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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누가 왕을 죽였는가(2)-14대 선조

by 싯딤 2008. 9. 25.

2장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1552-1608, 재위기간 1567-1608(41년간)

 

<선조실록> 40년9월5일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침 맞는 자리를 줄이자는 것은 채유종蔡有終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아니면 다른 어의의 입에서 나온 것인가 자세히 알고자 한다”고 물었다.

 

<선조실록> 41년2월1일

이날 미시未時(오후1-3시)에 임금의 몸상태가 갑자기 위급해지니 승정원과 사관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차비문 안으로 들어왔다.

 





<선조의 글씨: 오죽헌 시립박물관 소장의 칠언절구와 법주사 전시실에 있는 선조어필병풍. 8폭에 오언절구 네 수가 실려 있다>






 


 

중풍과 찹쌀떡

 

조선조 전체를 통털어 선조만큼 다사다난했던 임금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선왕의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방계 승통부터가 비상한 재위 기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선조 때 있었던 동서 분당과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미 이전의 방식으로는 통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간 임금, 명나라로 도망가려다 압록강가에서 겨우 멈춘 치욕의 군주가 바로 선조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무려 40년이상 재위에 있었으면서도 죽은 뒤 독살설에까지 휘말리게 된다.

 

선조는 과연 독살당했을까?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끈질기게 떠돌았고,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그의 독살을 다룬 책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이다. 독살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의 현장으로 가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는 지름길일 것이다 .먼저 선조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광해군과 북인 측의 기록인 <선조실록>을 살펴보자.

 

재위 40년 가을 선조는 병세가 위독해져 기가 막히면서 갑자기 넘어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선조는 기후가 조금 안정되자 "이 어찌된 일인가"하며 불안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의는 추운 아침에 일찍 기동하여 한기가 밖에서 엄습한 탓이라며 인삼순기산을 권했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호흡이 가빠지며 가래가 끓었다. 의약청에서는 풍기, 즉 중풍에 가까운 증세라고 진단했다.

 

그러던 선조의 병이 조금 차도를 보였다. 병세가 차도를 보이자 선조는 또 세자 광해군을 꾸짖기 시작했다.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 선조의 병이 다시 위독해졌다. 세상을 떠나는 해인 재위 41년 1월부터 선조는 병세가 다시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다. 그해 2월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제밤엔 편히 잠을 잤다"고 말했던 선조는 그날 오후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약방에서 강즙, 죽력, 도담탕, 용뇌소합원, 개관산 등을 들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세자가 어의에게 진찰하게 하자 어의가 말했다.

 

"일이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날 인목왕후가 선조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는데 유영경 등 여러 대신들이 "고례에 부인의 손에서 임종하지 않는다"며 왕비에게 밖으로 나와달라고 요청하는 와중에, 안에서 곡성이 들려 비로소 선조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모두 통곡하였다.

 

이처럼 <선조실록>은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지킨 여인이 부인 인목대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서인 측의 기록인 <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한 서인 측의 유일한 근거이기도 한 찹쌀밥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이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남계집>을 인용해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입시했던 선비 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 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고 이 말을 들은 조익과 권득기는 광해군 때 벼슬을 거부했다는 내용이다.

 

과연 선조는 북인 측의 기록처럼 병사한 것일까, 서인측의 기록처럼 독살당한 것일까?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문정왕후는 인종 독살설을 무릅쓰고 아들을 명종으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더 이상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잇게 하지는 못했다. 문정왕후의 유일한 손자이자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재위 18년(1563) 13살의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은 후 탄식했다.

 

"내 울어 무엇하랴. 을사년에 충량한 신하들이 죄 없이 떼죽음을 당해도 내가 임금이 되어 말리지 못했으니, 내 집에서 어찌 대대로 군왕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순회세자 외에 다른 아들을 두지 못했던 명종은, 그 2년 후인 재위 20년에 문정왕후가 사망함으로써 친정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문정왕후의 죽음에 대해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문정왕후가 명종에게 "내가 아니면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랴"라며 횡포를 부려 명종이 심열증을 얻었다면서 "윤비(문정왕후)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쓸 정도였다. 조선의 왕비 중 죽는 날 이런 혹평을 들은 인물은 문정왕후가 유일할 것이다.

 

문정왕후의 몰락과 함께 20년 동안 권세를 누려오던 소윤 윤원형도 몰락해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 문정왕후의 기세에 눌려 있던 세월이 병이 되었는지, 명종도 문정왕후 사망 2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재위 22년 6월 27일 시약청을 설치한 이튿날 새벽에 세상을 등졌으니 급서였다.

