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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 초상화

조선선비 초상화(2)/조선초,중기

by 싯딤 2010. 7. 15.

 

조선선비 초상화 (2) 

손소, 김시습, 오자치, 변 수, 신용개, 이우, 주세붕, 박순, 정탁, 황정욱, 이산해, 조경, 홍진, 권협, 권응수, 이원익

 

손 소孫 昭 1433년(세종 15)∼1484년(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일장日章, 호는 송재松齋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正字에 보직되었다.

1464년 정월 <의방유취>의 교정을 잘못 보아 파직되었다가 그해 7월 집현전을 폐지하고 예문관이 대신하도록 했을 때 겸예문관이 되었다가 11월 병조좌랑을 거쳐 종묘서령署令이 되었다.1467년 5월 이시애의 난 때 박중손의 종사관으로서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훈되고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특진되었다.

1469년(예종 1) 성주목사를 거쳐 공조참의와 안동부사를 역임하고 1476년(성종 7) 진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여 전리田里) 돌아갔으나 왕의 특명으로 녹봉)을 지급받았다.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친자식같이 다스렸다. 일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기근이 극심하게 들었으나 극진한 마음으로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어서, 그곳 이민里民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기도 하여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성주·진주·안동 등의 외관직은 경주에 있는 그의 노부를 봉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왕의 특지로 임명된 벼슬이었다.

초상화의 복식은 문무관리들이 평상시 일할 때 입는 복장으로 공복公服은 품계에 따라 홍, 청, 녹으로 구분하였으나 상복常服은 색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다. 단색의 흉배, 흰색 신은 성종대 초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165*105cm, 손성훈 소장, 보물 제1216호

 

 


 

김시습金時習 (1435(세종17)~1493(성종24))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승려로 생활하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5세 때 <중용>, <대학>을 익혀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를 불러 포상으로 비단을 선물하자, 비단을 묶어서 가져갔다고 한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사른 후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양주의 수락水落, 설악, 월성月城 등지를 방랑하며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머물고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에게 사육신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인 이정은과 남효온·안응세·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아내를 잃은 뒤 재취하지 않고 홍산의 무량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는 이이를 시켜 김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다.

숙종은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했다.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초상화의 복식은 조선초기 흑립형태의 사대부 편복 차림이다.

50.1*35cm. 조중구 구장. 덴리대학 소장

 

 

오자치 吳自治 1426년(세종 8)∼미상.


 

조선 전기의 무신·공신으로, 호는 서산西山이다. 본관은 나주이며 출신지는 전남 나주이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조석문과 함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2등공신에 녹훈되고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활 솜씨가 뛰어나 왕으로부터 호랑이와 사슴가죽을 하사받기도 했으며 성종 6년에 평안도 조전장군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가 1476년(성종 7) 9월, 늙은 부친의 봉양을 위해 낙향하였다.

이 초상화는 조선 초기 화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그림으로 오자치의 14세손이 개인소장하고 있다.

복식은 조선 초기 문무 관리들의 평상복으로 황금색 한가지로 묘사된 무관용 금사 호랑이 표시 흉배를 달았다. 이 호표 흉배는 무관 1,2품용이었다.

160*105cm. 오춘수 소장. 보물 제 1190호

 

 

 

변 수邊 修 (1447(세종29)~1524(중종 19))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영숙永淑이다.

예종 1년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의 여러 무관을 거치고, 1479년(성종 10) 병조참지에 올랐다. 이어 승정원으로 옮겨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좌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승진하였는데, 한명회에 부화뇌동하여 불명죄로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환급되었다.

그뒤 형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자격이 부족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은성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타도 전임을 요구하였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뒤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원천군原川君에 봉해졌다.

1511년(중종 6)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충청도와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51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성품이 탐오하여 대간들에 의하여 자주 탄핵을 받았고, 윗사람에게 아첨을 잘하였다. 1997년 12월경기도 양평에서 분묘가 발굴되었다.

복식은 문무관리들의 평상복 차림이다.

