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시 읽는 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 영조

by 싯딤 2010. 1. 18.

절반의 성공 영조/ 소론 강경파 숙청

‘난 경종의 충신’ 김일경은 뻣뻣했다

 

◀연잉군의 세제 시절 초상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로 세제가 되고 왕위에 올랐지만 소론 강경파는 경종 독살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격렬한 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하면 반대 당파의 재기를 막기 위한 정치 보복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치 보복은 권력 강화가 아니라 권력 약화의 길이었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를 인정하면서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타협과 화해를 통해 권력 강화의 길을 선택한 정치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세상을 떠났다. 닷새 후인 8월 30일 장희빈의 연적(戀敵)이자 정적(政敵)이었던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삼십 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 앞길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영조실록'에 “성상께서 대위(大位: 왕위)에 광림(光臨)하시자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 저주하고 과장하며 그릇된 이야기를 선동해서 사방을 미혹하게 했다(1년 1월 17일)”고 전하는 것처럼 ‘경종 독살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과제는 경종 독살설을 믿는 소론 강경파(埈少)와 남인들, 그리고 백성들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반대 당파와의 대타협에 의한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대타협을 할 생각이 없었고, 노론도 마찬가지였다. 영조 즉위년 11월 6일 유학(幼學) 이의연(李義淵)이 “신축년(경종 1년) 이후의 일은 모두 선대왕(先大王: 경종)의 뜻이 아니었다”면서 “교목세가(喬木世家: 명가)를 주륙한 무리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경종 1년(1721) 김일경의 신축소로 소론이 정권을 잡은 신축환국 이후의 일들은 모두 소론 강경파가 주도했다는 주장이었다. 소론 계열의 사헌부·사간원이 이의연의 국문을 요청했으나 영조는 거부했다.

▲ 이광좌 간찰 영조가 즉위하자 이광좌 같은 소론 온건파는 김일경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와 선을 긋는 것으로 영조와 공존을 꾀했다.
그러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좌의정 유봉휘(柳鳳輝)가 이의연의 처벌을 주장하며 사퇴하고,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청대해 “이의연의 상소는 선왕을 무욕(誣辱)한 것”이라고 주장해 영조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이의연은 당(黨)을 위해 죽기로 달게 마음을 먹은 무리”라면서 절도(絶島) 유배를 명했다. 그러나 영조의 속마음은 이의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11월 9일에는 동학 훈도(東學訓導) 이봉명(李鳳鳴)이 소론 강경파의 영수 김일경을 역적이라고 공격했다. 영조는 “지금 이후로는 당론(黨論)과 관계되는 것들은 응지상소(應旨上疏: 임금의 구언에 응하는 상소)라도 봉입하지 말라”고 이봉명을 꾸짖었다. 그러면서 김일경도 삭출(削黜)시켰다. 영조의 속뜻이 다시 드러난 셈이었다.

소론은 강경파(埈少)와 온건파(緩少)로 갈라졌다. 영조와 공존을 추구했던 소론 온건파(緩少)는 김일경 같은 소론 강경파(埈少)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했다. 영조실록의 “영의정 이광좌가 청대하여 김일경과 서로 친밀하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진달했다(즉위년 11월 19일)”는 기록은 강경파를 희생양 삼아 살아남으려는 온건파의 전략을 말해준다.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소론 강경파는 같은 당내에서도 고립되었으나 공세의 칼날에 굴하는 대신 죽음을 각오했다.

소령원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묻혀 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이 묘는 지관 목호룡이 잡아주었다. 그러나 목호룡은 영조 즉위 후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김일경의 삭출에 소론 강경파가 반발하자 영조는 “김일경을 옹호하면 역적을 비호하는 율(律)을 베풀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영조는 김일경을 경종의 충신으로 대접함으로써 소론 강경파와 화합을 추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조는 즉위년 11월 11일 김일경을 절도에 안치시켰다가 12월 4일 서울로 끌고 와 국문장에 세웠다. 이미 만 62세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김일경을 죽일 죄를 찾을 수 없었다. 노론 4대신이 경종을 제거하려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또 목호룡의 고변, 즉 삼급수(三急手)를 통해 노론에서 경종을 제거하려 했던 사실도 수많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할 수 없이 영조는 김일경이 목호룡 고변사건을 태묘(太廟: 종묘)에 고할 때 홍문관 제학의 자격으로 작성한 반교문(頒赦文)과 상소문의 구절들을 문제 삼았다.

예를 들면 “노(魯)나라의 종무(鍾巫)처럼 야밤에 칼을 품기도 하고, 한(漢)나라의 양기(梁冀)·염현(閻顯)처럼 음식에다 독을 타기도 하며, 진(秦)나라 때의 이사(李斯)·조고(趙高)처럼 국상(國喪)을 이용해 교제(矯制: 거짓 조서)를 만들기도 했다('경종수정실록' 4년 4월 24일)”는 김일경의 글이 영조를 공격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삼급수,즉 칼로 경종을 죽이려던 대급수,독살하려던 소급수,선왕의 유서를 위조해 폐출하려던 평지수의 사례를 중국 역사에서 찾아 인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김일경은 국청에 끌려 나왔을 때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국청에서 그는 “지금은 이 목숨이 끝날 때이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겠는가? 만 번 주륙을 당한다 해도 교묘한 말로 피하고 싶지 않다”며 “(내가) 평생 지킨 바는 오직 충(忠)과 직(直)”이라고 말했다. 영조는 김일경에게 ‘과거의 잘못을 시인한다’는 대답을 듣고 난 다음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영조를 ‘선왕을 독살한 범인’으로 보고 멸족까지 각오한 그가 잘못을 시인할 리 만무했다. 영조가 ‘부도(不道)’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자 “성품이 원래 충직(忠直)하여 부도한 일은 알지 못한다”라고 부인한 김일경은 “선대왕(先大王: 경종)의 빈전(殯殿:시신)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마음에 달갑겠다”라고 맞섰다. 경종의 충신으로 죽겠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김일경은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까지 말했는데 영조는 “‘시원하게 죽이라’고 한 뜻 또한 지극히 흉패(凶悖)하다. 저를 죽인들 내 마음에 무슨 시원할 것이 있겠느냐?”라고 분개했다.'영조실록'은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 죄인은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도 이에 감히 고개를 쳐들어서 머리를 덮어씌우라고 명했다(즉위년 12월 8일)”고 전하고 있다. 목호룡도 마찬가지였다.

목호룡은 영조에게 “회맹단(會盟壇)의 삽혈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영조는 “그 말이 흉참(凶慘)하다”라고 비난했다. 목호룡은 경종 3년 역적들을 토벌한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동성군(東城君)으로 책봉 받았는데, 공신들의 회맹 때 나누어 마신 피가 식기도 전에 역적으로 몰릴 줄 어찌 알았겠느냐는 뜻이었다.

목호룡은 호된 고문을 견디면서, “고한 자는 죽는 법이니, 장차 고한 자로서 죽겠지만, 흉심(凶心)은 없었다”고 말하고 “다만 종사(宗社)를 위했던 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죄는 없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영조는 “(목호룡의) 종사를 위했던 죄라는 말은 내가 역적을 돌보아 비호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군부(君父)에게 이런 말을 하니, 지극히 흉악하고 교활하다. 이것이 족히 단안(斷案)이 될 만하다(즉위년 12월 8일)”라고 말했다. 군부 불경죄로 사형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김일경과 목호룡이 보기에 역적은 자신들이 아니라 영조와 노론이었다. 차이는 누가 현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느냐 하는 점뿐이었다. 숙빈 최씨의 묏자리를 잡아준 것으로 출세의 기회를 잡았던 목호룡은 그 아들이 왕이 된 그해 12월 10일 역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다. 김일경은 영조 1년 1월 2일 사형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영조 1년(1725) 1월 16일 군사(軍士) 이천해(李天海)가 출궁한 영조의 어가에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천해를 국문했으나 영조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음참한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라”고 명했다. 사관 역시 “그 말이 극히 음참하기 때문에 초책(草冊: 실록의 초고)에 쓸 수 없습니다('영조실록' 1년 1월 17일)”라고 답할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28세의 청년 이천해는 24번의 압슬형을 받았으나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영조실록'의 사관은 영조 즉위 후 여러 말들이 난무하다가 “이천해의 흉언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라면서 “그 흉언은 대개 무신년(영조 4년) 역적의 격문(檄文: 이인좌 난의 격문)과 같다고 한다”고 전했다. 영조와 노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말이란 뜻이다.

김일경·목호룡·이천해 등을 죽인 영조는 재위 1년(1725) 목호룡 고변사건(임인옥사)를 ‘무고’라고 선언하고 노론 피화자(被禍者)를 신원하는 을사처분(1725)을 단행했다. 목호룡 고변사건은 신(新)정권에 의해 없었던 일이 되었다. 기세를 탄 노론은 유봉휘·이광좌·조태구·조태억·최석항 등의 소론 대신들을 ‘오적(五賊)’으로 규정해 공격했다.

