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장 임명 뒤 일절 간섭 안하더라”
평생동지 한승헌 변호사가 본 DJ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난을 오직 강인한 의지로 극복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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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 감사원장은 1970년 월간지 ‘다리’의 필화사건을 변호하며 김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74년 김 전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혐의로 기소됐을 때 변호를 맡았고 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는 육군교도소에서 같이 복역했다. 93년 ‘김대중씨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모임’ 공동위원장, 98년 국민의 정부 초대 감사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김대중 자서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 전 감사원장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던 것은 월간지 ‘다리’ 창간 1주년 기념식이다. 민주주의를 역설하는 강연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청중이 초만원이었다. 정치인으로서 소신과 패기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73년 8월 일본으로 납치됐던 김 전 대통령이 생환하자, 정부는 67년 대선 때의 발언을 문제삼아 선거법 위반혐의로 김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한 전 감사원장은 “가택연금으로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 대신 이희호 여사가 나를 찾아와 변호를 의뢰했다. 매일 아침 동교동으로 가서 대책을 상의했다. 그러던 중 내가 75년 3월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자 김 전 대통령은 갈현동 집에 찾아와 어머님과 아내를 위로하셨다.”고 전했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신군부의 정권탈취에 가장 큰 장애물인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한 사건’이라고 한 전 감사원장은 못박았다. 공소장 낭독에 걸린 시간만 해도 1시간27여분. 그런데도 “사형 선고를 받고 소신을 굽히지 않을 정도로 생사에 초연했다.”고 회상했다.
감사원장 취임 초기 때 대통령이 감사원간섭할 경우 어떻게 응해야 할지 ‘모범 답안’을 만들었지만 결국 그 답안을 한번도 쓴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를 이끌어 내며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한국인의 자랑이다. 아직 나라에 걱정거리가 많은데 그 분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다.”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서울신문. 서울신문. 김민희기자 ***
20년 애증 지선스님이 돌아본 고인
“87년 단일화 무산후 소원해졌지만 그분의 정신 이어받는게 우리의 몫”
“그 분을 영원히 떠나 보내야 하니 마음이 아프고, 만감이 교차합니다.”‘김대중 전 대통령 광주·전남추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된 지선 스님(백양사 주지)은 20일 “그가 평생 추구해온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화해 등의 정신을 이어 받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며 “장례일까지 매일 저녁 그를 기리는 추모문화제를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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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 스님은 1980년대 이후 ‘반독재 투쟁’이란 기치 아래 대학생들과 섞여 매일 거리 최루탄 공방전의 선봉에 섰고, 이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았던 그는 이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6·29 선언 다음달인 7월 초 석방된다.
“석방되던 날 DJ와 YS가 교도소 앞에 찾아와 처음으로 두 거물 정치인을 동시에 만났다.”며 “이후 두 분 사이를 오가며 후보 단일화를 강력히 촉구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두 분으로부터 선거 전까지는 꼭 단일화될 거란 말을 들은 뒤 각 대학에서 강연이 있을 때마다 ‘민주진영의 후보 단일화는 반드시 이뤄진다.’고 역설했으나 그 것이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 가장 가슴 아팠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광주에서 재야활동에 열중이던 지선 스님은 DJ가 1987년 대선 패배 이후 평민당을 이끌던 때도 여러번 부딪쳤다.
“DJ는 당시 ‘비 폭력, 비 반미, 비 용공’이란 3대 원칙을 끝까지 강조하며 우리 재야운동가와는 일정 거리를 두려 했던 현실 정치가였다.”며 “이런 점 때문에 고성이 오가는 상황이 자주 빚어졌다.”고 말했다. 지선 스님은 1989년 ‘조선대생 이철규 변사 사건’을 한 예로 들었다. 그는 지역 재야인사인 고 조아라 선생 등과 함께 동교동을 방문했다. 보기에도 흉측한 모습이었던 이철규씨 사진의 일간지 게재를 건의하기 위해서였다. DJ는 당시 “공안 당국에 탄압의 빌미만 제공할 뿐”이라며 일거에 거절했다.
