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 웃으며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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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서거’라는 두 글자를 본 것은 마침 그날 저녁 한겨레신문사 특강에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의 역사를 다루기로 하여 강의안을 작성하던 중의 일이다. 멍한 머리로 기억을 애써 더듬어가며 그분이 걸어온 길을 정리하려 하였지만, 그의 삶은 곧 한국 현대사였다. 그 굽이굽이에 남긴 참으로 많은 업적과 깊은 발자취를 어찌 90분 짧은 강의안에 다 기록하겠는가? 박정희를 위협한 박빙의 대통령 선거, 납치에서의 기적 같은 생환, 다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내란음모 조작 사건, 양김의 분열과 선거의 패배, 대통령 당선, 남북 정상회담, 노벨평화상 수상 등 하나하나가 장편소설로 써도 모자랄 진한 이야기들로 점철된 것이 그의 생애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고 오래 기억될 모습은 입원하시기 직전의 마지막 두 달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의 민주정권을 지내면서 사람들은 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촛불이 꺼진 뒤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슬픔과 분노를 겪고도 겨우 시국선언이나 했을 뿐, 우리의 근육은 살아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으로 숨 돌릴 새 없이 세상은 거꾸로 가는데,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때 중심을 잡아주신 분은 단연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역주행을 처음 지적하고, 현재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이명박 정권의 본질을 독재정권이라 규정하고, 민주당, 진보정당, 시민사회 등 민주연합세력의 대동단결이라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터뜨린 오열이 보여주듯 가장 깊이 슬퍼하면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행동 없는 양심은 악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처절하도록 간단한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준 분은 바로 그분이었다.
위기는 이명박 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말씀처럼 악의 세력과 다퉈서 이기는 것도 아주 쉽고, 지는 것도 아주 쉽다. “아무것도 안하면 지니까.” 사람들이 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렸을 때, 그분은 꼭 각목을 휘두르지 않고도, 고문당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법을 제시하셨다. 답은 복잡하지 않다.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하고,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되고, 나쁜 신문 보지 않고, 집회에도 나가고, 인터넷에 글 올리고, “하다 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고 연부역강한 젊은이들이 “하루도 쉬지 말고 민주화, 서민경제, 남북화해를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하셨다. 특별한 유언이 따로 없으셨다고? 그분은 온몸으로 유언을 쓰고 간 것이다. 그분은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비바람을 막아주고 뙤약볕도 막아주는 지붕 같은 분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붕 없는 한데에 나앉았다. 부디 그분이 남긴 정치적 유산을 탐하지 말고, 유지를 잇도록 하자.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
김대중 선생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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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문득 동해에서 북으로 가는 배가 처음으로 떠나던 날이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그 무렵 나는 몹시 일렁이고 있었다.
“나도 갈 거다. 그 옛날 우리 독립군을 실어 나르던 쪼매난 됫마 위에 막걸리 한 독을 싣고서는 ‘두만강 푸른 물~’을 부르며 나도 갈 거다.” 그러구선 무턱대고 동해로 갔다.
그런데 날더러 함께 타자는 이 하나 없이 배는 저만치 혼자 떠나가고 갯가에 남은 나는 마치 님 잃은 가시나처럼 하염없이 섰을 때다. 젊은이들이 북으로는 못 갔지만 울릉도라도 가자고 잡아끈다.
나는 몰래 꽁쳐온 쐬주를 한입에 꿀꺽꿀꺽, 찡. 그 바람에 내 두 볼에서 흘러내리는 짠물을 짠 바다에 보태며 웅얼댔다. “김 선생, 잘하는 거요. 저 배는 놀잇배가 아니라 이 피눈물의 두 동강이를 가로지른 먹개(벽)를 부수는 우리 겨레의 싸움배라니까요.”
그 뒤 선생은 북쪽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면서 엄청난 바람을 일게 했다.
우리 겨레는 하나라는 것,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먹개는 외간것(외세)들의 치발(침략)이라는 것, 따라서 남쪽과 북쪽의 맞섬(대립)과 꼴눈(증오) 따위는 모두 우리를 가른 것들의 꾸럭(조작)이라고, 굽이쳐온 우리 갈마(역사)를 올바로 깨우치게 했다고 나는 입이 말랐다.
그런데 이명박 준심(정권)이 들어선 오늘은 어찌 되고 있을까. “지난날을 잃어버린 10년”이라며 북쪽을 ‘매톡(악)의 축’이라는 부시의 전쟁도발적 꿍셈(음모)을 그대로 받아 이명박 투(식)의 냉전구조를 윽박지르고 있다.
