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시 읽는 역사

누가 왕을 죽였는가?(3)-소현세자

by 싯딤 2008. 10. 15.

3장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1612-1645

 

<인조실록> 23년6월27일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 (죽은 뒤 3개월 후 지내는 제사)를 행하였다.

 

세자는 심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부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임금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는 인열왕후의 서제庶弟였는데 이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학질과 의관醫官 이형익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그리고 삼전도 치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그 이면에 존재하는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비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만큼 소현세자는 잊혀진 인물이다.

 

그가 만약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런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소현세자는 삼전도 치욕이후 인조를 대신해 청나라에 끌려가 청의 수도였던 만주 심양에서 9년이란 세월을 볼모로 보냈다. 조선의 세자가 볼모가 된 것 은 조선의 마지막 세자 영왕과 소현세자 뿐이다.

 

소현세자를 독살한 혐의자가 부왕父王 인조라는 점에서 그의 심산한 일생을 한마디로 축약해 보여준다. <인조실록>을 따라 그의 죽음의 현장에 가보면 9년여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세자가 갑자기 병에 걸린 것은 두 달 후인 인조 23년 4월 23일 이었다. 어의御醫 박군이 진단한 세자의 증세는 학질이었다. 그런데 장년의 세자에게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학질을 치료한 인물이 문제의 의관 이형익이다.

 

약방에서는 다음날 새벽 인조에게 이형익을 시켜 침을 놓아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해야 한다고 주청했고 인조는 그 말에 따랐다. 그날 <인조실록>은 화성이 적시성積屍星(시체별)을 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명에 따라 세자가 발병한 다음날인 24일부터 침을 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도 세자는 침을 맞았는데 그 다음날인 26일에 그만 덜컥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세자의 이런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도 9년여를 견뎌 낸 세자가 학질 따위에 쓰러질 리는 없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학질에 침을 맞다 죽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는 정사正史인 <인조실록> 23년 6월27일자에도 나온다. 소현세자의 졸곡제 기사 중 세자의 시신 상태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오므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것이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파문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기본 자료인 사초에서 비롯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실록은 함부로 적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게다가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라고 목격담의 출처까지 적어 놓았으니, 실록의 이 내용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정말 독살된 것일까? 독살되었다면 왜 볼모 생활 중의 심양에서가 아니라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고국에서였을까? 그 의문을 추적해 보자.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인조 15년(1637년) 1월 30일, 50여명의 사람들이 통곡을 하면서 남한산성을 나왔다. 의장도 없는 신하의 행렬 속에,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색 옷의 차림으로 흰말에 올라타 힘없이 탄식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였다. 그 초라하고 굴욕적인 행렬 속에는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도 있었다.

 

산성을 내려온 인조는 죄인임을 표시하는 가시 박힌 자리를 펴고 앉아 대죄했다. 인조와 소현세자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의 인도에 따라 삼전도(지금의 송파구삼전동 한강상류 나루터)로 향했다. 그곳에는 청 태종이 황제를 나타내는 황옥을 펼치고 않아 있었고, 주위에는 활과 칼로 무장한 갑옷 차림의 장수들이 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한 가운데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인조가 손수 걸어 진 앞에 이르자 용골대가 나와 진문 동쪽에 머물러 기다리게 한 다음 진 안에 들어가 청 태종의 분부를 듣고 나와 전한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인조가 답한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용골대가 단 아래 북면北面하는 쪽에 자리를 마련했다. 북쪽을 바라보는 곳은 신하의 자리고 남쪽을 바라보는 곳은 임금의 자리다. 인조는 그 자리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삼배구고두례가 끝나자 인조를 단 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청 태종은 남면하고 인조는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다. 또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서쪽을 향해 나란히 앉고 소현세자는 그 아래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조선의 두 대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그 아래에 앉았다.

 

청 태종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하라."

 

무력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에 맞서 청의 콧대를 꺽을 무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위솔 정이중이 나서서 다섯 번을 쏘았는데 활과 화살이 조선과 다르므로 모두 맞질 않았다. 이에 만족한 청에서는 떠들썩한 술판을 벌였다. 잠시 후 인조가 완전한 항복의 표시로 도승지를 통해 국보를 받들어 올렸다. 당사자인 인조는 물론 소현세자, 봉림대군 모두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으니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치욕이다 .

 

볼모로 가는 두 형제

 

삼전도의 치욕은 병자호란 패전의 결과였으나 사실 그 원인은 인조반정에 있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폐모론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일으킨 것인데, 성격상 연산군의 학정에 항거해 일으킨 중종반정과는 달랐다.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정사는 국가나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는 탁월한 것이었다. 인목대비와 서인의 처지에서는 광해군의 정사가 패륜이었을지 몰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늘상 벌어지는 일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따라서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에게는 인조반정이 희소식이었겠지만, 광해군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던 일반 백성들에게는 임진왜란의 참화 극복에 전력을 바쳐야 할 시기에 벌어진 권력층 내부의 불필요한 정치적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 반정 직후 일등공신의 한사람인 이서의 회고이다.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 몰랐다.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오리 이원익이 전 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에 제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으로서는 인심을 수습할 명분과 사람이 없어, 남인 정승 이원익이 명망을 빌려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서인 정권이 겨우 위기를 수습한 반정 다음해인 인조 2년에는 내부 분열인 이괄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괄은 반정의 주역이면서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 난은 만주에서 여진족의 통일 기운이 높아져 국경 수비에 치중해야 할 시점에 발생해 북방 국경을 크게 약화시켰고, 더욱이 정묘, 병자 양 호란 때 조선군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반정 후 서인 정책의 핵심 방향은 광해군 정권의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 중요한 것의 하나가 바로 외교정책의 변화였다. 광해군의 명, 청 중립외교를 버리고 반정정권은 숭명외교를 취했다.