 

명종이 사망했을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후사가 없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왕위가 공석인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2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사망한 직후 명종도 덩달아 위독해 저승 문턱을 넘나든 적이 있었다.

 

그때 가망 없다고 여긴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등이 명종에게 후사를 정해달라고 청했으나, 명종의 증세는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대신들은 할 수 없이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에게 후사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하여 답을 받았는데, 이를 '을축년의 하서下書'라 한다.

 

이때 명종의 뒤를 이을 뻔했던 종친이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이다. 덕흥군은 중종이 창빈 안씨에게서 난 9번째 아들이었다 중종의 9번째 서자의 3번째 아들이니 선원보(조선왕실 족보) 대로라면 이균은 왕위를 꿈꿀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인순왕후가 이균을 후사로 정하는 하서를 내렸던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명종도 평소 이균을 볼 때마다 "덕흥은 복이 있다"며 아꼈다.

 

한 번은 명종이 종친 자제들을 궁중으로 불러 머리 크기를 알려고 한다며 익선관을 써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여러 왕손들은 익선관을 머리에 써보며 희희낙락했는데 제일 어린 이균만은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말했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쓰는 것이오이까."

 

이런 행동이 명조와 인순왕후의 뜻에 꼭 맞았다. 이런 경로로 을축년 명종이 위독할 때 이균을 후사로 결정했던 것이다.

 

재위 22년 6월 영의정 이준경 등이 문안했으나 명종은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위독했다. 이렇게 되니 다시 후사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인순왕후의 뜻은 2년 전과 같았다 .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균 이균에게 다시 하교가 내린 것이다.

 

이런 경로를 거쳐 도승지 이양원과 동부승지 박소립 등이 새 임금을 모셔오기 위해 덕흥군의 집으로 떠났다. 그런데 이때 덕흥군의 집에 도착한 이양원이 어느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못했던 데서, 선조의 즉위가 얼마나 유동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양원은 다만 이균의 외숙 정창서에게 뵙자고만 청했다. 함께 갔던 주서 황대서가 "누구를 뵙자는 것이오. 이같은 큰일을 그렇게 모호하게 할 수 있소?"라고 항의했으나 이양원은 듣지 않고 정창서에게 물었다.

 

"어느 군이 치장을 차리고 있습니까?"

 

"을축년에 하교받았던 하성군입니다."

 

이양원이 끝내 자기 입으로 하성군의 작호를 말하지 않은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였다. 즉 하성군 아닌 다른 인물이 임금으로 추대될 가능성도 있었고, 그 경우 하성군을 모시러 갔던 인물은 죽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양원은 끝내 이름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이날 박소립은, 하성군을 호종한 인물들은 공신이 될 거라는 궁인들의 말만 듣고, 호종한 인물들의 명단을 받았다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다시 말해 하성군의 왕위 계승이 그만큼 정통성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성군 또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궐에 들어와서도 상차喪次에서 나오지 않고 사양했다. 대신들이 청하고 인순왕후도 청하자 마지못해 나왔으나 용상에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물론 의례적인 거조이기는 했지만 하성군은 한참을 사양한 후에야 용상에 올라 백관의 하례를 받고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는 곧 인순왕후를 왕대비로 높여 수렴청정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즉위한 하성군이 임진왜란을 겪고 이러저리 피난다니는 수난의 군주 선조였다.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가장 큰 콤플렉스는 방계 승통에 있었다. 왕위에는 올랐으나 선왕 명종이 직접 전교를 내린 것도 아니었으니 다른 종친이 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인순왕후와 영의정 이준경, 그리고 우의정이자 인순왕후의 아버지인 심통원이 다른 종친을 선택했다면 선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즉위 당시 선조는 가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재위 2년 12월에 박응순의 딸을 간택해 국혼을 치렀다. 그녀가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 박씨이다. 그러나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선조는 방계 승통이라는 콤플렉스를 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비 소생의 원자에게 후사를 넘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선조는 6명의 후궁에게서만 왕자 13명과 옹주 10명을 낳았는데, 이 13명의 아들 중에서 누가 선조의 뒤를 잇느냐 하는 문제가 민감한 현안이 되었다. 이 많은 왕자들의 어머니가 각각 달랐으므로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아들 광해군은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셋째 아들 의안군과 넷째 아들 신성군은 인빈 김씨 소생이었다. 이외에도 순빈 김씨 소생의 순화군과 정빈 민씨 소생의 인성군 등 수많은 왕자들이 각축하고 있었다.

