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가야의 건국
신라의 건국과 주체

신라는 원래 한의 78개 거수국 중 하나인 사로국으로서 진왕의 통치를 받다 독립국으로 출발하여 BC 57년 박혁거세가 13세로 즉위하여, 서나벌徐那伐이라는 이름으로 건국했다.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BC 57) 4월 병진 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라 했는데, 이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이름을 서라벌이라 했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뛰어나게 영리하며 몸가짐이 조신하였다. 6부의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을 삼았던 것이다. 진한인들은 호匏(조롱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호와 같았다 하여 그의 성을 ‘박’으로하였다. 거서간은 진한인의 말로 왕을 뜻한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고조선시대에 한반도 남부에는 한이라는 국가가 있어 그 안에는 마한 진한 변진이라 불리는 거수국이 있었는데 변진 24개 국 중 하나가 경주 땅의 사로국이었다. BC 1세기무렵 고조선이 붕괴되자 한은 독립국이 되었으나 진왕의 통치가 아직 강력한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혼란이 계속되자 진한의 여섯 부部의 촌장들이 통치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라를 건국하였다. 신라를 건국한 세력은 고조선시대부터 그 지역에 거주했던 토착인들로 진한의 여섯 부(촌락 마을)였다. 여기서 먼저 신라라는 나라이름에 대해서 살펴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군신群臣이 아뢰기를 ‘시조가 창업한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혹은 사라라 혹은 사로라 혹은 신라라 칭하는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롭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인즉 그것으로 국호를 삼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502년)>
라고 하여, 그 때까지 신라의 나라 이름이 혼용되고 있었다. 이런 문제로 일부사학자들은 박혁거세가 즉위하던 당시 신라 초기사회를 원시부족사회로 보고 국가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2000년이나 앞선 고조선도 8조법금으로 통치하였고, 한도 준엄한 법으로 통치한 국가였다. <후한서 동이전 한전>에
변진 사람과 진한 사람들은 섞여 사는데 성곽과 이복은 모두 같지만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장대하고 머리카락은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다. 그리고 형벌과 법은 준엄하다. <후한서 권85 동이전 한전 변진>
따라서 신라는 사로국 때부터 법에 따라 다스리는 국가단계의 사회였으며 건국 후에는 더욱 엄격했을 것이다. 신라가 건국될 때 한반도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 한 등의 뒤를 이은 국가로서 엄격하게 말하면 신라의 건국은 왕조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BC 57년 신라가 건국되고, BC 37년 도성을 쌓고 B C32년엔 궁실을 지었다. BC 20년엔 마한의 진왕에게 통치받을 의사가 없다며 독립국임을 알렸다.
(BC 32년) 봄 2월에 (신라의) 호공을 마한에 보내 수빙했는데, 마한왕이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을 수가 있느냐고 했다. 호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성인(왕, 왕비)이 일어나면서부터 인사가 바로 잡히고 창고가 가득찼으며, … 우리 왕은 겸손하여 아래 신하를 보내 인사를 치르니 이는 예의로서 지나칠 정도라 말할 수 있는데 도리어 대왕이 진노하여 군사로서 나를 겁주니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38년>
신라 사신 호공의 말투나 태도는 진왕을 무시하고 이미 통치받을 의사가 없는 독립을 선포하는 대담한 것이었다.
신라의 건국초기 강역은 진한의 여섯부였다. 서기 29년(유리왕 5년) 무렵 국가적 면모를 쇄신하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핵심 씨족 여섯 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李∙ 崔∙ 孫∙ 鄭∙ 裵∙ 薛)를 하사하고, 가배라는 행사를 만들어 결합을 공고히 했다. 가배는 여섯 부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길쌈을 겨루는 축제행사였다.