지선 스님은 “5·18 이후 수많은 대학생과 열사들의 죽음을 외면하려면 정치를 그만 두라.”고 맞섰다. DJ역시 “법복을 입고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든 대학생을 선동하면 되느냐.”며 질책했다.
DJ와 지선 스님은 이 때부터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DJ가 집권한 이후부터 그는 10여년 동안 ‘산방’에서 지냈고, 최근 3개월 간 하안거를 마친 뒤 DJ추모행사를 진두지휘하게 됐다.
“어른은 가셨지만 우리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계실 그 분을 되새기고, 그의 정신을 계승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지요.”
지선 스님에겐 애증의 20여년이었다. 광주 서울신문. 최치봉기자***
[김대중 전대통령 영전에 부쳐]
유시춘 “대화의 힘 믿었던 휴머니스트”
그는 ‘대화의 힘’을 신봉했다. 뼛속깊이 민주주의자였다. 정치의 정도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을 향해 대화와 설득으로 합의와 타협을 이루는 과정이라 했다. ‘공산국가를 향한 억압과 고립화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로지 개방과 대화만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흔들림없이 믿었다. 역사발전은 이를 실증하고 있다. 철의 장막, ‘중공’의 빗장을 열게 한 것은 닉슨이 먼저 찾아가 대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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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추위를 몹시 타는 체질이었다. 그런데도 머리맡의 물그릇이 얼어 터지는 혹한의 감옥에서도 그는 결코 독재자를 증오하지 않았다. 대신 한달에 한 장만 주어지는 봉함엽서에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가족과 대화를 시도했다. 엽서 주소란까지 촘촘히 메운 사연은 그가 참으로 자잘하고 섬세한 여성적 심성을 가진 남성임을 보여 준다. 이 ‘양성적’인간은 놀랍게도 영하의 감옥에서 오히려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경지에 닿는다.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오래도록 참고 기다리는 사랑의 기술을 터득한다.
‘대화지상주의자’인 그는 1980년대에 택할 수밖에 없었던 ‘장외투쟁’을 싫어했다. 그는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사랑했다. 대의정치가 맺은 국민과 대표자 간의 계약과 신의를 존중하고자 했다. 그래서 재임기간에는 거부권을 한번도 행사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으로는 너무도 부당했지만 국회의 결정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 역시 그의 오랜 인내의 결실이다. 그는 북한이 거부하는 조선일보 기자의 방북취재와 김일성 주석이 잠들어 있는 금수산궁전 참배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평양으로 향했다. 그는 오히려 평생 동안 자신을 음해하고 괴롭힌 보수신문의 취재허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누구 못지않은 빼어난 논리와 달변을 갖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에 머무는 내내 북한 지도부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그는 극도로 자신의 말을 아꼈다. 대화를 위한 선결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좌우명처럼 여겼다. 친지들에게 자주 붓글씨로 써주었다. ‘때로 잘못 판단하기도 하고 흑색선전에 현혹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이외에는 믿을 대상이 없었던’ 그는 오로지 국민의 힘에 철저히 의지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사면복권되었을 때 그는 국민에 대한 그의 무한신뢰를 확인했다.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는 ‘가난은 나라가 구제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자본주의 정글에서 소외되고 뒤처지는 이들이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기초생활보장제’는 간난신고를 거듭했다. 재원도 부족하고 일각에서는 이념공세를 퍼부었다. 그는 굽히지 않았다. 이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굶거나 헐벗는 이들은 없다. 휴머니스트인 지도자의 힘은 그래서 존귀하다. 그는 ‘가난은 나라도 구제못한다.’는 왕조의 수준을 ‘공화국’으로 변환시켰다. 이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군사정권이 조작하고 유포한 거짓들이 아직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더 기다려야 할까? 만인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소수를 오래 속일 수 있지만 만인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믿자.
