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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설교평

신앙의 신비, 주술인가 역사인가? -김기동 목사

by 싯딤 2009. 11. 27.

신앙의 신비, 주술인가 역사인가?


-서울성락교회 김기동 목사-



선입관 지우기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서울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이하 ‘김 목사)의 근영이 놓여있다. 지금부터 20년 전, 김 목사가 출판한 책 <마귀론 上>에 실려 있는 사진인데, 대략 40대 중반 쯤으로 보인다. 등 뒤로는 벽돌로 된 벽이 있고, 소파가 그 벽을 따라서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김 목사가 강단용 성서를 들고 그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아마 그 당시의 성락교회 강단에서 찍은 게 아닐까 모르겠다. 좁은 체크무늬의 회색빛 싱글 양복을 입고, 엷은 하늘색 조끼를 받쳐 입은 채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프로필은 성직자다운 풍모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관상학에 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또한 그것을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내가 그의 사진을 통해서 받은 인상은 풍문으로만 듣고 막연하게 가졌던 그에 관한 좋지 못한 선입관을 흔들었다. 마귀와 귀신을 기독교 신앙의 인식론적 토대로 삼고 있는 목사라고 한다면, 그래서 많은 정통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단죄된 목사라고 한다면 그의 겉모습에도 그런 느낌이 물씬 묻어나야 했을 텐데, 그리고 나는 그걸 예상했는데 영 딴판이었다. 사람의 속과 겉이 다르다는 말이 이번 경우에 해당되는 걸까? 아니면 김 목사가 매우 지엽적인 문제를 빌미로 매도당한 것일까? 어쩌면 김 목사가 기독교의 종교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내 마음의 한쪽에 남겨둔 채 서울성락교회(이하 ‘성락교회’)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대략 1시간 20여분이 소요되는 성락교회의 예배도 역시 전반적으로는 괜찮았다. 그들은 요즘 흔하디흔한 복음 찬송에 치우치지 않고 파이프올갠 반주에 따른 예배 찬송을 불렀으며, 놀랍게도 매월 첫 주일은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1993년 한국 교회 건물로는 최초로 서울시 건축대상 금상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교회당에 모인 수만 명의 신자들에게 매월 성찬식을 베푼다는 건 김 목사가 예배의 본질에 치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주일공동예배에서 주기도는 드리면서 사도신경이 빠진 게 이상했다. 성락교회에 직접 전화로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 그들은 사도신경이 성서에 나와 있는 주기도와 달리 초기 교부들의 신학적인 교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침례교회 중에는 자기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는 교회들이 제법 많다고 하는데, 정확한 말인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대략 30여분 정도의 길이로 진행되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병마야, 물러가라!”거나, 또는 “귀신아, 나가라!”는 축사(逐邪) 행위가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최근에 설교 형태를 바꾸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검색한 최근의 김 목사의 설교에서는 그런 행위들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런 요소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런 건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인 순복음중앙교회의 조 아무개 목사 같은 이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니까 크게 문제 삼을 게 못된다. 다른 대형 교회 설교자들의 설교와 비교할 때 크게 문제 삼을 만한 게 내 눈에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설교를 비평해야 할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내가 이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일단 그에게 붙여진 이단이라는 딱지를 무시하고 그의 설교를 들리는 그대로 듣고, 보이는 그대로 보는 방법밖에 없다. 선입견 지우기가 곧 기독교 영성의 토대라는 평소의 지론을 실천할 순간이 바로 지금인 것 같다.

과유불급
그에게 받은 첫 인상과 그의 설교가 나에게 이렇게 정상적인 것처럼 다가온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우선 김 목사의 설교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발견할 만큼 신학적인, 영적인 깊이가 나에게 부족한 탓인지 모른다. 하수는 고수의 정체를 폭로할 수 없는 법이다. 또는 그에게 가졌던 나의 선입견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은 아닐는지. 그렇지 않다면 혹시 내가 그동안 성서와 기독교의 근본에서 벗어나는 정통교회 설교자들을 자주 경험한 탓에 김 목사의 설교도 역시 크게 일탈된 것으로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외눈박이 원숭이 나라에서는 외눈박이가 정상으로 보이기 마련 아닌가. 그러나 이런 것들은 표면적인 것들이고, 더 실제적인 이유는 사이비 이단들의 신앙적 특성인 열광주의를 김 목사가 배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개 의외였다는 데서 시작된다. 매우 건전한 설교학 교수의 강의처럼 들리는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영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이 이성을 떠나 어떤 무아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기독교는 무아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방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학대하고 부정하며 금욕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상실하게 하여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하는 것 아닙니까?(마귀론 中, 증보판, 미혹의 영이란?, 4쇄 1995, 185쪽. 이하 ‘미혹’).

