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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김대중과 나`

by 싯딤 2009. 8. 24.

미래 그려낸 지식인이었다

» 한상진 서울대 교수·사회학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 평화에 불멸의 공적을 남기고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가 처음 대면한 것은 1988년 총선에서 당시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한 직후였다. 나는 국립대 교수로서 야당을 돕는 것이 나라를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92년 대선 때는 초빙교수로 가르치던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시 귀국하여 텔레비전 찬조연설을 했다.

그러나 내가 김 전 대통령과 떨리는 울림으로 대화하고 공감했던 것은 93년 2월이었다. 그는 정계은퇴 선언을 한 후 영국으로 떠나 캠브리지 대학 근처에 칩거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베를린 사회연구원(WZB)에 있게 되어 2월6일 예고 없이 그를 찾아갔다. 이것이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반겼다. 그가 외로웠던 탓일까? 그는 마음 속 깊이 싸여 있던 슬픔, 분노, 감정의 응어리들을 토해냈다. 조선시대 이래 개혁정치의 어려움, 지역감정의 가공할 피해, 그를 향한 용공시비의 억울함, 그와 함께 역경을 나눈 동지들에 대한 감사, 그를 눈물로 배웅했던 국민들의 한과 열망을 반복해서 언급하면서 그는 스스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자 감격이었다.

2월7일, 김 전 대통령 내외분과 수행비서 그리고 나는 런던으로 나가 하이드 파크를 산보했고 한인교회에서 주일 미사에 참석한 후, 주영 대사관저에서 이홍구 대사를 만났다. 이 대사는 나도 잘 아는 사이여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 만남은 짤막한 인사를 제외하고는 지적인 탐구의 연속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유럽공동체에 관해 질문이 많았다. 통일문제로 화두를 옮기자 북한의 경제실정, 권력이양, 핵 문제, 동북아 국제정치 등에 관하여 자세하게 묻고, 전 통일원 장관이었던 이 대사의 의견을 경청했다. 아울러 교육문제에 관하여 한국과 영국의 차이를 주의 깊게 검토했다.

3시간에 걸친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그날의 만남은 대학 어디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대화의 성찬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연구하는 지식인의 진면목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통상적 의미의 정치인이 아니었다.

같은 해 2월24일 그는 베를린 사회연구원의 초청을 받아 <독일통일 경험과 한반도 전망>에 관해 영어로 주제발표를 했다. 그는 이때 3단계 통일방안을 처음 공식화했다. 아울러 독일 교수들의 날카로운 질문들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다음날 그는 독일경제연구소를 찾아가 독일통일의 후유증에 관해 연구책임자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울러 동베를린의 삼성전관공장, 그곳 노동자 가정 등을 방문하여 독일 통일의 이모저모를 직접 확인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김 전 대통령이 남북한 화해와 통일의 길을 구상하게 된 최초의 현장을 나누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되어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경협, 남북한 교류왕래, 긴장완화 등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아울러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미래의 인물이다. 한 보기로, 그가 1997년 9월26일, 대선 후보로서 서울대 학부 강의에 초빙되어 행한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 강연과 일련의 후속 토론은 그가 탐구한 지식의 결실이 인류의 미래에 어떤 자산이 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대통령 재임 시 그는 한반도를 통한 유라시아 문명을 꿈꾸었으며, 보편적 세계주의로 인류의 미래를 설파했다.
영면하기 전 그는 한반도와 함께 중국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2008년 4월4일, 당시 서울대를 방문한 독일의 석학 울리히 벡 교수와 나눈 중국의 미래에 관한 대화는 김 전 대통령의 당당한 지식인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이런 높은 경륜과 혜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안타깝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자 훌륭한 정치인이었지만 나는 그를 탁월한 지식인으로 본다. 미래를 향한 그의 사상과 윤리를 잘 확립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

민주주의 한반도평화 헌신…빈자리 커보여”

18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각계 인사들은 깊은 안타까움과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등을 위해 노력하신 고인의 뜻을 기리고 앞으로도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부 인사들은 김 전 대통령이 일궈놓은 남북화해의 분위기가 후퇴한 상황에서 그를 떠

나보내야 하는 현실에 한숨 짓기도 했다.

역사의 빛 어두워진 느낌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

한 시대의 정치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경륜가가 세상을 떠난 거 같아서, 역사의 빛이 어두워지는 것 같다. 그분이 돌아가셨기에, 그분의 꿈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알차게 이어질 것이다. 다만 그분이 이룩했던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 신장, 이 두 가지 소중한 가치가 1년반 동안 훼손된 가운데 떠나게 된 것이 가슴 아프다.

한 시대의 정치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경륜가가 세상을 떠난 거 같아서, 역사의 빛이 어두워지는 것 같다. 그분이 돌아가셨기에, 그분의 꿈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알차게 이어질 것이다. 다만 그분이 이룩했던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 신장, 이 두 가지 소중한 가치가 1년반 동안 훼손된 가운데 떠나게 된 것이 가슴 아프다. ***

»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
남북간 화해 분수령 이뤄
강만길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김 전 대통령 일생의 여러 공적 가운데 첫째를 꼽으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크게 신장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공적은 남북관계를 대결과 투쟁에서 화해와 협력의 역사로 바꿨다는 대목이다. 지난 2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은 화해라는 ‘역사의 분수령’을 이뤘다.

» △인터뷰/<인물 한국사>10권 완간 이이화. 김경호기자
역사의식 갖춘 지도자 /이이화 역사학자

역사의식을 갖춘 보기 드문 정치 지도자였다. 독서광이었고, 역사책을 많이 읽은 분이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한 인물이 예수와 전봉준이라고 했을 정도다.