그리하여 부추기는 것은 무엇일까. 화해가 아니라 맞섬, 평화가 아니라 전쟁, 끝내는 한나(통일)가 아니라 이 두 동강이 속에서 뚱속(욕심)을 채운 썩은 것들의 사갈(범죄) 마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김대중 선생이 해야 할 한마디가 있질 않았을까. ‘한나, 그 알짜(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오늘의 이 썩음을 그냥 놔두고 하나만 하자는 건가. 아니다. 이 땅의 갈라짐, 그 바탕은 있는 이와 없는 이의 갈라짐이다. 이 땅의 여러 맞섬, 그 쭈빗(긴장)도 있는 이와 없는 이의 갈라짐의 표현이다. 따라서 한나도 민주주의도 높고 낮음이 없는 고루가 바로 한나라는 것을 말할 때가 되었는데 아, 그런 분이 가시다니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이 땅 민주주의에 마주해선 한마디 했다. “이명박은 독재자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주먹을 쥐었다. 왜냐. 그 독재의 알짜를 좀더 까밝혀야 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이명박 독재는 모든 건 겨루기요, 모든 값은 시장에서 맺힌다는 신자유주의를 따르지만, 또 그것을 거꾸로 이명박 준심(정권)이 강요함으로써 독점자본과 검찰, 경찰, 그리고 요즈음 기무사의 날뜀이 말해주듯이 군사력이 한데로 묶어지는 막심(폭력)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모든 관료조직과 썩어문드러진 언론과 극우세력까지 결합해 곧맴(양심)과 제 알통밖에 없는 알맥이(노동자)와 서민을 마구 짓밟고 죽이고 잡아가고 있다. 이는 이명박은 독재자가 아니라 파쇼라는 갓대(증거)다.
이 때문에 참된 민주화란 무엇이며, 참된 곧맴은 무엇인지를 말할 때가 왔는데 아, 가시다니! 파쇼 이명박을 놔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 하지만 별은 사라지질 않는 법이다. 어두움이 내리면 다시 빛을 내는 것이니 찰(시) 하나를 띄운다. 한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럭 높이 떴구나/ 괴로운 나라 근심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이순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위대한 유산
갈등과 대결로 점철된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이동시킨 역사의 견인자. 비록 이 역사적인 지형의 판갈이가 아직도 진행형이라 종종 대결의 시대로 퇴행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하지만, 이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어 낸 지도자. 김 전 대통령은 이것만으로도 역사에서 자기 할 일을 충분히 다했음에도, 생의 마지막 불씨까지도 거친 이 길을 개척하는 데 태웠다. “오죽이나 젊은 우리가 못났으면 병든 노구의 그분이 아직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싸움터의 선봉장이 되셔야 하느냐”는 자책이 가슴속을 후벼 파고드는 가운데, 속절없이 그의 서거라는 비보를 듣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 병상에 눕기 전 어느 모임에서 이제는 쉬셔야 한다는 마음에서 “죄송합니다. 이제 저희들이 더 분발해서 나서겠습니다”라고 결의도 표시해 보았지만, 그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대북 포용정책을 구상하고 실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 화해와 평화의 가치를 손에 잡히는 이익으로 바꾸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갈등과 적대의 남북관계를 화해협력의 관계로 전환시키고, 북한의 호전적인 태도를 완화시키고자 한 포용정책은 지난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새로운 남북관계의 지평을 열었다. 아마 그처럼 남북문제에 대해 확고한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우에도 일관되게 나아가는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긴장의 파동이 수시로 요동치는 남북관계 속에서 포용정책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병행추진이라는 전략적 지혜를 유산으로 남겼다. 한반도의 근본적인 안보위협은 분단 이래 지속되어온 남북간 군사적 대치와 긴장상태이며, 북핵 문제는 1990년대 이후 여기에 한꺼풀 덧씌워진 위협구조이다. 따라서 북핵 위기가 충돌로 비화할 경우 그 지점은 지리적으로 붙어 있는 남북 경계선의 어느 부분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는 아주 중요하다. 남북관계의 개선은 우리가 북한을 설득해서 북핵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만약 선핵포기론의 입장을 고수하다가 우리와 상관없이 북핵문제가 해결될 경우 자칫 북-미 관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는 데탕트로 나아가는데 남북관계만 파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외교적 미아 신세로 전락하는 불행을 맞이할 수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전략적 이해를 간파하고 북핵문제와 남북관계 병행을 정책노선으로 제시하고 추진하였다. 참여정부 시절, 나는 남북관계에서 중요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김 전 대통령을 찾아 귀중한 가르침을 얻었다. 그때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감싸안고, 위기에 찬 한반도를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응시하며 화해협력의 시대를 개척해온 거인의 풍모를 접했다. 생의 마지막 숨길까지도 민족화해의 길에 바친 그를 이제라도 편히 쉬게 하는 길은 뒤에 남은 우리가 평화번영과 통일 한반도 실현을 위해 포용정책의 기반 위에서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뿐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