소론 온건파까지 적으로 돌리면 내전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한 영조는 재위 3년(1727) 민진원·홍치중 등의 노론 대신들을 축출하고 이광좌·조태억 등에게 정권을 주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했다. 재집권한 소론은 임인옥사(목호룡의 고변)를 다시 역옥(逆獄)으로 환원시키고 노론 4대신을 역적 명부인 역안(逆案)에 다시 기재했다. 소론 온건파에 정권을 넘긴 영조의 조치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군사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봉기한 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緩少가 있었다/이인좌의 난

사회 불안요소 해소의 최선의 방법은 불안요소를 정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6·25 때 농민들의 동조 봉기가 거의 없었던 것은 발발 직전 단행됐던 토지 개혁 덕분이었다. 영조도 재위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 온건파에 정권을 넘기는 것으로 소론의 불만을 수용했기에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되돌아봐야 할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무신(戊申) 봉기 영수’ 이인좌 세종 대왕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전형적인 남인 명가 출신이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영조 4년(1728) 3월 15일 밤. 거대한 함성과 함께 청주 병영(兵營)에 돌입하는 무리가 있었다. 병영 문은 굳게 잠겨 있어야 했지만 이날 밤은 달랐다. 병영의 기생 월례(月禮)와 절도사 이봉상(李鳳祥)이 신임하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내통했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 또는 무신난(戊申亂)으로 불리는 소론강경파와 일부 남인의 연합 거병의 시작이었다.

권서봉(權瑞鳳)은 경기도 양성(陽城)에서 미리 무리를 모아 청주성 경내로 들어온 뒤 행상(行喪:주검을 산소로 나르는 일)을 핑계로 상여에 병기를 실어 성 앞 숲 속에 몰래 숨겨 놓았다. 청주 인근 여러 고을에 건장한 사람들이 몰려들자 이상하다는 말이 유포됐고, 충청병사 이봉상에게 보고했지만 무시됐다. 결국 절도사 이봉상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등은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했는데 『영조실록』은 “성 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의 즉위와 노론의 집권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믿는 세력들과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에서 실제로 독약을 사용하는 소급수(小急手)를 실험했던 것이 확인된 상황에서 영조가 즉위 직후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자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일찌감치 거병을 준비했다. 여기에 경종의 전비(前妃:전 왕비)인 단의 왕후 심씨의 동생 심유현(沈維賢)의 목격담이 더해졌다. 심유현은 경종 사망 당일 특별히 명소(命召)를 받고 유문(留門:궁궐 문을 임시로 닫지 않는 것) 입시했는데 그가 이유익(李有翼)에게 말한 목격담이 전파됐다. 심유현은 “그때 유문하면서 급히 부르기에 환취정(環翠亭)에 들어가 우러러 (경종을) 뵈었더니 옥색(玉色:임금의 안색)이 평상시와 같으셨다. 그런데 대신이 고복(皐復)을 청하기에 비로소 승하하신 것을 알았다(『영조실록』 4년 3월 29일)”고 말했다. 자신이 봤을 때만 해도 이상이 없던 경종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대신이 고복, 즉 죽은 사람의 저고리를 들고 지붕에 올라 북쪽을 향해 혼(魂)을 다시 부르는 초혼(招魂)을 했다는 것이다. 소급수를 사용한 김성(金姓) 궁인(宮人)에 대한 조사 요청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김성 궁인은 인현 왕후 민씨가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였던 숙종의 후궁이자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딸 귀인(貴人) 김씨를 지목하는 것이었다.

사건 수사 기록인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에 따르면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은 경종의 사인(死因)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가 김일경이 사형당한 직후인 ‘을사년(乙巳年:영조 1년) 봄부터 가산(家産)을 털어 삼남(三南)을 돌며 ‘팔도의 저명한 인사(八道知名之士)’ 규합에 나섰다. 동조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노론에 의한 피화자(被禍者) 후손을 중심으로 소론과 남인의 강경파 인사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로 영남 세력이 많았지만 거사에 동조했던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이 “호남·영남에 적도(賊徒)가 번성하다”고 말한 것처럼 호남도 동조자가 적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태인현감 박필현과 담양부사 심유현, 무장(茂長)에 유배 중이던 박필몽(朴弼夢) 등이 호남에서 거병을 준비했다. 이들은 소현 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坦)을 추대했는데 이는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이 연잉군(영조)의 역모 가담으로 끊긴 것으로 보고 새 왕통은 소현 세자의 혈통에서 나와야 한다는 정통론이었다.

이인좌는 현재 『민족문화백과사전』 등에 광주(廣州) 이씨로 나오지만 세종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조부는 숙종 때 감사를 역임한 이운징(李雲徵)이고 조모는 남인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의 딸이고, 부인 윤자정(尹紫貞)은 윤휴(尹<9474>)의 손녀로서 전형적인 남인 가문이었다. 지방에서 이인좌가 거병하면 서울과 경기도에서 즉각 동조 봉기를 해 도성을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다. 영조 1년 1월 의릉(懿陵:경종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영조의 어가를 가로막고 ‘독살’ 운운한 이천해의 행위도 박필현과 이유익이 시킨 것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이들은 경종 독살설을 퍼뜨리는 한편 무장 거병을 준비했다. 특히 평안병사 이사성의 가담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무신역옥추안』에 따르면 이사성은 “많은 군병을 얻을 필요는 없다. 만약 적(賊)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있으면 국가는 반드시 나를 장수로 삼아 격퇴하게 할 것이니 이때를 틈타면 어렵지 않게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인좌는 권서봉에게 ‘영남에서 올린 상소문의 소유(疏儒:상소에 이름을 올린 유생)가 만여 인이니 각자 가정(家丁)을 끌고 나오면 12만 명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등 병력 동원에 자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이 끌어모은 무리 중에는 녹림(綠林)까지 있었다. 거듭되는 자연재해와 잇따른 실정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유리하던 농민들이 집단 도적이 된 무리가 녹림이었다. 녹림을 끌어들인 인물은 정인지의 후손으로 알려진 업유(業儒) 정세윤(鄭世胤)이었다. 용인의 사대부 안엽(安<7180>)은 이사성에게 “정세윤은 녹림 도적(綠林盜) 100여 명과 인연이 있는데 만약 은자(銀子) 수백 냥만 있으면 300~400명은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600~700여 명의 녹림을 모을 수 있었는데 주로 삼남에서 활동하는 무리였다. 이는 농촌에서 유리된 세력들이 중앙 정권 다툼에도 개입할 정도로 강한 세력을 형성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봉기 준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발생했다. 영조가 재위 3년(1727)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 온건파로 바꾸는 정미환국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사건 관련자 임환(任還)의 공초는 정미환국에 대한 이들의 반응을 잘 말해 준다.

“정미년 7월 초하루 환국이 있었는데 8~9월 사이에 박필현·이세홍 등이 이유익의 집에서 만나 크게 놀라며 ‘일이 이뤄지지 않는구나. 노론이 그대로 있다면 일은 용이하겠지만 지금 소론이 천만의외로 다시 들어가게 됐으니 들어간 자가 비록 완소(緩少:소론 온건파)라 하더라도 준소(峻少:소론 강경파)도 희망이 있다고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무신역옥추안』)”

정미환국은 노론이 소론 온건파까지 공격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영조가 “사적 복수를 앞세우고 국사를 뒤로 미룬다(先私<8B8E>後國事)”고 비판하면서 취했던 조치로서 소론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조로서는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이사성의 “남인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완소는 마땅히 모두 장살(杖殺)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론 강경파는 온건파에 분노했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봉기를 멈출 수 없었다. 멈추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고, 아는 자도 너무 많았다. 당초 계획보다 규모가 축소됐지만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자 각지에서 동조 거사가 잇따랐다.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 호남에서는 박필현 등이 앞장섰다. 이들은 진중(陣中)에 경종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조석으로 곡을 하면서 선왕의 복수를 다짐했다. 각지에 관문(關文)과 격문(檄文)을 뿌렸는데 영조는 이를 모두 불태우게 하고 이를 지니거나 전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명했다.

영조는 ‘경종 독살설’이 담긴 관문과 격문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영조는 총융사 김중기(金重器)에게 출전을 명했으나 반군을 두려워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노론은 위축됐다. 이때 진압을 자처하고 나선 인물이 소론 온건파 오명항(吳命恒)이었다. 안성에서 패전한 이인좌는 죽산의 산사로 도주했다가 승려들에 의해 붙잡히면서 결국 소론 강경파(峻少)가 일으킨 이인좌의 봉기는 소론 온건파(緩少)에 의해 진압됐다. 정미환국이 없었다면 소론 전체와 남인이 가담하는 전국적인 내란으로 확대됐을 것이고 승패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인좌의 봉기는 노론, 소론·남인의 잘잘못을 떠나 조선 정당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표출한 사건이었다. 당쟁의 폐해를 절감한 영조는 노론에서 이를 계기로 소론 온건파를 다시 공격하자 “지금 역변이 당론(黨論)에서 일어났으니 이때에 당론을 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며 탕평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노론이 장악한 언관(言官)들은 계속 소론 온건파까지 공격했다. 심지어 분무(奮武) 일등 공신 오명항까지 과거 김일경과 신축소를 올렸던 이진유(李眞儒)의 유배지를 내륙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공격당했다. 『당의통략』은 “노론 언관들이 심하게 탄핵하자 오명항이 근심과 걱정으로 죽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때가 영조 4년 9월이었으니 불과 6개월 전의 대사에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사를 지우고 싶은 영조, 탕평을 제안하다/신유대훈

현재의 권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 행위의 결과물인 미래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까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神)의 영역이자 역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조의 왕세제 책봉 죽책문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에 책봉되고, 노론은 대리청정까지 주장했으나 이는 훗날 영조에게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소론 강경파(峻少)와 남인 일부가 이인좌를 중심으로 군사봉기까지 일으키자 영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론 온건파(緩少)가 나서서 진압한 것이 영조에게는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노론은 ‘소론에서 역적이 나왔다’면서 이인좌의 난을 소론 전체를 공격하는 계기로 삼았다. 자칫하면 노론만의 임금이 될 처지에 놓인 영조는 소론과 노론을 모두 비난했다.