물론 그에게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있다. 드물게 역사의식을 갖추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분이지만, 취임 뒤는 외환위기를 수습하느라 그랬는지 빈부간·계층간 격차를 좁히는 데 실패했다.

» 한상진/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그의 정신 계승·실천하자 /한상진 서울대 교수

근래에 회복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던 터에 이런 일이 생겨 너무 충격적이다. 세상이 깜깜해지는 느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신 지 얼마 안 돼 김 전 대통령까지 가시니 그 슬픔이 더 큰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이 열었던 한 시대가 형식적으로는 마감을 고한 셈인데, 우리 앞엔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해야 할 절박하고 중차대한 시간이 펼쳐지고 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1987년 이후 20년간 진행된 민주화의 결실이 무엇인지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그 성과로 인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변화를 요구하는 개인과 세력들이,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새로운 틀과 방향으로 힘을 모으는 새로운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 김용택 시인 창간기념 대담 탁기형 선임기자

눈물 쏟아질 것 같다 /김용택 시인

나도 그렇지만 아버님은 일제시대 때부터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다. 제5 공화국과 유신시절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던 참혹했던 시절, 아버님은 늘 “대통령감은 김대중씨”라며 “살아서 그가 대통령 되는 것을 보면 한이 없겠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그 분이 대통령이 되기 직전에 돌아가셨다. 그 뒤 설날 산소에 가서 절하며 그 분이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고 고하고, 이젠 마음 활짝 펴시라고 말씀드렸다. 노 전 대통령에 이어 김 전 대통령마저 떠나니 세상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고 텅빈 것도 같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슬픔이랄까, 한 같은 걸 느낀다.

» 6월17일 오후 북한산 금선사에서 주지 법안 스님을 만났다. 지난 6월15일, 조계종 스님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법안 스님은 그 주역 가운데 하나다.

인권선진국 기틀 마련
/법안 스님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대표

김 전 대통령은 현대사에서 민주화·통일·인권에 대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권위주의 시대, 독재 시대를 보내던 한국 사회를 민주화 시대로 이끄는 데 큰 지도력을 발휘했다. 1980년대에 불교계도 재야에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당시 야당 총재이던 김 전 대통령에 자문을 구하면 하나 하나 늘 진정어린 답변을 해줬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민족의 숙원인 남북관계, 통일 문제에 지대한 역할을 했고, 인권 문제를 세계에 부각시켜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
민주·평화 헌신한 어르신 /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소중한 분을 잃게 됐다. 전직 대통령이자 존경받는 사회지도자, 사회의 어르신이셨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너무나 안타깝다. 민주주의가 현격히 후퇴하고, 남북관계도 위태로운 때여서 고인의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 대통령 재임시절엔 한국 복지제도에 큰 획을 그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를 시행했다. 김 전 대통령이 강조하던 ‘행동하는 양심’은 시민들에게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리잡았다.*

인도적 북한 지원으로 ‘화해뜻’ 이어야 / 윤공희 대주교

» 윤공희 대주교·전 천주교광주대교구장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4월께 이효상 국회의장 공관 만찬 자리였다. 국회의장이 천주교 주교들과 가톨릭 신자인 국회의원들을 초청했다. 누군가 ‘오늘 국회에서 김대중 의원이 의사일정을 끌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연설했다’며 칭찬했다. 젊고 유망한 가톨릭 정치인이 나왔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그 뒤로 몇차례 김 전 대통령을 만났고, 1973년 대주교가 된 뒤부터 성탄 카드를 주고 받았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으로 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겪었다. 천주교계는 광주민중항쟁으로 구속된 양심수들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80년 7월 하순께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이던 전두환씨를 만났다. 중앙청 옆 건물에서 전씨를 만나 구속자 전면 사면을 설득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대법원은 81년 3월31일 김 전 대통령 등 광주 관련자 5명에게 원심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나는 인혁당 사건처럼 구속자들이 곧 처형될 수도 있다는 다급한 마음에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 대통령 면담 문제를 협의했다. 수도경비사령부 군종 신부를 통해 대통령 면담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81년 4월1일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사면을 호소했다. 전두환씨는 굳은 표정으로 “경찰을 죽인 사람을 어떻게 그냥 사면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천근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명동성당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81년 4월3일 청와대 비서실에서 “곧 사면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고, 낮 12시 뉴스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5명이 모두 무기형으로 감형된다는 발표를 들었다.

87년 9월로 기억된다. 정치활동을 재개한 김 전 대통령이 광주대교구를 찾았다. 수많은 시민들이 광주대교구청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울타리가 무너지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에게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납치됐던 사건을 화제로 삼아 위기 상황에서 신앙으로 영적인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천주교계에서 5월 양심수들의 구명 운동을 펼쳐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면서도 경제·정치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지식인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미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신부들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에 왔을 때 김 전 대통령과 리영희 선생을 초청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을 영어로 유창하게 설명하던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김 전 대통령이 9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뒤 영국으로 떠나기 전 ‘한결같은 지지와 성원을 보낸다’는 내용을 담은 성탄 카드를 보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아, 이제 한 시대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1일 서울 국회의사당 마련된 고인의 빈소를 찾아 명복을 빌 생각이다. 22일 명동성당에선 김 전 대통령의 추모 미사를 집전한다. 김 전 대통령은 박해를 많이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념을 지키신 지도자이자, 그야말로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무엇보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고,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화해에 기여하는 등 큰 일을 했다. 민족화해를 위한 노력이 더 진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시는 것이 참 애석하다. 민족의 화해를 위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 계속되길 소망한다. 윤공희 대주교·전 천주교광주대교구장



만날 때마다 가슴에 파고든 ‘감동’/이토 나리히코

» 이토 나리히코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

내가 처음 김대중씨를 만나뵌 것은 1983년 미국 워싱턴 교외의 아파트였다. 김대중씨는 1980년 가을 군사재판에서 1, 2심 모두 사형판결을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당해 사형이 확정됐다. 이후 전두환 정권과 미 레이건 정권의 정치적 협상으로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다시 같은 해 3월 전두환씨의 대통령 취임에 따른 사면으로 20년으로 감형됐다. 1982년 12월23일 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보내진 뒤 워싱턴 교외의 아파트에서 살게 된 것이다.

