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경제론’과‘4대국 보장론’으로 하늘의 뜻 폈습니다
후광(後廣)선생의 서거 앞에서
이문영 교수 특별기고 / 고려대 명예교수
뉴스 시간을 안 놓치는 버릇이 있는 제가 이번에 후광이 입원하신 후에는 뉴스를 안 듣는 새 버릇이 생겼었습니다. 나쁜 소식을 들을까봐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조바심이 한낱 소용없는 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가셨으니까요.
후광의 일을 이렇게 미리 안 일이 몇 번 있었던 생각이 납니다. 군사법정에서 후광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그 하나였습니다. 저는 후광이 무사할 것이라고 미리 확신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만 더 미리 안 것을 적겠습니다. 대선에서 투표했을 때 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으면서 저는 미리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접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을 때 저는 ‘이번에는 당선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투표하던 저는 기뻐서 울음이 나왔고 후광을 이제는 정치의 고해바다로 내보내는 감을 잡아 울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다 울음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이 후광을 이제는 이 땅에 그만 두고자 하시는 이 시점에서 저는 후광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후광이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을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하느님 앞에서 무서워 떨지 말고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본 후광의 하느님께 자랑할 만한 한 가지는 1970년 이 겨레를 위하여 ‘대중 경제론’과 ‘4대국 보장론’을 펴신 일입니다. 이 두 가지의 주장은 군사 정부가 못 말하는 주장이었습니다. 군사정부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7·4 공동성명을 냄으로써 두 독재자가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고자 했습니다. 유신정부는 대중 경제가 싫어 노동자를 편들기만 해도 구속하는 국가보위법을 제정했습니다. 두 가지 주장 때문에 후광은 세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 두 가지 시책은 오늘에는 유효한 정책이며 통일 후에도 유효할 시책입니다. 즉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주축으로 해 경제를 돌리며 한반도의 평화를 6개국이 보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후광의 정책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 땅을 위해 마련한 정책이었습니다. 이 두 개의 시책 때문에 후광은 대통령도 되고 노벨상을 받으셨습니다. 후광이 대통령이 되신 것은 아시아 정치권에서 처음 보는 정권 교체였습니다.
그러니 후광은 이 땅에서 후광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시다가 가셨습니다. 부디 후광이여, 긍휼 많으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길이 받으십시오. ***
고인이 이룩한 민주·화해 후퇴하는 현실 안타까워 / 문학평론가 구중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생애의 연륜이 80대 중반에 이르렀으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일생일대를 마감하는 순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고인의 서거는 뜻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안쓰럽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그 첫째 이유는 지금 한국 정치의 흐름이 국민의 피나는 고투와 희생을 통해 이룩한 민주주의로부터 오히려 후퇴해 냉전시대의 획일주의로 돌아가는 듯한 분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민족의 남북분단 상황에 조성된 화해와 교류의 관계가 다시 막히고 오히려 악화될지도 모르는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와 민족 통일의 촉진이라는 이 두 과업은 모두 김 전 대통령 필생의 목표였고, 그가 국민과 더불어 앞장서서 투쟁해 세계적인 지지와 찬사를 받을 만한 단계로 발전시켜 놓았다. 그런데 이 두 역사적 과업의 상황이 오히려 혼미해지는 것을 보고 고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려를 표명하면서 생애의 마지막 날을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임해 우리가 애도를 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생전에 그가 신앙처럼 견지했던 민족사적 과업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고인은 1997년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듬해 봄에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거행된 제2공화국 장면 총리 추도 미사에 참석해 추도사를 했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은 4·19 민주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제2공화국의 장면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했으므로, 군인들은 국가의 “구악을 일소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군인들은 제2공화국의 부패정치 사례를 신문 광고란에 새까맣게 나열하고 군사재판을 실시했다. 그런데 재판의 최종결과는 어느 장관이 중고 냉장고 한 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이 유일한 유죄였다. 일소할 ‘구악’은 원래 있지도 않았다. 이렇게 판명이 되었는데도 군인들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지 않고 군사정권을 세워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이것이 김 전 대통령의 장면 총리 추도사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나는 “역사에 이러한 날도 있구나” 하고 감격했다.
