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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좋다

김어준 딴지그룹 총수

by 싯딤 2015. 1. 3.

 

 

 

 

 김어준

 

(1968년 12월 4일~ ), 언론인.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미국에서 생활했다.

 1987년 서울 문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를 목표로 3수를 하여 홍익대  전기공학과에 들어가 1995년 졸업했다. 이후 포스코에 입사한 뒤 6개월만에 사표를 냈다.

 

“(직장에서) 회식이 있었는데 새벽 3,4시까지 마셨다. 근데 이사님이 내일 아침 7시까지 와라. 자면 못 일어날까 봐 집에 오자마자 샤워하고 바로 여섯 시 반쯤에 출근했더니 이사님 혼자 있었다. 부르더니 교훈을 주는데, '내가 왜 일찍 오라고 했는지 아나. 힘들고 피곤할 때일수록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새벽에 이렇게 와서 일하는 자세 때문에 내가 이사까지 왔다' 했다. 그 얘기 듣고 이 양반이 참 안됐다고 생각했다. 불쌍했다. 그래서 관뒀다. 그날, 그게 자부심이 되어버린 그 사람이 너무 작아보였다."

 

 이후 80여개국을 돌아다녔으며, 중학시절 TV로 본 PLO 아라파트 의장이 멋있어 보여, 1994년경 노벨평화상을 받은 아라파트를 만나려고 그의 집 앞까지 갔다가 정작 만나면 할 말이 없어안만나고 돌아오기도 했다.

 

 1998, 우리나라 최초의 인터넷 신문인 딴지일보를 창간하여 사회현상과 각 계 인물들을 풍자했다.

 

 2002년 노무현 정권 출범 후부터 CBS, SBS라디오에서 퇴근시간의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그만 두었다.

 이후 한겨레 TV에서 김어준의 뉴욕타임스를 진행하였다.

 

2011,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에서 기성언론이 전하지 않은 이명박 정권의 각종 의혹을 제기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이 해,  나꼼수는 미국 아이튠즈 팟캐스트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였고, 행자 4인은 언론노조에서 주는 민주언론인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한겨레 TV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진행하고 있다.

 

그의 인생관은 '김어준의 직업은 김어준이다. 내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대로 산다' 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대인배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위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기 이익이나 출세를 위해 시류에 영합하거나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판단되면 동물적 본능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명분이나 염치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실되고 남자답다.

 

 ‘진실보다 더 큰 예의는 없다

 

 자기가 생겨먹은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생겨먹은 대로 행동하고 말하면 그게 자기 이미지가 된다생겨먹은 대로 안 하면 연기다..’

 

 

김어준은 가진 자들의 부조리, 비합리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비판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하고는 사랑으로 함께 간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자세는 사랑이 아니고 장사다.’

 

  

그는 자존감이 강하고 스스로를 만족해하며 근엄한 것을 싫어한다

 

매력은, 스스로를 매력 있다고 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상황 만이 특별하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자존감이 무르다는 방증이다. 자존감이 든든한 자는 자신이라고 특별할 게 없다는 걸 인정한다.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자신이 못나거나 하찮다는 의미가 아니다 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근엄한 게 웃기다. 태도로 먹고 들어가려는 수작이다.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정성 혹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근엄함 밖에 생각을 못해내는 것이다. 발랄해도 진실할 수 있다.’

 

 그의 말은 고상하지 않은 듯 하면서도 지적이고 예리하다. 말 끝에 추임새처럼 넣는 '씨바'는 약자의 언어로 권력자를 상대하는 방법이다.

 졸지 마는 너나 나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또 같다는 인간 평등의 역설이다. 불합리한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외침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유주의자이며 아나키스트이다.

 

다른 사람의 규범이 자기 삶에 우선할 수 없다

 

그의 인생관을 나타내는 말이다.

 

나쁜 선택보다 훨씬 나쁜 건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갑자기 다가온 우연에, 어떻게 내가 대처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

 

<출처: 프레시안, 2013.04.05 >

 

 

                               딴지 총수부터 '나꼼수'까지, 김어준

                                                                                                                                  노정태 자유기고가   

1.
      
1988년 서울올림픽의 모토는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급변하고 있었고,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시민사회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성취감을 얻었지만, 동시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기나긴 정치적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후, 그간 기층 단위에서 조직되었던 노동운동이 표면화되면서 이른바 789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공장의 말단 직원부터 중간 관리자까지, 전두환의 신군부가 억지로 찍어 누르고 있던 임금이 대폭 상승했다. 국민 모두가 이른바 '중산층'이 되는 그런 시대가 열렸다고, 다들 꿈꾸게 되었다.

▲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 ⓒ프레시안(최형락)
높아진 임금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서울로 몰려들었고, 부동산뿐 아니라 주식시장 등 온갖 금융 영역이 넘실거렸다. 더욱이 당시는 이른바 '3저(低) 호황'의 시절이기도 했다. 금리, 유가, 달러 환율이라는 세 가지 주요 경제 지표가 모두 낮아졌다. 누구나 쉽게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기름 값 부담 없이 자동차를 사고, 더 여유가 있으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을 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사실상 좁은 섬 안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바야흐로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때 한 청년이, 3수 끝에 지망하던 서울대가 아닌 다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87학번이 되었어야 했을 그는 89학번이 되었고, 자신이 원하던 서울대가 아닌 홍익대에 들어갔으며, 학교 안에 정 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50개가 넘는 나라들을 들락거렸다. 본인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그렇게 배낭여행에 몰두한 것은 입시에 실패하였다는 자괴감을 "여행을 떠나 세계를 만나"면서 "내가 살던 동네가 얼마나 비좁은 공간인지 절감"하고, "그를 통해 내가 겪은 실패라는 게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라"(<건투를 빈다>(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 26쪽))고 확인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묘한 방식으로 때를 잘 만났다. 만약 본인의 뜻대로 서울대 87학번이 되었더라면, 87년 6월 항쟁의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가 대학교 새내기 시절을 보낸 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89년 무렵에는 이미 3학년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배낭여행을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배낭여행을 통해 경험하는 내용들로 자아를 형성하기에는 다소 때를 놓치는 모양새가 된다. 배낭여행에서의 경험을 '근원적 체험'으로 삼기에는 그 전에 겪은 일들의 무게가 너무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어준은 3수를 했고, 87년 항쟁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절묘하게 비껴간 채, 민주주의와 역사의 흐름에 한 몫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

신문 칼럼, 강연, <딴지일보>에 본인이 쓴 글 등을 통해, 김어준은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원체험의 몇몇 굵직한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핵심적인 레퍼토리를 몇 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파리 오페라 극장 대로변 양복점에서 두 달 치 여비를 털어 BOSS 양복을 충동 구매한 이야기
(2) 이탈리아에서 다비드 상의 허리 라인을 보고 그것이 아르마니 양복과 쏙 빼닮았음을 깨닫고, 문화적 심미안을 가질 수 없었던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애를 느낀 이야기
(3) 독일에서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바닥이 기울어지도록 만들어진 버스를 본 이야기

각각의 내용을 간략하게 검토해보자.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에 타기 전날, 90년대 초반 배낭여행을 하던 김어준은 파리 오페라 극장 대로변에 있는 한 양복점의 쇼윈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양복에 말 그대로 '꽂혔다.' 뭔가에 홀린 듯 가게에 들어가 와이셔츠, 바지 등을 하나씩 착착 걸쳐가며, 그때까지 자신이 봐온 스스로의 모습을 훨씬 뛰어넘는 누군가를 보았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두 달 치 여비에 해당하는, 100만 원 가량. 냉큼 지르면 두 달 굶어야 할 상황이다. 김어준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절약한 100만 원을 향후 두 달간 숙소와 식량에, 합리적으로 소비한다면, 그럼 지금 당장의 이 환희는, 고스란히, 보상받을 수 있는 건가."(같은 책, 48쪽) 물론 대답은 '아니오'였고, 일단 옷을 산 그는 로마에서는 배낭여행객 숙소 '삐끼' 노릇도 했으며 부다페스트에서는 암달러상으로 여비를 벌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그 여행에서 겪은 일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피렌체에서, 김어준은 본인이 인솔하던 학생 관광객들을 우피치 미술관에 몰아넣은 후 고개를 들어 그 전까지 백 번은 넘게 마주쳤던 다비드 상을 보고, 모종의 깨달음을 얻어 벌떡 일어났다.