 

이럴 경우 누가 대신들의 지지를 받느냐 하는 점은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는데, 세자 책봉 이전에 대신들의 중망을 받은 왕자는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이었다. 맏아들 임해군은 성격이 과격해서 대신들이 꺼려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선조 24년 세자 책봉 문제는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재위 24년이 되도록 세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걱정한 우의정 유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가 논의했다. 이들이 마음에 둔 왕자는 둘째 광해군이었다.

 

"우리가 국가의 중책을 맡았으니 마땅히 큰일을 해야 할 것이오. 지금 후궁 소생의 왕자가 많이 있는데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세자를 세울 계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오. 우리가 힘써 청해봅시다."

 

"영상이 우리말을 듣겠소?"

 

당시 영의정은 북인 이산해였고 유성룡은 남인, 정철은 서인이었다. 영의정과 같은 당인 유성룡이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하자고 하면 영상이 어찌 듣지 않겠소."

 

이렇게 하여 영의정 이산해를 포함하여 세자를 세우는 데 동의한 세 정승은 대궐에서 모여 주청하기로 했으나, 막상 약속 장소에 이산해가 나오지 않아 무산되었다. 다시 약속 날짜를 잡아 아렸으나 이번에도 이산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산해는 당시 선조가 인빈 김씨를 총애하여 그 아들 신성군에게 뜻이 있는 것을 알고, 광해군에게 뜻이 있는 두 정승과 신성군에게 뜻이 있는 선조 사이에 공백을 이용해 두 정승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했다.

 

이산해는 극적인 반전을 노리는 계획을 짰다. 인빈 김씨의 오라비 김공량과 주연을 나누기로 약속한 이산해는 먼저 아들 이경전을 김공량의 집으로 보냈다. 한참 후에도 이산해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이산해의 종이 급히 달려와 이경전에게 고했다.

 

"대감께서 오시려고 하다가 어떤 말을 듣더니 문을 닫고서 눈물만 흘리고 계십니다."

 

이경전이 놀라서 집으로 갔다가 곧 돌아와 김공량에게 설명했다.

 

"부친께서 '좌상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후 신성군 모자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말을 들으신 까닭에 어찌 할 줄 모르고 계십니다."

 

김공량은 즉시 인빈 김씨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고했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무슨 까닭으로 좌상 정철이 너희 모자를 죽이려 한다더냐?"

 

"먼저 제자 세우기를 청한 뒤에 죽이려 한답니다.'

 

선조는 일축했다.

 

"뜬소문이지 정철이 그럴 리 있나."

 

그 다음날 세 정승이 함께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는데 이산해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아서 유성룡과 정철만 선조를 청대하였다.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임을 말하자 선조는 "누가 적당한가"라고 물었다.

 

"광해군이 그 중 가장 중망이 있습니다."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의 작호가 나오자 선조가 화를 벌컥 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경은 무슨 말을 하는가?"

 

유성룡은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고 정철은 땀을 뻘뻘 흘리다가 물러나왔다. 이 사건은 거칠 것 없이 뻗어가던 정철을 거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산해의 계략이 성공한 것이다. 양사에서 즉각 탄핵에 들어갔다.

 

"영돈녕 정철은 조정의 기강을 마음대로 하여 그 위세가 세상을 뒤덮었으니 파직시키소서."

 

구체적인 혐의도 없이 대신을 탄핵하면 대간이 추궁을 받은 법인데도, "위세가 세상을 덮었다"는 모호한 혐의를 선조가 받아들임에 따라 정철은 머나먼 강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처럼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조정이 한바탕 소동을 겪은 그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의추락, 광해군의 부상

 

정확하게 개국 2백년 만인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모든 체제를 송두리째 뒤엎었다.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했던 황윤길의 보고는, "침략의 조짐이 없다"는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묻혀버렸다. 황윤길을 야당인 서인인 반면 김성일은 집권당인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서인만을 골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공격한다는 기본적인 안보법칙마저 당리당략에 묻혀버린 것이다. 적군이 침입할 가능성이 1퍼센트만 있어도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하는 것이 국방의 기본 원칙이란 점에서, 당시 조선은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을 전사시킨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해 오자, 놀란 선조는 신립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삼도순변사로 제수했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보검과 전권을 하사받은 신립은 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자는 장수들의 요청을 무시한 채 허허벌판인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대패하고 충주는 왜적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상대 당을 거꾸러뜨릴 계략을 세우느라 정신없던 조정 신료들은, 막상 거꾸러뜨려야 할 왜군이 쳐들어오자 도망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선조는 군부君父로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자세보다는 일신을 보존하는 일에만 골몰해, 왜적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기로 했다.

