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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역사

누가 왕을 죽였는가(1)- 제 12대 인종

by 싯딤 2008. 9. 25.

<들어가면서...>

 

역사학자 이덕일의 <누가 왕을 죽였는가>를 싣습니다. 500여 년 역사의 조선 왕조는 이 기간 동안27명의 왕을 배출했습니다. 그 중에는 갑작스런 죽음 탓에 독살설에 휘말린 왕들이 있습니다. 인종·선조·효종·현종·경종·정조·고종이 그들입니다.여기에 살아서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을 거라고 평가받는 소현세자까지 포함하면 무려 8명입니다. 누가, 왜 그들을 죽였을까ㅛ. <조선 왕 독살사건>은 이들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실체를기존의 정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야사 속에 나타난 사실들까지 총 정리하여 면밀하게 추적해 갑니다.

 

때로는 긴장하며, 때로는 분노하며 읽는 우리 역사의치부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왕들의 죽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반대 세력과 정치적 긴장이 극대화됐을 때 급서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정조의 경우 그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임종을 지킨 것 자체가 의심스럽습니다. ‘여자는 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다’는 조선의 법도를 무시하면서까지 그녀가 임종을 지킨 데는 커다란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조선의 왕들이유난히 독살설에 휘말린 왕이 많았던 이유를 저자는허약한 왕권에서 찾습니다. 당론을 최우선시했던 신하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택군’의 방식으로 ‘독살’을 택한 것이라는주장입니다. 우리가 이 글을읽다 보면몇몇 왕의 독살설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계속 살아 왕권을유지했었다면 조선의 역사, 아니 대한민국의 역사가 충분히 바뀌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역사는 어둡고 밝음을 떠나,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정확히 밝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장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

 

제12대 인종 1515-1545, 재위기간 1544-1545(2년간)

 

<인종실록> 1년6월17일(사망 13일 전)

삼공三公이 주다례晝茶禮를 지낸 후 대비전에 문안하려는 일을 중지하기를 청하나 듣지 않는다.

 

<인종실록> 1년6월18일(사망 12일 전)

상(인종)이 주다례를 지내고 대비에게 문안하였다. 자전慈殿(대비)이 어가를 따른 시종, 제장에게 술을 먹이고 또 호초를 넣은 흰 주머니를 내렸다.

<효릉: 조선 제 12대 왕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고양시 원당동 소재>

 

야사野史는 어김없이 대비 문정왕후(1501-1565) 윤씨의 인종독살설을 전하고 있다. 야사가 전하는 내용은 이렇다. "언제 우리 모자母子를 죽일 거요?"하며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띄면서 맞아주더니 다과를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맛있게 다과를 먹었는데, 그 후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인종이 죽은 후에는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재위:1545-1546)이 즉위하였고, 이어 곧바로 궁중 내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축출되고 죽어갔다. 그 죽어간 세력 중에는 인종의 친척뿐만 아니라 사회의 희생자인 사림파도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 사대부들이 인종 독살설을 널리 믿게 되는 구실이 되었다. 인종 독살설은 이렇듯 인종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고 죽어간 세력들이 제기한 의혹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문정왕후가 조선의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무시하며 불교를 숭상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명종 때 편찬된 <인종실록>은 인종 독살설을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인종실록>은 인종의 사인死因을 중종의 장례 때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종실록>의 기록을 세밀히 검토해보면 이 기록도 인종 독살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인종이 독살되었는 지 그 죽음의 상황에 다가가 보자.

 

페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인종의 아버지 중종(재위:1506-1544)은 맏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원래 왕이 될 수 없었다. 중종은 성종(재위: 1469-1494)의 둘째 아들이었고 맏아들은 폐주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유일한 임금이었다. 탁월한 시인이었던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거부했다. 그는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기생들의 유원지로 삼음으로써, 조선에서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던 공자마저 무시했다. 성균관에 모셨던 공자 이하 모든 선현들의 위패는 고산암으로 내쳐졌다가 후에 음악을 맡아보는 관청인 장악원에 방치되었다. 이렇듯 사대부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공자의 위패를 방치하고 제사까지 폐지한 것은 조선의 정치이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국립 관료양성소인 태학을 없애고 무당을 불러모아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만약 연산군이 자신의 쾌락과 유흥을 위해서가 아닌 성리학에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이런 행위를 했다면 그는 오늘날 새로운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존의 이념과 가치 체계를 우습게만 여겼을 뿐,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이념이나 가치 체계를 수립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연산군이 성균관과 태학을 폐하자 사대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선은 임금 개인의 나라가 아니라 전체 사대부들의 나라라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결국 사대부들은 1506년 쿠데타를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신하들이 임금을 끌어내린 이 사건은, 중종의 이름을 따 '중종반정'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중종은 반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정 당일 반정군이 중종의 사저를 에워싸자 진성대군(중종)은 처음엔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해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부인 신씨의 만류로 멈추고 하인을 시켜 집 주변을 살펴보니 말 머리가 집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어, 자신을 죽이려는 군사가 아님을 알고 자살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을 에워싼 군사가 자신을 죽이려는 연산군의 군사인지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반정군인지도 몰랐던 진성대군이 반정 초에 힘을 가질 수 없음은 당연했다.

