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
집에서 읍내 초등학교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1,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이옥준 선생님이셨다. 어머니는 곰소 외삼촌이 보내 준 말린 조기를 보자기에 싸, 내 손에 들려 선생님께 갖다주시곤 했다.
3학년, 신혜경 선생님은 아름다운 도회지 여성이셨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 내 왼손가락에 굵은 핏줄이 밖으로 튀어 나오는 증상이 생겨 9일간 결석하고, 정읍 초승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치료를 마치고 어머니를 따라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선생님은 하얀 송편을 내 왔는데, 달콤한 설탕물이 톡 튀어나오는 송편이었다.
5학년 담임은 국민교육헌장을 가사로 동요를 작곡하여 전교 학생에게 보급시킨 선생님이었다.
6학년이 되어 반 편성하던 날, 5학년 담임선생님이 날 강당으로 불렀다.
선생님은 강당에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굵은 생나무 가지로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나무가지가 부러지면 다시 새 나무가지를 집어들고 쉴 새 없이 때렸다. 나중엔 화를 이기지 못한 듯 욕설을 퍼부우며 등, 허리, 어깨 등 닥치는대로 후려쳤다.
나는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몽롱한 채 강당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져 있는 나에게 이후로도 한참동안 매질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 지,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늦은 오후, 기운을 차려보니 눈물이 말라붙어 눈이 끈적거리고, 종아리, 등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빨간 매질 자국에 군데군데 터지고 긁힌 곳에는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어둠이 깔릴 무렵, 어머니가 동네 애들 몇과 함께 오셨다. 어머니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서러워 했다. 터진 종아리를 쓸어내리며, 설움섞인 작은 목소리로 ‘어서 집에 가자’ 며 내 작은 손을 끌었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내 등을 찬찬히 살피며 눈물을 보이셨다.
'아이고 이넘아 어쩌다 이러께 맞었냐..먼 짓을 히깐디 이 지경이여..'
서러워 나도 울었다. 태어나서 가장 서러운 날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수없이 매질을 당한 나는 다음날 아침 가고싶지 않은 학교를 억지로 갔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 욕을 해서 맞은 거라는 수군거림을 들었다. 내가 언제 선생님께 욕을 했는 지 기억나지 않았다.
6학년 담임께서 나를 불러 ‘너 선생님께 욕했냐?’ 물으시더니, 잠시 있다가 ‘아무 생각 말고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 되면 돼.’ 라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께 욕설을 할만큼 불량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다. 공부도 웬만큼 하는 편으로 우등상도 몇 번 탔었다.
후에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나를 미워했는지 시기했는지 여학생 몇 명이 선생님께 없는 말을 해 댄 것이었다. 지금도 그 학생들 이름과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이 나 어쩌다 졸업사진을 볼 때면 씁쓸해진다.
고등학생이 되어 정읍으로 통학하던 어느 날, 버스 차창 밖으로 건너편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5학년 담임선생님을 보았다. 성내면 등계마을 입구였다. 순간 눈을 의심했으나 그 후로도 계속 그 곳에 서 계신 선생님을 보았다. 반대 방향이었으니 아마 그 때까지도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 재직 중이었거나 아니면 고창 어느 학교에 재직 중이었던 것 같다.
고 1이 아직은 어린 나이였을까.. 미움과 증오보다는 또 맞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어느 날엔 갑자기 건너 편 내가 탄 차에 올라 다가와 멱살을 잡고 또 후려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일었다. 고 3학년이 되면서 두려움이 가셨다.
통학하던 3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정류장에 서 계신 선생님을 봤으니 한번 쯤은 나를 봤을 것이다. 어느 땐 분명 나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한데 무표정이었고, 어느 땐 미묘한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살아계시는 지, 우연이라도 한 번 뵙게 된다면 한번은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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