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의 카리스마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
영 분별
어젯밤에 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내가 부 목사인지, 아니면 청년회 회장인지 그건 정확하지 않지만, 뒷자리가 반쯤 빈 큰 교회당 강단에서 청중들을 혼내고 있는 담임 목사를 보고 좀 걱정스럽다는 마음으로 교회당 지하로 내려갔다. 그 상황에서 내가 왜 지하실로 숨었는지 전문가에게 정신분석을 받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이 요즘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너무 열심히 들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하는 거였다.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며칠 동안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이하 ‘윤 목사’)의 설교집을 열심히 읽었고, 어제 주일 밤에도 잠들기 직전까지 연세중앙교회 홈페이지를 통해서 한 시간이 넘는 그의 설교를 여러 편 시청했으니 꿈에 나올 만하지 않겠는가.
윤 목사의 설교를 접하면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다니던 경주의 아무개 감리교회와 1980년대 중반에 잠시 부 목사로 머물렀던 대전의 아무개 성결교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순간순간 일으켰다. 경주의 그 교회는 중학교 여학생들이 방언을 할 정도로 매우 열광적인 교회였다. 학생회장이면서도 방언을 못했던 나는 그 당시 그런 부분에서 열등감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대전의 그 교회를 끌어가던 담임 목사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부흥사였는데, 주일 대예배 중간에도 예배 분위기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부 목사들을 불러일으켜 놓고 공개적으로 “똑바로 해!” 고함치거나, 툭 하면 “그렇게 하려면 교회 당장 그만 둬!” 하시는 분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6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윤 목사의 설교가 내 무의식에 묻혀있던 씁쓸한 경험을 흔들어 깨웠나보다.
현풍에서 개척교회를 하던 에피소드다. 어느 날 통일교 신자였던 여자 분이 좋은 설교를 듣고 싶다면서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간혹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성이 풍부하면서도, 비교적 이성적이고 의지력이 강했던 그 분은 2년 동안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하고 교회를 떠났다. “목사님의 설교와 성경공부가 마음에 와 닿지만 요즘 문선명 선생님이 자꾸 꿈에 나타납니다.”
문선명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들 집단에 속한 사람의 무의식까지, 2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지배하는 걸까? 속칭 통일교에서 문선명의 자리는 신의 경지이다.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까,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의 생일을 국가적으로 경축하듯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통일교 신자들이 문선명의 생일을 거창하게 축하하고 있었다. 동영상으로 내가 확인한 그의 설교는 유치의 극치인데도, 그를 추종하는 청중들에게 하늘과 땅을 흔들만한 종교적인 열정이 발산되고 있다는 이 사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문선명만이 아니다. 연설을 통해서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카리스마는 전도관의 박태선에게도 있었고, JMS의 정명식이나 영생교의 조희성에게도 있었고, 혹은 독일의 합리주의 지성을 무력화한 히틀러에게도 있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악령도 성령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놀랄만한 게 아니다. 한 인격체 안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과 악령은 우리 인간의 영혼에 동전의 양면처럼 작용하는지 모르겠다. 이는 곧 영의 작용은 겉모습만으로 간단히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목사의 설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설교자가 영적이고 신학적인 성찰을 게을리 하면 자신의 설교가 대중적인 호소력을 확보하는 그 순간부터 성령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고 오히려 악령과의 관계가 돈독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여 사람들의 영과 몸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인간관계에도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영 분별자들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는 헨리 나우엔의 말은 옳다.(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88).
나는 오늘 내 꿈에까지 개입할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행사하는 윤 목사의 설교가 성령의 힘에 의한 것인지, 악령의 힘에 의한 것인지 분별하고 싶다. 이 말은 비단 윤 목사만을 향한 게 아니라 그와 비슷한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영 분별력이 내게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나는 다만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 도움을 청할 뿐이고, 그리고 내 판단의 옳고 그름은 독자들의 몫이다.