 

즉위 초 중종이 어떤 처지였는지는 부인 신씨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종의 장인은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이었는데, 그는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다. 즉 연산군의 부인 신씨가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결정한 반정세력에게 신수근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반정세력의 핵심 인물인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소중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곧 연산군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진성대군을 선택하겠는가 하는 물음이었고, 동시에 누이를 포기하고 딸을 선택하라는 권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연산군을 선택했다.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신수근은 반정군의 제의를 거부해, 결국 반정 당일 반정세력에게 처형되고 만다. 이렇게 되니 중종의 부인 신씨가 문제가 되었다. 반정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이 추살한 인물의 딸을 왕비로 받들 수는 없었다. 중종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공신들이 신씨 폐출을 주청하자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고 주저했으나 이들은 강경했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종사의 대사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빨리 결단하십시오." 권력과 아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중종은 권력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신씨는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정 7일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숙의로 있던 윤여필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니, 그녀가 바로 장경왕후 윤씨였다. 윤씨는 중종 10년인 1515년 아들을 낳았지만 산후조리를 잘못해 7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낳은 아들이 인종이다.

 

장경왕후 윤씨가 죽은 지 2년이 지나 새로운 왕비 책봉 문제가 대두되면서 조정은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가 새 왕비를 책봉하지 말고 반정 직후 사저로 쫓겨난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먼저 사림파인 순창 군수 김정과 담양 부사 박상이 중종의 구언舊言을 인용해 문제의 상소를 올렸다. "원자가 강보 속에 있는데 친아들 복성군이 있는 숙의 박씨같은 후궁을 왕비로 책봉하면 원자의 처지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언사는 명분과 의리에 목숨을 거는 사림파답게 거침이 없었다.

 

"신씨를 폐한 것은 무슨 명분이 있습니까? 반정 때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신수근을 죽이고 나서 훗날 환난이 미칠 것을 두려워해 보전책으로 폐비시킨 것이니, 이 일은 본래 무고하고 또 명분도 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정공신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비를 폐위시켰다는 주장이었다.

 

이때는 반정공신들이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이런 상소를 올릴 수 있었지만, 이는 반정의 정당성 자체를 부인하는 발언이었다. 상소 내용에 놀란 중종은 파문을 우려해 상소문을 승정원에 두고 공론화시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반정이념 자체를 부인하는 엄청난 내용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사실 신씨가 복위되어도 문제였다. 대사간 이행이 대사헌 권민수에게 물은 내용은 이런 문제를 말해준다.

 

"만약 신씨를 세웠다가 왕자가 태어나 가례의 순서를 따지게 되면 전하께서 잠저에 계실 때 혼인한 신씨가 먼저가 되니 이 경우 원자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씨는 중종과 연산군 5년인 1499년에 가례를 올렸고,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2년인 1507년에 가례를 올렸으니 신씨가 8년 먼저였다. 만약 신씨가 복위된 후 아들을 낳으면 신씨의 아들이 원자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신씨 복위를 주장한 김정과 박상의 상소는 사론邪論으로 몰렸고, 중종도 비망기를 내려 이들을 질책했다. 반정세력은 이들의 상소를 옥사로 확대시키려 했으나 사림파인 정언 조광조가 무마하는 바람에 귀양으로 일단락되었다.

 

사림파의 신씨 복위 주장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고, 중종 재위12년인 1517년 윤지임의 딸이 계비로 간택되었다. 당시 중종의 나이 30살이었으나 윤씨는 이팔청춘을 갓 넘긴 17살이었다. 이처럼 앳된 나이에 조선의 국모가 된 문정왕후 윤씨가 훗날 조선 사대부들의 표적이 되고 독살의 혐의자가 될 줄을 가례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윤씨는 심지어 사대부들로부터 '여왕'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조선의 정치발전을 후퇴시킨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아들 출산

 

문정왕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중종이 장경왕후 윤씨의 뒤를 이를 계비를 간택하려고 간택령을 내렸을 때, 윤지임의 딸 윤씨는 와병중이었다. 그녀의 병세는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 때 용하다는 시골 점쟁이 한 명이 서울에 와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점을 쳐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귀한 손님이 맨 먼저 오겠구나!>

 

첫새벽에 찾아온 인물은 윤지임이었다. 하인이 점쟁이에게 물었다.

 

"겨우 종 한 명만을 데리고 왔을 뿐인데 무슨 귀한 손님입니까?"

 

"아니다. 이분은 귀인이다."

 

윤지임은 점쟁이에게 사주를 내보였다. 위독한 딸 윤씨의 사주였다.

 

"병이 매우 위독하기에 살 수 있는지 보러왔소."

 

"이 사주는 국모의 사주입니다. 나리는 임금의 장인이 될 것이오."

