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섭 박사의 설교 비평에 대한 의견>
설교비평, 멀지만 가야할 길 /민영진 박사
교회에 공헌
1. 정성이 놀랍다.
단순히 설교 한 편을 놓고서 설교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집이 몇 권이든 그것을 가능한 한 다 읽는다. 설교자의 설교가 담겨져 있는 인터넷 동영상이나 비디오테이프나 녹음테이프가 있으면 그것을 다 보거나 듣는다. 설교 텍스트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으면 그것을 다 참고한다. 심지어 비평하려고 하는 설교자의 연출 언행 몸짓에서부터 그의 이력, 신학적 배경, 목회활동, 그가 섬기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관찰까지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간행물을 통하여 이런 설교비평을 할 경우 그는 거의 매달 그에게 주어진 시간과 정력을 오로지 한 설교자 관찰에만 다 쏟았을 것 같다. 이런 비평은 평자(評者 설교비평을 수행하는 이, 이 책의 저자)로서는 자기의 삶을 다 바치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작업일 터인데 속된 말로 그의 수고와 희생을 고려하여 연구비를 계산한다면 정상급 프로 선수의 연봉은 지불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만한 대우가 없었을 터이니, 아니 대우는 고사하고, 평자가 비평하는 설교자들로부터 또는 그 설교자들의 청중들로부터 평자 스스로가 미리 받아버리는 심리적 부담 또한 지독한 억압으로 체험되었을 것이니 그의 이런 노작을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수년 동안 줄곧 성실하게 해 왔고 또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성이 놀랍다고 하는 것이다.
2. 비평과 치유가 함께 있다.
설교비평에서 다루어진 설교자들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객관적이면서, 정중하고 진지한 때로는 비장한 설교비평을, 때로는 화가 날 만큼 솔직한 비평을, 그것도 일반 상식 수준에서가 아니라 그 설교자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한 전문 관찰자의 평을 듣게 된다. 아마도 이런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한 편으로는 어떤 지적에 대해서 억울하기도 하고 불쾌한 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자신들의 설교에 대하여, 비록 만족할 만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처럼 성실하게 비평하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설교비평에 오른 이들은 쓴 소리와 단 소리를 둘 다 듣게 된다. 설교자가 지닌 창조성은 마음껏 살리고 그가 빠진 늪은 도저히 거기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신랄하게 지적한다. 설교비평에서 받는 전체적인 인상은 평자가 늘 건설적인 비평을 하고, 설교비평의 대상이 된 이들이 그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들의 설교가 더 발전할 것 같다는 확신을 주는 면이 많았다. 비평을 받은 이들은 비록 가혹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고마운 것은 비평에 애정이 있고, 인신공격 같은 저급한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비평을 함께 읽어가는 독자들, 특히설교자들은 같은 동역자들의 설교가 받는 비평을 그대로 자기의 설교를 향한 비평으로 얼마든지 활용하여 자신들의 설교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용기 있는 비평이다.
어떤 설교에 대해서는 과감히 그것이 “불량품”이라고, “반(反)복음적”이라고, 심지어는 “사기(詐欺)”이고, “사이비(似而非)”라고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설마 그러랴” 하겠지만 설교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제시하는 평자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이 설교비평은 평자나 비평을 받는 이나 다 같이 처음부터 실명(實名)을 사용하였다. 이 연재물이 매달 나가기를 세 해째 하고 있는 줄 아는데,그동안 어떤 해당자들이 발행인이나 평자에게 무슨 명예훼손 같은 것을 법적으로 문제 삼는 일이 없었는지 걱정할 만큼 매회 치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자 자신이 한 때 말했듯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피하고, 공연한 덕담으로 지면을 매울 생각을 말며, 고담준론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진리와 자유의 영에 사로잡혀 이 비평의 항해를 시작하려 한다.”는 약속을비교적 충실하게 지켰다. 평자는 일반적으로 설교자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적한다. 장점이 장황하게 지적될 때는 뒤에 가서 반드시 그것을 상쇄할 것 같은 단점 지적이 쏟아진다. 비평의 대상이 되는 설교자들은 따가운 지적에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독자들은 그런 설교자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그처럼 유익하고 건설적인 모니터링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종교개혁의 힘을 지녔다.
