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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추모 시론

by 싯딤 2009. 8. 24.
“DJ 평화공존이 위기의 동북아 해법” / 와다 하루키


지난해 11월 한국민주화 취재때 만나
‘민주주의 위기’ 한-일 공동협력 강조도

»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지난해 11월 나는 김대중 선생과 인터뷰를 했다. 당시 나는 ‘한국민주화운동의 사람들’이란 주제로 ‘오럴 히스토리’(말로 전하는 역사) 책을 내고 싶은 생각에서 20명 정도 사람과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다. 선생에게도 요청하자, 응해줬다.

선생의 생애, 한국 민주혁명에 대한 헌신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변함없는 열의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일본 청년에 대한 메시지를 부탁했다. 선생은 “일본의 민주주의가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토마스 제퍼슨이 말한대로 희생을 치르고 쟁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지켜나가지 않으면, 빼앗기고 다시 독재자를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일본의 우경화가 진행되면서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보고 계셨다. 현재 한국도 그런 경향이 있다며 일본과 한국의 청년들이 교류해서 진정한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매우 중요한 말이라고 느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녹음기를 끄고 잠시 선생과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도 이야기 했다. 김대중 정부는 일본 정부에 아시아여성기금(1995년 옛 종군위안부에 금전적 보상 등을 위해 일본 정부의 출자금과 일본 국내외 모금으로 조성) 설치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또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지 않은 할머니에게는 한국 정부가 거의 같은 지원금을 지급했다.

언뜻 그것은 문제 없는 방법처럼 보였지만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은 사람은 한국에서 비난받을 것을 우려해 그 사실을 감추게 된다. 수령한 사실을 감추면 한국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게 된다. 이것이 할머니들을 심리적으로 얼마나 괴로운 입장으로 내몰게 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아시아여성기금은 해산(2007년 3월)됐다.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지는 수요집회를 묵살하고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할머니들도 괴로워하고 있으며, 수령을 거부한 과반수의 할머니들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김대중 선생에게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해주지 않겠는가라고 요청했다. 선생은 대통령을 그만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 문제에 관해서 구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이것이 김대중 선생을 뵌 마지막 날이었다.

올해 봄 동북아의 위기가 고조되자, 나는 김대중 선생이 한번 더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위원장과 이야기하면 어떻겠느냐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입원하고 말았다. 2000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공동선언을 발표했지만, 마치 그것을 역행하는 움직임만이 진행되는듯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도 멋진 움직임이었다. 위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연 화해와 공존, 협력의 길을 걷는 것 이외에 동북 아시아에서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다.

김대중 선생의 서거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게 되리라. 김대중 선생의 장례식은 ‘김대중의 길’을 추구하는 거대한 시위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물결 속에 김대중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두 전직 대통령이 외로웠던 이유 /이원재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에 위기가 닥쳤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나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등졌다.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왜 이렇게 외로워 보일까?

불편하지만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할 진실 하나. 우리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손쉽게 그들에게 아웃소싱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역시 하청받은 가치를 구체화할 수 있는 기술과 조직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당과 사회에는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해낼 진보적 싱크탱크가 없었다. 결국 기업연구소와 국책연구소에서 지식을 빌렸다. 수십년 동안 그 반대의 가치를 구체화하는 데 골몰했던 그런 싱크탱크에 기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 두 대통령에게 ‘갑’의 행세를 시작했었다. 그 정부가 현실과 타협하는 찰나, 그들을 거칠게 비판했다. 마치 품질이나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하청업체를 다루듯 말이다. 두 대통령 역시, 제대로 된 연구소조차 갖지 못한 개인사업자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달랐다. 1980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은 보수주의 정치와 시장만능주의 경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흐름은 전세계로 번져, 한국이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를 맞고 현재의 경제체제까지 오게 된 출발점이 됐다.

그러나 보수주의와 시장만능주의는 그가 만든 게 아니다. 1960년대부터 이미 미국 사회를 보수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은 1973년에 출범한 보수적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 뒤 헤리티지재단은 보수적 지식의 거대한 진지 구실을 하며 미국 사회에 그 가치를 확산시켰다. 결국 레이건 집권과 정책 방향 설정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버락 오바마도 달랐다. 2009년 대통령에 취임한 오바마는 레이건 시절부터 짜인 보수주의와 시장만능주의에 변화를 꾀할 것이라는 기대를 얻고 있다. 특히 의료보험 등 공공부문을 강화하고, ‘사회혁신’ 개념을 도입해 새로운 방법의 사회문제 해결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를 얻고 있다. 이런 새로운 방향 가운데 상당 부분은 2003년 ‘진보진영의 헤리티지재단’을 표방하며 설립된 진보적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5년 동안 일관되게 대안을 만들고 확산시킨 결과가 오바마 집권과 정책 방향 설정이다.

놀라운 것은 양쪽 싱크탱크 모두 민간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헤리티지재단은 맥주재벌 조지프 쿠어스 등 거액기부자도 참여했지만, 재원 가운데 상당 부분은 한 달에 25~50달러를 내는 소액기부자들로부터 나왔다. 미국진보센터의 경우 금융 거부 조지 소로스의 열린사회연구소(Open Society Institute)와 샌들러 부부 등 그 가치에 동의하는 민간 기부자가 자금을 댔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기틀을 닦았다.

