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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 초상화

조선선비 초상화(1)/어진. 여말선초

by 싯딤 2010. 7. 14.

조선선비 초상화(1)

어진/태조, 영조, 연잉군, 철종, 고종

최치원, 강민첨, 최유선, 안향, 이제현, 염제신, 이색, 정몽주,조반, 송암부인 이씨, 황희, 조말생, 하연, 경재부인 이씨, 신숙주, 장말손.

 

 

태조 이성계 (재위1392~1398)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여 조선을 세우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익선관과 곤룡포로 구성된 왕의 평상복 혹은 시무복 차림이다.

조중묵 필, 218*156cm. 전주 경기전 소장. 보물 제931호

 


영조 (재위1724~1776)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탕평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익선관과 곤룡포로 구성된 왕의 평상복 혹은 시무복 차림이다.

조석진, 채용신 필, 견본 설채,203*83cm.궁중유물전시관 소장, 보물 제 932호

 


이 금(李 昑, 영조 등극 전 연잉군 시절)

왕자의 평상복 차림으로, 사모에 망건을 두르고 허리에 1품의 서대를 띠었다.

견본설채, 147*72cm, 한국전쟁당시 부산에서 반소됨, 최광수 이모移模,

150*100cm, 궁중유물전시관

 


 

철종 (재위 1849~1863)

조선 제 25대 왕.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에 들어와 이듬해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융복戎服 차림의 구군복具軍服이다.

한국전쟁당시 부산에서 반소됨, 최광수 이모移模, 견본설채,205*108cm, 궁중유물전시관

 


고종 (재위 1863~1907)

조선 제26대 왕.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황제에 즉위한 뒤 그려진 것으로 조복朝服 차림이다.

고종황제어진, 210*116cm. 궁중유물전시관

 


최치원

신라시대 학자.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의 종사관으로서〈토황소격문〉을 기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화랑도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분홍빛 도는 단령團領에 당건唐巾의 영향을 받은 관모를 썼다. 당시 관모는 진골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이런 형태였다.

37*29cm, 조중구 구장 덴리(天理)대학 소장

 


강민첨姜民瞻 (?~1021)

고려시대의 장군. 목종 8년(1005) 문과에 급제하여 전공을 통해 이름을 날렸다. 영일 등에 쳐들어온 동여진을 격퇴하고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해 흥화진에서 격파했으며 거란 군이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자 이를 추격해 자산에서 크게 이겼다.

복식은 고려시대 관리들이 일할 때 입는 공복 차림이다.

박춘빈 이모, 80*61.3cm. 강영선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물 제 589호

 


최유선崔惟善 (?∼1075)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1030년(현종 21) 과거에 급제하여 7품으로 한림원에 들어갔다. 1047년(문종 1)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지중추원사로 이득로와 거란 흥종興宗의 장례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061년 판상서예부사를 거쳐 문하시중이 되었다.

대를 이은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사리에 밝았으며 여러차례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문종 묘정에 배향. 시호는 문화文和.

복식은 고려시대 관리들이 일할 때 입는 공복 차림이다.

37*29cm, 조중구 구장 덴리(天理)대학 소장

 


안향安珦 (1243년~1306년)

고려의 학자, 명신名臣으로 본관은 순흥,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문종 때 어휘가 같아(문종의 휘가 향珦), 향向으로 적었으며, 초명을 따라 안유로 불리기도 했다.

1286년(충렬왕 12)에 정동행성의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과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으며, 같은 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가 연경에서 주자전서를 보고 기뻐하여 책을 베껴 쓰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장학기금으로 6품 이상은 각각 은 1근씩, 7품 이하는 포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 학교를 운영케 하는 등 고려 말기의 유학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주자를 숭배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고까지 했다.

이 초상화는 죽은 지 12년째 되는 1318년(충숙왕 5)에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 명하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한 것으로 현재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제현의 초상화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그림의 하나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복식은 검은색 무명으로 평평하게 만든 평정건과 곧은 깃의 흉색포로 구성된 편복 차림이다. 평정건은 고려 말기 유생들이 착용하였다.