"쇼윈도 안에 진열되어 있던 '페라가모' 구두 뒤축에서 느꼈던 그거. '긴장감.' 동시에 돌멩이를 움켜쥔 오른팔의 늘어진 곡선 역시 낯익었다. 맞다. '야들야들.' '아르마니' 양복의 허리 라인이었다. 터무니없게도 말이다."(같은 책, 74쪽)

훗날 <한겨레>에 연재한 상담 칼럼 '그까이거 아나토미'를 묶어 <건투를 빈다>(푸른숲 펴냄)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면서 이 기억을 곱씹던 김어준은, 온 세상을 쏘다니며 좋다는 명작들은 다 보고 다니면서도 왜 본인이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지, 왜 자신의 미적 감수성이 그렇게 '후지게' 세팅되어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는 그 이유를, 명작들을 '외워서' '시험 보게' 만드는 한국의 공교육에서 찾고,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야 할 청소년기를 그렇게 보낸 스스로가 '인간의 말을 배울 시기를 놓친 늑대소년'과 다를 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후, 길든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국적 불명의 아파트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도시를 다시 마주하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단상이 하나 있다. 우리 유전자 어딘가에 몇 천 년을 축적해온 고유한 선과 면과 색에 대한 감각이 분명 존재할 텐데, 식민과 전쟁과 개발을 정신없이 겪어내느라 그 집단 기억을 상실해버린 무국적의 우리 도시들을 보고 있자면, 늑대소년으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잃고 으르렁거리는 것밖에 못 하게 만든 정글을, 떠올리게 된다. 난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렇게 늑대소년으로 길러졌던 게다. (같은 책, 76쪽)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달리 독일은 김어준의 문화적 감수성을 자극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독일에서, 굳이 말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의 한 기준을 얻게 된다. 장애인을 약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 바라보고, 그래서 대중교통이니까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대중들이 버스에 탈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혜주의적, 온정주의적 관점이야말로 더 큰 폭력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고 대우하는 분위기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 <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2000년 <한겨레21>에서 김규항과 함께 누군가를 인터뷰하거나 두 사람이 방담을 나누는 형식의 코너 '쾌도난담'을 진행할 때, 장애인 인권 확보를 위한 전국청년학생연합 공동 대표인 박지주 씨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야기한다. "장애인을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바라는 건 동정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인정을 해 달라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아주 근본적인 이런 부분부터 뒤집어가야"(<쾌도난담>(김규항ㆍ김어준 대담, 고경태 정리, 태명 펴냄), 151쪽) 한다는 것이다. 대단히 모범적인,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적 발언의 구성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1) 본인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개인적 태도, 동시에 미래의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핑계로 현재의 쾌락을 유예하지 않는 자세. (2)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본인 및 한국 사회의 심미적 미발달에 대한 인식, 그러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3) 타인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약자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포지션을 노리지 않고, 평범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요구하고 보장하는 정치적 태도. 이 세 가지를 조합하면, 주로 <건투를 빈다>에 수록되어 있는, 대중들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김어준의 사고방식의 얼개가 나온다.

3.

자기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지되, 엄숙하지 않고 유쾌하게 즐기며 사는 사람. 동시에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자기 인생의 미적 측면을 늘 생각하는 사람. 타인들을 자신과 똑같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바라보고 바로 그 시점에서 연대할 수 있는 사람. 배낭여행을 다니며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김어준이 스스로를 구성하고, 또 타인에게도 통용될 수 있을만한 어떤 '주체의 유형'으로 창출해낸, 말하자면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모델이다.

한국인들은 습관적으로 일본을 '섬나라'라고 부르곤 하지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힌 대한민국이야말로 사실상 일본보다 더 작은 조그마한 섬나라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 때문에 국민들에게 해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늦은 시점부터 제공하였고,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모든 국민에게 해외여행이 '허락'된 것은 김어준이 대학에 들어간 1989년부터의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1987년에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을 누군가와 1989년에 대학물을 먹기 시작한 이가 걷게 되는 길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자가 굳이 말하자면 '구세대의 막내'였다면, 후자는 한국인 중 거의 최초로 '세계'를 본인의 자아 형성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신세대의 맏이'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첨단에 김어준이 서 있었고, 그는 5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일종의 역할 모델로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좀 더 개인사적인 맥락을 짚고 들어가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그는 1987년에 들어갔어야 할 대학의 문턱을 1989년에 밟았다. 1987년 6월 항쟁만 놓친 게 아니다. 재수를 안 하고 대학에 들어갔다면 온몸으로 즐겼을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혀 향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과 귀가 쏠리는 자기 자신을 질책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스포츠 중계를 본 후 자꾸 고개를 드는 불안함을 어떻게든 달래야 했을 것이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88올림픽 슬로건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웃긴 말"이라고, "세계가 우리만 달랑 빼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무슨 특설 링도 아니"(<건투를 빈다>, 56쪽)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모습에서, 눈앞에 열린 축제를 즐기지 못하면서 쪼그라드는 자존심을 추슬러야 했던 한 수험생의 번민이 인간 꼬리뼈처럼 남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영 생뚱맞은 일만은 아니다. 1988년에는 '세계'가 '서울'로 올 수는 있었지만, '서울'이 '세계'로 갈 수는 없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당시에는 정말 세계가 "우리만 달랑 빼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무슨 특설 링"이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2002년 월드컵에 대한 김어준의 열광을 이해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있다. 축구는 멋진 스포츠이며, 쿨한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해서 자기 나라 대표 팀의 경기에 열광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보며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그 기억을 끝없이 반추하며 김어준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캐릭터는, 앞서 우리가 말한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4.

2002년 6월 13일, 포르투갈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1대 0으로 힘겹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조별 예선 3라운드, 한국은 폴란드를 상대로 1승을 거두었고 미국과 비겼기 때문에, 기왕이면 이겨야 복잡한 계산 없이 꿈에 그리던 16강 고지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 팀은 포르투갈을 이겼다. 이른바 '황금 세대'라고 하는, 당시 유명한 선수들을 망라하고 있던 우승 후보 포르투갈을 꺾고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문제는 그에 대한 언론 반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론들이 포르투갈 전을 보도하는 그 태도가 김어준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이틀 뒤인 6월 15일, 그는 자신이 '총수'로서 운영하던 사이트 <딴지일보>에 자신의 이름을 달고 한 편의 글을 올린다. 제목은 '우리는 강팀이다'.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와는 또 다른 하나의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건투를 빈다>(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포르투갈 대표팀은 한국을 이기지 못하면 16강 진출이 어려워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거칠게 플레이했고 반칙이 많이 나왔는데, 그러다가 당대 최고 수준의 스트라이커인 주앙 핀투가 퇴장당했다. 곧이어 또 한 명의 선수인 베투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포르투갈은 9명, 한국은 11명이 경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상황에서 박지성의 결정골이 터졌고, 포르투갈은 그 한 점 차이를 결코 만회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어쨌건 즐겁다는 분위기가 대세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지만, 김어준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이 홈 어드밴티지를 이용해서,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에 힘입어, 제 실력대로 하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고 16강에 올라갔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어딘가에 있긴 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발언을 반박하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축구 전문가"가 누구인지에 대해 지금의 우리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아무튼 그런 태도,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스스로 비겁한 승리를 했다고 생각하고야 마는 패배주의 근성을 김어준은 질타하기 시작했다.