 

과연 얼마 후 윤씨는 회복되었고 그 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열일곱 한창 나이의 윤씨가 왕비로 간택되자 궁중 한 구석에서는 우려가 일었다. 그녀가 왕자를 낳을 것에 대한 우려였다. 윤씨가 왕자를 낳을 경우 궁중의 역학관계는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문정왕후 소생의 왕자가 장경왕후 소생의 원자 호(인종)를 대신해 중종의 뒤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문정왕후는 왕비로 책봉된 10년이 지나도록 왕자를 낳지 못했다. 그러던 윤씨가 비로소 꿈에도 바라던 아들을 낳은 것은 중종 29년, 왕비로 책봉된 지 무려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 문정왕후 윤씨도 35살의 중년이었다. 윤씨 소생의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경원대군에 봉해졌다.

 

경원대군이 태어났을 때 세자의 나이는 이미 20살이었다. 강보에 싸인 애기와 왕권을 다툴 만큼의 나이가 아니었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면 왕위를 이을 성년의 세자였다. 누가 보더라도 성인인 세자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보에 싸인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윤씨는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세력을 길렀다. 그리하여 경원대군이 10살이 될 무렵 문정왕후는 자신을 지지하는 당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당을 ‘소윤小尹’이라 하는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당수黨首였다. 이들을 소윤이라 칭한 것은 윤尹자를 쓰는 또 다른 당, 즉 ‘대윤大尹’이라 불리던 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윤의 당수는 세자 호를 낳다가 사망한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이었다. 장경왕후 윤씨가 문정왕후 윤씨보다 먼저 왕비가 되었으므로 장경왕후 계열의 당을 대윤, 문정왕후 계열의 당을 소윤이라 부른 것이다. 윤임은 장경왕후 소생의 왕자이자 자신의 외조카인 세자를 지지했다.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는 소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대윤과 소윤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세자를 지지하는 대윤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의 다툼은 차기 왕권을 둘러싼 당쟁이었다. 왕권을 둘러싼 두 외척간의 당쟁은 중종이 참석한 경연에서까지 공공연히 논쟁을 벌일 정도로 치열했다. 중종 38년 대사간 구수담이 조강朝講(아침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이라 하는데 각각 당을 세웠다'고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 어찌 붕우와 족류가 없겠습니까만 하필 왕실의 친척이라는 것을 지목하여 당이라는 의논이 비등하니 매우 음험한 사론입니다.“

 

“백돌아!백돌아!”

 

대윤과 소윤 간의 당쟁은 소윤에게서 시작되었다. 소윤이 이미 책봉된 세자를 끌어내고 경원대군을 세우려 했던 것이 당쟁 발생의 시초였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자를 갈아 치우려 했기 때문에 세자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세자를 불에 태워 죽이려 했다는 야사는 당시 세자가 당한 핍박의 정도를 말해 준다.

 

어느 날 밤 세자가 잠을 자는데 갑자기 동궁에 불이 났다. 세자빈이 불길에 놀라 탈출하려 했으나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다. 세자가 세자빈에게 말했다.

 

"내 전날, 죽음을 피한 것은 부모님에게 악한 소문이 돌아갈까 염려해서였는데, 이제 밤중에 깊은 잠을 자다가 불에 타 죽으면 그런 소문은 퍼지지 않을 것이니 나는 피하지 않겠소, 빈궁이나 피해 나가시오."

 

지아비가 불에 타 죽겠다는데 세자빈이 홀로 살겠다고 나갈 수는 없었다. 놀란 시종들이 피할 것을 권해도 세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자가 불길을 빠져 나가려 하지 않자 시종들은 중종에게 달려가 고했다. 중종이 급히 달려와 보니 둥궁이 불바다였다.

 

"백돌아! 백돌아!"

 

다급해진 중종은 세자의 아호를 불렀다. 세자는 그제서야 아버지가 부르는데도 나가지 않고 타 죽는 것 또한 불효라는 생각에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작서灼書의 변'이라고 한다. 문정왕후가 쥐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에 들여보냈다는 뜻이다.

 

서의 변은 이보다 훨씬 전인 중종 22년에도 있었다. 세자의 12번째 생일날 사지와 꼬리가 잘리고 입과 귀, 눈을 불로 지진 쥐 한 마리가 동궁의 북쪽 정원 은행나무에 걸린 것이다. 이때는 문정왕후가 아직 아들은 낳기 전으로,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아들 복성군과 함께 서인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사건 발생 5년 후에 범인이 권신 김안로의 아들 김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듭되는 작서의 변은 어머니가 없는 세자의 지위가 얼마나 위태로웠었는 지를 잘 말해준다.

 

불붙은 쥐를 동궁에 들여보낸 장본인이 문정왕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은, 세자 핍박의 한가운데에 문정왕후가 있다는 증거였다. 중종은 세자를 사랑했으나 문정왕후도 총애했기 때문에 문정왕후를 추궁하기보다는 감싸 안으려 했다. 동궁에 불이 났을 때 중종은 이 불이 방화가 아니라 한 궁녀의 실화라고 말해 파문을 가라앉히려 했다.

