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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한국 고대 열국사(5)_한韓의 건국과 강역의 변천

by 싯딤 2026. 5. 6.

한韓의 건국과 강역의 변천

 

 

 

 

 

 

 한韓은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고조선 시대부터 청천강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조선이 붕괴되자 독립국이 되었는데 이후 오래지 않아 한의 거수국이었던 신라 백제 가야가 분열되어 독립해 나가면서 영토가 축소되었다.

 한을 삼한三韓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에 기록된 한의 명칭을 보자

 

 진한의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중국) 나라의 망명인인데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더니 마한이 동쪽경계의 땅을 나누어 그들에게 주었다고 했다

 

 진나라 망명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한국韓國이라 부르고 삼한三韓이라 칭하지 않은 것이다. 한을 삼한이라 부르면 한 지역에 3개의 독립된 나라가 각각 있어 분열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제日帝의 의도였다.

 

 한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삼국지 동이전 한전>(기자)조선의 왕, 준이 한 지역으로 망명한 뒤 그 곳에서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다가 그 후손이 끊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마한> 조에도 ‘(삼국지 위서인) <위지>에 이르기를 제후 준이 외람되게 왕이라 칭하다가 위만의 공격을 받아 정권을 빼앗기고 궁인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한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를 한왕이라 했으나 그 후손이 끊기어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이나 마한은 위만조선 이전인 BC 190년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한의 영토는 원래 북쪽 경계가 청천강 유역이었지만, 위만조선이 건국되고 고조선이 붕괴되자 한의 북쪽에 요서지역 주민들이 이주해 와 최씨낙랑국을 세워 한의 강역이 대동강 이남으로 줄어들었다. 그 후 최씨낙랑국 남쪽인 황해도 지역에 대방국이 들어서자 한은 다시 임진강 유역까지 줄어들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로 한계 지어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접하여 사방 4천리가량 되었다 <삼국지 권30 동이전 한전>

 한에는 마한 진한 변진이 있고, 그 안에 모두 78개의 거수국이 있었다.<후한서 동이열전 한전>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기록된 마한 진한 변진의 78개국명을 보면,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고, 남쪽은 왜와 접하니, 방方이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한다. 그 백성은 토착(하여 종식種植(씨를 뿌리고 식물을 심음)한다. 잠상蠶桑(양잠)을 알고, 면포綿布(무명)를 만든다. 각각 장수가 있고,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한다. 산해山海간에 흩어져 살며 성곽이 없다.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고국臣濆沽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점리비국占離卑國, 신흔국臣釁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辟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점랍국占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원지국爰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 등 모두 50여 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이며 총 10여만 호이다.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리며, 신지臣智 혹은 가우加優라고 부른다. 신하를 부를 때 운견지보안사축지분신리아불례구사진지렴지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라고 호칭한다.   그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한의)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서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고라 하고 도적을 관라 하고…,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한辰韓은 처음에는 6국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뉘어졌다.

 

 변진弁辰 또한 12개국이 있고,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는데 각각 거수(우두머리)가 있다. 큰 자는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 다음은 번예樊濊, 다음은 살해殺奚,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진한과 변진 24개국은) 이저국已柢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근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해국冉奚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악노국弁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변군미국弁軍彌國,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여담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사로국斯盧國, 우중국優中國이다.

 

 마한에 50개국, 진한에 12개국, 변진에 12개의 거수국이 있었다. 그 중에는 사로국斯盧國이 있는데 신라는 원래 한의 거수국이었다가 BC 57년 건국했다. 백제 가야도 50개국의 하나였다. 이들 거수국들이 독립국으로 건국하면서 한의 영역은 더 줄어들게 되었는데 백제신라 가야의 건국과정을 보자.

 백제는 서한西漢 성제成帝 홍가鸿嘉 3(BC 18)에 건국되었는데, 온조왕은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도읍을 하남위례성으로 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에 한에는 모두 78개의 거수국이 있는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도 마한지역에 있었던 한의 50여개국 중 백제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는 원래 한의 거수국이었다가 독립한 것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은 BC 18년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북한산)에 이르러 도읍을 하남위례성으로 정하고,(온조왕 14년 조에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때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한은 동북쪽 땅 100리를 떼어 주어 거주하도록 했다. (온조왕 24년 조)천도할 것을 고했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24>

 

 백제의 건국은 한의 양해 하에 북부 변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라는 BC 57년 진한의 여섯 부가 중심이 되어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고 경주에서 건국했다.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는 진한과 변한 지역에 있었던 24개 거수국의 이름이 있는데 그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다. 한의 거수국이었던 사로(신라)가 독립국이 됨에 따라 한의 동부 영토가 축소된 것이다.