미국과 한국의 다른 점은, 사람과 가치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 있었느냐에 있다. 진보든 시장만능주의든 가치가 먼저 있고, 그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서 독립적 싱크탱크가 있고, 그리고 레이건과 오바마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개혁적인 한국 대통령이 외롭지 않으려면, 국책연구소나 기업연구소를 넘어설 수 있는 규모 있는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충분히 대중적이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구체적 정책대안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재일동포에게 민주화·통일의 희망 심어줘” / 곽동의 한통련 상임고문

DJ, 한민통 활동빌미 납치·투옥
구명운동 앞장 등 ‘남다른 인연’
“하늘이 무너져 내린 기분이다”

» 곽동의 한통련 상임고문
팔순을 앞둔 재일 통일운동가의 목소리에는 큰 슬픔이 묻어났다. 곽동의 재일한국민주화통일연합(한통련) 상임고문(79·사진)은 19일 저녁 <한겨레>와 전화통화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민주화의 상징이고 남북화해 시대를 개척한 탁월한 정치지도자를 잃어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곽 고문은 김 전 대통령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일본 도쿄의 그랜드플라자호텔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간 한국인이 바로 그였다.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결성작업에 참여하고 있던 그는 이날 전화 연락을 받고 사건발생 5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마취제 냄새진동했다. 그 자리에서 성명서를 쓰고 기자회견을 열어 중앙정보부 소행이라고 고발했다.”

곽 고문은 “남북관계가 어려울수록 김 전 대통령 같은 분이 살아계셔야 하는데 더욱 애석하다”며 “김 전 대통령은 재일동포에게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 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높은 뜻과 업적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민통은 김 전 대통령에게 커다란 짐이면서도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한민통 의장에 취임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가 납치당했다. 1978년 대법원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로 낙인 찍힌 한민통은 81년 김 전 대통령이 반국가단체의 수괴 혐의로 사형판결을 받는 데 빌미가 됐다.

1973년 김대중 구출위원회를 결성해 납치사건 진상규명 활동을 펼쳤던 곽 고문은 법원의 사형판결 이후 ‘김대중 구명운동’을 주도해 120만명의 서명을 모으는 등 구명작업에 앞장섰다. 그러나 1998년 김 전 대통령의 일본 방문 때 재일동포 리셉션 명단에 한통련 관계자는 포함되지 못했다.

그는 서운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보상이나 칭찬받기 위한 일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소소한 아쉬움은 없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 퇴임 뒤인 2004년 대한민국 여권을 받고 정식으로 40여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 김 전 대통령과 해후를 한 기억과 기쁨이 더 선명하다고 했다. 당시 만남에서 김 전 대통령이 “미국이 시켜서 민주주의를 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는 국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다른 나라 민주주의와 뿌리가 다르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19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 당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의 한국청년동맹위원장이었던 그는 쿠데타 지지 움직임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민단에서 제명됐다. 줄곧 입국금지 상태였던 한통련 간부들에게 노무현 정부 들어 귀국의 문이 열렸으나 현 정부에서는 다시 조국 방문 길이 막혔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데”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인동초 김대중 /백승종

우리 근현대사에는 풍운의 영웅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각별한 흠모의 대상은 도산 안창호와 백범 김구 선생일 것이다. 이분들을 언급할 때면 우리는 관습적으로 “선생님”이란 칭호를 붙인다. 존경심이 가득 담긴 이런 칭호에 어울릴 만한 요즘의 정치가는 거의 없다. 며칠 전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예외다.

그의 별명은 디제이(DJ)다. 하지만 그 삶이 고난의 역정이었기에 “인동초”라 불리기도 했다. 역대 독재정권 아래 가택연금을 당한 것이 6년 반, 여기에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5년 반, 국외로 쫓겨난 것도 3차례에 모두 3년이었다. 디제이는 최소 15년 동안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이 나라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때도 사정은 복잡다단했다. 역사는 그에게 가혹한 시련만을 연거푸 강요했다.

산이 높으면 그림자도 길다. 그에 대한 사회 일각의 호된 비판은 끝도 없다. 위험천만한 급진주의자, 파벌정치의 괴수라는 매도, 권력욕의 화신이자 지역감정의 근원이라는 비난이 있다. 심지어 보수진영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조차 북한과 뒷거래를 통해 이뤄졌다며 의혹을 제기했으니, 중구난방이었다.

그가 평생을 바친 것은 민주화요 남북화해였다. 이런 업적을 세계 주요 언론과 학자들도 인정한다. 그는 죽음의 공포가 앞길을 가로막았을 때조차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갔다. “행동하는 양심”의 외길 평생이었다. 불의에 작고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듯, 디제이는 투철한 “역사의식” 덕분에 그럴 수가 있었다. 역사의 흐름에 대한 통찰과 신념이 있었기에, 그는 역사의 난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이런 인물 다시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것은 어찌된 일? 올해 들어 우리는 역사의식 투철한 두 명의 대통령을 모두 잃었다. 민주화도 남북화해도 뒷걸음만 치는 요즘, 님들의 향기 더욱 그립다. 백승종 독일 보훔대 한국학과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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