 

"전에 동궁에 불이 난 사건을 끝까지 추문하려 했으나 일이 분명하지 못해서 추문하지 않았다. 불이 처음 났을 때 내게 고한 자들이 무수비(궁에서 불과 물을 맡은 여종들)의 방에서 불이 났다고 하기에 내가 직접가서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세자가 불을 피해 앉아 있기에 데리고 대내大內로 왔는데 그 불은 당초 밖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환관들에게 들어보니 한 방 안에 네 명의 잡물을 두었는데 덕지라는 여종의 제 집의 목면을 그 방에 보관해두고는 밤에 살펴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등불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 여종이 열쇠를 쥐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나 문을 열 줄 몰랐다.

 

문을 바로 열지 못했으므로 불을 즉시 끄지 못하여 불길이 매우 치열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그 불은 처음 잠긴 방에서부터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중종은 문정왕후를 두고 떠도는 항간의 소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중종은 항간의 소문처럼 불이 밖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났으며,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말했지만, 덕지가 문을 열 줄 몰랐다면 어떻게 잠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초보적 의문도 해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말은 설득력이 없다.

 

중종마저 세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니 세자의 지위는 점점 더 위태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조정 신하들은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차기 임금을 지지하는 일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다.

 

중종이 사망하기 두 달 전인 재위 39년 9월에도 이 논쟁이 다시 논란이 되었다. 영사 홍언필이 중종에게 대윤 ,소윤에 대해 이렇게 아뢰었다.

 

"이른바 대윤 당이라는 것은 동궁東宮(세자)을 부호扶護하고, 소윤 당이라는 것은 대군(경원대군)에게 마음을 두었다 하는데, 위에 주상이 계신데도 사사로이 동궁을 부호하는 자는 간사한 꾀를 형용할 수 없는 소인일 것입니다. 대군에게 마음을 두는 자라면 패역의 정상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릇 이런 말이 도는 것은 동궁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인데 동궁에게 조만간 후사가 있게 되면 종사와 신하와 백성의 복이겠고, 불행히 후사가 없으면 종사의 만세를 위한 계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군이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있을 뿐이므로 형제 사이에 조금도 의심이 없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홍언필의 말처럼 문제는 세자에게 후사가 없다는 데 있었다. 당시 세자의 나이 이미 서른이었으나 불행하게도 후사가 없었다. 만약 세자에게 후사가 있었다면 소윤은 발호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세자에게 이상이 있더라도 세손이 뒤를 이을 것이므로 세자를 흔들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세자는 정비 인성왕후 박씨와 후궁 귀인 정씨를 두었음에도 끝내 후손을 생산하지 못했고, 그 공백을 문정왕후의 소윤이 파고들었다. 세자만 없으면 홍언필의 말대로 ‘대군이 많지 않고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으므로 유일한 대군인 경원대군이 뒤를 이을 것이었다.

 

이즈음에는 중종도 훗날 두 당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질 것을 염려할 정도로 중종의 후사를 둘러싼 당쟁은 심각하였다.

 

"소인이 군자를 해칠 때에는 반드시 붕당이라 지칭하여 일망타진하니 지극히 염려스럽다."

 

중종의 이 우려는 정확한 예언이었다. 그러나 당쟁에 대한 중종의 대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중종은 과거 조광조 중심의 사림파는 명분도 신의도 저버린 체 과감하게 제거했으나, 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당파의 제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 소극성 때문에 세자는 혼란스런 조정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다. 중종이 재위 39년 11월 사망함으로써 세자 인종이 즉위했으나, 그는 소윤에게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인종의 즉위로 소윤과 인종의 정면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홀로 된 첩과 어린 아들을 어찌 보존할 것이오?”

 

중종이 사망할 즈음 궐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중종이 폐비 신씨를 궁에 들였다는 소문이었다. 중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폐문 시간이 지났는데도 통화문을 열어놓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중종이 폐비 신씨가 보고 싶어 입궐시켰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통화문을 열어놓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는 폐비 신씨를 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승을 불러다 중종의 쾌유를 비는 불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이런 소문이 돈 것은 반정세력의 압력에 밀려 신씨를 폐위시켰던 중종이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업보였다.

 

중종이 소윤을 제거한 상태에서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폐비 신씨 문제는 사림파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그들과 굳건한 유대를 맺을 수도 있었다.

 

막 즉위한 인종은 하늘이 낸 대효大孝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효자였으며, 또한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선비를 자처한 호학애사好學愛士의 군주이기도 했다. 그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서연書筵(세자가 학문을 익히는 것)중에 세자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궁관에서 독서를 그치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와 "벌이 소매 속에 들어가서 몹시 쏘기로 이제 겨우 잡아냈노라"고 말했다.

 

또한 인종이 즉위한 후에는 중국 사신이 접대하던 관원에게, "당신의 임금은 성인이오. 그런데 당신의 나라는 조그마한 나라라 성인과 맞지 않으니 오랫동안 당신네들의 임금이 될 수는 없을 것이오, 당신들은 복이 없소" 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아성잡기>에 실려있다. 여기에서 성인이란 공자나 주자같은 유학자를 가리킨다.

 

이런 인종에게 사림파는 많은 기대를 걸었다. 호학의 인종이 사림파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사림파의 가장 큰 현안은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 사람파의 신원이었다. 인종은 조광조, 김식 같은 기묘사화 피화자들이 훈구파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믿었고, 세자 때부터 즉위하면 때를 보아 사림파를 신원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인종은 사림파와 같은 세계관, 역사관을 공유한 정치가였다.