물론 김 목사가 간혹 통성기도 중간에 방언을 한다거나 찬송 중간에도 탁성으로 분위기를 끌어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설교 행위만 놓고 볼 때 감정보다는 논리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독교의 구원론에서 일단 매우 정확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김 목사는 경건주의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이 미신으로 떨어질 위험성도 잘 알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을 미신의 차원에서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간을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게 아니라, 어떤 종교적 사상이나 교회건물을 우상화하여 섬기거나 두려워한다는 것이다.(미혹 226). 그래서 그는 이단의 발호를 자주 걱정하면서(미혹 23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인간의 수고나 헌신 또는 어떤 공로가 개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는 다른 예수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 없이 전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복음입니다.(마귀론 上, 1985, 99쪽. 이하 ‘상’).

김 목사는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분명하게 견지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말씀 계시와 이성이 대립적이지 않다고까지 주장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말씀은 이와 같이 이성을 초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가 보니’ ‘내가 들으니’ 하여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 계시의 말씀을 대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미혹 186).

김 목사가 과연 계시와 이성의 관계를 충분히 성찰했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만약 그가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대로 업적신앙과 감정신앙을 극복하고 기독론적이고 계시론적인 신앙과 합리적인 인식론을 추구하고 있다면 아무도 그에게 시비를 걸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귀신론이라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건 기독교 신학에서 아직 정립되지 않은 부분을 그가 경솔하게 처리한 것뿐이지 그를 기독교 공동체에서 배제시켜버려야 할 만큼 결정적인 결격 사유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김 목사의 귀신론이 기독교적이라거나, 또는 그게 별게 아니라는 뜻으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이런 문제를 일일이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요한계시록을 극단적인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일반 목사들에게도 끝없는 이단시비가 붙게 마련이다. 사실 삼위일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삼신론에 빠지든지 군주론적 일원론, 또는 양태론에 빠지거나, 아니면 아예 삼위일체론적 인식이 전혀 없는 설교자들이 태반이다. 또한 김 목사처럼 귀신 문제를 노골화하지 않았을 뿐이지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귀신에 관한 성서의 보도를 정확한 ‘삶의 자리’에서 해석하지 못한 채 실제로는 김 목사와 비슷하게 설교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그의 귀신론 자체보다는 그가 그런 귀신론에 사로잡히게 된 근본적인 사태를 찾아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글이 원칙적으로 이단 논쟁을 목표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김 목사의 귀신론은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김 목사는 기독교 신앙에 관한 신학적인 토대가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단지 목회의 과도한 열정에 사로잡혀서 결국 극단적인 귀신론 안으로 몰입된 것 같다. 사실 극단(極端)은 이단(異端)의 허점을 보이기 마련이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이 한국 목회자들도 자신들의 지나친 목회적 열정을 가라앉혀야할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벤처 사업가 ‘저리 가라’이다. 이제 목회 초기에 문둥병 환자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낼 정도로(마귀론 하, 23쪽. 이하 ‘하’) 남이 따라하기 힘든 목회의 열정에 사로잡혔던 김 목사가 귀신론이라는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그 사태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자.

신학무용론
김 목사가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는 방식은 “신학적이냐 성서적이냐 하고 따지기 이전에 현상학적으로 취급함으로써 다양하고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상 책머리)는 것이다. “사상(事象)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명제로 유럽 철학계에 현상학을 도입한 후썰의 주장처럼 어떤 절대적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존에 유통되던 모든 형이상학의 틀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옳다. 예컨대 ‘구원’이라는 개념도 기독교 안에서 이미 교리화했기 때문에 그것의 실체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일체의 고정관념들을 뛰어넘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김 목사가 말하는 ‘현상’은 선험적 엄밀성에서 제시되는 게 아니라 매우 단순한 주관적 ‘경험’을 직관하는 것뿐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는 성서와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신앙적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이렇게 주장한다.

