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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누가 왕을 죽였는가?(4)- 제 17대 효종

by 싯딤 2008. 10. 15.

4장

사라진 북벌의 꿈

 

제 17대 효종 1619-1659, 재위 1649-1659(10년간)

 

 

<효종실록> 10년5월4일

임금이 어의御醫에게 침 맞는 것에 대해 물으니 어의 신가귀가 대답하기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농증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고 말했으나 다른 어의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효종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 했다.”라고 말했으나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피를 빨리 멈추게 하는 약을 발라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삼공三公과 송시열, 송준길,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 사관史官, 제신諸臣도 따라 들어가 어상御床아래 부복하였는데 임금은 이미 승하하였으며 왕세자가 영외楹外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각은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 사이였다.

 



<효종이 쓴 편지,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 심양에 볼보로 가 있을 때 장모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

 <내용>

 "새해에 기운이나 평안하신지 궁금합니다. 사신 행차가 (심양으로) 들어올 때 (장모님께서) 쓰신 편지 보고 (장모님을) 친히 뵙는 듯, 아무렇다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청음(김상헌의 호)은 저리 늙으신 분이 (심양에) 들어와 어렵게 지내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옵니다. 행차 바쁘고 하여 잠깐 적사옵니다. 신사(인조 19년, 1641년) 정월 초팔일 호.

* 이 때 나이가 봉림대군 24세, 함께 끌려온 대신 김상현은 72세였다.

 



<효종 어필>

 

 

종기와 어의御醫 신가귀의 침

 

소현세자가 삼전도의 치욕을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조선을 개혁할 계기로 삼겠다는 꿈으로 승화시켜려 한 인물이었다면, 동생 효종은 그 치욕을 북벌로 직접 씻으려 한 인물이었다.

 

효종은 문치文治의 나라 조선에서 무치武治를 하려 한 특이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무치는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발을 낳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효종은 송시열과 손을 잡았다. 그런 후 북벌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독살설에 휘말린 임금들이 대개 그렇듯 효종의 죽음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었다. 효종은 죽기 2달 전 송시열과 독대한 자리에서 강력한 어조로 북벌을 주장하며 최소한 10년은 더 살 자신이 있다고 호언했다. 그 때 만 40세의 장년이었던 효종은 하지만 2 달 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효종의 증세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혹은 설득력을 가졌다. <효종실록>에 처음 병세가 기록된 날은 재위 10년 4월 27일이다. 머리 위에 난 작은 종기의 독이 점점 퍼져 얼굴까지 번졌는데, 이런 증세는 그리 심한 것이 아니었다. 의원이 문안했을 때 효종이 한 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종기의 증후가 날로 심해가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의원들은 그저 평이한 처방만 일삼고 있는데 경들은 그렇게 여기지 말라."

 

효종의 증세는 이렇듯 어의들이 보통으로 여길 정도로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종기를 진단한 어의의 처방은 산침散鍼이었는데, 산침으로 독기를 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따라 효종은 계속 산침을 맞았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문제의 어의 신가귀이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던 신가귀는 효종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철문 밖에 나아가 입궐을 청했다. 효종이 그를 입시시켜 물었다.

 

"침을 맞아야 하겠는가?"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농증을 이루려고 하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른 어의 유후성이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며 말리고 나섰다. 세자(현종)가 일단 수라를 든 후에 침을 맞을지 여부를 논의하자고 중재에 나섰으나, 효종은 이를 물리치고 침을 놓으라고 명했다. 신가귀가 침을 놓은 후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자 효종이 안도하면서 말했다.

 

"가귀가 아니었으면 병이 위태로울 뻔했다."

 

그러나 침구멍으로 피가 나온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온 것이다.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침을 놓은 신가귀가 손이 떨리는 증세, 즉 수전증 상태였다는 점이다. 수전증의 어의가 국왕에게 침을 놓은 것은 조선조 초유의 일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범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전증의 어의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가 그치지 않자 약방에서 급히 청심환과 독삼탕을 올렸다.

 

정신이 혼미해진 효종이 삼공과 송시열, 송준길, 그리고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달려가 어상 아래 부복했을 때 효종은 이미 승하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손 한번 못 써보고 북벌을 추진하던 군주 효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허무한 노릇이었다.

 

소현세자의 유산

 

장남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왕위를 지키고자 했던 인조도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인조는 소현세자 사후 4년 만인 1649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정변과 호란 그리고 음모와 독살로 점철된 27년간의 재위 기간을 마감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바로 효종, 즉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소현세자의 친동생인 봉림대군이다. 그러나 인조의 뒤를 이은 조선의 17대 국왕 자리는 원래 봉림대군의 것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것이자 원손 석철의 것이었다.

 

효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자로 결정된 이틀 후 상소를 올려 사양한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한 부담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상소는 "세자의 자리는 천만 뜻밖이며 원손의 칭호는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므로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지극히 간략한 내용이었다. 정승 등 고위직에 제수되면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는 당시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봉림대군의 상소는 의례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전날 이미 병조의 군사 50여 명이 봉림대군 저택에 파견되어 호위를 시작했던 데서, 그의 세자 책봉은 기정사실이었다.

 

봉림대군은 1차 상소 사흘 후인 인조 23년 윤6월 7일 재차 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이번에는 1차 상소에서 언급했던 원손에 대한 말조차 빠져 있었다. 2차 상소를 마지막으로 봉림대군의 사양 상소는 다시 없었다. 적어도 세 번의 사양 상소가 기본 예의였던 당시 관례로 봐서 봉림대군의 이런 거조는 세자 수락 성명이나 다름없었다. 봉림대군은 세자로 책봉된 조치에 만족했던 것이다.

