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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설교평

<반론> 나의 설교에 대한 정용섭 박사의 비평을 앍고/송기득 주간

by 싯딤 2009. 11. 28.

나의 설교에 대한 정 용섭 박사의 비평,
「사람다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읽고서

설교는 사람다운 삶을 겨냥해야

송기득 /<신학비평>주간

1. 정용섭 박사의 대견한 설교비평
내가 『기독교사상』에서 빼놓지 않고 읽는 글이 있다. 정용섭 박사의 설교비평이다. 우선 정 박사의 글이 좋다. 깔끔하고 날카롭고 명석하고 조리 있는 글 솜씨에 매료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비평 상대의 설교가 지닌 내용과 특징을 잘 밝혀내고, 그 설교의 문제점을 제대로 꼬집어서, 아주 건전하고 진지하게 평가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것은 가히 천재적이라 할만하다. 비평의 주제를 붙이는 것도 비상하다. “열린 교회, 닫힌 하느님”과 같은 주제가 그렇다.
또한 나는 정 박사의 성실성과 진정성에 놀란다.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설교자의 설교 수십 편씩을 꼼꼼하게 읽고서 진지하게 비평하는 자세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설교를 비평하는 것 자체를 못 마땅히 여기는 풍토에서, ‘내노라’하는 대가들의 설교를 ‘속 빈 설교’라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예언자의 의식이 없이는 못하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객기나 용기에 걸친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꽉 찬 설교’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없이는 그런 설교비평에 뛰어들기 어렵다. 설교비평은 단순히 “멀지만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 ‘하느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기를 바라는 진리 사랑의 마음과 열정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정 박사는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정 박사가 대견하고 존경스러운 것이다.
언제인가『기상』에서 열었던 세미나에서 발표한 다른 분들의 설교비평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이의 비평은 ‘비평’이 아니라, 숫제 ‘변호’이거나 ‘칭찬’이었고, 심지어 그 설교자의 명성을 추켜세우기조차 했다. 비평하는 패널 가운데는 신학교수들도 끼어 있었다. ‘자리’의 위험을 느껴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속 빈 설교’에 공감해서 그랬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신학한다’는 사람들이 그처럼 비판의식이 없어서야 어떻게 학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 박사야말로 설교에 대해 비평다운 비평을 했다고 여겨진다. 이번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펴낸 설교비평,『속 빈 설교, 꽉 찬 설교』에 실린 것들이 이 사실을 잘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아는 목사들에게이 책 읽기를 권한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설교를 깊이 성찰해서 제발 ‘속 빈 설교’를 하지 말았으면 해서다.
차제에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우리나라 모든 신학교에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신학과에「설교비평학」이 정규과목으로 개설되었으면 한다. 설교를 어떻게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비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정 박사의 설교비평에서 똑똑히 보았다. 진정한 비평이란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니라, ‘알 찬 설교’, ‘씨알 먹는 설교’를 위한 비평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 ‘속 빈 설교’가 수두룩한 것은 설교한다는 목사들이 신학교에 다닐 적에 설교비평학과 같은 과목을 듣지 못한 탓이 아니었을까? 정 박사가 꼬집었듯이, 이른바 ‘잘 나간다’는 목사들의 설교를 보기로 들어, 그 잘잘못을 낱낱이 짚어간다면, 그 강의를 들은 학생은 나중에 설교자로서 강단에 섰을 때, 적어도 ‘속 빈 설교’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교비평에는 반드시 설교비평의 원리가 미리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비평은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정 박사에게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라는 책을 낸 데 대해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하루라도 빨리『설교비평의 원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고 부탁했다. 정 박사는 머지않아 이런 책을 쓸 것으로 기대한다. 어쩌면 그것은 설교비평가로서 그의 책무인지 모른다. 남의 설교를 ‘속 빈 설교’니, ‘꽉 찬 설교’니 하고 진단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비평의 바탕은 밝혀주어야 마땅하다.
사실 이미 그는 자신의 설교비평의 원리를 그의 여러 설교비평에서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눈여겨보면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신학적으로 체계화될 때 비평의 원리는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나는 지난해에 정 박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정 목사님은 무엇을 어떻게 설교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 분은 친절하게도「당신 설교는 어떤데?」라는 주제로써 자신의 설교비평 원리를 뚜렷하게 밝혀주었다.(『신학비평』2006 봄호, 통권 20) 이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새롭게 정리하면 될 것으로 여긴다.