고인은 일찍이 장면 정권 시대 민주당의 대변인으로 정치를 시작했으니 그로부터 37년이 걸려 대통령이 되었다. 이 동안에 그가 겪은 극한적 고난은 이루 헤아리기도 어렵다.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한 일본에서의 납치, 명동성당 3·1절 구국선언 후 투옥, 광주항쟁 내란음모죄 사형 언도, 미국 망명, 귀국 후 가택연금, 어느 하루 평탄한 날이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고인은 시민단체와 문화예술인들을 가까이 만났다. 80년 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기금 조성을 위해 서대문 길가에 설치한 1일 술집 천막에도 방문하고, 동교동 자택으로 문인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그 결과라고 할까. 김대중 내란음모 연루 또는 참고인으로 연행되고 투옥된 문인이 헤아리기 어렵게 많다. 신경림, 조태일, 나 세 사람도 이 명목으로 같은 날 서대문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끝내 대통령이 된 고인은 2000년에 평양을 방문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교류를 상호신뢰의 기반 위에서 추진하게 되었다. 이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김 전 대통령이 여러 차례 북한에 제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미소 강대국들에 의해 타의적으로 분단된 민족이 반 세기가 넘도록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이것은 민족 최대의 과제이다. 하물며 냉전적 사고로 분단 비극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정치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다.
이제 고인이 된 김 전 대통령은 민족 통일을 위한 6·15 공동선언을 솔선해 실현한 한 가지 업적만으로도 민족의 현대사 안에 영원히 살아 있다.
민주주의와 통일, 이 과업을 후대 사람들이 가장 힘을 쏟아 추진하는 것만이 고인 앞에 우리가 얼굴을 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농업·농촌·농민사랑 실천 진정한 ‘경천애인 대통령’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연전에 은퇴한 가톨릭 안동교구의 두봉 주교께서 어느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이 나라에 민주주의와 평화를 정착시킨 이유 하나만으로도 김 전 대통령은 백년 후까지 그 이름이 교과서에 실려 길이 빛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외환위기 극복이나 남북정상회담 등 큰 업적에 가려 김 전 대통령의 위대한 참모습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외환위기에 따른 도시 산업부문과 은행의 연쇄도산 사태, 대량실업 등에 가려 당시 농업·농촌부문의 피해상황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국의 수많은 농민들이 고통받던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국무회의에서 농림부 장관에게 자주 문책성 질문을 던졌다. 유독 농업·농민만 챙기려 든다는 비난과 오해를 피하면서 오히려 힘을 실어주시기 위한 속깊은 배려였다.
“농림장관, 지금 경상도 진주지방 어느 마을에선 영농자금에 대한 상호 연대보증제도 때문에 온 마을 주민들이 연쇄도산 직전이라는데 대책이 무엇이오?” “김 장관, 지금 젖소 송아지 값이 5만원대로 떨어져 축산농민들이 송아지 50여마리를 국회 앞에 내다버렸다는데 그 상황을 아시오? 대책은 뭐요?”
또 추석날 불어닥친 태풍현장에 나가 있는 장관을 호출해 “농림장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소? 전화위복을 위해서는 원상회복보다는 항구적인 복구를 해야 하는데 예산대책은 어떻소?”라고 물으시며 경제부처 중 가장 약한 농림부가 분발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럼 나는 “진주지방만이 아니라 전남, 전북, 충청, 강원, 경기 등 1만5000개 모든 마을이 얼마안가 줄도산할 형편입니다. 정부가 농업신용을 보증해주면 연쇄도산을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하며 관계부처의 반대를 돌파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소값도 1년반 만에 원상회복을 넘어 최고가격으로 끌어올렸고, 수해복구도 항구적인 시설투자를 할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정부주도의 ‘친환경 유기농업 원년’을 선포하고, 친환경 직접지불제를 실시했으며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을 창설했다. 이런 노력으로 개방화시대인 최근에도 고비용 소규모 가족농업이 이 정도나마 버틸 수 있게 됐다.
