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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특별기획-도덕성,증오,도전

by 싯딤 2009. 8. 30.

[한겨레21.제762호] 

위험한 칼끝, 도덕성

 

[특별기획]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① 도덕… 비도덕적 인간에게는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고,
도덕적 인간에게는 끝없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역설

 

노무현. ‘도덕성’과 ‘정치개혁’을 언급하지 않고 그 이름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이름은 한국 정치사에 정치개혁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노무현식 정치개혁’을 가장 든든하게 뒷받침했던 것이 바로 도덕성이었다.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세운 것도 도덕성이고, 숱한 정치적 위기에서 그를 구해낸 힘도 도덕성에서 비롯됐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했다. ‘노무현식 정치개혁’을 뒷받침했던 것은 그의 도덕성이었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노 전 대통령 임시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추모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역설적으로, 검찰과 언론 그리고 여권이 지난 6개월간 집요하게 그를 공격한 부분도 역시 도덕성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600만 달러 수수 의혹이 불거졌고, 그는 이 가운데 100만 달러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구차하지만 그래도 진실이니 어쩔 수 없다며 “나는 몰랐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세상은 억대 명품 시계 수수 의혹과 자녀들의 미국 저택 매입 문제를 추가로 들춰냈다.

  검찰 수사로 내려진 ‘도덕적 파산선고’

  사건의 핵심인 600만 달러 수수 의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지 여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이 이대로 수사를 종결한 만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앞으로도 영영 묻힐 가능성이 높다. 대신 지난 6개월간의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그는 ‘도덕적 파산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덕성을 강조한 정치인이 스스로 도덕주의의 덫에 걸려 몰락했다’는 것이 대다수 언론의 시각이다. 이런 식의 이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이 노 전본인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이전부터 차원 높은 도덕성을 강조했다. 따지고 보면 2002년 대선에서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도 보수진영을 대표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이었다. 대통령이 된 뒤인 2003년 10월 최도술 당시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그룹에서 11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내가 모른다고 할 수 없다”며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도 “불법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생전에 노 전 대통령이 도덕적 기준을 한껏 높여놨기 때문에 스스로 도덕주의의 덫에 걸린 측면이 있다”며 “재임 기간에도 정치개혁이나 깨끗한 정치를 강조했고, 이를 중요한 업적으로 내세웠던 터라 이번에 비리 의혹에 연루됐을 때 자신을 둘러싼 혐의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도덕성을 강조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보면, 깨끗한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담은 도덕주의 가치와 담론은 19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처음 제시했다. 비록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호에 불과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 발전을 위해 부패한 기성 정치인, 정쟁을 일삼는 정치판을 청산하겠다는 그럴듯한 목표를 내세웠다. 1980년대 초 ‘사회악 일소’를 내세웠던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와 도덕은 서로 다른 영역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등 권위주의 체제는 정부와 정치 지도자가 부패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구조였지만, 정치인과 정치 관련 부패 사건이 언론에 등장하고 검찰에 기소되는 빈도는 오히려 김대중 정부 후기로 오며 증가했다. 최장집 교수는 “권위주의 정부에 비해 민주주의 정부에서 부패가 더 창궐했다고 보기 어렵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도 없다”며 “(이런 사건이) 많아진 것은 언론의 보도와 검찰 기소의 빈도이며 부패 문제를 이슈로 한 야당의 정부 비판과 공격의 빈도”라고 지적했다. 즉, 권위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감춰져있던 부패 문제가 더 쉽게 드러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대통령 주변의 부패 문제와 싸웠다. 조·중·동 등 수구언론과 한나라당은 특검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괴롭혔다. 참여정부 초기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과 관련해 썬앤문그룹 95억원 제공 의혹, 유전 개발 의혹, 행담도 개발 의혹, JU 로비 의혹, 바다이야기 연루 의혹 등 수많은 의혹을 제기했다. 의혹 대부분은 사안이 경미하거나 무혐의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법권력과 언론 영역 전반에 보수 헤게모니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은 이런 공격을 가하는 보수 독점구조에 대항하기보다 역으로 도덕주의 담론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은 이 지점에서 비롯됐다. 노 전 대통령 본인은 반부패와 깨끗한 정치 등의 모토를 높이 내걸고 정치개혁과 도덕주의적 이상을 동시에 달성하려 했지만, 정치개혁의 문제는 도덕주의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3월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광주 경선에서 정치개혁 바람을 일으키며 중앙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의 도덕성은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집중 표적이 됐다. 사진 한겨레 자료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도덕주의적 관점으로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태도에 문제를 지적했다. 쉽게 말해 정치와 도덕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높은 도덕적 가치의 잣대로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도덕주의 담론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노 전 대통령도 부패 문제를 과거보다 더 (부패)했냐, 덜 (부패)했냐 하는 관점으로 접근하기보다, 책임정치와 참여의 확대 등을 통해 정치의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패 때문에 민주주의나 정치가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아직 부족해 부패가 유지되고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부패 담론의 ‘남발’은 자칫 정치 자체를 부패한 것으로, 정치인을 부패 집단으로 덧칠하는 효과가 있다. ‘정치는 썩은 것’이라는 덧칠은 당연히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부채질한다. 역시 조·중·동이 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를 낳을 수밖에 없다.