이번 게임에선 우리가 이길 만하니까 이긴 거다. 우리가 정당하게 페어플레이해서 이긴 거 맞다. 그러니 우리가 비겁하게 승리를 뺏어낸 거라 생각하고 스스로 쪼그라들고 스스로 비아냥거리는, 만성적 패배주의에 찌들어 차분하기 짝이 없는 일부의 소심한 사람들아, 이제 제발 그만 차분해 하고 흥분해서 발광을 하며 날뛰는 주변의 정상적인 인간들이랑 어깨동무하고 같이 마음껏 난리치길 바란다. ('우리는 강팀이다', <딴지일보>, 2002년 6월 15일)

이탈리아 전에서도 역시, 세계 톱클래스 선수인 토티가 퇴장을 당한 후 한국이 이겼다. 마찬가지로 오심 논란이 있었고 홈 어드밴티지 논란도 있었다. 그에 대한 김어준의 대응도 역시 한결같았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한국팀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또 이겼다. 김어준은 그때까지도 남아있는, 혹은 본인의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는 '패배주의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그래서, 한편으론 정말 속상하다. 그동안 얼마나 이겨보지 못했으면, 얼마나 패배에 익숙해져 있으면, 얼마나 바깥의 눈치를 보고 살아왔으면…이렇게까지 작은 행운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도리질하고 있는 건가 말이다. 제발 이제부턴 익숙해지자. 승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라. ('믿어라! 우리가 강팀임을', <딴지일보>, 2002년 6월 24일.)

5.

2003년 9월 1일, <딴지일보>에 새로운 글이 하나 업데이트되었다. 제목은 '우리는 강팀이다 II'. 작성자는 당연히 김어준 총수였다. "승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라"고 권했던 그가, 자신이 남들에게 권한 바로 그 '승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모종의 체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해내고자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상대한 수많은 나라 중, 김어준은 이탈리아 전에서의 승리를 각별한 것으로 꼽고 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는 축구도 잘하지만 유니폼도 멋진 그런 나라이기 때문이다. 전직 복서 출신의 스트라이커 비에리의 거대한 체구가 공포감을 자아내는 만큼, 그들이 입고 있는 파란색의 쿨한 유니폼 역시 김어준에게 깊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 편 태클은 기술이고 상대편 태클은 폭력으로 자동 해석되는 그 전쟁 상황에서조차, 도대체 그들 유니폼의 상대적 세련미는 부정하기는 힘들었다"며, "그리고 난 그 유니폼이, 비에리의 선제골만큼이나 부러웠다"('우리는 강팀이다 II', <딴지일보>, 2003년 9월 1일)며 김어준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 본론의 내용 중 대부분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김어준의 주요 레퍼토리 중 (2)번을 수없이 확대재생산한 것이다. 어쩌면 (2)의 내용이 '우리는 강팀이다 II'를 쓰는 과정에서 그의 의식 속에 고착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김어준이, 본인이 배낭여행을 다니며 '개인'으로서 느꼈던 문화적 격차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법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자신의 눈을 호린 이탈리아의 '명품'들이 수많은 가족 기업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 가족 기업에서 일하는 장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것이 나에게까지 아름답게 보이는가, 왜 나에게는 내가 익숙한 대로 하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전통과 문화적 맥락이 없는가 등을 고민하던 그는, 하릴없이 다음과 같은 '서론의 결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가 발명한 민족주의라는 허구의식으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며 단군신화 파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 몰랐던 우리네 가치와 새롭게 정립해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보다 세련되고 보다 당당하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자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련다. (김어준, 같은 곳)

'우리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는 것 사이의 간극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당시 <딴지일보>를 열심히 보던 나 또한 김어준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자주 들어가 업데이트를 확인했지만, 단절된 역사적 지평 위에서 자아를 형성해야 하는 변방의 식자들이 겪는 공통의 문제에 대해, 김어준이라고 해서 뾰족한 해법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것'이 아닌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고자 하면, 그것은 몸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사실 앞서 말한 '어설픈 근대적 자아'가 자신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지평 위에 서있을 뿐,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흑인들의 음악인 힙합을 하면서 '미국인 흉내'를 내는 것만큼이나, 이미 전통이 단절된 지 오래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조선인 흉내'를 내고자 발버둥치며 '만들어진 전통' 위에서 국악을 하는 것 역시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세계'의 존재를 실감한 모든 이들이 한번은 겪게 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어준은 그 문제에 대한 태도와 축구 경기를 볼 때의 응원하는 자세, 한국팀의 승리를 당당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패배주의적인 태도 등을 잇는 어떤 '선'을 발견했다. 우리가 비겁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강팀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몸에 찌든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그렇다고, 승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버릇을 들이면 달라질 것이라고, 그는 믿었고 외쳤다. '이거 파시즘적인 구호 아냐?'라고 의심하지 말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다 보면 언젠가 대한민국도 이탈리아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을 터였다.

6.

2003년 9월의 김어준이 사회진화론적 뉘앙스를 지니는 논의를 전개해가며 문명사적 고찰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2002년 12월 '역사의 후퇴'를 막아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시 축구협회의 회장이었던 정몽준은 갑자기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올랐고, 그때까지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려가던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 노무현은 위기에 빠졌다.

탁월한 연설 능력, 열성적인 핵심 지지자 층의 헌신적인 선거운동, 독보적인 정치적 감각과 타이밍 등을 통해 그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선후보 경선을 승리로 이끌어내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문제는 갑자기 정몽준이 등장하고 나니, 노무현이 차지하고 있던 '깨끗하고 신선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많이 빛을 잃었고, 온 나라를 휩쓸고 있던 축구 열기가 그에게 전혀 이롭지 않게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화 - 6인 6색 인터뷰 특강>(진중권 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노무현은 다시 한 번 창의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정몽준 측에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제안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여론조사가 정치의 도구로 전면화되었고, 동시에 '본선 경쟁력'을 이유로 후보들이 단일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내었는데, 이것은 모두 이후 10년이 넘도록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노무현은 정치적 도박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으로서의 정치인에 관심이 많았던 김어준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그를 인터뷰한 전적이 있었다. 노무현이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잠재력과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했다는 것은 김어준의 자부심 중 큰 부분을 구성한다. 김어준에게 노무현의 당선은 역사의 가치가 현실화된 것이었고,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퇴보할 일은 없을 터였다. 월드컵에서 당당하게 이탈리아를 무찔렀고, 대선에서 당당하게 '수구꼴통'들을 이겼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강팀이라는 것을 아직도 못 믿는 패배주의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전파하는 일 뿐이다.

그것이 2003년 9월의 일이다. 하지만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인 2004년 3월 12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물론 2004년 5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탄핵의 역풍으로 그가 자신의 지지 세력과 함께 만든 열린우리당은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는 쾌거를 누리게 되지만, 아무튼 노무현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된 대통령이 되었다.

김어준뿐 아니라 다른 노무현 지지자들이 누리고 있던 '정신적 태평성대'는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 그들에 의해 막연하게 무리 지어진 '기득권', 혹은 '수구꼴통'이나 '조중동'으로 표상되는 거대한 악과의 투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터였다. 내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들은 '우리 대통령'을 공격한다. 내가 손을 놓고 있으면 '우리 대통령'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김어준의 머릿속에서 영원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7.

김어준은 축구가 전쟁의 대리물이라는 사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축구라는 대리전쟁에서 승리한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그의 언설 속에는, 마치 러일전쟁 당시 자국을 응원하고 승전보를 기뻐하던 일본 지식인의 그것과 비슷한 정조가 흐른다. 동시에 그에게 '우리'의 세상은 '저들', 즉 서양의 그것과는 달리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하지 못해 역사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자기 자신의 문화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도리어 부끄러워하는 경향을 띄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국가대표 축구팀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과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근대적이지도 않은 파편화된 개인들이 '한국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응원하고 목소리를 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응원의 대상이 반드시 축구에 한정되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대입하거나 적어도 몰입할 수 있는 '섹시'한 대상과, 그 대상에 몰입하는 것을 추하다고 혹은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흥을 깨지 않는 것이 관건일 뿐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김어준에게 바로 그런 대상이었다. 황우석 박사가 <사이언스>라는, 서양의 합리성과 이성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 과학 전문지의 1면을 장식하는 것 역시, 김어준에게는 과학이 아닌 '우리'의 승리였다.