136*67cm, 경북 영주 소수서원 소장, 국보 제111호.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고려의 문신이자 정치가·유학자로 본관은 영일,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 삼은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 검열·수찬修撰 등을 거쳐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의 토벌에 참가하였다. 이후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보문각 응교 겸 성균직강·성균사성에 올랐다. 1372년 정사正使 호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하던 중 풍랑으로 13일 동안 사선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귀국했다.

1376년(우왕 2) 우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여 ‘점점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와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라고 상소하였다가 울산 언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서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여 응낙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문관으로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가하였다.1382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입국 거부로 요동에서 돌아왔고, 1383년 동북면 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 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어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9년 예문관 대제학·문학 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했다. 공양왕을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커져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만나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조선 조정은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그 외 11개 서원에서도 제향되었다.

복식은 문무관리들의 평상복 차림으로, 당시 사모, 단령, 화대 등의 복제는 명나라 복제를 그대로 적용했었다. 화대는 1품용 삽화 금대이다.

37*29cm, 조중구 구장, 덴리대학 소장

 


송암부인松菴婦人 이씨 (?~1433)

정경부인 계림 이씨는 시온서 직장을 역임한 이양오의 딸로 남편은 조선조 개국공신인 조반(고려말~조선초 문신. 공양왕 1년, 밀직사동지사로 왕의 즉위를 전하려고 명나라에 갔을 때 윤이·이초 등의 무고 사실을 해명하여 명나라 황제의 의심을 풀게 함. 조선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부흥군에 봉해짐)이다. 이씨가 세상을 떠나지 세종은 부의로 석회 50석을 하사하였다.

91*71.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 반趙 胖 (1341년(충혜왕 복위 2)∼1401년(태종 1))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은천군 하何의 손자로, 호군 세경世卿의 아들이다.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매부인 단평장段平章의 집에 있으면서 한문과 몽고어를 배워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인정을 받아 중서성역사가 되었다.

1368년(공민왕 17) 아버지가 늙어 환국하여 1382년(우왕 8) 판도판서로서 하정사 겸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하였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1385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하고 돌아왔다. 이때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의 종 이광이 자기 땅을 빼앗자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에 의하여 투옥되었으나, 이 일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여 최영(崔瑩)과 사전협의를 한 우왕의 명으로 조반은 석방되고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염흥방 일당이 처형되는 무진피화戊辰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뒤 동지밀직사사·개성윤이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왕의 즉위를 알렸으며, 이때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의 본국에 대한 무고 사실을 명황제에게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게 하였다. 다음해 돌아와 윤이와 이초의 사건을 보고하여 이색李穡 등 수십명이 피해를 당하는 옥사를 일으켰다.

1391년 공전公田을 함부로 빼앗아 성헌의 탄핵을 받고 관직이 삭탈되어 죽림으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나, 1392년 지밀직사사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복흥군에 봉하여졌으며,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또한, 백관의 장문狀文을 가지고 조선 개국의 사실을 알리러 명나라에 갔다가 석달 만에 돌아왔다. 1394년(태조 3) 6월 이방원과 함께 명나라에 표문을 올렸고, 11월에는 이방원을 수행하여 재차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5년 판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가, 상의문하부사를 거쳐 참찬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숙위肅魏이다.

복식은 평상복 차림이다. 허리에 삽금대를 띠고 가슴에 다시 검은색 대를 두른 것은 독특한 양식으로 송나라 군신들이 착용한 공복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차림이다.

92.7*71.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황희黃喜 (1363~1452)

여말선초 문신이며 재상이다.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1376년(우왕 2년), 14살 때 음직으로 녹사가 되었고, 23살에 진사시에 급제, 27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에 보직되었다.

30살이 되던 해 고려가 망하자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여 불을 질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 중 나이가 가장 어린 황희가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예우에 육조판서를 역임하는 동안 대사헌·지의정知議政·견명사遣明使·참찬·도순문사·한성판사 등 내외의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 문물과 제도 정비에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태종은 모든 정사를 황희와 깊이 논의하였다.