강원도 홍천 역전평리 영당 소장.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신용개申用漑 1463년(세조 9)∼1519년(중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령.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해에 승문원에 등용되었고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렸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며, 강직한 성품이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려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했다. 이듬해 성희안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이 되었다. 그 뒤 대제학·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 2년 후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고 의연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중종대에는 정굉필과 함께 사류의 중심을 이루었다. 일찍이 성종은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를 벗어서 입혀준 일이 있었다.

저서로는 <이요정집>, 편서로 <속동문선>, <속삼강행실도>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복식은 당시 문무관리들의 평상복차림으로, 흉배가 좌의정 흉배인 공작흉배 대신 운학흉배를 부착한 것은 당시 제도와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45*91cm. 신영수 소장

 

 

이 우李 堣 1469년(예종 1)∼1517년(중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이며 이황의 숙부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이 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506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하였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협력하였고, 그 공로로 정국공신 4등에 녹훈,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을 겸하였다.

1508년(중종 3)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희망,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청렴과 검소를 위주로 백성을 다스려 왕으로부터 특별히 표리를 하사받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전임, 호조참판,·형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양친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영해·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앞서 반정공신 책봉 당시에 그를 녹훈시키는 문제로 물의가 있었는데, 1514년에 와서 입직승지로서 신절(臣節)에 어긋나게 행동하였다는 비난을 받아 삭훈되었다가 이듬해 안동부사로 서용되어 선정을 베풀어 당상관에 올랐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시문에 뛰어나 산천의 명승을 읊은 것이 <관동록 關東錄>·<귀전록 歸田錄>에 전한다. 최숙생 등의 사류와 친하였다. 예안의 청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송재집>이 있다.

복식은 당시 문무관리들이 일할 때 입었던 평상복 차림으로, 가슴을 가릴 정도 크기의 단색 문양의 흉배는 성종 후대 초상화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서대도 2품용 삼급대가 아닌 1품용을 착용하였다.

166*110cm. 이용희 소장


주세붕周世鵬 (1495(연산군1)~1554(명종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이며, 시호 는 문민文敏이다.

1522년(중종 1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어 사가독서한 후 검열·부수찬 등을 지내다가 김안로의 배척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 후 곤양 군수를 거쳐 풍기 군수로 있을 때, 1542년(중종 37) 백운동에 고려 말의 학자 안향의 사당을 세웠다. 이듬해 백운동 서원(소수 서원)을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그 뒤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감사로 있을 때 해주에 해동공자, 최충을 모신 수양서원을 세웠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죽은 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초상화의 복식은 사모에 흉배를 달지 않은 무늬없는 담홍색 단령을 착용한 시복時服 차림이다. 경국대전에 시복 제도에 대해서는 없으나 중종실록에 보면 ‘조정의 복색이 각각 달라 상참, 조참, 배사 때는 시복을 입고 경연때는 상복을 입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용도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50.1*35cm. 조중구 구장. 덴리대학 소장


박 순朴 淳 1523년(중종 18)∼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우윤右尹이다.

1553년(명종 8)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홍문관수찬·교리·의정부사인(舍人) 등을 거쳐, 1561년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의 시호제정 문제로 윤원형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 로 선정을 베풀었고, 홍문관직제학·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 백운산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박통하고, 특히 <주역>에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에 능하여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다. 중년에 이황을 사사師事하였고, 만년에 이이·성혼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 광주 월봉서원, 개성 화곡서원, 영평 옥병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초상화의 복식은 사모에 흉배를 달지 않은 무늬없는 푸른색 단령을 착용한 시복時服 차림이다.

50.1*35cm. 조중구 구장. 덴리대학 소장


정 탁鄭 琢 1526년(중종 21)∼1605년(선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리로 <명종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이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선조22년 우찬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 지평 박광옥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이듬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온 후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는 물론 천문·지리·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으며, 곽재우·김덕령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하였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하였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옥중의 이순신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일시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복식은 평상복 차림이며 당시 복제와 일치한다.

