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평화공존이 위기의 동북아 해법” / 와다 하루키 | |
|
| ||||||
선생의 생애, 한국 민주혁명에 대한 헌신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변함없는 열의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일본 청년에 대한 메시지를 부탁했다. 선생은 “일본의 민주주의가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토마스 제퍼슨이 말한대로 희생을 치르고 쟁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지켜나가지 않으면, 빼앗기고 다시 독재자를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일본의 우경화가 진행되면서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보고 계셨다. 현재 한국도 그런 경향이 있다며 일본과 한국의 청년들이 교류해서 진정한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매우 중요한 말이라고 느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녹음기를 끄고 잠시 선생과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도 이야기 했다. 김대중 정부는 일본 정부에 아시아여성기금(1995년 옛 종군위안부에 금전적 보상 등을 위해 일본 정부의 출자금과 일본 국내외 모금으로 조성) 설치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또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지 않은 할머니에게는 한국 정부가 거의 같은 지원금을 지급했다.
언뜻 그것은 문제 없는 방법처럼 보였지만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은 사람은 한국에서 비난받을 것을 우려해 그 사실을 감추게 된다. 수령한 사실을 감추면 한국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게 된다. 이것이 할머니들을 심리적으로 얼마나 괴로운 입장으로 내몰게 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아시아여성기금은 해산(2007년 3월)됐다.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지는 수요집회를 묵살하고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할머니들도 괴로워하고 있으며, 수령을 거부한 과반수의 할머니들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김대중 선생에게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해주지 않겠는가라고 요청했다. 선생은 대통령을 그만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 문제에 관해서 구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이것이 김대중 선생을 뵌 마지막 날이었다.
올해 봄 동북아의 위기가 고조되자, 나는 김대중 선생이 한번 더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위원장과 이야기하면 어떻겠느냐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입원하고 말았다. 2000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공동선언을 발표했지만, 마치 그것을 역행하는 움직임만이 진행되는듯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도 멋진 움직임이었다. 위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연 화해와 공존, 협력의 길을 걷는 것 이외에 동북 아시아에서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다.
김대중 선생의 서거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게 되리라. 김대중 선생의 장례식은 ‘김대중의 길’을 추구하는 거대한 시위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물결 속에 김대중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두 전직 대통령이 외로웠던 이유 /이원재
| ||||||
불편하지만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할 진실 하나. 우리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손쉽게 그들에게 아웃소싱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역시 하청받은 가치를 구체화할 수 있는 기술과 조직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당과 사회에는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해낼 진보적 싱크탱크가 없었다. 결국 기업연구소와 국책연구소에서 지식을 빌렸다. 수십년 동안 그 반대의 가치를 구체화하는 데 골몰했던 그런 싱크탱크에 기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 두 대통령에게 ‘갑’의 행세를 시작했었다. 그 정부가 현실과 타협하는 찰나, 그들을 거칠게 비판했다. 마치 품질이나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하청업체를 다루듯 말이다. 두 대통령 역시, 제대로 된 연구소조차 갖지 못한 개인사업자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달랐다. 1980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은 보수주의 정치와 시장만능주의 경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흐름은 전세계로 번져, 한국이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를 맞고 현재의 경제체제까지 오게 된 출발점이 됐다.
그러나 보수주의와 시장만능주의는 그가 만든 게 아니다. 1960년대부터 이미 미국 사회를 보수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은 1973년에 출범한 보수적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 뒤 헤리티지재단은 보수적 지식의 거대한 진지 구실을 하며 미국 사회에 그 가치를 확산시켰다. 결국 레이건 집권과 정책 방향 설정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버락 오바마도 달랐다. 2009년 대통령에 취임한 오바마는 레이건 시절부터 짜인 보수주의와 시장만능주의에 변화를 꾀할 것이라는 기대를 얻고 있다. 특히 의료보험 등 공공부문을 강화하고, ‘사회혁신’ 개념을 도입해 새로운 방법의 사회문제 해결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를 얻고 있다. 이런 새로운 방향 가운데 상당 부분은 2003년 ‘진보진영의 헤리티지재단’을 표방하며 설립된 진보적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5년 동안 일관되게 대안을 만들고 확산시킨 결과가 오바마 집권과 정책 방향 설정이다.
놀라운 것은 양쪽 싱크탱크 모두 민간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헤리티지재단은 맥주재벌 조지프 쿠어스 등 거액기부자도 참여했지만, 재원 가운데 상당 부분은 한 달에 25~50달러를 내는 소액기부자들로부터 나왔다. 미국진보센터의 경우 금융 거부 조지 소로스의 열린사회연구소(Open Society Institute)와 샌들러 부부 등 그 가치에 동의하는 민간 기부자가 자금을 댔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기틀을 닦았다.
미국과 한국의 다른 점은, 사람과 가치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 있었느냐에 있다. 진보든 시장만능주의든 가치가 먼저 있고, 그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서 독립적 싱크탱크가 있고, 그리고 레이건과 오바마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개혁적인 한국 대통령이 외롭지 않으려면, 국책연구소나 기업연구소를 넘어설 수 있는 규모 있는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충분히 대중적이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구체적 정책대안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평 (0) | 2009.08.24 |
---|---|
시론, 기고<경향> (0) | 2009.08.24 |
납치 탈진 때도 `민주주의 위해 싸울 것` 외신특파원들 회고 (0) | 2009.08.24 |
세계의 반응 (0) | 2009.08.24 |
마지막까지 `민주주의` 화두 (0) | 2009.08.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