한 시대 대중의 소망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이를 두고 우리는 영웅이라 부른다. 김대중, 그는 진정 민주주의와 평화를 꿈꾸는 우리들의 캡틴이었다. 실로 너무 멀고도 험한 길을 외롭게 걸어온 당신. 이제 더는 음해와 핍박이 없는 하늘에서 부디 평안을 누리소서.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상임위원***
DJ의 ‘도전과 응전’/박준철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영면의 세계로 떠났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향하는 길가에 운집한 추모행렬은 그가 겪은 격동과 영욕의 세월만큼이나 길고 길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애도의 물결은 그가 태어난 작은 섬 하의도에까지 다다를 듯하다.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그는 이제 하나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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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태동과 발전은 고통과 시련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척박한 환경과 당면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사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거듭되는 난관과 시련이 오히려 의지와 저항력을 키우고 직관과 분별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 토인비 문명사관의 요체다.
DJ는 자신의 인생을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고 표현했다. 노회한 정치가의 식상한 수사가 아니다. 2009년 5월2일 그가 작성한 일기를 보자.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또 다른 지면에서 그는 도전과 응전의 관계를 ‘나의 사상과 역사관을 단련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회고했다. ‘대응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판난다.’는 DJ의 인생철학은 그가 걸어온 험난한 정치역정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결국 DJ를 한국 현대사의 주역으로 성장시킨 요소는 역설적이게도 군부독재정권이 가한 시련과 핍박이었다. DJ를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군사정권은 그를 제거하려 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007 소설에나 나올 법한 죽음의 문턱들’에서 그를 생환시켰고, 역경에 굴하지 않는 DJ의 결연한 응전은 그를 더욱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시켰다.
납치와 고문, 그리고 사형판결은 반려자의 눈에는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의미하겠지만, 그 풍상과 질곡의 시간들은 DJ에게 민주화의 당위성과 시급성을 보다 명료하게 각인시키고 나아가 그의 대내외적 인지도를 제고시키는 결정적 기제로 작동하였다. 수감생활은 엄청난 독서로 이어지면서 안목과 논리를 배가시켰고, 가택연금은 영어능력을 키우면서 지도자의 국제적 소양을 숙성시켰다.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잘 알려진 대로 미당 서정주가 읊은 ‘자화상’의 한 대목이다. 누추했던 성장기의 험난한 어려움을 ‘바람’으로 은유한 이 소절은 불굴의 의지로 갖은 고난을 극복한 인간 김대중에게 더욱 적절한 표현으로 다가온다.
DJ의 도전과 응전은 때로는 일탈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는 우리사회를 유린해 온 고질적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이에 편승하는 우를 범하면서 분열과 반목의 확산에 장단을 맞췄다. 권력에 대한 그의 집착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의 단일화를 무산시켰다.
그는 ‘그때 일을 후회한다. 국민 염원을 최우선에 두고 내가 양보했어야 했다.’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한편 국민과 약속한 정계은퇴를 번복하면서 ‘민주주의는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있다.’는 평소의 소신을 저버리기도 했다. 평생 맞닥뜨린 도전과 그에대한 응전에 있어서 이따금 적절치 않은 방식을 택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DJ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육체의 쇠약과 엄습하는 고통은 DJ에게 다가온 최후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어려움과 고통에 그는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며 멋지게 응수하였다. 자신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인생이 오히려 아름다웠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발전한다는 인생관과 신념은 남은 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제 도전과 응전이 없는 편한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기원한다.
평생동지 송좌빈 옹과 DJ
“가장 안전한 게 송동지 집이라며 85년 연금때 몰래 빠져나와 방문”
13대 총선 개표가 한창이던 1988년 4월26일 자정 무렵. 송좌빈(85) 당시 평민당 당무지도위원은 대전시 주산동 대청호변 자택에 돌아오자마자 전화기를 잡았다. “선생님, 제1 야당이 된 것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에게 축하를 하는 송씨의 목소리는 자신의 낙선조차 잊은 듯했고, 어린아이처럼 흥분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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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에 반해 구파서 신파로
송 옹과 김 전 대통령의 인연은 4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DJ가 1967년 여름 3선개헌 반대 시국강연회 기착지로 대전을 택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민주당 신파 출신인 DJ는 ‘원조 비서’인 김장곤 전 의원을 구파인 송 옹 집으로 보내 강연회 참석을 요청했다. 구파가 신파의 행사에 나타나면 ‘변절’을 의심받던 시기라 탐탁지 않은 요청이었지만 DJ의 달변과 비전 제시 등에 매료된 송 옹은 그 때부터 DJ맨이 됐다.