1413년(태종 13년) 세자 제禔(양녕대군)의 폐립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어 태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가, 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파주) 지방에 유배되었다. 이 해,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져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황희는 남원에서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1422년(세종 4년) 태종은 그를 소환하여 직첩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등용토록 하여 의정부 참찬이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69세 되던 1431년(세종 13)에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 87세로서 은퇴하였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37*28cm, 조중구 구장, 덴리대학 소장

 


조말생趙末生 (1370~1447)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근초謹初, 호는 사곡社谷· 화산華山이다. 정몽주의 제자인 성리학자 조용의 문인이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정언·헌납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418년 이조참판, 형조판서가 되고 세종 즉위 후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7년(세종 9) 병조판서 때 그의 명의로 왜倭에 보낸 국서國書에,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경주)에 예속된 우리 영토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 후 함길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여진족 방어에 힘썼고, 1435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1437년 경상·전라·충청 3도의 도순문사로서 축성사업을 감독하였다.

1439년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었다. 1442년 숭록대부가 되었으며, 1446년에 영중추원사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시호는 문강文剛.

복식은 문무관리들의 평상복 차림이다. 그런데 운문단 단령에 모란, 쌍학이 함께 그려져 있는 흉배의 문양, 사모의 형태 등이 당시의 복제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178.8*104.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하 연 (1376∼1453)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정몽주의 문인으로,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녹사를 거쳐, 집의·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이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세종 5년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는 정책을 냈다.

142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린 뒤 형조·병조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1445년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을 받았으며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문종 1)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년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 합천의 신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50.1*35cm, 조중구 구장, 덴리대학 소장

 


경재부인敬齋夫人이씨 (생몰년 미상)

공민왕 15년 정언으로 있을 때 신돈의 횡포를 탄핵한 이존오의 딸로 경재 하연의 부인이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인 우명공의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이 생존에 계실때 영정을 그려 놓는 등 극진히 봉행하였다. 그의 어버이 영정이전북 무주 백산서원에 전하며 일본 덴리대학에도 남아 전한다.

50.1*35cm. 조중구 구장, 덴리대학 소장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으로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1439년(세종 21년)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을 시작으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는 6대의 임금을 섬겼다. 집현전에 있으면서 장서각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열심히 읽고 동료를 대신하여 숙직하면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익혔다. 세종은 그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발견하고 어의御衣를 하사하여 칭찬했다.

1442년(세종 24) 훈련주부가 되어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 집현전 학사로서 언어에 능해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한 동아시아 7개 국어에 신숙주가 능통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가장 공이 컸는데 마침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왕래하며 음운에 관해 논하였다.

세조가 즉위하기 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신숙주는 서장관으로 따라갔다. 세조 즉위 후 침실에까지 불러들여 의논하였으며, 공신을 내리고 고령군에 봉하였으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다. 세조가 죽고 어린 예종이 즉위하니 원상院相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남이장군을 숙청하여 보사공신保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돌아가고 성종이 즉위하니, 공신의 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경국대전,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 일본과 여진의 지도地圖를 만들었으며, 동국통감, 오례의도 왕명으로 편찬했다.

문무관리들이 평상시 일할 때 입었던 상복차림으로, 날개를 접고 나란히 서있는 백로의 흉배로 보아 정1품 영의정에 오르기 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167*109.5cm, 고령 신씨 문중 소장, 보물 제 613호

 


 

장말손張末孫 (1431~1486)

조선 전기 문신으로 본관 인동仁同, 자는 경윤景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63년(세조 8) 승문원 박사를 거쳐 한성참군漢城參軍 ·사헌부감찰 ·함길도병마도사 등을 지냈다. 1467년 예조좌랑으로 이시애의 난 때 강순을 따라 토벌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으로 내섬시 첨정에 승진하였다. 1470년(성종 1) 장악원 부정副正을 거쳐 중추부첨지사 ·해주목사 등을 지냈으며, 성종13년에 연복군에 봉해졌다.

171*107cm, 장덕팔 소장, 보물 제5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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