 

즉위를 허락하는 인목대비의 즉위 교서를 보자.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년으로, 의리로는 군신君臣이며 은혜로는 부자父子와 같다. 임진년의 은혜를 만세토록 잊을 수 없어 선왕께서는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에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청)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반정정권의 이런 인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반정 당시 중국대륙은 후금, 즉 청나라와 명나라가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이런 긴장상태에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면서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이 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후금은 조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중원을 정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묘호란은 양국이 형제관계를 맺는 정묘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당시 청은 명과 조선 모두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수습책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정묘조약 9년 후인 인조 14년에 청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나선 것은 이제 조선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인조와 서인정권이 이를 거부하려면 정묘조약 이후 9년동안 그만한 힘을 길렀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정권은 국방력 대신 명분싸움만 했고, 그 명분은 청을 천자국으로 모실 수 없는 것이었다. 청을 천자국으로 받드는 것은 반정을 일으킨 명분 자체를 부인하는 자기모순이었다.

 

인조는 8도에 선전교서를 내렸다 조선 백성보다도 '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를 더 큰 목소리로 주창한 이 선전교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목청 뿐인 허세에 대한 청의 대답은 군사공격(병자호란)이었고 그 결과가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조선은 군사력을 가질 수 없으며,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해 봉림대군 등 왕자들을 볼모로 끌고 가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화의 조건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굴욕적인 화의조약 내용>

1.조선은 청을 황제국으로 받들어 섬긴다.

2.명과 당장 국교를 끊는다 .

3.세자, 왕자, 신하들을 청에 인질로 보낸다.

4.명나라 정벌 전쟁 때 군사를 보낸다.

5.매년 원하는 만큼의 조공을 바친다.

 

삼전도의 항복 5일 후 잡혀 있던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볼모로 가기 전 하직 인사를 하러 대궐로 돌아왔다. 이때 배웅하던 신하들이 모두 길가에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한 신하가 말의 재갈을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는 말을 멈추고 한참동안 그대로 있기도 하였다.

 

청과의 화의조약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이 세자의 볼모 문제였다. 척화파斥和派는 모두 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자를 청나라에 내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주화파主和派라 해도 세자가 볼모로 가는 형편을 지지할 수는 없었으므로 실로 난감했다. 이때 이 난제를 푼 인물이 다름 아닌 소현세자 자신이었다.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전하라."

 

볼모 문제는 소현세자가 이처럼 스스로 청 진영에 나아가기를 자청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진 이 결정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조선 권력층 대다수는 국가의 안녕보다 일신의 안전을 더 중시했다. 청나라가 세자와 대군 이외에도 판서의 아들을 인질로 원하자 평소에는 벼슬자리에 아귀처럼 달려들던 관료들이 서로 판서를 맡지 않겠다고 다투었다. 실제로 호조판서 김신국이 내외의 비판을 모른 체하면서 병을 핑계대고 사직을 청해 이경직이 대신 임명되기도 했다. 세자가 끌려가는 판국인데도 고위 관료들은 나라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 태조의 14번째 아들인 구왕과 함께 멀고 먼 북방길을 떠났다. 인조가 지금의 경기도 고양의 창릉(昌陵: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 서쪽까지 거동해 전송하자 구왕이 말했다.

 

"멀리 오셔서 전송하니 실로 감사합니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대왕께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세자의 연세가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세자와 봉림대군이 절을 하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당부했다.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엎드려 분부를 받은 세자는 신하들이 옷자락을 잡으며 통곡하자 만류하며 말했다.

 

"주상이 여기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오. 각자 진중하도록 하시오."

 

마침내 소현세자는 언제 돌아올지,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지 모르는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26, 봉림대군의 나이 19살 때였다.

 

이 망하는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서

 

소현세자에게는 볼모의 북방길이 위기였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중국에서조차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성리학을 금지옥엽 모시는 우물 안 개구리의 사고방식을 타파하고, 또한 국제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판서 남이웅, 좌부빈객 박황, 우부빈객 박노, 보덕 이명웅, 필서 민응협 등의 수행원들과 북방길에 오른 세자는,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만주의 심양에 자리를 잡았다. 세자 일행은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지어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를 심양관瀋陽館이라 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관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즉 소현세자는 사실상 주청駐淸 조선 대사였고 심양관은 조선 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청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려 하였고, 인조 또한 청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워 소현세자에게 미루었다.

 

소현세자가 처리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응하는 것이었다. 청은 당시 명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명과의 전쟁에 투입할 조정군 파견을 요구했다. 이는 숭명대의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정권에게 심각한 자기 부정이었으나, 전쟁에 패배한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청의 요구에 재위 18년 4월에 임경업과 이완이 이끄는 조선 수군 6천 명을 파병했다. 하지만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서울을 점령한 틈을 타서 역으로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을 건의할 정도로 반청인사였으니,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대로 싸울 리가 없었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고 명의 전선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발포하더라도 엉뚱한 곳을 향해 쏘고 배를 일부러 부수고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태업을 일으켜 청나라의 분노를 샀다.

 

분노한 청나라는 이를 조선의 배신행위로 규정짓고 청나라 장수 용골대 등으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의주에 파견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용골대에게 크게 당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 들어도 주눅이 드는 형편이었다. 이때 세자는 용골대의 동향을 미리 조선 조정에 알려주고, 용골대에게는 조선의 처지를 설득하는 등 양자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한 번은 용골대가 "청과 다른 의논을 하는 자가 누구냐"며 세자를 협박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세자는 벌컥 화를 내며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고 호통쳤다. 이에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했다.

 

인조 20년에는 부사 이계가 감사 정태화의 명을 받아 조선 해안에 출몰한 명나라 배에 몰래 쌀과 음식을 제공해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용골대가 이계 등을 만주의 봉황성으로 불러 세자와 함께 심문했는데, 세자는 시종일관 조선 관리들을 옹호했다. 이에 용골대가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처럼 비호해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성리학이 가르치는 명분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자는 심양에 오기 전부터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있었다. 병자호란 5년 전인 인조 9년(1631년)에 견명사 정두원이 가져온 서양의 화포와 망원경, 자명종 등을 보고 서양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이런 소현세자의 눈으로 볼 때 중원의 대세는 이미 청으로 기울어 있었다. 만주에서 흥한 청이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즉위 후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각지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 중 비교적 큰 세력은 도적이 되어 떠돌아다니면서 명을 위협했다. 사실 명을 망하게 한 것은 청이라기보다는 이들 농민 반란군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역졸 출신의 이자성이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세력만 있으면 황제를 자칭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한 특징인데, 이자성 또한 세력이 커지면서 스스로를 대순황제라 칭하고 명의 수도 북경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북경이 함락되던 날 황제의 외척과 귀족, 재상들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유적의 흙발에 차이면서도, 농민 출신 이자성을 성천자聖天子로 받들고, 자결한 의종 숭정제를 저주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이렇듯 조선의 사대부들이 받들어 모시던 명나라는 이미 명나라의 황손들도 포기한 나라였다.

