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루∙ 동옥저∙ 동예의 사회

읍루∙ 동옥저∙ 동예는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가장 동쪽에 남북으로 서로 접해 있었다. 읍루는 오늘날의 연해주 지역을, 동옥저는 함경도 지역을, 동예는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을 차지했다. 읍루는 옛 숙신肅愼의 나라로 숙신족이 동쪽으로 이동해 세운 나라였다. 고조선 시대에 요서지역에 있을 때 숙신으로 불리웠다.
이들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일찍 멸망했기 때문에, 건국시기와 통치자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후한서 동이열전>이나 <삼국지 동이열전>에 “전傳”으로 실렸다는 것은 고구려∙ 한韓∙ 가야 등과 같이 왕이 통치했던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건국연대가 분명한 나라들은 동부여(BC 59)∙ 신라(BC 57)∙ 고구려(BC 59)인데, 아마 이들 나라도 이 시기에 독립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이들 나라가 아직 국가수준에 진입하지 못한 낙후된 사회로 보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읍루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었고, 읍락邑落 에는 각 대인大人이 있었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읍루전>
<후한서 동이전>에 기록된 내용도 이와 대동소이 하다. 그러나 부여∙ 고구려∙ 한韓은 이미 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아래 기록을 보더라도 이들 나라들은 신석기시대 같은 낮은 사회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동예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하는데, 언어∙ 법령∙ 풍속이 대체로 비슷했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예전>
(동옥저는) 음식∙ 주거∙ 의복∙ 예절이 고구려와 흡사하다. <삼국지 권30 동이전 동옥저전>
읍루의 사신이 위魏나라(BC 403~225)에 왔는데, 위 황제가 읍루왕 녹祿 에게 닭∙ 비단∙ 모직물∙ 솜 등을 하사했다. <진서 권97 동이열전 숙신씨전>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 (동)예왕의 인장을 주워 그것을 바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 차차웅>조
동예인들의 모직물 생산, 법령 등이 고구려와 대등하였고, 읍루왕, 동예왕이라 기록된 것을 볼 때, 읍루∙ 동옥저∙ 동예도 왕이 통치한 국가단계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뒤를 이은 이들 나라들이 국가가 아닌 연맹체였다면 이전보다 퇴보한 사회였다는 것으로, 역사발전 이론상 맞지 않을 뿐더러, <후한서>∙ <삼국지> 등 문헌에도 독립된 항목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읍루의 강역
읍루는 오늘날 연해주, 아무르강 하류, 흑룡강 하류 지역 지역에 BC 1~3세기 경부터 AD 4세기까지 존재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조에
읍루挹婁는 부여夫餘 동북 천 여리에 있다. 대해大海에 가깝고 남쪽은 북옥저에 접하며 그 북쪽 끝은 알지 못한다. 그 땅은 산이 많이 험하고, 그 사람들의 형상은 부여와 같고 언어는 부여·구려句麗와 같지 않다. 오곡, 소, 말 그리고 마포麻布가 있다.
사람들은 매우 용감하고 힘 있다. 대군장이 없으며 읍락, 각각에 대인이 있다. 산림 가운데 거주하는데 항상 혈거穴居한다. 큰 집의 깊이는 9계단으로 매우 좋아한다. 땅의 추위가 부여보다 심하다. 그 습속習俗은 돼지 사육을 좋아해 고기는 먹고 가죽은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많이 여러 번 나누어 칠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이 되면 옷 통을 벗고 알몸이 되어 한 자의 포布로 그 앞뒤를 숨겨 형체를 가린다. 사람들은 깨끗하지 않아 중앙에 변소를 만들고, 사람들이 그 가까이에 살며 둘러싼다.
그 활 길이가 4척으로 힘이 쇠뇌와 같고, 화살은 고楛를 사용하며 길이가 1척 여덟 촌인데,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드니 옛 숙신씨의 나라이다. 사수들이 뛰어나 사람을 쏘면 모두 명중하며, 화살에 독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을 맞추면 모두 죽는다.
적옥, 좋은 초貂가 나온다. 오늘날 읍루초挹婁貂라는 명칭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한漢 이래 부여에 신속했다.