 

거듭된 사화에 시달리던 사림파는 인종의 즉위를 쌍수를 들어 환호했다. 반면 훈구파는 인종의 역사관이 자신들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 인종을 지지한 사림파는 당연히 또 다른 인종의 지지세력인 대윤과 가까워졌고 그에 비례해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와 소윤과는 멀어졌다.

 

인종이 즉위하자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대윤의 영수인 윤임이 세를 얻었다. 그러나 인종이 인자하면서 그리 만만한 군주도 아니어서 윤임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인종 행차 때 있었던 일이다.

 

인종이 거동할 때 한 사람이 어가 앞을 막아서며 원통함을 호소하자 인종이 억울한 사연을 적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판서 윤임이 말리고 나섰다.

 

"예로부터 송사하는 사람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한 예가 없습니다." 이에 인종은 "인군人君이 친히 글을 보고서 그 원통함을 가리고자 하는데 송사를 맡은 관원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드리지 않은 예가 있었던가?" 라고 반문했다.

 

인종은 이처럼 온화하면서도 자기 주관이 뚜렷한 임금이었다. 만약 인종이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그 어느 왕보다 화려한 문화정치를 펼쳤을 지도 모른다.

 

인종은 문정왕후가 자신을 박해하고 정적으로 대했음에도 그녀를 어머니로 깍듯이 모셨다. 즉위하자마자 지아비 중종을 잃은 계모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공조참판에 임명했다. 이에 대간이 즉각 반박하고 나선 것은 윤원형의 참판 임명이 얼마나 파격적인 조치인가를 말해준다.

 

"윤원형은 사신을 따라가며 장사꾼을 데리고 가 중국에서 모욕을 받았으니 너무 비루합니다. 척리는 어질고 재능이 있어도 특별히 제수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적격자가 아닌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논박에도 인종은 윤원형에게 관직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이런 특은에도 감격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들 경원대군을 즉위시키는 것이었다. 인종이 동생을 참판으로 임명했음에도 문정왕후는 인종을 압박했다. 문안 온 인종에게 쏘아 붙인다.

 

"홀로 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전하겠소."

 

홀로 된 첩은 대비 자신을 가리키며, 약한 아들은 경원대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종은 이 말을 듣고 미안함을 이기지 못하여, 아침부터 더운 햇빛이 쪼이는 땅바닥에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임금이 석고대죄하는 셈이었다.

 

문제의‘주다례’

 

이런 일들은 부왕 중종의 장례를 치르느라 그렇쟎아도 몸이 쇠약해진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는 일이었다. 인종의 병세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승하하기 한 달 전쯤인 재위 1년 6월 4일인데, 이날 인종은 최초로 약방 제조들의 문안을 받는다. 그때 인종의 대답은 일상적이었다.

 

"더위 증세가 조금 있을 뿐이니 문안하지 말라."

 

그리고 첫 문안 이틀 후인 6월 6일 약방 제조들이 문안했을 때 인종의 답은 한층 활기있다.

 

"이제는 기후가 덜하니 문안하지 말라. 이렇게 몹시 더운데 문안하니 도리어 미안하다."

 

이후 약 보름 동안 <인종실록>에는 약방의 문안 기록은 보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집무를 본 내용만 나온다. 그러다 6월 17일 문제의 '주다례'기록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인종이 문정왕후가 내놓은 다과를 먹고 독살당했다는 야사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다.

 

6월 17일 영의정 등 삼공이 인종에게 이렇게 아뢴다.

 

"내일 경사전의 주다례를 지낸 뒤에 대비전에 문안하시겠다고 전교하셨습니다만. 지금 전하의 옥체가 강녕하시지 못한 데다 날씨는 매우 덥습니다. 이런 때에 노동하시면 혹시 중병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멈추소서."

 

"내 기후가 이제 매우 좋아졌으니, 무덥더라도 편안히 앉아서 오래도록 제례를 그만둘 수 없다."

 

이렇듯 삼공이 주다례와 대비전 문안을 그칠 것을 아뢰는 판국에도 대비 문정왕후는 이에 관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는 곧 주다례와 문안을 강행하라는 뜻이었다. 다음날 인종은 예정대로 주다례를 지내고 대비에게 문안하였다.

 

이날 대비는 어가를 따른 시종과 제장에게 술을 먹이고, 또 시종에게 호초를 넣은 흰 주머니를 내리는 등 일행을 극히 환대했다. 인종은 대비전의 내전에서 문정왕후와 다과를 나누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인종이 갑자기 약방에 명하여 약을 지어 들이게 한다. 인종의 병은 이질, 즉 심한 설사였다. 주다례 직후부터 설사가 나더니 그 이틀 후인 20일 무렵부터 증세가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은 것이다.

 

"이질 증세가 계속 일어나서 음식을 먹지 못하니, 권제權制를 따르는 것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의원은 별다른 증세가 없다 한다."