  ‘부패담론’이 반대파 절멸 수단으로

  정치에 도덕주의를 ‘과도하게’ 개입시키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또 있다. 국내외 역사를 보면 도덕성 관련 의혹은 권력을 가진 쪽이 상대 진영을 절멸시키거나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사례가 많았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민주당은 워터게이트나 이란 콘트라 사건 등을 통해 대통령을 공격했다. 공화당 역시 자신들이 의회를 장악했을 때 화이트워터, 르윈스키 사건으로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언론의 폭로-검찰 수사-정치적 상처’로 이어지는 과정은 한국의 ‘언론-검찰-정치권’ 관계와 다르지 않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정치와 관련된 부패 문제의 핵심은 국가와 사적 영역 사이의 ‘후원’과 ‘정치적 지지’가 교환되는 관계의 해소(즉 민주화)에 초점이 맞춰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권의 ‘부패담론’은 막강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보수 영역으로부터 ‘반대파 절멸’의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고 지적했다.

  검찰에 세 차례 구속됐지만 세 번 모두 무죄를 받은 박주선 민주당 의원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의 공정성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박 의원은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정치인이 도덕성이란 문제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보는 계기로 삼아야겠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검찰 수사가) 정치 보복적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논란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승수 진보신당 의원도 “기본적으로 정치인은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받는 공인이기 때문에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과정을 보면 정권 차원의 보복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정상호 한양대 교수(제3섹터연구소)는 아예 정치적으로 독립된 수사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것처럼 299명 국회의원을 각각 6개월씩 샅샅이 조사해보면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이다. 정치적 보복 수사나 검찰 수사의 편파성 시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검찰에서 독립된 수사기구가 필요하다.”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시도했던 정치개혁의 결과도 설명돼야 할 부분이다. 특히 부패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이유로 선거운동의 기간과 방법에서 대중과의 접촉면은 개혁을 할 때마다 계속 줄었다. 정치자금법은 최근 20여 년간 무려 여덟 차례 이상이나 개정했지만 선거 과정에서 부패 문제가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 정치 현실에서 주요 대선후보나 당선자에게 기업이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거의 일상화돼 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예를 들어 2004년 개정된 정치관계법을 보면 후원회 운영과 후원금 모금은 물론 선거운동 방법까지 규제하고 있다”며 “문제가 있으니까 접촉 자체를 막아버리자는 것인데, 정치를 너무 이상적이고 규범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정치인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 역할은 팽창, 정당은 축소

  결과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사회가 정치권에 들이댄 도덕주의 프레임의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다. 최장집 교수는 “정치 경쟁이 더욱 원색적이고 저차원적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엄청나게 팽창하는 반면, 사회 저변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정당의 역할은 줄어드는 현상을 동반한다. 이 과정에서 투표자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성’을 갖지 않는 기구들, 즉 검찰이나 사적 영역에서의 언론이 점차 정치의 중심 행위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기업인들로부터 수천억원을 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버젓이 살아있는데 이들보다 훨씬 도덕적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죽음에 이르렀다”고 안타까워했다. 봉하마을에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은 5월23일 늦은 밤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비도덕적 정치인에게는 도덕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도덕의 잣대를 높여놓은 도덕적 인간에게는 끝없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국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냐”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 도덕주의의 역설이다. <최성진 기자>*

   

시스템의 노무현 죽이기

 

[특별기획]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② 증오…당선 때부터 따라붙은 정치·사법·언론 권력의 무시 그리고 퇴임 뒤의 보복,
서거 이후 막가파식 대응은 분노 점증시켜

 

“너무 분하다. 주위에서도 노무현을 끔찍이 싫어하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분노하고 있다.” 82학번인 서울의 한 종합병원 부과장급 교수는 기자에게 이렇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떨리고 있었다. “고통이 너무 크다”는 노무현의 유서 내용이 발표되던 즈음이었다. 5월23일 낮 2시께였다.

  “이명박은 어떻게 할 지, 두 눈 뜨고 끝까지 지켜보겠다.” 비슷한 시간 90학번인 대기업 차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 옆에 있던, 현직 교사인 그의 부인은 “비주류들의 상징이 결국 주류에게 짓밟혔다. 우리가 끝내 지켜주지 못한 거지”라고 말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남편은, 방송에서 봉하마을에 돌아온 노무현이 “야~ 기분 좋다”고 외치는 장면을 보자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 증오와 무시를 바탕으로 한 현실 정치세력과 사법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의 ‘노무현 죽이기’는 결국 그의 죽음으로 귀결했다. 4월30일 검찰에 출두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현 정권의 ‘홍운탁월’(烘雲托月)