2. 설교비평의 다양성과 보편성
설교비평의 원리는 비평자가 서 있는 신학의 자리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근본주의신학의 자리에 선 설교자는 ‘근본주의신학’이 설교비평의 관점이 될 터이고, 신전통주의신학의 자리에 선 설교자는 ‘신전통주의신학’이 설교비평의 관점이 될 터이고, 민중신학[정치신학, 해방신학]의 자리에 선 설교자는 ‘민중신학’[정치신학, 해방신학]이 설교비평의 관점이 될 터이다. 보수신학자는 보수신학의 자리에서, 진보주의신학자는 진보신학의 자리에서 설교를 비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교신학 안에 국한하지 않는다. 설교비평은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쩌면 그리스도교 밖에서 하는 설교비평이 더 바른 비평이 될 수 있다.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탈[비]그리스도교의 사상가는 그리스도교 밖에 서서 설교를 비평할 것인데, 한번 그리스도교를 거친 사람의 설교비평은 더욱 무게를 지닐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설교비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살이의 길을 여는 데 보다 알찬 것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사회적 휴머니즘’과 같은 사상의 자리에서 하는 설교비평이다. 사람다운 삶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라면, 설교가 어찌 그리스도교의 독점물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설교가 어찌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삶의 진리란 사람의 궁극적 관심이므로, 모든 종교를 넘어서 추구될 수있다. 그래서 설교비평은 비록 그리스도교의 설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설교를 비평하는 눈과 잣대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거기에 따라서 설교비평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관점의 설정은 그만큼 중요하다 할 것이다. 비록 그 관점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거기에 충실하면 그 설교비평은 적어도 일관성은 견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비단 엉터리 설교라고 해도 그 설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자기정체성’을 간직한다면, 그 설교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리라.

3. 설교는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해석을 겨냥해야
그리스도교의 설교란, 그리스도교의 기본 되는 메시지(복음)가 무엇인가를 밝히고, 그 메시지(복음)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해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메시지의 ‘해설’과 ‘해석’이 설교의 두 기둥이란 말이다. 그리스도교의 기본 되는 메시지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명제로 모아진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교회]의 설교는 우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고, 그 예수가 어째서 그리스도가 되는지 그 까닭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까닭을 밝히려면 먼저 예수는 누구이며, ‘그리스도’는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밝혀진 예수와 그리스도는 어떻게 연관되는지 말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메시지를 설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설교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설교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메시지의 참뜻이 밝혀지면, 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해석해야 한다. 이 때야 비로소 설교는 완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 오늘을 사는, 아니 살아내야 하는 우리에게는 더 절실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구실은 결코 떼어질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해석은 기껏해야 일반 교양강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오늘의 해석을 저버린 설교는 훌륭한 성서강의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오늘을 사는 데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메시지의 해설과 해석, 이 둘의 상관관계를 놓치면 설교는 절뚝발이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위에서 내가 말한 설교의 구실은 그대로 신학의 구실이다. 설교의 구실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알짬을 밝히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풀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신학이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설교와 신학의 구실은 근본에서 하나인 셈이다. 그 차이는 그 표현의 방식이 다르다는 데 있을 뿐이다. 신학은 그것을 ‘이론의 자리’에서 수행하고, 설교는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수행한다. 신학하는 사람은 설교해야 할 메시지의 이론적인 바탕을 제공하고, 설교하는 사람은 그 메시지를 삶의 현장에서 풀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학과 설교는 뗄 내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신학과 설교의 밀접한 관계를 굳이 칸트 투로 말하면, (반드시 적절한 말은 아니지만) “신학 없는 설교는 공허하고, 설교 없는 신학은 맹목적이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신학과 설교 가운데서 설교에 보다 큰 비중을 둔다. 설교야말로 ‘신학의 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살이의 현장에서 살아 있지 않는다면, 다른 말로 해서 말씀이 설교로서 육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갓 이론이나 공론에 그칠 공산이 크다. 모든 이론이 삶의 현장에서 ‘진리’로서 검증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이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일은 우선 설교자의 몫이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거는 기대는 그 이상이다. 설교하는 사람은 ‘온 몸으로써’ 설교해야 한다. ‘온 몸’이란, 말과 행동이 하나를 이루는 경지를 일컫는다. 아무리 이론이 정연한 설교를 했다 하여도, 설교자의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면, 그의 ‘말씀’(설교)은 씨알먹지 않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설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설교한다는 사람 가운데는, 자신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윽박지르는 경우가 뜻밖에 많다. 이것은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느님 행세를 하려는 ‘휘브리스’(hybris, 자만)의 극치이다.