 

닷새 후인 6월25일 승지 박한종은 인종이 "설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기운이 매우 지쳐 있고 구토 증세도 있어서 그저께부터 통 수라를 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인종의 증세가 갑자기 위급해졌다. 눈동자가 술취한 사람처럼 흐릿해지고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그러다가 기운이 가라앉아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증세가 나타났다. 인종의 병이 위급해지자 의원들은 별각의 고요한 곳으로 옮겨 조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인종은 경복궁 안 한복판에 있는 아마산 동쪽의 청연루로 옮겼는데, 이 조치가 조금 효험이 있었는지 스스로 일어날 정도로 기운을 점점 회복했으며 열도 잠시 내려 미음을 들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문정왕후가 소동을 일으킨다. 갑자기 궁을 나가 의혜공주 집에 머물러 쉬면서 청연루로 가 인종의 병세를 살펴보겠다고 한 것이다.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명분이었다. 인종의 증세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가주서 안명세, 검열 윤결 등은 한결같이 문정왕후의 이 의외의 행동을 만류하고 나섰다.

 

"상의 옥체가 위급하시더라도 대비께서 친히 문안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만 경동만 더할 뿐입니다. 인심이 의구하고 경동하여 위아래가 황급하면 변고가 일어나는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정왕후가 벌인 거동 소동은 의혜공주의 집이 궐 밖 여염에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평소에도 대비는 밖에 나갈 수 없다. 한번 왕비가 되면 죽을 때까지 궐 밖 구경을 할 수 없었는데 심지어 과부가 된 대비가 궐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임금이 병환중인 상황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의 만류로 일단 주저앉은 문정왕후는 다음날 또 의혜공주 집으로 거동하겠다며 소동을 일으켰다. 이는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다. 왕비가 된 날부터 인종을 핍박했던 그녀가 인종의 병세를 걱정해 소동을 일으킬 리는 만무했다.

 

문정왕후가 이런 소동을 벌이는 이유는 분명했다. 백성들에게 인종이 와병중임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실 대궐 밖의 일반 백성들은 구중궁궐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잘 알 수 없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인자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그가 즉위한지 1년이 채 안 돼 급서할 겨우 그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일 것은 분명했다.

 

문정왕후가 이런 소동을 벌이는 동안 임금의 병석을 지킨 사람은 인종의 외숙인 대윤 영수 윤임이었다. 윤임은 병석에 있는 인종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말은 못하지만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18일 주다례 후 대비전을 문안했을 때의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 인종이 다과를 들고 며칠 만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대비전에서 마련한 다과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증거도 없는 일을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인종이 사망하기 이틀 전인 6월 28일 어의 박세거는 결국 소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장부가 매우 손상되어 병이 뿌리가 있는 듯 합니다."

 

손상된 장기는 비위였다. 그러나 부왕의 사망에 지나치게 애를 태워 비위가 손상되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비장과 위는 음식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장기로, 음식물에 의해 손상되는 부위지 슬픔 때문에 손상되는 장기는 아니다. 또한 비위는 독극물이 투입되었을 경우 가장 먼저 반응을 일으키는 장기이기도 하다.

 

내외의 이런 의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정황후는 세 번째 거동 소동을 일으킨다. 인종이 사망하기 하루 전이었다. 거동 장소는 여전히 딸인 의혜공주 집이었다. 대비의 소동은 병구완에 정신이 없는 대신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영의정 윤인경이 만류하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공주의 집은 여염에 있으므로 결코 옮겨서는 안되니, 마지못하면 승정원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은 경복궁에 있으므로 임금이 투병하는 청연루와 가까웠다. 그러나 승정원이 비록 궐내에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다. 대비가 승정원을 차지하고 있으면 승정원이 집무를 볼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간단히 말해 문정왕후가 인종을 도와주는 거조는 그냥 대비전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양사와 홍문관에서 대비의 승정원 이어를 반대했고, 문정왕후도 승정원을 "불편"하다며 의혜공주의 집으로 거동하겠다고 계속 고집하다가, 대신과 대간에서 거듭 만류하자 겨우 소동을 멈추었다.

 

문정왕후는 이런 식으로 인종의 병 치료에 바쁜 신료들을 끊임없이 힘들게 했다. 이런 소동 속에서 인종은 어의 박세거가 올린 소시호탕을 들기를 거부하고 나선다.

 

"내 병이 어찌 이 약을 마시고 곧 낫겠는가?"

 

인종은 생에 대한 미련을 이제 단념한 듯 윤임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광조의 복직과 현량과 설치는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용기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큰 한이다."

윤임이 만류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잡언을 많이 하십니까? 병환만 빨리 나으면 무엇이든지 어찌 수행하지 못하겠습니까?"

 

인종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탄식했다. 죽음을 앞둔 인종에게 가장 큰 한은 조광조 같은 사림파를 신원하지 못한 것이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낀 인종은 드디어 대신들에게 유교를 내린다.

 

"조광조 등의 일은 내가 마음 속에 늘 두고 있었으나 선왕先王(중종)께서 전에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내가 감히 가벼히 고칠 수 없어 천천히 하려 하였다. 이제는 내 병이 위독하여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으므로 비로소 유언하여 민심을 위로하려 한다. 조광조 등의 벼슬을 전부 옛날처럼 회복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현량과도 전에 아뢴대로 회복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이어 전위 교서를 내렸다.