  지방 출신. 빈농 아들. 고졸. 인권변호사. 재야정치인. 만년 야당. 그 총합이 노무현이다. 대한민국 주류는 한번도 그런 비주류가 최고의 권력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임 중은 물론, 퇴임 이후에도 집권여당과 보수언론으로 상징되는 주류들은 그를 조롱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사건이 터진 뒤에는 더 노골화했다. 검찰은 보수언론을 통해 그의 피의 사실을 매일 생중계하듯 공표했다. 어느 날은 부인 권양숙씨를 서울이 아닌 부산지방검찰청으로 불러 형식적으로 ‘예우’했다고 하다가, 어느 날은 ‘재소환’하겠다고 을렀다. 전직 대통령도 필요하면 두번 세번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던 1201만4277표의 무게를 잊고 있었다(2002년 당시에는 투표권이 없었던 19살 미만의 지지자들은 제외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시당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욕당할 때 그들에게 전해진 불쾌감도 쌓여갔다. 그의 죽음 앞에 수많은 분노와 수많은 눈물이 흩날리는 이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증오와 보복’의 시스템이 죽음으로 몰고 갔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교체와 함께 과거 정권을 심판하고 청산하는 과정이 반복됐다”며 “그 결과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는 비극적 상황까지 빚었다”고 지적했다. 현 정권이 전 정권을 청산하는 이유는 뭘까.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는 동양화의 ‘홍운탁월’(烘雲托月)을 이야기했다. 동그랗게 여백을 남겨 놓고 구름을 그려 달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낸다. 최 변호사는 “전임정권의 부도덕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들을 차별화해 온 것이 그간의 정치과정의 반복이었다”며 “이번에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주류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와 부정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들과 차별화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글자 그대로 ‘노무현 죽이기’였다.

보수언론은 재임 시절 노무현 대통령을 늘 ‘무능력과 증오의 화신’으로 묘사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노무현 죽이기>(개마고원 펴냄)는 노 전 대통령 재임 초기의 상황이 잘 정리돼 있다. 책에 인용된 <문화일보> 2003년 6월20일치 칼럼이다. “대통령 선거 결과 대한민국은 하향평준화되었다. 월드컵 4강은 아무나 우승할 수 있다, 아무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망상을 키웠다. 자기 수준의 대통령을 뽑음으로써 자기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자위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선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노 전 대통령과 그에게 투표한 이들을 ‘기준에 미달하는 이들로’ 동시에 비하했다. <조선일보> 2003년 6월23일 시론은 이렇게 말한다. “시기심이란 자기의 이득을 감소시키지 않는 타인의 행복이나 그들이 소유한 사회적 선(善)을 적대적으로 보는 심리 상태다. 이는 증오를 어머니로 해서 드러난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라는 대규모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런 명백한 악행인 시기심을 ‘도덕적인 의분’으로 포장한다는데 있다.” 이를 준거로 하면, 노 전 대통령은 주류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한 시기심에 가득한 존재다. 보수언론은 노 전 대통령이 ‘강남-삼성-서울대’로 상징되는 한국의 주류들에 대한 증오심을 현실정치에 이용한다는 프레임을 만들고자 했다. 강준만 교수는 “이들의 주장에 흘러넘치는 시기와 복수의 수사학은 이 땅의 수구 기득권 세력이 노무현에 대해 갖고 있는 반감의 강도와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고 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해 퇴임 이후 자전거에 매단 수레에 손녀를 태우고 마을 주변을 달리고 있다. 그는 서민적인 모습으로 국민들 앞에 나타나기를 즐겼다. 사진 노무현 전 대통령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 제공

  대검찰청 중수부를 강성 라인으로 바꿔

  이는 재임 기간 내내 지속됐다. 신병률 경성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조선일보>의 조선만평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만들어 온 프레임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무자격’ 일 것”이라며 “능력과 성격 등 모든 부분을 통틀어 ‘무능한 이미지’가 관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조선일보>의 ‘조선만평’이 노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2003년 2월25일∼2008년 2월24일)에 그를 어떤 소재와 방식으로 풍자했는지 조사해 5월16일 ‘2009년 한국언론정보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지독한’ 수사도 ‘증오감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하는 이들이 많았다. 검찰은 지난 3월 인사에서 박연차 전 회장을 수사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강성 라인으로 바꿨다. 새로 들어온 이인규 중수부장과 우병우 중수 1과장은 ‘강성’과 ‘독종’ 이미지로 유명했다. 이들은 박 전 회장을 강하게 압박해 원하는 결과를 차례로 얻어냈다.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이광재 의원 등 참여정부 핵심 인사들을 줄줄이 구속시켰다.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추부길 전 홍보기획비서관 그리고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 균형추를 맞출 현 정권의 실세들의 혐의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은 물론 부인과 아들, 딸까지 ‘비리의 온상’으로 묘사됐다. 노무현은 마지막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썼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절망에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심경을 밝혔다. 그는 죽음으로 그 고통의 고리를 끊고자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생활 내내 검찰과 긴장을 유지했다. 그는 변호사 신분임에도 1987년 노동쟁의조정법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그의 눈에 검찰은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태도를 180도 바꿀 수 있는 존재’로 보였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판사 출신의 강금실 법무장관 카드를 내세워 검찰 개혁을 주문했다. 검찰이 조직적으로 반발하자 노무현은 그 유명한 ‘검사와의 대화’를 열었다. 정면돌파였다. “이 정도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는 말을 남겼다. 김각영 당시 검찰총장은 사표를 냈다. 노 전 대통령은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 등을 통해 검찰권 제한을 시도했다. 위협을 느낀 대검 중수부는 2003년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을 향해 칼 끝을 겨눴다.

