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찬 비평은 설교 살린다> 서평 글
박득훈/언덕교회 목사
정용섭 목사의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를 읽는 내내 기대와 설렘이 내 마음 한 구석에 흐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설교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점점 넓어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로운 길을 힘겹게 걸어가다 말동무의 차원을 넘어 동지 의식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날 때 찾아오는 그런 흐뭇함을 맛보는 것도 참 즐거웠다.
속이 꽉 찬 설교 비평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한마디로 굳이 표현하자면 ‘속이 꽉 찬 설교 비평’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자신 <뉴스앤조이> 지상을 통해 몇 번에 걸쳐 설교 비평을 해 보면서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설교 비평가는 첫째, 비평의 대상을 최대한 정확히 하고 이해하고 예리하게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일단은 대상자의 설교를 최대한 많이 읽어야 한다. 설교의 핵심과 주변을 나눠보고 일관성을 점검해야 한다. 설교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다양한 선이해(先理解)와 신학적 관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비평의 대상을 평가할 수 있는 일관된 신학적·목회적 안목과 깊이가 있어야 한다. 자기가 먼저 깨닫고 경험한 만큼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탁월한 설교자들을 과감히 비평할 만한 신학적·목회적 안목과 깊이를 갖추는 것이 실로 만만한 일이 아니다.
셋째, 진정한 글 솜씨가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형편에서 설교 비평은 당사자와 당사자 교회 성도들에게는 물론 제3자에게도 그렇게 달가운 것이 아니다. 굳게 닫힌 방어벽을 뚫고 들어가려면 글의 표현 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비판 대상자를 향한 애정과 존중심이 담겨져 있어야 하고 설득력 있는 필치가 필요하다. 풍부한 어휘력과 쉬우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표현력, 앞뒤가 잘 맞게 이어져 가는 일관성과 논리성은 기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평 대상이 누구든지 개의치 않고 해야 할 말을 반드시 할 수 있는 용기와 배포가 필요하다. 여기엔 때로 자신의 오류가 나중에 발견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그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는 것도 포함된다. 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이 속이 꽉 찼다고 평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 면에서 모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론 정 목사의 설교 비평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평 대상자에 대한 정중함과 사랑을 놓치지 않다가도 정말 답답하다고 느낄 땐, 표현이 좀 과해지고 격해지는 경우도 조금씩은 엿보인다. 비평 대상 설교에 대한 정 목사의 이해와 분석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살짝 스쳐 지나가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결정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정 목사 자신의 신학적·목회적 지평이 얼마나 올바르고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용섭 목사의 신학적·목회적 지평
정 목사가 꼭 짚어주지는 않았지만 그의 지평에 의거해 비교적 꽉 찬 설교로 평가된 설교는 김기석, 박종화, 이재철, 임영수 목사의 설교다.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론 그 중에서도 박종화 목사의 설교에 가장 많은 점수를 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평가를 가능케 하는 정 목사의 신학적·목회적 지평은 일관성이 있지만 한 군데 집약되어 있지는 않다. 각각 다른 성격을 띠고 있는 설교를 생동감 있게 비평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분산되어 있는 그의 신학적·목회적 지평을 종합해보고 전적으로 동의되지 않는 부분에 대하여는 나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려 보는 것도 독자들의 책읽기에 도움이 될 듯싶다.
첫째,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깊이 파고 들어가 그 드넓고 하염없이 깊은 진리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면 설교는 자연히 당연히 다른 것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만의 신비한 경험의 절대화, 영웅적 혹은 일상적 삶에서 발견되는 깨달음에의 집착, 선동적 메시지, 감성적 호소 등이 바로 그것이고 그런 설교가 속 빈 설교다.
둘째, 성서를 제대로 해석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정 목사는 아쉽게도 그 해석학적 역량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좀더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지 않고 있다. 다만 성서는 종말론적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할 하나님의 구원론적 언어 사건으로써 이미 완료된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다음에는 그것이 형성된 역사를 초월하여 자신의 길을 간다고 말한다. 그 신비롭고 새로운 길은 해석학적 관점이 풍부한 사람에 의해서 열리게 된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박종화 목사를 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평가 기준이 다분히 주관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학적 관점이 옳은 관점인지에 대한 좀더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논증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해석학적 관점을 찾아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존 밀뱅크가 말한 것처럼 신학을 신학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모색해 가는 과정에서 신학은 갈수록 더욱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력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개인의 영성보다 교회 전체의 역사를 통해서 축적되어 온 영성이 더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조금 우려가 생긴다. 개인의 주관적 영성 못지않게 때로는 교회의 전통적 영성도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예전과 교회력에 대한 지나친 신봉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인다.
