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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흥덕

내 고향, 흥덕

by 싯딤 2009. 10. 1.

내 고향, 흥덕 

 

 

      내 고향,  전북 고창군 흥덕면 치룡리. 멀리 보이는 산은 노령산맥의 방장산.

 

 

내 고향 흥덕興德은 전북 고창군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면 소재지이다. 조선시대에는 현縣으로 사람들이 많이 붐볐지만 지금은 인접한 고창, 선운사, 정읍을 지나는 길목에 있는 작은 농촌의 면소재지이다.

조선조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은 흥덕현의 객사客舍 서쪽, 배풍헌培豊軒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바다 곁의 큰 고을은 푸른 산봉우리와 마주하고 있고

구름 찌를 듯한 누대에는 우뚝하게 바람이 임하네

외로운 배는 사양斜陽 밖에 보였다 안보였다 하고

먼 산들은 구름 속에 아물아물한다

한 밤에 나팔소리 달 그림자를 흔들고

한 난간의 꽃빛깔은 봄 경치 곱게 하네

바다는 큰 물결 몰아가서 고요한데

물 넓고 하늘 길어 보는 눈이 통한다.

 

 흥덕면은 백제시대에 상칠현漆縣이라 불렸다. 신라가 백제를 함락한 뒤 752년(경덕왕 16)에는 상질현尙質縣이라 고쳐 고부군에 속한 현이 되었고, 고려 때 고창현을 편입시켜 장덕현德縣이라 고쳐 감무監務를 두고 고창현을 겸임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이름()과 음이 같아 창덕현德縣으로 고쳤다가 창왕 때에 다시 이름자와 같아 지금의 이름인 흥덕德으로 고쳤다.

1392년, 조선 태조 1년에 고부에서 다시 나뉘어 현감을 두었다. 1621년(광해군 13)에는 무장향교(1420), 고창향교(1512)에 이어, 교운리에 흥덕향교가 창건되었다.

근대들어 1896년(고종 33),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전주부에 속한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인 1897년 전라남도에 편입되었다가 1906년에 다시 전라북도로 이속되어 부안군에 속했다가, 8년 후인 1914년, 3개 군을 병합하여 고창군으로 칭하게 되었다.

1909년, 일제에 의해 흥덕학원이 개교해 1915년 흥덕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 신림면 제하리가, 1987년 1월 1일에 신림면 송암리가 흥덕면에 편입되었다.

*

조선시대에는 흥덕현 서쪽 6리, 20리에 사진포沙津浦, 선운포禪雲浦 등의 포구가 있어 장삿배가 들락거렸다. 특히, 사진포에는 세곡稅穀을 모아 황해바다로 보내는 해창海蒼이 있었다. 바다 서쪽 죽도竹島까지는 물길로 7리에 이르렀다. 현의 치소는 배풍치培豊峙 위의 성 안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남문 밖으로 옮겼다. 해안 곳곳에 염창(소금창고)을 두어 소금을 모았고 백제 때 만든 눌재호에서 농사짓는 물을 공급하였다.

흥덕읍내는 명칭 그대로 현내면縣內面이라 칭했는데 흥덕 객사는 한때 보건소로 쓰이다가 근래 좌우 익사가 없는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민도리 홀처마 팔작지붕으로 깨끗하게 보수되어 흥성동헌興城東軒이라는 명칭으로 전북 유형문화재 77호로 보존되고 있다. 객사 앞 3거리는 서울에서 줄포를 거쳐 목포까지 이어지는 23번 국도가 지나가 주막, 점포, 방앗간, 양조장이 늘어선 저잣거리로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좌판을 벌인 장꾼들로 붐볐다. 지금은 새 길이 뚫리고 버스정류장이 옮겨지면서 좁은 옛길로 변하여 옛 흔적만 군데군데 남아 있다.

흥덕현의 관아가 들어서 있던 흥덕중학교에는 지금 어디에도 그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운동장에 문루, 아름드리 고목, 창고로 쓰인 건물들이 남아 있었지만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동헌터 동쪽 배풍산 자락에는 현의 바깥쪽 문 위에 지어진 문루가 있었고, 관아 앞에는 홍살문이 있어 동헌터 안에 있던 마을을 홍살거리라 불렀는데 역시 흔적이 없다.