‘주여, 삼창’
내가 보기에 윤 목사의 설교 내용은 일단 접어두고, 그것을 전달하는 그 형태만 놓고 본다면 그는 선천적으로 청중을 제압할만한 능력이 있거나 아니면 그것을 의도하거나, 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배운 것 같다. 지금도 윤 목사 특유의 고함소리가 내 귓전을 때리고 있는 듯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손으로는 막대 마이크를 잡은 채 불끈 쥔 다른 주먹을 힘 있게 흔들어대는 그의 설교 행위는 현대 무용수의 몸동작처럼 강렬하다. 그의 내면에 용암이 들끓고 있는지 한 시간 이상 설교하는 동안 잠시도 한 곳에 서서 설교하지 못하고, 넓은 강단을 휘젓고 다닌다. 자칭 국민가수라 하는 라훈아의 콘서트와 닮은 그런 설교 모습은 한편으로는 구령열의 억제할 수 없는 표출인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한 내면세계의 발산인 것 같다. 어쨌든지 배우가 무대에서 연극하듯 시선을 다양하게 이동시키면서 동선의 폭을 최대화하는 윤 목사의 설교 행위는 신탁을 받고 있는 예언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바로 이 대목이 윤 목사의 설교 형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카리스마의 핵심이다.
그 장면을 좀더 리얼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좀 극단적인 예를 들더라도 이해하시라. 나에게 윤 목사의 설교는 박수무당이 신명나게 펼치는 한판의 굿처럼 보였다. 그에게 그런 신들림이 없다면 그에게서 솟아나는 과도한 열정은 해명이 안 된다. 다른 목사들도 역시 윤 목사처럼 그 한번의 설교에 자기 생명을 걸어놓듯이 전력투구하긴 하지만 아무도 윤 목사를 흉내 낼 수는 없다. 청중들을 자기의 정신적 영지로 몰입시킬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윤 목사의 설교가 너무 시끄럽다거나 그의 제스처가 과장되어서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트집 잡으려는 게 아니다. 비록 윤 목사의 설교 형태가 기존의 설교와 크게 어긋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자기표현이라고 한다면, 설교 형태만 세련되었지 실제로는 여전히 자기중심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 기존의 설교보다는 오히려 낫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윤 목사의 설교 형태는 기본적으로 복음 ‘선포’라기보다는 전형적인 대중 ‘선동’에 가깝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 이유를 천천히 더 따라가 보자.
윤 목사는 설교 중에도 청중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아멘’을 복창하게 하고, 찬송을 부르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설교를 마친 다음에 청중들에게 두 손 ‘번쩍’ 들고, ‘주여 삼창’을 외치게 한 후, 큰 소리로 통성기도를 시킨다. 통성기도가 없는 교회를 향한 그의 연민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요즈음의 일반 교회를 헐뜯기 위함이 아닙니다. 설교해 놓고 통성기도 않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설교를 들었거든 기도하여 내 것을 삼고, 설교를 들었거든 기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내가 죄인인 것을 발견했으면 설교 끝나자마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풀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설교해 놓고 통성기도 않고, 회개기도 않는 교회가 한둘입니까? 나도 복 받고 여러분도 복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빨이 덜덜 떨리도록 까지 통성기도를 시키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기도하다가 이빨이 빠졌다는 사람 못 봤고, 턱 빠졌다는 사람 하나도 못 보았습니다. 턱이 떨어질 때까지 해보십시오.(절대적 기도생활, 요단출판사, 318쪽. 이하 ‘절대’).
그가 통성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잡념을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절대’ 329). 윤 목사가 자주 설명하듯이 우리가 조용하게 기도하거나 묵상으로 기도하다보면 다른 생각이 들어서 기도의 집중력이 떨어질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잡념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방언이나 통성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는 이스라엘의 신앙전통이 아니라 갈멜산에서 “자기네 의식을 따라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피까지 흘린”(왕상 18:28) 바알의 예언자 전통에 가까운 게 아닐까 모르겠다.
