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되게 하소서”
김대중 前대통령을 떠나보내며… 손숙
여의도의 하늘은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님은 맑고 깨끗했습니다. 소외자에게는 한없는 배려의 햇빛이었습니다. 다시 불러 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 님은 절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국민들에게 늘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더욱 서럽고 억울합니다. 남들은 쉽게 가는 길도 님은 늘 어렵고 힘들게 가시고, 넘어지고 만신창이가 되시면서도 끝내 목표에 도달하고 기적을 이루어 내시는 걸 저희들은 여러 번 보았으니까요.
|
그리고 죄송합니다. 한때는 무서운 세상에 겁먹어 당신을 사랑한다, 존경한다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늘 주눅들어 살아온 게 이제야 죄송해서 너무너무 눈물이 납니다.
그 마음을 담아 정희성 시인의 시에서 한 구절을 골라 가시는 길에 감히 뿌려 봅니다. ‘그대는 처음 죽는 사람도 아니고/이 더러운 현대사 속에서/이미 여러 번 살해 당한 사람./그대여/이 경박 천박한 세상 말고/개벽 세상에 나가 거듭나시라.’
|
당신은 참으로 정 많고 문화를 사랑하고, 여성을 존중하는 멋진 분이셨습니다. 오래전 일로 기억합니다. 이희호 여사님과 공연을 보러 오셨던 당신이 공연이 끝나자 저를 차에 태우고 댁으로 가셨습니다. 잠시 응접실에 앉아 있는데 이 여사님이 봉투 하나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공연을 보시면서 내내 걱정을 하셨어요. 너무 여위었다고. 이거 얼마 안 되지만 꼭 맛있는 것 사 먹고 몸 좀 추스르라고 하셨어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저는 내내 울었습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 만날 때마다 누구에겐 따뜻한 밥 한 끼를, 누구에겐 작은 선물 하나를 잊지 않고 쥐여 주며 등 두드려 주시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 보면 그냥 눈물 글썽거리는 그렇게 정에 무른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춥고 바람 부는 벌판에서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 주셨던 당신. 내가 그렇게 국민을 절절하게 사랑하는데 국민들은 왜 날 사랑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짝사랑의 비애를 호소하시던 당신이셨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님! 오늘 저희는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너무나도 늦었지만 진심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그 절절한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시는 길을 막고 울고 있습니다.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혹 섭섭함이 계셨더라도 모두 풀고 떠나십시오. 그 무거운 짐 모두 내려 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고이 가십시오.
저희는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당신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남은 자의 몫으로 살겠습니다. 정의로운 세상,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데 밀알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흔적을 우리 땅의 화해와 평화, 통합을 위한 밑거름으로 받들어 영원히 꽃을 피우겠습니다.
손숙 연극인·前환경부장관 ***
DJ 영결식을 보고…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 신경숙 소설가
오십년도 안되는 생을 살면서 많은 분들을 보냅니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분들의 죽음은 어느날 갑자기 천둥소리처럼 번갯불처럼 조용한 일상을 뒤엎고 지난 시간을 정면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요.
2009년 8월 23일, 오늘은 김대중이라는 강인한 이름의 대통령을 보냅니다. 나에겐 대통령 보다는 선생님처럼 느껴지던 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도 이름자만 부른 적이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김대중'이라고 쓰는군요. 내가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대통령으로서보다 먼저 선생님처럼 느끼는 것은 당신께서 중요한 순간마다 신중하게 "사랑하고 존경하는…"이라는 말씀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참 좋았습니다.
아시는지요? "사랑하고 존경하는…"이라는 말을 그처럼 진중하고 적절히 아름답게 쓰시는 분을 대통령으로 두고 사는 동안 국민으로서 든든하고 행복했었다는 것을요. 말을 품위있게 하고 밑줄을 긋고 싶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대통령을 둔 국민으로서 느꼈던 자긍심을요.
한 시대를 당신과 함께 통과해온 국민으로서 어떻게 눈물과 회한 없이 당신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일생을 되짚어보면 이것이 한 사람이 산 일생일까?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 고난들 때문에 지레 질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 고난들을 어떻게 그리 뚫고 나올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여겨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일생은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고통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빛과 희망의 근거로 자리하며 긴 세월 동안 동행했습니다.
당신이 다행히도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큰 정치지도자들의 죽음을 평화롭게 애도할 수조차 없는 현실을 살아온 국민으로서는 이것만으로도 고맙군요.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 평화롭게 애도할 수 있는 시간, 죽음이 끝이 아니라 화해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어 또 고맙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라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아시는지요. 그 말씀에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웃을 때면 나라의 근심을 다 짊어진 대통령도 아니고 식견이 넓어 대화하기에 어려운 선생님 모습도 아닌 죄송하지만 개구쟁이처럼 보이던 그 천진하고 긍정적인 모습의 근원이 그 말씀 속에서 담겨있는 듯 했습니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자면 또 한이 없다 했지요. 납치와 연금, 사형선고 같은 고난은 추억으로도 간직하지 마시고 당신의 마당이나 즐겨 읽던 책, 서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분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만 생각하소서. 당신이 가장 험한 곳에서 겪은 고난들이 우리를 오늘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우리는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의 일생은 힘껏 달려왔습니다. 넘치게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 위에서 후대는 조금 덜 고통스럽게 더 질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리라 믿고 평온한 빛을 따라 부디 영면하소서.*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장] 화보 (0) | 2009.08.25 |
---|---|
[국장]영결식에서 안장식까지 (0) | 2009.08.25 |
`마지막` 지킨 40년 동지들 (0) | 2009.08.24 |
시평 (0) | 2009.08.24 |
시론, 기고<경향> (0) | 2009.08.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