 

사실 조정은 선조가 도망가기 전부터 이미 조정이 아니었다. 아직은 어엿한 국왕인 선조가 내시들과 판방板房에 앉아 있는데도, 백성들이 대궐로 난입해 값나가는 물건들을 마음대로 들고 가도 어느 누구하나 감히 제지할 생각을 못했다. 또한 도망가는 선조의 행렬이 돈의문을 지날 때는 평소 '군신의 의리'를 밥 먹듯이 읊조리던 배관들이 모두 도망가 따르는 자가 1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대궐에 난입해 노비들을 관리하던 관청인 장예원에 불을 질렀다. 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대궐은 양반 사대부의 침학에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불타고 만 것이다. 선조의 행차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백성들이 어가를 가로막고 선조를 비난했다.

 

"상감은 그 동안 민생은 뒷전이고 수많은 후궁들 부자 만들기에만 열중하고 후궁의 오라비 김공량 사랑하는 것만 제일의 계책으로 여기다가 오늘 이 일을 당했는데 어찌 김공량을 시켜 왜적을 토벌하지 않으시오."

 

그 중에는 선조에게 돌을 던진 사람도 있었으니 백성들에게 선조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사대부가 농민을 지배하던 조선의 국가 체제는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광해군은 이처럼 국가 체제가 붕괴된 폐허 상태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다"며 정철을 치죄하던 선조는 세자를 세워야 인심이 안정될 것이라는 조정의 중의에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으로서는 나라가 오늘 망할지 내일 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니, 앞으로 임금이 될지 왜적의 손에 죽을지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어렵사리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리는 고난이었다.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의 임무를 맡은 광해군은, 맹산, 곡산, 이천 등지를 순회하며 왜군을 교란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했다. 선조도 광해군의 이런 활약에 고무되어 개평역에 있던 광해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살아서는 망국의 임금이요, 죽어서는 이역의 귀신이 될 것이다. 부자가 서로 헤어졌으나 다시 볼 날이 없을 듯하다. 오직 바라는 바는 세자가 옛 판도를 다시 회복하여 위로는 조종의 영을 위로하고, 아래로 부모의 돌아옴을 맞이하라.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노라."

 

광해군은 이 편지를 읽고 목놓아 통곡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돌을 맞는 수모를 당한 선조는, 해전에서 이순신의 활약과 육전에서 의병과 명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한 고비 넘기자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주상의 뜻

 

선조는 왜란이 막바지에 다다른 1596년 명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광해군을 국왕으로 책봉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에서 전위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광해군과 대신들이 무려 아홉 번이나 청한 후에야 뜻을 거두었을 정도로 선조는 의심많은 부왕이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인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그 2년 뒤 51 살 되던 해 김제남의 19살짜리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다. 그런데 국혼 4년 후에 인목왕후가 왕자를 낳으면서 조정엔 세자를 둘러싼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다. 이때 태어난 영창대군은 선조가 바라마지않던 정비 소생이었던 것이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영의정 유영경은 백관이 하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의정 허욱과 우의정 한응인이 "대군 한 명을 낳았다고 반드시 하례할 것까지야 있겠소?"라고 반대해 하례는 중지되었으나 유영경의 이 행위는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갓 태어난 대군에게 백관이 하례하는 것은 광해군의 지위를 흔드는 행위였다. 유영경은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과 임영대군이 태어났을 때 백관들이 하례한 전례를 근거로 들었지만, 세종 때는 세자나 광평대군이 모두 정비 심씨의 소생이었으므로 후궁 소생의 광해군이 세자로 있는 지금과는 경우가 달랐다.

 

"유영경이 주상의 뜻에 따라 대군의 지위를 튼튼히 하려고 한 것이다."