4. 정 박사의 ‘성령론적 설교해석’
정 박사는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나의 설교이해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나는 정 박사의 설교론이나 설고비평론을 아직 읽지 못했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부탁을 받고 써준 글,「당신 설교는 어떤데?」에 나타난 그의 설교이해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 글은 그의 설교이해의 한 가닥만을 드러내고 있을 터이지만, 나는 거기에 나타난 그의 설교의 본질이해를 짚어보기로 하겠다.
정 박사는 먼저 자신의 존재가 막막하고 어두운 상황에서 설교할 수밖에 없는 곤혹스러움을 전제한다. 존재의 막막함은 사람 사이의 소통이 부재하다는 데 그 심각성이 더한다. 그는 텍스트 앞에 설 때 두려움을 경험한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두려움은 텍스트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에 관한 것이다.”(비평 34쪽) 이들의 삶을 곧장 알 수 없는 소외감, 이것이 설교자로서 그가 느끼는 엄연한 실존이다.
그래서 그는 “당신은 무엇을 설교하는데?”라는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을 ‘성서 텍스트의 지평 속으로’(비평 35쪽) 인도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청중과 텍스트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 설교자로서 그가 선택한 길이다.(비평 36) 그러기에 그는 다만 텍스트 안에 있는 ‘영의 현실[실재]’를 향해 손가락질이라도 하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여느 설교자들 마냥 성서를 근사하게 해석해서 청중들에게 감동을 줌으로써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심하지 않는다. “설교자들이 아무리 삶의 변화를 외쳐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법”(비평 36쪽)이라는 게 그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 삶의 변화 가능성을, “성령의 존재론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에” 기대한다.
그가 이와 같은 소극적인 태도를 지닌 것은,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활동하신 생명의 영인 성령만이 성서를 읽는 오늘의 우리에게 성서 텍스트의 내막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비평 37쪽) 설교는 설교자가 주관하기보다는 성령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성령의 활동과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성령론적 설교’라고 이름 짓는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설교 시간에 성령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텍스트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효과적인 성서비평학은 물론, 사람살이의 자리를 심층/중층적으로 읽으려는 인문학이나, 교회가 시대정신에서 자기 정체를 확립하려는 조직신학과 같은 학문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텍스트에 대한 학문적인 올바른 이해와 해석은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그에겐 그만큼 중요성을 가진다.
나는 이 대목에서 슬쩍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한 가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다. 설교하는 사람이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텍스트의 실체를 만날 수 있게끔 안내하려고 할 때 성령의 역사가 필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는 어찌 그리 더딘 것일까? 설교하는 사람이 자기 주관만을 내세운 바람에 성령이 외면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성령은 그런 설교자에게 설교를 맡기지 말거나, 아니면 설교자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런데 정 박사의 말대로, “설교자들이 아무리 삶의 변화를 외쳐도 사람은 변화하지 않는 법”이라면, 그 설교자가 ‘꽉 찬 설교’를 했을 때도 별로 소용이 닿지 않을 성 싶은데, 이 때에도 성령은 역사하지 않아서일까? 사람의 변화가 전적으로 성령의 몫이라면, 그 성령은 참으로 인색하기 짝이 없거나 아니면 무기력하다는 평가에서 자유스럽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은 삼가야 할 테지만, 나는 요즈음 설교자들이 걸핏하면 “성령을 받으라.”고 소리치면서 성령의 역사를 내세우는 데 질려서 한 마디 해본 것이다.
성령이란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힘과 의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사람은 자신의 영성을 통해서 그 힘과 의미를 만나는 것이다. 이 만남에서 사람은 삶의 힘을 얻고 삶의 의미를 깨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삶의 힘과 의미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을 적에, 그 하느님의 다른 이름은 다름 아닌 ‘성령’이다. 이 점에서 정 박사의 ‘생명이신 하느님’의 의미가 보다 뚜렷해진다. 그는 그의 성령론적 설교에서 생명과 성령의 관계를 따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데, 이 점에 유의했으면 한다.