“소론의 김일경 무리에게 효경(梟<734D>)의 성질이 있었다면 노론에는 정인중 무리들이 효경의 성질이 있었으니, 피차에 어찌 역적이 없는 당이 있었는가?(『영조실록』·『승정원일기』 4년 9월 24일)”

① 조문명 초상 조문명은 소론 탕평파로서 그의 딸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부인이 되었으나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왕비가 되지 못했다. ② 영조의 탕평비 성균관대 안에 세워졌다. ‘두루 화친하되 편당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심이고, 편당하며 두루 화친하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사의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예기』의 구절을 새겨놓았다.
효(梟)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이고 경(<734D>)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으로서 불효자나 역적을 칭할 때 주로 사용한다. 영조를 압박한 소론의 김일경이나 경종을 시해하려 한 노론의 정인중이나 모두 역적이란 뜻이었다. 경종의 충신이 영조의 역적이 되고, 영조의 충신이 경종의 역적이 되는 모순된 현실이었다. 이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양자를 다 아우르는 탕평책(蕩平策)밖에 없다고 영조는 생각했다. 탕평이란 『서경(書經)』 ‘황극(皇極)조’에 “편이 없고 당이 없이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편이 없이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란 구절에서 나온 말로서 왕도는 공평무사하다는 뜻이다. 서인이 노·소론으로 갈려 싸우던 숙종 20년경 소론의 박세채(朴世采)가 처음 주장했으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영조가 사실상 노론의 추대로 즉위한 사실을 아는 소론 온건파로서는 자신들도 등용하겠다는 탕평책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김흥경(金興慶)·김재로(金在魯)·유척기(兪拓基) 등 노론 대신들은 이에 반발해 사퇴했다.

그런 과정에서 각 노·소론의 현실적인 정치가들이 탕평파를 구성하는데 노론에서는 홍치중(洪致中) 등이, 소론에서는 조문명(趙文命)·조현명(趙顯命) 형제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였다. 홍치중은 이 때문에 노론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탕평파는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이던 척박한 정치현실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공존을 모색했던 정치세력이었다.

그러나 탕평파의 입지를 좁힌 것은 경종 때 사형당한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신원 문제였다. 소론 좌의정 이태좌가 “지금 한편의 사람들이 벼슬에 나오기 어려운 단서는 네 사람의 관작을 추탈한 데에 있으니, 모두 벼슬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절의(節義)를 삼고 있습니다(『영조실록』 5년 8월 18일)”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는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노론 4대신을 신원시키려면 목호룡의 고변(임인옥사) 자체를 무고로 정리해야 했는데 이는 소론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론과 노론의 탕평파가 타협을 위해 만든 명분이 ‘죄의 경중이 같지 않다’는 분등설(分等說)이었다. 분등설은 경종 때 연잉군을 세자로 건저(建儲)하고 대리청정을 주창한 행위와 임인옥사를 구분해 처리하자는 절충안이었다. 연잉군(영조)을 추대한 경종 때의 세자 대리청정 요구는 충(忠)이지만 임인옥사는 역(逆)이라는 방안이었다. 노론으로서는 세자 대리청정 주청이 역(逆)에서 충(忠)으로 전환된다는 장점이 있었고, 소론으로서는 임인옥사를 여전히 역(逆)으로 묶어둠으로써 이를 처벌한 자신들의 행위를 충(忠)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분등설로 각 당의 탕평파들 사이에는 타협의 공간이 마련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노론 4대신 중 손자 김성행과 아들 이기지가 임인옥사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김창집과 이이명은 신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소론 탕평파 송인명이 “김창집과 이이명은 아들과 손자가 역적이니 죄가 없을 수 없으나 이건명과 조태채는 추죄(追罪)할 수 없으니 분등(分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조도 “이건명과 조태채는 관작을 복구하는 것이 옳다(『영조실록』 5년 8월 18일)”고 동의했다. 이렇게 두 대신이 신원된 것이 영조 5년(1729)의 기유(己酉)처분이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확산시키기 위해 소론 탕평파 조문명의 건의를 받아들여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인사부서에서 3명의 후보자를 주의(注擬)해서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요청할 때 각 당파를 골고루 포함시켜야 하고, 한 부서 안에도 각 당파가 고루 포진해야 한다는 인사원칙이었다. 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을 등용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탕평책은 유지되었으나 노론은 두 대신이 신원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영조는 재위 9년(1733) 1월 19일 노론 영수 민진원과 소론 영수 이광좌를 불렀는데, 『영조실록』은 “임금이 좌우의 근신(近臣)을 물리치고 주서(注書)에게는 붓을 멈추어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사관(史官)에게만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하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날 영조의 하교를 ‘1·19 하교’라고 하는데, 핵심은 경종 때 노론의 행위나 소론의 행위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경고였다. 이날 영조는 “아! 당론(黨論)이 나를 모함하고 당론이 나를 해쳤다”면서 임인옥사 때 자신을 추대한 혐의로 죽은 처조카 서덕수와 자신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주장해 자신의 처지 또한 곤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이날 영조는 오른손으로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 화합을 종용했으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재위 13년(1737) 8월 18일 인정문(仁政門)에 나가 백관에게 ‘혼돈개벽(混沌開闢)’ 유시(諭示)를 내린다.

“아! 당습(黨習)의 폐단이 어느 때야 없어지겠는가?…오호라! 우리나라는 그 명목(名目:당색)이 서로 바뀌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그 폐단이 더 심해서 처음에는 군자(君子)라 하다가 뒤에는 충(忠)이라고 하며, 처음에는 소인(小人)이라 하다가 뒤에는 역적(逆賊)이라고 서로 공격했다.(『영조실록』13년 8월 28일)”
영조는 이날을 기점으로 “이전의 일은 혼돈에 부칠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개벽이다”라면서 어제까지는 노·소론이 싸운 ‘혼돈’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모두가 화합하는 ‘개벽’이라고 유시했다.

그러나 과거사에 매달리기는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영조는 재위 14년(1738) 12월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했다. 서덕수의 할머니이자 정성왕후 서씨의 어머니인 잠성부부인(岑城府夫人:정성왕후의 어머니)이 사망하자 “서덕수는 사람됨이 어리석어 속임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중전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신원한 것인데, 이는 임인옥사에 대한 영조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드디어 재위 16년(1740:경신) 1월에는 김창집과 이이명도 신원시켜 노론 4대신 모두의 혐의를 벗겨주었다. 나아가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를 무고로 처분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을 단행했다.

그러자 연잉군(영조)의 미래를 부탁했다는 숙종의 유조(遺詔)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현명의 문집인 『귀록집(歸鹿集)』에 따르면 영조 16년 인현왕후 민씨의 조카 민형수(閔亨洙)는 조현명에게 “정유독대(숙종과 이이명의 독대) 후에 숙종께서 두 왕자(연잉군·연령군)의 보전을 생각하셔 안으로는 (두 왕자를) 동조(東朝:대비)에게 부탁하고, 밖으로는 대장(大將) 이우항(李宇恒)에게 부탁했다”고 말했다. 민형수는 ‘숙종이 이이명에게 선비(士)를 추천하라고 하자 이이명이 김용택과 이천기를 추천했는데, 숙종이 7언고시를 김용택에게 내렸다’고 덧붙였다. 삼급수 중 숙종의 유서를 이용해 경종을 내쫓으려는 평지수가 실제 숙종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 역모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김용택의 아들 김원재를 국문한 후 숙종의 유시(遺詩)는 김용택이 위조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영조는 과거사 정리를 계속해 재위 17년(1741)에는 드디어 ‘신유대훈(辛酉大訓)’을 선포한다. 경종 때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은 역모가 아니라 자성(慈聖:대비)과 경종의 하교에 의한 정당한 조치라면서 『임인옥안(목호룡 고변 사건 수사기록)』을 불태우고 이를 태묘(太廟:종묘)에 고하게 한 것이다. 신유대훈은 영조식 과거사 정리의 완결판이었다. 임인옥안에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자신의 전과를 말소하면서 재위 1년(1725)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고 취했던 을사처분으로 회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을사처분이 재위 3년의 정미환국으로 무효가 된 지 14년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을사처분이 일방적 선언이었다면 신유대훈은 소론의 동의를 받아낸 점이 달랐지만 비생산적인 과거사 집착이란 점은 마찬가지였다. 임인옥안을 불살랐다고 사건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자 군왕의 평가는 옥안(獄案)의 등재 여부가 아니라 재위 시의 업적에 의한다는 사실도 간과한 것이었다.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진 못했다/애민군주의 한계

군주가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궁극적 길은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군주는 백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는 제도개혁에 앞장서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앞장서 실천하는 유학 군주였으나 백성들은 물론 시대도 그런 개인적 실천보다는 잘못된 제도의 개혁을 요구했다.
박문수 초상 흔히 뛰어난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는 이인좌의 봉기 토벌에 가담한 소론 온건파로서 고른 인재 등용과 군역제도 개혁에 앞장섰던 개혁정치가였다.
선왕독살설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영조는 훨씬 성공한 군주가 될 자질이 있었다. 그는 절검을 솔선하는 애민군주였다. 재위 20년(1744) 5월 영조가 병이 들어 약원(藥院)의 진찰을 받을 때 신하들은 영조의 침실을 엿볼 수 있었다.