 

시중에 이런 소문이 떠돌았다. 갓 태어난 대군과 이미 성인인 세자 사이에 갈등이 싹틀때 관건은 '주상의 뜻'에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백척간두에 놓였을 때 "오직 바라는 바는 세자가 옛 판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면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던 선조의 마음은, '도루목'이란 신조어가 생겨나게 한 것처럼 평화를 만나니 다시 바뀌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가 광해군을 흔든 표면적인 명분은 명나라가 세자 책봉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환도한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명나라는 번번이 거부했다. 그 이유는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차례를 뛰어넘은 예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진짜 이유는 명나라 내부의 권력 투쟁에 있었다. 명의 신종神宗(재위 1572-1620)이 둘째 아들 복왕 상에게 뜻을 두고 맏아들인 광종을 세우려 하지 않자, 명의 예부에서 신종의 맏아들 광종을 위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선조의 속마음은 맏아들 임해군이 아니라 갓 태어난 영창대군에 있다는 점에서 명나라의 책봉 거부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예관이 다시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청하자고 주청하자, 선조는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고 세자 책봉만 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며 화를 냈다. 이를 본 신료들은 선조의 마음이 광해군에게 떠난 것을 알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광해군 측에서 마음이 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만약 광해군이 폐세자 되고 정비의 아들이 세자가 되면 광해군은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었다.

 

인목왕후 측에서 기록한 <계축일기>는 이때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이 인목왕후를 낙태시키기 위해 대궐 안에 돌팔매질도 하고 나인 측간에 구멍을 뚫고 나무로 쑤시는 등 수많은 방해공작을 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방해 공작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처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만일 영창대군이 장성할 때까지 선조가 생존했다면 비극의 주인공은 광해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젯밤엔 편히 잤다”

 

재위 40년 가을 들어 선조의 병세가 갑자기 심해졌다. 약방의 온갖 처방에도 효험이 없자 가망이 없음을 알아차린 선조는 전위 전교를 내리기 위해 세 정승을 불렀다. 그때 영창대군의 나이 겨우 2살이었다. 34살의 장성한 세자를 폐하고 강보에 싸인 2살의 아이에게 왕위를 넘길 수는 없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영창대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영의정 유영경의 소북세력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유영경은 선조가 세 정승 모두가 아니라 자신만 불렀다며 선조와 독대했다. 이 자리에서 선조는 비망기를 내린다.

 

"지금 병에 걸린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차도는 없고 더욱 침중하다. 세자가 장성했으니 고사에 의해 전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도 가하다. 군국의 중대사는 이처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장성한 세자', 즉 광해군에게 전위나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비망기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선조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유영경은 이 전교를 받기를 거부했다.

 

"오늘의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왔으니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영경은 같은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과 공모해 대궐을 에워싸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날 뜻밖에도 중전 인목왕후가 한글로 내지를 내려 전위를 지지하고 나선다.

 

"상께서 병중에 계신 지 거의 1년이 되어가니 심기 불편함이 배나 더하다. 지금 이 전교를 따르지 않는다면 심기가 더욱 손상되어 환후가 더욱 위중하실까 염려된다. 대신은 상의 명을 순순히 따르라 이것을 바랄 뿐이다."

 

유영경, 허욱, 한응인 등 세 정승은 전교 받기를 거부하고 나섰다. 광해군과 대신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으나 세자가 명을 받겠다고 스스로 나설 수는 없었다. 이때 대북에서 소북 유영경을 공력하고 나선 인물은 전 공조참판 정인홍이었다.

 

"신이 삼가 길에서 듣건대 지난 10월 상께서 전섭傳攝(세자에게 섭정케 함)한다는 전교를 내리자 영의정 유영경이 원임 대신(전직 대신) 다 내쫓아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유독 시임 대신(현직 대신)과 공모하였으며, 중전께서 언서의 전지를 내리자 '금일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온 거사이니 명령을 받지 못하겠다'고 즉시 회계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유영경은 무슨 음모와 흉계가 있어서 이토록 중대한 일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세자를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 영경의 죄를 빨리 정당한 형벌로 다스리소서."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정인홍을 꾸짖었다.

 

"정인홍이 세자로 하여금 속히 전위를 받게 하려고 하였으니 그 스스로 모의한 것이 세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겠지만 실은 불충함이 극심하다. 제후의 세자는 반드시 천자의 명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세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자는 책명을 받지 못했으니 이는 천자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고 천하도 알지 못한다. 지금 인홍의 상소 때문에 위로는 내 마음이 불안하여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는 밥을 먹지 못한다."