 

북경이 함락될 때 명의 유일한 정예군은 오삼계가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진격하여 산해관을 돌파하던 오삼계는,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청나라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돌아가셨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급히 북경으로 향하는 바, 차제에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좋겠다."

 

청과 연합전선을 결성해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이었으나,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 달라는 이 말은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소현세자를 볼모로 데려왔던 청의 구왕 다이곤은 즉각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이곤은 당시 태종의 뒤를 이은 어린 청 세조를 대신해 섭정하고 있었다.

 

"인의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

 

명목은 명,청 연합군이었으나 사실상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잡혀 온지 7년째 되던 해인 1644년(인조 22년) 4월의 일이었다. 이때 구왕 다이곤은 자국의 왕과 장수들 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남정南征길에 올랐다. 소현세자를 대동한 것은 과시하기 위한 구왕의 의도적인 행위였다.

 

남정군을 따라간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마지막 정예군인 오삼계 군단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명은 도처에서 무너지고 반면 청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이미 중원의 정세가 청으로 기울었음을 알고 있었던 소현세자는 오삼계 군단의 항복 장면을 목격한 후, 조선이 취할 외교정책이 승명대의가 아니라 청나라 중심의 현실외교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청군은 남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돼 북경에 입성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점령해 간 것이다. 청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성은 항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쳤고, 이로써 청은 명의 수도인 북경에 무혈입성하였다. 이자성은 청에 갖다 바치기 위해 애써 북경을 함락한 셈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북경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주씨네 떡가루로 이씨가 쪄낸 빵을, 이웃 조서방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이는 주씨의 명 왕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이, 결국 조씨를 국성으로 쓰는 만주의 청에게 고스란히 빼앗긴 것을 풍자한 노래였다.

 

이를 지켜본 소현세자의 심정은 담담했다. 소현세자는 이미 7년 간의 볼모생활을 통해 이런 사태를 예견했는데, 인조 18년, 임경업이 명과 싸우지 않고 태업하며 사실상 투항했을 때 세자가 놀랐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세자가 볼 때 이런 행위는 오히려 조선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세자는 볼모 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국제 정세 인식을 터득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인식은 조선의 인조와 서인정권에게는 위험한 사고방식으로 비춰졌다.

 

아버지 인조의 부정父情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온 지 3년째 되던 해인 인조18년, 부사 이경헌과 서장관 신익전이 인조의 병환이 심각하니 세자를 일시 귀국시켜달라고 청에 요청한 일이 있었다. 조선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을 그동안 심양에 머물게 하겠다고 요청했는데, 청은 이 제의에 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도 인평대군과 함께 보낼 것을 요청했다.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부른 후에야 소현세자를 일시 귀국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청은 세자의 비중을 크게 생각했다. 청은 구체적으로 인평대군과 원손을 만주의 봉황성에서 맞바꾸자고 제의했는데 조선은 이를 거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청의 구왕 다이곤과 질가왕은 소현세자를 위로하기 위한 송별연을 열어주었고, 인조 18년 2월 12일에는 청 황제 태종도 직접 송별연을 열어주었다. 이 자리에는 봉림대군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태종을 만나기 전 뜰 안에서 용골대가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흥망룡의를 주면서 입으라고 했다. 이를 본 세자는 깜짝 놀라하며 사양했다.

 

"이것은 국왕이 입는 장복입니다."

 

용골대가 세자의 사양하는 뜻을 전하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대흥망룡의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파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조선으로 전해졌다. 세자 빈객 신득연이 이 상황을 자세히 적어 인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명이 자신을 폐하고 광해군을 세우지 않을까 의심했던 것처럼, 청이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세우지 않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세자는 청 태종의 송별연 다음날 심양을 떠나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 인조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었으나, 인조의 마음은 싸늘했다.

 

인조는 노정路程 밖에서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 관원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의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주청도 거부했다. 인조는 세자를 맞이하는 모든 의식을 폐지시켜 버렸다. "4년 만에 돌아오는 세자의 행차가 어떤 일인데 이렇게 간략하게 한단 말입니까"라고 호소하는 대간들의 청도 거부했다.

 

다만 인조 18년 3월 7일 한양에 도착한 세자가 부복하며 눈물을 흘리자, 인조도 눈물을 흘리며 맞기는 했다. 세자의 눈물이 기폭제가 되어 인조는 물론이고 대신들도 눈물을 흘려 조정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세자를 감시하러 따라온 청의 오목도가 이를 저지하자 인조가 말했다.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으므로 슬퍼서 저절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의 눈물을 직접 대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의심도 부정父情에 녹은 것일까?

 

세자는 그해 4월 2일 다시 청나라로 떠났다. 심양에는 꿈에도 그리워했던 원손 석철이 있다는 사실이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심양에 도착한 세자에게 청의 범문장이 그해 6월말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원손도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자. 세자가 "날씨가 몹시 덥고 아이가 병이 있으니 서늘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출발시키려고 합니다."라고 말렸던 것은 부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범문정은 황제께서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니 시기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비운의 세자와 원손은 이국의 수도 심양에서 부자간의 정을 나눌 사이도 없었다. 청에서 조선에 군사 징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해 1월에는 전 판서 김상헌과 전 지평 조한영 등이 목에 철쇄를 매고 두 손이 결박된 채 심양에 끌려와 심문을 받게 되어 세자는 쉴 틈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인조 21년에는 전 정승 이경여와 선조의 부마인 동양위 신익성, 그리고 전 판서 이명한 등이 심양에 끌려와 목에 칼을 차고 두 손이 결박된 채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세자는 조선 편에 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볼모 신분인 세자의 역할은 한계가 있어서 조선인이 죽어갈 때마다 세자 또한 한탄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왕 인조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인조 21년 10월 역관 정명수가 청이 세자를 귀국시키려 한다고 전하자, 인조는 처와 세자가 결탁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인조가 세자 귀국 문제를 비변사 당사에게 논의하자, 정태화는 "청에서 먼저 말을 꺼냈는데 우리가 청하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의심할 것"이라면서 받아들일 것을 주청한다. 이처럼 세자의 귀국을 두고 근심하는 데서 이미 세자를 보는 인조와 조신들의 마음이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청에 대한 인조의 대답은 이렇다.