  임기 중반에도 ‘대결’은 이어졌다. 강정?전 동국대 교수 사건으로 후임 김종빈 검찰총장이 물러 났다. 검찰 내부에서는 ‘검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검찰 조직을 흔들려고 했다’는 거부감과 반감이 조직적으로 커져갔다. 검사 출신의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의 원인을 이런 ‘원한’ 탓으로 돌렸다.

 

» 지난 2004년 제16대 국회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하자, 김근태 당시 의원(사진 왼쪽)과 정동영 당시 의원 등이 서로 껴안으며 서럽게 울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후폭풍’ 주 대상은 검찰과 보수언론

  그럼 이명박 정부는 왜 검찰에게 노 전 대통령을 수사하도록 했을까? 정치권에서는 ‘촛불정국’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민주당의 한 전직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촛불 정국에서 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태도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쇠고기 협상에 대해 청와대는 “노무현 정부가 안 하고 간 것을 설거지 한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한나라당의 핵심 당직자는 “촛불 정국을 이끈 세력들을 검토 과정에서 이른바 ‘친노 세력들’의 그 한축을 이루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며 “청와대로서는 모래성이나 다름없는 민주당보다 한 줌밖에 안되지만 차돌처럼 결집된 친노 세력이 먼저 정리가 필요한 대상이었다”고 분석했다. 이 당직자는 “내년에 있는 지방선거에서 노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들이 영남에 등장하는 것을 막자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증오와 무시를 바탕으로 한 현실 정치권력과 사법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의 ‘노무현 죽이기’는 결국 그의 죽음으로 귀결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결과다. 후폭풍이다. 정치 컨설팅 업체 나우리서치 이재경 대표는 “앞으로의 ‘후폭풍’은 거의 블랙홀 수준이 될 수도 있다”며 “주 대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수사했던 검찰과 그를 부도덕의 극치로 몰아간 보수언론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했다.

  죽음은 한국 정치의 거대한 돌발 변수였다. 강준만 교수는 신작 <현대정치의 겉과 속>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심정민주주의’라고 했다. 강 교수의 분석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동력은 바로 심정이 폭발한 시위였다. 4·19혁명에서부터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는 모두 시위의 결과였다. 한국인에게 차분한 대화와 토론의 마당은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경험도 없었다. 김주열, 박종철, 이한열이라는 (열사의) 이름이 말해주듯 결정적 계기는 늘 개인의 죽음이었다. 이게 바로 ‘심정민주주의’의 불가사의한 대목이다. ”

  그 심정을 폭발시키는 것이 ‘욱’ 하는 감정이다. 강 교수는 이를 ‘욱 민주주의’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4·19 혁명이 3·15 부정선거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마산에서 ‘부정 선거 다시 하라’, ‘발표경관 처단하라’는 소리가 나오는 데도 서울은 3·15이후 34일 동안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욱’하는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가 없는 6월 항쟁을 생각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전임 대통령의 ‘안전한 귀가’를 보장해야

  2004년 3월12일 대통령 탄핵과 그 직후의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열린우리당의 압승도 ‘욱’하는 기질의 폭발이 불러온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접한 이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이러다 민란 난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스스로 폭발 직전의 민심을 자각한 것이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이명박 정부가 모든 부담을 지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의원은 “MB(이명박 대통령)는 이번 6월 국회에서 미디어 관련법 처리를 집권 후반기를 준비하는 일종의 ‘화룡점정’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의 상황으로는 이를 강행하는 것은 ‘화약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형국’이 됐다”며 “집권 후반기 전략을 사실상 다시 짜야할 상황에 이르게 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도 “이명박 대통령은 ‘사정 드라이브’를 통해 지난해 촛불 정국에서 상실한 국정장악력을 회복해 왔는데. 이제는 사정 드라이브를 사실상 중단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며 “대통령이 검찰과 세무권력을 현실정치에 동원한 것이 앞으로의 국정운영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게 생겼다”고 우려했다. 청와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한나라당의 다른 당직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것은 청와대의 민정과 정무 기능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말들이 많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차제에 청와대와 권력 주변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야에서는 ‘검찰 개혁’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당 안팎에서는 김영삼 정부 초기에 시도했던 ‘중수부 해체론’을 다시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대검에도 (직접 수사를 담당하는) 중수부가 있을 이유가 없다며 이를 해체하려다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을 위해 중수부를 동원해야 했기 때문에 존치시킨 바 있다”고 말했다.