농정변화에서 가장 감격적인 것은 소비자와 농업인, 정부가 함께 ‘농·소·정 협력’시스템을 구축해 농정을 함께 펴게 된 것이다. 농조통합으로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을 분노케 했던 수세(물세)가 폐지됐고, 농축인삼협동조합 통합으로 금리가 대폭 인하됐다.
각 언론과 정치권, 농림부를 제외한 경제부처들이 간척 농경지의 용도를 변경해 특정기업에 100조원대의 특혜를 몰아주려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농림부는 용도변경의 이익도 손해도 국가가 져야 한다고 홀로 버텼고, 김 전 대통령은 농림부를 도와 국가소유로 구입케 함으로써 제2의 수서비리, 아니 그 백배의 폭발력을 가진 비리사태를 면하게 했다. “아무리 나라경제가 어렵다 하더라도 불법으로 비리기업을 도울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 그분의 답변이었다.
어느날 김 전 대통령께서는 독대보고를 마친 농림장관에게 “김 장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뼛속 깊이 농민의 서러움과 고통을 보고 자란 아마도 마지막 세대의 사람이오. 앞으로의 정부는 도시출신의 젊은 사람들이 정부를 이끌 것이니 지금 내가 대통령일 때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을 살릴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시오”라고 하셨다. 그 분은 농업·농촌은 경제 이상의 고려대상이며, 경제이론만으로는 풀 수 없는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요즘 대북관계가 끊겨 쌀도 비료도 남아돌고, 값은 떨어져 풍년 기근현상을 보이고 있다. 유일한 ‘농민사랑 대통령’을 잃은 우리 농업·농촌은 과연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아무 것도 안하면 진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 사회학
석달 남짓한 사이에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잃었다.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때 거리에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들고 있었던 손팻말에는 ‘지켜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도 국민들의 애도는 비슷한 감정의 골을 따라 흐르는 것 같다. 나라의 어른을 잃은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미안함’의 감정은 도대체 그 시원지가 어디기에 이리도 국민들의 마음을 고루 적시는 것일까.
‘대통령 서거’ 미안해하는 사람들
국장 기간 공개된 그의 마지막 일기와 미발표 연설문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일기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였던 부인 이희호 여사와 아마도 처음으로 가져보는 소소한 행복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노 전 대통령 서거, 남북관계 위기, 경제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등을 고루 걱정하고 자신의 남은 삶을 바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유고가 되어버린 미발표 연설문에서는 남북한 관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해 소상하게 분석하고 북핵 위기의 본질을 갈파했으며, 그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다시 한번 그의 마지막 일기를 들여다본다. 우리는 이 85세의 노인에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맡겨놓고 무관심하게 돌아앉아 있었던 것인가. 지병과 싸운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생의 가장 귀중한 시간인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걱정하고 남북문제의 해법을 고민해야만 하도록 맡겨놓고 있었던 것이 국민들을 미안하게 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정치인 김대중에게도 명과 암이 있었다. 우리는 그의 밝음에 동참한 것 못지 않게 그의 어두움에도 동참했다. 그가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혀 돌아가는 길을 택했을 때, 우리는 정치 무관심과 정치 혐오로 동참했고, 지역감정으로 동참했으며, 술안주 삼아 말하기 좋은 색깔론으로 동참했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아 고통받고 피폐해질 때면 그에게 기댔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먹고 살기가 바빠서 다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렸고, 따라서 그의 어두움은 걷힐 수가 없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일기는 85세의 노인이 혼자 짊어져야 했던 고뇌의 시간들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되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되찾아준 민주주의 지켜나가야