황우석 박사팀이 연구원의 난자를 이용해 배아줄기세포 배양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MBC 시사교양프로그램 은 폭로했다. 2005년 11월 22일의 일이다. 이틀 뒤인 11월 24일 황우석 박사는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이 황우석 사태를 놓고 '둘로 갈라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황우석의 편을 들고 있었고, 과 <프레시안> 그리고 일부 지식인만이 황우석 팀의 연구 윤리 등을 지적했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는 김어준,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김어준은 <부산일보>에 '황우석 사태 관전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다. 11월 29일의 일이다. "황우석 사태, 생뚱맞게도, 월드컵이 오버랩 됐다"며 말문을 연 그는, "말하자면 은, 2002년 안정환의 이태리전 결승 헤딩골은 카메라 사각이어서 제대로 잡히지 않아 그렇지 사실은 안정환의 핸들링이었다는 것을 온갖 자료를 동원해 증명해내고 또 손에 닿은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안정환은 거짓말쟁이라는 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입증한 꼴" ('황우석 사태 관전기', <부산일보>, 2005년 11월 29일)이라는 독창적인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11명의 태극전사가 축구를 하는 것과, 10여 명의 연구진이 실험실에서 배아줄기세포 복제 연구를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단번에 지워진다. "모든 이의 자부심과 뿌듯함"을 위한 것이므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줄기세포복제 연구 자체가 날조된 것이 아니라 그저 '연구 윤리 위반'이 문제인 것으로 여겨졌던 11월 말, 김어준의 입장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팀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 논란이 일어났을 때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궤적을 그렸다. FIFA에서 새로 적용한 심판 규정 때문에 토티가 퇴장되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듯이, "충분히 자발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경우, 연구원 난자기증 가능하단 것이 배아복제 실험과정에서 우리가 경험적으로 획득한 실험윤리라고 국제과학계에 주장하는 꼴 좀 봤음 한다"고 김어준은 말했다.

전쟁의 대리물로서의 축구.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쟁. 하여 이제는 세상사 모든 일이 '감정이입'하고 '열광'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축구경기이자 곧 전쟁이 되어버렸다. 황우석의 연구 자체가 날조된 것임이 확인되어 본인의 패색이 짙어지자, 김어준은 <한겨레> 지면을 빌어 "황우석 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고 외친다. "대중의 감정이입을 멍청한 착각이고 위험한 파시즘이라고만 단정하는 게으르기까지 한 관성적 비판과, 영웅적 캐릭터로부터 위무 받고 대리만족 느끼던 대중을 간단히 애국주의로 괄호 치는, 그 야박하고 오만한 이성주의가 난 훨씬 더 재수 없다"('황우석 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 <한겨레>, 2005년 12월 29일)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황우석 사태에 대해 순순히 "닥칠" 수 없던 것은 정작 김어준 자신이었다. 2006년 2월 2일 <한겨레> 지면에 오른 '황우석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김어준은 황우석과 미즈메디와 공동연구자 새튼과 또 다른 과학 전문 학술지 <네이처> 등을 소재로 삼아 이런 저런 음모론과 가설을 마구 던져놓는다. 물론 그 중 어떤 주장에도 책임을 질 수는 없기에, "나중에 바보 되면 내 배는 내가 알아서 째리라. 하지만 난 이 사건이 도대체 이상하다. 나만 그런가"('황우석 미스터리', <한겨레>, 2006년 2월 2일)라고 흐지부지 결론을 내리지만,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스타일은 이후 김어준의 활동 방향을 그대로 예상할 수 있게끔 한다.

8.

박지성에게 '두 개의 심장'이 있듯이, 우리는 김어준에게 '두 개의 자아-캐릭터'가 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을 곱씹으며 만들어낸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가 한 편에 서있다면, 노무현의 당선과 2002년 한일월드컵, 노무현 탄핵, 황우석 사건, 이후 노무현의 검찰 조사와 자살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비극을 통해 확고해진 '음모론적 정치선동가'가 다른 한쪽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 양자 사이의 간극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개인주의자 김어준과 정치선동가 김어준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고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움직인다. 개인주의자 김어준에게 조직이란 개인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며 삶을 방해하는 조직이 있다면 개인은 그것을 버리거나 바꿔야 한다. 하지만 정치선동가 김어준에게, 우리가 어지간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조직인 대한민국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하고 자랑스럽지 않아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무언가다.

음모론적 정치선동가 김어준이 황우석에게 '올인'했다가 황우석의 연구 조작이 드러나면서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한동안 발언권을 잡지 못했던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 김어준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한겨레>에 연재된 상담 코너 '그까이거 아나토미'는 김어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개인주의적 감수성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고 시원시원하게 조언하는 '딴지 총수' 김어준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사이언스> 1면의 논문 게재를 안정환의 헤딩슛과 비교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다.

▲ 2011년 11월 30일 서울 특별공연을 연 '나는 꼼수다' 팀 ⓒ프레시안(최형락)

그렇게 대중적 입지를 회복한 김어준은 2011년 <닥치고 정치>(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를 출간하고 그해 연말부터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를 시작하면서 완전한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다. 임기 4년차에 접어들어 예전만큼 권력의 '말빨'이 먹히지 않게 된 대통령 이명박을 소재로 삼아, 정치선동가 김어준의 관심사인 온갖 음모론과 '시나리오'들이 가미되자, 특히 노무현의 자살 이후 정신적 공허감에 빠져있던 구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닥치고 정치>는 상당히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 1위를,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아이튠즈 전체 팟캐스트 중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개인주의자와 정치선동가의 묘한 동거는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닥치고 정치>를 펼쳐보자. 개인주의자 김어준은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시위의 배후로 노무현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놓고 "자기들 잘못을 정면으로 인정할 수 없는 초라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들이 가장 쉽게 매달리는 사고 패턴"이라며, "그런 자들은 일이 잘못되면 배후나 음모가 있어줘야"(<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 104쪽)한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책을 조금만 넘겨보면 이번에는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 사실이 어떻게 언론에 알려졌는가에 대해, 김어준 본인이 바로 그런 "배후나 음모"를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른은 이명박의 법무적 경호실장"인데, "그런 바른이 이지아의 법적 대리인"이고, "그 재판의 정확한 성격을 알았던 사람은 이지아 측 변호인단밖에 없지 않느냐는 추론이 가능"(같은 책, 108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지적 가카 시점"이라는 유명한 유행어가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다시피, <닥치고 정치>와 '나는 꼼수다'의 상당 부분은 바로 그런 음모론에 할애된다. 그렇다면 음모론적 사고방식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이 책에 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개인주의적 자아가 남겨놓은 다잉 메시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9.

<건투를 빈다>의 김어준은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이고, <닥치고 정치>의 김어준은 '음모론적 정치선동가'라고, 따라서 우리는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취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직전에 살펴본 것처럼 <닥치고 정치>에서 김어준의 개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희미하게 엿볼 수 있듯, <건투를 빈다>에는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아르마니 양복 밑에 감춰져 있는 'Be the Reds'티셔츠의 땀자국이 남아있다. 양자는 떼어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이다. 그 부분을 확인해보자.

나이 70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본 김어준은, 기력이 쇠하고 난 후 동네에서 작은 식당을 하나 하고 싶다며 본인의 "70대 리스트" 중 일부를 공개한다. 그는 "그저 열 받는 것과 흥분되는 것이 공유되는 '꽈'가 같은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수다 떨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영 관련 없이 늙어가고"(<건투를 빈다>, 83쪽) 싶은 것이다.

하여 그런 거점으로 난 식당 하나를 열 게다. 그래서 35년 전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을 이야기하면서 어제 일처럼 같이 열광하고 30년 전 2008년 광우병 사태를 이야기하며 오늘 일같이 함께 흥분하는 사람들, 노년엔 그렇게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놀고 싶다는 거다. (김어준, 같은 곳)

자, 지금의 김어준이 볼 때, 35년 후의 김어준이 여전히 열광할만한 소재가 있다면 무엇인가?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이다. 30살을 더 먹은 김어준이 여전히, 분노의 뉘앙스로 흥분할만한 일은 뭘까? 2008년 광우병 사태가 그것이다.