 

"경원대군 이환에게 전위한다. 경들은 더욱 힘쓰고 도와서 내 뜻에 부응하라."

 

결국 인종은 투병하던 청연루 아래 소침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월 1일, 재위에 있은 지 불과 여덟 달 만이었다.

 

그날 밤 서울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서울 사람들이 스스로 놀라 움직이며 뭇사람이 요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괴물이 밤에 다니는데 지나가는 곳에는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 수레가 지나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서로 이런 소문을 전해 미친 듯이 현혹되어 떼를 지어 모여서 함께 떠들고, 궐하로부터 네거리까지 징을 치며 쫓으니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소동이 3-4일 계속된 후에야 그쳤다.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문정황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아직 미성년이었으므로 성종 때의 예에 따라 대비가 섭정을 해야 했다. 당시 섭정할 수 있는 사람은 중종비인 대왕대비 문정왕후와 인종비인 왕대비 인성왕후 두 명이었다. 그러나 대비가 스스로 섭정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고, 대신들이 결정해 주청해야 했으므로 조정은 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윤인경이 누가 섭정해야 하는가를 물었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소신을 밝히고 나선 인물이 사림파 이적이었다.

 

"송나라 철종 때 태황태후가 정치를 대리한 전례가 있습니다. 어떻게 형수와 시숙이 함께 궁전에 나앉을 수 있겠소."

 

다른 사람도 아닌 사림파 이언적이 문정황후의 대리를 주청하고 나섰으므로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문정왕후는 이처럼 모순되게도 사림파 이언적의 지지를 받아 대리청정하게 되었다. 훗날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이언적이 을사사화 때 사림파의 기개를 지키지 못했다며 비판했는데, 율곡의 속마음은 사림파의 기개를 지키지 못한 데 있다기 보다는, 문정왕후의 섭정을 주장함으로써 사림파의 집권이 그만큼 늦어진 데 대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사림파 이언적의 이 순진한 주청은 입술의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사림파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왔다.

 

인종이 위독할 때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며 소동을 벌였던 문정왕후는 정권을 잡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그녀의 속마음은 인종의 장례 절차에서 먼저 드러난다. 윤원형과 함께 소윤을 이끌던 이기가 인종의 장례 절차에 대해 색다른 주장을 했다.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루를 모셔도 임금이건만, 인종은 임금이 아니니 대왕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 같으면 대역죄인이 될 주청이었다. 그러나 결국 인종의 장례는 임시로 빨리 치르는 약식 장례인 갈장으로 치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종의 장례일이 승하한지 다섯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 27일로 정해졌는데, 문정왕후와 소윤은 오히려 여기에서 20여일을 더 앞당겨 10월 15일로 장례일을 수정했다. 홍문관 부제학 나숙이 부당하다고 상소한 것은 당연했다.

 

"대행대왕의 장례일을 10월 27일로 정한 것도 이미 5개월의 상기에 어긋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또 15일로 당기니 놀라고 의혹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에 따라 장례일을 늘려 잡으소서."

 

교리 정황도 갈장은 안 된다고 상소하고, 사헌부에서도 그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문정왕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야사인 <영남야언>에는 윤원형이 불공을 올려 임금의 수명을 짧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고 적혀 있다. 윤원형이 깊은 밤 남산에서 들불과 초를 켜놓은 채 손수 향을 피우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였으며, 궁중에서는 나무로 만든 사람을 묻어 인종을 저주했다는 것이다.

 

상복을 입는 날 윤원로, 윤원형, 이기 등 소윤이 갓을 털고 서로 하례하며 의기양양해하는 것을 보고 교리 정황이 분노했다.

 

"이 역적 놈들의 기색을 보기 원통함이 더욱 심하구나."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사림파를 신원하는 유교를 내린 인종의 시신이 궐내에 있던 그 해 8월, 사림파들은 '을사사화'로 대거 화를 입게 된다.

 

대비 윤씨는 인종이 죽은 다음 달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옛날 윤원형의 형 윤원로를 공박해 귀양보낸 대윤 영수 윤임과 유관 등을 치죄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윤원형은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임백령 등을 배후에서 움직여 윤임과 유관 등을 공격하게 했다.

 

윤원형은 대윤을 제거하기 위해 윤임이 인종비 인성왕후에게 보내는 편지를 거짓 작성하여 몰래 대궐에 떨어뜨렸다.

 

"근래, 나라 일이 점점 수상해지니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몰라서 밤낮으로 울고 있습니다. 판서 유인숙, 정승 유관과 함께 왕위를 봉성군에게 옮기려고 합니다. 지난번 윤원로를 귀양 보낼 때 윤원형마저 치죄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윤임이 인성왕후와 모의해 왕위를 중종의 여섯째 아들 봉성군에게 옮기려 했다는 거짓편지였다. 이 사건으로 봉성군은 귀양을 가고, 윤임과 유관숙, 유관은 모두 귀양, 파직 등을 당한다. 인종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대윤이 몰락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이 완전한 조작이라는 것은 이들을 처벌하는 전지에 죄명을 명시하지 못한 데서도 드러난다. 적시할 죄명이 없었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전지에 사연을 언급하지 않으면 아무 까닭없이 죄 준 것 같을 것이니, 윤임은 종묘사직과 크게 관련된 말을 만들어내고 유관과 유인숙은 권간과 결탁했다고 적으면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했으나, 민심이 동요할 것이라며 반대하자 죄목도 없이 치죄했던 것이다 .