 

드디어 그해 9월27일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는 왕세자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27살 때였다. 이로서 봉림대군이 조선의 세자임이 온 나라에 선포되었다.

 

심양시절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자리를 넘보려 한 증거는 찾기 힘들다. 소현세자가 유고일 경우 조선의 종법에 따른 후사는 원손 석철이란 점에서도 봉림대군이 왕위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반청 자세를 견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의 종법은 국왕이라 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봉림대군이 즉위하자 소현세자의 원손 석철에 대한 거론은 금기가 되었다. 소현세자와 원손 석철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효종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사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석철을 비롯한 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에서 죽었을지라도 세자의 3남 석견이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세자의 두 아들이 미성년으로 죽었으므로 소현세자의 후사는 3남 석견이 이어야 했다.

 

소현세자의 유산은 효종이 즉위했다 해서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도 많았다. 소현세자의 급서를 책임져야 함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의관 이형익의 처리문제도 그 중 하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양사는 다시 이형익의 처형을 요청했다. 그러나 효종은 인조가 그랬던 것처럼 단호하게 반대했다.

 

"어찌 당시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사형을 논하는가. 지금 만약 그를 죽인다면 선조(인조)의 뜻을 거스를 염려가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공신이자 효종 즉위의 일등공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유산은 이형익 뿐만이 아니었다.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약점

 

강빈 일가의 억울한 죽음도 소현세자가 남긴 유산의 하나였다. 강빈은 누가 보더라도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은 가엾은 며느리였고, 그 식구는 사돈에 의해 멸문된 불쌍한 가문이었다. 의리를 명분으로 삼은 산림은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강빈의 신원 문제를 당론으로 삼기도 했다. 이렇듯 불씨를 안은 채 잠복해 있던 강빈 신원 문제는 효종 5년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가뭄이 계속되자 효종이 사대부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이때 황해 감사 김흥욱이 이에 응하는 응지상소를 올려 정면에서 강빈의 신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흥욱은 강빈 옥사의 의혹을 조목조목 들어 강빈이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강빈이 저주 사건을 일으키고 인조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모두 부정하면서, 모든 책임을 이미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인조의 후궁 소용 김씨와 김자점의 공작으로 돌렸다.

 

"역적 조(소용 조씨)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자점은 밖에서 조작해 견강부회로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사사에 이르게 하고 강빈의 온 가문을 남김없이 주륙하였으니 아! 참혹합니다. 소현의 두 자식의 죽음도 자점이 빚어낸 것입니다. "청 장수(용골대)가 운운했다."는 말은 은밀한 일로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인데도 자점이 연좌를 주장했고, 또 후환을 막아야 한다며 어린아이들을 외방에 멀리 유배시키기를 청했습니다. 나이어린 연약한 아이들이 고생스레 방황하면서 서로 이끌고 한꺼번에 남쪽 유배지로 옮겨 가게 되자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유배지에 도착한 후 얼마 안 되어 죽게 되니 자점의 사주라 여기는 사람들의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김홍욱은 현재의 재변은 억울하게 죽은 강빈 일가의 원한 때문이라며 신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효종은 이 상소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김홍욱은 강빈 옥사를 소용 조씨와 김자점의 책임으로 돌렸지만, 효종은 이를 자신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김홍욱의 상소 내용을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즉시 사람을 보내 홍욱을 대신하게하고 금부도사로 하여금 홍욱을 잡아 오게 하라."

 

그러나 효종의 이 명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임금의 구언에 응한 응지상소는 오늘날 국회의원의 의정발언처럼 면책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로를 그만큼 중히 여긴 것이다. 효종은 구언하면서 "모든 일을 숨김없이 다 말하라. 말이 비록 거칠거나 참람하더라도 죄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막상 김홍욱이 강빈 옥사를 거론하자 자신의 구언 하교를 무효화시켜버렸다. 그만큼 강빈 문제는 효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효종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김홍욱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김홍욱의 상소대로 강빈 옥사를 재조사한 결과 사건 자체가 조작임이 밝혀질 경우, 그 파장에 대해서는 효종도 손을 쓸 수 가 없었다. 강빈이 무죄라면 강빈의 자식으로 유배형에 처해져 제주에서 죽어간 두 아들도 당연히 신원되어야 했으며, 그리되면아직 셋째 아들 석견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종통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다. 또한 소현세자가 이형익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효종의 정통성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효종이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효종으로서는 김홍욱을 그냥 둘 수 없었다.

 

효종이 김홍욱을 국문하려 하자 거의 모든 대신들이 반대했다. 강빈의 억울함에 공감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응지상소 처벌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들은 응지상소 처벌을 사대부 중심의 통치 체제에 대한 국왕의 월권으로 여겼다. 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백, 우의정 심지원 등이 김홍욱을 두둔하자 분노한 효종이 말했다.

 

"후세에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책임질 것이니 경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김홍욱은 혹심한 고문에 시달렸으나 그는 확신범이었다. 국문을 받던 김홍욱은 오히려 삼사를 꾸짖으며 부르짖었다.

 

"왜 말하지 않는가? 왜 말하지 않는가? 예로부터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던가? 내가 죽으면 내 눈을 빼내어 도성문에 걸어두라.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겠노라."