 

 (32) 2월에 (신라의) 호공瓠公을 마한에 보내 수빙修聘했는데 마한왕이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을 수가 있느냐고 했다. 호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 왕비)이 일어나면서부터 인사가 바로 잡히고 창고가 가득찼으며, … 우리 왕은 겸손하여 아래 신하를 보내 인사를 치루어 이는 예의로서 지나칠 정도라 말할 수 있는데, 도리어 대왕이 진노하여 군사로서 나를 겁주니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했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38>

 

 신라 사신 호공의 말투나 태도는 진왕을 무시하고 이미 통치받을 의사가 없는 독립을 선포하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가야도 한의 거수국으로 출발했는데, 42년 한의 동남부 지역인 경남 김해에서 건국하였다. 가야는 6가야로 이루어졌는데 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중심이었다. 가야의 경계는 낙동강 가야산 지리산을 경계로 한 경남지역으로 변한 지역이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 가락국기,> <삼국지 권30 동이전 한전>

 <삼국지 동이전 한전>의 기록에 변한과 진한 지역에 있었던 한의 24개 거수국의 이름가운데 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이 보인다. 변진 구야국은 변진(변한)의 구야국으로서 한의 거수국으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거수국들이 독립하면서 한의 영토는 줄어들고, 그 영토 변화는 한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의 멸망연대는 문헌 기록에 나와 있지 않으며, 백제 근초고왕 때인 3세기 말로 추정된다.

 

 각 거수국의 규모에 대해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큰 나라는 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인데 그들은 읍락에 섞여 살거나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산다고 했다. 마을은 진왕이 거주하는 도읍都邑, 거수의 국읍局邑, 일반 주민의 읍이 있었고, 신분계급은 왕-천군-거수-평민-서민-노예로 나뉘었다. 한의 법체계는 문헌에서 보이지 않으나 법규와 관습이 매우 엄격嚴峻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8조 금법을 계승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8조금법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되어 있으며3조의 내용만이 《한서지리지 연조燕條> 전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 전을 내놓아야 한다.

 나머지 5조는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 보이는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었을 것으로, 소도(성역) 훼손하는 자는 가둔다. 예의가 없는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 음란한 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린다. 남을 속인 자는 훈방訓放한다. 

 

마한 사람들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짓고, 누에를 치고, 비단 명주 무명베를 짰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크기가 배만 했다. 변한과 진한인은 토질이 비옥하여 오곡과 벼가 잘 자랐고, 누에치기를 알아 비단과 무명베를 짜며, 소와 말을 타고 부렸다. 진한에서는 철이 생산되어 화폐로 사용하고 한과 왜에 수출하기도 했다. <후한서 한전>, <삼국지 한전>

 

 (진한) 그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예 마한 등이 모두 와서 사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 철을 화폐로 사간다.<후한서 권85 동이전 한전 진한 조>

 

 (변진)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들이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군과 대방군의) 두 군에도 공급했다. <삼국지 권 30 동이전 한전 변진>

 

 마한 사람들은 금 보화 비단 모직물 등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오직 구슬을 귀하게 여겨서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후한서 권85 동이열전 한전>

 

 해마다 5월에는 씨 뿌리기를 마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중구의 탁무와 비슷하다. 10월에 농사를 마치고도 이렇게 한다. <삼국지 권30 동이전 한전>. <삼국사기>에는 자연재해로 보리 조 등의 곡식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은 전 지역이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따뜻하여 농경이 발달한 사회였다. 다음은 <삼국지 동이전 한전>의 기록이다.

 

 그 풍속은 규율이 적어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으나 읍락이 뒤섞여 살아 서로 잘 제어하지 못한다. 꿇어앉아 절하는 예절이 없다. 거처는 초가집이나 흙방을 짓는데 모양이 무덤 같고 문이 위에 있어 온 가족이 그 안에 함께 있으며 장유나 남녀의 구별이 없다. 장례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은 없으며, 소나 말을 탈 줄 몰라 소와 말은 장례 치르는 데 다 써버린다. 영주瓔珠(구슬)를 재물로 여겨 옷에 꿰어 장식하거나 목에 걸고 귀에 드리우기도 하며, , ,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강인하고 용맹하며, 머리는 틀어 묶어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경병炅兵 같고, 베 도포를 입으며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 안에 일이 있거나 관청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젊고 건장한 자들은 모두 등 가죽을 뚫어 큰 밧줄로 꿰고 또 한 길이 넘는 나무 막대기를 꽂고는 하루 종일 소리 지르며 힘을 쓰는데 아픈 줄을 모르고, 이를 작업 독려하는 것으로 여기며 또한 건장하다고 여긴다.