부여가 그 조부를 무겁게 해 받아내는 까닭에 황초黃初 연간(AD 220-226)에 배반했다. 부여가 여러 번 정벌했는데, 그 무리들은 비록 수는 적지만 전부 험한 산에 있고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해 끝내 평정할 수 없었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도적질을 하니 이웃 나라의 근심이다. 동이東夷는 마시고 먹는 법식에 있어서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는데 읍루만이 법과 풍속이 없으니 최고로 법강과 풍기가 없다.
숙신씨肅愼氏, 일명 읍루挹婁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고, 부여에서 대략 60일 걸어간다. 동쪽 끝은 대해大海이고 서쪽은 구만한국寇漫汗國에 접하며 북쪽 끝은 약수弱水이다. 그 땅 경계는 동서남북 수천리다. 깊은 산속의 험한 골짜기에 거주하고 그 길은 지세가 높고 가파르며 험하여 차마車馬가 통하지 않는다. 여름이 되면 높은 곳에 살고 겨울이 되면 굴속에서 산다.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서 군장이 된다. 글자와 먹이 없기에 언어로 약속한다. 말馬이 있으나 타지 않고, 단지 재산으로 여기는 것 같다. 소와 양이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는 먹고 그 가죽은 입으며, 털을 모아 쌓아둔 것으로 포布를 만든다.…땅에 소금과 철이 없어서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고 씻어서 즙과 같이 먹는다.
모두 변발이라는 퐁속을 따르며, 베로 작은 치마를 만드는데 지름 한 자여로 앞뒤를 가린다. 장가가 아내를 맞을 때 남자는 여자 머리에 털 깃을 꽂고 여자는 화답하는 경우에는 가지고 돌아간 연후 예를 다하여 부른다. 부인은 정숙하나 처녀는 음란하고, 젊음을 귀히 여기고 늙음을 천하게 여긴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 즉시 들판에 매장한다. 나무를 구해 작은 나무 쇠뇌를 만들어 돼지를 죽이고 그 위에 쌓아 사자의 양식으로 한다. 성품이 흉하면서 사납고 근심과 슬픔이 없는 것을 서로 좋아하기 때문에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곡을 하지 않고 곡하는 자는 씩씩하지 않다고 손가락질한다. 도둑질은 어른아이 상관없이 모두 죽음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비록 들에다 두어도 서로 범하지 않는다. 석노石砮, 가죽과 뼈로 된 갑옷, 3척 5촌의 단궁檀弓, 길이 1척 여덟 치 정도의 고시楛矢가 있다. 그 나라 동북에 돌이 나오는 산이 있고 그 날카로움은 철을 꿰뚫는데 얻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빈다.
주周무왕 대에 그 호시와 석노를 바치고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도울 때 이르러 다시 사신을 보내 들어와 하례하고 이후 천여년이 지나 진秦과 한漢이 성했어도 이르는 일이 없었다. 문제文帝가 상相이 되었던 위魏 경원景元 말에 와서 호시, 석노, 활, 갑옷과 초피貂皮모음을 받쳤다. 위제魏帝는 조를 내려 상부相府에 보내고 그 왕 욕계褥雞에게 비단, 융단, 솜 그리고 견직물을 하사했다.
무제武帝 원강元康 초에 이르러 다시 와 공헌했다. 원제元帝 중흥기에 다시 강좌江左에 도달해 그 석노를 바쳤다.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 석계룡石季龍에게 공물을 진상했다. 4년 만에 비로소 도착했다. 계룡이 묻자 답하기를 “소와 말이 서남을 향해 자는 걸 3년간 매번 보고 대국의 소재를 알았기 때문에 왔다.” 하였다. <삼국지 위서 30 동이전 읍루전>
(121년) 겨울 10월, (동부여) 왕이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 중 곤궁한 자를 찾아가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려주었.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잔치를 열어 위로하고 보냈다. <삼국사기 권 15 고구려본기 태조>
(AD 459년)11월 기사己巳, 고려국高麗國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숙신국이 중역을 거쳐 고시楛矢(탱자나무 등으로 만든 활)와 석노石砮(돌화살촉)를 바쳤다. 서역이 무마舞馬를 바쳤다. <원사元史 권6 본기 세조>
이로 보아 숙신은, 121년 경에는 동부여의 신하국이었으며, 233년 경에는 고구려가 숙신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초피 1000매를 조공한 것으로 보아 동부여로부터 신속臣屬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80년에 숙신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단로성檀盧城이 함락되어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었다. 이후로 고구려에 완전 병합되지는 않았고, 물길-말갈-여진-만주족으로 명칭이 변화하며 청나라까지 이어졌다.