잠깐, 2008년 광우병 사태라고? 이 말은 좀 이상하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솔직하지 못한 표현인 것 같다. '꽈'가 같아서,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 박사 사건은 인간이 저지른 과오를 악마적 의도라고 단정하는 진영 논리로, 저지른 잘못에 합당한 징벌을 상회하는 결과적 폭력이었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그저 생래적 보수성을 타고났을 뿐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사회적 걸레로 용도 폐기하는 진보의 잔인한 비인간성을 목격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또 하나의 책이 만들어져야 하니까, 그건 그냥 내가 욕먹고 말게.(웃음) 다만, 국익 드립.(웃음) 난 황우석이 말한 국익에 전혀 관심 없어. 이해시키기 힘들다, 참. 끝.(웃음) (<닥치고 정치>, 299쪽)

반대로, 우리는 대체 "2008년 광우병 사태"의 그 무엇이 김어준을 그토록 흥분하게 하는지, 그런데 그 흥분을 대중들과 나눌 수 없어서 굳이 개인 클럽까지 열어가며 통하는 사람들에게만 속삭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광우병 사태의 악역은 이명박이요 선량한 희생자는 과 국민들이었다. 혹시 김어준은 광우병을 다루던 의 '취재 윤리'가, 마치 황우석 사태 때의 그것처럼,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대세에 휩쓸려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인가?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고 이명박을 감싸 안으며 ', 광우병, 씨바 왜 그따위로 검증하냐'고 따질 생각이었던 것인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김어준이 지금까지도 분노하는 사건은 황우석 사건이지 광우병 사태가 아니다. 겁먹은 개인을 대중과 미디어가 몰아가서 벼랑 끝으로 밀어낸 사건. 앞서 인용된 것처럼 김어준은 황우석 사태를 그렇게 이해한다. 우리나라를 위해 뛰는 선수가 핸들링을 했다고, 한국인들이 FIFA에 제소해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해버린 사건. 우리가 우리 편을 구석으로 몰아붙인 사건. 개인을 도구로 삼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진보의 잔인함을 드러낸 사건. 그리하여, 노무현의 탄핵 및 자살과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사건.

월드컵에서 황우석으로 이어지는 김어준의, 말하자면 '흑역사'를 그의 단행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각각에 대한 언급이 이러한 형태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것이이야말로 의미심장한 일이며,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에 들린 단행본을 열쇠삼아 인터넷을 검색하게 되었고, 김어준이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나머지 반쪽의 자아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가 살아온 시대의 밑그림을 얻게 된 것이다.

10.

김어준은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얼마 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주는 포스코에 입사했지만 6개월 만에 퇴사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그 일마저도 끊기게 되어 하릴없이 만든 것이 <딴지일보>였고, 이후 그는 지금까지 '<딴지일보> 총수'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대학 시절을 배낭여행으로 보내고도 국내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이 그것을 박차고 나와 "인생은 비정규직"이라고, 삶에 보직은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애초에 정규직이 될 가능성조차 너무도 희박해서 한 줌의 지푸라기를 쥐고자 그가 말하는바 '초식동물'의 삶을 감내하는 이들은, 부러움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난 다음부터, 기존에 정의되었던 표준적인 삶의 모델들이 하나씩 허물어졌다. 직장은 더 이상 직원들을 지속적으로 챙겨주지 않는다. 노동자는 쓰고 버리는 건전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고, 김어준이 유럽에서 보던 으리으리한 명품들은 이제 서울 시내 백화점만 가도 손쉽게 구경할 수 있다.

▲ 김어준. ⓒ프레시안(김하영)

김어준이 만들어낸 개인의 모델,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는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다. 삶이 통째로 비정규직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 칼날이 언제 내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개인주의자이고, 따라서 기존 정당과 노동운동의 조직 등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약하디 약한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감정이입과 열광뿐일 것이다.

정치선동가 김어준은 바로 그 결여를, '나는 대중들에게 열광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자아-캐릭터를 통해 채워 넣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마약 중독자이기도 한 마약 딜러처럼, 음모론적 정치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은 정치인을 연예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선별하여 대중들의 앞에 던져놓는다. 본래 서울대 조국 교수를 '띄우기' 위해 <닥치고 정치>를 기획했지만, 간을 보고 아니다 싶어서 문재인으로 갈아탄다는 그 모든 과정이 책에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치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은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다. 김어준이 선동하는, '닥치고' 문재인을 지지하자는 그 '정치'는, 경제적 굴레 앞에서 자발적으로 복속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재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그저 '박근혜는 아니지 않느냐', '공동체의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수준에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문재인을 닥치고 찍어봐야, 어차피 우리 모두의 인생이 비정규직이다. 대통령 바뀌었다고 해서 너와 나의 직장만 정규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삶의 조건이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대통령을 바꿀 수 있지만, 결국 인생은 알아서 사는 것이므로, 대통령은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없다. 대통령 뿐 아니라 모든 '정치'가 그렇다. 정치를 향한 참여와 열광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지난 10여 년간, 반대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실제의 삶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어만 갔다. 결국 2012년 대선은 박근혜와 문재인이 아니라 박정희와 노무현이 맞붙는 상징계의 싸움이 되어버렸고, '나는 꼼수다'의 열광은 세대별 인구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결과 앞에서 '멘붕'했던 김어준은, 마이크도 채 끄지 않은 채 스튜디오를 떠났고, 스스로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카페 가서 에스프레소 한잔 마시며 유럽·미국 뉴스 훑고, 알아둘 기사 있으면 그쪽 기자에게 연락해 뒷이야기 듣고, 관계 맺고 자료 조사하고, 구상"(<시사IN> 290호, 39쪽)했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음모론적 정치선동가가 패배를 곱씹는 사이,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페르소나가 팬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11.

1987년 민주화 투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모두 놓친 한 청년은 이 좁은 세상이 너무도 갑갑했다. 때마침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지고, 또 3저 호황의 결과로 국내에서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만한 여비를 손쉽게 마련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그 청년의 20대는 더욱 우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좋은 시점에 대학에 들어갔고, 사실상 '배낭여행 1세대'로서 개척 세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만끽했다.

<한겨레>에서 주관한 인터뷰 형식의 특강에서, 김어준은 늘 그렇듯 젊은이들에게 여행을 많이 다니고 연애를 하라고 조언했다. 문제는 그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방법이다. 김어준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다른 나라의 여행 여건과 편의시설 등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찍어주는 대신 여행사에서 자신에게 항공권을 제공하는 '딜'을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자기가 처한 상황 안에서 애를 써서 방법을 찾다 보면 방법은 무수히 많다고 생각"(<화 - 6인 6색 인터뷰 특강>(진중권 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89쪽)한다고,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방법을 찾아서,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구글 지도로 파리와 뉴욕과 런던의 뒷골목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구글 스트리트 뷰로 에베레스트와 킬리만자로까지 구경할 수 있게 된 지금, 이런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어준이 처음 여행을 다니던 그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세계'의 물꼬가 트였고, 가장 먼저 뛰쳐나간 사람들은 또 누구보다 빨리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세계'의 모습을 소개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낭만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아직까지는 세계가 덜 평평했던 그런 시대의 모험담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캐릭터가 김어준을 '쿨'한 존재로 만들어줬다면, 88올림픽을 즐길 수도 없었던 한 청년이 2002년 월드컵을 보며 개인에서 '우리'로 도약한 후 몇 번의 질곡을 거쳐 주조해낸 음모론적 정치선동가의 캐릭터는 그를 '핫'하게 만들었다. 얼핏 보기에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입장이 한 사람의 몸에, 모종의 담론적 굴절을 통해 안착해 있다.