항상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데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밟고 몸을 굽혔다 폈다 하며 손발이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리듬이 마치 탁무鐸舞와 비슷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어 국읍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는데 소도蘇塗라 부른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도망자가 그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아 도적질을 좋아하게 만든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불탑)와 비슷하나 행하는 선악에는 차이가 있다.

그 북쪽 군郡에 가까운 나라들은 예절과 풍속을 조금 알지만, 멀리 떨어진 곳은 마치 죄수나 노비가 모여 있는 것과 같다. 다른 보물은 없다. 짐승이나 초목은 대략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는데 배만큼 크다. 또 꼬리가 가는 닭(세미계)이 나는데 꼬리 길이가 모두 5척이 넘는다. 그곳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을 한다. 또 주호州胡가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좀 작고 말이 한韓과 같지 않으며 모두 선비鮮卑처럼 머리를 깎았으나 다만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은 위만 있고 아래는 없어 마치 알몸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 안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한은 왜와 교류했는데, 서기 3세기까지 600여 년간의 왜열도 야요이문화는 한의 주민들이 북규수로 건너가 소국을 건립하여 이룬 문화로 보고 있다.

 

 한이 멸망한 시기를 정확히 기록한 문서는 없다.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27(9), 마한이 백제에게 넓은 땅을 빼앗기고 멸망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 때는 도읍을 포함한 지역을 빼앗겼으나 아직 망하지는 않고, <진서 동이열전> 277년부터 290년까지 한이 중국 서진西秦에 사신을 계속 보냈던 기록으로 보아 서기 3세기 말까지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의 도읍은 목지국目支國이었으며, 삼한 중 가장 강대한 마한의 왕이 다스렸다.<한서 동이열전 한전>. 후한서보다 늦게 쓰여진 <삼국지 동이전 한전>의 기록에는 진왕은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 변한과 진한의 합계가 24국이다. 그 가운데 12국이 진왕에게 신속臣屬 되어 있다고 했는데, 도읍이 목지국과 월지국으로 상이하게 나타나는 것은, 강대한 왕으로 군림하다가 점차 왕권이 약화되어 일부 지역만 다스리게 되고 영토도 축소되면서, 북쪽의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26> 조에 있다.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은 점차 쇠약해지고 위아래 인심이 이반하니 오래 지탱하지 못할 형세이다. 만일 마한이 다른자에게 병합된다면 우리는 입술이 없어져 이가 시린 격이 될 것이니 이미 그 때는 후회하더라도 늦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취하여 후환을 면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목지국과 월지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를 특정한 기록은 없으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목지국은 충남 직산, 월지국은 전북 익산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 기록을 보자.

 

 (시조 온조왕) 24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만드니,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기를 ‘(온조)왕이 처음에 강을 건너 발디딜 곳이 없자, 내가 동북 100리 땅을 떼어 안전하게 거하도록 했으니, 왕을 대우함이 적지않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마땅히 보답해야 할 생각을 해야 하거늘, 오히려 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인민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하여 크게 성지를 만들고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의리로 보아 그럴 수가 있겠는가하니 온조왕이 부끄럽게 여게 드디어 책을 허물었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이 사건이 있은지 3년 뒤 백제가 목지국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웅천의 위치를 알면 대략 목지국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 안성천 유역의 공도면에는 웅교리熊橋里 가 있고 하류에는 평택 군물진이 있는데 고대어 은 곰을 뜻했으므로 웅천은 안성천일 것이며, 따라서 목자국은 안성천에서 가까운 직산 지역이었을 것이다. 직산 지역에는 도하리 안궁리 평궁리 신궁리 등 도읍이나 궁궐을 연상하게하는 지명이 남아 있다.

 

 백제가 세력을 확장하여 목지국을 점령하자 한은 남하하여 도읍을 월지국으로 옮겼다. 이 때가 서기 8(백제 온조왕 2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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