“이때 임금은 목면으로 만든 침의(寢衣:잠옷)를 입었으며…이불 하나 요 하나도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병장(屛障:병풍)도 진설하지 않았다. 또 기완(器玩)도 없어서…여항(閭巷:민간)의 호귀(豪貴)한 집에 견주어도 도리어 그만 못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와 검소한 덕에 대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영조실록』20년 5월 2일)”

영조의 침실이 민간의 부잣집만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영조행장’에도 “중의(中衣)·철릭(貼裏:군복) 따위는 이따금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영조는 절검을 솔선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사치를 금지시키려 했다. 흉년과 전염병이 만연해 백성들이 죽어가는 가운데에서도 사대부들의 사치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순무영진도 조선 후기 군사들의 군진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는 군역 의무가 없고 가난한 양인들만 군역 의무가 있는 모순된 군역 제도를 갖고 있었다.
재위 8~9년 가뭄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영조는 “필서(匹庶:서인)의 사치는 곧 조사(朝士:벼슬아치)를 본받은 것이고, 조사의 사치는 곧 귀척(貴戚:왕실의 외척)을 본받은 것이며, 귀척의 사치는 왕공(王公)에 근본을 두고 있다(『영조실록』 9년 12월 22일)”면서 왕실의 고급 비단 직조를 금지시켰다. 영조는 재위 32년(1756) 1월 사대부가(家) 부녀자들의 가체(加<9AE2>:어여머리)를 금지시키고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도록 명했다. 『영조실록』은 이때 사대부가 부인들이 ‘서로 높고 큰 가체를 자랑하고 숭상했다’면서 “한번 가체를 하는 데 몇 백 금(金)을 썼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는 금주령도 자주 내렸는데, 심지어 “갑자기 좋은 계책이 생각났으니 바로 예주(醴酒:식혜)인데, 아! 예주가 어찌 현주(玄酒:제사 때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보다 낫지 않겠는가?(『영조실록』 31년 9월 7일)”라면서 제사 때도 술 대신 식혜를 쓰라고 명했다. 영조부터 금주했음은 물론이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한다고 여겼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도개혁이었다. 모순된 제도를 방치한 채 군주의 절검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 백성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는 군역(軍役:병역)의 폐단이었다. 그 핵심은 양반들이 군역에서 면제된 데 있었다. 개국 초에는 양반 사대부들도 군역의 의무가 있었으나 차차 사라지더니 중종 36년(1541)에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합법적으로 면제된 것이다. 양인(良人)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1년에 포 2필을 납부하는 것으로 군역 의무를 대신했는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피지배층인 백성들은 군역의 의무가 있는 반면 지배층인 양반들은 면제된 것이다. 이후 군포를 내면 상놈으로 천대받고, 내지 않으면 양반으로 우대받는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발생했다.

성공한 농민 일부가 곡식을 헌납하고 공명첩(空名帖:이름을 적지 않은 관직 임명장)을 사들인 이유도 양반 신분을 획득하면 군역에서 면제되기 때문이었다. 재력 있는 양인들이 공명첩을 매입해 군역에서 면제되면서 군역은 돈 없고 힘없는 상놈들만의 의무로 전락했다. 여기에 양란 이후 군사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을 창설한 이래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청이,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해 총융청이, 정묘호란 뒤에는 남한산성에 수어청이, 17세기 말에는 수도 방위를 위해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군영이 5개로 늘어났다. 군포(軍布)를 납부할 백성 수는 줄어드는데 국방비 수요는 늘어난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숙종 때 군사 숫자를 줄이자는 개혁안이 잠시 등장했다가 국왕 경호가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반대론에 쑥 들어갔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기에 군역개혁론인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 등장했다. 사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여러 방안이 속출했다.

양역변통론은 크게 유포론(遊布論), 호포론(戶布論), 구전론(口錢論), 결포론(結布論)의 네 가지가 있었다. 유포론은 군역 기피자를 색출해 군역 의무를 지우자는 것이고, 호포론은 수포(收布)의 기준을 인정(人丁:사람)에서 호(戶)로 삼아 모든 가호(家戶)에 군포를 받자는 것이었고, 구전론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자는 것이었다. 결포론은 인정(人丁) 대신 전결(田結:토지면적)에 군포를 부과하자는 것으로서 대동법과 비슷한 발상이었다. 이 중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양반 집안도 군포를 내게 하자는 호포론과 양반 사대부 개개인을 징병 대상으로 삼아 돈을 받자는 구전론이었다.
이에 대해 사대부들은 중국 고대 위진 남북조 시대 송나라 왕구(王球)가 말한 “사대부와 서민의 구별은 국가의 헌법(士庶之別 國之章也)”이라는 사대부 특권 의식에서 나온 숭유양사론(崇儒養士論)으로 반대했다. 군역 의무는 상놈만의 것이란 논리였다. 조정에서 가난한 백성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양반 대다수가 반대하자 군제개혁론은 좌초 위기에 놓였다. 영조는 개인적인 절검을 실천할 의지는 있었지만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어가면서까지 군제개혁을 강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영조 26년(1750) 호조판서 박문수(朴文秀)가 호전론(戶錢論)을 제기하면서 다시 양역변통 논쟁에 불이 붙었다. 호전론은 호포론처럼 호를 단위로 돈을 받자는 방안이었다. 영조는 재위 26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을 만나 군역에 관한 여론을 들었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은 영조는 “(백성들이) 부르짖고 원망하여 도탄 속에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조(先祖)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영조실록』 26년 5월 19일)”라고 눈물을 흘렸지만 양반들은 영조의 눈물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영조가 타협안으로 마련한 것이 균역법(均役法)이었다. 균역법은 왕실과 양반 전주(田主:지주)가 조금씩 양보해 백성들의 군포 부담을 줄이자는 방안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연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 줄어든 수입은 어염선세(漁鹽船稅)와 결작미(結作米), 은여결세(隱餘結稅),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으로 보충하자는 방안이었다. 어염선세는 왕실에 속해 있던 수입을 정부 재정으로 돌린 것으로 왕실이 양보한 것이고, 결작미는 전결(田結) 1결당 쌀 2두(혹은 돈 2錢)를 부과 징수하는 것으로 양반 전주들이 조금 양보한 것이었다. 은여결세는 전국의 탈세전을 적발해 부과하자는 것이었고, 선무군관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군역에서 벗어난 양민들을 색출해 선무군관으로 편성한 것으로서 전국에서 2만4500여 명이 새로 편입되었다.

균역법은 군역개혁의 목표였던 양반계급의 과세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지배층의 부분적 양보를 명분 삼아 문제의 본질을 덮어버린 반쪽짜리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균역법이 한계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양반 전주들은 결작미 부담을 전호(佃戶:소작농민)에게로 떠넘겼고, 농민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균역법 시행 2년이 채 안 된 영조 28년(1752) 병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대리청정하는 사도세자에게 올린 보고서는 반쪽짜리 개혁안이 휴지가 된 사실을 잘 보여준다. 홍계희는 가장 가난한 백성들만 군포 납부 의무를 진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세업(世業)도 없고 전토(田土)도 없어 모두 남의 전토를 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1년에 수확하는 것이 대부분 10석을 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 반을 전토의 주인에게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바칠 수 있는 계책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영조실록』 28년 1월 13일)”

홍계희는 이 때문에 ‘죄수들이 감옥에 가득하게 되고 원통하여 울부짖는 것이 갈수록 심해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영조가 진정한 애민군주가 되려면 절검이라는 개인적 수신(修身)보다는 양반 과세(課稅)를 통한 신분제의 해체라는 제도개혁으로 나가야 했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였다. 그러나 경종독살설에 발목 잡힌 영조는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철폐할 권력도 의지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의 특권 속에 백성들은 계속 군역의 폐단에 시달렸다.