서기 90년 무렵에는 본격적인 영토 확장을 꾀해 낙동강 동쪽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였고 167년에는 한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212년에는 가야 왕자를 볼모로 신하국으로 군림했고 300년에는 최씨낙랑국과 대방국을 병합시킨 후 혼용되던 국호를 신라로 고쳤다.(307년)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취하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 대항했다.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493년엔 백제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514년 법흥왕 때부터 호칭을 왕으로 바꿨다. 신라의 국력이 강해지자 550년, 진흥왕은 동맹을 깨고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틈을 타 두 나라의 뒤를 쳐 성을 빼앗았다.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의 한강유역 땅을 전부 차지하였다. 신라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낀 백제의 성왕은 554년, 신라의 관산성(충북 옥천)을 쳤다가 군사 3만명을 잃고 자신도 전사했다. 562년에는 가야를 평정했다. 이렇게 하여 신라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경남 창령, 서울 북한산, 함흥 황초령, 함남 마운령 등에 진흥왕 순수비와 단양의 적성비를 세웠다.
(진흥왕 29년, 568년) 8월 21일 계미에 진흥태왕이 영토를 순수巡狩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세상의 도리가 참되지 않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한 것이 서로 경쟁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왕이 연호를 제정함에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짐은 … 태조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이 내린 도를 위반할까 두렵다. 우又로 하늘의 은혜를 입고 운수를 열어 보며, 그윽한 가운데 신기神祇에 감응되어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친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오게 된다. 아래로 신민新民과 구민舊民을 어루만졌으나 오히려 왕도의 덕화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에 무자년 가을 8월에 영토를 순수하여 민심을 살펴 노고에 선물을 내려주고자 한다. 여유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하고 재난의 낌새를 살피며, 적에게 용감하고 전쟁에 강하며, 나라를 위하여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을 상으로 더하여 주고 그 공훈을 표창하고자 한다…(이하 생략)
신라의 생활
<삼국유사 문무왕>조에 거득공車得公이 안길安吉을 맞아 차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신문왕후를 맞기 위해 폐백 15수레, 쌀, 술, 기름 간장 된장 포 젓갈 135수레와 벼 150수레를 보냈다<삼국사기 권8신라본기>
(추가)
가야의 건국과 강역
가야는 한韓의 거수국으로 변한 지역의 24개국 중 하나였다가 서기 42년 가야국으로 개국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기록된 24개국 중 변진구야국과 변진안야국이 보이는데 그 음이 비슷하니 가야의 전신이었을 것이다. 가야가 건국하기 전 그 지역은 한의 영토였고 고조선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고조선이 영토였다. 가야는 삼국과 더불어 6세기까지 존속했던 높은 국력의 국가였다. 그럼에도 삼국에 비해 평가가 충분하지 못한 것은 일본인의 생각이 반영되고 식민사학자들의 생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일본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지배했으므로 가야사는 일본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야의 건국연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동일하게 서기 42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건국과정이다.
천지가 처음 열리던 뒤로 이곳에 아직 나라 이름이 없고 군주나 신하의 이름도 없더니, 세월이 흘러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의 아홉 간이 있어, 이들이 추장으로서 백성을 거느렸는데 모두 100호였고 7만 5천 명이었다. 대부분 산야에서 도읍하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했다.
후한 세조광무제 건무 18년 3월 계욕일에, 북쪽 구지龜旨에서 수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어 마을 사람 200~300 명이 모이니 소리는 나는데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홉 간들에게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나에게 이곳을 다스려 나라를 새롭게 하여 임금이 되라고 명했으므로 내려왔다. …’
아홉 간이 머리를 들어 쳐다보니 자색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은 지라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폭에 금합이 쌓여 있는 것이 보여 그것을 열어 보니 황금알이 6개가 있었는데 둥글기가 해와 같았다. 여섯 알이 화하여 동자가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므로 상에 앉히고 여럿이 배하하고 극진히 위하였다.… 그 달 보름날에 즉위했는데,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고 나라를 대가락大駕落 또는 가야국伽耶國 이라고도 일컬으니 곧 육가야 중 하나였다. 나머지 다섯사람은 각각 가서 오가야의 주主가 되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 가락국기>
이 기록을 보면 그 지역 토착인들의 사회가 성장하여 건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이전 가야지역에는 군주나 신하의 칭호가 없었다. 간干이나 칸汗은 고대 동북아 지역에서 우두머리를 부르는 칭호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수로가 왕이 되었는데 아마도 수로왕은 가야지역 명문 거족 출신의 토착인으로 그의 출생을 신비화하는 과정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졌을 것이다. 수로왕 아래 다섯의 통치자들에게 주主라는 호칭을 준 것은 다섯 가야가 대가야의 통치아래 있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동등한 지위의 여섯연맹체라는 것은 국가체제가 아닌 원시부족연맹체로 보는 것으로서 옳지 않다.