읍루의 사회와 문화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로, 오늘날 연해주 지역으로, 북쪽은 아므르강, 남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인과 흡사했지만 언어는 동부여나 고구려 사람과 달랐다. 읍루를 건국한 숙신족은 원래 고조선 민족이었지만 주민 다수는 연해주 토착인 들이었으므로 언어가 달랐을 것이다. <삼국지 권30 동이전 읍루전>
풍속도 다른 점이 많았다. 모두가 편발編髮(머리를 땋음)을 하고, 결혼 신청을 할 땐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꼽아 주고 승낙을 하면 그것을 뽑아 집으로 와 예를 갖추어 신부를 맞이하고, 부인들은 정숙한데 처녀들은 그렇지 않은 것, 건장한 자를 귀히 여기고 노인은 천하게 여기고,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곡을 하지 않는 것, 사람이 죽으면 들에다 장사지내는데 나무관 위에 돼지를 잡아 올려놓고 죽은 자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 등이다. <진서 숙신씨전>
읍루 지역은 매우 추워서 굴 속에서 살았는데, 깊은 굴일수록 귀하게 여겨 대가大加들은 아홉계단을 내려가는 깊은 굴 속에 거주했다. 법도 엄격하여 도둑질한 자는 경중에 관계없이 모두 죽였기 때문에 비록 들에다 두어도 훔쳐가는 사람이 없었다. <진서 숙신씨전>. 신분은 왕-대가-대인-하호의 계급이 있었다.
오곡과 마포麻布를 생산하고 소∙ 말∙ 돼지의 가축을 길렀으며, 종족 수는 적지만 매우 용감하고 힘이 세며 험한 산 속에서 살았다. 활을 잘 쏘았는데 사람의 눈을 쏘아 꿰뚫을 수 있었다. 활의 길이는 넉 자고 화살대는 호나무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한 자 여덟 치였다. 화살촉은 청석靑石으로 만들고 독약을 발라, 사람이 맞으면 즉사했다. 배를 잘 타고 노략질을 좋아했으므로 이웃 나라들이 꺼리고 근심거리로 여겼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읍루전>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두껍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알몸에다 한 자정도의 베조각으로 앞뒤만 가리고 다닌다. 그 사람들은 더러운 냄새가 나고 불결하다… 법도나 풍습이 (동이 가운데) 가장 기강이 없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읍루전>
읍루의 법도나 기강이 다른 나라보다 낮았던 것은 단순히 미개했다기 보다는 혹독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생활의 유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읍루의 멸망시기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263년에 읍루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과 읍루의 후신인 물길勿吉의 기록이 471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이에 읍루와 물길의 왕조교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물길국勿吉國<삼국지 위서 권100 물길> 물길勿吉은 5~6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 북쪽 지역에서 활동한 세력으로, 숙신肅愼, 읍루挹婁의 후예, 말갈靺鞨의 전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 계승 관계는 분명치 않다. 물길국勿吉國이 여러 물길 부족들의 통합체인지 아니면 그중 하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본전에서 “國有大水 … 名速末水”라고 했으므로, 물길 7부(粟末, 伯咄, 安車骨, 拂涅, 號室, 黑水, 白山) 중의 粟末部를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 粟末部는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어 충돌이 잦았는데(『北史』 “與高麗接 … 每寇高麗”), 이는 본전에서 전하는 乙力支의 기술과도 일치한다. 물길국은 고구려 북쪽에 있다. 