 

"청인淸人이 내게 입조를 요구한 것은 전한(청 태종)때부터였으나 내가 병이 있다고 이해시켰기 때문에 저들이 강요하지 못하였다. 듣건대 구왕은 나이가 젊고 강퍅하다고 하니 그 속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난날에는 세자를 지나치게 박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게 대하니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인조는 구왕 다이곤과 세자가 결탁해 자신을 볼모로 불러들이고 세자를 조선의 국왕으로 봉할 것을 우려했다. 인조의 이런 의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신하들이 아니었다. 심열이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니 신하가 어찌 감히 우러러 세자의 귀국을 청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리고 다음달 심양에서 온 중관을 만난 뒤 인조의 의혹은 더욱 커진다.

 

"세자가 아무리 빨리 돌아오고 싶어도 우리의 인마人馬가 들어가야 나올 수 있을 것인데 역관 정명수의 말을 전해 들으니 세자가 돌아올 시기가 가까운 듯하다. 이처럼 빨리 나올려 하는 것은 내 추측이 허망한 소리가 아니라면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인조가 염려하는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란 자신을 폐위시키고 세자가 즉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뜻을 알아차린 감자점이 답했다 .

 

"성상은 항상 이를 염려하시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세자께서 나온 뒤에 만약 뜻밖의 변이 있다면 군신 상하가 어찌 손을 묶어 두고 그들이 하는 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청에서 인조를 폐위하고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군신 상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으니, 인조의 불안감을 정확히 읽은 것이었다. 청이 인조를 폐하고 세자를 세우려 한다는 생각은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의 의심일 뿐이었다.

 

청은 원손을 비롯해 세자의 여러 아들들을 청으로 부른 후 만주의 봉황성에서 세자와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이번 귀국은 세자빈 강씨의 부친인 영중추부사 강석기가 인조 21년(1643년) 6월 사망했는데 세자빈이 아직 곡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청한 것이었으므로 세자 부부가 동행했다. 세자와 세자빈은 인조 22년 1월 초하루, 자신들 대신 볼모로 들어온 원손과 아들들을 봉황성에서 만났다. 아들들을 볼모로 잡고 곡을 하러 떠하는 상황이니 눈물의 상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의 만남을 감시하던 청나라 사람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볼모생활 중에서 부친이 사망하여 곡도 하지 못한 세자빈의 한은 컸다. 그러나 원손과 다른 아들들을 볼모로 남겨두고 귀국한 세자빈은 부친의 빈소에 곡을 할 수가 없었다. 인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조는 곡을 하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달려온 며느리의 빈소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왕의 이 가혹한 조치에 삼공이 모두 "세자빈의 돌아갈 기일이 임박했는데 어버이를 살펴보았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라며 세자빈 강씨의 빈소행을 허락해달라고 청했으나 인조는 거부했다. 삼공은 거듭 청했다.

 

"세자께서 귀국을 청할 때 세자빈의 부친은 죽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이유로 삼았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펴보는 절차가 없이 돌아가면 저쪽 나라가 그 말을 들을 때 반드시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빈 강씨는 끝내 빈소에 곡도 하지 못하고, 병중인 모친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조 22년 2월 초순의 일이었다.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실

 

인조의 이런 처사는 많은 사대부들의 불만을 샀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 인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것을 반정 명분으로 삼은 인조가, 며느리 강씨의 왕곡往哭을 막은 것은 심각한 자기 부정이었다.

 

며느리 강빈의 왕곡을 끝내 허락하지 않은 인조의 처사로 인해 급기야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주모자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청원부원군 심기원이란 데서 당시 사대부들의 감정을 알 수 있다.

 

끝내 세자빈의 왕곡을 허락하지 않은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의 심양으로 되돌아갈 때 환관 김언겸을 딸려 보냈다. 김언겸은 인조가 세자부부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간자, 측 첩보원이었다. 친아버지 인조는 이처럼 세자 부부를 의심해 간자까지 딸려 보냈으나 세자는 배웅 나온 심기원과 김류, 홍서봉, 조창원 등 여러 부원군들에게 인조의 병을 옆에서 보살피지 못하는 심정과 이역에 머물러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여 듣는 이의 눈물을 훔치게 하였다.

 

바로 그 이틀 후인 인조 22년 3월 21일 부사직 황익과 오국별장 이원로 등이 청원부원군 심기원, 전지사 이일원, 광주 부윤 권억 등이 모반하려 한다고 고변했다. 고변자 황익이 전하는 심기원의 말은 이렇다.

 

"주상이 반정한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상황으로 추존하고 세자에게 전위하게 하고 싶어 내 집의 재산을 털어 은 수천냥을 마련하고 역사를 모집하여 지성으로 대접했는데, 내 소원은 오로지 강상을 부식하자는데 있는 것이다. 지난번 세자가 심양에서 나왔을 때 전위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아무리 세자를 받들어 세우더라도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실행하지 않고 회은군을 추대하려 한다."

 

또 심기원과 함께 정형正刑(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당한 초관 정형은 심기원의 종질 권두형 형제의 말을 전했다.

 

"숙주께서 명나라 배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그들과 합세해 심양과 끊으려고 하지만, 세자는 본디 원대한 계획이 없고 주상도 원수를 갚을 길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22일 거사한 후에 상에게 왕자 중에 합당한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하고 상왕으로 높인 다음 정예포수 5만명을 거느리고 심양을 쓸어버린다면 어찌 남자의 사업이 아니겠는가."