이제 오랫동안 그에게 맡겨두었던, 우리의 권리와 우리의 자유를 우리의 일상 속으로 되찾아와야 한다. 한 시대가 갔다고들 한다. 거인이 갔다고들 한다. 제2의 거인은 나타나줄까. 그가 평생을 바쳐 되찾아준 민주주의를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삶으로 만드는 데 계속해서 실패한다면 제2의 거인 따위는 의미가 없다. 기껏해야 한 집단의 정치적 유산 정도로 끝나버린다면 그의 삶이 너무 안타깝다. 민주주의를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 할 우리의 삶 그 자체로 만드는 데 모두가 함께할 때에만 우리의 미안함은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낮은 목소리로]안녕히 가세요, 대통령님! / 한지혜 소설가
머리를 감고 나오다가 동네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하셨대요. 순간 멍했다. 곧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환이었고, 생은 욕망이나 희망 혹은 필요나 간구로 잡을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착잡하고 쓸쓸하고 맥이 풀리는 것은 비슷한 공감대의 영역에 있던 대통령을 잃은 것이 불과 몇 달 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한 달 생의 마지막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듯한 대통령의 기사를 읽으면서, 그를 찾아가는 온갖 정적과 친구와 야망과 후회와 세월들을 보면서, 그는 참 강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의지만 있다면, 누구라도 살아 있는 동안 제 삶의 모습을 어떻게든 갈무리할 수 있겠지만, 죽음의 순간을 그토록 차분히 갈무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정기 검사를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갔더니 마침 전직 대통령이 문병 차 방문하던 중이었다. 4층 접수창구에 서 있자니 3층 현관으로 들어오는, 한때 사형선고까지 내렸던 전직 대통령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순간 생뚱맞게도 ‘맞다. 김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미안하다, 제스처든 진심이든 말할 시간을 주는 것, 그것이 그 분이 택한 마지막 배려이자 인격이겠다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보여준 생의 마지막은 분명 잊지 못할 감동이다.
완벽하게 막을 내린 ‘한 시대’
그렇게 한 시대가 갔다. 정말 완벽하게 막을 내렸다. 시대가 가면 다시 한 시대가 와야 하는데, 지금 남은 시대는, 과연 ‘시대’라고 묶일 만한 무엇인지 모르겠다. ‘시대’라는 말 속에는 공동의 운명, 공동의 정신, 공동의 무언가가 깃들어야 할 것 같은데, ‘자본’과 ‘개발’ 말고 지금 시대가 무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켠 TV에서 들리는 각 정당의 추모 논평이 이런 우울함에 부채질을 한다. 특히 그 중 한 정당의 논평은 듣다가 귀를 의심했다.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큰 정치인으로서’, ‘과정과 내용에 논란이 많았지만 한반도 통일을 향한 열정과 의지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자치단체의 수장이나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위원을 추모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특정 지역을 대표했다고 표현하는 건 폄훼이자 왜곡이고 무례다. 고인의 업적이라고 노벨상을 거론하면서 논란과 의혹을 함께 제시하는 것도 업적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조롱이다. 그런 졸렬하고 예의 없는 논평을 정당 차원의 추모 논평이라고 내놓다니, 그게 그들의 수준인 건지 이 나라 정치 수준인 건지 듣는 내내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러하니, 아니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추모는 더더욱 국민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산자의 형평도 가늠하지 못하면서 죽은 자의 형평을 논하며 장례 방식을 결정하는 이들이 있듯 죽은 자들의 업적과 가치를 비교하여 평가하고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들도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걸 정치적 이용이나 추종자들의 선동으로 폄훼한다면 그건 자신의 한계와 수준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서거를 ‘정국’으로 만든 건 추모하는 자들이 아니라 추모를 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진정한 추모는 국민들의 몫
작가 김연수는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 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지금 우리의 추모는,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더라도 인사는 해야지.