예를 들어 총을 쏠 때 가늠쇠와 가늠자가 있어 이를 잘 맞춰 놓으면 물체를 맞힐 수 있는 것같이 1차적으로 성서에 근거하고 2차적인 경험을 통해 3차적으로 결론을 얻을 수 있으나, 해석은 금물입니다.(상 10).

바로 위의 진술은 김 목사의 귀신론을 비롯해서 그가 제시하는 모든 주장의 토대이다. 성서와 경험 사이에는 오직 성령만 개입할 뿐이지 그 어떤 신학이나 교리도 개입할 수 없다. 그에 의하면 성서와 경험이 일치할 경우에만 어떤 사실은 진리로 인정될 수 있다. 성서가 단지 죽은 언어가 아니라 우리 삶의 경험에서 구체적인 생명을 얻어야만 진리가 된다는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듯이 그는 무언가 그럴듯한 주장을 제시하다가 헛발질을 하는 경우가 많다. 기초체력과 기본기가 부실한 축구선수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성서와 신앙경험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지 않은 채 무슨 기독교적인 진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인지 나는 그의 말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혹시 그는 <원리강론>에서 하늘의 예언자나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자신만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선명과 비슷한 극단적 주관성에 빠져있다는 말인가? 그는 신학무용론을 넘어서 교리를 미신이라고까지 폄하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학에 몰두하다 보니 교파의 분열이 조장되고 그로 인해 성도들의 신앙은 표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체계라는 말씀입니다. 교리란 원래 미신을 체계화한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는 미신과는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미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영혼 169).

신학박사 학위를 비롯해서 4개의 박사 학위를 받은 김 목사가 무슨 근거로 “교리란 원래 미신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주장은 그의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매우 부실하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확실한 것으로 주장하는 귀신론 자체가 교리(dogma)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가 신학 혐오증에 빠진 이유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그에게는 칭의와 성화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귀신 들린 사람들과 병자들을 고치는 일이 중요하며, 창조와 종말에 관한 신학적 지식을 얻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아가는 게 신앙의 목표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이 신학적 개념으로 완전히 해명될 수 없기도 하고, 신학이 영적인 현실성을 놓치고 현학적으로만 기울어지는 경우에 신학 자체를 위한 학문으로 떨어질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일단 옳다.
그러나 정통교회의 설교자들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이런 신학 무용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기함정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구전, 로마 교회의 세례문답인 사도신경, 그리고 복음서와 바울의 여러 편지들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기독교를 심화하고 내면화한 그 역사의 과정에는 신학적 사유가 깊숙이 작용했다. 다른 부분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우리 앞에 놓인 성서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적 해석이라는 사실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무죄한 사람들이 왜 고난 받는지, 장애인들이 받아야 할 삶의 무게는 어찌할 것인지, 악의 근원,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 평화와 구원의 출처, 로마제국 앞에서 당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수난, 궁극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현실들을 붙들고 신학적으로 해석한 흔적이 바로 성서다. 따라서 그 성서가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신학적 해석 과정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진리의 영인 성령은 그런 방식으로 성서와 설교에서 활동하신다.
나는 김 목사를 비롯하여 신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설교자들에게 묻는다. 성서 기자들은 자신들에게 압박해 오는 역사를, 혹은 역사의 신비를 해석하기 위해서 전력투구 했는데, 왜 당신들은 ‘무조건적인 믿음’이나 ‘성령의 조명’이라는 명분으로, 김 목사의 경우에는 ‘해석은 금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성서가 자리하고 있는 그 역사의 깊이로부터 도피하는가? 내가 보기에 그런 태도는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전혀 맛보지 못한 설교자가 자의반타의반으로 걸려드는 설교 편이주의에 불과하다.