 

계속되는 국문에도 굴하지 않던 김홍욱은 결국 장사杖死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산림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크게 반발했다. 나라는 국왕과 사대부가 함께 통치해야 하는 것이지, 국왕이 마음대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 효종의 행위는 절대왕권을 행사하려는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생각은 달랐다. 효종은 조선을 군주국가라 생각했고, 군주국가에서 국왕은 나라의 주인이자 어른이며 사대부나 일반 백성은 모두 신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 두 생각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즉 이는 조선의 지배자가 국왕과 사대부냐 아니면 국왕뿐이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차이가 효종 재위 10년 간 국왕과 사대부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의 근본 원인이 된다.

 

모든 것을 북벌로

 

효종 시대의 화두는 북벌이었다. 효종은 북벌에 매달렸다. 북벌만이 자신의 왕위계승을 정당화시켜준다고 믿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 중요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군사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의 배경에는 8년간에 걸친 심양에서의 불모 생활이 있었다. 효종 또한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 모두 청이 승리한 이유가 학문이 아닌 군사력의 우위에 있음을 인정했지만 청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이 대륙을 장악한 이상 분쟁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청과 선린관계를 구축한 후 국가 발전에 매진하는 것이 조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어차피 사대의 예를 취할 바에야 그 대상이 명이면 어떻고 청이면 어떻냐고 생각했던 소현세자의 실리적 사고는, 심양에서 주자학의 상대성을 알게 된 데서 기인했다. 소현세자는 지구 반대편에 주자학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신봉하는 또 다른 문명국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벽안의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이들과 교류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달랐다. 그에게 청은 선린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청의 모습을 이해하는 동안 봉림대군은 청의 약점을 알려고 노력했다. 물론 봉림대군이라고 앞뒤가 막힌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봉림대군도 심양 시절에 소현세자처럼 주자학을 절대 가치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현세자처럼 천주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주자학이나 천주교가 아니라 북벌이었다. 그 북벌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갖추어야 했고,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권이 필요했다. 청나라 임금은 주자학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자학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봉림대군은 바로 그것이 실질적인 군주권이라고 생각했다.

 

청과 싸우려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효종은, 강력한 승무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그의 현손인 정조와 함께 조선 후기 승무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군주였다. 그에게 승무정책은 북벌의 전제조건이자 절대조건이었으며, 북벌에 필요한 것은 지식 많고 말 잘하는 문관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힘을 발휘할 무관이었다. 그는 조선의 문,무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관은 문을 숭상해야 하고, 무관은 무를 숭상해야 하는 법인데,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여 문관이 무관처럼 생기면 경멸을 받지만 서생처럼 생긴 무관은 세상에서 용납하게 되었다. 만일 무관이 말 달리기를 좋아하면 광패하다고 지목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지금의 무관은 선비와 같으니 어찌 싸움터에서 힘을 쓸 수 있겠는가."

 

무신을 문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유일한 군주이기도 했던 효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전시에 일개 서생들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큰 폐단이다."

 

당시 조선은 문신이 군사 지휘관을 가진 특이한 나라였다.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유성룡이 문신이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바로 이런 점이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킨 원인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 효종은 문무의 엄격한 구분이 군사력 강화의 첫걸음이라고 판단했으나, 당시 상황으로는 무신을 병조판서에 제수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효종은 차선책으로 박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다. 모든 문서들이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판국에 박무가 홀로 <수륙군환정사목> 등 군정 개혁 5개 조를 내놓아 군비 확장을 찬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효종과 박무는 뜻이 잘 맞는 짝이었다. 박무는 효종의 뜻에 따라 청의 감시와 문신들의 의혹의 눈초리를 감내해가면서 군비를 확장했다. 그러나 술을 절제하지 못했던 박무는 병조판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과음에 의한 쇼크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효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군비 확장에 찬성하는 드문 문신인 원두표를 병조판서에 임명해, 군비 확장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원두표는 김자점의 낙당洛黨과 대립되는 원당原黨의 영수였으므로 김자점이 거세된 이후의 정국을 이끌 적임자이기도 했다. 이어 효종은 무신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했다. 이는 문무를 조화시키기 위한 조치로, 원두표에게는 국방 정책을, 이완에게는 그 실행을 맡긴 인사였다. 실로 원두표와 이완 두 사람은 효종의 북벌 계획과 실행을 뒷받침한 문무 신하이자 효종의 동지였다.

 

효종은 이 두 신하를 중심으로 강력한 군비 확장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 하나가 관무재를 다시 실시한 것이다. 관무재는 국왕이 친히 군사들의 기예를 시험해 본 후 우수자를 서용하는 일종의 무과시험이었다. 그런데 효종이 재위 3년 8월 다시 관무재를 실시하려 하자 대사헌 민응형, 봉교 이단상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봉교 이단상이 든 반대 이유가 그날이 자전(자의대비 조씨)의 목욕일이라는 궁색한 것이었으니. 이들이 얼마나 군비 확장을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효종은 관무재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인물들을 지방 수령으로 임명해 무신들의 사기도 높이는 한편 지방 군비도 확충하려 했다. 그러나 무신을 수령으로 임명하려는 이 조치에 많은 문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영의정 정태화가 "수령은 상으로 내리는 벼슬이 아닙니다."라고 반대하고 나선 것은 문신들의 이런 반대를 집약한 것이었다. 결국 문신들의 집요한 반대로 관무재 합격자를 지방 수령으로 발령하려던 효종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효종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재위 5년째 되던 해에 영장제도를 부활시켰다. 영장들을 지방에 보내 군비 확장 사업을 전개하게 한 것이다.