그리고 정 박사는 설교자는 우선 청중을 텍스트의 지평으로 인도해서 그 실체와 만나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설교자는 청중들을 비록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서 그 실체를 체험하게 했다 할지라도, 설교자 자신은 거기에 담겨 있는 생명의 실체를 확실하게 붙잡았다고 자신할 수 없으며, 다만 설교자 자신이 텍스트의 지평에서 체험한 실체를 가리킬 뿐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 길을 열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텍스트에 담겨 있는 생명의 실체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바로 그 때문에 그 실체는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질문으로 다가올 뿐이다.”(비평 39쪽) 이 말은 나에게는 하나의 질문으로 다가온다. “‘종말론적으로’라는 것은 앞으로 올 것이므로 우리는 다만 그것을 종말의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인가?” 아마도 이 물음은 우문에 그칠 수도 있다. 정 박사가 종말의 현재화를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사가 이어지는 한, 텍스트의 실체에 대한 의미추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텍스트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있다. 설교자가 청중을 텍스트의 지평으로 인도해서 그 안에서 만나게 하는 텍스트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스도교의 자리에서 보면,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신앙고백이다. 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설교의 본분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 박사는 이 사실을 온갖 수사학을 동원해서 전달하는 데 힘을 쏟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미 대답은 주어졌으니까, 포장하는 일만 남아 있다는 투의 말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아마도 그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명제를 맹목적으로 설파하는 것이 마땅치 않는 모양이다. ‘예수’라는 말에 담긴 삶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면서, 그리고 ‘구원’이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 하면서, 예수를 구원자로 선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이해하고 해석한 역사적 과정에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마 이것은 처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했던 그 체험의 세계를 ‘추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정 박사는 말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하는 것을 무조건 ‘정답’으로 답습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른 그 과정을 다시 추적하고, 오늘 우리가 새로운 답을 찾는 게 중요하다.”(비평 40쪽) 그러나 처음 교회가 도달한 그리스도 고백의 과정을 추구하고 거기에 담겨 있는 오늘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마침내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하는 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모든 탐구과정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하기 위한 예비단계라고 보았을 때, 아무래도 강조의 초점은 예수의 그리스도성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작 정 박사는 설교의 실체를 ‘생명’에 있다고 말한다. “내가 설교해야 할 그 세계는 ‘생명’이다. 이것 말고는 내가 설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비평 41쪽) 그래서 그가 텍스트를 만난다는 것은 곧 생명과 만난다는 의미한다. 따라서 “가장 감동스러운 설교는 청중이 설교를 들은 다음에 생명에 대한 신비가, 그 다층적인 성격이 열리고, 그래서 놀라고 황홀해 하고, 하느님을 향해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설교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하느님을 향해서 드리는 doxology(영광의 노래)이다.”(비평 41쪽)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가리키고, 그 생명의 세계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태도를 알려주는 것을 자신의 설교행위라고 생각했다.
이 때 정 박사가 생각한 ‘생명’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생명 일반을 말하는 것은 물론, 사람의 ‘목숨’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생명과학이나 생태학의 대상으로서 생명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생명이란 사람의 경우 사람의 ‘목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의 외연(外延)을‘삶’으로 넓힌 것이다. ‘삶의 철학’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아니 정 박사가 말하는 생명은 사람의 삶을 함축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삶이 지니는 특징이 뜻있고 보람 있는 삶에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생명은 곧 사람답게 사는 삶을 아우른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생명을 그리스도교 설교의 주제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교의 법문에서도, 유가의 강론에서도, 베르그송이나 딜타이의 삶의 철학에서도, 니체와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삶의 깊은 뜻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설교를 훨씬 능가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계시가 어찌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국한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정 박사가 말하는 설교의 주제인 ‘생명’은, 그리스도교 설교의 핵심이라고 할 ‘케리그마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를 생명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다.”(14 : 6) 도대체 예수가 생명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를 통해서 죽을병을 고쳤다면, 아니면 예수를 통해서 절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안게 되었다면, 그리고 사람으로 대접 받게 되었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예수가 ‘생명’이 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곧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정 박사의 생명과 예수의 메시지가 연계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기본 메시지가 “하느님나라가 가까웠다”는 데 있다면, 그리고 그가 벌인 운동이 하느님나라운동이라면, 예수의 하느님 나라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뜻한다고 할 적에, 예수야말로 사람의 ‘생명’인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에게는 그 이상 가는 생명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도 이것과 상통한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을 적에, ‘영생’(영원한 생명)이란 사람이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인가 죽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영생이란 참되고 보람 있는 삶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사는 것 이상으로 영원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정 박사가 가리키는 ‘생명’은 ‘사람다운 삶’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사람다운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댄 예수와 연결지어본 것이다. 아니 그럴 경우에 ‘생명’은 그리스도교 설교의 알짜 주제가 된다.