설교비평은 결국 그 설교를 하는 이들과 듣는 이들의 영성까지 비평하게 되는데,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무시하고 복음의 이름으로 인간의 탐욕을 합법화하는 결과를 빚는 설교자나, 그것을 즐기는 청중들에 대한 어떤 지적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이런 종류의 설교비평이 지닌, 종교개혁까지 유도할 수 있는 폭발력과 파괴력을 감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라도 이런 종류의 설교비평은, 설교자만 다르고 지적 내용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설교가 계속되는 한 지속적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평자 자신은 자기의 설교비평이 당랑거철(螳螂拒轍)일뿐이라고 개탄하기도 하지만 그의 평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설교를 반성하는 일반 설교자들은 이미 조용히 개혁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5. 설교비평의 방법과 비평 용어를 개발하였다.
한 편의 설교를 놓고, 혹은 한 설교자의 설교를 놓고 비평할 때, 요점을 지적하여 나타내 주는 개념들을 평자는 개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에세이식 설교”, “나열식 설교”, “강해설교”, “정치설교”, “교회력의 실종”, “침묵하는 텍스트” “설교의 여운” “복음의 훼손” “종교버라이어티 쇼”, “반(反)복음”, ...... 이런 용어들은 좀더 정리가 되고 정의(定義)가 되면, 설교비평학의 전문용어로도 널리 활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
6. 설교비평의 한 장르를 형성했다. 평자가 설교비평의 여기저기에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하게 보여주는 풍부한 신학적 유산, 성서 본문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穿鑿)의 열정, 세계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 등이 존경스럽다. 설교비평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의 복음이해, 영성 이해, 우리 설교자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모범적인 설교의 방향 등이 이미 우리의 평자에게서 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여러 특징들이 있기에 “설교비평, 멀지만 가야할 길”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비평의 장르를 형성했고 공헌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7. 독자는 평자의 고백적 진술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비평의 대상이 된 설교자들에게서뿐만 아니라 평자 자신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자가 다른 이들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자신도 송두리째 독자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고백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할 때보다는 문제가 되는 설교자의 설교비평을 할 때, 그것이 왜 기독교의 설교일 수 없는지, 왜 복음적 설교일 수가 없는지를 비판할 때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과정에서 평자는 자신이 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소중한 지혜와 지식을 독자들에게 거저 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비평의 질곡(桎梏)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설교비평이 개척해 가야할 수많은 소로(小路)들이 거대한 숲 속에 있음을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8. 기대되는 효과.
앞으로도 우리의 평자가 한국교회의 수많은 설교자들을 위해 이런 설교비평을 지치지 말고 해주기를 바란다. 필자가 기독교 계통 TV 방송을 시청하면서 확인 것으로, 대중 설교자 중 영향력이 큰 한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에 대한 우리 평자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적받은 사항에 대하여 변명을 하기는 하지만 바뀌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이 반가웠다. 설교의 질은 설교자의 깨달음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마치 지혜처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혜, 그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에게 잠깐씩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설교비평이 줄곧 계속되어 비평 받는 설교자나 그 비평을 읽는 독자인 설교자들이 함께 큰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기를 평자에게 바란다. 평자는 한국교회 실천신학 특히 설교학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평자에게 우리 모두 박수를 보낸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비평을 통해서 자신들의 설교를 반성하고 발전시키고 강단의 품위를 높일 수 있다면, 거기에서 진리와 자유의 영이 역사할 수 있다면, 평자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앞으로의 과제
1. 설교자비평과 설교비평.