 

또한 효종은 무신 출신 유혁연을 승지로 임명하였다. 물론 이 역시 문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간에서는 무관 출신 승지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효종은 수령을 파견할 때 군사관계는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조판서는 무관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그리고 유혁연이 이를 효종에게 보고하게 했다.

 

이런 다각도의 노력 끝에 효종은 재위 6년 가을, 장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량진에서 조선 군사의 위용을 자랑하는 열무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때 승무원이 제사를 지낸 직후 군사 퍼레이드를 갖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대하고 나섰으나, 효종은 이런 반발을 무시하고 그 해 9월 29일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펼치는 열무식을 강행했다. 이때의 열무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심신의 상처를 입은 조선 민중들을 위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효종은 세자와 문무백관을 열무식에 다 모이게 했는데, 이들 외에도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대부가의 여인들까지 대거 몰려들어 구경했다.

 

하지만 이런 열무식에 대해서도 문신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심지어 청과 분쟁거리가 된다며 말리는 신하들도 있었다. 효종은 문신들이 무찔러야 할 적군이 청과의 분쟁거리가 된다며 군비 확장을 말리자 분개했다.

 

"지금 명색이 관리란 인물이 열병식이 청나라와 분쟁거리가 된다고 말하면 내 마음이 움직일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것이 어찌 북쪽 오랑캐의 주구가 아니겠는가?"

 

효종의 결심은 확고했다.

 

효종은 기병을 양성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의 담장을 열어 기사장을 만들기도 했다. 산악이 험준한 조선에서 기병이 그다지 유용한 군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위군인 금군과 기병을 양성한 효종의 속마음은 물론 북벌에 있었다.

 

효종의 군비 확장 의지는 제주도에 표로해 온 네덜란드의 하멜에 대한 처리에서도 나타난다. 효종은 하멜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서 그들의 조총을 모방한 새로운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러나 군비 확장에 따르는 어려움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군사로 충당할 인원이 부족한 것이었다. 일반 농민들은 연이은 전란으로 황폐화된 농토를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효종은 일반 농민들의 징발이 어렵자 실제 납공에서 누락된 노비들을 추쇄해 군사로 추당하려고 했다. 당시 노비대장에 등재된 노비의 수는 19만여 명이었으나 실제 납공노비는 2만 7천여 명뿐인 데 착안해, 나머지 16만여 명을 잡아 군사로 충군하려 한 것이다.

 

효종은 누락 노비들을 잡는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해 남부 5도에 추쇄어사를 파견해 내려보냈다. 그러나 당시의 노비 누락은 역사 발전에 의한 신분제 붕괴의 결과로, 이들의 상당수는 농업에 종사하는 일반 양인이었다. 결국 이들의 추쇄는 농민 추쇄와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노비 추쇄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군비 확장에 따르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군비 확장과 북벌에 대한 문신들의 반발이었다.

 

효종의 딜레마

 

효종의 군비 확장과 북벌 의지에 대한 문신들의 반발은 거셌다. 군비 확장의 전제조건은 강력한 왕권이었다. 그러나 군비확장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효종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대부들과의 마찰도 강해졌다. 조선은 청과는 다른 나라였다. 비록 국왕이라 해도 사대부의 지지없이는 강력한 정책을 펼 수 없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말로는 춘추대의를 외쳤으나 속으로는 현상 유지를 바라고 있었다. 구조화된 문치주의 아래서 지배계급의 지위나 계속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들은 두 번에 걸친 국가적 전란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지배세력이었다. 이것이 바로 효종의 딜레마였다.

 

즉 이들을 배제하고는 북벌도 군비 확장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효종은 문신들의 반발을 억누르며 군비 확장을 강행했는데, 재위 8년째가 되자 문신들이 효종의 승무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백성들의 민생을 먼저 생각하라는 이른바 안민책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농사를 짓는 한편 군사훈련, 성 쌓기, 병장기 제조 등의 부역에 동원되어 이중의 곤란을 겪고 있었으므로 안민책은 명분있는 반대였다. 당연히 농민들로부터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문신들은 이를 구실삼아 군비확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피폐한 생활을 구실로 한 군비 확장 반대는 일견 명분이 있어 보이지만 그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이 또한 말뿐이었다. 당시 농민 생활을 피탄에 빠뜨린 주범은 군비 확장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금체계였다. 농민들을 짓누르던 군역을 양반 사대부들은 면제받고 일반 백성들만 부담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수천 석의 소출을 올리는 전주인 사대부의 공납액과,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전호인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공납액도 같거나 오히려 농민들이 더 무거운 경우가 많았다.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 불균등한 조세체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는 극력 반대하면서도, 말로는 농민생활의 피폐를 구실로 군비 확장에 반대했다. 물론 대동법의 경세가 김육이나 이경석처럼 농민들의 고초를 진심으로 걱정한 문신들도 있었지만, 나머지 대다수 북벌에 반대하는 문신들은 군비 확장이나 북벌로 인한 기득권 상실을 두려워했다.

 

효종 8년 사대부들이 효종의 군비확장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서자 효종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사대부들이 더이상 효종의 정책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나서자 더 이상 군비확장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효종 8년(정유년) 산림의 영수 송시열이 올린 <정유봉사丁酉封事>였다. 봉사란 남이 볼 수 없게 밀봉한 상소문을 말한다. 그만큼 비밀스런 내용이 담겨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남송의 주희가 효종에게 올린 봉사를 본 뜬 것이었다.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효종의 재위 8년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은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자 한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해,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총 19개 항목에 걸쳐 국정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언했다. 송시열은 오늘날까지 효종 북벌 이론의 제공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그의 사후 노론제자들이 스스로 발전시킨 것이고 실상은 북벌의 반대자였다. 이 <정유봉사>에서도 송시열은 사실상 북벌 중지를 요청한다. 북벌 중지의 논리 역시 주희에게서 빌려왔다.