납치사건 규명운동중 워싱턴 찾아가 병문안

나는 1973년 8월 잡지 <세계>에서 김대중씨의 인터뷰 기사 ‘한국민주화에의 길’을 읽고 김대중씨가 뛰어난 민주주의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 직후 김대중씨가 한국의 비밀기관원에 의해 납치된 것에 충격을 받고 김씨의 원상회복과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1년 1월 김대중씨를 병문안 하기 위해 워싱턴 교외로 김씨를 방문한 것이다. 1973년 8월 납치사건 이후 10년에 걸쳐 군사 독재정권에 줄곧 탄압을 받아온 김대중씨는 찾아온 우리들에게 “일본의 여러분들이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 준 점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한 뒤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많은 정치범이 투옥된 상황에서 나 혼자 위로와 병문안의 말을 듣는 것은 정말로 마음 괴롭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있는 것은 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고 설령 감옥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지금은 하루빨리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했다. 나는 몸시 감명을 받았다.

김대중씨는 또 당시 만남에서 “납치사건 관계를 모두 용서하고 그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전두환 장군의 쿠데타가 없었다면 납치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완전히 해결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납치사건은 김대중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런 사건이 유야무야 되는 것을 허용하면 제3세계 정치인의 인권은 지켜질 수 없다. 제3세계 정치인의 한명으로서 제3세계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납치사건을 철저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도 말했다.

우리들이 일본에 돌아오자 일본 정부는 “납치사건은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1983년 8월8일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앞으로는 미국 연방수사국 방식으로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분명히 수사의 ‘막내리기’를 의미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에 초당파 국회의원, 대학 교수, 목사, 언론인 등 45명으로 1984년 1월23일 ‘김대중납치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해 본격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개시했다. 나는 1984년 7월 다시 미국을 방문해 우선 피해자 김대중씨로부터 납치의 체험을 자세하게 듣고 동시에 많은 자료를 모아 1987년 ‘전보고 김대중 사건’을 출판했다.

지난해 마지막 만남…‘선민주’ 깊은 뜻 배워

1987년 8월 나는 자택연금이 해제된 김대중씨의 초청으로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그때 ‘전보고 김대중 사건’의 한국어판이 준비돼 내가 서문을 써 출판됐다. 그러자 납치사건 최고책임자로 보이는 이후락씨가 “김대중의 생명을 구한 것은 자신이다”라고 자처했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은 살해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대중씨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말했다. 명언이다.

내가 김대중씨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해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8주년 기념의 국제심포지엄에 초청된 때였다. 김대중씨는 ‘선민주’라는 말로 민주주의야말로 평화, 인권, 번영 등 모든 기초라는 점을 가르쳐주었다. 민주로부터 바야흐로 통일로 이르는 도정에서 타계한 것은 정말로 마음으로부터 애석하다. 합장. 이토 나리히코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 *

“책임·원칙 중시… 참 노력하신 분”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김대중 전 대통령 '분신'으로 불리는 권노갑(79) 전 민주당 고문. 그는 김 전 대통령의 목포상고 후배로 66년, 정치적 동지로 48년을 함께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한국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하는 1961년 5대 국회 이후 지금까지 동교동캠프의 '좌장'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말씀해 주시죠.
"제가 목포상고 1학년 때 김 전 대통령은 5학년이었죠. 웅변도 잘하고, 잘 생기고 우리의 우상이었습니다. 내가 목상 1학년, 14세 때였으니까 그분을 알게 된 게 햇수로 66년이지요. 그분을 본격적으로 돕게 된 것은 61년 5대 강원도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부터였습니다. 목포여고영어 선생을 하다가 김대중 선배께서 외롭게 인제에서 홀로 선거운동을 한다고 해서 뛰어가서 1주일 동안 도운 게 오늘에 이르렀군요."

어머니에게 극심한 효심
-그분은 인간적으로 어떤 분이었나요.
"원칙주의자였습니다. 책임을 강조하는 분이었습니다. 참으로 노력하는 분이었습니다. 공부하고 노력해야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이었지요. 들에게
'나하고 함께 갈 사람은 노력해라. 내가 100m 앞서가는데 뒤떨어지면 함께 갈 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분은 낙오자가 되지 마라. 내가 손을 잡을 수 있는 위치에 항상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과는 동거는 할 수 있어도 동락은 함께 못한다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용인술이 남달랐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었나요.
"그분은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요. 그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또한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도 노력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능력이 있으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싫어하셨습니다. 그분은 특히 잡기를 싫어하셨어요. 장기, 바둑, 화투는 전혀 못하셨지요. 특히 도박하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고초 함께 겪은 자식 사랑 각별
-그분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신 사례를 말씀해 주시지요.

