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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한국 고대 열국사(6)_백제의 건국과 성장

by 싯딤 2026. 5. 7.

백제의 건국과 성장

 

 

 백제는 열국시대 초기에 고구려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었다. 백제의 건국 시조에 관한 설은 모두 4가지인데 온조설과 비류설은 한국문헌에, 도모설과 구태설은 일본과 중국문헌에 기록된 것인데, 이 중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이 비류설이다. 백제의 건국시조가 온조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온조왕>조에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그 자리를 이었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가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BC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거주할 수 없었으므로 위례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올 때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라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온조왕>

 

이처럼 백제를 건국한 인물은 온조왕으로 고구려를 건국한 인물은 추모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했다. 백제의 건국시조가 비류였다는 설은 위에 인용한 <삼국사기>의 주석에서 이어진다.

 

일설에 이르기를,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인데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졸본인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후에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BC 37)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은 소서노의 총애가 두터웠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우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떠나면,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군더더기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모친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았다 한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온조왕> 주석

 

 백제를 건국한 인물은 온조가 아니라 비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친도 고구려의 추모왕이 아니라, 부여 해부루왕의 서자 우태였고, 어머니는 졸본부여의 소서노였으며, 백제의 첫 도읍지도 하남위례성이 아니라 미추홀이었다는것이다. 백제의 건국시조가 구태였다는 설은 중국의 <주서 이역열전 백제전> <수서 동이열전 백제>에 보인다.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하다.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네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인접하여,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이다. 도읍은 고마성이다…. 그 나라 왕은 매 계절의 중월仲月에 하느님과 5제의 신에게 제사 지내고 또 해마다 계절에 따라 네 번 그의 시조 구태의 사당에 제사드린다. <주서 권49 이역열전 상편 백제>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가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서 백제라 불렀다. 그로부터 10여대동안 대대로 중국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 이전 나라의 역사에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수서 권81 동이열전 백제>

 

 백제 왕실이 고구려 혈통이 아니라 부여계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이나 상징은 <삼국사기>에 보이는데,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서 성씨를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왕실을 고구려라 전하는 온조설 보다, 부여계로 전하는 비류설이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왕운기 백제기 주석>을 보자.

 

 (온조는) 어머니와 형 은조와 함께 남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은조는 나라를 세운지 다섯달 만에 사망했다. <제왕운기 권하 백제기 주석>

 

 형 은조(비류)가 자녀없이 다섯 달 만에 사망하여 왕통이 동생 온조에게 이어져 실질적인 시조로 전해진 것이다. 백제 왕실의 혈통은 부여계로서, 비류와 온조의 부친인 부여왕 해루부의 후손인 우태였으며, 모친은 졸본부여의 소서노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주석에 실린 백제의 건국 내용을 보자

 

 일설에 이르기를 시조는 비류왕으로 그의 아버지는 우태인데,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인데 졸본인 연타발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작은 아들은 온조였다. 우태가 사망하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후에 고주몽이 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하고 소서노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건국할 때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커서 주몽의 총애가 두터웠고, 비류 등을 마치 친아들처럼 대우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태어난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소서노

 소서노는 부여 졸본인 연타발延陀勃의 딸로, 처음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아들인 우태優台와 혼인하여, 온조와 비류,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가 죽자 한동안 졸본에서 과부로 살다가 이후 부여에서 대소왕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추모왕(주몽)이 기원전 37년 2월에 졸본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자 소서노는 추모성왕과 혼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BC 19년 4월에 부여에 남겨두고 왔던 추모의 아내인 예씨의 아들, 명이 찾아 오자 추모왕은 결국 유리명왕을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버림받은 신세가 된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는 절망에 빠졌다. 게다가 그해에 동명성왕이 죽으니 더이상 고구려에서 세력을 뻗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와 온조는 서로 의논한 끝에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후 맏아들인 비류는 미추홀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가  달만에 세상을 떴다. 뒤를 이은 둘째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었다.
 이후의 소서노 행적은 알 수 없다. 온조왕 본기에 따르면 이후 BC 6년(온조왕 13년) 2월에 호랑이 5마리가 도성안으로 들어오더니 왕의 어머니가 61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는 대방의 옛 땅에서 건국되었으며, 건국연도는 BC 18년이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로서 보익을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니 이때가 전한 성제의 흥가 13년이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삼국사기에 따른 각 국의 건국연도를 순차적으로 보면 동부여(BC 59), 신라(BC 57) , 고구려 백제(BC 18) , 가야(AD 42) 순이다.