  이런 비극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증오의 정치’를 중단시켜야 한다. 임혁백 교수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는 전임 대통령의 ‘안전한 귀가’를 보장해야 한다”며 “한국이 아프리카도 아니고 ‘죽음의 민주주의’ 패턴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안전한 귀가가 보장돼야 권력을 쉽게 내놓게 되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좀더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게 된다”며 “이명박 대통령부터 그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후폭풍의 크기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과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열사의 죽음은 독재정권의 구조적인 억압의 결과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라는 정치적 구호가 나오기 쉬웠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어떤 정치적 구호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폭풍이 불 지, 그 정도가 얼마일 지를 예상하기는 힘들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까지 조롱하는 일부 보수세력의 태도와, ‘촛불을 막아야 한다’며 분향소 설치와 분향까지 막는 정부의 막가파식 대응이 분노를 점증시키고 있는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

  무덤에도 침을 뱉다

  스스로 대한민국 주류를 자처하는 보수 논객 조갑제씨는 서거 당일 ‘조갑제닷컴’에 “대통령과 같은 지고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그냥 죽어도 서거라고 할 만하다”며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난 자가 검찰에 출두하여 뇌물 수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고발 당하기 직전에 자살한 것을 두고 ‘서거’라고 하면 말이 안된다”고 적었다. 조갑제식 표현을 따르자면, 그들은 노무현의 ‘무덤에 침을 뱉’었다.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노 전 대통령과 그의 죽음에 분노하는 ‘비주류’들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비주류들의 상당수는 한국 사회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잊고 있다. 그들이 무시하고 무지한 만큼 비주류의 증오는 쌓인다. 그 증오를 다시 대물림할 텐가. 이태희 기자 · 이순혁 기자*

 

 

기득권 스스로 포기한 ‘탈권위의 상징’

 

[특별기획]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③ 도전… 당정 분리, 언론과 선긋기, 지역주의 타파 등 새로운 시도 계속했지만
우파·족벌언론 포화에 상처만

 

“저는 이번 선거를 통해 낡은 정치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정치의 시대가 개막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2002년 대선을 이틀 앞둔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무현 시대’를 이렇게 규정했다. 하지만 1년 뒤인 2003년 11월5일 그는 원로 지식인 13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연 오찬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종이 세종의 시대 기반을 닦은 것처럼 새로운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가 되는 것 같고 구시대의 막차를 탄 것 같습니다.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나 후배들이 다시는 흙탕물에 발딛지 않도록 하고, 다음 정부가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랬다. 그는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 맏형’이 되려고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구습은 끈질기고 뿌리 깊었다. 도전은 번번이 좌절됐다.

 

» 2003년 9월30일 청와대 국무회의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커피를 마시며 박호군(맨 왼쪽)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한테서 과학위성의 성공적인 교신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 도중 장관들과 함께 직접 차를 타 마시는 등 권위주의를 없애려 노력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족벌 언론, “좌파” 색칠로 공격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과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공천권과 당직자 임명권을 통해 당에 전권을 휘두르는 ‘총재님’이던 역대 대통령과 달리 그는 그저 평당원이었다. 당정 분리를 실행한 것이다. 대가는 몹시도 썼다. 당내 굳건한 지지기반은 없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에 이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 아파트값 폭등 등으로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자 급기야 탈당까지 요구받았다. “섣부른 당정 분리 때문에 국정운영이 안 된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를 두고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여당이 청와대의 거수기가 되는 걸 막고 국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당정 분리는 역대 대통령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문제는 당정이 소통까지 끊어버리는 바람에 양쪽 다 고립돼 최악의 경우가 됐다”고 지적했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다. 국민주권·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고 하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2004년 9월5일 문화방송 대담에서 나온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구시대 청산이라는 목표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안법 폐지 뜻은 한나라당과 우파 진영의 엄청난 반발에 부닥쳤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대한민국의 법질서가 야만의 시대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내겠다”고 했다. 한나라당은 예산안 처리를 위한 임시국회도 거부했다. 우파 단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는커녕 단 한 글자도 바꾸지 못했다.

  족벌언론과 벌인 싸움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2001년 8월1일 민주당 수원시 국정대회에서 그는 “비리·특권 신문인 <조선일보>를 그대로 두고는 이 땅의 진정한 개혁은 없으며, 당원들과 지도부가 똘똘 뭉쳐 당운과 국운을 걸고 싸우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조선일보>는 함께 몰락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대통령이 된 뒤 그는 ‘국운’을 걸고 족벌언론과 싸웠다. 국정연설에서 “족벌언론의 횡포” “박해” 등 자극적인 표현을 동원해 이들을 비판했다. 이들의 취재엔 응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신문시장 독과점을 규제하는 신문법도 제정했다. 오보엔 일일이 정정·반론 보도를 신청하도록 공무원을 독려했다. 족벌언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좌파 정권’이라는 색칠을 하며 공격적으로 대응했다. 부동산정책도 좌파 정책, 교육정책도 좌파 정책이라고 했다.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자 <조선일보>는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동아일보>는 2006년 6월 “(임기가) 남은 1년 반, 우리끼리라도 실용적 세계화로 살아남아야 한다. 일제 36년도 견딘 우리다”라고 썼다. 증오였다. 불행히도 여론을 좌우하는 힘은 그가 아니라 이들에게 있었다.

