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탈진 상태서도 '민주주의 위해 싸우겠다'" |
전직 외신특파원들의 회고 "누구에나 친절·정직…늘 희망 얘기 평생 통일 추구, 민주주의 확신 가져" |
미국의 대표적인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82) 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과 돈 오버도퍼(78) 존스홉킨스대학 교수는 1960~70년대 <워싱턴 포스트>의 도쿄 특파원이었다. 해리슨은 68~72년, 그리고 오버도퍼는 72~75년에 도쿄에 머물며 수시로 서울을 찾았다. 이들이 기억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40년 전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18일(현지시각)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두 전직 특파원들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말을 시작했다.
해리슨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때는 68년이었다. “당시 그는 한 국회의원일 뿐이었지만, 군사정권과의 싸움을 막 시작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젊은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영삼·김대중에게 주목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때부터 ‘통일’을 얘기했다. 놀라운 건 그때 얘기했던 통일의 방식과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좀더 정교해졌을 뿐이다”라고 해리슨 선임연구원은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첫째,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을 꺾어 한국의 민주화에 큰 공헌을 했다. 더 중요한 건 남북관계의 새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통일을 얘기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평생에 걸쳐 끝까지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 » 정진석 추기경 등 종교계 인사들이 19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시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으로 각각 들어서고 있다. 김경호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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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계종 총무원장 등 종교계 인사들이 19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시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으로 각각 들어서고 있다. 김경호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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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19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노르베르트 바스 주한 독일대사가 조문을 위해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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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정직했고, 일관됐다. 그리고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늘 희망에 차 있었다”고 기억했다. 해리슨 선임연구원은 “그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 더 안타깝다. 한반도는 아직도 김대중을 필요로 하는데…”라고 말했다.
해리슨에 이어 도쿄 특파원을 맡은 오버도퍼 교수는 72년 도쿄에서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그는 첫 만남에 대해 “매우 스마트하고, 큰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는 끝이 안 보이던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독재와 탄압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전했다. 그는 73년 김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에 납치됐다가 풀려난 직후, 동교동 자택에서 맨 먼저 김 전 대통령을 인터뷰한 기자다. 그날의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얼굴에 상처가 나고,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싸우겠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햇볕정책에 대해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이상은 남과 북의 공존이다. 현재 북-미 관계의 바람직한 모습이 제재냐 화해냐 하는 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나는 그의 햇볕정책이 지금도 여전히 가장 유효한 정책이라고 믿는다.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평화를 가져온다. 이는 단순하지만 위대한 개념이다. 북한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 나는 햇볕정책 이외의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망명지서 뿌린 ’인권’ 씨앗 ‘민주화’로 꽃펴 |
워싱턴의 DJ 자취 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주항쟁 직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뒤 미국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망명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으나, 부인 이희호씨는 사지에서 돌아온 남편과 저녁을 함께할 수 있었던 그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로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83년 워싱턴에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했다. 김 전 대통령은 연구소를 터전으로, 미국 각지에서 강연회등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의 정치인, 학자, 사회단체 지도자, 언론인 등과도 긴밀한 유대를 쌓았다. 문동환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했다. 통일문제를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강연을 하는 등 잠시도 쉬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85년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뒤에는 연구소 문을 닫을 것을 요구했다. 현재 애틀란타에 거주하는 민수정 전 인권문제연구소장은 “2000년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뵀는데, ‘이제 한국의 민주화도 일어났다. (연구소를 계속 두면) 정치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활동을 멈추라’고 했다”며 “반대가 있었지만, 뜻에 따라 폐쇄했다”고 전했다. 민 소장은 “지난 2007년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한국민주평화연구소’가 새로 설립돼 막 활동을 하려던 때에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게 됐다”고 말했다. 워싱턴에는 또 인권문제연구소의 후신 격인 ‘한민족경제비전연구소’(소장 신대식 목사)가 설립돼 역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기리고 있다. 연구소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 그리고 해외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생을 바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고 말했다. 한민족경제비전연구소는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에도 워싱턴지역 40여단체 합동으로 범동포추모위원회를 구성하고 합동분향소를 운영한 바 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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