여섯가야의 이름은 김수로의 금관가야金官伽倻∙ 아라阿羅가야∙ 고령古寧가야∙ 대大가야∙ 성산星山가야∙ 소小가야이다. <삼국유사 기이 오가야>
건국당시 가야는 고조선과 한韓을 이어받았으므로 당연히 이들 국가의 사회수준을 계승한 국가단계의 사회였다. 이것은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사는데..형법이 준엄했다.<후한서 권85 동이전 한전, 삼국지 권30 동이전 한전>
법이 존재하는 사회가 합법적인 권력이 출현하면 국가단계의 사회라고 할 것이다. 가야가 건국되기 전부터 가야지역이 국가단계의 사회였음은 고고학 자료로도 확인된다. 경남 창원 덕천리 유적과 다호리 유적은 문화재연구소에서 연대측정한 결과, 덕천리 유적은 고조선 후기인 서기전 9세기 경으로, 다호리 유적은 기원전 1세기 경으로 나타났는데 청동기류∙ 철제농구를 포함한 철기류, 칠기류를 비롯, 동아줄∙ 붓 등의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가야인들은 농구 생활도구를 사용하였으며 문자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강역은,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부쪽은 가야산이 경계이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황산강은 김해 동쪽 40리의 양산군과 경계를 이루는 낙동강의 일부의 이름이다. <신증국동국여지승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가야의 영토를,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 경계가 되어 있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 가락국기>
가야의 강역은 건국초기에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남 일부였다가, 가장 강성한 시기인 4세기 무렵에는 낙동강 동쪽에서 서쪽으로는 섬진강 유역까지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5세기에는 영토가 축소되어 낙동강 서쪽으로부터 남해지역과 남원지역에 이르렀다.
가야는 94년∙ 97년∙ 102년∙115년∙ 116년에 신라와 영토 문제로 싸웠다. 201년에 가야가 신라에 화평을 청하여 이루어진 후 소원해졌는데, 400년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광개토왕의 침략을 받아 금관가야(대가야) 종발성從拔城이 함락되어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가야는 대가야를 고령으로 옮기고 백제∙ 신라와 화친을 맺어 침략에 대비했다. 481년에 다시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침공하자, 백제∙ 신라가 도와주었다. 이에 가야왕은 꼬리가 5척이나 되는 흰 꿩을 신라에 보냈고, 508년엔 가야왕이 이찬伊飡(신라 귀족, 지증왕비의 부친)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9년>. 532년, 세력이 약해진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했다. 신라가 팽창하자 가야는 백제와 연합하여 554년에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쳤으나. 이에 신라 진흥왕이 562년 이사부를 보내 가야를 치니 저항도 못하고 백기를 들어 투항했다.
가야지역은 변한시대부터 철이 생산되어 국가 성장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나라에 철이 나는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와 사간다. 시장에서 철을 중국의 화폐처럼 쓴다. 2개군(낙랑과 대방)에도 공급한다.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열전烏丸鮮卑東夷列傳 동이>



가야의 왜열도 진출
고고학적으로 볼 때 한반도와 만주는 지금으로부터 만년 전에 구석기시대가 시작되었고, BC 4천년 경에 고을나라가 형성되었으며, BC 2333년에는 고조선이 건국되어 국가가 출현했다. 그리고 고조선 후기인 BC 800년 무렵에는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열도에서는 신석기문화인 조몬문화縄文文化가 BC 3세기까지 계속되었고, 이 무렵에야 청동기∙ 철기 문화가 혼합된 야요이문화彌生文化가 출현하여 3세기 무렵까지 600여년 간 지속되다가, 6세기 무렵에야 야마도 세력이 주변세력을 겨우 통합하기 시작했다. 왜열도에서의 신석기시대 종료와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고조선보다 무려 2200년이나 늦었던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청동기시대가 1700년 동안 계속되다가 철기시대로 이어졌는데, 왜열도는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나타난다. 그 까닭은 한반도로부터 청동기, 철기의 혼합된 문화가 늦게야 동시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국가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BC 4세기에 임나가 가야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떠돌아 다니면서 사냥이나 고기잡이로 생활하면서 문명의 발전이 없던 조몬문화에 한반도로부터 발전된 문화가 전해져 급격한 발전의 야요이문화가 형성되자 정착생활을 하면서 생산경제 생활에 진입했지만 한반도에 비하면 8천년 늦게 시작된 것이다. 왜열도의 한반도 문화는 한반도 남부에서 가까운 거리인 서북 규슈 지방에서 시작되어 말기에는 북해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야요이문화 질그릇의 원류는 한반도 무문토기로, 한반도 고유의 독창적인 형태다.
