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복 60년사

1947년/ 서윤복, 보스턴 마라톤 재패. 여운형, 장덕수 암살

by 싯딤 2009. 9. 3.

2월11일/ 공민증제 실시

3월 1일/ 남대문 좌우익 충돌

시가행진 중인 우익 세력

1947년 3월 1일 15시 40분, 3.1절 28주년 기념식을 각기 따로 치른 좌-우익이 시가행진 중 남대문-서울역 간 도로상에서 충돌을 일으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좌익단체들은 남산공원에서 '삼일절 기념 시민대회'를치른 뒤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 쪽으로 시가행진을 하고 있었다. 반면, 우익단체들은 서울운동장에서 '기미 독립선언 전국대회'를 마친 뒤 종로를 출발, 광화문과 서대문, 서울역을 거쳐 남대문으로 행진하던 중이었다.

15시 30분, 마침내 양측의 행진은 남대문-서울역간 도로상에서 마주쳤다. 양측은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투석전까지 벌이며 격렬히 대치하다가 17시30분이 되어서야자진 해산했다.

양 진영은 서울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충돌을 일으켜이날 하루에만 16명의 사망자와 2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월22일/ 남한 전역서 총파업

4월19일/ 서윤복, 보스턴 마라톤 재패

1947년 4월 19일 오전 11시, 제51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8개국 156명의 선수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선에는 가슴에 'KOREA'와 태극기를 단 서윤복(徐潤福,1923~ )과 남승룡(南昇龍,1912~2001)이 있었고, 조금 옆에는 경기 시작 전, 출전을 포기한 손기정(禎,1912~2002)이 있었다.이 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무국적 선수단이었다.우여곡절 끝에 미군의 프로펠러 군용기를 얻어 타고서울을 출발한 이들은,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 일주일여 만에도착했던 탓에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하지만, 이들은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65cm의 키에, 55kg의 왜소한 체격이었던스물 네 살의 서윤복은기권하지는 않겠노라고 입술을 깨물었다.마침내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졌습니다.중간 지점부터 선두를 달리던 서윤복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30km지점이었다. 한 관중이 서윤복을 격려하려고 박수를 친다는 것이, 그만 끌고나온 개의 끈을 놓친 것이었다.갑자기 도로 안으로 뛰어든 개 때문에, 서윤복은넘어지고 말았고, 그 사이, 7∼8명의 선수들이 서윤복의 곁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서윤복은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운동화가 말썽이었다. 끈이 풀린 것이었다.하지만, 서윤복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힘을 다해,달렸다.

마침내 선두를탈환한 서윤복의 눈에,멀리 결승점인 보스턴 시청이들어왔다. 2시간 25분 39초, 세계 최고기록...

광복 후, 처음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국제 마라톤대회에서우승까지 차지한서윤복은,손기정과 함께,서로를 부둥켜 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그의 쾌거에 감격한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 발로 천하를 제패하다)"라는 휘호를 선물했고,이승만 박사는 울면서 진심어린 축하를 해주었다.

3년 뒤인 1950년에는,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 세 선수가 제54회 보스턴 마라톤에서1, 2, 3위를 모두 석권,한국의 위상을또 한번 드높히기도 했다.*

"한국의 완전독립을 염원하는 동포들에게 승리를 선물로 바친다. 나의 우승은 1910년 이래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고, 4천 년의 역사에 빛나는 한국의 완전독립을 염원하는 삼천만 민족에게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서윤복 선수는 우승 소감에서 이렇게 밝혔다.

14세 때 육상을 시작한 그는 1946년 제1회 전조선마라톤대회, 제1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 10월 전국체육대회를 모두 제패하며 손기정`남승룡과 함께 보스턴대회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그에겐 차비 마련도 힘들었다. 각계 각층의 도움을 얻어 겨우 미 군용기를 얻어 타고 보스턴에 갈 수 있었다. 대회 우승도 잠깐, 돌아올 차비가 없어 미국에 도착한 지 43일이 지나서야 동남아`일본을 거쳐 인천으로 가는 화물선을 얻어타고 출항 18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항구는 그를 환영하는 인파들 손에 들린 태극기로 물결쳤다. 서울 시민들이 가가호호 30원씩 걷어 마련된 환영식이 며칠 뒤 비원에서 열렸다. 이승만 박사도 기쁨을 함께했고, 김구 선생은 그에게 ‘足覇天下(족패천하: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라는 휘호를 써주며 크게 기뻐했다.

손기정`남승룡부터 훗날 황영조`이봉주까지, 배달민족의 마라톤 실력은 어느날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조문호기자 매일신문, 2005.04.19.*

 

7월19일/ 여운형 암살사건

몽양 여운형(1886~1847)

한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 초당의숙()을 세우고, 신한청년당()을 발기하였다.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이어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47년 초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여운형은 남부지방을 순회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는 지방여행의 결과 구 인민당원의 절반 정도는 남로당에 들어갔지만 아직 10만여 지지자가 있다고 보고 이를 기반으로 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결성하였다. 여운형이 위원장, 백남운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근로인민당은 2개월 뒤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곧 몰락하고 말았다.

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서울 성북동 김호의 집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재미 조선사정협의회 회장 김용중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자택으로 돌아가던 중에 저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여운형은 해방 3일 후인 45년 8월 18일부터 테러를 당하기 시작하여 그간 10번의 테러를 당했는데, 11번째 테러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여운형의 암살범은 극우 청년 한지근이었다. 한지근은 김두한이 고문으로 있던 백의사의 멤버였다. 김두한은 46년 7월 16일에 일어났던 여운형 피습사건과 47년 3월 17일 여운형 자택 폭파사건도 모두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고 밝히면서, 여운형의 암살도 자신이 몸담고 있던 백의사(白衣社)가 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백의사는 결사대를 뽑았다. 당시 18세의 한지근 군이 선발되었다. 한군이 1947년 7월 19일 하오 1시경 혜화동에서 커브를 도는 여운형 씨의 세단에 올라타고 여씨를 사살하기 전날 밤 나는 한군에게 권총을 수교(手交)하교 악수를 했다. 일본 장교용 권총 한 자루를 내어 주고 넘버를 내 수첩에 적어 놓았다. 얼마 후 나는 또 장택상 수도청장에게 불려갔다. 그분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저 혼만 내주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시끄럽지 않은가?’ 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한홍구는 김두한에겐 테러리스트로서의 영웅담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김두한은 47년 7월엔 살인사건으로 감옥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 위와 같은 주장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2001년 9월에 발굴돼 공개된 미군 정보장교인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는 여운형의 암살범들이 백의사 단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김두한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망정 백의사의 관련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여운형의 암살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서중석에 따르면,