170*85cm. 정충사 소장. 보물 제 48호


황정욱黃廷彧 1532년(중종 27)∼1607년(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관史官, 승문권지承文權知·예문관검열·봉교를 거쳐 시강원설서에 제수되었다.

1561년 호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해미현감으로 나아갔으며,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565년 헌납 겸 지제교·부수찬을 거쳐 지평을 지낼 때 당시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명종이 병이 나자, 그는 훌륭한 선비를 뽑아 종실을 가르칠 것을 청하였다. 1584년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명나라 법전에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것)의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그 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이 되어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을 배종陪從하여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으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에 의하여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왜장 가토로부터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권유문을 쓰도록 강요받자, 처음에는 이것을 거절하였으나, 손자와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고 아들 혁이 대신 썼다. 이듬해 왜군이 부산으로 철수할 때 석방되었지만 항복권유문을 기초한 문제로 동인, 서인 간의 정치쟁점이 되어 길주에 유배되었다.

1597년(선조 30)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복관되지 못한 채 죽었다. 문장·시·서예에 능하였으며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초상화의 복식은 사모에 무늬가 없는 흑색 포를 착용한 시복 차림으로 조선 중기 시복의 특징이 그대로 잘 나타나 있다. 그려진 시기는 그의 나이 68세 때로 임진왜란 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아직 관직이 회복되지 않은 시점이다.

78.9*56cm. 서울대학교 소장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3)~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시대 명종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벼슬을 한 조선시대 문신으로 선조때 영의정을 비롯해 여러 관직을 거친 당대의 세도가이자 문장가이다.

실록에 따르면, 이산해는 6세 때 이미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15세가 되기 전 여러차례 향시에 장원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산해를 우러러 봤으며, 그 사람됨이 순후하고 숙성하여 얻기 어려운 선비라는 말을 들었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선조대 8문장가의 한 명으로 칭송되며 나라에 그 문명을 날렸으며,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다. 초시를 거쳐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21살 때는 명종에게 그 학문의 뛰어남을 인정받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될 정도로 그의 학문적 역량이 뛰어났다.

1558년(명종 13)에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567년 선조 즉위 때 명나라 조사를 맞이하였으며 직제학, 지제교,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대사성·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윤근수·윤현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다음해 대사헌에 승진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오른 뒤,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해에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정철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을 시켜 김공량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하여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 경전으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하게 하여 강계로 유배시키는 한편, 이와 관련하여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와 백유성·유공진·이춘영·황혁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으나 양사로부터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백의白衣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에 중도부처되었다. 3년 뒤 풀려나서 영돈령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될 때 이이첨·정인홍·홍여순 등과 대북파가 되어 그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으로 환배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이이·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복식은 평상복 차림으로 1품용 서대를 띠고 있다. 복제가 경국대전과 일치한다.

162.5*83.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 경趙 儆 (1541년(중종 36)∼1609년(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사척士惕.

명종 때 포도대장,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안국의 아들로 중종 19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제주목사를 거쳐, 1591년 강계부사가 된 뒤 그곳에 유배되어 온 정철을 우대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가 되어 황간·추풍 등지에서 싸웠으나 패했고, 금산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나 부상을 입었다. 이해 겨울 수원부사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禿山城의 권율을 지원, 이듬해 도원수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거둬 가선대부가 되었다. 행주산성 승리로 한양을 탈환할 수 있었고, 도성서도都城西都 포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593년 <기효신서 紀效新書>의 신진법新陣法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소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 편제된 훈련도감 당상을 겸하고, 이듬해 훈련대장이 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함경북도병사·한성부판윤을 거쳐 1599년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무신으로 사서史書를 두루 통하여 고사에 밝았고 늦게 급제하였으나 명망이 높아 사람들이 모두 대장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시호는 장의莊毅이다.