그 둘을 떼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치선동가가 이끌어낼 수 있는 대중적 팬덤은 개인주의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정치선동가가 삐끗할 때면 언제나 개인주의자가 구원투수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자유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두 개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열광의 정치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파시즘의 이상향으로 서서히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김어준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부모에게 인생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서는 안 될 개인이면서, 동시에 국가대표 축구팀의 경기를 보고 함께 환호해야 마땅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늙은 몸을 인질로 삼아 자식들의 삶을 침범하는 부모와 싸우는 청년의 건투를 빌어주지만, 그 청년이 닥치고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김어준은 그를 '겁쟁이 유인원' 쯤으로 낙인찍을 것이다. 김어준이 말하고 실현하는, '인생은 비정규직'이기에 오는 자유는, 그의 자유를 동경하는 수십만 비정규직 청취자들의 비자발적 자유가 없다면 성립할 수조차 없다. 이 간극과 양면성이야말로, 늑대소년이 PC방에 앉아 이번 시즌 아르마니 수트를 검색하고 있어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그 자체다.

본 원고는 비정기 문화 잡지인 3호에 실렸던 '늑대소년은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보았나'를 수정·증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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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의 인물탐구]딴지그룹 총수 김어준… 쫄지 않는 사업가인가, 마초주의 입담꾼인가

<주간경향 2015.01.05>

 

불편한 진실’ 하나를 말해보자. 최근 카카오톡 감청 논란으로 사이버 망명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카톡 사용자가 이탈하고 대신 텔레그램이라는 외국 매신저가 각광을 받고 있다. 회사를 합병하고 멋지게 출범하는 다음카카오의 주가는 폭락하고, 급기야 사장이 법원의 감청영장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사이버 망명이 계속되면서 한국 IT산업의 위기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 사태는 9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도를 넘는 모독’”이라는 발언에서 시작됐다. 9월 18일 대검찰청에서 사이버 엄단 범정부 대책회의가 열렸고, 온라인 대피령으로 이어졌다.

이런 온라인 대피 분위기와 텔레그램을 처음 소개한 언론은 ‘불편하게도’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다. 김어준은 9월 26일 카톡 사용자 이탈을 감지하고 텔레그램의 안전성을 처음으로 소개했다.(이 팟캐스트 녹화는 24일 이뤄졌다. 실제 보도는 더 빨랐던 셈이다) 팟캐스트 방송 이후 무료앱 부문 111위에 불과했던 텔레그램은 일주일도 안 돼 1위로 뛰어올랐다. 한국에서만 무려 200만명이 넘는 사용자가 텔레그램으로 이동하는 사이버 엑소더스가 벌어졌다. 만약 기자가 ‘이달의 기자상’(기자협회에서 매달 수여하는 나름 가장 권위 있는 상) 심사위원이라면 당연히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 부문에 선정했을 것이다.



기존 언론 물먹인 텔레그램 최초 보도
여기서 ‘불편한’이라는 표현은 개인이 운영하는 조그만 팟캐스트가 기성 언론보다 앞서 특종을 했기 때문이다. 우수한 기자를 다수 보유하고, 해당 분야의 전담조직이 있으며, 수십년간 취재의 노하우를 가진 기성 언론이 물을 먹은 것(낙종)이다. 기성 언론 입장에서 당연히 불편하다. 기자 세계엔 나쁜 속성이 있다. 물을 먹으면, 물을 먹인 매체(김어준의 팟캐스트)를 비난하는 것이다. 낙종에 대한 책임회피다. 이런 책임회피가 상습화되면 기성 언론은 카르텔을 형성, 해당 매체를 집단적으로 ‘왕따’시킨다.

김어준에 대한 기성 언론의 대응에는 솔직히 그런 점이 있다. 김어준은 ‘나꼼수’(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처음 도입했으며, 정치·시사 프로그램으로 많은 특종을 했다. ‘나꼼수 신드롬’을 일으키며 애플의 팟캐스트 정치·시사 부문 다운로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기성 언론 입장에서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날 만도 했다. <중앙일보> 김진 정치전문 기자는 ‘사실관계 확인에 소홀하고 비평 대상이 편파적’이라는 이유로 기성 언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질투가 ‘저주’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은 김어준에 대해 ‘반지성과 마초주의’를 넘어 ‘양아치’에 비유하기도 했다.

언론노조서 주는 민주언론상 받아
사실 출연자 몇 명이 ‘떠드는’ 팟캐스트는 시사 토크쇼에 가깝다. 추론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너무 앞서 나가다가 오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무분별한 말을 쏟아내는 종편에 비하면 점잖은 축에 속한다. 팟캐스트도 사실을 전달하고 진실을 밝히는 측면에서 분명 언론이다. 이미 그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주는 민주언론상을 받았다. 게다가 요즘 언론 수용자들, 국민들은 프로그램을 다운받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매체를 찾아 듣고 본다. 이번 세월호 참사과정에서 다양한 팟캐스트, 인터넷 방송 등 이른바 ‘대안언론’이 각광을 받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더욱 불편한 진실은 팟캐스트를 듣는 사람들이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요즘 김어준의 팟캐스트는 보통 회당 200만명, 특별한 이슈가 있는 경우 500만명이 듣는다고 한다.(파파이스 측 주장) 이는 웬만한 일간신문 주간 발행부수를 능가하는 것이다.

김어준은 1968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공무원인 덕분에 2년간 미국물을 먹었다. 서울대학교를 세 번이나 낙방한 후 홍익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배낭여행을 시작, 졸업할 때까지 40여개국을 다녔다. 대학 졸업 후인 1995년 포스코 해외영업부에 근무하다가 8개월 만에 퇴사, 다시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그는 “여행이 자신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는 배낭여행과 인터넷을 결합한 여행상품을 개발한 여행사를 차려 돈을 잘 벌었다. 여행 중 만난 입양아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수완도 발휘했다. 하지만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사업이 망했다.

실업자 상태에서 심심풀이로 만든 것이 바로 개인 홈페이지 <딴지일보>다. <딴지일보>의 ‘딴지’는 ‘비주류 마이너리티’의 표현이다. 본인도 “패러디는 마이너리티의 언어”라고 말한다. 기성 언론에서 할 수 없는 제도권에 대한 풍자와 패러디, 또 풍부한 여행 경험이 먹혔다. 결정적 성공 계기는 2009년 모바일 시대에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플랫폼(소통기구)으로 ‘김어준의 뉴욕타임스’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확신을 얻은 그는 2011년 4월 ‘나는 꼼수다’를 통해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통찰력과 해학적 매력 vs 짜증과 비아냥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등 새누리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스스로 ‘닥치고 정치’라는 책을 통해 진보 집권 플랜을 제시하기도 했다. 무명의 문재인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야당 대통령 후보로 키우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의 비약적인 발전에 당연히 찬사와 비난이 쏟아졌다. 혹독한 실명 비평으로 유명한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통찰력과 해학적 매력을 기반으로 다수의 ‘신도’를 거느린 ‘교주형 멘토’”라고 높게 평가한다. <삼국지 인물전>을 쓴 김재욱은 김어준을 주역과 수학에 정통해 앞날을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는 관로에 비유해 ‘영원한 자유인 관로’라고 평가했다.

서울 대학로 벙커1 화장실 벽에 써놓은 구호는 김어준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혹독한 비난도 많다. 기성 언론의 비판 이유는 앞서 설명했다. 진보비평가로 통하는 진중권은 김어준에 대해 “리버럴과 우익마초의 측면이 공존한다”면서 “나꼼수와 극성팬은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했다”고 극언까지 했다. 하지만 김어준은 자멸하지 않고 훌륭히 사업을 하고 있다.

이념을 떠나 김어준을 가장 솔직하면서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그의 사무실 화장실에 써붙인 구호(사진)이다. 기자는 이 구호가 김어준의 진면목이라 생각한다. ‘맨땅에 헤딩하자’ ‘해보자’ ‘쫄지 말자’ ‘가능하다’는 구호는 그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 즉 도전정신과 모두 이어져 있다. 아마 80여개국 여행에서 쌓은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쪽팔리게 살지 말자’는 그의 인생관이다. 비겁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배웠다는 사람들은 ‘정명’ ‘지성’ 등의 수사로 치장하지만 그는 포장하지도, 돌아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분노하십시오’는 불의에 대항해 행동하라는 것이다. 김어준은 그 싸움을 ‘악착같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무실 화장실에서 발견한 이 구호는 나약하고 의타적인 지금 젊은이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는 아닐까. 이념을 떠나 ‘불의에 분노하는 것’은 사실 현대 시민이 갖춰야 할 기본적 소양이다.