“1947년 6월 28일 하지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는데, 그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 1947년 7월 19일쯤의 시점에서 미국으로 볼 때 김규식과는 달리 여운형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시기 미국은 냉전의 길목으로 깊숙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국 문제는 더 이상 소련과 협의하여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민전 의장 김원봉은 여운형의 죽음에 대한 분노에 찬 애도문을 명일보,노력인민 등 좌익지 47년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 민전은 7월 27일 ‘공위 경축 임정수립 촉진 인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였는데, 서울 남산공원엔 60만 인파가 운집하였다. 민전은 또 여운형 암살에 대한 대중의 공분을 촉발시키고자 8월 3일 서울에서 수십만이 운집한 가운데 여운형의 인민장을 치렀다.1) 1) ‘몽양 선생 추모사업회'는 2002년 4월 국가보훈처에 몽양 여운형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으나, 심사 자체가 보류되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인정해 지난 95년 이동휘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적이 있지만, 광복 이후까지 사회주의 색채를 유지한 경우는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심은정,〈‘독립운동가 여운형' 왜 안 됩니까〉,문화일보, 2003년 8월 13일, 31면.

그러나 좌우합작위의 좌측 수석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활동 정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자, 좌우합작위는 활동을 시작한 지 1년 5개월 만인 47년 12월 6일 공식 해체되었다.

여운형과 김구

오늘날 김구는 여운형에 비해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많다.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 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만 했다”고 비판하면서 ‘하나의 민주공화국’ 건설을 위해선 여운형의 노선이 옳았다는 평가를 내린다.

“그는 자기와 이념이 다르더라도 ‘하나의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협력과 연대를 아끼지 않았다. 여운형은 미국, 소련과의 합의가 ‘하나의 민주공화국’의 필수조건이요, 좌익과 우익의 협력이 그 충분조건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친일파를 제외한 어떤 세력과도 협력했다. 우익과 좌익을 모두 인정하고 미군정과 손을 잡고 좌우합작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위성국가의 길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는 두 차례나 김일성을 찾아가서 토지개혁을 만류하기도 했다. 북한만의 토지개혁이 분단의 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46년 2월 9일 북한을 방문한 이래 4월 17일, 7월 31일, 9월 23일, 12월 말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매번 김일성을 만났다. 바로 이 점이 훗날 남한에서 여운형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들고 여운형에 대한 언급을 조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야말로 여운형의 장점이요, 강점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김구(1876∼1949)

여운형은 1886년생,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여운형이 26년 연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엔 더욱 장유유서(長幼有序) 의식이 강하던 때였고 그런 의식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일성과 김구ㆍ이승만은 36∼37년의 나이 차이가 났는데, 바로 이런 나이 차이가 세대간 의식 차이와 더불어 남북협상을 어렵게 만든 점도 전혀 없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건 방북,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면서 38선을 넘나드는 것에 대해 여운형의 측근들이 그런 장유유서의 질서를 언급하면서 반대할 때에 여운형은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라는 말로 반대를 일축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 정병준은 해방정국에서 “북한 방문을 통해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연대 형성에 노력한 것은 여운형뿐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 9개월 후에 김구와 김규식이 방북해 남북연석회의를 열게 되지만, 그건 “이미 한반도에서 국토분단과 분단정권 수립이 목전에 도달한 시기에 시도된 마지막 민족통일 시도”였던 반면, “여운형이 방북한 1946년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에 정치적 관심이 집중된 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한 정치인들이 정권 장악을 위한 주도권 쟁탈에 여념이 없었던 시점에서 여운형이 민족통일을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남한 내부의 좌우합작과 아울러 북한과의 남북연대를 내세우며 이를 실천하려 했던 건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중간파ㆍ좌익 인사들의 ‘테러 공포증’

테러는 중간파 및 좌익 지도자들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효과를 낳았다. 앞서 보았듯이, 김규식은 자신이 머무르는 삼청장 안에서도 침실을 자주 옮겨다니기까지 했으며, 측근들은 만일의 테러사태를 염려해 강원도 홍천에 있는 선친의 묘소로 참배를 가는 것도 만류할 정도였다. 좌익 지도자들의 경우엔 더욱 심각했다. 염인호는 약산 김원봉의 ‘테러 공포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45년 12월 말의 송진우 암살사건 이후부터 약산은 테러를 몹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4당 꼬뮈니께에서 테러 방지 조항을 특별히 넣었던 것은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래서 약산은 항상 잠행하였다.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약산은 필동의 자택 외에 동대문 밖에 모처 등 대여섯 군데의 거처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 곳에 두 시간 이상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특히 자기 측근과 같이 있다가도 아무 소리 없이 화장실 가는 듯하면서 사라지곤 하였다. 이 같은 잠행은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단련되었던 약산이었으므로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었다. 민혁당의 청년 조직은 잠행하는 약산의 손발이 되었다. 그래서 약산은 송진우ㆍ여운형ㆍ장덕수 등 정치지도자들이 살해된 해방정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운형 암살사건이 일어난 47년 여름은 해방정국을 내내 강타했던 테러가 유난히 기승을 부린 시절이었다. 7월 한 달 동안 모두 128건의 테러가 발생하여 36명이 사망하고 385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에는 68건의 테러로 17명이 죽고 15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68건 중 37건은 우익에서 저질렀고 16건은 좌익에서, 나머지 15건은 불명이었다. 우익의 37건 중 36건이 좌익에 대한 정치적 테러였다.2) 2) 9월엔 50건이었는데, 우익이 28건 좌익이 12건 불명이 10건이었으며, 10월에는 45건이었는데 우익이 32건이었다. 11월에는 40건, 12월에는 63건의 테러가 발생했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1991), 561∼562쪽.

좌익 청년단체보다는 우익 청년단체의 폭력과 테러가 더 심했는데, 이는 우익단체가 경찰의 비호를 받는 동시에 좌익단체와는 달리 중앙과 지방의 명령계통이 확립되지 않은 탓이었다.