 

즉 이들은 세자가 귀국했을 때 거사를 일으켜 인조를 상왕으로 내쫓은 후 북벌을 단행하려 했으나, 소현세자를 추대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발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인조의 처사는 의외이다. 인조는 여러 신하들이 다 심기원을 정형하라고 청하는데도 사사賜死를 고집하다가 허락하였으며, 그 시신은 8도에 돌리지 말고 가족에게 내주어 장사지내게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덕인은 정형하지 않고 사사하고 재산도 적몰하지 않았다. 역모 사건의 주범에 대한 처사치고는 매우 온건했다. 또한 심기원과 권억, 정형, 이일원, 이지룡, 이권, 김즙, 권두창 등 관련자들을 정형한 후, 그해 4월 1일 명정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대적인 사면조치를 내린다. 이 또한 이례적인 거조가 아닐수 없다.

 

인조로서는 반정 일등공신인 자신을 폐하고 세자나 회은군을 옹립하려 한 사건을 확대해 좋을 것이 없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렇지 않아도 인심을 잃은 인조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자신을 추대하려는 사건으로 옥사가 벌어지는 동안 조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이런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청의 구왕을 따라 북경에 가야했다. 그 해 4월 이자성 군대를 산해관에서 격파함으로서 중원 정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청은 중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데려간 것이다.

 

세자는 이렇듯 동아시아 정세를 놓고 자웅이 일척을 겨루는 역사적 현장의 한가운데 있었으므로, 국내의 추대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세자는 북경에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아담 샬과의 만남

 

그 해 5월, 하루 평균 120-30리 길을 달리는 청군과 함께 북경으로 향한 세자는 구왕이 이끄는 청군이 파죽지세로 북경을 손에 넣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청이 북경을 차지한 것은 대세가 이미 청에게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북경에 도착한 세자는 문연각이라 불리던 명 목종의 부마 후씨 집에 가서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 20여 일 만에 심양으로 되돌아왔다가, 그 해 9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다시 북경에 들어가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소현세자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세례를 받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다. 1628년 32번째 예수회 신부로서 북경 옹안문 내에 거주한 아담 샬은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역서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아 명나라 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청 세조는 북경 점령 후 그의 과학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으로 삼고 대청시헌력을 짓게 하였다. 아담 샬은 북경 남문인 선무문 내에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세운 남천주당에 자주 머물렀는데, 소현세자는 아담 샬의 거주지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이 벽안의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 숙소인 문연각은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운 동화문 안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오가면서 우정을 쌓았다.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와의 만남은 조선에 천주교를 전교할 수 있는 호기였고,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서양 문명과 천주교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머나먼 이국 땅으로 자청해서 온 푸른 눈의 선교사와 불모로 잡혀 온 불행한 세자의 남다른 처지가 이색적인 감화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 만남을 지켜봤던 당시 남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순치 원년에 조선 국왕 인조의 세자는 북경에 볼모로 와서 아담 샬 신부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에 대해서 살펴 물었다. 샬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를 찾아가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깊이 사귀었다.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임을 말하였는데 제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며 자세히 물었다. 세자가 귀국하자 샬 신부는 자신이 지은 천문, 산학, 천주교서적 여러 가지와 여지구, 천주상을 선물로 보냈다."

 

선물을 받은 소현세자는 곧 아담 샬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중 몇권의 책을 보았는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이렇듯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준 만남"에 감사하고 있었다.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한 때는 서기 1644년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개국하가 232년 전으로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한 때보다도 211년 앞섰다. 소현세자의 이 개방적인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만남이었던 것이다. 9년간 볼모 생활을 소현세자의 사고를 이처럼 개방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세자는 아담 샬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아담 샬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담 샬은 신부 대신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이방송, 장삼외, 유중림, 곡풍 등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마 임진왜란 때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땅을 밟은 이래 최초로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1644년 11월 1일 청 세조는 북경의 천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선포했다. 자신이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 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 달 11일 구왕은 용골대를 시켜 세자가 꿈에도 그리던 말을 전했다.

 

"북경을 얻기 이전에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피차가 서로를 신의로써 믿어야 할 것이다. 또 세자는 동국의 왕세자로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의당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비운의 귀국길

 

드디어 길고 긴 볼모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청에서 세자를 귀국시키는 이유는 구왕의 말대로 ‘북경을 얻어 대사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세자를 붙잡아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기쁨에 앞서 다음과 같이 우려하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청이 세자를 돌려보내는 이 조치가 참으로 좋은 뜻에서 나왔고 딴마음은 없는 것인가?"

 

대신들은 모두 다른 염려는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조에게 세자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귀국하는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조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채 9년 간 품어왔던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 귀국은 이전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돌아오는 것이었다. 인조 23년 2월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심양에 잡혀 갔던 세자는 30대 중반의 연부연강한 나이로 귀국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타국에서 볼모로 보낸 34세의 비운의 왕세자였다. 세자는 이제 자신의 비운이 끝나는 알았다. 그러나 비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비운은 9년간의 볼모생활을 지혜롭게 보낸데서 시작되었다. 세자는 치욕의 볼모 기간을 새로운 국제 정세와 사상, 그리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체화시키는 기간으로 삼았다. 명나라를 죽도록 사모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깨달았고, 성리학 이념 체계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도 깨달았다. 세상에는 성리학뿐 아니라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리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가지고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머리 속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고 싶은 꿈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조선은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상상못할 비극의 현장이었다.

 

비극의 조짐은 인조가 귀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를 막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부왕 인조는 명나라가 멸망했기에 더 이상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합리적 사고는 멀리 하고, 세자의 귀국 자체를 그저 의혹의 눈초리로만 바라보았다. 세자가 휴대한 수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들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랑캐에게 성리학 정신을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소현세자가 귀국 두 달 만에 병석에 누운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인조의 냉담한 반응에 깊이 상심한 것이 병으로 연결될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이외에 인조나 후궁 조씨의 외부적 작용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귀국한 해 4월 23일 세자가 병석에 누운 이유는 학질이었다. 이미 장성한 세자에게 학질은 그다지 큰 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세자의 학질을 치료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의 이형익이 바로 세자 독살설의 한가운데 위치한 인물이다. 이형익은 열을 내리게 한다며 발병 다음날부터 침을 놓았는데, 침을 맞은 세자가 3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한 나라의 세자가 학질에 걸렸는데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침만 맞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귀국한 해 4월 26일의 일이다.