 

"주자가 처음에는 효종(남송의 효종)에게 금나라를 쳐서 북벌하는 의리에 대해 극진히 말했으나, 20년 뒤에는 다시 북벌에 관해 말하지 않고 다만 '오직 폐하께서 먼저 동남쪽의 태평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시어 마음을 바르게 하시고 한 몸의 사용을 이기셔서 조정을 바르게 하시면 진실한 업적을 얻을 수 있어서 별다른 근심이 생기지 않아 원대한 계획이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때 효종이 편안한 데 빠져서 근본이 염려되는 것을 이길 수 없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남송의 주희가 처음에는 북벌의 의리를 논하다가 나중에는 북벌이 아니라 '수신'을 권고했는데, 이는 남송의 효종이 편안한 데 빠졌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는 남송의 효종에게는 해당될지 몰라도 조선의 효종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조선의 효종은 직접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군사들과 어울리는 임금이었으니 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진정 염려해야 할 것은 말로는 '북벌'과 '춘추대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북벌에는 딴죽을 거는 송시열같은 문신 사대부들의 이중적인 처신이었다.

 

청나라가 알면 오히려 좋아할 이런 내용의 상소를 굳이 봉사라는 비밀상소의 형식을 빌려 위기를 과장한 그 진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시 민생을 살리기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구체적으로 양반 사대부들의 봉건적인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양반들도 일반 백성들처럼 국역의 의무를 지는 것이 민생안정의 첩경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유봉사>에서 효종이 사대부를 우대하지 않는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사대부를 우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송시열이 효종에게 분개한 가장 큰 이유였다.

 

"전하께서 대신을 공경하여 예법으로 부리는 도리를 아시지 못함은 아니지만 지난번에 심하게 대신을 꾸짖으시고 돼지처럼 여러 관원을 꾸짖었다 하는데 그것은 주자가 매우 놀라 탄식한 바입니다."

 

이는 얼마 전 효종이 홍문관 부제학 윤강을 태형한 것에 대한 일종의 항의였다.

 

"윤강은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경연을 이끄니 전하와 가까운 자인데 비록 실수한 바가 있다 하여도 어찌 졸지에 끌어내어 볼기를 때려서 여러 백관에게 보이셨습니까."

 

송시열은 노골적으로 효종이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부터는 깊이 성의聖意를 여기에 두시어 반성하시고 살피시는 공부를 더하셔서, 희노喜怒에 의해서 움직이지 마시고 신민들을 햇볕처럼 사랑하고 하늘처럼 두려워하십시오."

 

송시열 같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나라는 임금의 것이 아니고 천하의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천하'는 만백성이 아니라 '사대부'를 뜻하는 것으로, 나라는 임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관작은 전하의 관작이 아니고 천하의 관작이오니, 폐하가 그렇지 못한 자를 벼슬시키면서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이 기뻐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에게 사대부는 곧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임금이 사대부를 초월한 위치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사대부이고 임금은 다만 사대부 중에서 가장 높은 사대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효종은 이처럼 8년의 재위기간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 송시열의 <정유봉사>에 분명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윤강에게 그랬던 것처럼 송시열을 붙잡아다 볼기를 치지 못했다. <정유봉사>는 송시열 개인의 의견이 아닌 조선 사대부, 특히 서인 산당山黨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효종의 군비확장 정책은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내고, 사대부들은 집단적으로 저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송시열과 송준길의 산당이 있었다.

 

결국 효종은 자신의 치세를 전면 부정한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당한 정치적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효종은 송준길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사대부들의 여론을 주도하던 산림의 영수 송시열과 군비확장에 비판적인 산당을 탐탁치 않게 여겨왔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집단 저항으로 비롯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산당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의 벼슬을 제수除授(왕이 직접 벼슬을 내리는 것)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이는 효종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송시열의 승리였다. 송시열은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주가를 한층 높인 후, 효종 9년 7월 행호군을 받아들임으로써 드디어 조정에 들어왔다. 얼마 후 산당의 또 다른 지도자인 부호군 송준길도 조정에 나왔다. 은거와 출사를 거듭했던 산림이 효종 재위 9년여 만에 드디어 집단적으로 출사한 것이다.

 



<송시열 초상, 송시열의 45세 때 모습을 그린 것을 정조 때 다시 그린 것으로 정조의 칭찬글이 함께 써 있다.>

 

 

북벌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북벌을 둘러싸고 효종이 사대부들과 마찰하면서 정정이 불안해졌다. 사대부들의 집단 반발은 또 다른 인조반정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효종은 하나뿐인 동생 인평대군을 잃은 직후라 마음이 나약해져 있었고, 여기에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부상까지 당해 심신이 고달픈 처지였다.

 

이런 처지에서 효종은 송시열과 송준길의 산당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치적 난국을 타개하려했다. 하지만 산당은 군주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오는 정당이 아니었다. 이들은 살아있는 조선의 군주보다 죽은 남송의 주자를 더 떠받들었다. 효종이 주자의 수신론修身論을 비판했다는 말을 듣고, 송시열이 효종에게 따진 것은 이들이 누구를 더 섬기는가를 보여준 일례이다.