  탈권위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중요하게 여긴 과제였다. 2003년 3월11일 참여정부의 두 번째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그리 지치지 않았다. 회의 도중 대통령이 제안한 휴식 시간 때문이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회의장 바깥 복도에 마련된 탁자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셨다. 노 전 대통령도, 장관들도 모두 손수 탄 차였다. 경직된 분위기로 진행되던 과거 국무회의에선 휴식도, 커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한 국무위원은 “그런 자리도 처음이지만, 대통령이 직접 차를 타 마시는 것을 보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대통령께 접근하기가 쉬워졌다”고 했다.

지역 균형발전도 헌재에 가로막혀

» 퇴임 뒤 봉하마을로 돌아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8년 3월 마을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 누리꾼들은 이 사진을 보고 ‘멋진 노무현’이란 뜻의 ‘노간지’라는 별명을 지었다. 사진 연합 최병길

노 전 대통령 스스로 권위주의의 갑옷을 내던진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국민에게 개방했다. 총리가 주재하던 국무회의부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수석·보좌관회의까지 직접 주재했다. 회의엔 장관뿐만 아니라 관련 실무자까지 참석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얘기했다. 듣고 싶은 의견이 있으면 행정관한테도 직접 전화를 걸었고, 맞담배도 피웠다.

  거침없는 표현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통령의 언어와 서민의 언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일상과 공식 언어의 일치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서민 대통령?지향하는 철학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는 당시 청와대 참모의 말은 되씹어볼 만하다. 어깨에 힘을 주는 게 아니라 국민과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해야 진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라는 얘기다. 우파와 족벌언론은 이번엔 ‘경박하고 품격 없다’는 평가를 내려줬다.

  지역주의 해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숙원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에 “이의 있습니다”라고 손을 드는 순간 그는 지역주의 해소의 상징이 됐다. 당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영남 출신 호남당 대선후보’의 당선은 많은 이들에게 지역주의 해소의 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것도 지역주의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인사에선 ‘영남 패권주의’만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역 균형발전도 그의 도전 과제였다. 하지만 그 전략으로 내놓은 행정수도 건설은 추진 초반부터 쉽지 않았다. 2004년 1월 공포된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그해 9월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관습헌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논거를 대 위헌 결정을 내렸다. “수도 이전은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막겠다”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을 비롯해 수도권의 민심도 악화됐다. 규모를 줄인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바꿔 다시 추진할 수밖에 없었지만, 수도권과 충청권으로 민심은 갈릴 대로 갈린 뒤였다.

  노 전 대통령이 꿈꾼 정치개혁의 도착지는 제도로 운영되는 민주주의였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 만큼 기록에 집착했던 것도 그런 의지였다. 그는 밤에 청와대 관저에서 사적으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다음 날 기록관리비서관에게 만난 사람과 나눈 대화의 요지를 알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지정기록물은 37만여 건에 이른다. 앞선 대통령들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지정기록물을 거의 남기지 않은 것과는 판이하다. 하지만 역시 ‘선배’들이 옳았던 것일까. 이명박 정권은 집권 여섯 달 만에 법원을 동원해 지정기록물 공개에 나섰다. 지정기록물은 쉽게 공개될 경우 현직 대통령이 후임을 의식해 주요 기록을 제대로 안 남기거나, 후임이 직전 대통령을 상대로 정치 보복을 벌일 수 있어 비공개라는 장치를 둔 제도다. 이명박 정부는 이에 더해 ‘기록물 유출’ 논란까지 일으켰다. 이준한 교수는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하면서까지 책임정치를 할 기반을 만든 건데, 본질과 무관한 다툼이 돼버려 안타깝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왜 끊임없이 도전하고,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어야 했을까?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전문위원은 “구습을 끊어내고자 하는 열정은 강했지만, ‘그 다음’을 내놓지 못했다. 구시대의 관습과 지역주의 타파, 당정 관계 변화 등 중요한 화두를 던졌지만,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준비된 내용을 보여주지 못해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켰다”고 분석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지역 균형발전, 행정수도 이전 등의 문제가 손쉽게 ‘이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것도,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설 수 있는 사안을 ‘당위’로 밀어붙이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구시대의 막내 되고자 했을까

  대통령 자리를 떠난 그는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가 ‘시민’이 되려 했다. ‘전빵’(구멍가게의 경상도 사투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고, 자전거에 매단 수레에 손자·손녀를 태우고 마을을 달리기도 했다. 봉하마을 주민들과 오리농법을 이용해 ‘친환경 봉하 오리쌀’을 수확했다. “자유롭게 대화하되, 깊이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민공간을 만들어보자”며 개설한 웹사이트 ‘민주주의 2.0’에선 ‘노공이산’(우직한 사람이 뜻을 이룬다는 ‘우공이산’에 ‘노’를 합친 말)이란 필명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권위주의를 벗어던지고 참여와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발전에 힘을 보태려는 노력이었다. 처음 보는 유형의 전직 대통령 모습에 봉하마을은 관광객으로 붐볐고, 누리꾼들은 ‘노간지’(멋진 노무현이란 뜻의 합성어)라는 애정어린 별명을 붙여주며 열광했다.