초상화의 복식은 평상복 차림으로 무관2품용 복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홍가신洪可臣 (1541년(중종 36)∼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이며, 민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1년(선조 4) 강릉참봉이 되었을 때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에 특진되고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다 하여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때 파직당하였다가 다시 1593년 파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하여 1596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하여 박명현·임득의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광해군 초 장례원정·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판서에 이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에서 죽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사문師門의 촉망을 받았으며, 체계있는 학문을 전수받아 문장으로서 조직적인 화실華實의 매력을 갖춘 외에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문斯文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기일원론에 동조하였다.

초상화의 복식은 평상복 차림으로 정2품의 운안 흉배로 보인다.

163.6*8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홍진洪進 (1541년(중종 36)∼1616년(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희고希古. 호는 인재訒齋·퇴촌退村 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가 되고 검열을 역임하였다. 1573년 홍문록에 올라 유선록에 실린 조광조의 시, 5수를 찾아서 교서관에 보내 이를 보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박사, 부수찬·정언을 거쳐 1576년 헌납이 되었는데, 너무 빠르게 승진하였다고 스스로 사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어가를 호종하고, 좌부승지에 오른 뒤 우승지·좌승지로 선조 측근에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1593년 9월 환도에 앞서 ‘경중인(京中人)의 진휼에 전력을 다하라.’는 특지를 받고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환도 후 염철사를 겸임, 경기·황해·충청·전라도 해변의 소금을 전국 각지에 보내 기민饑民을 구제할 것을 진언하였다.

1595년 대사헌이 되고 약방제조를 겸하였고, 이후 이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뒤 1600년 왕비 의인왕후가 죽자 빈전도감제조가 되었다. 이어서 좌참찬·형조판서를 거쳐, 1604년 판의금부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광해군 1년에 관상감제조가 되었으나 북인이 집권하자 사퇴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초상화의 복식은 정1품 품계를 표현하고 있어 영의정으로 추증된 뒤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162*92.2cm


권 협權 悏 (1553년(명종 8)∼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사예·승문원·춘추관 등의 벼슬을 거쳐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89년 각 도에 괴질이 발생하자 함경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돌보고 제사를 올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장령으로서 서울을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6년 교리·시강관을 거쳐 이듬해 응교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로 명나라에 가서 사태의 시급함을 알리고 원병을 청하였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 이정이 우리나라의 지세를 알고자 하므로,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보병과 수군을 얻고 군량을 조달하게 했다. 돌아와서 예조참판·호조참판, 황해도 관찰사,대사헌, 전라도감사를 지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가 되었으나, 광해군 때에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

복식은 평상복 차림으로 흉배가 잘려 품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57*46cm. 권회영 소장


강 신姜 紳(1543년(중종 38)∼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여립의 난을 평정했고 임진왜란 때에도 크게 활약했다.

본관은 진주, 자는 원경, 호는 동고, 시호는 의간으로 1567년 진사가 되어 1577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을 평정하여 평난공신 3등과 진흥군에 봉해졌다.

1592년 승지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순찰사로 활약했으며 병조참판에 올랐다. 1596년 서북면순검사로 나갔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군사와 함께 왜군을 격퇴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전란 평정 후 부제학을 거쳐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중추부판서에 이르렀다. 1609년에 우참찬, 1610년 좌참찬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복식은 평상복으로 운학의 흉배를 달았는데 당시 종1품의 벼슬로는 공작 흉배를 착용해야 하므로 법제와 맞지 않는다.

175*88cm.경북 상주 경덕사 소장


이 준李 準 (1545년(인종 1)∼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평숙平叔) 호는 뇌진자懶眞子·서파西坡. 덕천군德泉君이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주서·정언을 거쳐 1581년 헌납이 되고, 진주목사·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도승지로서 죄인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전성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운향사運餉使가 되어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 조달책임을 맡았다가 병으로 은퇴하였다. 그 뒤 한성부좌윤·춘천부사를 거쳐 예조·병조의 참판을 지내고, 1600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 홍여순의 일파로 몰려 한때 파직되었다.