"5분의 연설을 위해 몇 시간을 준비하는 분입니다. 한 예로 3선 개헌 반대를 위한 집회가 효창구장에서 있었을 때 김 전 대통령은 저하고 하루 전날 태평로 올림피아 호텔에 들어가서 녹음기를 갖고 연설준비를 하고 연습까지 했어요. 물론 당일 대히트를 쳤지요. 그날 이후 연설 잘하는 김대중으로 국민들이 알기 시작했습니다. "
-책을 많이 읽은 분이라지요.
"예, 그분이 소장하고 있는 책이 1만권이 넘습니다. 정말 다방면에 박학다식하신 분입니다. 독서를 정말 많이 했던 분입니다. 유명한 신간은 거의 다 보셨습니다. 소설, 역사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듭니다. 주요한 것이 있으면 요점별로 메모하시고 책에는 줄을 치며 읽으셨습니다."
-가족에게는 어떤 분이었나요.
"세 아들이 아버지 때문에 너무 많은 피해를 봐서 늘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식 사랑이 각별했습니다. 그분은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심을 보였습니다. 아침에 국회에 갈 때나 저녁에 돌아와서 어머니 방을 찾아 꼭 인사를 드렸지요. 동생 2명의 뒷바라지도 했어요. "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좌파라는 '색깔론'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념과 용공조작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목포에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출마했다가 낙선한 홍모씨가 5대 인제 보궐선거에서 자유당 선전요원으로 나타났어요. 거기서 그 사람이 '나는 김대중이를 잘 아는데 그는 빨갱이다'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아마 용공조작의 시작일 것입니다. 좌익용공이라는 굴레가 평생을 따라다녔는데 이는 명백한 정치음모이고 조작입니다. 저는 그분의 이념적 좌표는 중도 우파라고 봅니다.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지만 급진적이진 않습니다."