이후 송 옹은 40년 넘게 DJ의 노선과 이념, 정치철학을 충실히 이행했다. 1978년 옥살이(긴급조치 9호 위반)와 3차례의 국회의원 출마·낙선도 DJ와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전국구를 권하는 DJ의 제안을 “지역구에 출마해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며 고사한 일화는 회자된다.
●천석꾼 재산 거의 당비로
‘천석꾼’이었던 송 옹은 대덕연구단지 입주로 받은 막대한 토지보상금 등 거의 모든 재산을 당비로 냈다. DJ와 동갑이지만 늘 ‘선생님”이라고 호칭할 만큼 깍듯했다. DJ는 이런 송 옹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14대 대선에서 YS에게 패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눈물의 송별연에서 DJ는 “송 동지가 대표로 고별사를 해주세요.”라고 했을 정도다.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DJ가 1985년 8월 가택연금 상태에서 빠져나와 찾은 유일한 사가 방문이 송 옹의 주산동 자택이다. 이희호 여사, 장남 홍일씨와 권노갑, 김옥두, 윤철상씨 등 비서 출신들이 모여 ‘가든파티’를 열었다. 훗날 DJ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안전한 곳이 송 동지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튿날인 지난 19일 대전시청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은 송 옹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서거 자체가 아닌 새로운 민주화를 위한 첫 발걸음일 것”이라며 앞으로의 정국을 예상했다. 서울신문. 최용규기자***
'DJ 정신'과 한국정치의 과제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용서와 화해'가 요체
최근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은 DJ 재임 중 가장 잘한 일로 '남북관계 개선 및 교류확대'(27.7%)를 지적했다. 그 뒤를 이어 'IMF 극복'(25.9%)과 '민주주의 강화'(16.8%)'를 꼽았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2명 중 1명(52.2%)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DJ는 국정운영 리더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7년 한국정치학회가 87년 민주화 이후 선출된 전· 현직 대통령 4명의 지도력에 대한 국민의 정치의식을 조사한 결과, DJ는 10점 만점에 평균 5.36점으로 가장 높았다. 그 다음으로 김영삼 대통령(4.10점), 노무현 대통령(3.97점), 노태우 대통령(3.82점) 순이었다. DJ는 국민설득, 외교능력, 위기관리 등 9개 평가 전 분야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또한 IMF 조기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했고, 반대세력의 온갖 비난과 저항 속에서도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모든 업적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강력한 정치철학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변화와 개혁을 위한 창조적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물론 DJ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역사의 몫이다. 하지만 수평적 정권교체, 외환위기 극복, IT 정보기술산업 발전, 월드컵 성공, 남북화해 기반 구축, 인권ㆍ복지 향상 등의 성과는 치적으로 기록될 수 있다. DJ의 서거로 지난 50년간 민주화의 상징으로 한국정치를 지배했던 한 축이 사라져 정치판의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영남과 호남,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 속에서 경쟁과 대립으로 점철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현실적으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권은 이제 우리 시대의 큰 지도자가 남긴 공백을 새로운 정치적 내용으로 채워야 할 역사적인 과제에 직면했다. 새로운 시작의 출발은 한국정치를 짓눌러왔던 증오와 배제, 극단과 단절의 정치를 청산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DJ가 2003년 퇴임하면서 발표한 '위대한 국민에의 헌사'를 정치권은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주춧돌
그는 "험난한 정치생활 속에서 나로 인해 상처입고 마음 아팠던 분들에 대해 충심으로 화해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우리 모두 하나같이 단결합시다. 내일의 희망을 간직하고 열심히 나아갑시다. 큰 대의를 위해 협력합시다"라고 말했다.