오늘도 양복 안주머니에서 때 묻은 까만 수첩의 첫 장을 펴든다. “퇴수”(退修), 물러나 자신을 연마한다. 작년 8월 미국 스탠퍼드대로 1년간 안식년을 떠나는 내게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토인비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가서 쉴 생각 하지 말고 미래를 대비해 공부하라”며 김대중평화센터 이름이 선명한 수첩을 주었다. 그리고 미국 체류 동안 나는 “퇴수”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기력하게 인터넷을 통해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퇴행을 온몸으로 막으며 노구의 마지막 기력을 불사르는 김 전 대통령을 보았다.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두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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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내게 떠오른 것은 그의 모습이 담긴 세 장면이었다.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장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오열하던 모습, 일본 도쿄대학 연설 장면, 그리고 서울대 문화관 강연 모습이다. 지난 5월, 영결식장에서 오열하던 DJ의 모습에는 민주주의, 평화, 인권 등 그가 평생 추구해온 가치의 후퇴에 대한 격정적 울분이 담겨, 보는 이의 마음이 사뭇 아팠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연단 위의 그는 얼마나 달랐던가.
2005년 5월 23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에서 열린 김 전대통령 강연은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1973년 도쿄에서 그가 납치되었을 때 구명을 위해 애썼던 도쿄대 강상중 교수와 와다 하루키 교수 등 일본 내 진보지식인들이 납치사건 30주년을 기해 추진하다가 2년 후에 성사시킨 행사였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외국 국가원수가 야스다 강당에서 연설하는 것은 초유의 일이라 했다.
나는 관련 심포지엄의 발표자였던 덕에 꽤 앞쪽 자리에서 연설을 듣는 행운을 누렸는데, 그는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이었고 목소리도 힘이 있었다. 30년 전 독재정권의 피해자로서 초췌한 얼굴로 일본 언론에 등장했던 그가 이제 남북한 정상회담의 주역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최상의 의전 아래 일본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각국 외교사절을 비롯해 수많은 저명인사가 강연을 경청했다.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의 화해・평화에 관한 그의 연설은 1500여 청중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탁월한 유머감각을 발휘하였기에, 강연장에는 큰 웃음꽃이 피어오르곤 했다. 고난과 죽음의 고비를 헤치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인물이었던 만큼, 그의 말 하나하나가 큰 감화력을 미쳤다. 청중이 느끼는 감동의 기운, 국제사회가 그에게 보내는 존경의 기운이 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일 년 반 후 다시 김전대통령의 강연을 접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으로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던 때였다. 미국 부시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전면제재론을 언급했고 국내 보수인사들은 전쟁불사를 외쳤으며, 일본에서는 재무장론이 더 요란해졌다. 이 상황에서 10월 19일에 그가 서울대 문화관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남북평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변함없는 신념으로 역설했고, 납치당시의 상황을 비롯한 자기 생애의 경험도 구수한 입담으로 술회했다. 이 강연은 곤란한 상황에 놓였던 당시 참여정부의 남북대화 및 인도적 대북지원 정책을 위해 든든한 원군역할을 했다.
백미는 후반부였다. 이 날 수많은 학생들이 통로에 빼곡 서서 강연을 듣고 있었는데,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DJ가 자리에 앉지 못한 학생들을 연단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학생들은 연설자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고 의자에 앉은 DJ는 그들에게 약간 몸을 기울인 자세로 이야기를 하였다. 이십대 학생들과 여든이 넘은 노정치인은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손녀가 정담을 나누듯, 아주 정겨운 자세로 마주보며 강연회를 이어갔다. 바라보는 사람의 입가에도 미소가 베어들게 하는 분위기였다. 평화와 대화를 강조하는 그의 연설이 젊은 세대에게 각별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명장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토록 빛나던 DJ의 모습은 언제부턴가 어두워져 갔다. 그 높은 연세에도 외국인들을 감동시키고 우리의 젊은 세대를 열광케 하는 능력을 가졌던 그가, 우리 사회의 타락과 야만으로 인한 상심을 이기지 못했다. 국제사회를 향해, 미래의 주인들을 향해 평화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슴 벅찬 가치를 알려줄 인물은 이제 없는 것인가?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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