'비자금설' 결코 사실 아니다
-DJ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립니다.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DJ 재산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진실이 뭡니까.
"세상에는 거짓이 진실처럼 알려질 때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김 전 대통령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 홍걸이가 대치동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어요. 집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 숨겨놓은 재산이 있으면 제일 사랑하는 막내아들 집 한칸을 만들어주지 않았을까요? 최근까지 취직도 못하고 있다가 이제 중국에서 겨우 취직을 했어요. 사모님께서 가장 마음 아파하시지요. 세간에 떠돌던 DJ 비자금 문제는 내가 자신있게 말합니다. 결단코 사실이 아닙니다." 서울신문. 이강렬 대기자 ***
인간적,리더십 뛰어난 매력적인 사람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김대중씨는 1925년생이니까 호적상 나이로는 나와 동갑이다. 그러나 실제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많은 것으로 안다. 1973년 일본에 온 김대중씨를 처음 만났다.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농담을 잘하고 화술이 대단했다. 특히 고향의 토속적 사투리를 이용한 우스갯소리가 많았다. 시골 사람들하고 허물없이 대화할 줄 알았고, 지적인 사람을 만나면 지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인간적인가 하면 또 정치적으로는 매우 정략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두뇌가 명석했고 사귐의 폭이 넓었고 그러면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아주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같은 데 가면 김대중씨가 중심이었다. 다른 나라 정상들은 그 뒤를 따라다녔다. 개인적 리더십, 민주화 투사로서의 이력, 국제적 인정 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는 전 세계에 아시아의 지도자로 각인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국
제적 지위를 높인 사람이라고 하겠다.
1992년 대선 낙선 후 영국으로 갈 때 한 여당 인사가 "당신은 유능한데 당신 주위 사람들이 시원찮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술을 못하는 김대중씨가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너희들 일류대 출신들이 나하고 같이 하자고 언제 따라다닌 적 있느냐?"
실제로 그의 주변 사람들은 좀 작았던 것 같다. '약은' 사람들은 그를 따라다니지 않았다. 난세에 개인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은 출세의 길을 가지 고난받는 사람을 따라다니지 않는다.
김대중씨는 집권 후에도 다수당인 야당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해 고생이 많았다. 외환위기를 극복해내고, 의료보험제도 만들고, IT 강국 만드는데 선각적인 역할을 했다. 만약 정치풍토만 더 나았다면 그는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남북 문제, 정치 문제를 해나가면서 비정상적인 방법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남북 문제나 정치 문제가 비정상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한다. 김대중씨는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박정희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래도 경상도의 마음을 얻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난 김대중씨가 당시의 정치적 풍토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리더였다고 본다.
남북 화해는 물론 위대한 공적이다. 양쪽이 서로를 살해하는 불행한 역사는 끝냈으니까. 서로 접촉하고 북을 고립시키지 말고 식량 문제 등을 도와주자는 것에도 찬성한다. 그러나 난 김대중씨의 대북관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고 본다.
김대중씨는 이상적인 정치이념과 현실적인 정치감각, 두 가지를 다 가진 사람이었다. 정권을 잡기까지는 정치감각이 중요할지 몰라도 정권을 璲?나서는 정치이념에 충실하기를 나는 바랐다. 세속적인 정치 프로세스에서 탈피해야 하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거기에 너무 의존하지 않았나 싶다. 김대중씨에게는 정치적 리얼리즘이 항상 우선했다.
나는 김대중씨의 말이 정치적 언어인지, 마음으로부터의 생각인지 그 구별을 잘 못하겠다. 그는 재임 시 박정희씨에 대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퇴직 후에는 이명박씨에 대해 독재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들이 정치적 발언인지, 진정한 역사해석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끝내 얘기를 안 했다. 어쩌면 일생 마음을 터놓고 상의한 사람이 없지 않았나 싶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 같다.
어려운 역사를 고려해볼 때 이승만 대통령도 위대했고 박정희씨도 그 나름대로 위대했다. 그 다음으로는 김대중씨가 위대했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은 잘못이다. 어느 시대나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게 마련이고, 그걸 넘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역사를 그렇게 봐야 한다. 국민일보. 정리=김남중 기자 ***
내가 만난 최고의 관객 DJ를 추모하며/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
김대중대통령께서 오늘 서거하셨습니다.
이 땅을 빛낸 또 하나의큰 별이 떨어지셨습니다.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고인의 못다 이룬 꿈이 아쉽습니다.
고인의 서거를 애도하며 저와의 개인적인 추억, 특히 문화예술에 대한 고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잊지 못할 일화 한가지를 소개합니다.
그 만남은 1993년의 겨울 어느날, <예술극장 한마당>이라는 허름한 소극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고인은 1992년 대선에서김영삼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갔다가 돌아와 '아시아-태평양 재단' 일에 전념하고 계실 때입니다.
저는 극단아리랑의 대표겸 연출가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서편제」의 주연배우로대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무렵입니다.
제가 창단공연으로 막을 올린 「아리랑」을 원안으로 하여, 권호웅 후배가 연출한「아리랑2」라는 작품을 공연하고 있을때입니다.
뜻밖에도 '아시아-태평양 재단'으로부터DJ께서 우리 공연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서편제」 영화를 관람하신 뒤 제가 극단아리랑을 운영하고 있다는 얘기를잊지 않고 계시다가, 연극 공연소식을 듣고연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1993년 11월 4일 일요일,국회의원10여명을 대동하고 공연시간인 3시가 되기 조금 전에 오신 DJ는초대하겠다는 저의 호의를 무시(?)하고 굳이 티켓을 사서 관객들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소극장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기셨습니다.
제가 대표를 겸하고 있던 <예술극장 한마당>은 대학로에서 성북동으로 들어가는혜화동 골목 길가 허름한 건물의 지하에 세들어 있던 100여석 정도의소극장으로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고, 어두컴컴하고, 주차장도 없고, 좌석은 좁고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초라한 곳이었습니다.
젊은 관객들이야 소극장이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오지만, 이미대통령 후보까지 지내신 정계의 거물을 그런 누추한 장소에 모시자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함께 오신 의원님들도 그 당시 난다긴다 하는 거물 정치인들인지라 소극장의 꼴이 그토록 험악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들 잘못 왔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짓고 어쩔 줄 모르는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생각해도 와주신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고문의 후유증으로 다리까지 불편하신 분이 그런 비좁은 의자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연극을 보신다는 것은 또다른 고문(?)과 같이 무리한 일이라, 죄송하다는 얘기를 하고 다음에 좋은 蔓恙【?공연할 때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DJ께서는웃으시면서 그런 걱정하지 말고 공연이나 잘하라고 하시며 의원들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할 수 없이 두 분만 앉을 수 있게 허름한 간이의자를 부리나케 준비하여 특별석(?)을 마련했습니다.
이희오 여사의 손을 잡고 두 시간 동안 즐겁게 공연을 감상하신 DJ는 수고하는 단원들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대학로의 소박한 고깃집에서 단원들과 국회의원들과 자리를 함께 하신 DJ는식사가 나오기 전에 관람하신 공연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감상도 얘기하시다가, 느닷없이 모 국회의원을 향해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DJ : 어이, OOO의원!
모의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
DJ : 자네 지금까정 연극 맻편이나 봤능가?
모의원 : (더듬거리며) 아...예....아직 한편도....
DJ : 이 사람아, 정치허는 사람이 연극도 안보고 댕기믄 쓰겄능가?
모의원 : 죄송합니다. 바빠서....
DJ : 아무리 바뻐도 연극을 자주 보러 댕기소.
모의원 : (앉으며) 예, 알겠습니다!
DJ :서편제까지 허신 김대표가 여그 이렇게 열악한 소극장에서 연극의 열정을 불태우는디 정치인들이 적극 관심을 가지고 지원도 허고 그려야 된단 말이시.
의원들 : 맞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에 모두들 웃으며 연극과 정치 얘기로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습니다.
그뒤 DJ께서는 금일봉과 함께 극단아리랑 의 후원회원으로가입하여 우리들을 한껏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뒤 그 분과의 인연은국립극장장과 대통령으로도 이어졌습니다만,제 가슴 속에는 제가 연극에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에 허름한 소극장을 찾아주신 고인의 영상이 너무도 뚜렷이박혀 있습니다.

누추한 골목길의 초라한 소극장에서 돈도 되지 않는 민족극을 하겠다고 땀을 흘리는 무명배우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하신애정어린 관객,

초대 안하면 공연장에 오지도 않는 정치인들의 몰지각한 문화의식을 앞장 서서 깨뜨려주신 선구적 관객, 당당히 표를 사서 관객들과 함께 줄을 서서 입장해 주신 겸손한 관객,


추운 겨울 날의 오후를 소극장에서 함께 보낸 DJ는 제가 이제껏 만난 최고의 관객입니다.

***
김대중 대통령 마지막 길 지킨 ‘영원한 DJ맨, 하라다'
»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 도쿄 피랍 직전 거처를 마련해줬던 일본인 하라다 시교가 지난 6월2일 김대 중 전 대통령과 만나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라다 시교 제공
1973년 8월 8일. 일본 하라다 맨션 605호. 고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납치되기 전에 머물렀던 숙소다. 납치되자마자 일본 경시청에서 “DJ가 없어졌다. 어디 갔는지 아느냐”라는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숙소 주인이었던 하라다 시교(原田重雄·77)씨.