 

병세가 조금 회복되자 선조의 마음이 또다시 변한 것이다. 정인홍은 이 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이 선조의 성격이자 통치술이었다. 선조는 동.서인은 물론이고 아들 광해군도 믿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발생한 정여립 옥사사건(기축옥사)을 살펴보면 선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기축옥사는 흔히 반란 사건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 증거도 불분명한 사건이었다. 허목은 이 사건으로 무려 1000여 명의 호남사대부들이 화를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6세기 중반의 조선 인구가 채 500만이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어머어마한 규모였다.

 

이렇게 많은 사대부들을 명확한 증거도 없이 죽인 선조는 훗날 이런 말로써 자기 부정을 한다.

 

"내가 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에게 속아 어진 신하들을 죽였구나."

 

그러나 선조는 이른바 ‘흉혼독철(성흔과 정철)’에게 속아 무고한 신하들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선조는 이이의 제자로서 서인이었다가 동인으로 당적을 옮긴 정여립의 전력을 이용해 당시의 집권당인 동인을 약화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옥사를 확대한 것이었다. 정여립 사건 때 화를 입은 사람들은 선조를 "시기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모질어서 같이 일을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거나 "괴팍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선조는 이렇듯 남이 예측할 수 없는 괴팍성을 왕권 강화에 사용한 인물이었다.

 

정인홍의 상소 이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명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왜 세자라고 칭하는가? 너는 권봉權封(임시로 봉한 것)한 것일 뿐이니 앞으로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꾸중을 들은 광해군은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하고 정신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을 쫓아내기에는 선조의 병세가 너무 깊었다. 결국 재위 41년 1월 선조의 병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해 2월 1일에는 "어젯밤엔 편히 잠을 잤다"고 말해 병세가 호전되는 줄 알았으나 오후부터 갑자기 악화되어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날 선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인목왕후라는 점이다. 그녀는 영의정 유영경 등이 "전례에 따르면 부인은 임종을 볼 수 없다"고 말하는 데도 선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왕비와 대신이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므로 대신들이 밖에서 기다리는데, 잠시 후 곡성이 밖에까지 들렸다. 파란만장했던 선조 시대는 이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35살의 세자 광해군이 즉위했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선조의 교서까지 거부한 세력에게 광해군의 즉위는 두려운 일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왕위를 두고 세자와 다투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었다. 선조와 인목왕후의 전위 교서를 거부한 유영경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다른 인물을 임금으로 택한 신하와, 그로부터 배척받았던 임금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세자의 장인 유희분은 전한 최유원을 시켜 선조 사망 당일 세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하였다. 하지만 유영경이 세자의 당일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유영경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계속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유영경으로서는 목숨을 건 반대였지만 이미 대세는 세자 광해군에게 기울었다. 광해군은 이튿날 백관이 모여 천세를 부르는 가운데 즉위식을 거행하고 드디어 왕이 되었다.

 

유영경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다음 달 유영경을 중도부처시켰다가 같은 해 9월 유배지에서 사사했다. 영수 유영경의 몰락과 함께 소북도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광해군이 이처럼 소북을 처단하고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이로써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의 존재가 남아 있었다.

 

만약 임해군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처럼 현명하다면 골육상쟁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동생을 임금으로 둔 형은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의도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임해군은 명나라가 광해군의 책봉을 거부하는 상황에 희망을 걸었을지 모르지만, 명이 책봉을 거부한 것은 자국의 광종을 위해서지 임해군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임해군은 동생 광해군이 자신을 절도로 유배 보내라는 대신들의 청을 거부하며 군사를 동원해 자택 연금을 시켰을 때 근신하고 있어야했다. 그러나 임해군은 부인 차림으로 변장해 다른 사람에게 업혀 도망가다가 발각됨으로써 스스로 궁지에 빠졌다. 신료들의 거듭된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보냈다. 다음해 수장 이정표가 독을 들고 찾아갔으나 임해군이 독약 마시기를 거부해 이정표가 목을 졸라 죽였다.