성서에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표현도 있고, 예수님도 땀이 피처럼 보일 정도로 기도하셨고,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도 방언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기독교 신자들이 열정적으로 기도한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좀 넓게 본다면, 굿판에서 무당과 청중들이 하나가 되어 심리적 억압 상태가 ‘카타르시스’된다는 점에서 기독교 안에서도 그런 심리적 배설의 기회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주여 삼창’과 ‘통성기도’를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한다는 것은 윤 목사의 설교가 청중을 기술공학적으로 선동하는 ‘노하우’에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라거나(고전 14:28), 예언하는 자들도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고전 14:32) 바울의 가르침을 그가 외면하는 걸 보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윤 목사의 설교에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의 설교를 좀더 긍정적으로 평가해볼 여지는 없을까? 그의 설교 행위에서 발견되는 그런 거친 열정과 카리스마는, 그리고 스타 앞에서 무아의 경지를 경험하는 ‘오빠부대’처럼 그의 설교에 심취하는 청중들의 종교현상은 윤 목사 자신에 의해 의도된 게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자연발생적인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만약 윤 목사의 설교에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분명한 영성이 담보되고 있다면 비록 외형적으로 대중 선동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교의 ‘어떻게’와 ‘무엇을’은 원래 기본적으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이제 윤 목사가 무엇을 설교하는지 확인할 때까지 그의 광적인 설교 형태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은 좀 유보해야겠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윤 목사의 설교 내용은 누가 듣더라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분명했다. 그것은 그의 설교 형태가 신들림 현상을 보일 수밖에 없는 근거인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설교에 등장하는 모든 성서 이야기나 교회의 신앙 이야기는 한결같이 이 단순한 구조를 보강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는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2005년 3월20일 설교)와 예수의 십자가 이야기(1월23일 설교)가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그의 설교에서 죄, 십자가, 지옥, 천당(혹은 천국)을 빼버린다면 남을 게 하나도 없을 만큼 그는 온통 이 구조에 천착하고 있다. 윤 목사의 설교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이에 관한 대목 중에서 두 군데만 인용하겠다.
우리가 굶어 죽든, 병들어 죽든, 나이가 많아 죽든, 어떤 사고로 죽든 이 땅에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고 말했으니(히 9:27),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인데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습니까?(누구를 선택하랴, 도서출판 누가, 105. 이하 ‘누구’).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사람들은 펄펄 끓는 물 지옥, 활활 타는 불지옥, 그리고 구더기가 온 몸에 붙어서 침을 살 속에 박고 쭉쭉 빨아먹는 벌레 지옥, 또 엄청나게 큰 뱀들이 몸을 칭칭 감고 뱀 아가리로 사람 머리를 삼켰다 뱉었다 하는 지옥 등을 상상합니다. 성경에도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라고 했고, 그곳에서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한다고 했습니다(막 9:48,49).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곳입니까?(당신을 성공시켜라, 요단출판사, 220. 이하 ‘당신’).
행인들이 많은 곳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써 붙인 피켓을 들거나 어깨띠를 띤 사람들이, 그것으로도 모자라 확성기로 그 구호를 내지르는 사람들이 간혹 주변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들이 남의 싫은 눈치에 아랑곳 하지 않고 거의 미친 사람 취급받으면서까지 그런 방식으로 전도하는 이유는 위의 인용문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천당과 지옥이 그들의 정신세계에 너무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광신적인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단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지옥과 천국을 신앙의 토대로 생각하고 있으며, 설교자들도 역시 윤 목사처럼 노골적이지 않을 뿐이지 이런 유의 설교에 익숙하다. 그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진부인데, 뭐가 문제라고 시비를 거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오늘 내가 멋도 모르고 뜨거운 감자를 집어삼키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교회 안에서 거의 절대적인 교리인 것처럼 선포되고 있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의 문제와 맞서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가 정리되지 않는 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깨어있는 의식으로 참여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이미 벌어진 상태이다. 뜸 들이지 말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과연 기독교 신앙의 본류인지에 관해 질문하자.
구약성서에는 천당이라는 개념이 원래부터 없었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스올이나 게헨나에 갈 뿐이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천당이라는 개념은 없다. 묵시문학을 거쳐서 신약성서가 기록되면서부터 천당과 지옥 표상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표상하고 있는 지옥과 천당(혹은 천국)은 이것 자체로 독립된 교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 종속하는 교리이다. 설교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중심과 주변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교리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완성된 하나의 체계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요소들이 매우 역학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가 그 안에서 일종의 상수(常數)와 변수(變數)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에 바른 신앙으로부터 이탈하기 쉽다. 이단이 별 건가? 마귀론으로 기독교를 체계화한 김 아무개 목사에게서 볼 수 있듯이 상수와 변수의 자리바꿈이 곧 이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논제를 구체화하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가, 아니면 예수 믿지 않는 이들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시는가? 한국교회에서는 이중예정설이 문자적인 의미로 고수되고 있으며, 또한 ‘최후의 심판’ 비유가(마 25:31-46)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딴소리는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위 ‘만인구원론’도 역시 기독교 신앙의 체계 안에서 무조건 배척해버릴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도신경에만 빠져있는 부활 직전에 있었던 예수의 지옥행은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벧전 3:19)는 베드로 사도의 진술에 근거한 것인데, 이 진술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롬 11:32)는 바울의 진술에서 우리는 만인구원론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궁극적인 문제에서 우리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정의가 우선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가 우선이라고 한다면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의와 자비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선택하기 어렵다. 이런 가르침은 ‘신정론’과 마찬가지로 실증적으로 대답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종말이 이를 때까지 결정적인 대답을 열어두어야 한다. 참고적으로, 칼 바르트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지옥을 비어두실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판넨베르크도 만인구원론의 가능성을 <사도신경해설>에서 이렇게 피력했다. “모든 나머지 사람들 역시, 예수 이전에 이미 죽은 이들 역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수에게 나타난 구원에서 참여할 수 있다.”