광해군 때 좌참찬·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615년(광해군 7) 개성부유수가 되었다.이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 일파가 계축옥사를 일으키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정사를 어지럽히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초상화의 복식은 2품 문관 운안의 흉배로 제도와 일치하며 당시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잇다.

162.7*92.2cm. 전주이씨 전성부원군종친회 소장


권응수權應銖 (1546년(명종 1)∼1608년(선조 41))

조선 중기의 의병장·무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白雲齋이다.

1584년 별시무과에 급제, 의주를 지켰으며, 경상좌수사 박홍의 막하에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가 의병을 모집, 궐기하였다. 이해 5월부터 활동을 전개하여 여러 곳에서 전과를 올리고, 6월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의 휘하에 들어가 7월에 각 고을의 의병장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이 무렵 영천에 있던 적군은 신영·안동에 있던 적군과 연락하면서 약탈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7월 14일 적을 박연朴淵에서 치고, 22일에는 소계召溪·사천沙川까지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25일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작하고 26일에는 결사대원 5백명을 뽑아 적진으로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다음날에는 화공火攻으로 대승, 영천성을 수복하였다.그 공으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우후가 되었다. 그 뒤 좌병사 박진의 휘하에 들어가 8월 20일 제2차 경주탈환전에 선봉으로 참가하였으나 패전하였다. 12월에 좌도조방장으로 승진하였다.

1593년 2월에는 한효순과 함께 7군의 군사를 합세하여 문경에서 적을 대파하고, 25일에는 산양탑전山陽塔前에서 적병 1백여 명의 목을 베고 크게 이겼으며, 이어 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4월에 안동 모은루 밑에서 적을 크게 격파한 다음 구담九潭까지 추격하여 적 1백여 명을 사살하였고, 7월에는 밀양의 적을 격파하였다. 9월에는 좌도방어사로 특진되었다.

1594년 정월에는 경상도병마좌별장이 되고, 4월에는 황룡사 부근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7월에는 충청도방어사를 겸직하고 이사명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고 은진현감 이곡과 함께 창암倉巖에서 가토 군을 대파하였다.

1595년 정월에는 경상좌도방어사를 겸하였으며 1603년 충무위호군忠武衛護軍에 오르고 경연에 입시하였으며, 선무공신2등으로 책록,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도총부도총관이 된 뒤 1606년 경상도방어사, 1608년 남영장南營將을 겸하였다.

좌찬성에 추증, 신령의 경덕사敬德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초상화의 복식은 임진왜란 이후의 복으로 무관1,2품 호표 흉배를 달았다. 복제가 당시 제도와 일치한다.

163*85cm. 경북 영천 백운재서원 소장. 보물 제668호


이원익李元翼 (1547(명종 2)~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공려功勵, 호는 오리梧里로 태종의 아들인 왕자 익녕군 이치李袳의 4세손이다.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었으나, 원래 인품이 곧아 사람 사귀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없었으나, 유성룡만은 그의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이듬해 황해도사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

이이가 황해감사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이이가 천거하여 1576년 정언이 되고,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사부 하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그 후 대사헌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왕이 피란하는 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이듬해 평양 탈환 작전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으나, 일본과 화의를 주장한 죄로 물러난 유성룡을 변호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상이 되어 누차 소문을 올려 국사를 논했다. 선조를 간언하여 한때 대신을 그만두고 시골에 가 있었으나 1600년 다시 소환되어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고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였다. 1615년 폐모론을 반대하다 홍천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 때에 공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다. 또한 인목대비가 한사코 광해군을 죽이고자 할 때 모든 공신은 이에 찬성하였으나, 이원익은 대비에게 간청하여 이를 무사하게 하였다. 대동법을 시행하여 공부貢賦를 단일화하였다.

청백리에 뽑혔으며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오리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사후 인조의 사당에 모셔졌다.

초상화의 복식은 무늬없는 담홍색 단령의 시복 차림으로서(초상화 상)당시 관료들에게 홍단령이 널리 유행했었다. 평상복의 흉배는 문관 1품용 공작 흉배이다.(초상화 하).

165.8*81.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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