 

"신이 듣기에 지난번 경연에서 '오늘날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는데 여러 신하들은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매번 나에게 수신하라고만 권하고 있으니 이런 치욕을 씻지 못한 채 수신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는데,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전하께서 성학聖學(주자학)이 미진한 데가 있는 것임을 두려워합니다."

 

효종에게 중요한 것은 북벌이었으나, 송시열의 산당에게 중요한 것은 춘추대의와 수신이었지 실제의 북벌이 아니었다. 군사를 일으켜 북진하는 것이 효종의 북벌이라면 산당의 북벌은 말로만 춘추대의를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니 군비확장에 대한 효종과 양송의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효종에게 군비확장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지만, 양송은 훈련도감 군사를 늘리고, 군량을 늘리는 것도 반대하고 나섰다. 물론 이들은 흉년이니 백성을 진휼하자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그 속마음은 군비확장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이들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군비확장이고 북벌이고 모두 안된다는 것을 안 효종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자신이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남으로서 북벌을 더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한 것이다.

 

효종은 권력의 일부를 산당에게 내주기로 결심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북벌을 적극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삼아, 인사와 군사에 대한 전권을 주고 북벌추진의 대임도 함께 넘겼다. 이것은 보기 드문 군주와 신하 사이의 대타협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 이른바 양송은 효종이 자신들에게 정권을 맡긴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산당정권은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해야만 명분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반대하던 군비확장을 적극 추진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비밀서신을 보내 북벌을 종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효종의 비밀 서신에 대한 송시열의 답신이 <상영릉문>이다. 하지만 <상영릉문>의 내용은 대단히 모호했다. 북벌을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본심을 알 수 없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재차 분명한 북벌의지를 천명하고 또한 북벌에 대한 산당의 분명한 당론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

 

효종이 전례를 깨고 송시열과 독대한 것은 바로 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나라에서 원래 독대는 금지되어 있었다. 국왕은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입회한 자리에서 정사를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왕과 신하의 독대는 매우 이례적인 행위였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는 효종 10년 기해년에 있었다고 해서 ‘기해독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독대이다. 그 해 3월 11일의 일이었다.

 

이날 효종은 이조판서 송시열을 제외한 나머지 신하들은 물론 승지와 사관, 내관까지도 내보냈다. 흥정당에 단 둘이 남은 효종과 송시열 사이엔 긴장이 흘렀다. 효종이 독대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분명했다. 북벌을 채근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大事(북벌)를 논의하기 위함이다."

 

송시열도 이 자리가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효종의 북벌론은 계속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 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할 때 곧장 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붙잡혀 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의 북벌전략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청의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인 반면 피지배층은 다수민족인 한족이었다. 만주족은 한족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중화사상을 지닌 피지배층 한족이 만주족에 대해 민족감정이 없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북벌군이 기세를 올리면 청은 급속히 분열될 수 있었으며, 효종의 말대로 조선 포로 수만 명은 물론이고 한족도 궐기할 수 있었다. 조선과 한족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만주족에 대응하려는 효종의 전략은 뛰어난 계책이었다. 효종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감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소."

 

효종은 이어 다른 신하들이 북벌에 무관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질타했다.

 

"내가 만수전을 지을 때 몇 명을 만나 은밀히 시험해보았는데, 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니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소.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서 놀라니, 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오. 저들이 모두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소."

 

그랬다. 당시 조선 사대부는 나라는 뒷전이고 자기만 생각했다. 병자호란 때 판서의 자제를 인질로 데려간다 하자 앞다투어 사직서를 내고 서로 그 자리를 맡지 않으려 했던 지배층이 그대로 이어져 왔으니,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있었던 상황은 차라리 당연했다. 그런데 효종의 이런 질타를 송시열은 정면에서 반박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수신제가한 후 법도와 기강을 세웠으니 이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버리지 못하시니 지기志氣가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으며, 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진실로 심신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들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시면, 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은 지배층인 사대부들의 부패와 안일을 모두 효종의 책임으로 돌렸다. 자나깨나 북벌만 생각하는 효종에게 이는 모욕이었다. 그래도 효종은 참고 송시열의 이런 말도 받아들였다. 북벌을 위해서는 송시열의 지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이 옳소."

 

효종이 이렇게까지 용납한 이유는 물론 송시열을 북벌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효종의 이런 양보에 대한 송시열의 답변은 공허했다. 치자治者의 근본 도리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뜻의 '수기형가'인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허무한 메아리였던 것이다. 훗날 송시열이 반대 당파로부터 '수기형가'란 네 글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송시열의 북벌관은 이미 효종 즉위년의 <기축봉사>에서 다 드러났다. 송시열은 그때 이렇게 피력했다.

 

"이렇게 우리 힘의 강약을 살피고 저 오랑캐 세력의 성하고 쇠함을 엿본다면, 비록 창을 들고 저들의 죄를 따지면서 중원을 깨끗이 쓸어 신종황제(임진왜란 당시의 명 황제)의 망극하신 은혜를 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혹시 오랑캐와 국교를 끊고 이름을 바르게 하여 이치를 밝게 함으로써 우리의 의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즉, 송시열의 북벌관은 만주와 중원을 실제로 점령하는 군사적 정벌이 아니라, 청나라가 약해지면 국교를 단절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자는 시대착오적이고 사대주의의 극치인 명분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앞으로 10년을 기한으로 북벌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나서자 다급해졌다. 효종은 독대에서, 조만간 송시열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직하게 할거라고 말했다. "큰 임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북벌이었다. 만약 송시열이 큰 임무를 거절하면 현재의 이조판서직을 박탈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니 송시열은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면 북벌을 적극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주자학자 송시열에게 '춘추대의'란, 명분을 제공해주는 도구일 뿐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은 아니었다.

