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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납치 탈진 때도 `민주주의 위해 싸울 것` 외신특파원들 회고

by 싯딤 2009. 8. 24.
"납치 탈진 상태서도 '민주주의 위해 싸우겠다'"

전직 외신특파원들의 회고
"누구에나 친절·정직…늘 희망 얘기
평생 통일 추구, 민주주의 확신 가져"




미국의 대표적인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82) 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과 돈 오버도퍼(78) 존스홉킨스대학 교수는 1960~70년대 <워싱턴 포스트>의 도쿄 특파원이었다. 해리슨은 68~72년, 그리고 오버도퍼는 72~75년에 도쿄에 머물며 수시로 서울을 찾았다. 이들이 기억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40년 전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18일(현지시각)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두 전직 특파원들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말을 시작했다.

해리슨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때는 68년이었다. “당시 그는 한 국회의원일 뿐이었지만, 군사정권과의 싸움을 막 시작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젊은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영삼·김대중에게 주목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때부터 ‘통일’을 얘기했다. 놀라운 건 그때 얘기했던 통일의 방식과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좀더 정교해졌을 뿐이다”라고 해리슨 선임연구원은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첫째,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을 꺾어 한국의 민주화에 큰 공헌을 했다. 더 중요한 건 남북관계의 새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통일을 얘기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평생에 걸쳐 끝까지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 정진석 추기경 등 종교계 인사들이 19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시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으로 각각 들어서고 있다. 김경호 기자

» 조계종 총무원장 등 종교계 인사들이 19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시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으로 각각 들어서고 있다. 김경호 기자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19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노르베르트 바스 주한 독일대사가 조문을 위해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정직했고, 일관됐다. 그리고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늘 희망에 차 있었다”고 기억했다. 해리슨 선임연구원은 “그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 더 안타깝다. 한반도는 아직도 김대중을 필요로 하는데…”라고 말했다.

해리슨에 이어 도쿄 특파원을 맡은 오버도퍼 교수는 72년 도쿄에서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그는 첫 만남에 대해 “매우 스마트하고, 큰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는 끝이 안 보이던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독재와 탄압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전했다. 그는 73년 김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에 납치됐다가 풀려난 직후, 동교동 자택에서 맨 먼저 김 전 대통령을 인터뷰한 기자다. 그날의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얼굴에 상처가 나고,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싸우겠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햇볕정책에 대해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이상은 남과 북의 공존이다. 현재 북-미 관계의 바람직한 모습이 제재냐 화해냐 하는 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나는 그의 햇볕정책이 지금도 여전히 가장 유효한 정책이라고 믿는다.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평화를 가져온다. 이는 단순하지만 위대한 개념이다. 북한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 나는 햇볕정책 이외의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망명지서 뿌린 ’인권’ 씨앗 ‘민주화’로 꽃펴

워싱턴의 DJ 자취

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주항쟁 직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뒤 미국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망명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으나, 부인 이희호씨는 사지에서 돌아온 남편과 저녁을 함께할 수 있었던 그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로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83년 워싱턴에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했다. 김 전 대통령은 연구소를 터전으로, 미국 각지에서 강연회등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의 정치인, 학자, 사회단체 지도자, 언론인 등과도 긴밀한 유대를 쌓았다. 문동환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했다. 통일문제를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강연을 하는 등 잠시도 쉬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85년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뒤에는 연구소 문을 닫을 것을 요구했다. 현재 애틀란타에 거주하는 민수정 전 인권문제연구소장은 “2000년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뵀는데, ‘이제 한국의 민주화도 일어났다. (연구소를 계속 두면) 정치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활동을 멈추라’고 했다”며 “반대가 있었지만, 뜻에 따라 폐쇄했다”고 전했다. 민 소장은 “지난 2007년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한국민주평화연구소’가 새로 설립돼 막 활동을 하려던 때에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게 됐다”고 말했다.

워싱턴에는 또 인권문제연구소의 후신 격인 ‘한민족경제비전연구소’(소장 신대식 목사)가 설립돼 역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기리고 있다. 연구소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 그리고 해외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생을 바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고 말했다. 한민족경제비전연구소는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에도 워싱턴지역 40여단체 합동으로 범동포추모위원회를 구성하고 합동분향소를 운영한 바 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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