사후 보상론
위의 설명을 듣고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군, 하고 생각한다면 내 설명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우리는 지옥 가는 게 두려워서, 또는 천당에 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주이고, 재림주이며, 최후의 심판자이며,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믿는다. 예수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와 이미 하나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그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이미’ 우리에게 현실화했지만 ‘아직’ 완료되지 않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우리는 기쁨과 평화 같은 구원의 속성을 우리의 역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미래에 이루어질 희망의 영역으로 남겨놓는다. 이처럼 이미와 아직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가운데서 심화하고 기다려야 할 하나님 나라를 ‘천당, 지옥’ 패러다임으로 해체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왜곡이다.
특히 ‘천당, 지옥’을 사후 보상의 차원에서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윤 목사의 설교에서 이런 왜곡이 극대화한다. 지옥은 “정말 무섭습니다.”(2005년 5월6일 설교)는 윤 목사의 호소를 듣고 있으면, 저승사자의 음성을 듣는 듯 기분이 오싹하면서, 동시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도 없다. 또한 윤 목사는 그 특유의 탁음과 제스처를 통해서 거의 반복적으로 ‘영원한’ 보상이 준비되었다고 외친다. 그는 “물질에 손해가 오고 환경에 손해가 오고 세상 것으로 성공하는 일에 손해가 온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타협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이런 손해들은 영원한 때에 하나님이 기쁨으로 보상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에 보약 한 재 먹고 십년 더 산다면 그 보약을 먹고 십년 더 살고 싶어서 미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십년을 더 산다고 할 때 값이 아무리 비싸도 구해서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년이 아니라 영생을 보장하는 예수 믿는 믿음에 무엇인들 아깝겠습니까?(‘누구’ 123).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금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교회에 나오고 헌금하라는 것이다. 웬만한 목사들은 이런 설교를 하더라도 에둘러 표현하지만, 윤 목사는 흡사 정력에 좋다는 뱀술이나 보약을 파는 약장사처럼 자신감 넘치게 설교한다. 그런 설교에 청중들이 빠져드는 것도 그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주님 오시면 “아무개야 네가 시집갈 때까지 벌어 놓은 것을 모두 가져다 성전 짓는 데 바치지 않았느냐? 하늘에서 새예루살렘이 내려올 때 그곳에서 내가 살 권리를 네게 주리라.” “아멘, 내가 3년밖에 못 번 것인데요.” “아니 그래도 영원히 살게 하리라.” “10년 밖에 못 번 것인데요.” “아니 영원히 살게 하리라.”(‘절대’ 212).
집회 현장의 분위기가 책으로 읽을 때와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런 점은 필자가 늘 조심하는 부분인데, 이런 정도면 ‘사이비’에 가까운 게 아닐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간을 이식해줄 수 있는 게 바로 동물과 다른 사람의 특성이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10년 동안 번 돈을 고스란히 교회당 건축헌금으로 바쳤다는 사실 자체는 누가 가타부타 말할 게 못되지만, 그런 헌금으로 영원한 천국이 보상으로 주어질 것처럼 설교한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사기다.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헌금은 하늘나라에 가면 도로 내 몫이 됩니다.”(‘누구’ 47)는 식의 속임수로 윤 목사는 지난 5월5일에 1만3천 평 대지에 1만2천여 평의 새성전을 건축하고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사후보상론은 적지 않은 목사들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주제이기 때문에 윤 목사만 탓할 수도 없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의 차별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니까 기가 막힐 뿐이다. 부활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자유롭고 평화롭고 절대적인 생명의 나라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라를 구체화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급의 차별을 통해서 상대화하려는 그 저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청중들의 욕망을 부채질해야만 종교적 열정을 끌어낼 수 있다는 그들의 얄팍한 계산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신앙 형태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에 그 뿌리가 놓여 있다.