우익 청년단체들은 지방을 원정 다니면서까지 테러를 저지르곤 하였는데, 가장 왕성한 테러 활동을 벌인 게 바로 서북청년회였다. 47년 4월엔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이던 지청천이 귀국해 청년단체의 대동단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동청년단을 결성함으로써 우익 청년단체들 사이에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졌다.

서북청년회의 경우엔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문봉제는 훗날 서청 행동의 배후는 경찰이었지만 정신적 배후는 이승만이었다고 회고했다. 대동청년단은 김구의 지지자들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는 단체들은 대동청년단을 견제하기 위해 48년 2월 5일 구국 3) 나중에 대동청년단이 5ㆍ10 총선거와 단정수립에 적극 참여하자, 이에 반대하는 대동청년단의 일부는 48년 7월 31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산하에 자주통일청년단을 결성하였다. 류상영, 〈8ㆍ15 이후 좌ㆍ우익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최장집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4』(한길사, 1989), 74∼75쪽.

청년총연맹을 결성하였다.

우익 정치지도자들의 테러 후원

테러는 우익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필요악(必要惡)으로 인정받거나 적극적인 후원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조병옥은 47년 7월 7일 우익 테러사건이 민족적 애국단체의 공동방위적 입장에서 출발한 행동이라고 공공연히 담화까지 발표했다. 군정장관 러치가 몇 번 서북청년회의 해체를 지시했지만, 조병옥과 미군정의 한인 부처장들은 그들에게 다소 불법성이 있다고 해서 서청과 같은 열렬한 반공우익단체를 해체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실행되지 않았다. 서청을 해체할 경우 경찰만으로 치안을 유지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승만(1875∼1965)

이승만도 맞장구를 쳤다. 이승만은 47년 8월 미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이 말해 주듯이, 우익 청년단체는 이승만이 행사하는 권력의 주요 기반이었다. 이와 관련, 강원용은 이렇게 말한다.

“국회를 3분의 2 장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같은 얘기는 당시의 이승만의 권력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깁니다. …… 당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사할 수 있었던 힘의 조직을 군정의 경찰을 통해 가지고 있었고 또 미군정이 밀었어요. …… 그 당시 경찰력 또는 깡패를 동원시키는 등의 힘이 어느 쪽에 있었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다른 정치인들도 그 점에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미군정 보고서는 “청년단체는 정치지도자들이 탐내는 목표물이 되는데 이는 이 조직으로부터 정치권력의 상당한 원천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는 47년 8월 27일 트루먼의 특사로 방한(訪韓)한 미 장성 앨버트 웨더마이어에게 행한 구두 보고에서 “미국 점령정책의 성공으로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극우파지만, 그들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확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47년 9월에 나온 하지의 정세 보고는 한국의 우익 정치지도자들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는 한국은 “4000년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민주적인 제도보다는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부패한 정부를 가졌을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우익 정치지도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단히 개인주의적이어서 상대하기가 어려우며 그들끼리 협조적이지 못하다. 만일 한국인 10명을 한 방에 모아 놓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면 한 시간 안에 4, 5개 파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들끼리도 합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우테러의 최고 비호자는 미군정’

웨더마이어는 47년 9월 19일 트루먼에게 보낸 장문의 보고서에서, 미국 정책 수행에서 가장 큰 장해 요인은 이승만과 김구의 극우세력으로서, 그들은 산하에 테러리스트적 수법을 행사하는 청년조직을 두어 중도세력과 비공산주의적 좌익계의 활동을 가로막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서중석이 잘 지적했듯이, “물론 그는 극우테러의 최고 비호자는 이승만과 김구, 조병옥과 장택상의 테러 비호를 계속 두둔하는 미군정의 최고 수뇌라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서중석은 테러에 대해 미군정과 극우세력에게 주된 책임을 물으면서도 좌익에게도 책임이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은 계급노선과 친소 국제노선을 과대히 강조하고,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옹호하여, 민족을 위한 세력으로나 자주적인 세력으로 부각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우편향, 좌편향의 오류를 거듭하면서 독선주의와 모략ㆍ선동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달성코자 하여,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세력은 우군조차도 중상모략하고 매도하였으며, 우익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친일파’ ‘파쇼세력’ ‘반민주주의 세력’으로 몰아쳤다.

이러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설득력 약한 무차별적인 공격의 남발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테러에 대한 보호막을 약화시키고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극우는 물론이고, 극좌도 이성과 윤리성ㆍ공정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적잖이 들었다. 극우 반공세력이 특히 그러하였지만, 정치에 의한 해결 방안 대신, 그리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존중 없이, 일차원적 힘의 논리나 모략적인 선동에 의해서 목적하는 바를 해결하려고 할 경우, 테러의 온상이 제공되고 무수한 좌우충돌, 동족상잔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운형 암살로 극에 이른 해방정국의 ‘테러 정치’의 정신적 근거라 할 절대적 불관용은 대중의 일상적 삶에까지 파고들었다. 여운형 암살과 ‘테러 정치’*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박헌영(왼쪽)과 여운형.

박헌영(왼쪽)과 여운형.

[신동아.2007.9]





올해는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1886~1947)이 암살된 지 꼭 60년이 되는 해다. 몽양은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게 지금까지 정설로 굳어져왔다. 그런데 지난 7월19일 열린 몽양 추모 심포지엄에서 “몽양을 박헌영 계열에서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헌영은 당시 남로당의 총수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李庭植·76) 명예교수는 ‘여운형의 이상과 선택: 냉전의 희생양’이란 논문에서 박헌영과의 관계, 좌우합작에 대한 집념 등을 중심으로 몽양의 인생행로를 재구성하면서 좌익에 의한 암살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의 주장이 입증된다면 우리 현대사는 상당부분 다시 씌어져야 한다.

몽양은 해방전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일찍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그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로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는가 하면,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또한 국제 공산당과 연대하는 등 좌우를 넘나들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직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일제가 물러난 뒤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그는 해방 정국에서 대중적 지지도가 가장 높은 민족지도자였다. 하지만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던 그의 노선은 좌우 양측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곤봉, 권총, 수류탄, 사제폭탄 등에 의해 12차례나 테러를 당하는 위협 속에서도 일관되게 좌우합작노선을 견지하던 그는 결국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7월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했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아직까지 여운형 암살의 배후가 누구라고 확정할 만한 단서는 발견된 것이 없다.