그는 지난 13일 홀로 한국에 와 DJ를 찾았다. 서거 후엔 온 가족(아내·아들·딸)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평생 정신적 동반자를 자처하며 36년 우정을 지켜온 후원자로서 마지막길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나의 취미는 DJ업적 말하기"

짧게 깎은 머리, 8순을 바라보는 노인이지만 총명해 보이는 표정에 손짓도 표정도 DJ를 닮았다. “납치 사건 때 내
아파트에 살게 되었는데 한 달 만에 그 일이 발생했다”며 “납치 사건 전 방 하나 제공했던 인연이 평생 이어져왔다”고 했다. 김 전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끌려 사라졌다는 경찰의 받고 주미 일본대사관에 구명을 요청했던 이도 그다. 그는 10년 뒤인 1983년 미국에서 망명한 DJ와 재회했다.

그는 “DJ는 영면했지만 사상과 철학은 영원하다”며 “DJ는 사선(死線)을 많이 넘었지만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훌륭한 길을 갔다.
노벨평화상도 타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말했다. DJ도 그와의 인연을 각별히 여겼다. 그는 평소 동교동에서도 ‘도쿄에서 직접 전화를 하면 바로 바꿔주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통했다. 그는 97년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만난 최초 일본인기도 하다.

그는 지난 6월 초 동교동을 찾아 DJ와 기념 사진도 찍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지난 13일 DJ를 만나러 홀로 찾아와 쾌유를 기원했다. 이날은 DJ가 병상에서 도쿄피랍 생환 36주년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18일 DJ 서거 소식을 듣고 나서는 21일 온 가족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가족들도 DJ의 열렬한 지지자다. 아들인 나오다케(41)의 결혼 때는 이희호 여사가 참석했다. 그는 DJ와의 인연에 대해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답했다.

그의 아들 나오다케는 아버지 취미에 대해 “첫 째는 DJ 말하기, 둘째는 DJ 업적 알리기, 셋째는 DJ 따라하기”라고 대답했다. 일본에서도 DJ와 가장 가까운 일본인으로 알려져 서거 직후 NHK,
후지TV, TBS가 도쿄에서 1시간 거리인 가나사가현 후지사와에 있는 그의 집까지 직접 찾아와 취재할 정도였다.

“남북문제 경제관 들으며 마음 통해”

그가 정치인 DJ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남북 문제. “나는 한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데에는 일본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DJ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DJ가
목포상고를 나와 해운 사업과 목포일보사 사장 등을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 경제를 잘 알아 더 친해졌다”고 말했다. 1980년 5·18이 터지고 나서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DJ가 체포 직전 '가족을 잘 부탁한다'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는 “DJ는 약속을 잘 지키고 인간으로서 믿을 수 있다. 반생을 같이 산 영혼의 동반자와 같다.”라면서 "DJ가 서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DJ는 세계인이 알아주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의 거인이었다. 재임 시절 한일 문화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해 일본에도 DJ팬이 많다. 그의 사상과 업적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명기 기자
1973년 8월 8일. 일본 하라다 맨션 605호. 고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납치되기 전에 머물렀던 숙소다. 납치되자마자 일본 경시청에서 “DJ가 없어졌다. 어디 갔는지 아느냐”라는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숙소 주인이었던 하라다 시교(原田重雄·77)씨.

그는 지난 13일 홀로 한국에 와 DJ를 찾았다. 서거 후엔 온 가족(아내·아들·딸)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평생 정신적 동반자를 자처하며 36년 우정을 지켜온 후원자로서 마지막길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나의 취미는 DJ업적 말하기"

짧게 깎은 머리, 8순을 바라보는 노인이지만 총명해 보이는 표정에 손짓도 표정도 DJ를 닮았다. “납치 사건 때 내
아파트에 살게 되었는데 한 달 만에 그 일이 발생했다”며 “납치 사건 전 방 하나 제공했던 인연이 평생 이어져왔다”고 했다. 김 전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끌려 사라졌다는 경찰의 받고 주미 일본대사관에 구명을 요청했던 이도 그다. 그는 10년 뒤인 1983년 미국에서 망명한 DJ와 재회했다.

그는 “DJ는 영면했지만 사상과 철학은 영원하다”며 “DJ는 사선(死線)을 많이 넘었지만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훌륭한 길을 갔다.
노벨평화상도 타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말했다. DJ도 그와의 인연을 각별히 여겼다. 그는 평소 동교동에서도 ‘도쿄에서 직접 전화를 하면 바로 바꿔주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통했다. 그는 97년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만난 최초 일본인기도 하다.

그는 지난 6월 초 동교동을 찾아 DJ와 기념 사진도 찍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지난 13일 DJ를 만나러 홀로 찾아와 쾌유를 기원했다. 이날은 DJ가 병상에서 도쿄피랍 생환 36주년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18일 DJ 서거 소식을 듣고 나서는 21일 온 가족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가족들도 DJ의 열렬한 지지자다. 아들인 나오다케(41)의 결혼 때는 이희호 여사가 참석했다. 그는 DJ와의 인연에 대해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답했다.

그의 아들 나오다케는 아버지 취미에 대해 “첫 째는 DJ 말하기, 둘째는 DJ 업적 알리기, 셋째는 DJ 따라하기”라고 대답했다. 일본에서도 DJ와 가장 가까운 일본인으로 알려져 서거 직후 NHK,
후지TV, TBS가 도쿄에서 1시간 거리인 가나사가현 후지사와에 있는 그의 집까지 직접 찾아와 취재할 정도였다.