  검찰이 숨통을 옥죄어오자 그는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썼다. 마침내 2009년 5월23일 스스로를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는 청렴해야 (된다고) 하고, (지도자에게) 결단력을 요구하지만 50년이나 100년 뒤에 보면, 많은 흠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같은 방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느냐가 문제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게 중요하다.”(2002년 9월26일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 마지막 순간, ‘노공’은 혹시 ‘구시대의 막내’가 되길 바라며 이 말을 떠올리진 않았을까. 조혜정 기자 *

 

 

촛불로 맞아 촛불로 보내다

 

[특별기획]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④ 촛불… 대통령 당선의 결정적 계기로 시작돼 임기 내내 ‘시민 미디어’가 되고
추모의 불길로 타오른 ‘참여정치’의 상징

 

5월23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촛불이 켜졌다. 생전 웃는 모습 곁에 누군가 방명록을 뒀다. 이미 시민들의 글이 빼곡하다. 떨리는 손 다잡은 흔적이 물고기처럼 펄떡댄다. ‘정신애’라는 이름이 감정에 겨운 글로 말한다. “스무 살 때 촛불 들어 지켜냈습니다. 다시 한번 촛불을 들어 이제 가시는 길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촛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7년을 함께했다. 들어 올렸다 내렸으며 이제 다시 그의 곁에 모이고 있다.

시민의 촛불, 노무현의 자원이 되다

» 그때, 돼지저금통에 담긴 것은 정치자금만이 아니었다.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오랜 열망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선거 참여를 탄생시켰다. 2002년 11월28일 경기 부평역 광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돼지저금통에 모은 돈을 전달받은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가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모든 일은 촛불에서 시작했다. 하굣길의 여중생 두 명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렸다. 2002년 6월이었다. ‘앙마’라는 네티즌이 다 같이 모여 추모하자고 제안했다. 지도부가 없어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전에는 몰랐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4만5천여 명이 모였다. 촛불.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고 여린 그것을 사람들은 품에 당겨 안았다. 사건, 무명씨의 제안, 인터넷 토론, 광장의 촛불, 기성정치를 압도하는 시민의 힘…. 이때부터 ‘촛불 정치’의 문법이 틀을 갖췄다.

  “반미면 어떻습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 노무현이 말했다. 1400도로 타오르는 수만 개의 촛불 앞에 섰다. “미국에 대해 우리 정부가 좀 더 자율적이어야 합니다.” 촛불이 박수를 보냈다. 대통령 후보가 ‘반미 집회’에 참여해도 되느냐고 대선 캠프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촛불 현장을 찾았을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반미가 아니라 시민이었다. 2002년 6월 이후, ‘시민으로서의 촛불’은 결정적 국면마다 그의 자원이 됐다.

  2002년12월 대선 패배 이후, 한나라당은 ‘효순·미선 촛불 집회로 인한 반미 정서’를 패인으로 꼽았다. 반미 정서까진 모르겠으나 촛불 집회가 이회창 후보의 패배, 노무현 후보의 승리와 밀접했던 것은 사실이다. 우파의 ‘촛불 콤플렉스’도 함께 시작됐다. 심지어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배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고 우파 인사들은 의심한다. 현명한 의혹은 아니다. 촛불의 작동 방식을 여전히 이해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촛불을 움직인 게 아니라, 기성 정치 구조 전체를 불신하는 시민들이 촛불을 붙이고 끄고 또 붙였다.

“정치는 여전히 특정 정치가 계급의 직업적 행위이고, 이에 진입하는 경로 자체를 바로 그 계급이 독점하고 있다.” <유쾌한 정치 반란, 노사모>에 노혜경이 그렇게 적었다. 같은 책에는 “정치 혐오의 진흙탕에서 피운 정치 사랑의 연꽃”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정치개혁을 꾀했던 노무현 노선에 대한 시적 개념화다. 실제로 2002년 12월19일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언론은 ‘노사모의 승리’라고 적었다. 민주당의 승리라 기록했다면 부정확한 표현이 됐을 것이다. 민주당에 앞서 자리를 차지한 ‘노사모’는 정당 질서에 복속되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을 대표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만 졸업한 노 전 대통령에게 최고 엘리트들이 장악한 정당·관료 조직의 장벽은 높았다. 그는 기성의 정당·관료 정치와 항상 긴장했다. 그가 싸운 것은 지역주의 이전에 ‘엘리트주의’였다. “명문가, 명문학교 출신들은 깊이 반성해봐야 합니다. 기회주의 처신으로 개인적 이익을 도모해왔고, 그 가운데 부당하게 특권을 누려왔던 과오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선 직전 출간된 <노무현의 색깔>이라는 책에서 그는 엘리트로 표상되는 기성의 권력 작동 방식을 비판한다.