용서와 화해는 모진 한파를 이겨내고 봄이 오면 인고의 꽃을 피우는 인동초 김대중 정신의 요체임에 틀림없다. 여야 정치권 모두 이러한 'DJ 정신'을 주춧돌로 삼아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성숙하고 견고한 민주주의의 성전을 짓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한국일보>*
본격 사회안전망 구축한 DJ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도 비슷하다. 민주화 투쟁과 남북 정상회담 업적은 열심히 떠들지만, 외환위기로 도시빈곤층 비율이 7%에서 20%로 치솟은 해에 취임한 그의 재임 시절 비로소 사회안전망이 본격적으로 구축되었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좋은 제도를 도입한 업적은 쉽게 잊힌다. 독일제국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세계 최초 의료보험 도입, 나폴레옹의 세계 최초 민법 제정 등이 전형적인 예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원년을 기록했다고 할 만한 김 전 대통령이 취임한 1998년 국민 1인당 소득은 1996년의 2만 달러에서 7,300달러로 떨어졌다. 그러나 국민의정부는 국민연금 적용대상을 전국민으로 확대, 가입자 숫자가 780만에서 1,600만으로 늘어났다. 이어 2000년에는 제 힘으로 먹고 살 수 없는 국민을 위해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다. 생계비를 지원 받는 사람을 37만 명에서 155만 명으로 늘렸고, 받는 돈도 월 13만원에서 20만원으로 높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의 사회복지 원년의 업적을 이룰 때도 반대와 비판이 많았다. 일부 언론의 비난은 그가 죽은 뒤에도 그칠 줄 몰랐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루스벨트를 공개적으로 "공산당원(사실은 빨갱이)"이라고 욕한 것은 상징적이다. 사회안전망 구축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일종의 도움닫기이자 디딤돌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는 상식 축에도 못 끼는 상식이지만 개척자의 길은 그토록 험했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에 비하면 김 전 대통령은 여건이 한결 나았다. 이를테면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는 국민소득이 3,000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밑그림을 그린 것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른 업적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루스벨트가 끊임없이 위헌 시비에 시달리고 실제 위헌 판결까지 받은 데 비해, 김 전 대통령은 사법부는 물론이고 진보적 지식인과 문화계 등의 엄호를 받았다. 과도한 복지지출이 성장잠재력을 좀먹는다거나 저소득층을 더욱 나태하게 만든다는 등의 비판이 있었지만, 이를 웃도는 사회의 폭 넓은 지지가 있었다.
'햇볕' 같은 사회복지 개혁자
지도자가 대중이 원하는 정책을 펼 때, 그가 포퓰리스트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잣대는 일관된 철학의 유무이다. 김 전 대통령의 여러 업적 가운데 사회안전망 구축과 관련해서도 그가 포퓰리스트였는지 개혁자였는지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이 글 제목을 '사회복지 원년' 대통령으로 정한 것은 내 나름대로 그가 개혁자였다고 결론 내린 데 따른 것이다.
좋은 제도는 햇볕과 같다. 누리는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감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사회복지 개혁이 없었다면 우리사회 빈곤층이 이번 경제위기를 견디기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한국일보>*
베이징=한국일보. 장학만특파원
살아 생전 중국을 7번이나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해외 방문지도 중국이었다. 그와 중국과의 인연은 21세기를 지향하는'한중 협력동반자관계'수립(1998년 11월)이란 양국관계 발전의 큰 전환점을 통해 수교 17년 역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웠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놀랄 만큼 가까워진 '수교 17년'
한중간의 교류는 눈부실 만큼 성장했다. 한국 6개 도시와 중국 31개 도시를 잇는 항공편은 매주 830편에 이른다. 한국~미국 항공편이 매주 260편, 한국~일본 417편에 비하면 2~4배가 많다. 양국간 교역도 급팽창하고 있다. 92년 수교 당시 50억 달러에 불과하던 교역량은 지난해 말 1,861억 달러로 37배 성장했다. 중국은 한국의 제1 무역대상국이고, 한국도 중국의 3대 교역대상국 중 하나가 됐다.