 

임해군의 비참한 죽음은 권력은 형제 사이에도 나눌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위야 어찌 됐건 이 사건은 광해군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광해군과 대북세력에게 임해군 이상의 위협적인 존재는 영창대군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영창대군은 어엿한 선왕의 적자였으며 그의 생모 인목왕후는 엄연한 대비였다.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김제남과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지지함으로써 광해군과 대북세력이 영창대군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그러나 김제남은 영창대군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대북정권이 그를 의심하게 되면서 사태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광해군 5년에 발생한 박응서의 옥사는 김제남은 물론 영창대군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 사건은 전 서인 정승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가 주범이라 해서 '박응서의 옥사'라 불린다. 박응서는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등 7명의 서자들과 사생계를 조직하고, 소양강 위에 같이 살면서 스스로를 ‘강변칠우江邊七友’, 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재를 지나던 은상을 살해했다가 포도청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이 발각되었다. 서인측 기록인 <광해군일기>에는 대북 영수 이이첨이 이 사건을 김제남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 반역 사건으로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영창대군 추대 사건으로 인정되어, 배후 인물인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김제남이 사사된 다음해인 광해군 6년 강화부사 정항은 음식물 공급을 중단하는 등 영창대군을 핍박하다가, 방에 가두고 심하게 불을 때 비참하게 죽였다고 한다. 더구나 김제남의 세 아들이 모두 화를 입는 등 인목대비 집안은 사실상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건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인 것으로 끝날 수 없었다. 김제남의 딸이자 영창대군의 생모

인 인목대비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만일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영창대군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 목숨은 부지시켜 주는 온건한 방법을 택했다면 서인들의 쿠데타 명분은 궁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미 그 친아버지와 친아들을 죽인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더 이상 인목왕후를 대비로 모실 수 없었다. 두 지친을 죽여버림으로써 형식적인 아들과 형식적인 어머니로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마저 없애버린 이 사건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큰 실책이었다.

 

이들은 3년 후에 드디어 폐모론을 주창하였다. 광해군 9년부터 주창되기 시작한 폐모론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인 대북정권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성리학 사회 조선에서 '모자관계'는 권력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하수였다. 제 아무리 현세의 권력이 강고해도 아들이 어머니를 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폐모론은 내외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 심지어 평생 당색이 없었던 이항복마저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 가면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라고 가질 정도로, 어머니를 폐한다는 비윤리적 행위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을 고립시켰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던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드디어 광해군 10년 인목대비를 폐하고 존호를 깎아 서궁으로 칭하고 유폐시켰다. 비록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생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어머니를 폐한 사태는 반대파에게 이런 모든 업적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아들이 어머니를 폐한 사태는 처음이었고, 일반 사가에서 이런 일을 했다면 당연히 사형이었다.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정권에서 완전히 멀어진 서인들은 폐모론을 명분삼아 세력을 모았다. 그리고 드디어 광해군 15년 3월, 서인들이 광해군의 조카뻘인 능양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문제의 찹쌀밥

 

선조는 죽기 직전 인목왕후를 통해 유서를 세자 광해군에게 전했다.

 

"형제를 내가 있을 때처럼 사랑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를 너에게 부탁하니 너는 모름지기 내 뜻을 받아라."

 

선조는 어린 영창대군의 보호를 맡길 인물은 세자 광해군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으로 하여금 영창대군의 존재를 두려워하게 만든 인물은 다름아닌 선조 자신이었다. 선조는 끝없이 병을 달고 다녔으면서도 약간의 기력만 있으면 세자를 흔들었다. 또한 신하로서 임금의 전위 교서 받기를 거부한 유영경 대신, 그를 탄핵한 정인홍을 귀양보낸 인물도 선조 자신이었다. 따라서 선조가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급서하다보니 독살의 의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유력한 물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 소문이 헛말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는 <남계집>의 기록이 있으나, 이 역시 광해군이 폐출된 뒤의 기록이다. 광해군측에서 편찬한 <선조실록>에 선조 독살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조반정 후 서인들이 편찬한<광해군일기>에도 선조 독살설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시사적이다. 다만<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해 서인측이 유일한 근거로 삼은 찹쌀밥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未時(오후1-3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이 갑자기 기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 라는 내용이다. 바로 이 찹쌀밥을 세자가 들였다는 것이 서인들의 주장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광해군을 쫓아낸 당사자 인조의 찹쌀밥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선조께서 위독하실 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선왕께서 병 후에 맛있는 음식이 생각날 즈음 동궁의 약밥이 마침 왔기에 과하게 잡수시고 기가 막혀 이내 돌아갔을 뿐 중간에 어떤 농간이 있었다는 말은 실로 밝히기 어렵다."

 

선조의 기를 막히게 한 약밥, 즉 찹쌀밥을 들인 인물이 광해군인 것은 맞지만 찹쌀밥에 독이 들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을 입증하는 인물로 개시라는 궁녀가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말로 '개똥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개시가, 세자를 교체하려는 선조의 뜻을 알고 광해군과 몰래 접촉해 뒷날을 도모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개시가 선조를 독살했는데 실상 광해군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고 있다.