몽양의 죽음은 한반도에 좌우대립을 심화시켰고,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몽양은 남과 북 양쪽에서 모두 불편한 기억이었다. 2005년에야 대한민국은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다음은 이정식 교수가 발표한 논문 ‘여운형의 이상과 선택 : 냉전의 희생양’ 전문이다. ‘편집자’

저는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위논문으로 학문에 입문했고 공산주의운동사도 연구해왔습니다만, 이번에 몽양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발견하고 배웠습니다. 특히 최근 발굴된 소련군정 문헌들은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준 반면에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소련 문헌을 발굴해서 번역하신 전현수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886년부터 1947년까지의 기간, 즉 몽양 여운형께서 살아계시던 시기에 대한 자료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몽양은 독립운동의 거의 모든 장면에 나타나서 활약을 했거나 배경에서 노력을 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8년 말에 그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한국 사람들이 독립을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린 일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규식을 파송한 후 장덕수, 김순애(김규식 부인) 등을 도쿄와 고국에 파송해서 3·1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놓았고,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일본 수도에 나타나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해 많은 사람을 감복시켰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에 출석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들과의 연대를 굳게 하였으며, 그 후에는 국제공산당과 더불어 중국의 쑨중산(孫中山) 등과 손잡고 반제(反帝)운동, 중국혁명에 공헌했습니다.

반제운동, 중국혁명이 한국독립운동과 관계가 없던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몽양은 이 모든 투쟁이 한국의 자유와 독립으로 향하는 지름길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는 한국의 독립을 넘어 동양 전체의 평화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가 말한 평화의 개념은 왜 그가 그처럼 폭넓은 투쟁에 열중했던가 하는 질문을 풀어줍니다. 다음은 그가 1919년 11월 도쿄에서 말한 것입니다.

“평화의 진수(眞髓)는 융화로서 모든 투쟁, 시기, 분노, 원한 등 부정적인 것을 씻어버리고, 새가 짹짹거리고 꽃이 피고, 낮이 포근하여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상을 말함이지 결코 사해(死海)와 같이 다만 고요하고 평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의 희락과 희망과 자유와 평등과 존귀가 다 있는 가운데에 평화가 있는 것이지 두려움과 걱정과 절망과 압박과 차별이 있는 곳에 어찌 평화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에서 동양의 평화를 논해봅시다.”

서양의 학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긍정적 평화론’이니 ‘적극적 평화론’을 논하기 시작했지만 몽양은 이미 1919년에 그런 말을 했고 자기의 행동지침으로 삼았습니다.

간사할 邪, 속일 詐, 죽을 死
그는 국제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뿐 아니라 조선공산당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해방 후에는 평양에 왕래하면서 소련군정의 수뇌부는 물론 후에 북한의 수장이 된 김일성과도 자주 만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를 공산주의자였다고 단정하기도 했습니다. 또 기회주의자였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왜 그는 여러 가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될 행동을 취했던가. 그가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왜 그는 일직선을 걷지 않고 복잡한 길을 택했던가. 과연 여운형의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등의 질문은 학자들에게 주어진 중요하고 재미있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운형이라는 개인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현대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그가 독립운동뿐 아니라 해방 후의 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요구할 사항이 있습니다. 여운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분론적인 측도(測度)나 틀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운형이 ‘기회주의자였다’ 또는 ‘사상이 모호했다’는 평가를 하게 된 것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의 사상적인 틀을 그에게 맞춰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맞지 않은 틀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운형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의 용어에 끼워 맞출 수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었지 그가 모호하거나 야릇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운형의 가족. 차녀 여연구(두 번째줄 맨 오른쪽)는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여운형의 가족. 차녀 여연구(두 번째줄 맨 오른쪽)는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여운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판단해온 한국의 정치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척사위정(斥邪衛正)이라고 하면 모두 조선왕조 말기의 대원군과 그 주변의 선비들을 연상할 것이지만 저는 척사위정이라는 단어는 한국의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한국의 문화는 독선적이고 교조적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좌도 그렇고 우도 그렇습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주의는 조선민족의 핏속에 짙게 흐르고 있습니다. 한국에 아직도 대화문화가 깃들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미 진리와 진실을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사(邪, 간사할 사) 아니면 사(詐, 속일 사)일 터이니 사(死, 죽을 사)로 대해야 한다는 송시열적인 문화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여운형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대화를 좋아하고 남에게서 배우는 것을 즐기는 열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비(非)한국적인 한국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어폐가 있겠지만 그는 일찍부터 세계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여운형을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습니다. 마르크스가 계급이 없는 사회, 압박이 없는 사회, 평등과 자유의 사회를 이상적인 것으로 내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학교도였던 조부의 슬하에서 자라난 여운형은 어린 시절부터, 즉 마르크스주의를 알기 전부터 그런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레닌주의나 스탈린주의가 가미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지만 폭력을 통한 혁명을 배척했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척했습니다. 기독교 배경이 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삼던 그가 공산당의 독재를 선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박헌영이 1946년에 했다고 하는 말을 주의 깊게 새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헌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

그렇다면 왜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지적을 받았을 정도로 공산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냈던가. 왜 그는 남다르게 일찍부터 평양 나들이를 자주했고 소련군정의 수뇌부와 만나곤 했던가.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룬 두 가지 요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반(反)제국주의사상이고 둘째는 독립에 대한 집념입니다. 물론 조국이 분단된 후에는 독립에 대한 집념은 통일독립으로 변했습니다.

여운형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몇 가지의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세부적인 것은 이제 곧 출판될 저의 책에서 기술해놓았습니다. 여기서는 그분의 반제국주의사상에 대해서, 그리고 좌우합작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反제국주의와 독립에 대한 집념
그가 반제국주의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1915년이었습니다. 중국에 유학하던 시절에 중국의 학생층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중국을 한국 다음가는 두 번째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21개 조항의 요구가 있었는데 경찰권, 사법권, 경제권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중국 청년들이 분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5년간 전도사로 시무했고 평양신학교에 다니다가 신학을 공부하겠노라고 하면서 유학길에 나섰던 여운형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분노의 분위기였습니다. 중국 학생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의용군을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에 몽양도 이에 참가하고자 했던 일이 있습니다.