 

인조에게 쏠린 의혹들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 9년을 살다가 귀국한 세자가 학질에 쓰러질 리는 없다는 것이 식자들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세자가 독살되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혹은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집중되었다. 이형익이 어의로 특채된 배경에도 의혹이 일었다. 이형익은 원래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이었는데, 소용 조씨의 추천으로 어의가 되었다. 그가 어의로 특채된 것은 불과 3개월 전이었다. 그의 특채 시점이 세자의 귀국 시점과 일치하고, 그의 특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소용 조씨가 세자 및 세자빈과 알력 관계에 있다는 점을 모르는 궁중 사람은 없엇다 .특히 소용 조씨와 세자빈 강씨와의 알력관계는 외부에 알려질 정도로 심각했다 .당연히 이형익과 소용 조씨가 세자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인조는 시종일관 이형익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자 사람들은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됐다. 왕이나 세자가 승하하면 시의들은 잘못의 유무를 더나 국문하는 것이 관례였다. 소현세자같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의혹이 있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양사에서 이형익을 탄핵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왕세자의 증후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악화되어 끝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뭇사람이 모두 의원들의 진찰이 밝지 못했고 침 놓고 약 쓴 것이 적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의원 이형익은 사람됨이 망령되어 허탄한 의술을 스스로 믿어서 세자의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나 침만 놓았으니 그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양사의 이런 당연한 주청에 인조는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국문할 것 없다"고 답했다. 양사에서 재차 국문을 청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시종일관 이형익을 옹호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관련되었다는 유력한 증거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양사는 물론 산림의 송준길까지 나서서 이형익을 처형하라고 주청했으나 인조는 요지부동 이형익 편만 들었다.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자에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조실록>에 적힌 세자의 시신상태, 즉 시신이 까맣게 변하거나 얼굴의 눈, 코, 귀 등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의 시신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 목격담은 소현세자의 생모인 인열왕후의 서제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내척의 자격으로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세자의 시신 상태에 의혹을 품고 한 말이었다.

 

심지어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기 위해 승정원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는 상소를 받아들이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당시 이형익의 처형을 가장 강도 높게 주장했던 김광현은 척화파 김상용의 아들이자,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라는 시를 지으며 청에 끌려갔던 김상헌의 조카였다. 그러니 그의 집안에서는 당연히 모든 문서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고 인조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김광현이 이형익을 처형하라고 극력 논박하자, 인조는 세자빈 강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세자빈 강씨, 즉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의 장인이기도 했던 김광현은 훗날 강빈의 옥사가 발생하자 아무 죄도 없이 이조참판에서 순천 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인조가 세자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은 장례절차에서도 나타난다. 인조는 세자의 시신을 담은 관의 명칭에 임금의 관을 뜻하는 ‘재궁’이란 호칭을 못 쓰게 하고, 대신, 대부나 일반 사서들이 쓰던 ‘널 구’ 자를 쓰도록 했다. 세자시강원의 보덕 서상리, 필선 안시현 등이 반발하고 나선 것처럼, 세자는 살아서는 동궁, 죽어서는 빈궁이 되므로 재궁이라 쓰는 것이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조는 무덤의 이름에도 ‘원’자 대신에 ‘묘’자를 쓰도록 했다. ‘원’자는 태자묘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태자만 쓸 수 있다는 논리였으나, 황제의 무덤을 일컫는 ‘능’자를 역대 임금의 무덤에 써왔다는 점에서 이 또한 명분없는 억지였다.

 

상복 착용 기간도 마찬가지였다. 고례에 따르면 장자長子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는 것이 예법에 맞았다. 그러나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 등 서인 중신들은 인조와 왕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정해 올렸다. 그 자체로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인조는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법易月法을 적용해 12일 만에 복제를 마치려고 하다가 한 등급 더 감해 7일만에 마쳤다. 1년을 입어야할 복제를 1주일 만에 벗어버린 것이다.

 

또한 인조는 재최 1년복을 입어야 할 백관의 복제를 3개월 단상短喪으로 결정했다. 옥당에서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지평 송준길이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섰다. 송준길은 인조와 강빈, 그리고 원손은 참최 3년복을 입고 중전은 재최 3년복을 입어야 하며 신하들은 기년복으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유신이 사직하면 만류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송준길의 상소에 아무런 답은 없이 그를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인조는 이처럼 소현세자의 장례마저 야박하게 대했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소현세자 후사 문제였다.

 

원손元孫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당시 원손으로 불리던 소현세자 맏아들 석철이 소현세자의 뒤를 이을 것인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소현세자를 모셨던 세자시강원의 관료인 필선 안시현은 "원손을 세손으로 세우자"는 상소를 올리면서, 세자의 상에 사부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강빈을 조문하여 위로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했다. 세자의 사부 즉, 영의정과 좌의정은 인조의 마음이 강빈에게서 떠난 것을 알고 위문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위태로운 정황 때문에 세자궁의 관원들이 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갖고, 서둘러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하자고 주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안시현의 당연한 상소를 즉각 물리치면서 “이런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며 파직시켜 버렸다. 그러나 안시현은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상소를 올려 원손을 세손으로 정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조참의 조석윤도 안시현과 송준길의 상소는 나라를 걱정하는 강직한 언론인데도 모두 배척하였으니 뭇사람의 마음에 어찌 의심이 없겠는가라고 비판할 정도로 소현세자와 강빈, 원손에 대한 인조의 대접은 법도에 어긋난 것이었다.

 

원손에게 뒤를 잇게 하지 않으려는 인조의 속셈은 소현제자가 급서한지 석 달 후인 재위 23년 윤6월 2일에 드러난다. 인조는 대신 및 정부의 당상 육경, 판윤과 양사의 판서 16명이 모인 자리에서 선언을 한다.

 

"내게 오래 묵은 병이 있는데 원손이 저렇게 미약하니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는 원손이 아닌 다른 인물, 즉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이자 조정을 흔들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판단은 법과 원칙에 따르는 것이었다. 법과 원칙에 따르면 원손이 세손가 되어야 했으므로 당연히 반대가 잇따랐다. 좌의정 홍서봉이 나섰다.