차멀미, 배멀미 귀신
설교 편의주의라는 말이 불쾌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바란다. 그러나 내가 접한 많은 설교 명망가들의 특징은 설교 준비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 목사도 설교준비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다. 워낙 청중을 다룰 줄 아는 베테랑이 된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이미 정리된 일정한 신앙적 정보를 청중들과 설교자의 입맛에 맞도록 전하는 요령에만 익숙하지 성서 본문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이 전혀 없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김 목사는 2005년 5월29일에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기도”(시 105:1-10)라는 설교를 했다. 그는 30여분 동안 하나님이 참된 신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만 상식적인 차원에서 설명했을 뿐이지 시편 기자가 처한 영적인 상황과 그가 기도하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스쳐지나가고 말았다. 설교 중간에 “내 영혼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자!”는 구호를 3번 외치게 하고, “내 영혼아, 복을 받자!”는 구호를 2번 외치게 했을 뿐이다. 2005년 6월5일 “하나님이 주문하시는 기도”(사 1:18-20)라는 설교에서 김 목사는 본문과는 아무 상관없는 영생 문제와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는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과 상의하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불쌍한 자세로 서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날의 설교를 끝냈다. 내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이사야가 피를 토하듯 외치고 있는 죄의 현실에 대해서는 소 닭 보듯이 지나간 채, 본문과 아무 상관없는, 또는 ‘거짓 예배’를 질타하는 본문과 정반대라 할 십일조를 비롯한 ‘신자의 다섯 가지 의무’를 강조한 후, “내 영혼아, 하나님과 의논하자!”는 구호를 3번 외치게 하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이사야가 여기서 거론하는 구체적인 죄는 23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고아와 과부를 무시하는 이스라엘 방백들의 행위였다. 비틀린 역사에 대한 예언자들의 깊은 고뇌를 외면한 채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 안에 안주하고 있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는 철저하게 침묵당하고 있었다. 내가 확인한 그의 모든 설교가 이런 방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수만 명의 신자들이 그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다고 하니,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으랴.
설교 편이주의는 약간씩 무늬만 달리할 뿐이지 많은 설교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혹은 신학적 안목의 결여로 인해서 성서 본문의 세계가 자신의 영적인 시야에 잡히지 않는 설교자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김 목사의 설교가 본문과 ‘따로 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겠다. 그러나 김 목사가 귀신론에 집착하게 된 그 이유가 바로 이런 설교 편이주의라는 사실만은 좀더 분명하게 짚어야겠다. 그것은 곧 김 목사가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수고를 피한 채 성서의 사건들을 흡사 신문의 뉴스 보도처럼 진술된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결국 성서 시대의 미숙한 세계관이 그의 신앙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김 목사는 귀신과 마귀에 대해서 기독교인이 되기 전보다는 그 이후에 성서를 통해서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는 성경에서 귀신이 있다는 것을 배웠으며 귀신은 사람의 원수로서, 모든 병의 원인이 되며 사람들의 생활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귀신들린 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쫓는다는 것도 성경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주님의 강력한 명령으로 ‘너희는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라’ 하신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미혹 158). 본인이 그렇다는데 내가 굳이 나서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우습기도하고, 오늘의 핵심 주제가 귀신론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천수를 채우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영이 귀신이라는 그의 경솔한 주장에(미혹 68, 78, 하 137)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사양하겠다. 그의 귀신론이 안고 있는 자체상의 모순이나 비성서적 문제들, 또한 그것의 무속적 성격들도 역시 접어두겠다. 대신 그가 경험한 귀신들의 76%가 여자귀신이었다거나(하 153), 도벽이 있는 소년의 주머니에 든 돈이 자기 눈에 보였다거나(하 173), 자신이 직접 죽은 자를 살린 경험이 있다는 주장(하 26)에서 우리는 그의 귀신론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만 확인해두자. 급기야 김 목사는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면서(하 170) 귀신론을 거의 개그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린다.

셋째, 차멀미, 배 멀미하는 것도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멀미 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멀미하지 않습니다. 넷째, 어두운 곳이나 골목을 들어서면 머리가 쭈뼛쭈뼛해지는 것도 귀신 들렸기 때문입니다. <중략> 일곱째, 앉거나 설 때, 어지러운 것도 귀신 들렸기 때문입니다. 고혈압이다, 저혈압이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다 귀신 들렸기 때문에 어지러운 것입니다.(하 214).

이런 정도라고 한다면 나도 역시 이 귀신 들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1986년도에 출판된 책에서 주장하기를 40만 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한다.(하 10). 그때까지 그의 목회 경력을 20년으로 잡는다면 매일 50명 이상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그런 능력이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면 지금쯤 80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축사 행위를 직접 본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것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그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이 당연히 누려할 권세라고 강변되는(미혹 132, 상 26, 203) 축사행위가 신앙의 중요한 대목으로 자리하게 된 그 원인만 짚을 수 있을 뿐이다.