“남북문제 경제관 들으며 마음 통해”

그가 정치인 DJ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남북 문제. “나는 한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데에는 일본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DJ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DJ가
목포상고를 나와 해운 사업과 목포일보사 사장 등을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 경제를 잘 알아 더 친해졌다”고 말했다. 1980년 5·18이 터지고 나서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DJ가 체포 직전 '가족을 잘 부탁한다'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는 “DJ는 약속을 잘 지키고 인간으로서 믿을 수 있다. 반생을 같이 산 영혼의 동반자와 같다.”라면서 "DJ가 서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DJ는 세계인이 알아주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의 거인이었다. 재임 시절 한일 문화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해 일본에도 DJ팬이 많다. 그의 사상과 업적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명기 기자
1973년 8월 8일. 일본 하라다 맨션 605호. 고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납치되기 전에 머물렀던 숙소다. 납치되자마자 일본 경시청에서 “DJ가 없어졌다. 어디 갔는지 아느냐”라는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숙소 주인이었던 하라다 시교(原田重雄·77)씨.

그는 지난 13일 홀로 한국에 와 DJ를 찾았다. 서거 후엔 온 가족(아내·아들·딸)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평생 정신적 동반자를 자처하며 36년 우정을 지켜온 후원자로서 마지막길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나의 취미는 DJ업적 말하기"

짧게 깎은 머리, 8순을 바라보는 노인이지만 총명해 보이는 표정에 손짓도 표정도 DJ를 닮았다. “납치 사건 때 내
아파트에 살게 되었는데 한 달 만에 그 일이 발생했다”며 “납치 사건 전 방 하나 제공했던 인연이 평생 이어져왔다”고 했다. 김 전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끌려 사라졌다는 경찰의 받고 주미 일본대사관에 구명을 요청했던 이도 그다. 그는 10년 뒤인 1983년 미국에서 망명한 DJ와 재회했다.

그는 “DJ는 영면했지만 사상과 철학은 영원하다”며 “DJ는 사선(死線)을 많이 넘었지만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훌륭한 길을 갔다.
노벨평화상도 타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말했다. DJ도 그와의 인연을 각별히 여겼다. 그는 평소 동교동에서도 ‘도쿄에서 직접 전화를 하면 바로 바꿔주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통했다. 그는 97년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만난 최초 일본인기도 하다.

그는 지난 6월 초 동교동을 찾아 DJ와 기념 사진도 찍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지난 13일 DJ를 만나러 홀로 찾아와 쾌유를 기원했다. 이날은 DJ가 병상에서 도쿄피랍 생환 36주년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18일 DJ 서거 소식을 듣고 나서는 21일 온 가족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가족들도 DJ의 열렬한 지지자다. 아들인 나오다케(41)의 결혼 때는 이희호 여사가 참석했다. 그는 DJ와의 인연에 대해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답했다.

그의 아들 나오다케는 아버지 취미에 대해 “첫 째는 DJ 말하기, 둘째는 DJ 업적 알리기, 셋째는 DJ 따라하기”라고 대답했다. 일본에서도 DJ와 가장 가까운 일본인으로 알려져 서거 직후 NHK,
후지TV, TBS가 도쿄에서 1시간 거리인 가나사가현 후지사와에 있는 그의 집까지 직접 찾아와 취재할 정도였다.

“남북문제 경제관 들으며 마음 통해”

그가 정치인 DJ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남북 문제. “나는 한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데에는 일본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DJ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DJ가
목포상고를 나와 해운 사업과 목포일보사 사장 등을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 경제를 잘 알아 더 친해졌다”고 말했다. 1980년 5·18이 터지고 나서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DJ가 체포 직전 '가족을 잘 부탁한다'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는 “DJ는 약속을 잘 지키고 인간으로서 믿을 수 있다. 반생을 같이 산 영혼의 동반자와 같다.”라면서 "DJ가 서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DJ는 세계인이 알아주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의 거인이었다. 재임 시절 한일 문화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해 일본에도 DJ팬이 많다. 그의 사상과 업적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명기 기자***
1970년 하루만에 ‘40대 기수론’ 출마 결심

나는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1957년 웅변학원 원장과 학생으로 만난 이후 52년을 함께했습니다. 나는 그를 항상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김 전 대통령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몇 안 되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1957년에 나는 대한웅변협회 학생회장이었고 김 전 대통령은 동양웅변전문학원 원장이었습니다. 그때는 웅변이 사회적으로 많이 활용되던 시기였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무명 정치인으로 막 정치활동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분은 아주 멋쟁이였죠. 화려한 옷에 행커치프로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청년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분이 민주당에 입당했고 나도 따라서 입당했지요. 그 양반이 선전부장을 할 때 내가 선전부 차장을 했어요. 김 전 대통령이 5대 총선에서 목포에 공천받지 못하고 강원도 인제에 출마하자 그를 도왔습니다. 내가 가두연설을 전담했지요. 면의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지원연설을 했어요.

김 전 대통령은 매사에 집중력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메모하고 기록하는 분이었습니다. 시간 있으면 책을 보지요. 술을 못하니까 공부하는 시간이 많았지요. 아주 사무적인 성격이었어요. 호탕하고 놀기 좋아하는 나와는 성격이 달라요. 항상 나하고는 논쟁을 했지요. 의견 충돌 50년이라고 할까. 강한 집념의 소유자라는 것은 인제에서 세 번 출마한데서 알 수 있어요. 호남 출신이 강원도에서 나간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였어요. 부정선거로 졌지만 선거 무효 소송을 변호사에게 안 맡기고 본인이 했지요.