몽양은 그 후에 김규식을 파송하는 일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선두에 서게 됐는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그의 신념은 국제공산당이 파견한 보이틴스키를 만남으로 더욱 공고화합니다. 국제공산당이 약소민족들의 독립투쟁을 도울 것이라고 했는데 실질적인 원조를 주었습니다.

국제공산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200만루블을 원조하기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이동휘, 김립 등은 그중의 60만루블만을 받아가지고 와서 자의로 쓰는 바람에 140만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돼버립니다만 국제공산당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조선민족을 도우려고 한 것은 틀림이 없는 일입니다. 몽양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이런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순전히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다고 진술했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후 그는 고비사막에서 야영을 하면서 모스크바에 이르러 레닌을 만나게 되지만, “한국에서는 공산주의혁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에 주력해야 한다”는 레닌의 말에 공감하고 볼셰비키들과의 연대를 굳혀 나갔습니다. 그는 그 후에 중국에서 스탈린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던 보로딘과 합류해 중국 반제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게 됐는데 이것은 볼셰비키당이 말로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중국에서의 반제운동을 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볼셰비키 정권, 즉 소련 정부가 쑨중산 휘하의 중국국민당에 베푼 원조는 여운형이 소련과 더욱 가깝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여운형은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상하이에서 소련이 새로 시작한 타스통신사에서 일을 했고 중국국민당의 영수(領袖) 쑨중산의 고문이었던 보로딘의 조역(助役) 아니면 고문의 역할을 했는데 소련은 중국국민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불가결의 역할을 했습니다.

장제스(蔣介石) 교장 휘하의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고 키운 것도 소련공산당이고, 중국혁명군이 북벌(北伐) 통일과정에 나선 것도 소련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지원했고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추진했습니다. 현장에서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그가 소련공산당을 동경하고 감사히 여긴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1926년에 광둥(廣東)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2차대회는 몽양의 사상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 선언서를 채택했는데, 그 대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이벤트였습니다. 대회에서 채택한 선언문은 그 전해에 사망한 쑨중산의 유언을 인용하면서 제국주의 타도가 국민혁명의 제일 과제라고 했고 그 방법으로는 민중을 환기시키고, 세계무대에서 중국을 평등하게 대해주는 민족들과 연합하여 공동투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소련과 성심으로 합작해야 하며 모든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피압박민족과 밀접하게 연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압박민족과의 연대를 증명하기 위해서 대회는 세 명의 외국 동지로 하여금 연설을 하게 했는데 그중 하나가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이었고 그 다음은 여운형이었습니다. 같은 대회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은 농민운동에 대해 연설했는데 여운형과는 구면의 동지였습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처럼 몽양의 안목으로 볼 때 소련공산당은 적수가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중요한 파트너였고 원조자였습니다. 몽양은 때가 오면 중국혁명을 위해 도와준 것처럼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소련공산당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몽양이 공산당원들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상하이에서 체포되기 바로 전에 그가 취한 행동을 보면 그의 관심은 여전히 한국의 독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가운데) 출소 직후인 1935년 조만식(오른쪽)과 함께한 몽양.

도산 안창호(가운데) 출소 직후인 1935년 조만식(오른쪽)과 함께한 몽양.

그는 당시 침체된 한국독립운동을 소생시키기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민대회를 소집할 것을 보로딘과 협의한 바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1929년에도 한국임시정부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보로딘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에 임정의 조소앙 외무부장은 한커우(漢口)에 있던 국민정부에 5만원을 얻기 위한 수속을 취했는데 장제스가 일으킨 공산당 숙청은 모든 것을 무산시키고 말았습니다. 이 일만 봐도 그가 소련을 한국의 맹우(盟友)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자기는 언제나 소련을 맹우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던 그 말에는 거짓이 없었습니다.



몽양 여운형과 공산당의 관계는 이런 맥락에서 분석돼야 합니다. 그의 안목으로 볼 때 소련공산당이나 국제공산당은 물론이고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과 함께 중국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혁명세력의 일부였고 조선공산당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한국에서도 좌익과 우익이 합심해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신간회(新幹會)가 계속 발전할 것을 바라고 있었는데 좌익세력이 신간회를 장악하고 좌와 우가 갈라져 나가는 것을 보고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3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했을 때에는 이미 신간회가 해소되어 있었고 총독부는 한국인들이 정치단체를 형성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지만 만일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신간회 같은 조직에서 공헌을 했을 것이었습니다.

해방이 된 날부터 몽양의 활약에 대해서는 길게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여 정계의 주역으로 등장했는데, 그가 공산당의 중진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해온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해방된 날 엔도(遠藤) 정무총감으로부터 소련군이 며칠 후에 서울에 진주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 다음날인 8월16일에는 소련군이 서울역에 곧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많은 시민이 그곳으로 몰려갔고, 광주, 목포, 부산에서도 그랬습니다. 이 소동은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이라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몽양이 조선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이러한 상황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게 되고 소련공산당을 등지게 됩니다. 박헌영이 주관했던 조선공산당은 여운형을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했고 배반자라고 규탄하기도 했는데, 과연 그는 그런 공격을 받아야 했던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런 의문은 왜 그가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게 됐는지, 그리고 왜 소련공산당을 등지게 됐는지를 알면 풀릴 것입니다.

박헌영과 여운형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여운형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에는 심복인 이임수로 하여금 콤그룹의 김한성에게 현금 1만원을 주도록 함으로써 이씨가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혁명동지로서 아주 친숙한 사이였습니다.

‘정치적 강간’
그런데도 그가 1946년 8월 미군정에 박헌영을 제거해달라는 부탁까지 한 것은 평양에 다녀온 박헌영이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운형에 따르면 좌우합작을 박헌영의 ‘제의’에 의해 시작했는데 박헌영이 번의(?意)해 자기의 체면이 엉망이 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1946년 9월25일에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한 말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처럼 암초에 올랐는데 여운형은 그 후에 박헌영을 더욱 증오하게 됐습니다. 9월26일의 둘째 날 면담에서 몽양이 김일성, 김두봉 앞에서 털어놓은 말을 보면 왜 그가 박헌영과 결별하게 됐는지를 알게 됩니다. 다행히도 소련군정은 그날 대화의 속기록을 보존해 놓고 있었는데 몽양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는 박헌영이 북조선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18일 동안 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합당 준비를 했다. 나와 만난 후 박헌영은 공산당 내부에서 합당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고, 인민당을 준비시키는 것은 나의 책임이었다. 내가 아파서 이틀 동안 시골에 가 있을 때, 박헌영은 나의 명의로 인민당에 지령을 내렸고 내가 서울에 도착한 후 나에게 이 지령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이 지령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당수인 나에게 내용도 알리지 않은 채 지령을 하달했기 때문이다.