주술적 세계관
신학적 해석과 전혀 상관없이 고착화한 그의 귀신론은 기본적으로 그의 성서읽기와 신앙경험이 철저하게 ‘주술적’ 세계관에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신앙경험이 주술적이라는 것은 그가 귀신론의 대가이며 한국 제일의 축사자라는 사실에서 이미 확인 된 것이다. 그렇지만 김 목사 자신은 그것이 주술(呪術)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신앙의 능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과연 그는 이 세상을 주술적으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신앙적으로 바라보는가? 그리고 그 차이는 무엇인가?
김 목사에 의하면 이 세상은 악의 권세를 지닌 마귀가 지배하는 음부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따라서 우주는 곧 ‘음부’라는 것이다.(상 181). 그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마 16:18)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은 음부 가운데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교회가 있는 이 세상이 음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감히 지배하지 못하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하늘을 열고 들어갈 수 있고 또 이를 언제든지 닫을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영혼 81).

그는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교회가 음부 가운데 세워졌다는 뜻으로 오해한 것 같다. 이 세상이 음부라는 주장은 그의 설교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 지구는 마귀가 정죄될 때까지 마귀를 유도하고 결박하기 위한 장소라 했습니다(유 1:6). 그때까지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후 마귀를 완전히 지옥에 보낼 때 이 음부는 지옥으로 화하고 구속받은 자들은 주님의 예비한 처소로 올라간다고 성경은 말했습니다.(미혹 223).

요한복음 기자는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다고 했으며(요 3:16), 시편 기자는 “야훼여,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사오나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시 104:24)고 노래했는데, 김 목사는 무슨 근거로 이 세상을 악마가 지배하는 음부라고 주장하는 걸까? 성서는 기본적으로 음부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껏해야 죽은 사람이 가야 할 어떤 곳으로 표상하고 있을 뿐이다.(욥 26:6, 시 88:11, 계 9:11). 설령 그가 견강부회 식으로 인용한 마 16:18절과 유 1:6절처럼 성서 어느 구석에 이 세상을 음부라고 지칭한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구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로 고백하는 성서 전체의 기본입장에 비해서 거의 무의미하거나 지엽적일 뿐이다. 만약 성서에 관한 최소한의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준비된 설교자라고 한다면 ‘부분’으로 ‘전체’를 뒤집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김 목사는 성서를 자신의 주장처럼 현상학적으로 접근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귀신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몸은 귀신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서 귀하게 만든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단을 정죄하기 위해 만든 도구에 불과하다.(상 74). 그의 영적인 시야에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마귀의 합법적인 권세만 가득한 것 같다. 이런 마귀론과 귀신론이 극단화하면 개인의 존엄성을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든다.

성도가 마귀로부터 괴로움 당하는 것은 마귀에게 주어진 권세이기에 불법이 아닙니다. 이는 불법을 행할 권세를 가지고 합법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곧 불법을 합법화시켜 하나님이 법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노아 홍수 때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어도 하나님은 관심이 없지 않았습니까?(상 153).

인간의 죽음이 하나님에게 별 문제가 아니라는 건 참으로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그는 도대체 이런 발언들을 어떻게 수습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딱하다. 작년 말, 서남아시아에 발생했던 쓰나미 재앙을 불신앙과 연결시켰던 서울금란교회 김 아무개 목사와 비슷한 세계관처럼 들린다. 김 목사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성서와 신학에 대한 전체적인 균형감각을 잃을 경우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우 비성서적일 뿐만 아니라 비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김 목사에 따르면 음부라 할 이 세상에서 귀신에게 고통당하는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과 불행의 근원이 간단히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심층적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악령의 힘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다. 흡사 셰익스피어가 <한여름밤의 꿈>에서 청춘남녀의 사랑에 ‘요정’이 개입한 것처럼 묘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 악과 구체적으로 맞서 ‘투쟁’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악령추방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역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주술적인 행위이다. 내가 보기에 악한 영이 개입한 인간의 운명을 축사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무당들의 세계관이나 김 목사의 세계관이나 역사가 완벽하게 실종된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이다. 물론 김 목사가 무당의 축사는 귀신을 달래는 것이고, 자기의 축사는 꾸짖고 멸시하는 것이라고 차별화했지만 말이다.