그리고 정 박사에 따르면, 생명 세계의 신비는 성서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는 하느님 체험에 닿아 있다. 따라서 설교는 청중들에게 생명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절대적인 생명에 직면하라고 명령하는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왕도란 없는 것이므로, 설교자는 다만 어떤 절대적인 힘에 사로잡히기 위해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진짜 설교에는 설교자 자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텍스트와 그것이 열어가는 생명의 능력만이 지배해야 하는 설교여야 한다. 이때 비로소 설교자는 자유로워진다. 그는 이것을 ‘성령론적 설교’라는 말과 연계시킨다.
그러나 생명의 신비 체험, 유일한 하느님 체험은 반드시 성서를 통해서만 가능한가? 오히려 성서의 신비는 자기초월을 내세우는 여느 신비주의사상보다도 훨씬 덜 신비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서는 본디 해석사(Geschichte)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그의 ‘성령론적 설교’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메시지와는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그의 설교론은 굳이 ‘그리스도교의 설교’에 국한할 필요가 없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처음 그리스도교가 ‘이단’으로 멀리했던 ‘영지주의적 설교론’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정 박사와 쌍벽을 이룰 만한 설교비평이, 진보적인 신학자 가운데서 나왔으면 한다. 아마도 그것은 정 박사의 ‘성령론적 설교’에 비해서 ‘예수론적 설교’라고 이름붙일 수도 있겠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서 ‘사람다움’의 구원 원리를 밝히는 설교라는 뜻에서 그렇다. 그랬을 적에 두 설교론이 지평융합을 이루어 한국교회의 설교를, 보다 알차고 꽉 찬 설교로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

5예수를 바탕으로 하는 나의 ‘인간화 설교’
이제 나는 정 박사가『기독교사상』(2007년 1월호)에서 나의 설교를 다룬 글,「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에 나타난 그의 평가에 대해서 몇 가지 짚어보기로 한다.
정 박사는 나를 가리켜 ‘사람다움을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그렸다. 나의 반생을 다룬 신앙평전,『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서』를 읽고서 그렇게 느낀 것이리라. 그는 나를 잘 보았다고 여긴다. 나는 사람다운 사람이 그립고 지금도 그 그리움은 한결 같다. 그래서인지 사람다운 사람으로 느껴지는 사람을 보면 눈시울을 적신다. 또한 나 자신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으며, 내 둘레에 있는 사람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서, 결핵요양소 “한산촌”의 일도 했고,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교회에서 설교도 했다. 지금도 그 일을 이어오고 있다. 때로는 사람이란 것에 실망하면서도, 처음 생각한 대로 사람은 ‘그냥 사람’이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아직껏 대학교 철학과에서조차「예수의 사회적 휴머니즘」을 강의하고 있으며, 그런 설교를 놓지 못하고 있다. 『신학비평』을 내는 것도 사실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사람다움의 중요성을 깨우치려는 데 본뜻이 있다.