그가 언론인인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인문학을 동경하는 자유로운 사고의 사업가이며 행동가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를 비판하는 기성 언론은 그의 ‘놀라운 성과’에 질투하는 것 아닐까.

“진보비평가의 비판에 관심없다”

팟캐스트를 들어보면 김어준은 굉장히 건방진 말투에 욕도 잘한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면 의외로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기자를 만났을 때 담배를 피우려다 뒤로 숨기는 예절바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벙커1에서 만났을 때 김어준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녹화를 해야 한다”면서 “내일 SNS로 인터뷰하자”고 제안했다. SNS로 인터뷰하기는 기자생활 27년 만에 처음이다. 인터뷰는 10월 16일 저녁 8시25분부터 10시 넘어서까지 2시간 정도 이뤄졌다.

딴지그룹에 대해 간략한 소개와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가.
“(딴지그룹은) 최초의 인터넷 미디어. (앞으로 비전은) 버티자, 끝까지.”
(김어준은 법인명 ‘딴지그룹’의 법적 대표이사다. 직원 20여명이 근무하는 딴지그룹은 인터넷 신문사 <딴지일보>, 팟캐스트를 하는 <딴지라디오>, 온라인 상거래 업체인 <딴지마켓>, 그리고 <딴지까페>와 문화사업·특강을 하는 <벙커1>이라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딴지그룹은 최근 3년 동안 직원 20여명의 월급을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딴지일보 김용석 편집장은 “직원들의 노고에 비해 월급을 많이 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적게 주고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번 텔레그램 특종처럼 그동안 김어준이 내세울 만한 특종 3개와 오보 3개를 든다면.
“나꼼수 시절 선관위 디도스, 내곡동, 십알단이 특종, 오보가 아니라 흡족하게 확증해내지 못했던 것은 많다.”

IT분야에 대해 취재력이 뛰어난 것 같은데, 전자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많은 제보자 덕분인가.
“관심, 취향, 제보, 정보, 추론, 직관, 조력.”(김어준은 여러 분야와 지역(해외 포함)에서 무보수로 기고하고 제보해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같은 멤버였던 김용민과 달리 기성 언론에 대해 맞대응(비난)은 안 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마땅히 이해해줘야 할 의무가 그들(기성 언론)에게 없다. 내 손을 떠난 메시지는 제 생명력만큼 생존할 것이고, 해서 억울한 게 없다.”

진중권 등 이른바 진보비평가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각자 제 몫을 하는 것이다. 당연해서 관심이 없다.”

감성진보를 표방하지만 텔레그램이나 세월호 진도VTS 교신기록 조작 등에서 보듯이 매우 과학적 논리를 추구한다. 정서가 논리를 이긴다는 지론과 배치되는 것 아닌가.
“논리는 툴(도구)이고, 정서는 OS이다.”(OS는 오퍼레이션 시스템의 약자로 컴퓨터 ‘운영체계’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가.
“없다. 인터뷰를 즐기지 않아서요. 꾸벅.”(하지만 김어준은 세월호 참사에서 에어포켓과 자신의 재판문제로 한동안 기자와 문자질을 계속했다. 그는 11월 10일 고법 결심공판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김어준 약력
1968년 출생. 홍익대 전자공학과 졸업. 포스코 해외영업부 근무. 여행사 운영. 딴지일보 창간(1998년). 딴지그룹 설립 총수 취임(2000년). 팟캐스트 김어준의 뉴욕타임즈(2009년). ‘나는 꼼수다’(2011년). 민주언론상 본상 수상(2011).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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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2011. 10.04

   신동호가 만난 사람 /  나는 꼼수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ㆍ“권력이 화를 내면 쪼잔하게 보이잖아요”

“매~우 바쁘시네요”라고 쏘아붙였다. 분풀이성 첫 질문이었다. 인터뷰하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는지는 여기서 굳이 밝힐 생각이 없다. 홍길동만큼이나 잡기 어려웠던 자칭 딴지그룹 총수 김어준을 만난 것은 원고 마감 시점인 지난 9월 23일 오후 1시 반쯤이었다. 파란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맨 털투성이 얼굴의 김 총수는 기자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양 너스레를 떨었다.


“예, 요새 지구 온난화 문제나 북극곰 문제라든가… 문제가 많아서… 아하하.”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함께 웃고 말았다. 더구나 인터넷 라디오방송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로 요즘 천정부지로 뜨고 있는 몸이니… ‘각하를 위한 헌정방송’이라는 콘셉트로 현 정부와 이명박 대통령을 풍자하는 나꼼수는 국내 팟캐스트 전체 프로그램 순위에서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등 쟁쟁한 지상파 프로그램을 제치고 1위를 달리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뉴스·정치 부문 프로그램 가운데 다운로드 1위에 올랐다. 용서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니다.(그렇다고 기회를 봐서 딴지의 주특기이자 지상과제인 똥침으로 한 번쯤 갚아주고 싶은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인터뷰에 들어갔다.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요즘 ‘안철수 현상’에 이어서 ‘나꼼수 신드롬’이….
“(말을 끊으며) 나꼼수 신드롬이 먼저였습니다.”

암튼 나꼼수 신드롬이라고 하죠. 작명의 귀재인 김 총수께서 이 현상을 직접 작명 좀 해보시죠. 예를 들면 안철수 현상을 ‘안풍’이라고도 하듯이 이걸 ‘꼼풍’이라고 한다든가….
“글쎄요. 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꼼풍이라고 하죠. 잘 만드셨네요.”
‘나는 꼼수다’와 같은 패러디 요소는 그가 진행하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과 칼럼의 제목에 배어 있다. ‘색(色)다른 상담소’ ‘뉴(New)욕(辱)타임스(Times)’ ‘김어준이 만난 여자’ ‘그까이꺼 아나토미’ 등. 10월 초 출간할 그의 책 제목 ‘닥치고 정치’도 그가 직접 붙인 것이다.

나꼼수 신드롬이 안풍을 능가할 기세인데요. 두 현상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가장 비슷한 점은 이런 것 같아요. 이명박 대통령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시대의 결핍 같은 게 있잖아요. 지극히 사사롭고, 이기적이고, 이익 중심이고, 그 안에 인간은 없고, 그리고 뭐 국가를 수익모델로 한다든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든지, 오로지 자기 것만 챙긴다든지, 심지어 가난하면 머리가 나쁜 것 아니냐고 한다든지…. 기타 굉장히 많은 태도를 드러내잖아요. 그 태도로 인해서 사람들이 받은 상처라든가 결핍이 있고, 거기서 오는 정치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이명박의 여집합, 이명박 아닌 것의 합집합, 혹은 그 시대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위로, 그런 게 나꼼수를 통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지점이죠. 그게 하나의 인물로 체화된 게 안철수고요.”