나는 박헌영에게 심한 모욕을 느꼈다. 백남운은 내게 야유조로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정치적으로 강간(强姦)했다고 말했다. 나는 박헌영에게 화가 나서 옆으로 물러섰다. 나 없이는 합당이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박헌영은 로동당의 세 지도자로 나, 박헌영 그리고 이주하를 추천했다. 나는 로동당이 이 세 지도자 밑에 있는 한 내가 공산주의자들 손안에서 농락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나는 인민당 당수직에서 사퇴했다.”

위에서 언급된 백남운은 남조선 신민당의 당수였는데 신민당 중앙위원들은 예외없이 ‘합당’을 반대했습니다. 여운형이 “심한 모욕을 느꼈다”고 했고 정치적인 ‘강간’이라고 표현된 지령은 7월 말에 박헌영이 김오성에게 내린, 인민당을 남로당으로 흡수하라는 지령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김오성은 인민당 선전부장이자 공산당원이었습니다.

김오성이 1946년 8월20일에 소련군사령부에 보낸 ‘인민당의 합당 활동에 대한 보고서’에는 합당 과정이 낱낱이 기록돼 있는데 그 문서는 다음으로 시작했습니다.

“7월 말 김(박헌영)으로부터 공산당, 인민당(人民黨), 신민당(新民黨) 세 정당을 하나로 통합시켜야 하며, 인민당이 통합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우리 김세용과 김오성은 인민당 내의 열성분자들에게 이 사실을 신속히 전달하였다.”
여기에서 ‘열성분자’란 물론 인민당내에 잠복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을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
박헌영에 대해 극도로 분노했지만 소련군정에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김일성과 대화가 있은 후였습니다.

1946년 9월25일. 평양에 도착한 여운형은 김일성더러 소련군정의 스티코 상장이나 로마넨코 소장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로마넨코 소장은 북조선 주둔 소련군 민정담당 부사령관으로서 연해주군관구(軍管區) 군사평의회위원인 스티코프 상장 다음가는 장성이었습니다.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쳐서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묻고 다음 날 김일성, 김두봉, 로마넨코를 따로 불러서 지시를 내렸습니다. 스탈린이 여운형과의 만남을 승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6일에 김일성이 한 말은 스티코프가 한 말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몽양은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박헌영의 탓인 줄 알고 그에 대한 증오감을 토로했는데, 김일성은 박헌영의 횡포가 소련군정의 명령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줌으로써 몽양을 놀라게 했습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는데 여운형의 분노를 무시해버리는 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북조선에서의 합당 결과로 로동당이 가장 강력하고 권위 있는 정당이 됐으며, 지금 30만의 당원을 포괄하게 됐고, 북조선의 근로대중은 로동당의 창립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접적인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여운형의 행동에 대해 심각한 비난을 가했습니다.

1929년 일경에 의해 상하이에서 검거돼 용산역에 내리는 몽양.

1929년 일경에 의해 상하이에서 검거돼 용산역에 내리는 몽양.

“우리는 남조선에서 당신과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여기에서 “희망했다”라는 말은 남로당 수립을 위한 박헌영의 조치가 소련군정의 명령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말은 여운형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질책이었습니다. 공산당에, 그리고 소련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갖다줬다는 말은 심각한 비난이었습니다. 조금 후인 10월22일 김일성은 여운형과 함께 3당합당에 반대했던 공산당 대회파의 강진에 대해 합당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비난했고 그가 “미 제국주의의 주구(走狗)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미국에 한없이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공격했습니다.

여운형은 김일성이 박헌영의 ‘정치적 강간’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무시하고 자기를 질책하고 나선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인민당을 가로챈 박헌영을 무한히 증오하고 있었는데 박은 하수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스탈린의 ‘신전술’
왜 소련군정은 박헌영으로 하여금 여운형의 인민당을 가로채도록 했던가. 왜 몽양을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고 김오성에게 지령을 내림으로써 몽양의 분노를 일으켰던가.

당시 몽양은 알 길이 없었지만 이러한 행동은 7월에 있었던 스탈린의 지령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김일성, 박헌영, 스티코프를 크렘린에 불러서 지령을 내렸는데, 요점은 미군정에 대해 강경정책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령은 나중에 철도노동자들의 파업, 전기회사들에 대한 파업으로 표현됐고, 또 대구에서 이른바 ‘인민봉기’로 전개됩니다. 북한에서의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과 남한에서의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합당은 이러한 강경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를 규합하고 명령체제를 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스탈린은 세계무대에서 미국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조선반도는 큰 무대 속의 하나의 작은 장면에 불과했습니다.

스탈린이 박헌영을 시켜서 인민당과 신민당을 흡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동의를 요구했을 경우 몽양은 3당합당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합당’이라면 최소한의 예우가 있어야 했습니다. 북한의 경우를 보면 신민당의 당수였던 김두봉이 북로당의 위원장이 됐고, 실세인 김일성은 부위원장 자리를 맡았습니다. 형식상의 대접은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달랐습니다. 여운형을 설득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던지, 아니면 좌우합작운동을 중지하라는 자기의 충고에도 불고하고 그 일에 집착하고 있던 몽양을 적대시했던지 박헌영은 몽양의 인격을 모독하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인민당을 강탈했고 남로당의 지도권을 공산당이 독차지하는 체제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치가 박헌영 단독의 과오가 아니라 소련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알았을 때 몽양은 소련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946년의 소련공산당은 몽양이 1920년대에 동경하고 존경했던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하에서는 ‘설득’이라는 용어는 폭력과 공포의 유사어가 돼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지령이나 결정에 대한 의구심을 품거나 반문하는 것은 범해서는 안 되는 죄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조만식은 평양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몽양이 가깝게 지내왔던 친구였기에 오랜만에 평양을 방문한 그는 조만식을 만나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조만식이 자유를 상실하게 됐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3당합당에 대한 김일성의 질책을 들으면서 조만식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좌우합작에 대한 집념
몽양은 서울에 돌아가서 좌익 3당의 합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대신에 인민당, 공산당, 신민당의 ‘합당’에 반대하는 부류를 이끌어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사로당과 남로당이 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남로당은 이를 거절했고 사로당이 해체하고 당원들은 개인의 자격으로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로당은 여운형을 공격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사로당이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문제가 많았습니다. 남조선공산당이 주관하고 있던 남로당에는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규율이 통용되었는데 사로당에는 공통적인 이데올로기도 없었고 지배적인 인물도 없었습니다. 그들 간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박헌영에 반대한다는 것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응집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사로당은 그런 허점 때문에 그리고 소련군정의 압력 때문에 사산(死産)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여운형은 인민당을 소생시켰고 좌우합작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이에 대한 집착은 다음의 일화에 잘 드러납니다.