나는 사람다움(인간화)을 나의 신학의 화두[주제]로 삼고 있다. 나의 모든 글이나 설교는 여기에 모아진다. 나의 신학논문모음, 이를테면『끝내 사람이고자』(1990)나 『사람다움과 신학하기』따위가 그렇고, 나의 세 권의 설교집 곧『예수와 인간화』(1989),『살며 믿으며 바라며』(1993),『사람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1998)가 모두 그렇다. 지금 나는 무엇을 말하든 역사의 예수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화를 말하고 있으며, 그 바탕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나의 신학을 ‘인간화신학’이라고 부른다. 내가 나의 신학을 ‘인간화신학’이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본뜻이 결국에는 사람다움의 실현을 겨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풀이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그 해설과 해석은 예수의 그리스도성으로 모아지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다움의 전거’(paradigm)를 역사의 예수에게서 찾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화운동의 추동자란 의미에서 내게 ‘그리스도’이다. 정 박사가 말한 대로, 이런 의미에서만 예수는 내게 ‘그리스도’인 것이다. 나는 ‘교회의 그리스도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인간화운동)은 철저한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에서 줄곧 일어난 인간화운동에서 예수의 운동은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져온다. 그는 전봉준의 동학농민항거에서, 문 익환의 통일운동에서, 모 택동이나 호치민이나 만델라의 해방운동에서 다시 살아났다. 특히 5.18 광주민중민주항쟁에서 예수는 ‘민중 자체’로 부활했다. 민중이 곧 예수였던 것이다. 아니 5.18의 민중은 이천 년 전의 예수를 능가한다. 역사의 변혁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오늘의 그리스도’이다.
정 박사는 내가 ‘사람다움의 회복’을 겨냥하고, 그 바탕으로서 ‘예수의 민중 당파성’을 내세우고, 아울러 그리스도교나 사회주의가 모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본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나의 인간화신학의 핵심을 잘 짚어서 평가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대척점에 선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삶과 구원을 설교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기상 2007년 1월호)고 말하면서도, 나와의 차이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어서 이제 나는 그 차이점의 핵심이 어디 있는가를 짚어보려 한다.
정 박사의 주제에서 드러난 대로, 그는 그 차이를 ‘복음화와 인간화’의 관계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굳이 맞세운다면 그는 ‘복음화’ 쪽이고, 나는 ‘인간화’ 쪽인 셈이다. 나의 신학이나 설교가 거의 ‘사람다움’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인간화’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복음화와 인간화를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에게서 참된 ‘복음’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다움 이상 가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의 절규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들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게 하라.” 이들을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이들에겐 참된 ‘복음’이다. 그렇다면 복음화와 인간화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복음화는 그리스도교의 언어이고, 인간화는 휴머니즘의 언어일 뿐이다.
정 박사가 복음화와 인간화를 나누어본 것은 한국교회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구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보수진영에서 내세운 복음화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데서 복음주의신학을 바탕으로 삼아 사람의 개인구원의 길을 열려는 입장인 듯하고, 진보진영에서 내세운 인간화는 ‘하느님의 선교’신학을 바탕으로 삼아 사람의 사회구원의 길을 열려는 입장인 듯하다. 한 때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의 논의가 있었는데, 이 논의가 얼마나 진부했던가를 알고 있다. 사회 없는 개인이 어디 있으며, 개인 없는 사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개인의 변화가 사회구조를 바꾸기는커녕, 도리어 개인은 사회구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으로 살려면, 사람을 억누르고 짓밟는 비인간적 사회의 구조악의 틀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에 개인의 구원은 인간화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고, 여기에서 복음의 참뜻이 매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유의할 게 있다. “예수를 믿으면 하늘나라에 간다.”는 투의 말을 정제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극우보수교회의 설교자들은 근본주의신학이나 그 신앙을 ‘복음주의’로 포장해서 교인들을 오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 그 자체를 농락하거나 모독하는 일이니, 삼가는 것이 좋겠다.
정 박사는 한국에서 사회구원과 인간화를 내세운 신학의 중심에 민중신학을 놓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신학 가운데서는민중신학이 ‘사회구원’ 쪽을 맡아 민중해방을 신학화했다. 그런데 정 박사는 민중신학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민중’에 대해서 폄훼하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에게는 그의 말마따나 민중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고 있지만, 민중을 사랑하는 쪽보다는 민중을 싫어하는 쪽이 더 강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조 용기 목사의 설교비평, 『민중에 대한 질문』에서 민중을 ‘욕망의 주체’로 보고, 자신의 영혼을 쉽게 파는 사람들로 규정하면서, 어째서 민중은 역사의 주체로 서지 못하느냐고 서슴없이 질타한다. 그리고 그는 “도대체 민중은 누구냐?”고 물으면서, 민중신학자는 여기에 대답하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그 심정을 넉넉히 이해한다. 70만이나 되는 ‘신자 민중’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조용기의 삼박자구원논리에 무릎을 꿇고서, 조 용기 목사의 정당성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서 정 박사는 같은 목사로서 화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런 민중에게서 “어떻게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기대한단 말인지, [민중신학자여] 대답하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정 박사는 한 가지 눈여겨볼 게 있다. 예수는 당시 사람으로 받들어지기는커녕 도리어 사람 아닌 ‘죄인’으로 취급받은 ‘무리’(ochlos) 곧 민중을 조금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예수는 민중을 못살게 굴었던 사람들에게는 “이 독사의 새끼들아, 이 위선자들아”고 온갖 독설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사실도 기억하기 바란다.