왜열도 북규슈 지방은 야요이문화 중기에 접어들면서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를 그대로 반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박재동기舶載銅器’라 하는데, 한반도에서 ’배에 실려온 동기’란 뜻이다. 이 시기에 고인돌과 벼농사가 동시에 왜열도로 전달되었다. 이 시기에 왜는 철이 생산되지 않아 한반도에서 철을 수입해서 썼다. 일본의 철 생산은 대체로 5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는데 이 시기까지 계속 수입한 것이다.
도야요이문화의 요소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는 것은, 단계적으로 전해졌다기보다 그런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대거 이주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가야를 비롯한 삼국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북규슈와 긴키지방을 중심으로 집단마을 이루고 선진기술을 전했다. 5세기 후반까지의 문화유물들을 보면 도자기, 철제, 고분형식 등이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백제 가야의 양식과 비슷하다. 나라지방의 고분과 유물은 가야고분과 비슷하여 이 지역 지배계급이 가야였음을 말해 준다. 일찍이 가야인들이 왜열도에 이주했음은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사기>에 기록된 일본의 건국신화를 보면 다카키신의 명령에 따라 손자들이 강림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단군이름의 한자와 비슷하고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과 <속일본기>에도 가야에서 이주해 간 사람들의 후손임을 말한 내용이 많다.
한반도에서 이주한 가야인들은 여러 곳에 가야 소국을 형성하고 고국에서 살았던 곳의 지명을 이주지역에서 사용하면서 이름을 남겨 놓았다. 562년, 한반도에서 본국 가야는 멸망했지만 왜열도는 646년 무렵까지도 계속 존재한 기록이 그들 일본서기에 나타난다.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이주한 삼구과 가야인들은 한민족 문화를 그 곳에 전하여 일본이 구가의 형태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임나일본부
가야와 왜열도의 관계를 다룰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제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문제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핵심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 임나任那가 한국남부를 지배하고 그곳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식민통치했다는 것으로서 일본사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토수복의 일환으로 합리화 하는데 까지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국가발전 수준차이로 볼 때 일본이 한국 남부를 200년 동안 지배했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고 근거도 없다. 이는 한반도에서는 BC 24세기에 고조선이란 청동기 국가가 출현한 반면 왜열도에는 BC 3세기 무렵부터 AD 3세기 무렵까지의 야요이彌生문화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에서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가 전달되었고, AD 6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기나이畿內의 야마토大和 세력이 주변 세력들을 겨우 통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근래들어 일본인들은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임나일본부가 정치적 지배를 위한 기관이 아니라 외교관계나 상업교류를 위한 기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위치는 한반도였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일본인들의 견해에 대하여 우리나라 남북한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왜열도나 대마도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이는 왜열도와 대마도에 임나(가야)라는 지명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서도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문화 전파가 매우 강하게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이주한 주민도 상당히 많았다.
한반도와 왜열도의 문화 격차로 볼 이들 한반도의 이주민들은 왜열도를 문명사회로 진입시키고 일본이라는 국가를 출현시키는 데 이바지했을 것이 분명하므로 임나일본부에 대한 지금까지의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었고 있었다면 어디에 있었는지, 임나에 대한 문헌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임나가 한반도 남부 가야에 있었다면 한국고대사이므로 문헌 어디엔가 기록이 있을 것이고, 일본 영토에 있었다면 그들 문헌 어디엔가 기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나에 관한 기록이 많이 실려 있는 <일본서기>의 연구가 곧 임나 연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서기>에는 임나 기록이 많다. ‘임나’는 일본서기에만 215회, <신찬성씨록>에 7회 나타난다. 임나의 위치에 대한 학자들의 지금까지의 주장은 가야지역에 있었다는 견해, 왜열도 안에 이었다는 견해, 대마도에 있었다는 견해 등인데 문헌 기록을 살펴보자.