결국 윤임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유관과 유인숙은 ‘무슨 행적이 있다.’는 이유로 치죄되었으니 이는 이들의 무죄를 말해주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소윤은 자신들에게 불만을 가진 사림파들을 마저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사화가 다시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을사년에 벌어졌다 하여 을사사화라고 부른다.

 

소윤은 홍문관과 대간 등에 자리잡은 사림파가 윤임 등의 치죄에 반대하자 이들마저 윤임과 유관 일파로 몰아 공격했다. 이 일로 수찬 이휘, 장령 정희등, 박광우 등 젊은 사림파 관료들이 잡혀 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장형을 받던 박광우가 울부짖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는가?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어찌 감당하란 말이냐?"

 

정희등이 울부짖는 박광우를 타일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곤장의 굵고 얇은 것을 비교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돌아가신 임금의 관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고통 소리가 안에 들리지 않게나 하세."

 

이들은 심문받을 적마다 인종의 관이 있는 곳을 향해 부복해, 형을 집행하던 사령들도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이처럼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를 지지했던 대윤과 사림파는 급전직하 몰락했다. 윤임, 유관, 유인숙, 이휘 등은 참형에 처해졌고 많은 사림파가 귀양 또는 파직당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을사사화 2년 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다시 옥사가 벌어진다. 양재역 객사에 "여왕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격이다"라는 내용의 벽서가 붙은 것이다. 이로 인해 봉성군과 송인수, 이약해 등이 사형에 처해지고, "형수와 시숙이 한 궁전에 나앉을 수 없다"며 문정왕후의 섭정을 제안한 이언적도 먼 변방으로 쫓겨나 위리안치 당했다.

 

그러나 문정왕후와 소윤의 공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양재역벽서 사건 다음해인 1548년 무신년에는 전 사관 안명세의 사초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관 안명세가 사초에 윤임 등을 옹호하고 이기가 사건을 조작했다고 비난하면서, "중종의 소상도 지나지 않았고 인종의 발인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빈전 옆에서 대신 세 사람을 죽였다"고 개탄했던 것이다 .

 

춘추필법을 지향한 안명세는 혹독한 고문 끝에 "부디 자식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마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형당했다.

 

그 후 명종 4년에는 이홍윤 사건이 일어나 또 한차례 피비린내가 일어났다.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약빙의 아들이자 윤임의 사위였던 이홍윤이 "연산군도 사람을 많이 죽이더니 중종반정을 당했는데, 지금 임금도 사람을 많이 죽이니 어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겠는가?" 라고 불평하곤 했는데, 그 아우 이홍남이 이 말을 조정에 고함으로써 옥사가 재연된 것이다. 이 사건은 충주 지역에 사는 이약빙의 문인들을 초토와시켜 무려 3백여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한 명종이 쫓겨날 것이라는 이홍윤의 발언에 분노한 문정왕후는 충청도의 도명을 아예 청홍도로 바꾸기까지 했다. 원래 대읍인 충주와 청주의 첫 음을 따서 충청도의 도명으로 삼았는데 사건 발생지인 충주대신 지금의 홍성인 홍주를 넣은 것이다.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이처럼 문정왕후 섭정 기간은 옥사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문정왕후는 성리하 사회인 조선에서 보우라는 승려를 중용하고 불교를 중흥시키는 등 사대부들과는 정치적으로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문정왕후는 양재역에 붙은 벽서의 내용처럼 '여왕' 노릇을 한 여인이었으나, 사망한 후에는 두고두고 사대부들의 원성의 표적이 되었다.

 

훗날 숙조의 모후 명성왕후가 국정에 관여해 논란이 일자 윤휴가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라고 비난한 것은, 문정왕후에 대한 사대부들의 감정이 어떠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문정왕후는 이렇듯 사대부들에게는 저주를 받았으나 불자들에게는 후한 평가를 받았다.

 

김영태는 <한국불교사>에서 이렇게 썼다.

 

"성종, 연산, 중종 때 불교는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다가 명종이 즉위한 후 그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면서부터 다시 부흥의 기운을 보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중흥불사의 대임을 맡을 고승을 물색하여 설악산 백담사의 보우를 맞아들었다. 이처럼 문정왕후가 보우와 같이 불교를 중흥시키려고 함에, 조금이라도 불승을 우대하는 기색이 보이기만 하면 조정 대신들과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가만히 있질 않았다."

 

당시 시대적 과제는 세조의 집권이래 계속되어온 훈구파의 비정을 청산하는 것이었는데, 문정왕후의 섭정은 오히려 훈구파의 집권 연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뜻 있는 선비들의 비판거리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은 사림파들에게는 암흑의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세월 동안 "인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은

 계속 횡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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