옛 숙신국肅愼國이다. 읍락마다 각각 장長이 있으며, 통일되어 있지 않다. 그 사람들은 사납고 굳세며 거칠어 동이東夷 중 가장 강하다. 언어는 혼자 다르다. 두막루豆莫婁 등의 나라들을 항상 업긴여기니 여러 나라들이 근심거리로 여긴다. 낙양洛(陽)에서 5천리 거리다. 화룡(성)和龍에서 북으로 2백여리에 선옥산善玉山이 있고, 산에서 북으로 13일을 가면 기려산祁黎山에 이른다. 또 북으로 7일을 가면 여락괴수如洛瓌水에 이르는데, 강의 넓이가 약 1리남짓이다. 또 북으로 15일을 가면 태로수太魯水에 이르고 다시 동북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도달한다. 그 나라에 큰 강이 있는데 약 3리로 넓고 크며 이름은 속말수速末水이다. 그 부류는 모두 7종이 있다. 첫째, 속말부라고 부르는데, 고구려와 인접한다. 정예병사가 수천이고 날쌔고 용맹하여 항상 고구려를 노략질한다. 둘째, 백돌부는 속말[수]의 북쪽에 있다. 정예병사가 7,000이다. 셋째, 안거골부는 백돌[부]의 동북쪽에 있다. 넷째, 불열부는 백돌[부]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 호실부는 불열[부]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 흑수부는 안거골[부]의 북서쪽에 있다. 일곱째, 백산부는 속말[부]의 동남쪽에 있다. (안거골부 부터 백산부까지) 정예병사는 모두 3,000을 넘지 않는데, 흑수부가 가장 굳세다 거주지는 산과 강에 의지하는 곳이 많다. 거수를 대막불만돌이라고 한다. 나라 남쪽에는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 말로는 태황太皇이다. 풍속에 그 산(종태산, 도태산)을 매우 경외하여, 사람이 산 위에서 소변과 대변을 보지 못하고, 산을 지나가는 자는 분뇨를 담아서 간다. 산에는 곰·큰곰·표범·이리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 또한 감히 죽이지 않는다. 지대가 낮고 습하며 성을 쌓고 혈거穴居한다. 집의 모양이 무덤과 같고 위에 출입구가 있어 사다리로 출입한다. 그 나라에는 소가 없고 車馬는 있다. 수레는 사람이 밀고 다니며, 두 사람이 짝지어서 밭을 간다. 땅에는 조·보리·검은 기장이 많고, 채소는 아욱이 있다. 물에는 소금기가 있고, 나무껍질 위에서 소금이 나오며, 또한 소금기가 있는 못이 있다. 그 나라의 가축으로 돼지가 많으나 양은 없다. 쌀을 씹어서 술을 빚는데, 그것을 마시면 모두 취한다. 혼인하면, 부인은 베로 된 치마를 입고, 남자는 돼지가죽 옷을 입으며, 머리에는 용맹스러운 표범의 꼬리를 꽂는다. 풍속에 오줌으로 손과 얼굴을 씻으니, 모든 동이 중 가장 불결하다. 혼인 첫날밤에는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여자의 유방을 잡았다가 놓는다. 그 아내가 외도하여 남이 그 남편에게 알리면, 남편은 곧 아내를 죽이고는 후회하여 반드시 알린 사람을 죽인다. 이 때문에 간음한 일은 끝내 발설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활을 잘 쏘아, 활사냥을 생업으로 삼는다. 각궁은 길이가 3자이고, 화살은 길이가 1자 2치인데, 매년 7~8월에 독약을 만들어 화살에 바르는데, 짐승과 새를 쏘아 적중하면 즉사한다. 끓인 독약의 기운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 부모가 봄이나 여름에 죽으면 곧바로 매장하고, 무덤 위에 지붕을 지어 비에 젖지 않도록 한다. 만약 가을이나 겨울에 죽으면 그 시신을 이용해 담비를 잡는데, 담비가 그(시신) 살을 먹다가 많이 잡힌다. 항상 7, 8월에 독약을 만들어 화살촉에 바르고 짐승을 쏘는데 맞는 것은 바로 죽는다. 약을 다릴 때의 독기 또한 능히 사람을 죽인다. 을력지乙力支는 “처음 그 나라에서 출발해 배를 타서 난하難河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 태하太河에 이르러 배를 물에 가라앉히고 남쪽으로 출발해 육로로 가서 락고수洛孤水를 건너 계단契丹 서계를 따라서 화룡에 도착했다.”한다. <삼국지 위서 권 100 물길> |
동옥저의 사회와 문화

오늘날 함경북도 끝인 두만강에서 함경남도에 이르는 동부해안을 따라 있었던 동옥저는 BC 1세기경 건국되어, 그 일부인 북옥저가 BC 28년에, 동옥저 전체가 56년에 고구려에 병합되어, 불과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 존재했다.