먼저 임나일본부가 가야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광개토대왕 비문>, <진경대사탑비문眞境大師塔碑文>, <삼국사기 강수전强首傳> 등이 있는데, 광개토대왕 비문에,
(AD 400년 광개토왕 영락)10년 경자년에 왕이 명령을 내려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도록 했다.(고구려군이)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니 그 안에 왜인이 가득차 있었다. 관병이 막 도착하니 왜적들이 퇴각하는데… 관병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은 즉시 항복했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10년>
이 전쟁은 신라에서 일어났으므로 임나가라는 당연히 한반도 남부의 지명이다, 가야를 가라加羅라고도 불렀는데, <진경대사탑비문>에는 금관가야가 임나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종발성은 금관가야의 성이다. <진경대사탑비문 眞鏡大師 塔碑文>은 924년에 신라 경명왕의 명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창원 봉림사지에 있었다. 진경대사의 가계에 대해 비문은,
대사 휘는 심희이고, 속성은 신김씨인데 그 선조는 임나 왕족이다. 초발의 성지가 항상 인병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우리나라에 투항했다. 그의 먼 조상은 흥무대왕이다.
흥무대왕은 김유신의 추존호인데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해의 증손자였다. 따라서 진경대사의 선조가 임나 왕족이었다는 것은 금관가야의 왕족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임나는 금관가야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기 강수전>은 강수가 중원경(충주) 사량沙梁 사람인데 신라 태종왕이 이름을 묻자,
신臣(강수强首)은 본래 임나가랑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자두字頭 입니다.<삼국사기 권46 열전 강수전>
라고 대답했다. 이로 보아 임나는 금관가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두번째로 임나가 왜열도에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들인데, 당시 왜열도에는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계통의 지명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 왜전>에,
왜인은 대방 동남 큰바다에 있는데,…왜에 도달하려면 해안을 돌아 바닷길로 한국韓國을 거쳐 약간 동쪽, 약간 서쪽으로 가면 구야한국狗耶韓國에 이르게 되는데, 7000여리가 된다. 드디어 하나의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이른다.<삼국지 권30 동이전 왜전>
여기서 한국韓國은 삼한의 한韓이며 구야한국은 규슈 북부 연안에 있었다. 그런데 >삼국지 한전 변전>조에 변진구야국이 나오는데 가야는 구야狗耶 라고도 불렸으므로 왜열도 규수북부연안의 구야한국은 가야한국 즉 가야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본국군연혁고日本國郡沿革考>에는 비중備中의 하양賀陽(가야)에 대해, 하양은 78촌인데 옛날의 가야국이며 이름이 향옥香屋·문옥蚊屋·하야賀夜·하양 등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시대에 따라 한자가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모두 일본음은 가야이므로 이곳은 고대에 가야 즉 임나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중備中은 오늘날 오카야마 지역이다. 따라서 가야는 규슈 북부에도, 오카야마 지역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속일본서기>에는,
비전備前국 (사람이) 말하기를 읍구군邑久郡 신라읍新羅邑 구포久浦에 매우 큰 물고기 52마리가 떠내려왔는데…. <속일본기 천평天平 15년>
라는 기록을 보면, 왜열도 안에 신라라는 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의 비전국도 현 오카야마 지역이다.
이 외에도 왜열도에는 가라계 지명이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일본서기>, <속일본서기>에 가야∙ 신라∙ 백제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
셋째로 임나일본부가 대마도에 있었다는 견해이다.
대마도對馬島의 대마對馬 ‘훈訓’이 ‘kara’로 그 자체가 가라加羅라는 주장으로서, 대마도에는 가야계 지명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대마도 전체가 임나였거나 임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대마도 이나향伊奈鄕의 중심 마을인 이나촌伊奈村의 한량韓良은 kara라고 읽히며 <진도기사津島紀事>에는 이곳이 가라加邏로 표기되어 있다.