안녕히 가세요. 대통령님.***
“DJ는 한국 민주주의·경제발전의 횃불”
ㆍ김 前대통령과 40년 교류 제임스 레이니 前주한 미대사
ㆍ그는 자유수호 투사… 일부 ‘좌익’ 매도 웃기는 일햇볕정책은 한반도 변화 불러온 아주 적절한 정책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 대사(81·에모리대 명예총장·사진)는 18일(현지시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횃불과 같은 존재였다”면서 “40년 지기인 그를 잃은 데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 군정 시절 육군 방첩대 일원으로 여운형·김구 선생의 암살사건을 수사했던 그는 김 전 대통령을 좌익이라고 매도하는 한국 내 보수인사들의 주장에 대해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라며 일축했다. 햇볕정책 역시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의 실책과 북한의 핵개발로 벽에 부딪혔을 뿐 당시로는 “한반도에 변화를 불러올 적절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
“그와 40년 동안 친구로 지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에 의해 투옥됐던 그의 석방운동을 하면서 직접 관련을 맺기 시작했지만 그를 안 것은 더 오래전이다. 미 군정 방첩장교에 이어 60년대 연세대에서 5년간 교편을 잡으면서 ‘신예 정치인’ 김대중을 알게 됐다. 80년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가까워졌다. 주한대사 재직 시절(1993~97)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다.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행사가 열린 지난해 12월 아내와 두 손자와 함께 서울을 찾아 가족 동반 저녁식사를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오랫동안 연락을 끊지 않고 지냈던 친구다.”
-정치인 김대중을 어떻게 평가하나. 일각에서는 지금도 그를 빨갱이라고 비판하는데.
“웃기는 이야기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용감한 투사였다.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많은 한국인에게 그는 희망의 상징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의 만델라’였다. 그러한 용기가 있었기에 햇볕정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 햇볕정책에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을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는 과감한 발길을 내딛는다. 다른 모든 (한국) 대통령들은 대북 강경 방침을 표하는 것으로 끝났다. 방위만을 강조하는 데는 아무런 상상력도 필요없지 않은가.”
-햇볕정책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평가한다면.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재직하던 2000년 한·미 두 나라는 북한 문제 해결에 큰 진전을 이뤘다. 그런 한·미관계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햇볕정책은 결코 순진하지 않았다. 잘 짜인 정책이었다. 다만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이제 쌍둥이 목표를 갖고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북한의 핵보유를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다.”
-햇볕정책이 대북 퍼주기였다는 주장도 있다.
“비난은 할 수 있지만 사실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1994년부터 부시가 취임했던 2001년까지 영변 핵시설은 동결됐고, 한국은 그동안 놀라운 경제적 진전을 이뤘다. 햇볕정책이 실패한 것은 조지 부시가 취임하면서 클린턴과 김대중의 정책을 거부하면서 비롯됐다.”
-김 전 대통령의 가장 오랜 친구인 스티븐 솔라즈 전 하원 동아태소위원장 같은 사람은 북한 인권문제에 매달리고 있는데….
“모두가 북한의 인권상황을 통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을 피하는 것이 가장 큰 인권옹호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평화로의 긴 항해 끝에 결국 인권을 지키는 길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애 마지막 몇 달간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한국의 민주주의와 대북 화해정책이 후퇴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어쨌든 이명박 대통령이 병문안을 통해 존경감을 표해 기뻤다. 관대한 제스처였고 한국사에서 김대중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전두환의 병문안 역시 오랜 정적이었지만 존경을 표한 것으로 본다.”
<워싱턴 | 김진호특파원>***
[김 前대통령 국장] 그레그 前 주한 미대사 인터뷰
“민주주의 향한 신념에 매료 햇볕정책 본질적으로 옳아”
-고인과 유달리 친분이 깊었는데 이번 부음을 접하고 심경이 어떻습니까.