동옥저의 영토는 남북으로는 길어 사방 5백리쯤 되었고, 동서로는 좁은 형태로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었다. 토질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자라고 물고기∙ 소금∙ 해초류가 풍부했다. 소와 말은 많지 않았다.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전>
사회 신분계급은 왕-대가-삼로-장수-하호로 구성되었으며 신분은 상속되었다.
동옥저의 가구수는 5천호쯤 되었으며 왕-대가-삼로-장수-하호의 신분구조가 명확했고 세습되었다. 동옥저 사람들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했는데 창을 잘 다루고 보전步戰에 능했다. 풍속∙ 언어∙ 음식∙ 의복 등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동옥저전>
토질이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후한서 권85 동이열전 동옥저전>
민며느리제도가 있었는데, 여자의 나이 10세 이전에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집에서 데려다가 장성하면 다시 친정집에 보내 여자 집에 돈을 지불한 뒤 다시 집에 오게 하여 아내로 삼았다. 사람이 죽으면 목관에 넣어 모두 썩게 한 뒤 유골만 추려 다시 온 집안 사람들의 유골이 있는 하나의 곽 속에 안치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목상을 만들어 솥에 쌀을 담아 문 곁에 매달아 놓았다.
동옥저 사람들은 북쪽 읍루의 노략질이 심해 여름철에는 깊은 동굴 속에서 살고, 겨울철에야 얼음이 얼어 뱃길이 막히면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서 살았다.
동옥저는 영토가 좁고 인구도 적은 나라로서 부여 고구려 동예 등 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그 사이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병합된 뒤에는 담비∙ 무명베∙ 물고기∙ 소금 등과 여러 해산물들을 조세로 징수하며 천리나 되는 먼 곳을 져 날라야 했고, 동옥저의 미인들을 고구려에 보내도록 하여 첩이나 종으로 삼았으며, 고구려 하호보다 낮은 노예 수준의 노복奴僕으로 힘들게 살아야 했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동옥저전>
동예의 사회와 문화
동예는 오늘날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으로, 북쪽은 고구려∙ 동옥저와, 남쪽은 진한, 동쪽은 바다, 서쪽은 최씨낙랑국과 접해 있었다. 동예는 읍루∙ 동옥저와 마찬가지로 BC 1세기 후반에 건국되어 245년 이전에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읍루나 옥저보다는 좀 더 오래 존속했지만 단명한 왕조였다. 동예 지역은 평야가 부족하고 산이 많아 사냥∙ 고기잡이와 농경생활을 하며 살았다.
삼을 심고 누에를 기르고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점쳤다. 표범을 잡고 과하마果下馬(조랑말)를 길렀으며, 바다에서 반어斑魚(민어)를 잡아 사신이 오면 언제든지 그것들을 바치고, 한나라에 수출도 했다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예전>
동예의 가구수는 2만호였고 왕-후-군-읍-삼로-읍군-후의 신분계급이 있었다. 이들은 예로부터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했는데 성품이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없고 염치가 있어서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 법령,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았고 의복은 다소 달라른 점이 있었다<삼국지 권30 동이전 예전>
동예의 법은 엄격하여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했고, 각 마을의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면 노예∙ 소∙ 말 등을 부과하게 했고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옷차림은 목둘레를 둥글게 만들고 넓은 옷에 은화를 옷깃에 꿰메어 장식했다.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지 않았으며, 꺼리고 금하는 것이 많아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집을 버리고 옮겨 갔다. 해마다 10월이면 무천행사를 열어 남녀노소 신분을 막론하고 음주가무를 즐기고 하느님께 제사지냈다. 또한 호랑이도 신으로 섬겨 제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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