 백제의 건국 첫 도읍지는 미추홀이었으며, 이후 온조왕 14년에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했다. 인천의 미추홀은 대방에 속하지 않았고 한강 이남이어서 지명은 일치하나 미추홀로 보기 어렵다. 396년에 광개토대왕이 한강 이북지역의 미추성을 친 적이 있었는데 미추홀은 임진강과 한강 유역의 성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어제 한수 남쪽을 순회했는데 그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오랫동안 평안할 방책을 도모할 것이다.” 라고 했다. 7월에 한산(북한산)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다. <시조온조왕 13>

 

  14년 정월에 천도했다. 7월에 한강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헸다. <삼국사기 시조온조왕 14>

 

 이것으로 보아 백제 온조왕 13년에 도읍을 옮길 준비를 하고, 그 다음 해인 온조왕 14년에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몽촌토성으로 보는 것은 의문이 많다. 왕성임을 입증하는 궁궐이나 관청터가 발견되지 않았고, 제방과 치수시설이 있는 지금도 큰 비가 내리면 침수되는 곳인데, 고대에 그런 곳에 도읍을 했을까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서 궁궐로 보이는 건물터와 여러 유적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국 열국사 연구  P240 주석43>

 

 온조왕은 기반이 닦이자 마한을 쳐서 영토를 정읍까지 확장시켰다. 이 시기에 고이왕은 난하지역의 낙랑군을 공격하여 산동성 강소성 및 절강성까지 세력을 확장시키고 해안지역을 지배했다. 아신왕은 왜와의 관계를 증진시켜 왕인과 아직기를 보내 왜의 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쳤으며 직물 등의 기술을 전했다. <삼국사기 아신왕11>.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의 전쟁에서 많은 땅을 잃고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수천명의 병사를 잃고 남녀포로 100명과 세마포 1000필을 바치고58개의 성과 700개 마을의 영토르 빼앗겼고 왕실의 대신 10명이 볼모로 잡혀 갔다.

 백제는 일찍이 245년 무렵에 중국 동북부에 진출하여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지의 동부해안 지역을 지배해 왔으며 581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마감되었다. 이 기간에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다시 사비로 옮겼는데 이 지역은 모두 곡창지대로 백제 부흥을 꿈꾼 것이었는데 무령왕릉의 화려한 유물들을 보면 높은 문화수준과 강력했던 구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부흥을 시도했던 백제는 의자왕때 믿었던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의 중국 동부 진출

백제의 중국 진출

 

 

 백제의 중국진출에 관한 사실은 김세익의 <중국 료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 1967> 김상기의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하여. 1984>의 논문으로 연구가 시작되어 백제의 요서진출이 확인되었다. 백제가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진출하여 지배했다는 사실은 당시 백제의 국력을 알게 해 주며 백제가 해양 활동을 활발히 한 국가였음을 말한다.

 중국동부지역은 선사시대 때부터 한반도 만주와 밀접한 문화교류를 가지고 있어와 그곳에 거주했던 한민족을 동이라 불렸고, 서한 무제 때는 위만조선에 반대하고 서한으로 이주한 예족의 남녀 등 28만명을 받아들여 오늘날 발해만 서부 창주滄州 연안에 살게 하여 일찍부터 한민족이 거주한 곳이었다.

 백제는 중국이 위촉오 세나라로 분열되던 시기인 서기 246년 이전에 동부해안 지역에 진출하여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북쪽으로 오늘날 난하유역으로부터 남쪽으로는 강소성 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백제가 중국 요서에 진출하여 그 곳을 소유한 기록을 보자. 송대 역사를 기록한 <송서 백제전> 기록에,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 동쪽 1천리에 함께 있었는데 그후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소유하였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는데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이다. <송서 권97 이만열전 57 백제전>

 

 백제가 다스린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송시대부터 였을 것이다. 양나라 역사서인 <양서 백제전>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때 이미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소유했고 백제 또한 요서 진평 두 군의 땅 웅거하면서 소유하여 백제의 군을 설치했다<양서 권54 열전 48 백제전>

 

 이 같은 기록은 후세 역사서인 <통전>, <자치통감>, < 문헌통고>, <계동록> 등에도 보이며, 북제의 역사서인 <북제서 후주기>에도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음을 나타나는 기록이 있다.

 

 (571) 봄 정월무인년에 백제왕 여창을 사지절 도독 동청주자사로 삼았다.<북제서 권8 제기 후주기 무평2>

 

 위의 내용은 북제가 백제의 위덕왕에게 동청주의 군사와 행정의 권한을 맡겼다는 것이다. 동청주는 오늘날 산동성 동남부의 청도시靑島市로서 해로의 요충지이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한족 정권이 남부 지역에서 남조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세력이 매우 약해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보자는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와 화친을 유지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서 활동하는 백제 관리들에게 사지절 도독 자사 장군 태수 등의 중국 관직을 제수했다.백제로서도 그러한 관직으로 현지를 다스리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중국 동부지역 진출 및 지배가 보다 더 수월했었다.

 

백제 의복문화/ 출처:한국복식문화 고대, 2017, 채금석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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