나는 민중신학 쪽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대답하지 않을 수 수 없다. “정 박사님, 그게 바로 민중입니다.” 그들이 아니꼽게 보여도 그들 또한 ‘그냥 사람’이라는 점에서 사람으로서 존중되어야 하고, 또한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든 그게 바로 사람살이이므로 그들의 모든 짓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 박사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다만 그가 놓친 게 있다. 그것은 민중의 긍정성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민중은 ‘민중’이란 말에 매이기를 거부한다. ‘민중’이란 개념은 민중을 결코 담아내지 못한다. 민중은 살아 있는 실재이다. 그래서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에 대한 정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한정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신학’이라는 학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민중을 ‘학’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민중을 정의하지않을 수 없다. 민중이란 말은 우선 사람이란 데서 철저하게 버려진 계층 곧 인간소외계층을 가리킨다. 또한 민중은 우리[사람]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생필품을 만들어내는 ‘기층민’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민중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역사의 주체이며 그 추동자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민주와 인권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목숨을 내대고 싸운 민중의 해방운동의 덕이다. 3.1운동이나 6월항쟁이나 5.18민주민중항쟁 따위가 이를 강변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화신학의 자리에서 민중을 다른 쪽에서 특징지어본다. 민중이란 ‘사람으로 받들어지지 않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민중 개념의 폭을 넓혀본 것이다. 가진 사람들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민중인 셈이다. 돈은 높이고 사람은 얕보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람은 사람으로 대접받으면서 사람답게 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인간화신학이 그리스도교를 넘어서,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모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 때 인간화신학은 차라리 ‘사회적 휴머니즘’이다. 사회적 휴머니즘은 민중의 인간화를 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민중의 인간화를 실현하는데 참여한다. 그것이야말로민중이 민중을 스스로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차제에 나는 민중신학이 쇠퇴했느니, 민중교회가 사라졌느니 하는 논평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어디에서고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사람으로 받들어지지 않는 ‘인간소외계층’이 있는 한, 그리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민중신학이나 민중교회는 있는 것이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신학을 하는 젊은 신학자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민중신학에는 ‘민중’이 없을지 몰라도, 민중은 엄연히 실재한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민중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러니 비록 역설이겠지만, ‘민중이 없는 시대’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런데웃기는 것은 민중신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조차 설교할 때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고 ‘민중구원’을 역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중’을 팔아먹는 짓이니, 참으로 역겨운 반어(反語, eironeia)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한편 정 박사는 설교자들에게 민중 구원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한다. “민중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게 좋다. 그들을 닦달하지 말고,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라.”(비평 44쪽)고 일갈한다. 그의 말은 옳다. 민중 스스로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지, 설교자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이, 민중 스스로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생명력을 가졌다는 ‘씨알’(함 석헌)을 뜻한다면,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설교자가 민중을 구원한답시고 나부대는 꼴은 보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박사의 말대로, “부화뇌동하는 민중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은 민중을 얕보는 것이기도 해서 삼가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민중구원에 대한 정 박사의 관점은 다르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그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들[민중]을 구원할 것”이라는 게다.그런데 생명의 영인 성령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시기에,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껏 민중구원을 이루지 않고 있는 것일까?우리더러 ‘그날’을 마냥 기다리라는 것인가. 이럴 때 설교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참으로 답답하다. 그런데 정 박사는 “종말론적인 미래”로부터 오게 될 생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의 구원, 사람의 구원은 미래에서 그 생명이 오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그의 종말론이 혹여 ‘묵시[문학적]적 종말론’을 뜻한다면,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 세례자의 말대로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다만 구원[심판]의 ‘그날’을 기다릴밖에 없다. 그러나 정 박사가 말하는 종말론이 ‘역사적 종말론’을 뜻한다면, 종말의 역사화, 미래의 현재화가 가능할 것이므로 우리는 구원의 ‘그날’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애써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힘쓰는 사람이 빼앗는다.”(마태 11 : 12)는 말이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당위화(當爲化)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마가 1 : 15)는 예수의 메시지는 바로 그것을 촉구한다. 예수가 외친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태”를 다루는 ‘유물론적인 접근방법’을 통해서 해석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민족이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억압에서 해방되는 세계, 경제적인 평등을 누리는 세계, 율법이라는 종교이데올로기의 주체가 되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런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내는 데는 민중의 참여가 절실히 요청된다. 여기에 예수가 말한 회개가 그 의미를 가진다. 예수의 회개는 ‘죄의 회개’(요한 세례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의 결단’을 뜻한다. 이 점에서 예수는 그의 스승인 요한을 능가한다. 그리스도교의 설교자라면 요한 쪽에 서야 할까, 아니면 예수 쪽을 따라야 할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예수 쪽이다.