고창, 부안으로 가는 동편 세갈래 길에는 큰시암(우물)거리라는 마을과, 입구에 한양 조씨 열녀문이 있었다고 한다.

흥덕현 남쪽 15리에 있는 높이 734m의 방장산方丈山은 방문산方文山으로 연결되어 전남 장성으로 이어진다. 방장산 서북쪽에는 용추폭포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매년 달 밝은 10월 보름날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풍류를 읊고 놀다가 못에서 목욕을 하였으며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화시산火矢山이 현의 서쪽 10리에 있고 소요산逍遙山이 현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소요산 자락에선 근현대사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 많이 태어났다.

소요사는 백제 위덕왕 때 소요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도승 도선이 도를 깨우친 다음 수도를 위해 머물렀고 사천왕상이 이곳에 있다가 영광 불갑사로 옮겨갔다. 정유재란 때 대부분 불 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때 중건되었다가 다시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몇 채만 남아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말 소요산 자락에는 80,000여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많은 수도승 가운데 응용대사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불도에 통달하였고, 풍수에도 조예가 깊어 명당을 잘 찾아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대사와 그 제자들에게 명당을 잡아달라는 청이 갈수록 많아 응용대사는 소요산 깊은 산중에 몸을 숨겼다. 어느날 응용대사가 일찍 일어나 불을 피우고 밥을 짓고 이는데 아침 산 햇살 속으로 연기가 피어오르자 사람들이 그가 있는 줄 알고 몰려갔다. 그러나 데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 응용대사가 다시 밥을 짓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사람들이 곧바로 몰려와 응용대사를 만났다고 한다. 그 후 그 곳을 연기동이라 불려지게 되었고 응용대사로 연기대사라 불렀다고 한다.

높이 44m의 소요산과 서쪽에 있는 선운산은 예부터 기묘한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소요산이 흥하면 선운산이 쇠하고, 선운산이 흥하면 소요산이 쇠락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그 주기가 몇 백년씩 지속된다고 해서인지 오늘날 선운산 자락의 선운사는 관광객이 붐비는 반면 소요산의 소요사는 인적이 드물어 쓸쓸하다.

소요산 자락 용산리 수월골에는 수월사水月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춧돌과 기왓장만 남아 그 자취를 전해 주고 있다. 고려말의 문인 이곡李穀은 이 곳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명산 찾기 위하여 이 곳을 지나는데

강 다리에서 갈라진 길 연기와 안개 속으로 들어가네

돌아와서 죽림 밑에 말을 쉬니

한그루의 산다화 꽃 아니 피었구나

소요산은 갑오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의 태몽설화를 간직한 산이기도 하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일찌기 고향 당촌을 떠나 소요산에 머물렀는데 꿈에 소요산 만장봉이 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꿈에 천인이 나타나 천서를 주고 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고 한다.

소요산 자락 아래 마을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 태어났다. 1920년대 보천교를 창시한 차경석이 연기동에서 태어났고 인촌 김성수가 봉암 인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미당 서정주는 부안면 질마재에서 태어났다. 소요산 소나무 울창한 숲 속에 자리한 황토 질척한 질마재에서 태어난 미당은 23살 때 자화상이라는 시를 지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나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머니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화시산과 소요산 사이에 흐르는 냇강은 풍수지리상 명당자리인 금으로 만든 쟁반에 옥으로 만든 술병이 얹힌 형상이라 하여 금반옥조가 숨어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오늘날 그것을 찾기 위해 소요산에 오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수 송창식이 불러 유명해진 선운사로 발길을 향하는 길 앞에 개울이 있어 후포後浦라 지은 후포리에는 활터가 있어 현재 초등학교 자리에 과녁이 있었다.

후포 동북쪽 줄포로 가는 길가에는 시게배미라는 논 두마지기가 있다. 이 논은 모양이 세모나고 지대가 높아 비가 오면 물이 금방 위아래로 새어버려 얼른 팔아 시계를 사는 것이 낫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후포에서 시게배미로 가는 고개 옆에는 고성 이씨 묘가 있는데 행인들이 지름길로 가기위해 묘를 질러서 지나므로 양반 아들들이 날마다 나와서 묘를 지켰다고 해서 양반재라고 부른다. 후포에는 지금도 밭으로 변한 창고터가 있는데 흥덕 고을에서 거둔 세미를 이 곳에다 보관했다가 서울로 실어갔다.