화난 영조 “양반의 나라니 경들이 다스리시오”/숙빈 최씨의 추승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 말은 조선 후기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승자인 노론과 패자인 여타 당파에 관한 기록이 그런 것처럼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와 라이벌 희빈 장씨 이야기도 시종 승자인 최씨의 자리에서 기록되었다. 노론은 최씨를 우호적으로 묘사했지만 영조의 모친 추숭 작업에도 제동을 걸었다. 국왕의 생모라도 신분제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①숙빈 최씨의 소령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숙종 당시 묻힐 때는 소령묘였으나 영조 즉위 후 소령원으로 격상되었다. ②육상궁 현판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곁에 있다. 영조는 즉위 후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승격시켰는데 현판은 아직도 육상묘인 것이 이채롭다. 이곳은 주로 왕을 낳은 후궁들을 모신 사당이다. ③이문정의 수문록 들은 대로 썼다는 뜻의 제목을 달고 있다. 이문정은 종제 이진유가 김일경과 신축소를 올리자 절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노론 정체성이 강했고, 이 책도 그런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영조는 평생 경종 독살설과 모친 최씨의 미천한 신분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숙빈(淑嬪) 최씨는 희빈 장씨의 라이벌이었다. 여러 야사에 최씨는 선한 인물로, 장씨는 악독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이는 최씨가 인현왕후 및 노론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한 덕분이었다. 그런 야사의 하나가 조선 후기 이문정(李聞政)이 쓴 『수문록(隨聞錄)』으로서 숙종과 최씨의 만남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최씨가 궐내 자신의 방에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숙종이 들어온다. 사유를 묻는 숙종에게 내일이 인현왕후의 탄신일이어서 왕후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비는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숙종은 인현왕후도 그리워졌고 옛 주인을 섬기는 최씨의 정성도 가상했기 때문에 그를 가까이해 태기가 생겼다는 이야기다.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는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閔維重)이 인현왕후를 업은 부인 송씨(송준길의 딸)와 영광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정읍 태인면의 대각교 다리에서 고아로 떠돌던 최씨 소녀를 만나 거두어 길렀다고 전한다. 그 후 인현왕후가 입궐하며 궁녀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숙빈 최씨의 신분에 대해 궁녀에게 세숫물을 떠다 주는 무수리(水賜)라는 것이 일종의 상식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들은 달리 전하고 있다. 영조가 즉위 1년(1725)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짓게 한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에는 ‘만 6세 때 궁녀로 선발되어 들어왔다(選入宮甫七歲)’고 전하고 있다. 인현왕후가 만 14세에 숙종과 가례를 올릴 때 최씨는 만 11세였다. 최씨가 6세 때 궁녀로 들어왔다면 인현왕후가 데려갈 수는 없게 된다. 또한 6세 때 궁녀로 들어갔다면 무수리 출신도 아니다.

남인 계열 장씨의 미인계에 일격을 당하고 정권을 빼앗긴 서인(노론)에게 최씨는 좋은 반격의 재료였다. 실제 서인(노론)은 고비마다 최씨의 도움을 얻어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숙종 20년(1694) 서인들이 하룻밤 사이의 대반전으로 정권을 잡는 갑술환국도 마찬가지였다. 민유중의 아들이자 인현왕후의 오빠였던 민진원(閔鎭遠)은 『단암만록(丹巖漫錄)』에서 ‘김진귀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奉保夫人: 숙종의 유모)을 통하여 최씨와 계략을 세워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보고하여 환국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명문 거족 출신의 거대 정파 노론에 맞섰던 천인 출신 희빈 장씨에 대한 노론의 적대감은 상상 이상이어서 여러 전설을 만들어냈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와 최씨의 다툼을 시종 최씨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는데, 숙종이 조는 사이 신룡(神龍)이 땅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숙종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숙종이 장씨 방에 가서 살피니 담장 밑에 큰 독이 엎어져 있었는데, 그 속에 임신한 최씨가 결박당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다. 왕비 민씨가 희빈 장씨의 종아리를 때린 것처럼 왕비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는 최씨를 질투하고 박해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임금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죽이려고 시도할 수는 없다. 아들이 귀했던 숙종 때 왕의 혈육을 임신한 여인을 죽이려던 사실이 발각되었다면 갑술환국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그날로 쫓겨나 사형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종 20년(1694) 9월 최씨가 아이(영조)를 출산하자 숙종은 출산을 도운 호산청(護産廳)의 내시와 의관에게 내구마(內廐馬)를 상으로 주었다.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이 차자를 올려 ‘내구마가 어찌 환시와 의관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반발할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야사는 대부분 장씨가 최씨를 핍박했다고 전하지만 실제 장씨를 죽음으로 몬 여인은 최씨였다.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민씨가 병사한 후 장씨는 민씨를 무고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다. 『숙종실록』은 “숙빈 최씨가 평일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했다(『숙종실록』 27년 9월 23일)”고 기록해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몬 인물이 최씨라고 전하고 있다.

숙빈 최씨는 숙종 44년(1718) 48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이때 공교롭게도 최씨의 장지(葬地)를 선정한 인물이 목호룡이다. 당초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가 간심한 숙빈의 장지는 경기도 광주의 명선(明善)·명혜공주(明惠公主) 묘산(墓山) 내의 청룡(靑龍) 터였다. 법금을 무시한 장지 선택이라고 질책당한 후 연잉군이 목호룡을 데리고 직접 간심해 결정한 장지가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동의 소령묘(昭寧墓: 현 소령원)였다. 종친 청릉군(靑陵君)의 가노(家奴)였던 목호룡은 이 공으로 속신(贖身)되는데 삼급수 사건을 고변했다가 영조 즉위 초 죽임을 당했으니 기막힌 인생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조 즉위 직후 숙빈에 대한 추숭 작업을 추진한 것은 소론 정권이었다. 영조 즉위년(1724) 9월 예조판서 이진검(李眞儉)이 “선조 때 덕흥군을 높여서 대원군이라고 하고, 군부인(郡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높였다”면서 추숭을 건의하자 영조는 우의정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숙종이 내린 작호에 ‘대(大)’자를 첨가하자고 찬성하자 영조는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귀해진다고 선유(先儒)가 말했다”고 동의했다. 그러면서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대해 묻자 공자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말라’고 했다”며 선왕이 내린 작호를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숙빈의 사우(祠宇)를 따로 짓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두 달 전의 사양이 본심이 아님을 드러냈다. 영조는 숙빈 최씨에게 시호를 올리고 묘(廟)를 궁(宮)으로, 묘(墓)는 원(園)으로 승격함으로써 생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는 한편 모친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씻으려고 했다. 재위 17년의 신유대훈으로 목호룡의 옥사를 모두 무효화시킨 영조는 이를 기반으로 재위 20년(1744)부터 본격적인 숙빈 추숭에 나섰다. 이때 영조는 “사서(士庶)도 동추(同樞: 종2품 동지중추부사) 이상은 3대를 추증하는데 하물며 국군(國君)의 사친(私親)을 아버지만 추증해서야 되겠는가?”라면서 3대를 추증하라고 명했다.

드디어 재위 29년(1753) 6월 25일 영조는 모친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육상묘(毓祥廟)를 육상궁(宮), 소령묘(昭寧墓)를 소령원(園)으로 격상시켰다. 영조는 “오늘 이후로는 한이 없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격했으나 의식 진행과정에서 제동이 걸렸다. 그해 7월 27일 시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시키는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을 설치했는데, 은인(銀印) 사용에 반대하고 나선 신하가 있었다. 격분한 영조는 왕위를 물러나겠다는 뜻까지 내비치면서 “내가 사친을 위해서 감히 옥인(玉印)을 바라지는 못해도 어찌 은인(銀印)까지 불가하겠는가?”라고 분개했다.