“매우 슬픕니다. 지난주 그가 입원했던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찾아가 꽃과 함께 회복을 빌었습니다. 직접 만나지 못하고 대신 이희호 여사를 만났습니다. 내가 얼마나 깊이 남편을 존경하는지, 남편이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전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강력한 옹호자였습니다. 납치와 투옥, 암살 위협을 견뎌내고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이끌었고, 성공했습니다.”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1970년대 납치사건을 계기로 간접적으로 알게 됐지만 80년 대 그의 망명시절 처음 만났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단호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내가 이사장으로 있던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한국뿐 아니라 북한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흔쾌히 동참했습니다.”
-납치사건 당시 큰 도움을 줬습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나는 CIA 한국 근무를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필립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 김대중이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됐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누군가 그를 죽이려 할 수 있겠지만 반드시 미국의 대응 방침을 확인한 뒤에야 죽일 것’이라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그의 소재를 파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 리콴유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을 아시아 최고 지도자로 꼽았는데 이유는 무엇입니까.
“52년부터 아시아 문제를 다루면서 많은 아시아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세 분은 모두 나라가 가야 할 길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평가를 한 것이지요.”
-햇볕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90년 대 말에는 매우 효율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위대한 순간인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후 조지 부시 대통령이 빌 클린턴 대통령의 정책을 이어받지 않았고 일본 측에서도 실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북한이 실수를 한 것도 분명합니다. 대북 송금 문제가 좀더 잘 다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햇볕정책은 본질적으로 옳았습니다. 여전히 북한을 상대로 지속적이고 진지하게 대화를 한다면 핵 없는 한반도의 목표 달성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데.
“어떤 위대한 지도자에게도 그런 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화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평가 역시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김 전 대통령이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건강악화로 이어졌다는데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비통해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장례식에까지 참석한 건 대단한 정성이었다고 봅니다. 큰 슬픔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 오도엽 | 시인
김대중선생과 40년 인연
이소선이 김대중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지난 6월11일 6·15 공동선언 9돌 기념식장에서다. 이날 김대중 선생은 과거 50년 동안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걱정이라는 연설을 하였다. 연설을 마친 김대중 선생이 휠체어를 타고 단상을 내려오자 이소선이 달려갔다. 김대중 선생은 이소선의 손을 꼭 잡으며 “어머니는 걸어오셨어요?”하고 물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당신이 원망스러웠나 보다. 헤어지며 김대중 선생은 이소선에게 “건강하셔야 돼요, 건강하셔야 돼요”를 되풀이하며 당부했다. 김대중 선생은 이소선을 만나면 늘 건강을 챙겼다.
2007년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 이소선.
6월11일 김대중 선생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이소선은 그날 밤 장롱을 뒤지기 시작했다. “엄마, 어디 피란가요? 또 잠 안 오니까 장롱 뒤적이는 거지. 금붙이라도 나올까봐 그러나.” 이소선을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본다. “썩을 놈, 모르면 가만히 있어. 힘들어 죽겠구먼.” 이소선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다음날 아침에 이소선을 만나니 손목에 못 보던 시계를 차고 있다. 몸에 뭐 달고 다니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이소선이다. 그런데 갑자기 시계를, 그것도 이소선의 자그마한 손목에 유난히 크게 도드라진 시계를 차고 있다.
“참, 살다 보니 별일이네. 어머니가 시계도 차시고.”
“야, 이거 찾느라고 어제 밤새 장롱을 몇 번 뒤졌다.” 이소선은 시계를 매만지며 말한다. “어제 내가 김대중 선생을 만나고 오지 않았느냐. 건강이 너무 안 좋으신 거 같아. 그래서 너무 가슴이 아파. 나한테 만날 어무니 건강하세요, 건강하세요 했는데 김대중 선생 건강이 더 안 좋아 보여. 그래서 이 시계를 찾은 거 아니냐. 나도 몸이 안 좋으니 이제 자주 찾아가 볼 수 없고, 이렇게 시계라도 몸에 지니고 있으면 김대중 선생을 보는 거 같으니.”