교회 성장지상주의
다시 한발 물러나서, 윤 목사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강조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극적으로 표현한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이 볼 때는 정말로 시시한 직장에 취직할지라도 내가 시간을 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축복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사는 그 모습을 바라볼 때 어떤 때는 깨물어 먹어도 비린내가 안 날 것 같습니다.”(‘절대’ 284)라거나,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싫증내고 피곤해 하고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인간은 저주받은 인간입니다.”(‘절대’ 297)라는 선정적 언급이 윤 목사 특유의 어법이기 때문에 그런 자극적인 표현만을 문제 삼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겉으로는 세속적인 관심을 완전히 끈 신비주의자의 흉내를 내지만, 실제로는 철저하게 세속적이라는 사실이 바로 내가 윤 목사의 설교를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예컨대 2005년 5월29일 설교(누가 7:11-17) “예수를 만나라”에서 윤 목사는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행복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를 통해서 가난과 질병에서 자유로워진다고 충동한다. 그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세상에서의 행복한 조건과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된 가난, 질병, 고통으로부터의 자유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는 설교 분위기가 잡히면 노골적으로 “잘 되자, 부자 되자, 건강하자.”(2005년 5월22일)고 외친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외치던 분이 무슨 이유로 기복적인 신앙을 선전하는 것일까? 그는 세상이 제공하는 풍부한 물질과 예수를 통해서 얻는 풍부한 물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겠지만 그건 기만에 불과하다.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신앙적 일관성을 포기한 채, 신자들이 헌금을 내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좋다는 사실을 전파하고, 교회에 나오게 하기 위해서 물질축복을 미끼로 던지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런 모순과 기만에 빠진 이유는 과도한 교회 성장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가 오십이 넘었지만 아직 꿈이 있습니다. 교회와 기도원을 크게 짓고 신학교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또 양로원을 잘 지어서 한국의 목회자들이 목회를 마치고 오갈 데 없을 때 그 분들을 모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꿈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밤잠 안 자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그 열매를 향해서, 꿈을 향해서 나의 소망을 움켜쥐고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당신’ 179).
본인은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분이니까 이런 꿈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로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지금이 초대형 교회당을 건축할 때인지, 그렇지 않아도 차고 넘치는 기도원과 우후죽순 격인 신학교를 세울 때인지는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하나님이여, 내게 200억을 쓸 능력을 주시옵소서.”(‘절대’ 330)라거나, 다음과 같은 진술을 들어보면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한국 기업 전체의 수출액이 200억 달러일 때 혼자서 1천만 달러를 달성한 경력에서 보듯이(2005년 5월22일 설교) 그가 교회를 일종의 기업처럼 여긴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 성도들은 기도하는 성도들입니다. 몇 년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노량진 땅을 다 사면 어떻겠습니까? 생각도 못합니까?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십니다. 그분이 성경에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성전을 지으려는 마음만으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한다 하셨으니 노량진을 다 사서 성전을 짓는다고 하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이지 않습니까? 제가 배포가 크잖아요. ‘제일 큰 교회를 내 평생에 주님께 지어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했으면, 50년 후에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생길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겁니다.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기도와 믿음은 많아도 많아도 좋은 것입니다.(‘절대’ 194).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그는 잘못한 게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잘못한 게 없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교회 성장지상주의에 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교회가 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 건 매우 바람직하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이런 조직과 체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운동’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부동산에 집착하는 한국교회의 병적인 현상은 이미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접어두고, 잘못한 게 없다는 이 무대뽀(?) 심리의 근거는 좀 검토해야겠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무대뽀로 나가는지 긴 말이 필요도 없다. 교회당 건축을 반대하는 동네 사람들과 멱살잡이를 하면서 교회당 건축을 밀어붙이고, 교회에 대한 비판 방송을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방송사 앞에서 시위하고, 타종교를 백안시 하면서도 ‘뭐가 어떤데!’ 하는 식이다. 다른 사이비 집단에게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행동에는 전혀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그들의 확신에는 나름의 진정성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진정성이라는 게 전혀 다른 현실에 입각해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것은 곧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미 지동설을 받아들이지만, 자기만은 천동설에 근거해서 세계를 해석하고 행동하는 그런 현실인식을 말한다. 이런 심리현상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마마보이나 공주병, 또는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대개 이런 심리에 속하는데, 지옥과 천당 패러다임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도 이런 심리에 빠질 가능성은 높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에 따르면 “정신과에서는 정상인과 정신질환자를 구분할 때 ‘현실검증력’이라는 기준을 적용한다. 현실에 대한 왜곡이 있는가 없는가로 둘 사이의 경계를 긋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질환자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현실왜곡은 피할 수 없다. ‘자기감정, 자기생각이 곧 현실’이라는 명제는 인간이 가진 현실감각의 본능적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나와 다른 사람의 현실감각이 어떻게 다른 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사람 vs 사람, 개마고원, 64).