 

선조 때부터의 궁녀였던 개시는 광해군이 즉위한 후 이이첨과 한편이 되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 것은 물론이고,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광해군을 모시려면 개시의 허락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광해군과 동침하고자 하는 궁녀는 그녀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에게도 마음에 안 들면, "나의 큰 덕을 감히 잊는단 말이오. 내 입에서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임금이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성을 내니 광해군이 당황하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서인 측에서 과장한 소문일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개시가 정몽필이란 자를 사랑해서 음란한 짓을 하면서 광해군의 후궁인 소의 윤씨를 중매해 음행하게 했다는 데 이르면 그 신빙성은 더욱 떨어진다.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후에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미약하다. 반정 일등공신 원두표는 집권 후 광해군이 선조를 시역弑逆했다고 상소하려다 그만둔 적이 있었다. 이때 왜 상소를 그만두었냐는 박세채의 질문에 대한 원두표의 대답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처음 장유가 지은 왕대비(인목대비)의 교서 외에 언문으로 된 교서에는 광해의 작은 죄상도 다 주워 모았는데 다만 약밥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없었소, 이를 가지고 봐도 경솔히 들추기는 어려워서 그만둔 것이오."

 

즉 서인들이 아무리 물증을 찾으려 해도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에 상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미약한 근거라도 있었다면 이는 인조반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인물은 인목대비였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과 반정군이 경운궁의 인목대비를 찾아가자 대비는 맨 처음 이렇게 물었다.

 

"역괴逆魁(광해군) 부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궐하에 있습니다."

 

"그는 한 하늘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하고 싶다. 10여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 같은 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

 

이는 폐모가 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정아버지와 형제들은 물론이고 선왕의 유일한 적자인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한 여인의 한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만 39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반정의 주역들은 대비의 복수에 동의하지 않았다.

 

"무도한 임금으로는 걸의 주왕만한 이가 없었으나 탕의 무왕은 이를 추방했을 뿐입니다. 지금 내리신 하교는 신들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목대비도 물러서지 않았다.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 수 없다. 역괴가 스스로 모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내게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만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이때 만류하고 나선 인물이 이덕형이다.

 

"옛날에 중종께서 반정하시고 폐왕을 우대하여 천수를 마치게 하였는데 이것은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은 철천지 원수였다. 반정 주역들이 광해군의 주륙에 동의하지 않자 인목대비는 드디어 광해군이 선조를 시해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경의 말이 옳다. 역괴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으며, 그 적모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다 하였다. 어찌 연산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인목대비는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동부승지 민성징이 그 내용을 되물었다.

 

"지금 하신 하교는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시해하였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 몽둥이로 하든 칼로 하든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왕께서 병들어 크게 위독하였는데 고의로 충격을 주어 끝내 돌아가시게 하였으니 이것이 시해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에서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큰 혼선을 겪는다. 지금껏 서인들이 퍼뜨린 선조 독살설의 줄기는 찹쌀밥에 의한 독살이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엉뚱하게도 "고의로 충격을 주었다"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선조의 독살 여부에 대해 가장 잘 알 만한 위치에 있었던 인목대비가 '찹쌀밥' 대신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은 선조 독살설이 두서없이 전개되었다는 반증이다. 선조의 임종 현장에는 약방 도제조 등 어의들이 입시해 있었으므로 '고의적인 충격' 등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복수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하겠다. 그러나 광해군이 선조를 시해했다는 인목대비의 이 말은 서인들로서는 호재였다. 서인들은 대비의 이 말을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명분의 하나로 삼아 전파시켰고, 때론 위의 <남계집>에서처럼 문집에도 남겼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숙종 때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서인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선조 독살설은 하나의 사실처럼 굳어졌다.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정권은 자신들이 왜 광해군을 폐출했는지를 안팎에 설명해야 했다. 당시 명나라는 중립외교를 취했던 광해군이 폐출된 것을 환영했으므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달랐다. 시대착오적인 중화사상을 가지고 반정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서인들은 선조 독살설을 집권의 정당성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제기하지는 못하고, 비공식적이나마 조직적으로 선조 독살설을 유포했던 것이다. 만약 선조 독살설이 사실이라면 서인들이 반정 후에도 이를 공식화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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