1946년 8월26일에 김원봉, 허헌, 그리고 박헌영을 포함한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단은 여운형을 만나서 3당합당에 동의할 것을 권고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말을 ‘농담’으로 했습니다. “좌익 정당의 합당을 추진하며 이와 동시에 좌우 양 진영의 합작운동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몽양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지 않고 “찬성하며, 그렇게 할 경우 자신은 좌익정당의 합당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넓은 의미의 좌우합작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서 좌익 3당합당을 원했던 것인데 이 ‘농담’을 에워싼 대화는 해방 후 여운형의 이상을 집약한 것이었습니다.

몽양이 좌우합작에 집념했던 것은 중국에서 국공합작의 성과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이 혁명에 성공한 것은 국제공산당의 원조와 국공합작 덕분이었습니다. 1927년에 장제스가 공산당을 숙청하는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제1차 국공합작은 끝이 나지만 국공합작을 빼고 중국의 혁명을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몽양은 중국에서처럼 해방 한국에서도 좌우합작이 되어야 통일독립이 이룩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몽양은 좌우합작 문제 때문에 납치와 폭행을 당할 뿐 아니라 자택에 대한 폭탄 세례도 받았습니다. 1947년 3월16일의 일입니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폭탄테러가 좌파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고 이정구, 이상백은 이 음모가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여운형과 남로당의 관계가 폭력을 사용할 정도로 악화되자 여운형의 측근들은 지금까지 삼가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북조선노동당과 남로당은 소련의 정책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이 정책이 명백히 오류임이 드러난 경우에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두 정당은 사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거하여 집요하게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근로인민당 결성
북로당과 남로당에 대해 가한 사대주의라는 비판은 공산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몽양은 1946년 9월27일에 있었던 로마넨코 소장과의 대담에서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집중적으로 탄압하고 있는 것은 “미국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데 반해 조선의 공산당은 모스크바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는데 ‘사대주의’라는 용어는 물론 쓰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본 대로 여운형과 공산당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으나 몽양은 여전히 민전(民戰) 의장단회의에 참가하고 있어서 기이한 감을 줍니다. 그런데 1947년 4월16일 정로식, 허헌, 김원봉, 홍증식, 이기석이 참석한 민전 의장단 회의에서의 여운형의 발언은 그의 시국관과 선택을 나타내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사가 됩니다.

그는 미소관계의 장래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는 곧 재개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년 뒤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혹은 10년 뒤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좌우합작운동 사명의 중대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김규식, 김한규, 김호 및 다른 중도주의자들은 반드시 민족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는 “조선에 미군 군대가 주둔하고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들과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운형과 송진우. 가운데 앉은 여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여운형과 송진우. 가운데 앉은 여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여운형의 발언에 대해 민전 의장단의 반응이 어떠했던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소련군정은 여운형, 김규식 등이 이끄는 중간세력을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여운형에 대한 비판의 강도도 매우 높았습니다. 4월17일자 보고서의 표현은 당시 소련의 관점을 대표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핵 정책과 달러 정책 그리고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불안해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진영의 승리를 믿지 못하는 중간파들 및 좌익진영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은 여운형과 김규식이 영도하는 좌우합작 노선에 자신의 희망을 걸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을 믿고 있는 여운형은 좌우합작 노선을 버릴 수 없는 상황이며 김규식과의 접촉을 중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통일과 민주역량의 성장에 대한 기대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는 반동진영의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그들은 그에게서 합작노선의 실행을 끌어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민주진영’이란 물론 공산진영을 말하는 것이며 ‘민주역량’이란 역시 공산진영의 역량을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된 남로당 부위원장 이기석은 4월26일에 여운형을 단독으로 방문했는데 이날 여운형이 내놓은 시국관은 그전보다 더욱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는 미소공위가 다시 실패작으로 끝난다면 조선 문제는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할 것이며 심지어는 2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할 가능성조차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련과 미합중국 사이에, 혹은 남조선과 북조선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수 있으며, 전쟁이 발발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기석은 새로 조직된 정당(근로인민당)의 상황은 어떠한가 물었는데 여운형은 미소공위가 재개되면 자신은 자주적인 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근민당은 1947년 4월26일 준비위원회를 열었고 5월24일과 25일에 열린 결당대회에서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 장건상을 각각 선출했는데 어느 장소에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몽양은 근로인민당과 남로당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소련군정의 5월4일자 보고서에 올라 있습니다. “남로당은 미군정청과 투쟁하는 정당이다. 나는 미군정청과 협력하는 당을 만들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른 성명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이 이용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남로당은 극단적으로 좌익이며 오직 우리 당만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위의 정보를 보고한 남로당 간부는 “그러한 식으로 여운형은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해 있는 구 인민당 구성원들과 사회노동당 구성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문화학생 조직들 속으로도 침투하려고 시도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근로인민당의 출범은 남로당 내에 동요를 일으키고 여운형의 위력이 작지 않음을 나타냈습니다. 이때까지 여운형은 공산당과 자기와의 차이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노선이 선명하지 않았으나 근민당은 그의 약점을 극복하고 장래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군정과의 비밀회동
몽양이 암살된 1947년 7월19일의 나들이는 정치인 여운형의 최종 선택을 나타내는 중대한 길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미군정의 2인자 E. A. J. 존슨을 만나기로 돼 있었습니다. 존슨은 그날의 사유에 대해서 장황한 글을 남겼는데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러치(Lerch) 장군이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남조선 과도정부가 드디어 설립됐다. 우리는 새로이 임명된 한국인 직원들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행정에 전념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능력본위로 뽑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공연한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과도정부는 야심적인 한국 정치지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어느새 극우세력이 경무국과 법무부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버렸고, 안재홍은 공식적으로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부 내 우익인물들의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또 좌익측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들이 한국 사람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좌익은 거의 무시되었다.