우리 설교자들의 현실감각은 어느 정도일까?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기도원 건축헌금을 드리는 걸 칭찬하는(‘당신’ 230) 설교자의 현실감각이 바르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세상 세속의 문화가 기독교를 오염시키도록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염되면 죽고 맙니다. 세상 세속의 문화는 기독교를 오염시키는 최대의 적입니다.”(‘누구’ 170)는 윤 목사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세속과 교회를, 차안과 피안을 철저하게 이원론적으로 구분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패권주의에 빠지게 하는 설교자의 현실감각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윤 목사에게는 교회보다 세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궁극적으로 선교는 자기를 확대하는 교회의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Missio Dei)라는 사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 김영민의 한국교회를 향한 고언은 우리가 귀담아 둘만 하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로 모르면서 한 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명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한겨례 21, 1999년 4월15일자).
이미 니체는 그 당시 유럽 기독교 신앙을 단지 사육당할 뿐인 가축떼 윤리로 평가하고, 프로이트는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으로 보았는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그런 모습들이 없다고 말할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이런 질병적 현상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흡사 자폐증 환자들처럼 ‘지옥 천당’ 패러다임이라는 전혀 다른 현실감각 속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신학, 그리고 인문학적 통찰력을 확보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날카롭게 성찰해야 한다. 특히 설교자는 최소한 성서해석에서만이라도 구도정진의 자세를 유지해야하는데, 윤 목사의 설교는 이런 부분에서도 역시 부실의 극치를 달린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윤 목사가 주일공동예배(2부)에서 선택한 성서본문을 분류해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구약은 2003년도에 5번, 2004년에도 역시 5번, 그리고 2005년 1-5월에는 2번 선정되었는데, 이 숫자는 전체 횟수에 10%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그의 설교 본문은 신약일변도였으며, 구약본문도 욥기서와 다니엘서와 여호수아서를 제외하면 모세오경과 시편에만 집중되었다. 그는 왜 이렇게 설교본문을 편식한 것일까?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윤 목사의 설교에는 성서 텍스트가 거의 무의미하다는 게 결정적인 대답이다. 그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을 강화하고 자극하기 위해서 성서의 표면적인 정보를 발췌할 뿐이지 그 텍스트의 지평에 들어가는 일이 전혀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가 한 시간 동안 신명나게 설교 한판을 끌고 갈 수 있다는 건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그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의 견강부회를 막을 길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는 사회구원과 영혼구원을 비교하면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것(행 3:1-10)이 곧 영혼구원이라고 주장한다.(‘누구’ 179). 장애인의 몸이 치료되었다면 이건 오히려 사회구원에 가까운 사건이 아닐까?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 예언자의 진술(사 53:3)에 근거해서 예수가 못생긴 분이라는 그의 주장은(‘누구’ 176) 젊은 여성들에게 “긴 치마를 입어라.”는 언급처럼(‘당신’ 149) 일종의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
2005년 1월9일에 “예수로 일하게 하자.”(욥 1:6-22)는 설교에서 윤 목사는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욥기서의 주제를 건드리지도 않은 채 예수의 도움 없이는 건강, 재산, 행복도 보장되지 않는다거나, 예수의 이름으로 질병, 가난, 죄악, 육신의 소욕도 이겨야 한다는 점만 강조한다. 그의 설교에는 인간 삶과 역사의 신비에 내밀하게 접근해서 제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총에 대한 ‘해명’은 없고, 단지 마귀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이기자는 선동적 ‘구호’만 난무한다. 순진한 청중은 이러한 ‘윤석전 버전’에 무기력하게 허물어진다.
훨씬 노골적인 성서 왜곡은 ‘하늘나라의 야심을 가져라’는 작은 제목을 단 대목에서 윤 목사가 매우 감동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거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에서 벌어진다.