한중간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우리는 미국과 함께 G2로 성장한 중국과의 관계에서 과연 어떤 전략과 자세로 '중국 굴기(崛起)'에 대응해야 할 것인가. 중국의 환초우시바오(環球時報)는 21일 한중수교 17주년과 중일수교 37주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특집기사로 다뤘다.
이 신문은 중국의 전문가의 말을 인용"최근 중국의 굴기를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 국민들은 아직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복잡한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에는'일중역전(日中逆轉)'이란 단어가 유행할 만큼, 이르면 올해 말 세계 제2 경제대국의 지위를 중국에 넘겨줘야 한다는 초조함과 경계심에 휩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의 추월로 심기가 불편한 한국은 여전히 중국의 경제발전 수치와 지표를 한국과 비교하며 벌어지는 격차에 점점 낙담하고 자신감을 잃어가는 모습이 역력하다고 표현했다.
한ㆍ중ㆍ일 뉴패러다임 ?아내야
비행기로 기껏 1시간 30분 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중국은 이제 우리의 본격적인 내수시장으로 성장했다. 중국은 우리 경제를 다시금 도약시킬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고 있다. 중국의 굴기를 활용한 발 빠른 우리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과 각 분야별 긴밀한 전략적 협력관계는 글로벌 경제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선결 과제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선 북한의 영원한 사회주의국가 형제인 중국의 협력과 지원이 더 없이 절실한 상황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구를 이끌고 지난 5월 중국 베이징을 마지막으로 방문해 '대국 굴기'의 중국에게 영원한 동반자로서 관계 강화를 촉구했던 그 소중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때다.*
한국일보 황상진 논설위원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 전, 목포의 수산물 전문점에 한 야당 인사가 홍어를 사러 왔다. 값을 치르고 나서 흑산도 홍어 한 마리를 받아 가면서 이 인사가 "아따, 선상님이 이거 보시면 고놈 참 실허다고 좋아라 허시겄네~잉"했다. 돈을 세던 주인이 깜짝 놀라 다급한 목소리로 그 인사에게 "시방, 머라 혔소? 선상님이라고? DJ 선상님?"하고 물었다. 그는 "그라믄, 우리헌티 DJ 선상님 말고 다른 선상님이 또 있단 말요?"하고 반문했고, 주인은 후닥닥 가게 안으로 들어가 더 크고, 실한 홍어를 꺼내와 안겨줬다. 정치권에서 회자되던 일화다.
▦적어도 호남인들에게 '선생님''선상님'은 고유명사, 대명사에 가깝다. '우리 선상님'하면 영락없이 김 전 대통령을 가리킨다. '선상님'에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호남인의 믿음과 기대가 담겨 있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며 죽음의 고비를 수 차례 넘긴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녹아 있다. 호남인들은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형극의 길을 걸을 때, 그 고통을 자신들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만큼 '선상님'을 자신들과 동일시했다. 물론 그런 맹목적 추종이 거부감을 부르고 지역감정을 자극해 호남을 더 고립시킨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
▦어제 영결식은 평화와 통일, 화해와 용서의 가치를 평생 추구해 온 김 전 대통령의 크고 깊은 그림자를 절감케 하는 자리였다. 국장 기간 6일 동안 국민들은 김 전 대통령의 부재를 통해 우리 사회 '큰 어른'으로서 그의 존재감을 느꼈을 것이다. 박영숙 미래포럼 이사장은 영결식 추도사에서 김 전 대통령을 '대통령님''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대통령님, 우리의 선생님"으로 시작한 추도사를 들으며 거부감을 느낀 국민이 있었을까. 김 전 대통령은 이승과 이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호남인의 '선상님'이 아닌, 국민의 '선생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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