교운리에 있는 흥덕 향교는 1406년(태종6년)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21년(광해군 13) 현재의 위치에다 이건하였고, 그 후 1675년(숙종1)에 새로이 증축하였다. 현재는 3칸의 대성전과 5칸의 명륜당, 3칸의 동 재, 서 재, 그리고 사마재, 양사재, 현관실, 고직사 등이 있으며 전북 문화재 자료 108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녹사리 동쪽 한림동은 한림학사가 귀양살이한 곳이라 지어진 이름이고, 사천리 각시섬은 새냇골 위에 있는 논으로 예전 신혼부부가 이 곳 방죽 위를 가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사 뒷산 넘어 애통배미 논은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 내려 온다, 옛날 어느 부부가 일하다가 내기를 했다. 남편은 혼자 여섯마지기를 다 갈고 부인이 지면 길쌈을 하여 옷을 지어 오기로 했다. 남편이 논을 다 갈도록 부인이 오지 않자 자기가 이긴 줄 알고 좋아했다. 그런데 부인이 와서는 남편에게 모자를 벗어놓은 자리는 빼놓고 갈았다고 하여 자기가 진 것을 안타까워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갯가에 모래가 많아 사진포라 불리웠던 사포리의 서남쪽에는 술항골(주항酒缸)이라는 마을이 있다. 세미를 수집하는 장소라 사람과 우마가 많이 모이면서 주막집을 술항집이라 부른데서 붙여졌다. 돌다리가 있어 석교라 불려진 석교리에는 옛날에 강선이라는 기생이 선을 보기 위하여 오는 길에 강선교를 놓았다고 한다. 석우촌은 동림저수지 둑이 생기면서 동림, 석신개 마을이 침수되어 폐촌되고 동림새터마을이 새로 생겼다. 향교가 있는 오태동五台洞은 지형이 다섯 정승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신지매는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가 피난와 터를 잡은 마을이다. 용이 서린 형국이라는 용반리의 고갯등은 옛날 과객이 쉬어 가는 주막이 있었다. 남당 뒤 술무덤은 임진왜란 때 채홍국, 고덕붕 등 92인이 혈맹을 맺고 흙으로 쌓은 당이라고 한다.

송암 마빼기 다리는 마박교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말을 매놓고 잠시 쉬어가던 다리라고 하며, 자포리 뒷산에 있는 망곡비는 구한말 고종이 세상을 뜨자 오성필이라는 자가 아침저녁으로 이 산에 올라 망곡을 했는데 그 후손이 이를 기리고자 비를 세운 것이라 한다.

고릿제 아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제하리堤下里에는 여곡麗谷 마을이 있다. 조선조 태종 때 사헌부 장령 고직이 벼슬을 내려놓고 이곳으로 옮겨와 살다가 옛 고려를 잊지 않겠다는 뜻에서 고려곡이라 하였는데 그의 후손 고덕붕이 호를 여곡이라 하고 마을 뒤 큰 바위에 고려곡이라고 세 글자를 새겨놓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치룡리峙龍里는 배풍치의 치리峙里 마을과 복룡촌伏龍村이 합쳐 지어진 이름이다. 구동狗洞은 지형이 개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복룡伏龍은 뒷산에 용이 엎어져 있는 모양이라 해서 붙여졌다.

*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이 1468년(세조 14년) 흥덕현감으로 부임해 와 현감으로 있을 때 흥덕현의 배풍헌을 두고 시를 지었다.

능가산 몇 만 봉우리에 구름이 덮였는데

매실 익는 보슬비, 동풍을 좇아온다.

낙수 소리 이따금씩 속에 들려오고,

들빛은 가깝고도 아스라한 가운데 푸르다.

이미 문서처리 거두고 쓸쓸한데 돌아갔으니,

고깃배 따라 허무한 곳 들어가고 싶구나.

피로한 행색, 주인의 괴로움을 살피지 못하고,

다시 석잔술에 대도통大道通만 생각한다.

* 대도통大道通 : 당나라 이태백이 석 잔 술에 큰 도가 통했다고 한 고사.

 

많은 사람이 붐비던 흥덕현은 이제 작은 농촌 면 소재지로 고창, 선운사, 전주, 군산가는 사람들의 중간 길목 역할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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