김 총수의 표정이 진지해지고 말도 빨라졌다. 그는 두 현상의 또 하나 비슷한 지점으로 메시지 유통구조 내지 프레임의 확산 채널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존의 구조는 보수가 완전히 장악한 상태잖아요. 방송3사와 조중동 등 오프라인은 물론이고 포털까지 포함하면 온라인에서도 자신의 의도대로 프레임이나 메시지를 유통시킬 상당한 힘을 갖고 있는 거죠. 저희는 여기에 일대 일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봤어요.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SNS, 이 셋이 따로 있지 않고 합쳐지면 새로운 메시지 유통구조가 탄생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러한 새로운 메시지 유통구조를 통해 기존의 구조가 장악하고 있던 시스템을 물리적으로는 아니지만 머릿속으로는 대체하는,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이 구체적인 플랜이라기보다 하나의 희망을 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가 동일한 현상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다른 점에 대해서는 그는 단순명쾌하게 설명했다.
“나꼼수가 출마할 것은 아니니까…(웃음) 그 점에서 차이가 있겠죠. 본질적으로는 유사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시각을 종합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안철수 현상은 탈정치화한 정치의 ‘진지한’ 버전이고, 나꼼수는 ‘웃기는’ 버전, 즉 엔터테인먼트화한 프로그램이라고 말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철수씨를 탈정치의 정치라고 비판하고 싶어 하는 ‘먹물’들이 많을 거라 봐요. 불편하겠죠. 안철수씨가 구체적으로 정치 지향이나 또는 이념에 기반을 해서 좌우가 분명히 구별되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기존의 해석법으로 보면 정치를 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보일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탈정치의 정치라고 그럴 듯하게 비판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건 학술대회에서나 할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탈정치화한 정치라는 것이 꼭 비판적인 용어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앞의 정치는 정치의 부정적인 요소를 뜻하고, 뒤의 정치는 긍정적인 요소를 말한다고 보는데요.
“비판적인 용어로 많이 쓰더라고요. 제가 들어본 용례는 거칠게 정리하면 정치를 모르는 일반 대중이 정서적으로 기존 정치로 인한 피로함 때문에 (안철수씨한테로) 몰려가서 정치가 아닌 것이 정치가 되었다는 정도로 이해되는 맥락의 비판이 많더라고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럼 어떻게 생각한다는 겁니까.
“그거야 말로 구식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오랜 기간 진보 진영에서 만들어내고 싶어 했던 개념이 계급이었습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이념적으로 훈련이 안 된 사람들에게 계급이 무엇인지 체감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분당에서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당선됐잖아요. 손 대표의 경쟁력과 민주당의 노력, 이명박 정권에 대한 거부감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분당 사람들이 자기가 부자가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에요. 이명박 시대에는 재벌 정도 아니면 부자 아니거든요. 종부세 대상인 2%의 분노를 대변하는 정권이고, 자기네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서민에 불과했다는 걸 안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계급을 만들어낸 것이에요. 거기다 대고 탈정치의 정치를 말하는 것은 굉장히 오래된 프레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정치와 생활이 직접 연계되어 있다, 내 일상의 스트레스의 근본이 정치다, 이렇게 말로 정확히 표현은 못해도 피부로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시대의 성과죠.(웃음)”

딴지일보가 뜬 배경에 IMF사태가 있었듯이 최근의 세계적 경제위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꼼수에 열광하게 한 게 아닐까요.
“세계적인 경제상황이나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저변에는 있겠지만 직접적으로는 이명박 정권이죠. 딴지일보나 나꼼수는 풍자의 언어고, 풍자나 패러디는 기본적으로 약자의 언어잖습니까. 대놓고 들이받기는 약하고, 쌓여 있는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으니까 권력을 제외한 모두를 웃게 만드는 것이, 그래서 풍자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역사적·시대적 화술이라는 거죠. 모두가 웃기 때문에 권력이 화를 내면 쪼잔하게 보이잖아요. 이게 통하는 시대인 거죠. 그만큼 심리적 억압이 심하다는 얘기예요. 딴지일보가 유행했던 시절과 나꼼수가 유행하는 시절의 공통점이 있는 거죠.”

나꼼수가 천정부지로 떠도 돈은 거의 안 되는 것으로 아는데요. 전 딴지일보 수뇌부를 자처하는 분이 법인계좌를 까고 후원을 호소한 일도 있잖습니까.
“재정이 크게 나아진 것은 없고요. 나꼼수 서버 비용이 생각보다 커요. 사람들이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돈이 들어가죠. 그 돈을 낼 수 있는 형편까지는 되고 있죠. 되고 있다기보다는 되어가고 있죠.”
김 총수의 공개적인 ‘절친’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다. 오 전 시장이 시장직을 걸면 ‘친구 먹겠다’고 나꼼수에서 공언한 데서 맺어진(?) 사이다.

절친 오 전 시장의 근황이 궁금하군요.
“글쎄 최근에 전셋집 구했다던데요.(웃음) 그분이 저에게 직접 연락하진 않으니까 제가 근황을 파악할 뿐이죠.”

‘역술지식인’(그가 MBC ‘나는 가수다’의 탈락자 등을 점쟁이처럼 맞혀서 얻은 별명이다)으로서 그때 실수를 한 겁니까, 아니면 미리 알고 덫을 놓은 겁니까.
“나름의 전략이었는데요, 저는 맨 처음부터 사퇴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사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다만 판단을 흐리게 하고, 스탠스를 꼬이게 하고, 그 행보가 대서사시가 되어야 하는데 개그가 되어버리게 하는 데는 일조를 한 셈이죠.”

나꼼수의 클로징 멘트가 ‘우리를 건들지 마라’는 것인데,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서입니까.
“예를 들어서 딴지일보를 해킹한다든가… 2000만원 주고 청부해킹했다는 제보를 받았어요. 오래 전부터 전화나 문자메시지가 체크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고요. 그런 게 당연히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대처방안을 찾고 있을 터인데, 우리는 선제공격을 제일 좋아합니다.(웃음)”

자칭 ‘차기 국정원장 후보’라고 말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하하.(크게 웃음) 그건 농담이고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만났을 때 ‘대통령 되시면 국정원장이나 검찰총장 달라’고… 요즘 아무나 하는 것 같으니까…(웃음) 나도 못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제가 무슨 국정원장을 하겠습니까.”

김어준의 직업은 김어준이라고 했는데, 대표 직업이 뭡니까. 언론인, 방송인, 벤처기업인, 작가, 정치평론가, 자칭 ‘야매 상담가’라고도 하고….
“전 어릴 때부터 꿈을 말하라고 하면 당황했어요. 다들 직업을 얘기하는데 저는 직업이 떠오르지 않았죠. 그때는 제가 이상한 건 줄 알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여러 가지 업종을 했는데 인생 전체로 보면 그때그때 하는 업이고 나는 나로 살다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직업을 물어보면 김어준이다, 내가 나로 사는 게 직업이지 뭐, 그런 거죠.”

자칭 ‘하반기 베스트셀러가 될 예정’이라는 저서 ‘닥치고 정치’, 이건 무슨 뜻입니까.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을 쿨한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내 일상과 정치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지금은 그게 아니다. 지금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 앞에 했던 다른 잡소리 그만두고 이 시점에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닥치고 정치’라고 한 겁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사실 그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나꼼수 시작할 시점이었는데요. 조국 서울대 교수의 <진보집권플랜>을 읽고 원래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진보와 보수가 무엇인가를 이념적 용어나 학술 용어에 해당되는 건 다 빼고 일상의 용어로 말한 거예요.”

딴지체로 쓴 겁니까.
“그건 아니고 일상의 언어와 인터뷰 형식을 취했어요. 진보와 보수가 뭔지 이야기해보자는 것인데, 구체적인 인물에 대해서도 두루뭉술하지 않고 직설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풀었습니다. ‘아주’ 재밌습니다. 사서 보세요.(웃음)”

진보는 심각해서 망하는데 김 총수는 ‘감성진보’라고들 하죠.
“우파는 이익에 민감하고 좌파는 논리에 집착하죠. 논리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사람은 논리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논리로만 세상의 균형이 맞춰지지도 않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정서를 논리가 이기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점에서 진보진영에 부족한 게 감수성이고 나꼼수가 그걸 메우려고 하는 것이죠. 책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김 총수께서 갈수록 진지해져간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렇진 않습니다. 딴지일보 시절에도 패러디도 있었지만 이 정도 수준의 진지함도 있었습니다.”

글을 보면 굉장히 마초 같은데 말은 참 점잖게 하는군요.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요. 제가 상담할 때는 굉장히 직설적으로 단순화합니다. 나꼼수는 그에 맞는 언어로 하는 것이고요. 지적인 게 필요하면 굉장히 지적으로 대합니다. 형식에 맞는 화술을 택하는 거죠. 하지만 그 안의 골자는 똑같습니다.”때로는 명랑 모드로, 때로는 엄숙 모드로 풀어가는 얘기를 듣는 동안 가벼운 역습의 똥침이라도 날릴 기회를 그만 놓쳤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그가 말했다.

“저 가야 될 것 같은데요. 이만하면 장사 될 것 같지 않습니까.(웃음) 아, 그리고 이 말은 꼭 넣어주세요. 김어준은 잘생겼다!”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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