지금까지 나온 평자의 설교비평 양식을 보면 독립된 한 작품으로서의 한 편 설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개 설교자의 설교 전반을 비평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달랑 한 편의 설교를 비평하는 것으로서는 부족할 것이다. 비평받는 그 설교자의 생애가 요약되기도 하고, 한 편의 설교가 아닌 그의 어떤 한 기간 동안의 설교들이 평자에 의해 발췌되면서 그 아무개의 신학이 그의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설교비평의 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자로서 아무개의 설교의 경향을 밝히는 평은 될 수 있어도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매 설교 하나 하나의 본격 설교비평과는 다르다. 이러한 “설교자비평”은 그것대로 또 하나의 중요한 영역이 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설교비평”은 이런 경지까지 갈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독자들로서는, 특히 설교자들인 독자들로서는, 다른 이들의 설교가 어떤 청중들에게 어떤 기회에 어떻게 선포되는지, 한 편으로 끝나는 그 한 설교를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2. 평자가 지적하는 일관성 결여.
설교자들이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선 저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한 설교자를 상대로 하여, 설교의 일관성 결여를 지적한 평자의 비평은 옳다. 때로는 단 한 편의 설교 안에서도 일관성이 결여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설교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선포한 설교들, 같은 기간에 했다 하더라도 청중과 상황이 다른 설교들을, 평자가 종횡으로 비교하면서 신학의 일관성, 진술의 일관성, 성서해석의 일관성 등을 검토하게 된다면, 이것은 설교자가 서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맞물린 상황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에 너그럽지 못한 평자의 엄밀한 척도 때문이다. 한 설교자가 한 곳에서 한 말을 다른 곳에서 달리 말한 것을 비평하는 것은, 단순 비교에서 상충과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기보다는 그 배경에 대한 다양한 요인들을 분석하여 설교비평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보는 것도 설교비평의 영역을 넓히고 깊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평자가 지적한 문제가 되는 설교자들 중에는 자신들의강단을 떠나서, 청중이 바뀔 때는, 설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설교자의 설교인 것처럼 바뀌기도 한다. 그럴 경우 당신의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해놓고 여기 와서는 왜 이렇게 말하느냐 따지지 말고, 그 바뀐 설교 그 자체만 가지고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해 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메시지의 내용이 바뀌는 것은 일반 설교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그 요인의 복잡성과 다양성, 타당성과 기만성 등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청중, 다른 상황에서 같은 메시지라도 달리 포장을 하는 설교자의 심리 같은 것도 분석하여 비판하거나 격려하거나, 그 설교자의 열린 가능성을 지적하거나 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3. 기독교의 본질.
이것은 축소되지 말고 확대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평자는 자주 복음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을 말할 때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로 돌아가서 그 최초의 것을 조명하려고 한다.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그가 자주 말하는 복음의 "해석"은 복음의 본질이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확대 해석이나 확대 적용을 허용한다. 타종교와의 차별성도 중요하지만, 종교적 공통 현상이라고 하여 반드시 비순수이거나 비복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종교학적으로 보면 기독교도 한 종교인데 타종교와의 공통점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평자가 지적하는 것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교회가 의료 상담 봉사 등을 포함한 사회사업에 몰두하는 것은 한 눈팔기가 아닌가 하고 묻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교회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별하지 못한다.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라오스 같은 공산국가의 교회들이 사회봉사에 치중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보려 하는 것은 사이비 구원이 아니라 그들로서는 하나님나라의 선포의 중요한 한 방식이다.
4. 설교비평의 기준.
설교는 정의할 수는 있어도 어떤 정의가 지배적일 수는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비평하는 평자에게는 적어도 기독교의 설교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평자에게도 그런 설교비평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의 그러한 기준 설정은 필요하고 옳다고 본다. 그러니까 설교가 그러한 기준에서 빗나갈 때는 비평이 신랄할 수 있고, 듣는 이들을 설득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이 설교의 다양한 형태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설교가 그의 기준에서 빗나간 것과 같이 취급될 위험도 없지 않다. 그런 교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설교를 비평할 때는 그런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이런 연구가 다 설교비평의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비평은, 복음적이다 아니다 하는 가치판단 이전에, 설교의 다양한 형태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그 다양성의 배경을 밝혀줄 의무가 있다. 기독교적이냐 비기독교적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역시 독자 의 몫으로 넘겨도 된다.