이 날짜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우리나라는 양반의 나라이니(兩班之國), 경 등이 스스로 다스리면 될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었다. 시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는 내용을 죽책문(竹冊文)으로 지어야 했으나 작문 당사자인 대제학 조관빈(趙觀彬)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죽책이 옥책(玉冊)에 비하면 경중이 있기는 하지만 국조(國朝)의 크고 작은 책문(冊文)은 승통(承統)한 비빈(妃嬪)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영조실록』 29년 7월 29일)”라고 반대했다. 왕비나 세자빈이 아니면 죽책문을 사용할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영조는 “그 마음은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대신들은 마땅히 토죄를 청해야 할 것이다”라고 분개했다. 영조가 분노한 이유는 조관빈이 경종 때 사형당한 노론 4대신 조태채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숙빈 덕분에 노론이 정권을 되찾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조는 소론의 불만을 무릅쓰며 재위 12년(1736) 조태채의 관작을 복구시켜주었는데 그 아들이 죽책문 작성을 거부했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논란 끝에 영조는 모친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육상묘(廟)를 육상궁(宮)으로, 소령묘(墓)를 소령원(園)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왕비보다는 낮지만 후궁보다는 높은 새로운 궁원(宮園) 제도를 수립한 것이다. 영조 50년(1774) 거창 유생 김중일(金重鎰) 등이 소령원을 릉(陵)으로 올리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구미에 맞춘 말이었으나 영조는 “엄중히 처단해야 하겠지만 기기(忌器)를 참작하여 정거(停擧: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기기는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준말로 ‘돌을 던져 쥐를 잡고 싶으나 곁의 그릇을 깰까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사헌부의 요청에 따라 김중일을 유배 보냈다. 국왕의 생모라도 신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양반 나라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론은 희망을 잃고, 임금은 이성을 잃었다/나주벽서사건

세상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경쟁할 때 발전하는데 정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반대세력을 말살하고 독존하려는 성향이 존재한다. 가끔 현실의 권력으로 반대세력을 말살하고 독존에 성공하는 정치세력이 나타났지만 그 결과는 반대세력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 전체까지 공멸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윤지의 벽서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은 토역경과사건과 맞물리면서 탕평책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독주 체제를 만들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영조는 재위 17년(1741)의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자신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임인옥안』을 불태우고 경종 당시 있었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은 역모가 아니었다고 선포했다. 영조는 이로써 자신의 과거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사는 경종의 편에 섰다가 자신이 즉위하면서 몰락한 소론 강경파(埈少)와 화해를 통해서만 정리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신유대훈에 동의한 소론은 정권에 참여했던 온건파(緩少)뿐이었다. 게다가 신유대훈 이후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탕평책은 명목상의 존재로 격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영조 31년(1755)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의 급보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이었다. 나주 객사(客舍)인 망화루(望華樓) 정문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벽서가 걸리면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영조는 좌의정 김상로(金尙魯), 우참찬 홍봉한(洪鳳漢) 등을 불러 전라감사의 장계를 보이면서 “이는 황건적과 같은 종류인데,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 때의 여얼(餘孼)이다. 그러나 무신년에 최규서(崔圭瑞)가 고변하였을 때도 나는 오히려 동요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는 웃었다.

영조처럼 감정 기복이 심한 인물이 자신의 치세를 전면 부정하는 흉서를 내보이며 웃었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방증이었다. 영조는 좌·우변(左右邊) 포도대장을 입시시켜 기한을 정해 범인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벽서는 필적을 숨기기 위해 똑같은 자획으로 썼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주 정도의 작은 고을에서 목숨을 걸고 영조를 비난할 사대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범인 윤지(尹志: 1688~1755)가 체포되었다. 영조 즉위년에 김일경 일파로 몰려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 윤취상의 아들이었다. 부친이 사형당한 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만 18년 만인 영조 19년(1743) 나주로 이배(移配)된 인물이었다. 지난 30년 세월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조와 노론이 지배하는 한 미래가 없었던 인물이었다. 영조 즉위와 동시에 그의 자리에서 영조는 선왕을 독살한 역적일 뿐이었다.

사건 연루자인 임천대(林天大)는 윤지가 나주에서 30여 명을 모아 계를 만들었는데 먼저 벽서를 걸어 인심을 소란시킨 후 거사하자고 말했다고 자백했다. 계원인 임국훈(林國薰)은 윤지가 맡긴 각종 책자와 편지를 압수당했는데 그중에는 목호룡의 고변서도 있었다. 윤지와 가장 많은 편지를 나눈 전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은 국문에서 “김일경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여겼다”면서 “꿈에 윤취상을 배알했다”고까지 말해 영조를 충격에 빠트렸다. 영조는 윤지 부자를 사형시킨 후 그의 집을 저택(<7026>宅: 연못으로 만듦)하고 이하징·박찬신(朴纘新)·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 등 연루자를 처형했다. 또한 이미 사망한 조태구·유봉휘 등에게 역률을 추가했다.

영조는 같은 해 4월 태묘(太廟: 종묘)에 나가 역적들을 모두 토벌했다고 고하고 5월 2일에는 이를 축하하는 토역(討逆) 경과(慶科)를 베풀었다.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행하는 특별 과거였다. 그런데 파리 머리만 한 작은 글씨로 영조의 치세를 비난하는 시권(試券: 과거 답안지)이 제출되어 영조를 경악케 했다. 이인좌의 봉기 때 사형당한 심성연(沈成衍)의 동생 심정연(沈鼎衍)이 제출한 시권이었다. 또 답안 대신 ‘상변서(上變書)’도 제출되었는데, 『영조실록』은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었다. 심정연은 친국하는 영조에게 “이는 일생 동안 나의 마음으로서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심정연은 윤지의 숙부이자 윤취상의 아우인 윤혜(尹惠)와 모의했다고 자백했다. 윤혜에게서 압수한 문서에는 선왕들의 휘(諱: 이름)가 쓰여 있었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상고하느라 썼다”고 답했다. 영조가 주장(朱杖: 붉은 곤장)으로 마구 치게 했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미 군신 사이가 아니었다. 영조는 보여(步輿)를 타고 종묘에 가서 엎드려, “나의 부덕으로 욕이 종묘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라고 울었다. 그러나 영조는 경종의 충신으로 자처하는 소론 강경파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생각은 없었다. 영조는 군사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갑주(甲<5191>)를 입고 친국에 임했는데, 『영조실록』은 이때 영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전하고 있다.

“이때 임금이 크게 노하고 또 매우 취해서 윤혜의 수급(首級: 머리)을 깃대 끝에다 매달고 백관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리도록 명하면서, ‘김일경과 목호룡의 마음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려라’라고 말했다.…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다.(『영조실록』 31년 5월 6일)”

분노 속에 술을 마셔 이성을 상실한 영조는 사형을 남발했다. 소론 강경파도 이판사판이어서 심정연과 친했던 강몽협 등은 60여 명으로 춘천부(春川府)를 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각 도에서 연루자가 연일 체포되었는데 영조는 그해 5월 12일 강원·전라·경상·함경·경기 다섯 도의 감사에게 사민(士民)을 안정시키라는 명을 내려야 했다. 영조는 그해 5월 16일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연달아 없애 다스려도 조금도 징계되어 그치지 않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노론 영수 김상로에게 적당(敵黨)의 처리 문제를 물은 것이니 답은 뻔했다. 김상로는 “이는 반드시 큰 소굴이 있어서 적(賊)들이 이를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고, 영조는 “내가 반드시 그 소굴을 찾아낸 후에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다”라고 다짐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경종에 대한 충심으로 연결되어 목숨 걸고 저항하는 것이란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영조와 노론 정권은 연루자를 모두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죄인 김요덕이 물고되었는데 김일경의 종손이다. 김일경의 종자(從子) 김유제·김인제·김덕제·김홍제·김대재·김우해와 종손 김천주·김요백·김요채·김요옥·김요덕 등은 심정연의 초사 때문에 모두 국문을 받았는데, 김인제는 승관(承款)하여 정형(正刑: 사형)되었고, 김요백·김요채는 역적 윤혜와 함께 효시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장(杖)을 맞다 죽었다.(『영조실록』 31년 5월 18일)”

김일경의 후손 중에 중으로 변장한 인물이 있다는 정보가 있자 각 사찰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김일경의 종자(從子) 김창규(金暢奎)를 끌고 왔다. 김창규는 “먹고살 길이 없어 걸식했을 뿐”이라고 답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자 갑자기 “어서 빨리 나를 죽여라(只當速殺我: 5월 20일)”라고 소리쳤다. 김일경이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고 대든 것과 같은 말이었다. 드디어 전 승지 신치운(申致雲)은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1724: 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대들었다. 이 말에 영조는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경종이 와병 중일 때 대비 인원왕후가 게장을 올리고 왕세제(영조)가 상극인 생감을 올려서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사건으로 처형당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 영조는 형식적 탕평책마저 완전히 붕괴시켰다. 영조는 이종성(李宗城)·박문수(朴文秀) 등 극소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소론 온건파도 모두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해 11월 영조는 『천의소감(闡義昭鑑)』을 발간했는데, 노론 4대신은 물론 목호룡의 고변으로 사형당한 김용택 등도 모두 충신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게장은 자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 어주(御廚: 대궐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는 대비 인원왕후의 변명도 실었다. 영조와 노론, 그리고 인원왕후의 ‘과거사 다시 쓰기’였다.

그러나 경종 시절 영조와 노론의 행위는 경종의 자리는 물론 어느 국왕의 자리에서 볼 때도 반역행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영조와 노론의 과거사 지우기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재위 32년(1756)에는 노론에서 정신적 지주로 삼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드디어 노론이 한 당파의 이념을 넘어 국가의 이념임을 선포한 셈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로 전락하고 노론 일당 독주가 강화되었다.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가 이런 정국에 불만을 품으면서 소론 강경파에게 향했던 영조와 노론의 칼끝은 사도세자를 겨냥하게 됐다.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고 탕평책을 붕괴시킨 노론 일당의 권력이 국왕의 후계자를 겨냥할 정도로 막강해진 것이었다.