대마 상도上島의 좌호佐護에 カラスの原(karasu no hara)라는 지명과 나전懶田의 율서栗栖(karasu)라는 지명이 있고, 당주唐州(kara-su)라는 지명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가라수加羅愁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대마 하도下島에는 흑나黑懶(kuro-se)라는 지명도 있다. 대마도에 있는 지명인 고리古里(huru-sata), 후목朽木(huru-ki), 하곡賀谷(gaja) 등도 모두 가라계 지명으로서 대마도에 임나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 왜열도 대마도에 임나나 가야 또는 가라의 지명이나 나라이름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임나의 명칭만으오 그곳에 임나일본부가 있었으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이름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왜열도, 대마도에도 있는데, 일본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이 이름들을 한반도로 국한하여 한반도와 왜열도의 관계로만 해석하였다. 일반적으로 보더라도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 기록이므로 왜열도의 역사를 위주로 기록하였을 것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명칭도 왜열도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이러한 지역이 왜열도에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dlTek. 나타내는 기록이 많이 있다.
<일본서기 유라쿠雄略 천황 7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BC 456년) 8월, 관리로 있던 오조라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사키쓰야는 오조라를 머무르게 하여 심부름을 시키면서 달이 지나도록 교토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천황은 쓰라오를 보내 (오조라를) 불렀다. 오조라는 부름을 받고 와서 말하기를 ‘사키쓰야는 어린 여자를 친황 사람이라 하고 큰 여자는 자기 사람이라 하여 경쟁하여 서로 싸우게 하고는 어린 여자가 이기면 칼을 빼어 죽입니다. 또 작은 수탉을 천황의 닭이라 하고 털을 뽑고 날개를 자르고는 수탉을 자기의 닭이라 하고 방울 , 쇠붙이 등을 달아 주고느 경쟁하여 싸우게 하여 털을 뽑힌 천황의 닭이 이기면 또 칼을 뽑아 죽입니다.’ 라고 했다. 천황이 이 말을 듣고 물부物部 군사 30명을 보내 사키쓰야 등 일족 70명을 죽였다.
이 해에 다사田狹가 궁중에서 임금의 시중을 들었는데 친구에게 (자신의 부인인) 와카히메 雄媛 를 대단히 칭찬하여, ’천하의 미인이라도 내 아내보다 못할 것이다. 밝고 온화하며 좋은 용모를 다 갖추고 있다. 상냥하고 명량하며 좋은 점을 다 갖추고 있다. 향수나 화장을 더하지 않아도 이 시대에 비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다. 천황이 멀리서 귀 기울여 이 말을 듣고는 속으로 기뻐하였다. 스스로 다사의 아내 와카히메를 찾아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다사를 임나국사任那國 司로 임명했다. 얼마 뒤에 천황은 다시 와카히메에게 행차했다. 신하 다사는 와카히메와 혼인해서 아들 에키미 兄君 와 오토키미 第君를 낳았는데 다사가 임명지에 이르러 천황이 자기 부인을 총애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신라에 구원을 청하기 위해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신라는 왜를 섬기지 않았었다. 천황은 다사의 아들인 오토키미 와 아카오에게 명령을 내려, ‘너희들은 가서 신라를 쳐라’고 했다. 그 때 곁에 있던 서한재기西漢才伎 환인치리 歡 因 知 利가 나아가 말하기를 ’ 저보다 재주있는 자가 한국韓國 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서 쓰십시오’ 라고 했다. 이에 천황이 군신들을 불러, ’그러면 환인치리를 오토키미 등 따르게 하여 백제로 가서 칙서를 전하고, 재주있는 사람을 바치도록 해라’고 명하였다. 이에 오토키미가 먀\udu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가서 백제에 이르러 그 나라(신라)에 들어갔다. 그런데 국신國神이 노파로 변해서 홀연히 길에 나타났다. 오토키미가 가서 나라가 먼지 가까운지 물었다. 노파는 ‘다시 하루를 더 가야 도착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오토키미 는 스스로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치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백제가 바친 금래재기今來才伎(기술자)를 큰 섬 속에 모아 놓고, 바람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여러 달을 머물러 있었다.
