9월 2일 동아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 명의를 승계받고 이어 동아일보를 속간하였다.[11] 1931년 5월 이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을 시작하였다. 7월에는 학생 하기방학 '브나로드'운동을 시작했다. 7월, 만보산사건에 서범석 기자를 특파하였고, 9월 소위 만주사변에 기자 설의식·서범석 특파하였으며, 피난동포 구호운동을 주관하였다. 10월 동아일보에 들어온 모금으로 행주에 권율도원수 사당을 중수하였다.[11] 1932년 7월 아산 이충무공 현충사를 낙성하고, 이상범이 그린 영정을 봉안하였다.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간 전국 단군성전 순례에 현진건 기자 특파하기도 했다.[11]

1936년까지 동아일보 사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동아일보의 고문, 주필 등으로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운영하였다. 1935년 1월 6일 오후 2시 광산갑부 최창학이 신형 리무진을 산 기념으로 황해도 신천온천에 갔다. 이때 송진우도 초대받았고, 매일신보사 부사장 이상협, 중추원 참의 조병상, 대창산업주식회사 사장 겸 조선광업회 평의원 최창학등과 함께 최창학의 리무진을 타고 서대문으로 향하였다.[12] 그날 오후 3시 30분 리무진은 독립문을 지나 의주가도를 고속으로 달리다가 예성강 포구 근처에 도착했다. 포구에서 송진우와 네명의 신사는 예성강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던 중 차가 절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운전사 등 5명은 그자리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였으나 차는 세번을 구른 끝에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은 건질수 있었다.[12] 송진우는 이때 넓적다리뼈가 부러져 병원에 3주간 입원치료를 받고 요양한 뒤에 퇴원하였다.[12] 1936년 손기정 선수 사진에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조선 총독부의 압력을 받고 11월 11일 총독부의 압력으로 사장직을 사퇴하였다.[11] 1937년 6월 9일 동아일보 고문에 취임했다.[11]

1939년 12월 총독부는 시국에 부응하여 다음해 2월까지 동아일보를 자진 폐간할 것을 강요하였다.[11] 1940년 7월 송진우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일보 강제폐간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돌아오던 중, 부산에서 피검당하였다.[13] 8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지령 6천819호를 내려 동아일보를 강제폐간했다. 8월 동아일보는 청산위원회를 열고, 그를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대표 청산위원에 선임했다.[13] 1940년 동아일보가 강제폐간되자 송진우는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된 이후에도 송진우는 홍익범(洪翼範) 등 동아일보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찾아다니며 만났다.[14]

어느 날 홍익범은 송진우를 찾아와 그 동안 미국과 일본의 전쟁 전황을 외국인 선교사들 덕택에 알수 있었었는데, 그들이 감옥에 잡혀들어가거나 귀국하여 전세를 알 길이 없다며 도움을 청하였다.[14] 송진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전세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봤으면 좋겠다'고 답하였고 홍익범은 송남헌(宋南憲)을 찾아갔다. 교육자인 송남헌은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홍익범의 아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서 서로 가까이 지지내고 있었다.[14] 홍익범의 말를 들은 송남헌은 경성방송국 편성과 PD로 근무하고 있는 양제현을 떠올렸는데, 송남헌은 경성방송국의 어린이 방송프로와 가정물의 작가로 문학활동을 하고 있어 방송국에도 출입할수 있었고 아동문학 동호인인 양제현과는 교분이 두터웠다.[14]

송남헌의 제안에 양제현은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비밀리에 단파방송 내용을 알려주는 데는 동의했다.[14] 송진우는 이들에게서 단파방송을 접했고, 그결과 송남헌과 홍익범을 통해 단파방송 내용이 송진우 외에도 김병로(金炳魯), 이인(李仁), 허헌(許憲) 등에게도 전달되었다.[14] 단파방송 내용이 세상에 나돌면서 이것을 퍼트리는데 주도한 송진우는 다시 일본 경찰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다.[14] 1942년 말부터 1943년 봄,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 도청으로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 경찰은 방송내용을 접하거나 관련된 인사들을 대대적인 검거하였다.[14] 이것이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 도청사건이다.[14] 1943년 1월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를 해체하고 주식회사 동본사가 설립되면서 그는 동본사 사장에 선출되었다.[13] 1944년 가을, 송진우는 설의식을 시켜서 카이로선언의 내용을 비밀리에 알아보게 하였고, 1945년 5월경 장철수를 통하여 구미측 동향을 알아보았다.

해방 후 정치 활동

조선총독부1945년 8월 11일 경기도지사 이쿠다를 통하여 조선의 자본가, 지주, 명사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송진우를 접촉하여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여운형이 찾아와 고하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중경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연합군의 승인을 이유로 대면서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송진우와 가까운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것 역시 무산되었다. 1945년 9월 16일에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만들었고, 송진우는 초대 수석 총무를 맡았다. 한국민주당은 뒤에 민주 야당의 모태가 되었다. 1945년 10월 20일에는 환국지사영업위원회의 조직을 주도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는 11월 중순 이승만을 찾아, 국민총동원의 방법을 협의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자 11월 24일 김준연과 함께 임정요인을 예방하였고, 11월 하순 애국지사후원회를 결성했다. 1945년 12월 중순, 임정 요인들을 서울 관수동의 국일관으로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사망 직전인 1945년 12월 1일에 동아일보 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신탁통치 찬반 토론과 암살

12월 29일 송진우는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의 호출을 받았다. 하지는 자문위원인 송진우를 불러 임시정부에 대한 설득을 당부하였다. 12월 29일 밤 각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김구의 숙소인 경성부 서대문구 경교장에 모였다 송진우도 경교장을 방문, 12월 29일 밤부터 12월 30일 새벽 김구를 만났다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격렬한 논쟁이 있은 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권을 행사하여(접수하고)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들이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는 한편 모두 출시해 반탁운동을 벌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때 송진우는 냉정을 촉구하는 주장을 하였다. 강원용에 의하면 송진우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는 5년 이하이며 우리 힘으로 움직일수 없는 일이며 신탁기간은 5년이 될 수도 있고 3년이 될 수도 있는 문제이니 여유를 갖고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고 촉구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자택에서 한현우 등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범인은 한현우, 유근배 등 6명이었고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범행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된 듯하다. 1946년 1월 5일 서울 외부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정부 수립 후 1966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43-2번지 지향산 기슭에 이장하고 1967년 10월 20일 위당 정인보의 한문비석을 한글로 번역한 국문비석을 추가하여 건립 제막했다. 그뒤 1988년 5월 3일.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암살의 배후와 원인

송진우의 암살범은 경찰관 한현우 등 6명이었고 그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하였다. 범행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범인 중 한 사람인 한현우는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동기였으며, 배후는 없었으며 김구이승만이 자신들을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한현우 등이 재판시 진술에서 '송진우는 미국의 후견을 지지했다'는 주장은 12월 29일 밤 경교장 회의에서 송진우의 발언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강준만은 송진우의 발언은 존 하지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존 하지의 회고에 의하면 송진우는 12월 29일 존 하지의 호출을 받고 미군정청을 방문했다. 하지는 군정청 한국인 자문위원중의 한사람인 송진우를 불러 신탁통치에 대해 찬성하도록 송진우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설득을 당부했고, 존 하지는 송진우가 떠난 다음에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준비가 되었다고 주장했으나 다음날 아침에 죽고 말았다고 증언하였다

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은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등의 배후로 임시정부를 지목했다

12월 30일 반탁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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