끝으로 정 박사의 평가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짚으려고 한다. 정 박사는 나의 인간화 실현의 원동력을 ‘프로메테우스의 불’에 빗대고 있다.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그것이 예수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누가 12 : 51)고 말한 그 불과같은 뜻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 박사가 지적한 대로,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인간화 실현의 원동력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인간적인 과학기술을 만들어 사람을 ‘죽임’으로 내모는 인간파멸의 불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 박사도 알다시피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내게는 분명히 인간화 실현의 원동력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부활 의미와 상통한다. 그래서 혹여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은 나머지 자기분열에 허덕이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는지 하고 염려하는 정 박사는 마음을 놓아도 좋을 성 싶다. 사실 아담[사람]이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사람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아담의 타락은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인간 구원의 상징이다. 만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느님 치마폭에 싸여 생명 열매나 따먹으면서, 인간의식조차 없이 그저 생존하는 데 그쳤다면, 아담은 끝내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 박사는 사람의 구원을 생명의 완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 너머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쩌면 아담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공짜로 얻어먹으려고 하는 것과 진배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가? 나는 정 박사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너무나 친숙함을 느끼고 있는 터라 농담 삼아 한마디 해본다.

6.한국교회에 ‘알 찬 설교’가 넘치기를
나는 정 박사의 설교비평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설교비평이 한국교회에서 ‘속빈 설교’가 사라지고 ‘알찬 설교’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그의 진정성을 보였다는 뜻에서도 그렇지만, 그의 설교비평은 한국 신학에 ‘설교비평학’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뜻에서도 그렇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설교비평이 지니는 신학사적 의의는 크다. 그래서 나는 정 박사에게 “설교비평의 원리”와 같은 책을 쓸 것을 권했던 것이다. 이것은 정 박사에게 내린 ‘천명’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나는 정 박사의 ‘성령론적 설교’에 대조해서, ‘예수론적 설교’를 곁들었지만, 이것이 굳이 대조라면 거기에는 저절로 ‘지평융합’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지평융합은 관점이나 접근의 차이를 전제한 것이지, 설교의 본뜻을 달리한다는 뜻은 아니다. 설교란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데 그 궁극의 목표가 있다고 본다면, 두 사이에는 하등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정 박사가 설교를 ‘텍스트의 지평으로 인도해서 생명인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이라고 말했을 적에, 설교를 듣는 사람은 그 텍스트에 담겨 있는 ‘생명의 원체험’을 만나, 그 실체를 추체험(追體驗)함으로써 자기의 생명이신 하느님 체험과 연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이때 그 ‘생명’은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사람다운 삶의 전거를 ‘역사의 예수’에게서 보고 있지만, 그 전거를 ‘선포된 그리스도’에게서 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거기에서 생명[삶]의 실체를 찾게 된다면, 어쩌면 그것이 그리스도교 설교의 알짬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사람다운 삶의 참뜻을 잘 드러내느냐에 있다. 여기에 [설교비평]신학의 중요성이 있다.
이 대목에서 정 박사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를 안게 된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체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과 성령의 관계도 보다 뚜렷하게 밝혀주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성령론적 설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하는, 그리고 생명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설교를 다 대변했다고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정 박사의 설교비평이 한국교회에 ‘꽉 찬 설교’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 한국의 모든 설교자가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지를 온 몸으로 가리키는 설교가 널리 이루어지는 길트기가 되기를 바란다. (기독교사상, 200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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