주술적 신앙
김 목사의 음부론에 근거한 마귀론과 귀신론만 주술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현재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의 설교에도 역시 이런 주술적인 형태는 적지 않게 나타난다. 성서의 ‘축자영감설’은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철저하게 훼손된다는 점에서 분명히 주술적 세계관에 가깝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조금 더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주술적 형태는 헌금행위이다. 우리는 십일조 제도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그 배경을 충분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 규범인 것처럼 신자들에게 강제하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를 상대화하는 김 목사도 십일조만은 절대화하고 있다.(2005년 6월26일 설교).

십일조를 하면 이 땅의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창고는 크게 만들어 놓고 십일조는 겨우 몇 번 드리고 나서 하는 말이 ‘왜 하나님이 안 채워 주시느냐?’고 원망합니다. 십일조를 했으며 당신의 창고는 벌써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히 받을 수 있도록 되어진 것입니다. 그 권리를 먼저 확보하게 되면 반드시 창고는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좀더 기다리십시오.(영혼 199).

여기서 나는 십일조의 신학적 정당성 여부를 거론하고 싶지 않다. 다만 교회를 꾸려가야 한다는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십일조 헌금이 복을 주술적으로 제공할 것처럼 가르치는 태도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점은 짚어야겠다. 이상한 일이다. 왜 우리는 성서를 자기 필요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걸까? 복더위를 맞아 당회를 끝낸 다음 보신탕집을 찾아가는 교회도 많겠지만,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말씀은 뻔뻔스럽게 어기면서, 십일조는 무조건 따라야 할 의무로 가르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신자들에게 헌금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기초에서부터 바르게 배우지 못하면 그 신자의 모든 세계관은 결국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신자들이 헌금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헌금문제만이 아니라 교회당이 이 세상의 다른 공간과 구별되는 거룩한 장소로 간주되고, 목사의 기도가 일반 신자들의 기도보다 영적인 능력이 훨씬 많다고 생각되거나, 일천번제를 신앙의 증거로 삼기도하고,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서 부모의 노후나 자녀의 진로를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들은 거의 주술적인 수준이라고 보아도 좋다.
이왕에 주술의 문제가 나왔으니까 기독교 신앙의 훨씬 본질적인 주제까지 밀고 들어가 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담과 인류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헐어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생각한다. 이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숙명으로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기계적으로 따라간 것처럼 가르친다면 기독교의 구원론은 주술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김 목사는 이 문제를 훨씬 극단화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참사람이신 예수가 죽기로 결정되고, 그가 죽기로 결정된 순간에 사람은 살기로 작정되었다.(영혼 91). 급기야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죄와도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고립된 영원불변의 진리로 초월해버린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기 전, 만세 전에 이미 죽기로 작정된 분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모든 사건이 예수 안에서 예정되어진 것입니다(엡 1:4). 우주가 창조된 이후에 인류가 범죄했기에 그 죄를 사하려고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하 52).

이런 역사 결정론에 머물러 있는 한, 기독교 신자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추락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예감하고 그것을 피해보려는 생각을 했으며, 십자가에 달렸을 때는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경험했다. 인간적 삶의 완전한 실패라 할 수 있는 십자가는 예수의 선택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는 이미 예정된 부활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역동성이다. 구원론에 관한 심층적 인식론이 필요한 이 부분을 우리의 주제와 연결시켜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미 예정되고 결정된 수순의 진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술이고,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그래서 인간의 앙가주망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숙명주의가 아니라 미래로 열려진 길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부단히 고뇌하고 결단하는 역사의식이다. 역사를 폐기처분하는 주술이 한국교회의 구석구석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리라.