손목에 찬 시계는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재직 시절 청와대로 이소선을 초청할 때 준 거다. 이미 건전지가 다 되어 시계는 멈춰 있다. 이소선은 멈춘 시계를 차고 김대중 선생과 맺은 좋은 인연 속에 한없이 머물고 싶은가 보다.
이소선의 삶을 기록한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책을 낼 때 의도(?)적으로 유명한 정치인들과 얽힌 이야기들은 뺐다. 하지만 김대중 선생과 얽힌 이야기는 도저히 뺄 수가 없어 두 꼭지를 다뤘다. 그만큼 이소선에게 김대중 선생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으로 맺어진 인연은 40년을 끈질기게 이어왔다. 이소선에게 김대중 선생은 자기의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는 지기지우와 같은 존재다. 김대중 선생이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영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소선은 동교동 집으로 찾아갔다. 그냥 영국에 가서 쉬다 오면 되지 왜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소리를 하느냐고 이소선은 김대중 선생한테 따졌다. 그때 김대중 선생이 슬그머니 이소선 곁으로 다가와서 귀엣말을 하였다. “어머니,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내가 영국에 가기도 전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렇게만 아세요.” 이소선은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긴 정치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이소선은 김대중 선생과 사적인 관계를 넘는 공적인 일에 부딪히면 독설을 퍼붓는다. 청와대를 찾아가 “대통령이 됐으면 당신을 죽이려고 한 국가보안법부터 없애야지, 금반지 모으는 일부터 하느냐”고 쏘아붙였다. 이런 이소선에게 김대중 선생은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보이지 않게 이소선과 민족민주열사 유가족들을 챙겨주었다. (유가족들의 쉼터 ‘한울삶’ 집을 살 때 도와준 일화는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 자세히 나왔으니 여기서는 건너뛴다.) 그래서 이소선은 김대중 선생이 유가족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지난 13일 병문안을 가겠다고 나섰던 이소선은 창신동 골목을 나서다 기운이 없어 뒷날로 미루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더욱 애통해한다.***
옥중사유(獄中思惟) /박성수 논설위원
헛된 삶 이어가며 부끄러워 하느니/ 충절 위해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하늘 가득 가시 자르는 고통으로/ 길게 부르짖지만 저 달은 많이 밝다.” 만해 한용운의 ‘기학생’(寄學生)이라는 한시(漢詩)다. 한용운 선생은 이 시를 감옥에서 썼다. ‘님의 침묵’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면 이 시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지가 뚜렷한 작품이라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감옥은 도서관이자 사색의 공간이었다. 그는 생전에 아놀드 토인비, 버트런드 러셀 등의 책을 읽고 “감옥에 안 갔으면 이런 진리를 모른 채 죽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에 갇혀있는 동안 가족에게 쓴 29통의 ‘옥중서신’은 마치 그람시의 옥중편지를 연상케 한다. 손바닥만한 봉함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 내려간 편지 속에는 ‘인간 김대중’의 애환이 묻어있다. “면회실 마루 위에 세 자식이 큰절하며/ 새해와 생일하례 보는 이 애끊는다/ 아내여 서러워마라 이 자식들이 있잖소…”로 시작하는 청주교도소 시절의 ‘옥중단시’는 고뇌하는 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준다. 김대중의 철학과 사상, 문학이 감옥에서 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장서는 약 3만권. 책갈피마다 손때가 묻어 있다고 한다. 행마다 줄을 긋고 메모를 했기 때문이다. “독서는 정독하되, 자기나름의 판단을 하는 사색이 꼭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저자의 생각을 넓고 깊게 수용할 수 있다.” 김대중 어록에 나오는 말이다. 굳은 신념은 사슬로 묶을 수 없고 자유로운 영혼은 감옥에서도 꺾이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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