 

기해독대 이후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북벌을 추진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송시열은 영의정 정태화를 끌어들이려 했다. 정태화를 찾아간 송시열은 곧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설 것처럼 호언장담하면서 정태화의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조정에서 보낸 정태화는 산림에 있던 송시열보다 노련한 정치가였다. 자신을 끌어들여 북벌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송시열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다.

 

"공의 지략이 성상의 위임을 받아 천하의 대의인 대사(북벌)를 진행하시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 나는 이미 늙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하지만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대감이 비상한 공을 세우고 천하에 대의를 펴는 것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오."

 

"나는 이미 늙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한다는 거절의 말이었다. 송시열이 실망한 낯빛이 되어 돌아가자 정태화의 아들이 물었다.

 

"아버님은 지금 국제 정세가 어떤데 북벌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정태화가 웃으며 답했다.

 

"내가 언제 북벌한다고 말했더냐. 송 대감은 지금 북벌을 임무로 삼아 성상에게 무한한 위임을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도 성공할 묘책이 없으니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의 생각에 내가 북벌이 가망없다고 하면 그 한마디를 구실삼아 나에게 죄를 돌리고 발을 빼려 하는 것인데, 내가 왜 남에게 팔린단 말인가. 그가 나를 권모술수로 대하니 나 또한 권모술수로 답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하지 않더냐."

 

이들의 대화는 북벌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북벌을 효종 혼자만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청을 건국한 만주족이 조선보다 인구가 적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으며, 효종처럼 청의 취약한 구조에 대해 분석하지도 않았다. 그저 북벌은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송시열도 정태화와 같은 생각이었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효종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북벌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조선의 국력으로 북벌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벌이 불가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효종과 맺은 암묵적 연합전선은 깨질 것이고 산당은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이때 송시열을 구해주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손을 떠는 신가귀

 

송시열과 독대한 2달 후 효종은 머리 위에 난 작은 종기가 원인이 되어 어의 신가귀에게 침을 맞다가 세상을 떠났다. <효종실록>은 침이 혈락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신가귀가 손을 떠는 수전증 상태에 있었다는 점에서 의혹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수전증의 어의가 옥체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침이 혈락을 범했다고 해서 사망할 수 있느냐는 점도 의혹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의혹을 끝까지 추적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조정을 잡고 있는 산림과 서인들에게 북벌군주 효종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들은 효종 사망의 모든 원인을 약방 도제조 원두표와 신가귀 등 약방에만 돌렸다. 현종 즉위년 5월 9일 대사헌 이응시와 행 대사간 이상진은 원두표를 중도부처하고 어의 신가귀. 유후성. 조징규를 사형시키라고 청했다. 결국 신가귀는 교수형을 당하고 다른 어의들은 중도부처되었으며 원두표는 불문에 부침으로써 파문은 마무리 지어졌다.

 

그러나 효종은 그냥 그렇게 이승을 떠날 수 없었던지, 그의 시신과 장지를 둘러싸고 계속 문제가 발생한다.

 

효종 사망 당일부터 시신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했다. 효종이 사망하자 왕비는 사람을 피해 어탑의 서북편에 병풍을 치고 들어가 가슴을 두드리며 발을 굴렀고, 여러 신하들은 어탑 주변에 둘러서서 곡하다가, 왕비가 있는 곳과 너무 가까워 물러났다. 훈련대장 이완이 훈련도감의 군병을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왕비가 송시열을 불러 전교했다.

 

"옥체에 부기가 있으니 어찌 하리오."

 

송시열이 대답했다.

 

"이는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보통 초상에 부기가 극도로 되면 도로 빠집니다. 이제 대렴大斂할 날이 아직 멀었으니 그 전에 반드시 바로 될 것입니다."

 

과연 다음날 저녁에 부기는 빠졌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관의 폭이 염한 시신보다 작았던 것이다. 송시열이 내시를 불러 말했다.

 

"이 관에는 옥체가 들어가지 않을 듯 하니 가는 댓조각을 가지고 시신을 재어 오라."

 

내시가 재어 온 바로는 과연 시신이 관턱을 걸치고도 남았다. 임금의 관이 시신보다 작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알리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랐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염한 옷이 너무 두터워서 그런지 모른다고 생각해 손으로 만져보았으나 아주 얇았다. 시신이 썩기 쉬운 한여름에 두터운 옷을 입힐 까닭이 없었다. 확실히 시신의 어깨가 관보다 넓었다. 정태화가 세자에게 말했다.

 

"망극한 가운데 더욱 망극할 일이 생겼습니다."

 

"망극 망극하오. 장차 어찌 하겠소."

 

"넓은 널판을 구해봤으나 구하지 못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널판을 잇는 것 외에 다른 계책이 없는 듯합니다."

 

국왕의 관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궁이라 하여 재궁이라고 표시한다. 이런 재궁을 성리학과 예학의 나라 조선에서 너덜너덜 잇게 된 것이다. 또 그러고도 그 책임 소재는 가리지 않은 채 흐지부지 그저 '망극'이란 한마디 말로 끝내고 말았다. 효종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장지가 문제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못다 한 일이 많은 효종의 한이 거듭 문제를 일으킨 것일까?