 

“옛 역사를 상고해보면 태자가 없으면 태손이 뒤를 이었으니 이것이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常道를 어기도 권도權道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

영중부추사 심열, 판중추부사 이경여 등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인조는 영의정 김류를 끌어들였다.

 

"이 일은 오로지 영상에게 달려 있으니, 경이 결단하라."

 

후사를 정하는 일은 영의정의 권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인조와 반정 주역 김류 간에 밀약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류는 미리 계획한 대로 세조의 둘째 아들로 보위를 이은 예종과, 덕종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를 이은 것을 예로 들었다. 둘째 아들이 보위를 이은 예를 듦으로써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려는 인조의 의중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우찬성 이덕형, 병조판서 구인후, 공조판서 이시백, 이조판서 이경석 등 양심적 관료들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부제학 이목과 대사간 여이징도 "상도를 지켜야 한다"며 가세했다.

 

김류를 끌어들였음에도 대다수 신하들이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자 인조가 화를 냈다.

 

"이 일은 반드시 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들이 이렇게 평범한 말만 하고 있으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경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낙흥부원군 김자점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성상의 깊고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의당 속히 결정해야 할 일인데, 어찌 우물쭈물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조가 기뻐하며 말한다.

 

"그 말이 옳다.“

 

이어 김류가 김자점과 한편임을 실토한다.

 

"지금 신민들의 기대가 모두 원손에게 있는데도 전하께서 이러시는 것은 반드시 바깥 사람이 알 수 없는 궁금한 일입니다. 그러니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경의 뜻이 완전히 나와 부합된다."

 

그러나 실학의 시조인 원손의 사부 김육이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원손이 아직 어려서 덕망을 잃은 것이 없습니다."

 

잘못이 없는 원손을 어떻게 폐할 수 있느냐는 당연한 항변이었다. 그러자 다시 김류가 나선다.

 

"상께서 만일 분명한 전교를 내리신다면 당장 결단할 수 있습니다." 빨리 결심하라는 재촉에 인조가 화답했다.

 

"원손이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 원손 사부 이식이 반대했다.

 

"진강進講할 때 보니 원손의 재기가 뛰어났습니다."

 

사부가 원손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반박하자 인조는 말을 돌린다.

 

"한낱 재질의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좌의정 홍서봉이 인조에게 떠넘겼다.

 

"신이 계달하는 것도 상도입니다. 권도를 쓰는 것은 성상께 달려 있습니다."

 

종법이나 예법에 어긋나는 권도, 즉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후사로 삼으려면 자신들을 끌어들이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매우 분노해 얼굴이 발개졌다. 이경여가 다시 나섰다.

 

"지금 성상의 하교는 원소의 현명함을 언급하지 않고 나이만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덕을 성취하고 나라를 보전한 사람 또한 한둘이 아닌데, 어찌 나이 어린 것 때문에 원손을 함부로 폐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상도를 뒤엎고 권도를 행해야 종사가 보존된다면 신 또한 상도만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열이 아뢰었다.

 

"세자가 이미 졸하였으면 뒤를 이를 사람은 원손인데, 국본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마디로 당장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찬성 이덕형이 강력하게 반대하지 못하는 여러 신하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오늘 성상께서 비록 종사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지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미 바로잡힌 원손의 명호를 바꾸려고 하시는데, 뭇 신하들이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버린다면 당차 저런 신하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인조가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대신들의 뜻이 모두 일치하였는가?"

 

김류가 대답했다.

 

"이의가 없는 듯합니다."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자는 말이었다. 인조가 물었다.

 

"자식이 둘이 남아 있으니 대신이 그 중에 나은 사람을 결정하라."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중에서 고르라는 말이었다. 신하들보고 다음 왕이 될 사람을 고르라는 하교에 홍서봉이 아뢰었다.

 

"대군은 조신들과 접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우열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상의 간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다 용렬하니 취하고 버릴 것도 없다. 나는 그 중에 장자를 세우고자 하는데 어떤가?"

 

김류가 맞장구쳤다.

 

"장자로 적통을 세우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노라."

 

이에 원손 석철이 폐위되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원손의 자리를 대군으로 바꾸는 데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나라 사람들이 후사로 믿고 있던 원손을 폐한다면, 그 다음 원손의 목숨까지 빼앗을 것이 분명했다.

 

효종과 현종 연간에 벌어졌던 예송논쟁이 단순히 상복 착용 기간을 둘러싼 이론 논쟁이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을 묻는 예각의 정치 논쟁이었던 이유도, 바로 이 종법을 무시한 인조의 후사 책봉에 있었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를 적통은 봉림대군이 아니라 원손 석철이었다. 소현세자처럼 성인이 된 후 죽었을 경우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인조가 무리해가며 봉림대군을 후사로 결정했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효종의 승통이 정당한 것이냐는 극도로 민감한 정치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세자 일가의 비극

 

원손의 지위를 빼앗은 것으로도 세자 일가에 대한 인조의 분노는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이제 남편을 잃고 상심해 있는 며느리 강빈을 향했다.

 

인조는 강빈이 청고 결탁해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즉위시키려 했다고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세자가 죽은 후에도 강빈이 청과 결탁해 자신을 내몰고 원손을 즉위시킬수 있다고 의심했다.

 

인조는 저주 사건을 벌여 강빈을 제거하려 했다. 원손이 폐립된지 약 2달 후인 인조 23년 8월말,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각되어 2명의 궁녀가 하옥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원손의 보모 최상궁이었다. 인형과 조류 따위를 마당이나 베갯속 등에 묻어두고 상대방에게 화가 내릴 것을 비는 이 저주 사건은, 그 성격상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고문에 의한 자백을 인정하는 관례를 이용해 강빈을 얽어 넣으려고 두 궁녀를 심하게 고문했으나, 두 궁녀는 조작된 혐의를 시인하지 않고 죽음을 택함으로써 강빈을 보호했다. 그러자 인조는 강빈의 오라비를 귀양 보내는 등 친정을 치죄하여 손발을 묶은 다음 다시 저주 사건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강비의 궁녀 2명이 연루되었으나 이들 역시 조작된 자백을 거부하고 죽어갔다.