그분과 나는 고난을 함께 받았습니다. 1980년 신군부에 같이 끌려갔지요.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분의 최후진술입니다. 1980년 내란음모 사건 때 사형을 구형받고 1시간30분 동안 최후진술을 합니다. 역사적 진술이지요. 나는 죽더라도 이 땅에 정치보복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지요. 나도 울고 모두 울었어요. 내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이끈 정동년씨를 DJ에게 소개해주고 총 500만원을 받아 운동자금으로 줬다는 것이 기소 요지였지요. 나는 정동년을 본 일이 없는데, 모두 다 조작이지요.

그분을 같은 정치인으로 평가한다면 정말 탁월한 분입니다. 뭔가 창조적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력이 있습니다. 정치에 몰입해서 전력투구하면서도 각 방면에 상식과 지식을 많이 갖춘 분입니다. 음악, 미술 등 모르는 분야가 없어요. 보통사람들은 그러기 힘들지요. 하여간 놀라운 것은 어떤 역경 아래에서도 잘 견디고 돌파한다는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과 김영삼(YS) 전 대통령, 두 사람의 차이를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두 분을 비교하면 YS는 직선적이고 툭 터놓는 사람입니다. 반면 DJ는 표현을 하지 않는 분입니다. YS는 감성의 정치인, DJ는 논리의 정치인입니다. YS는 그렇게 DJ를 대놓고 욕하고 비난하지만 DJ는 한번도 공개적으로 YS를 비난한 적이 없어요. 속으로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이런 일화가 있어요. '민추'를 할 때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어요. DJ가 100만명 서명운동을 하자 하니까 YS가 무슨 소리냐며 1000만명 서명운동을 하자는 겁니다. DJ가 '어떻게 1000만명 서명운동을 하느냐. 그것 다 못 채운다'고 하니까 YS가 '그것을 누가 세보나?'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1000만명 서명운동으로 됐지요. DJ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YS는 통 크게 밀고나가는 게 장점입니다.

DJ와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40대 기수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1970년 김영삼씨와 이철승씨는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착실히 하고 있더군요. DJ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어서 뉴서울호텔에서 만나 '형님도 40대 기수론으로 나가죠'라고 했더니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겁니다. 내게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하루 만에 '나도 선언을 해야겠네'라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어 결국 후보가 됐지요. 선언식 할 때 영화배우 김지미씨 등 배우들 화환이 10개 정도 왔어요. 그분의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이제 그분은 가셨습니다. 그분은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 큰 거목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수난의 점철이었지만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많이 애쓴 분입니다. 정리=이강렬 대기자***
“해박함에 존경심 절로…따뜻한 눈빛 못잊어”

노 전 대통령 조문 뒤 건강악화
15시간 비행내내 꼿꼿이 독서

» 2003년 5월16일 심혈관 확장술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퇴원하면서 함께 찍은 기념사진. 정남식 제공

11년 주치의 정남식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책을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14~15시간 걸리는 비행기 안에서도 의자를 뒤로 젖히는 법이 없이 꼿꼿하게 앉아 책을 보시거나 글을 쓰셨어요. 책 보는 습관 때문에 엉덩이에 물집도 많이 생기셨죠.”

정남식 연세대 교수(심장내과)는 19일, 꼿꼿이 앉아 책장을 넘기는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을 가장 먼저 회고했다. 정 교수는 1998년 대통령 취임 이후 10년이 넘도록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을 돌봐왔으며, 18일 서거 순간에도 자리를 지켰다.

정 교수는 2003년부터 매주 세 차례 김 전 대통령의 혈액투석을 도우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김 전 대통령의 넓고 깊은 독서와 해박한 지식에 놀란 적이 많았다고 전했다. “언젠가 ‘중국 인구가 왜 많은지 아는가’라고 물으시더라구요. ‘땅이 넓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더니, ‘당나라 시절에 스페인에서 건너온 감자와 고구마 등 구황작물이 들어오면서 인구가 늘어났다’고 조목조목 설명해주셨습니다.” 정 교수는 “빼어난 기억력과 해박한 지식, 숫자 관념 때문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 한편으로, 김 전 대통령은 매우 따뜻한 배려심의 소유자였다고 정 교수는 전했다. “투석을 할 때면 눈으로 인사를 나눈다. 정말 따뜻한 눈빛으로, 바쁜데 왔느냐고 말하신다. 투석이 끝나면 ‘바쁠테니 어서 가라’고 하실 뿐이다.”

정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이 육군교도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기 전 타협하지 않은 이유를, 그에게서 들은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로 꼽았다. “김 전 대통령께서 ‘사람이 물에 빠져서도 죽고 아파서도 죽는데, 내가 불의와 타협해서 목숨을 연장하는 것은 두 번 죽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감동을 받았다.”

정 교수는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김 전 대통령의 건강에 ‘고비’가 됐다고 전했다. 5월28일 휠체어를 탄 채 서울역광장의 분향소에서 차례를 기다려 조문을 하고 연설을 한 것이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날 뙤약볕에 오래 계신 것이 무리였고, 그때부터 건강 상태가 나빠지셨다.” 당시 취재진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또다른 주치의인 장준 연세대 교수가 분향소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정 교수는 전했다.

“지난 12년 동안 수행했고, 입원하고는 매일 뵈었던 분을 더이상 볼 수 없게 돼 가슴이 멍합니다. 그 분의 눈빛을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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