정부의 주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우리들은 과도정부 내에서 날로 자라나고 있던 우익측의 영향을 막아버리는 동시에 자유주의적인(liberal) 세력과 중간좌파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엇인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한국 사람들과 의논을 했는데 그들은 유명한 중간좌파의 지도자인 여운형에게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맡기는 것이 현명한 책략일 것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창덕궁에서 멋지게 위장된(위장됐다고 생각했던) 비밀회의를 열고 내가 여운형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도록 했다. 그러나 중앙청에 있던 나의 사무실에 그를 초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를 우리 집으로 초청하기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하지 사령관 휘하의 미 군정청에서는 우익세력의 독주를 막기 위해, 그리고 방향전환을 하기 위해 여운형을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존슨의 관사로 초청했던 것입니다.

남로당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그를 배반자, 기회주의분자라고 규탄했고, 그는 폭행도 당하고 가옥이 폭탄세례를 받기까지 했는데 그가 실권을 가진 민정장관 자리를 맡았을 경우 어떠한 사태가 전개됐을까 생각하게 됩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왜 그가 미군정 치하에서 민정장관 자리를 맡을 의향을 갖게 됐던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몽양은 어떠한 조건들을 제출했을 것인지, 미군정이 몽양이 제출했던 조건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합의의 가능성은 있었다고 보입니다.

여운형의 인생행로, 특히 그의 사상 형성 과정을 보면 그는 어떠한 논문이나 책, 또는 연설을 읽거나 들음으로써 사상을 형성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사상을 정립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동학을 따른 조부 슬하에서 자라났고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과격한 계급사상을 배척해 신분의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부모의 상을 치른 후에 노비들을 해방시킨 것은 이런 생각의 결정(結晶)이었습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그는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나섰는데 물론 이것은 조국의 자유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던 소련을 선호했고 공산당과 손을 잡았는데, 해방 후 그는 다른 형태의 소련과 다른 형태의 공산당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약소민족의 해방을 돕는 데에 적극적이던 소련은 1939년에 독일과 중립조약을 맺은 이후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동유럽 국가들을 흡수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버렸고 동아시아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기에 바빴습니다. 물론 서방의 제국주의국가들에 포위된 상태에서 유일한 사회주의 조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 스탈린의 구실이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미국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약소민족들의 권익은 물론 개인이나 어떤 정당의 권익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여운형의 사상
몽양은 이러한 논리에 수긍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상의도 없이 자의로 권익을 박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몽양은 동지로 삼던 박헌영이 ‘정치적인 강간’을 한 데에 대해 분개했습니다만 그가 소련의 지시를 따랐을 뿐임을 알았을 때 생각을 다시 하게 됐던 것입니다.

위에서 몽양은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반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반응은 복잡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시나 조선반도가 분단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지만 여운형은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상하이에서 체포되기 바로 전에 그는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강연을 했는데 지상천국인 동남아시아 지역을 백인국가들이 강점하고 있으므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논조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여권이 압수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몽양이 다녀간 5년 후인 1934년에 미국은 필리핀에 독자적인 헌법을 채택하도록 했고 12년간의 자치기간을 거쳐 1946년 7월에 독립하도록 했으므로 ‘제국주의’ 문제로 미국을 반대할 이유는 없어졌습니다. 바로 1년 후에 몽양은 암살됐는데 몽양의 차녀 여연구씨는 부친을 암살한 것은 종파분자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즉 박헌영 계열이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저는 터무니없는 억측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련 문헌을 읽으면 읽을수록 평양비행장에서 만난 여연구씨의 말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남로당은 몽양의 장례식을 유사 이래로 가장 성대한 행사로 치렀고 ‘몽양을 암살한 우익진영’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부르짖었는데 앞과 뒤가 맞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로당은 바로 그전까지 몽양을 맹렬히 매도했고 폭행을 가한 일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여운형의 아이덴티티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분을 어떠한 틀에 맞추려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그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몽양 여운형은 생존의 희락과 희망과 자유와 평등과 존귀(尊貴)가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 원했고, 그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거듭했으며, 일제하에서는 쓰라린 투옥의 경험을 두 번이나 했는데 해방된 조국에서는 매도(罵倒)와 폭력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패한 정치인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나 기타 종류의 애국운동은 결과만을 두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의 과정 역시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과정을 통해서 몽양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들을 격려했고, 이끌었습니다. 몽양 자신은 때를 잘못 만났기에 꽃을 피우지 못했으나 그는 겨레의 스승의 한 사람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정치학, 경희대 평화대학원 석좌교수 *

8월 4일/ 중앙방송국 프락치 사건

12월 2일/ 장덕수 암살사건

장덕수(1895~1947)

한국 언론인 겸 정치가. 여운형 · 김규식 등과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고, 이듬해 국내로 잠입하다 체포되어 거주 제한을 당하였으나 여운형의 통역관이 되면서 풀려났다. 1920년《동아일보》초대 주필이 되었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등과《3·1신보》를 발간했다.

1947년 12월 2일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현직 경사 박광옥과 배희범에 의해 제기동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이날 저녁 6시경 범인 박광옥은 종로경찰서 외근감독으로 근무중임을 기회로 정복차림에 칼빈총을 휴대하고 공범 배희범과 함께 장덕수를 방문, 공무를 사칭하고 면회를 한다음 박광옥이 매고 있던 칼빈총으로 2발을 발사하여 하복부에 명중 절명케 하였다'

범인들은 사건발생후 약39시간만인 4일 하오 3시경에 수도청 형사대에 의 해 체포되었는데 ,그배후 조종자로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 조상환 신일준 손정수 김중묵 최중하 조엽 박승봉 등이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사건은 이해 4월2일 하지중장 주관하의 미군정재판소에서 조엽 박승봉을 제외하고박광옥 배희범을 포함한 8명의 피고에게 사형을 언도함으로써 배후관계가 더 확대됨이 없이 종결되었다*

*****

'광복 60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48년  (0) 2009.09.04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0) 2009.09.02
1945년. 광복  (0) 2009.09.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