넷째,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이는 엘리트주의적 냄새를 피우기 때문에 오해되기 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성서를 해석해서 가르쳐야 하는 지도자들에겐 반드시 필요한 소양이다. 성경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보면 정식 교육 과정을 거친 것과는 상관없이 그러한 안목이 있었던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안목이 있어야 성서를 영혼과 개인의 관점에서만 풀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들의 전인격적인 삶, 사회 그리고 역사에 연결시킬 때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영적 현실성(reality)인 생명과 역사의 신비에 깊이 침잠하여 깨달은 바를 전달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변화를 촉구하는 것보다 중요시 여기고 우선적으로 앞세워야 한다. 정 목사는 성서가 요청하는 변혁적 삶에는 부차적 의미만을 부여한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면 도덕적 삶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렇다면 엄격히 말해서 성도의 실천적 삶에 대하여 강조하는 성서의 많은 부분들은 불필요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도덕주의적 요소를 경계하다 반대 방향으로 너무 나간 듯한 느낌이다. 예배와 송영 그리고 실천적 삶은 하나의 실체이지 가치나 순서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교 비평의 당위성
정 목사는 책의 머리글에서 설교 비평이 한국교회에 덕이 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노라고 고백한다. 아울러 설교 비평작업이 객관적으로 평가될만한 담론의 장이 형성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비쳤다. 그 바람을 공유하는 마음으로 부족한 대로 설교 비평의 당위성과 그 유익에 대한 나의 소회를 간략하게 밝힘으로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비평 받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없을 것이다. 설교자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허물과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래도 그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새로운 차원의 희열과 만족을 자연스럽게 맛보게 된다. 또 그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똑같은 허물과 잘못을 다른 사람이 지적하고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자존심이 상해 매우 아플 뿐 아니라 자기를 방어하고 해명하고 싶은 공격적 충동까지 느끼게 된다. 하물며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전혀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을 비평 받을 때에야 그 심정이 어떠랴! 하여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자신의 오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하려고 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한 자기 성찰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진리와 자신을 만족스러울 정도로 온전히 통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진리를 독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을 여러 명이 나눠 쓰게 된 것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더 잘 이해될 수 있지 않겠는가? 성경을 읽을 때도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면 매우 위험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의 가장 기본 원칙 중에 하나인 ‘전체를 통해 부분을 보고, 그리고 부분을 통해 다시 전체를 보라’는 원칙을 변증법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적용해나가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저자들이 계시를 통해 받은 진리조차도 장차 얼굴을 맛 대고 보듯이 보게 될 온전한 진리에 비하면 고대의 부정확한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아직은 희미한 것이다.(고전 13: 12) 그렇다면 그러한 성경의 해석자에 불과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얼마나 겸손해야하겠는가? 설교자는 실로 다른 사람의 비평에 귀를 활짝 열 수 있는 겸허한 용기가 필요하다.
설교 비평의 유익
사도행전 15장을 잘 살펴보면 설교 비평의 유익을 명확하게 유추해낼 수 있다. 초대 교회가 할례 문제로 말미암아 위기에 봉착했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소위 해외파는 할례무용론을 주장했다. 반면에 열두 사도와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국내파는 반대로 할례유용론, 할례필수론에 기울어져 있었다. 신학의 핵심인 구원론에 해당한 논쟁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교회가 두 쪽이 날만한 위기 상황이었다. 이들은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위기를 아름답게 극복했다. 각자의 신학적 이해와 역사적 경험을 공론의 장에 내놓았다. 그리고 서로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이를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야고보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는 요구하지 말되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행 15: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고보가 독단적으로 혹은 권위주의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단순히 ‘자기의 의견’으로 피력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그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새로운 차원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하여 그러한 결정의 주체로 ‘성령과 우리’를 나란히 소개하였다.
성령은 오늘도 다양한 설교자들과 설교 비평가들의 상호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풍성하고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건전하고 꽉 찬 설교 비평은 설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살리는 것이다. 왜곡되거나 잘못된 설교 비평은 최대한 자제되어야겠지만 그것도 그렇게 염려할 바는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악의적인 비판과 곡해 그리고 억압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처럼 꽉 찬 설교와 그 설교에 담긴 진리는 그런 불건전한 비평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해석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앤쏘니 씨쓸톤은 해석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로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 비움’(de-centering of the self before the cross)을 제시했다. 이는 바울처럼 십자가의 도를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실체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자기를 절대적인 위치에서 내려놓는 자세를 말한다. 이는 자기 해석이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렇게 판명될 때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세다. 모든 설교자들이 그런 자세로 건전한 설교 비평에 대하여 마음을 활짝 연다면 한국교회의 설교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설교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베뢰아 성도들처럼 스스로 설교 비평가가 되어 설교 내용이 진리인가를 검증하기 위해 성서 텍스트의 세계로 깊이 들어갈 수 있길 바란다.(행 17:11) 그래서 설교 비평이 고약한 흠집잡기나 교회 강단 파괴 행위로 폄훼되지 않고 오히려 설교와 교회를 살리는 소중한 사역으로 자연스럽게 잡아갈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선동적이고 기복적이고 도덕적이고 모호한 속빈 설교가 판을 치는 시대가 사라지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적 실체로 꽉 찬 설교가 승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기독교사상 200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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