 

당시 군신들 중에 풍수지리에 가장 능한 인물은 <어부사시사>를 쓴 윤선도였다. 그런 그가 효종의 장지로 수원부 청사 뒷산등성을 주장했고, 지관들도 그곳이 길지라고 호응했으므로 세자는 이곳을 장지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대신과 삼사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장지를 결정하는 데 풍수설을 쫓을 필요는 없고 다만 그 땅이 길이 되거나 집터가 되거나 수해가 있는 등의 문제를 뜻하는 5환五患만 없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5환은 송나라 사마광의 이론이었다. 이들은 수원의 지세가 평탄하고 넓으며 농토가 비옥하고 사방으로 통한 곳이어서 5환에 해당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송시열도 차자를 올려 수원을 반대했다.

 

"대행왕(효종)께서는 수원을 7천 병력의 주둔지로 만들었고 장수와 수령을 보낼 때 가장 나은 사람을 뽑아 보내어 긴급할 때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고을을 철거하고 농토와 가산을 파괴하여 그 곳 사람들을 슬프게 함은 결코 대행왕의 뜻이 아닙니다."

 

이들은 효종의 군비확장에 안민론으로 맞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백성들의 삶을 명분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공교롭게도 100여년 후 효종의 고손인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세워진다. 정조가 현륭원을 세우기 위해 주민을 이주시킬 당시 가구 수는 약 250여 호였는데, 내탕금으로 이주 비용을 마련해주니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이는 시행 의지의 문제이지 민생의 문제는 아니었다. 더구나 정조가 헌륭원을 이곳으로 옮긴 후 수원이 더 행정,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볼 때, 군사를 내세운 반대론도 근거가 없다. 손을 떠는 어의가 옥안에 침을 놓는 것 하나 막지 못하고, 임금의 관 하나 제대로 마련 못한 신하들이 백성운운하며 반대한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효종 독살설을 전국에 퍼지게 했다. 실제로 효종이 죽기 직전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괴상한 일이 속출했다. 한 거사의 예언도 그 중 하나였다.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할 무렵 한 거사가 돈화문 밖에서 외쳤다.

 

"금년 5월 궁중에 변고가 발생할 것이오. 이를 면하려면 전하께서 지금의 거처를 옮겨야 하오."

 

그러나 성리학 사회인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를 믿을 리가 없었다. 사대부들은 한마디로 요망하다고 일축해버렸다. 그런데 이어 해인사의 8만대장경 판목과, 속리사, 공산사 등 주요 사찰의 불상과 석탑 등이 여러 날 땀을 흘리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효종은 이런 변고로 뒤숭숭한 상황에서 승하했다.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현재 남겨진 자료로 효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다.

 

정말 효종은 침이 혈락을 범해 사망한 것일까? 효종의 시신에 부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을까? 송시열의 말대로 시신에 부기가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일까? 또한 재궁이 시신보다 작은 것이 그저 '망극'이란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일까? 재궁(관)이 왜 시신보다 작았을까?

 

효종 사망 다음 달에 의관 이기선이 갑자기 엄형을 받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즉위년 6월 현종은 어의 이기선 문제를 제기한다.

 

"지난달 초3일 밤 입진 때, 의관 이기선이 많이 부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감히 꽁무니를 뺄 생각으로 진맥할 줄 모른다고 아뢰었는데,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작년 편찮으셨을 때는 어떻게 맥을 논했다는 말인가? 그의 정상이 매우 흉측 교묘하여 엄히 징벌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를 잡아들여 국문 처리하라.

 

지난달 초3일이면 효종이 세상을 뜨기 전날로 그때부터 효종의 몸에 부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현종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효종비 인선왕후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의 이기선이 갑자기 발을 뺀 것이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현종은, 이기선이 국문에서 원래 맥 짚는 법을 모른다고 말하자 화를 냈다.

 

"맥 짚는 방법을 모른다면 어떻게 의원이 되었느냐?"

 

현종은 엄형을 가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한의사가 맥을 짚을 줄 모른다는 말은 의사가 주사를 놓을 줄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게다가 어의들은 왕비나 후궁을 진찰할 때 손목에 맨 긴 실만 잡고도 맥을 짚을 줄 아는 실력이 있어야만 채용될 수 있었다. 현종은 분명 이기선에게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고 엄형을 가해 정상을 알아내도록 한 것이다.

 

원래 현종은 어의에게 관대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신하들이 효종의 죽음과 관련해 세 어의를 사형에 처하자고 주청했을 때 신가귀를 제외한 두 어의를 살려주었고, 또한 신가귀도 교형으로 한 등급 낮추어 목이 시신에 붙어있게 배려해주었다. 그런 현종이 어의 이기선을 추궁한 것은 적지 않은 의혹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기선을 옹호하고 나선 세력이 있었다. 바로 송시열 등의 산당이다. 현종 즉위년 6월 7일 송준길이 신가귀 등 어의의 형을 빨리 윤허하라고 청했는데, 같은 당인 송시열과 정유성은 "이기선은 사실 맥 짚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며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이기선은 송시열의 이 주청으로 사지에서 구원되었다.

 

어쩌면 이기선은 송시열의 말대로 정말 맥을 짚을 줄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현종의 말대로 짚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의원, 그것도 어의가 되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산당세력이 신가귀 등은 굳이 빨리 형을 윤허할 것을 청하면서, 이기선은 왜 옹호하고 나섰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혹들을 남긴 채 효종은 세상을 떠났고 조선은 다시 극심한 주자학의 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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