주님의 보좌 좌우편을 얻는 것에 야심을 가지십시오. 세상에서는 비록 부잣집 문턱에서 얻어먹던 거지였을지라도 하늘나라의 야심을 가졌던 나사로는 기어이 하늘나라를 소유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오직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누구’ 215).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게 살았지만 죽음 이후에 가장 행복한 삶이 주어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이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윤 목사의 신앙적 취향에 ‘딱’인지 몰라도 그는 이 이야기를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텍스트에 교묘하게 덧칠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전파하고 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지만,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삶의 복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나사로는 비록 개와 더불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나누어 먹는 볼품없는 거지이며, 아무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기 때문에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당신’ 132).
나사로 이야기에는 나사로가 하늘나라에 ‘야심’을 가졌다거나,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본문은 단순히 나사로가 세상에서 고생했으니까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는 호화롭게 살았으니까 지옥에 갔다는 사실만 다루고 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부자의 무책임한 삶을 경고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더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후반부에 있다. 예언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죽었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말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세계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정이 이런대도 불구하고 그는 나사로의 신앙적 야심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한 것처럼 오도한다. 이런 설교가 바로 전형적인 ‘꼼수’다. 청중이 자기보다 한수 아래일 경우에만 통할 수 있는 이런 꼼수를 둔다는 건 윤 목사가 오직 기도에 전념하느라 성서를 볼 틈이 별로 없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성서를 도구화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윤 목사에게 묻는다. 왜 없는 이야기로 신자들을 현혹하시는가?
그는 이단인가?
지금까지 나는 윤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들을 충분하지는 않지만 핵심적으로 지적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단이라는 말인가? 윤 목사가 오랫동안 이단시비에 휘둘린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런 데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미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정통과 이단의 경계선에서 오락가락 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닌 마당에 윤 목사에게서 발견되는 몇 가지 단서로 이단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제 한국교회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이단 시비를 걸 수 없을 만큼 그는 거목이 되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 복음단체 총연합회장’을 연임하고 있으며, ‘한국부활절 연합예배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아마 내년에는 부활절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그가 기도하던 대로 연세중앙교회를 이제 한국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교회로 성장시켰는데, 누가 시비를 붙겠는가? 그가 초교파 집회의 강사로 나서기만 하면 신학공부와 건전한 영성모임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목회자들이 그의 집회에 수천 명씩 몰려든다고 하니 그의 영적인 능력도 완전히 공인된 셈이다.
그것 말고도 윤 목사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은 많다. 연세중앙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6월5일 저녁) 윤 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흰돌산 기도원에서 7월25일부터 9월1일까지 이번 여름에 개최될 초교파 집회가 일곱 개나 소개되어 있었다. 전국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로부터 중고등부, 청년 대학부, 직분자, 목회자 부부 영적 세미나 등이 그것이다. 놀라운 건 참가 신청을 미리 받는다는데, 참석인원이 평균 4천명, 참가비는 3-5만원이었다. 물론 강사는 모두 윤석전 목사였다. 어린이부터 목회자 모임까지 전천후 강사로 활동하며 한국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윤 목사의 설교 행위를 향해 내가 이렇게 핏대를 올려보았자 내 꼴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 할 것인가? 한편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의 설교와 내통하는 거대한 집단이 여전히 한국교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 현실 앞에서 공연한 싸움으로 우리의 영적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패러다임 쉬프트’는 혁명이 일어나든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그 세대가 물러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토마스 쿤의 지적이 옳다면 지금 우리는 투쟁의 방식이 아니라 미몽의 안개가 걷힐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방식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패배주의인가, 지혜로움인가?
다른 한편으로, 지금이야말로 희망의 노래를 부를 때다. 왜냐하면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둠이 짙다는 말이 있듯이, 거칠 게 없는 듯 분출되고 있는 윤 목사의 카리스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온)가 동터오기 직전의 마지막 조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부활 생명이 현실화하는) 그 때가 되면 얼굴을 맞대보듯이 이 세계, 인간,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인식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종말론적 영성으로 자신의 신앙적 잠정성을 끊임없이 지양할(Aufhebung) 줄 아는 젊은 설교자들을 준비시키는 일은 시급하다. 그래야만 한국 교회는 입항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카이로스 호(號)에 승선할 수 있으리라.
<기독교사상,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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