주술에서 역사로
그런데 왜 일반 사람들이 첨단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주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핵심적으로 우리의 삶이 ‘신비롭다’는 게 바로 그 대답이다.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시간이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죽음과 삶의 궁극적인 리얼리티는 은폐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는지도 역시 숨겨져 있다. 성실한 사람이 인생에서 실패할 수도 있고, 불성실한 사람이 성공할 수도 있다. 불행이 순식간에 행운으로 바뀌며, 행운이 즉시 불행을 야기한다.
이런 삶의 은폐와 신비 앞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불안을 느끼는데, 이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 인류 역사에서 많은 종교들이 나름의 대안들을 제시했다. 그들은 대개 주술적인 방식을 통해서 병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을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그러나 성서는 궁극적으로 주술이 아니라 역사다. 십자가도 역사이며, 부활도 역사이고, 교회도 역사이며, 성만찬도 역사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술은 형식으로만 신비이지 실제로는 인간이 역사의 신비에서 감수해야 할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파괴하는 인간의 자기 전략이고 자기 숭배이다. 주술은 결국 신앙의 신비를 파괴할 뿐이다.
김 목사는 성서에 분명히 축사 사건이 자주 등장하고, 그런 능력을 보이셨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었다는 사실을 제시할 것이다.(상 203). 성서의 그런 보도들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성서가 그런 방식들이 일반적이었던 그 시대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성서 어느 곳에서도 그런 기적과 축사 사건이 강조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구원활동만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더구나 김 목사가 강조하고 있는 마귀의 인격성에 대해서 성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성서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여전히 불확실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을 그 어떤 보편타당한 해석학적 근거도 없이 자신의 축사 경험에 근거해서 실증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와 잠정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부터 벗어날 개연성이 아주 높은 경솔한 태도이다.
아무래도 김 목사의 주술적인 신앙이 생명의 신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으로 이 비평 작업을 정리해야겠다. 인간의 영과 육은 우리가 포착해낼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영육이원론에 근거해서 그 신비를 해체한다. 물론 그가 영과 육은 대립하는 게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영혼 175) 실제로는 철저하게 이원론에 기울어있다. “육신은 죄를 짓고 이를 행복하게 생각할지라도 나중에 그 영혼은 죄값을 반드시 짊어져야”한다거나(영혼 67), “우리의 인격이 육체에 속했느냐 아니며 영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육체에 속한 사람이냐 영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결정이” 내려진다는(영혼 115) 그의 주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살기에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세상에서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은 세상에 살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그곳에서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영혼 117).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육체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는 세상에 속했고 영은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육와 영이 한 인격으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살리신다고 진술하고 있다.(롬 8:11b). 그런데 김 목사는 급기야 “육체가 무너지는 날, 그날은 영이 만족하는 날의 시작”이며(영혼 46), 또한 “주님은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영혼 72)고까지 극단적으로 주장한다. 이원론적 영지주의를 연상시키는 발언들이다. 김 목사의 이러한 인간이해에 따르면 결국 배아줄기 기술을 통해서 인간의 질병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하는 황 아무개 교수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에게 속한 생명의 신비가 아니라 단지 기계적으로 계산 가능한, 또는 처리 가능한 비의(秘儀)로 전락하고 말뿐이다. 과연 김 목사는 주술적 비의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토대하고 있는 역사의 신비로 돌아올 수 있을까?

지뢰밭을 옥토로
지난 6월29일 ‘한국기독교총협의회’(‘한기총’과는 다른 단체)에서 주관한 ‘이단 사이비 포럼 및 공청회’에서 성락교회를 대표한 한상식 목사가 대담자로 참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목회 임상에 불과한 귀신론 때문에 이단으로 매도되는 건 옳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면 수정할 용의가 있다면서 앞으로 한국교회의 연합활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과연 한국교회와 성락교회 사이의 이단논쟁이 해결될 수 있을지 나는 예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락교회가 신학적인 문제를 전향적으로 수정할 생각이 실제로 있는 건지, 아니면 이단이라는 굴레를 벗기 위해 단지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1969년에 7명으로 시작해서 91년도에 6만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한 성락교회가 한국교회의 건강한 한 지체로서 자리를 잡는다면 교회의 단일성 차원에서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에 큰 힘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미련만은 여전히 남겨두고 싶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이 현실성이 되려면 우선 성락교회가 뼈를 깎는 자세로 자신들의 신앙을 리모델링 정도가 아니라 리엔지니어링까지 밀고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귀신론만이 아니라 지면관계상 열거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까지 포함된다. 내가 글머리에서 김 목사의 설교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지만, 그건 표면적인 것뿐이고 그 내면에는 크고 작은 약점들이 흡사 지뢰밭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누가 지뢰탐지기로 이 지뢰밭을 옥토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김 목사 자신의 의지나 능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한계상황을 넘어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문제는 내가 구체적으로 언급할 대목이 아니니까 이만 접자. 김 목사가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역사가 아니라 주술의 차원에서 처리함으로써 결국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형해화하고 대신 귀신론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도 내가 할 일은 끝난 것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정통으로 자처하는 설교자들의 정신세계도 역시 주술이 지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가시지 않아, 내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 오늘의 화두는 이것이다. “신앙의 신비, 주술인가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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