임나국사 다사가 (아들) 오토키미가 (신라를) 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기뻐하며 몰래 사람을 백제에 보내 “너의 목이 얼마나 튼튼하여 남을 치려고 하는가? 전해 듣건대 천황이 나의 처를 받아들여 이미 아이도 있다고 한다. 지금 두려운 것은 화가 몸에 미치려고 하는데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아들인 너는 백제를 근거로 하여 일본과 연락하지 말라. 나는 임나에 근거하여 또한 일본과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오토키미를 타일렀다.
오토키미의 부인 쿠스히메 樟媛은 나라에 대한 마음이 깊고, 군신의 의리가 간절하였다.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도 낫고, 절개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이 모반謀叛을 미워하여 자기 지아비를 죽여 집안에 몰래 묻고, 곧 해부직적미(海部直赤尾(국가에 대한 반역행위)와 함께 백제가 바친 수말재기手末才伎를 이끌고 큰 섬에 머물렀다. 천황은 오토키미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히타카노키시 日鷹吉師를 보내어 함께 복명復命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왜국倭國의 아토 吾礪 광진읍廣津에 안치하였는데, 병들어 죽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천황은 대반에게 명하여… 상도원上桃原·하도원下桃原·진신원眞神原 등 세 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
이 부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 부분은 오조리가 천황에게 죽음을 당하는 기사이고, 뒷부분은 다사가 임나국사가 되어 천황을 배반하는 기사인데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지배했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사료이다. 앞부분 내용이 왜열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것이라는데에는 일본이나 국내 학자들 사이에 이의가 없다. 그런데 대뜸 신하의 부인을 후궁으로 취하는 과정의 이야기에서 왜열도와 한반도 남부의 국가 간에 재주있는 사람(工人) 바치는 국제관계를 말하고 있다. 더구나 BC 5세기 경에 임나는 신라∙ 백제가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말을 타고 왔다갔다 했다. 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너 백제까지 갔다가, 신라까지 하루 더 가야 한다는 말에 돌아온다는 것인데, 정작 다사가 바다를 건너 멀리 한반도까지 간 것으로 볼 수 있는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다사의 임나국에 관한 기사로 읽는다면 왜열도 안에서 일어난 일로, 한반도 남부에서 이주한 한민족이 세운 백제· 가야· 신라의 마을나라(소국)들과의 관계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특히 간인치리가 천황에게 한국에는 자기보다 재주있는 사람이 많으니 불러서 쓰라는 말은 한국 사람은 바다 건너 외국인이라기 보다 왜열도 안의 한국인들을 말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왜열도인들보다 발달한 문명기술을 그들에게 전파했었을 것이기에 재주많은 사람들이었다. 이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 이번엔 <유랴쿠 천황 23년. 479년>조를 보자
이때 신라를 정벌하러 간 오시로尾代는 행군이 기비국 吉備國에 이르자 (자기)집을 지나게 되었다. 거느린 500명의 에조蝦夷 (일본 아이누족의 옛이름)들이 천황의 사망 소식을 듣고 수군거리기를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천황이 이미 사망했다. 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집결하여 부근의 마을을 노략질했다. 이에 오시로는 집에서 나와 사하娑婆의 수문水門에서 에조를 만나 싸우며 활을 쏘았다...<일본서기 권14 유라쿠천황 23년>
오시로가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행군하는 도중에 기비국에 이르러 자기집을 지나는데, 잠시 머무르는 동안에 천황이 사망하자 에조들이 반란을 일으켜 집을 나와 그들과 싸웠다는 내용이다. 위 내용에서 두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오시로 등은 출정 중에 집에 들른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출신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라가 있었을 것이다.
가비국은 오늘날 오카야마현 지역이다. 오카야마현 지역에는 고구려∙ 백제∙ 가야계의 지명이 현재에도 많이 남아있다.
비전국 사람이 말하기를 읍구군 신라읍 구포에 매우 큰 물고기가 52마리가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2장이고 거죽이 종이같고 눈은 쌀알같으며 소리는 사슴울음 같았다. 노인들이 모두 이르기를 일찍이 (이런물고기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속일본기 천평 15년>
비전국도 오키야마현 지역에 있었다. 결국,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와 임나∙ 고구려∙ 백제∙ 신리의 관련 기록들은 대부분 왜열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왜열도 안에 있었던 한민족 소국들과 항쟁하면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기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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