영조의 왕위이양 ‘쇼’ , 4살 세자는 석고대죄했다/사도세자

세자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당선자다. 다만 현재의 임금이 사망해야 즉위하기 때문에 즉위 날짜를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다를 뿐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세자는 시강원에서 왕도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자 역시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결정판이 사도세자다.
함춘원지의 함춘문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 사당을 창경궁 동쪽 후원 함춘원으로 이전하고 경모궁으로 개명했다. 일제는 1924년 이 자리에 경성제대 의학부를 건설하면서 그 원형을 파괴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다. 함춘문은 경모궁으로 가는 문이다.
영조 38년(1762)에 있었던 사도세자 살해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는데 현재도 많은 이들이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홍씨의 『한중록』이 과거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홍씨와 다른 시각의 사료는 배제되었다. 그 결과 세자의 정신병이 ‘뒤주의 비극’을 낳았다는 홍씨의 시각만 유통되었다.

『한중록』은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其一)은 홍씨의 회갑 때인 정조 19년(1795) 쓴 것이고, 2편(其二)과 3편(其三)은 67∼68세 때인 순조 1∼2년(1801∼1802), 4편(其四)은 71세 때인 순조 5년(1805)에 각각 쓴 것이다. 『한중록』은 정조의 생존 때 쓴 1편과 정조의 사후에 쓴 2~4편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1편은 주로 사도세자와 자신의 친정이 사이가 좋았음을 묘사한 뒤 “불행히 임계년(영조 28~29년)에 병환 증세가 계셨다”고만 언급했을 뿐 세자의 정신병이 비극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지 못했다.

사도세자 사당 전남 무안군 운남면 동암마을에 있는 사도세자 사당. 정조 때 마을 사람들 꿈에 사도세자가 여러 차례 나타나 이 마을에 살겠다고 말한 것을 계기 삼아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반면 손자인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쓴 2~4편에서는 사도세자의 정신병과 비행을 적극적으로 거론했다. 예를 들면 “외인(外人)이 모년사(某年事: 사도세자 사건)로 ‘여차여피(如此如彼)하다’ 하는 것은 다 맹랑무계한 이야기요, 이 기록을 보면 모년 시종(始終)을 소연(昭然)히 알 것이요”라며 『한중록』만이 사건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저 이 일로 영묘(英廟: 영조)를 원망하며,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이 병환이 아니시라 하며, 신하를 죄 있다 하여서는 비단 본사(本事)의 실상을 잃을 뿐”이라고 말했다. 세자의 병이 비극의 주된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죄 있는 신하’에 친정 아버지 홍봉한이 포함된 사실을 알아야 『한중록』의 집필 의도도 알게 된다. 『한중록』은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사도세자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몰락한 친정을 복권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쓴 자기변명서다. 『한중록』의 사료적 가치를 『영조실록』을 비롯한 다른 여러 사료와 비교 검토한 후 제한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세자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당파 구조를 상수(常數)로 놓고, 나머지 요인을 변수(變數)로 대입해 분석해야 한다. 그 원인(遠因)은 노론과 영조가 관련된 경종 독살설이고, 근인(近因)은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사건 및 토역경과사건이다. 또한 영조가 재위 35년(1759) 예순여섯의 나이로 열다섯의 정순왕후와 재혼한 것도 주요 원인의 하나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자신의 친정과 관련 없는 대목에서는 뛰어난 직관으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사도세자와 경종의 만남을 서술한 대목이다. 경종은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11년 전에 사망했으므로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 11년(1735) 1월 21일 영빈(暎嬪) 이씨에게서 태어나는데 『영조실록』은 “이때 나라에 오랫동안 저사(儲嗣: 왕의 후계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 45년(1719) 정빈(靖嬪) 이씨가 낳은 효장세자가 영조 4년(1728) 세상을 떠난 후 만 41세 때 다시 아들을 본 것이다. 늦둥이는 이듬해 3월 만 1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영조실록』 13년(1737) 2월조는 “세자의 나이 세 살인데 행동거지가 의연했으며…『효경(孝經)』을 펴고 문왕(文王)이란 글자를 낭랑하게 송독(誦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최초 일인즉 섧고 애달픈 것이 하나는 어리신 아기(사도세자)를 저승전(儲承殿)에 멀리 두심이요, 둘은 괴이한 내인(內人) 들여오신 연고”라고 한탄했다. 저승전은 경종의 부인 선의왕후가 살던 전각이었다. 연잉군 대신 양자를 들여 경종의 후사로 삼으려던 어씨는 경종 급서 후 쓸쓸히 지내다가 영조 6년(1730) 만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혜경궁 홍씨가 말하는 ‘괴이한 내인’이란 경종과 왕비 어씨를 모시던 궁녀들을 뜻한다.

“어대비 국휼 삼 년 후 어대비 부리시던 내인들이 다 밖으로 나갔더니… 어찌 하오신 성의(聖意)신지 경묘(景廟: 경종)와 어대비전 내인 나간 것을 최 상궁 이하로 다 불러들여 원자궁(元子宮) 내인을 만드시니 처소 내인들 모양이 경묘(景廟) 계신 듯 싶을 것이요.(『한중록』)”

경종과 어씨를 모셨던 궁녀들이 어린 사도세자를 모신 것이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반(反)노론의 정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셈이다. 그러나 어린 사도세자를 경종 때의 사건으로 끌어들인 것은 경종의 궁녀들만이 아니었다.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세자가 만 4세 때인 재위 15년(1739) 1월 영조는 느닷없이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선위(禪位)하겠다고 선언했다.

“황형(皇兄: 경종)의 후사를 시켜 우리 집을 삼가 지키게 하는 것이 내 본심인데, 열조(列祖)께서 도우시어 다행히 원량(元良: 세자)이 이제는 다섯 살에 차서 이미 주창(主<9B2F>: 후사)이 있다. 아! 효장(孝章)세자가 살아 있다면 어찌 오늘까지 기다리겠는가?(『영조실록』 15년 1월 11일)”

만 4세 아이에게 선위하겠다는 선언이 영조의 본심이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는 석고대죄해야 했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필두로 백관도 전(殿)에서 내려가 관(冠)을 벗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명(命)의 환수를 요청해야 했다. 그제야 영조는 “위로 자성(慈聖: 대비)을 근심시키고 아래로 원량(元良: 세자)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명을 거두었다. 영조는 “삼종(三宗)의 혈맥은 황형과 나뿐이었다”며 자신의 즉위가 순리였다고 강조했으나 경종 편에 섰던 소론 강경파를 탄압했다. 말로는 경종과 한 몸이었음을 강조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경종의 충신들을 사형시키는 혼란 속에 어린 세자를 끌어들인 인물이 영조였다.

영조는 세자를 만 9세 때 동갑내기 혜경궁 홍씨와 혼인시켰는데 부친 홍봉한(洪鳳漢)은 그때 매번 과거에 떨어지던 낙방거사였다. 음보(蔭補)로 능참봉이 되었던 그는 자신의 딸이 세자빈이 된 지 9개월 만인 영조 20년(1744) 10월 과거에 급제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장인(丈人)이 과거하시다”면서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정성왕후께서는… 노론을 위하시기를 친척같이 하시기에 우리 집에 가례(嘉禮)한 일을 심히 흔희(欣喜)하시다가 (부친이) 대천(大闡: 과거급제)하신 일을 진실로 기꺼하셔서 안수(眼水: 눈물)까지 머금으시니”라고 덧붙였다. 사돈 홍봉한이 노론이기 때문에 가례도, 급제도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론이기 때문에 홍봉한은 소론의 견해를 갖게 된 사위와 척을 지게 된다. 세자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인 영조 25년(1749)이었다. 그해 1월 22일 영조는 밤에 승정원에 봉서(封書)를 내렸다. 첫머리에 ‘중옹(仲雍)’ 등의 글자가 있고 하단에는 ‘을유 등록(乙酉謄錄)’이란 구절이 있었다.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둘째 아들 중옹은 막내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형인 태백(泰白)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친 인물이다. 을유년은 숙종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고 소동을 피운 재위 31년(1705)을 뜻한다.

“내가 감히 삼종 혈맥의 하교를 어기지 못해서 비록 이 자리에 있었지만 남면(南面: 임금의 자리)을 즐겨 하지 않은 마음은 25년이 하루 같아서 날마다 원량(元良)이 나이 들기만 기다렸는데 이제 다행히 열다섯 살이 되었다. 오늘 이 거조는 하나는 저승에 가 황형(皇兄: 경종)의 얼굴을 뵙고자 함이요, 하나는 남면을 즐겨 하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고자 함이다.(『영조실록』 25년 1월 22일)”

이튿날 비가 몹시 내리는 가운데 소동이 벌어졌다. 세자는 백관들과 빗줄기 속에서 울면서 명의 환수를 요청했다. 영조는 한참 후에 “대리청정(代理聽政)은 어떻겠는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 세자로 하여금 막연히 국사(國事)를 모르게 했다가 뒷날 만약 노론과 소론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능히 살아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거조는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영조실록』 25년 1월 23일)”

그해 1월 27일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태묘(太廟: 종묘)에 고하고 팔도에 전교를 반포했다. 영조는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시킨 것을 언급하면서 “30년 동안 이 자리를 벗어나려 고심했으나 저궁(儲宮: 세자)이 울면서 간곡히 만류해 대리청정으로 양보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열다섯의 나이에 정국의 한복판에 섰다.