 

그러나 인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조 24년 정월에는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오른 사건이 발생했다. 인조는 이번에도 강빈에게 혐의를 돌려 궁인들을 하옥해 국문하고 강빈은 후언 별당에 감금했다. 인조의 수하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강빈이 독을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조가 이미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는 엄명을 내려 강빈의 수족을 완전히 묶어놓은 상태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도 인조의 자작극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강빈의 궁녀인 정렬과 유덕이 하옥되어 압슬(무릎 위에 무거운 돌을 얹히는 고문)과 낙형(인두로 지지는 형벌)같은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들도 조작된 각본을 시인하지 않고 죽어갔다 이렇듯 연일 무고한 궁녀들이 죽어감에도 인조는 며느리의 목숨을 끊으려는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전복구이에 독을 넣은 사건도 오리무중에 빠지자 인조는 비망기를 내린다. 그런데 그 비망기의 내용을 보면 인조 자신이 소현세자를 죽인 범인이며 저주 사건과 독약 사건을 자작했음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 적의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지난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으로 시끄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본다면 흉한 물건을 파놓아 저주하고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옛부터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나 없었겠는가마는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라."

 

강빈이 역적이라는 이 비망기는 그러나 인조 자신이 모든 비극의 주범임을 실토하는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자신의 죄가 비망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잊은 것이다.

 

신하들은 당연히 강빈이 무죄라고 생각했으므로, 역적죄로 품의해 올리라는 인조의 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인조는 위기의식을 조장했다. 병조판서를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김자점을 호위청에 입직시켰으며 포도대장에게 궁궐을 엄중히 경비하라고 명했다. 인조는 이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강빈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사헌 홍무적이 강경히 반대했다.

 

"강빈을 폐위시킬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강빈을 죽이고자 하신다면 먼저 신을 죽인 다음에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강빈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드디어 인조는 재위 24년 2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명을 거두어달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끝내 자신에 의해 과부가 된 며느리마저 죽였다.

 

강빈은 결국 사저로 쫓겨난 후 사약을 마셨고 교명, 죽책 등은 거두어 불태워졌다.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에게도 죄를 씌워 장살시켰다.

 

소현세자에 이어 강빈마저 세상을 떠났으나, 세자 일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강빈을 죽인 인조는 이전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강빈을 지키던 궁녀들은 이제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결국 고문자의 의도에 굴복하고 강빈의 이름을 댔다.

 

인조는 이를 구실로 이 사건을 강빈의 친정어머나와 강빈의 세 아들, 즉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손자이기도 한 어린아이들에게 확대시켰다. 인조는 안사돈이었던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하고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에 유배 보냈다.

 

이들의 유배지를 정하라는 인조의 명을 받은 의금부는 석출은 제주에, 둘째 석린은 정의현에, 그리고 석견은 대정에 유배하자고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거부했다.

 

"한 곳에 정배하여 서로 의지해서 살도록 하되 내관과 별장 등을 교대로 지정해 보내 외부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세 고을에 유배된 사대부는 모두 다른 섬으로 옮겨 정배하라."

 

당시 제주에는 "강빈을 죽이려면 나를 먼저 죽이라"고 격렬하게 반발했던 전 대사헌 홍무적이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홍무적은 이에 남해현으로 옮겨졌으며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해 귀양갔던 이경여도 북쪽 변경으로 옮겨졌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임금이 되어야 했던 석철은 인조 25년 7월, 12세의 어린 나이에 죄수의 몸으로 제주에 도착했다. 이날 사관은 인조의 이런 처사를 개탄하는 글을 <인조실록>에 덧붙였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만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가 독한 안개와 풍토병이 있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져 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석철은 다음해 9월 제주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석철의 일은 내가 매우 놀라고 슬프게 여기고 있다. 중관을 내려 보내 그의 시신을 호송해 아비 곁에 장사지내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날의 사관은 인조를 직법 비난하고 있다.

 

"석철이 역강逆姜의 아들이기는 하나 성상의 손자가 아닌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풍토병이 있는 제주도에 귀양보내 결국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곁에 장사 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인조실록>은 석철의 죽음을 풍토병 때문이라고 기록했으나 당시 지각 있는 사람들은 인조가 석철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석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인조는, 청에서 석철을 키운 후 자신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의 사신들이 돌아갈 때 소현세자의 묘에 들어 참배하는 등 소현세자의 죽음을 슬퍼했으므로 인조는 석철을 더욱 두려워했다. 비록 석철이 독살이 아닌 풍토병으로 죽었다 해도, 이는 어린 손자를 사지로 몰아넣은 인조에 의한 타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둘째 아들 석린도 석달 후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진 인조는, 그 책임을 나인 옥진에게 돌려 여러차례 고문해 죽여 버렸다. 석철과 석린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옥진은 두 아이가 죽은 것은 토질 탓이지 보양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고 반발했으나, 인조에게 필요한 것은 두 손자의 죽음에 쏠린 안팎의 의혹을 돌릴 희생양이었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었다. 강빈은 억울하게 죽은 지 8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숙종 44년(1718년)에 이르러 복위 선시宣諡되었다.

 

조선의 좌절, 소현세자의 좌절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조선의 꿈과 좌절이었다. 소현세자가 순조롭게 즉위하여 청국에서 익힌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정사를 펼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조의 쿠데타로 야기된 그 모든 국난들은 긍정되고 오히려 옥동자를 낳기 위한 산고로 받아 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와 반정의 주역들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원손마저 제거함으로써 소현세자의 꿈은 사라졌다. 조선을 개혁의 나라, 개방의 나라로 만들려던 이상은, 사랑하는 아내 강빈, 그리고 아들들과 함께 차디찬 땅 속으로 묻히고 만 것이다.

 

소현세자가 데려온 천주교 신자인 청나라 환관들은 청나라 사신과 함께 돌아갔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청나라 환관들이 돌아감으로써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주자학 유일사상의 나라로 남았다. 이후 조선의 그 밀폐된 공간과 정지된 시간을 채운 것은 인조반정의 후예들인 소중화주의자들의 사대주의와 예학이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