  이 점에서 그는 ‘양김’과 단절한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기성 정당의 역학구조에서 탄생했다. 두 대통령은 나란히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보수정당 또는 분파의 힘을 빌렸다. 대통령 김영삼은 1990년 3당 합당을 거친 민자당 창당의 산물이었다. 대통령 김대중은 평생의 숙적 김종필과 손을 잡은 ‘DJP 연합’의 결실이었다. 정치권력의 상층을 어떻게 분할하고 통합할 것인지가 이들의 화두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대편을 봤다. 정치권력의 밑바닥, 정치 구조의 외곽에서 정치적 자원을 길어 올렸다.

 

» 촛불은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7년을 함께했다. 5월23일 밤, 봉하마을 빈소 앞에서 시민들이 추모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촛불에 대한 우파의 뿌리 깊은 공포

  노사모’는 이미 2002년 대선 이전부터 주권재민과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정치인 노무현은 그 의지를 실현할 인물로 여겨졌다. 그들이 “자율성을 존중하는 느슨한 연대”를 구현하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소통과 지역 소모임 형태의 풀뿌리 조직을 갖췄을 때, 촛불의 진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2004년 3월부터 석 달에 걸친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은 그 정점이었다. 최대 13만 명이 운집했던 이 촛불은 의회의 결정을 무력화하고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사실상 압박했다. 정당의 외곽, 거리와 광장과 인터넷에 편재한 시민의 힘을 신뢰했던 노 전 대통령의 판단은 옳았다. 정치인 노무현과 그가 표상하는 가치를 지켜준 것은 정당이 아니라 시민이었다.

  그 가공할 위력을 우파는 일찍부터 두려워했다. 촛불을 일컫는 우파의 용어는 따로 있다.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감정을 휘어잡기 위해 마구잡이로 외쳐대는 흥행이다. 몇 가지 특징은 있다. ‘반엘리트’ ‘반지식인’ ‘부흥사적 도덕주의’ 같은 것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대중이건, 대통령 지망자들이건 그런 난폭한 포퓰리즘 풍토에 흠씬 젖어 있다.”(2002년 4월6일,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비록 비난의 맥락에 담기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 보수 논객은 포퓰리즘에 흠씬 젖은 대통령 지망자가 반엘리트주의와 도덕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2002년의 촛불 시민과 2004년의 촛불 시민은 바로 그 반엘리트주의와 도덕주의를 강력히 지지하기 위해 광장에 나왔다.

  촛불은 그러나 끝없이 흔들린다. 2003년 6월, 이라크 파병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2007년 3월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대통령 노무현과 소통하는 ‘시민 미디어’였다. 그 풍경은 더이상 낯설지 않았다. 다만 4년 간격을 두고 타오른 두 촛불은 ‘노무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촛불은 그의 행보에 물음표를 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그 촛불에 현명하게 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 시스템의 상부 구조로 퇴행했다.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이뤄 바닥난 정치자원을 보충하려 했다. 직접·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이 흔들렸고, 시민들의 촛불도 사라졌다.

  100만 명이 모인 2008년 촛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반 이명박 정부’를 내걸었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오판했다. 시민들이 불신하는 것은 기성 정치 구조 전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촛불을 보고 다시 한번 노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노무현의 모든 유산’을 척결하려 했다. 그 가운데는 노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검찰 수사도 포함된다. 그의 죽음은 촛불에 대한 우파의 뿌리 깊은 공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다시 촛불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제 무엇을 지킬 것인가

  계속 타오를까? 언제까지 어디까지 번질까? 지난해와 같은 대규모 촛불을 낙관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정권의 탄압이 있고, 촛불이 내세울 구호도 여전히 막막하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촛불이 다시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겠지만, 추모의 물결이 얼마나 확산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5월23일 대한문 앞에 적힌 방명록의 글은 대부분 후회와 반성의 고해였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제와 그리운 게 원통하다고 적었다. ‘자혁·자현 아빠’도 글을 남겼다. “그때 차라리 그들을 막지 말 걸 그랬습니다. 당신을 탄핵한다는 이들에게서 당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을 때는 이런 일이 생길 걸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자혁 아빠가 ‘당신’을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세상을 떠났다. ‘당신’이 좋아서 때로는 미워서 촛불을 들던 사람들은 그래도 ‘당신’없는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다시 촛불을 든 자혁 아빠는 이제 그 촛불로 무엇를 지킬지 고민해야 한다. 저기, 사람들이 간다. 안수찬 기자·임인택 기자·전종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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