5. 평자의 몫과 독자의 몫.
진리를 향한 외골수 정도(正道)를 고집하는 평자가 어떤 설교자의 일관성 결여를 지적하는 것은 여전히 옳다. 평자는 이 점에 있어서 존경받아 마당하다. 다만, 어떤 설교자가 사이비 목사나 설교자가 아니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복음을 훼손하려고 예수의 추종자 탈을 쓰고 강단을 점령한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라면, 그가 하는 설교가 모순 덩어리이고, 때로는 평자가 이해한 복음에 반하는 설교로 들릴지라도, 언표(言表)된 말들을 끌어 모아 그것을 재편집하여 일관성 결여를 독자 앞에 폭로하면 독자들은 그것이 그의 설교의 전부인 줄 알고, 그 설교자의 신실을 의심하게 되고, 그만큼 그 설교자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설교자이든 회중이든 다 사람이다. “설교비평”에서는 개별 설교를 비평하고 설교자 비평을 하지말자고 하는 것은 비평자와 독자의 몫을 구별하고, 설교 비평의 본 영역을 설교로 한정짓자는 말이다.
6. 외국인 설교자와 한국인 설교자의 비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와 한 개인 김 아무개 박 아무개의 강해 설교의 비교일 뿐이다. 영국 강해설교와 한국 강해설교의 우열이 여기에서 가려져서는 안 된다. 왜 그 유명한 영국 설교자의 전문적인 강해설교를 도저히 그와는 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한국의 여러 일반 강해설교자들의 설교에 비교하여 한국교회를 폄(貶)하는가? 차라리 거꾸로 한국의 모범적인 강해 설교와 영국의 저질 강해 설교를 비교하여 국위를 선양하는 시합은 어떤가? 그러나 평자로서도 그러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강해설교와 조직신학의 결합이 필요한 마당도 있고, 강해설교와 한국문화 사이의 상호작용이 필요한 마당도 있지 않은가! 성서 속의 신비한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조직신학적이기보다 시적일 수도 있다. 설교자가 무장하여야 할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하지만 조직신학 신드롬이 가져오는 소모적인 논쟁도 두렵다. 평자는 그가 높게 평가한 한 설교자의 설교에서 조직신학적 주제를 지루하게 다룬 것이 있는데, 자칫 한가한 신학논쟁이 될 수도 있다.
7. 숨은 설교자들의 모범적 설교.
인물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설교비평이 극소수의 유명 설교자만을 다루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한계가 있다. 하나는 자칫 이 설교자들의 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 설교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어떤 전제를 은연중 독자에게 가지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더 많은 교회, 더 많은 강단의 설교자들은 한국교회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는 단 한 편도 읽거나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이들 스타 설교자들 외에도 얼마나 더 많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청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간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이들 좋은 설교가 더욱 좋은 설교가 되기 위한 비평의 대상이 못 되는가 하는 아쉬움이다. 설교자들 중에는 목숨을 걸고 설교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 동역자들은 잘 안다. 자신들이 그러하기 때문에 다른 설교자들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유추해서 알 수도 있다. 토요일 밤을 뜬 눈으로 새우는 설교자들, 같은 설교를 수없이 반복하는 초청 설교자들보다는 매주일 새로운 메시지를 준비하느라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설교자들, 평자는 그들에게도 “주님께서 무슨 말씀이 계셨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8. 설교 자료 비평.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라는 것이 어디 모범적인 것이 하나 딱 있어서 누구나 그것만 그대로 전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설교자들은 알고 있다. 여러 교단들이 목회자들을 위해 교회력에 따른 설교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 해의 설교를 한꺼번에 제공하거나 월별 혹은 계절별로 설교를 제공하기도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 못지않게 이런 설교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이 이러한 설교 자료가 설교비평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 사상, 200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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