대리청정 덫에 걸린 세자의 뜨거운 가슴

세자 대리청정은 제왕수업이란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지만 2인자로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즉위 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무인 기질의 세자는 속내를 감추고 있기에는 너무 가슴이 뜨거웠다. 세자는 섣불리 노론에 손을 댔고 노론은 세자 제거를 당론으로 정했다. 영조가 여기에 동조한 것이 비극의 본질이었다.
사도세자 영정 사도세자는 반(反) 노론의 정견을 표출하다가 영조와 노론의 합작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영조는 재위 25년(1749) 2월 16일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 나가 ‘오늘은 세자가 처음 정사를 보는 날’이라며 “품의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세자에게 품의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사도세자의 정계 데뷔날이었다. 영의정 김재로가 북방의 성진(城津) 방영(防營)을 다시 길주(吉州)에 소속시키자는 함경감사의 청을 아뢰었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도 동의하자 세자는 ‘방영을 다시 길주에 소속시켜도 성진에 군졸이 남아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에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영조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네 말이 비록 옳지만 당초 방영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내가 한 일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마땅히 대신에게 먼저 물어보고 또 내게도 품의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옳다.”(『영조실록』 25년 2월 16일)

한중록(恨中錄)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
국사를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주문이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세자가 대신들에게 “민간의 질고(疾苦)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보고를 듣고는 “좋도다. 질문이여!”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세자가 집권 노론의 당익(黨益)에 손을 대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대리청정 초기 사간원 정언 이윤욱(李允郁)이 과거에 급제한 조진도(趙進道)에 대한 삭과(削科:과거 급제를 취소함)를 요구했다. 그 조부 조덕린(趙德隣)이 노론 대신 김창집 등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가는 도중 사망했다는 이유였다. 세자가 삭과를 거부하자 노론은 영조에게 직접 요청해 삭과시켰다. 세자가 노론과 다른 정견을 갖고 있음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성락훈(成樂熏)은 『한국당쟁사』에서 노론 영수 김상로(金尙魯)가 영조에게 ‘동궁이 선왕(경종) 때의 일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하자 영조가 불러 꾸짖었는데, 세자가 “황숙(皇叔·경종)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하자 못마땅해 했다고 전한다. 영조는 노론 당파성이 강하면서도 공정한 군주인 것처럼 평가받고 싶어했다. 영조는 재위 28년(1752) 경종 4년(1724) 사망한 소론 영수 최석항(崔錫恒)의 관직을 복직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부덕한 내가 임어한 지 지금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날마다 고심한 것은 조제(調劑:당론 조절) 두 글자였다. 아! 내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여러 신하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드물 것이다…. 아! 나라의 삼척(三尺:법)은 당인들끼리 보복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일시에 보복하면 당인은 비록 통쾌하겠으나 오호라! 보복이란 예부터 돌고 도는 것이니, 법을 만든 자가 도리어 그 법에 걸리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영조실록』28년 11월 2일)

그러나 영조는 재위 31년(1755)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사건을 정치보복의 기회로 이용해 무려 500여 명의 소론 강경파(峻少)를 사형시켰다. 이때 사도세자가 온건론을 주창하면서 위험이 가중되었다. 영조는 경종 때 자신을 보호했던 소론온건파(緩少) 이광좌(李光佐)의 관작까지 삭탈했는데, 이는 살아남을 소론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광좌의 조카인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이 과거 이광좌에 대해 “친척으로 따지면 상복을 입는 관계지만 의리로 따지면 사표(師表)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인책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세자는 ‘경(卿)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성상과 내가 환히 아는 일인데 이처럼 스스로 자책하는가’라면서 달랬으나 영조는 노론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종성의 관작을 삭탈했다. 이종성은 영조 31년 5월 1일 시민당에서 세자를 만나 “방금 새로 큰 옥사를 겪어 뒷수습을 잘하기가 어려우니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대조(大朝:영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본받으셔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도모하소서”라고 당부했다.

세자가 두 사건 관련자의 사형을 거부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세자가 위태로워졌다. 세자는 유배된 윤광찬, 전효증, 전효순 등을 국문해 죽이자는 대간의 청을 “따르지 않겠다(不從)”고 거절했고,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를 죽이자는 청도 거절했다. 두 사건 이듬해인 영조 32년(1756) 1월 관학(館學) 유생 유한사(兪漢師) 등이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의 정려(旌閭)를 요청한 것도 거부했다. 세자의 이런 정견 표출로 노론은 물론 부왕과도 사이가 불편해졌다. 영조는 재위 33년(1757) 11월 8일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우의정 신만(申晩)에게, “동궁이 7월 이후로는 진현한 일이 없다”면서 세자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실록』은 이때 김상로가 손으로 땅을 치면서, “신 등은 궐 밖에 있어서 진실로 이런 줄을 몰랐습니다. 신 등이 성상 앞에 있을 때는 말을 가리지 않고 다했으나 동궁에게는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통곡했다고 전한다.

사도세자의 문집인 『릉허관만고(凌虛關漫稿)』에는 세자가 지은 ‘스스로 경계하는 사(自警辭)’가 실려 있는데, “기강을 세우니 상벌이 명확하네, 상벌이 명확하니 나라가 다스려지네, 나라가 다스려지니 백성이 편안하네, 대공(大公)이 바르니 사사로움이 없네(紀綱樹兮明賞罰。 賞罰明兮國治 。 治國家兮百姓安。 大公正兮無私)”라는 내용이다. 세자의 대공(大公)과 노론의 당익(黨益)이 충돌했다.

수세에 몰린 세자를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든 것이 영조의 재혼이었다. 영조는 재위 35년(1759) 5월 정성왕후가 사망한 지 만 2년이 지났는데 영의정 이천보가 계비의 책봉을 청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시킬 정도로 재혼에 집착했다. 영조는 재위 35년(1759) 6월 예순여섯의 나이로 세자보다도 열 살이나 어린 열다섯 정순왕후와 재혼했다. 정순왕후의 부친 김한구(金漢耉)와 아들 김귀주(金龜柱)는 홍봉한처럼 낙방거사였으나 국혼(國婚)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서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혜경궁 홍씨 가문과 정순왕후 가문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지만 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세자가 주정뱅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런 소문 속의 세자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영조 36년(1760)의 온양의 온궁(溫宮) 행차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전배(前陪)’도 없고 ‘순령수’도 없는 쓸쓸한 행렬이라고 말했지만 호위병력만 도합 520명이었다는 점에서 거짓이었다. 세자는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李壽鳳)과 ‘임금이 배라면 백성은 물이다’라는 설을 강론했고,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만나 질고를 물어보고 조세와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했으므로 일로(一路)가 크게 기뻐했다.”(「어제장헌대왕지문」)

호위 군사의 말이 콩밭을 짓밟자 밭 주인에게 후하게 보상하고 군사를 처벌했다. 세자의 실제 모습은 소문과는 달리 성군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노론의 홍계희(洪啓禧) 등이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승부수를 던진 것이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고변한 것이다. 『영조실록』은 나경언에 대해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고 전하고 있다. 『어제장헌대왕지문』은 ‘대궐의 하인으로 있던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 즉위년(1776) 8월 영남 유생 이응원(李應元)이 “저군(儲君:세자)을 형조에 정소(呈訴:고소)한 것은 천하 만고에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후로는 듣지 못하던 일”이라고 상소한 것처럼 일개 상민(常民)이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고변한 희한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형조참의 이해중(李海重)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홍봉한은 “청대(請對)하여 계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영조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고, 이해중은 적군이라도 쳐들어온 듯 세 차례나 급히 청대했다. 경기감사 홍계희는 호위(護衛) 강화를 요청해 도성과 대궐의 문을 닫게 했다. 잘 짜인 각본이었다. 사도세자는 고변 이후 매일 시민당 뜰에 거적을 깔고 대죄했으나 장인인 영의정 홍봉한이 이 사실을 영조에게 보고한 것은 대죄 7일째인 5월 29일이었다. 영조는 “나는 그가 대명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답하면서도 늦은 보고를 질책하지도 않았다.

영조는 윤5월 13일 이십일째 대죄하고 있던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는데 세자궁 관원들의 제지로 실패하자 뒤주 속에 가두었다. 세자는 음력 윤5월 중순의 뙤약볕 아래에서 여드레 동안 신음하다가 죽었지만, 그동안 영조와 노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적으로 생활했다. 세자가 죽은 다음 달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가 “한쪽 사람들(一邊人:노론)이 모두 소조(小朝:세자)에게 불충하였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이 말이야말로 사도세자 사건의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확인 사살이 정신병자로 모는 것이었고, 이런 기도는 최근까지도 성공을 거두었다.
***

'다시 읽는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익  (0) 2010.01.19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 이덕일  (0) 2010.01.19
조선 왕을 말하다 - 경종  (0) 2010.01.18
조선 왕을 말하다-예종  (1) 2010.01.18
조선 왕을 말하다 - 숙종  (0) 2010.01.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