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지러운데 어찌 먼저 가십니까 한승헌 변호사 추도사 죽을 고비 수도 없이 넘기며 민주 평화 이끈 당신은 우리 대통령을 넘어 세계의 지도자 한승헌 변호사. 전 감사원장 김대중 대통령님께 제가 이런 애도의 글을 드리게 되오니, 아픈 마음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이제 대통령님께서는 고난과 영광으로 점철된 이승의 삶을 거두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그토록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뒤로하시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습니까. 생각하건대 대통령님께서 남기신 발자취는 이 나라의 빛과 어둠, 그리고 이 겨레의 염원과 맞닿은 궤적이었습니다. 비단 남한의 대통령에 그치지 아니하고, 조국의 남과 북을 아우르는 지도자였고, 세계가 존경하는 지도자였습니다. 한반도 남쪽 바다 하의도에서 열린 대통령님의 삶은 해방 후의 혼돈과 좌우 대결 속에서 여러 번 위기를 맞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특히 정치인으로서 반독재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심지어는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일본에서 납치되어 살해당할 뻔했는가 하면, ‘내란 군인’들이 날조한 ‘5·17 내란음모사건’ 재판극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위해도 이 땅에서 독재정치를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하는 대통령님의 굳은 신념과 행동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나라와 겨레의 통일을 향한 위대한 결행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민주화 투쟁의 험난한 대장정을 이끌어 오신 끝에, 역사상 초유의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위대한 성과를 남기셨으며, 험난한 한 시대를 감당하는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경륜과 정책의 실천을 통하여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셨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대통령님께서는 당선자 시절부터 구제금융 사태(아이엠에프 위기)라는 국난의 타개를 위해 놀라운 역량을 발휘하셔서 예상 밖의 ‘조기 졸업’으로 경제를 살려내고 나라를 구해냈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분단의 저편, 평양까지 몸소 날아가시어 해방 후 최초의 남북 영수회담을 열고, ‘6·15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냄으로써, 남과 북의 화해·협력·교류에 큰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남북 대결을 지양하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대통령님의 경륜이야말로 이 땅의 안정과 번영에 이바지하는 근본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2000년도 노벨평화상을 받으신 것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공헌을 세계가 인정한 증표였으며, 우리 한국인으로서도 ‘첫 수상’의 영광이자 자랑이었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연세에 비해 너무 벅차고 힘겨운 활동을 계속하신 것이 건강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아서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난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행한 최후에 큰 충격을 받으신데다, 현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반인권적 역주행과 남북관계 악화에 공개적 비판을 하실 정도로 상심이 겹쳐 있었던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무도한 권력의 정치적 탄압을 받은 피해자임에도 정치적 보복을 반대하셨고, 화해와 용서를 강조하고 또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1973년의 납치사건에 대해서 그러했고, 1980년의 ‘내란음모사건’에서 사형 구형을 받고도 정치적 보복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최후진술을 남기셨습니다. 대통령님만큼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시며, 넓게 살피고, 멀리 내다보시는 지도자를 이제 어디서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 걱정이 날로 늘어가는 이 국난의 복판에서 대통령님께서 저희 곁을 떠나 멀리 가셨으니, 참으로 애통하고 허탈합니다. 생전의 이런저린 입장의 차이를 떠나서 우리 모두가 대통령님의 빛나는 업적을 되새기고,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유지를 받들어 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삼가 추모의 묵념을 올리고자 합니다. 정작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만치 접어놓은 채, 원치 않는 작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삼가 명복을 비옵나이다. 변호사/전 감사원장 *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정세균 민주당 대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땅이 꺼지는 아픔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마음의 등대처럼 의지해온 당신이 갑자기 떠나시니 비통하고 주체하기 어려운 슬픔이 밀려옵니다. 이렇게 당신을 속절없이 보내드려야만 하는 제 처지가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 흔들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이 밀려오면 어둠 속에서 촛불을 찾듯 늘 당신을 찾았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혜안과 지혜를 알려주셨습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살아오신 고난과 인내의 삶을 보고 배우며 어려움 앞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 죽음의 문턱을 넘은 당신 삶처럼, 이번에도 훌훌 털고 다시 우리 곁으로 오실 줄로 알았습니다.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단 소식에 눈이 시리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언젠가는 보내드려야 하겠지만 제 자신이 아쉬움과 송구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 보니 결코 지금은 헤어질 때가 아닌 것 같아 더욱 서럽기만 합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1997년 12월 18일. 그때 저는 연청회장이었습니다. 50년만의 정권교체에 기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했고 신명났습니다. 기조위원장으로 당신께 보고하면서 정당정치에 대한 원칙을 배웠고 노사정 간사위원으로서 노동자와 인권에 대한 당신의 철학을 배웠습니다. 국민의 정부시절 직접 저를 불러 당부하신 기초생활보장법 입법은 당신의 복지에 대한 신념의 결과물입니다. 민주개혁진영에서 사람과 정치, 정책 그 어느 곳에 당신의 혜안이 미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 지난 7월11일이었습니다. 최고위원단과 함께 서울 동교동 자택을 찾았을 때 늘 그러하듯이 형형한 눈빛으로 중국을 다녀오신 소감을 소상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남북관계, 국제정세에 대한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역사에서 독재자가 승리한 적이 없다"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국민 모두에게 영원한 대통령, 존경하는 대통령님입니다. 온 국민이 IMF 환란 앞에서 절망의 나락에 빠져있을 때 "희망의 저쪽을 향해, 위기의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겠다"며 나라와 국민을 구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름 석자를 보고 외국 정상들이 앞다퉈 한국에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야 한다"며 인터넷 강국을 만들었습니다. 국민 누구도 굶길 수 없다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고 양성평등을 통해 여성 권익을 신장시켰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많은 사람들이 당신과의 불가피한 별리를 이야기할 때, 저는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님 제발 조금 더 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십시오. 저희가 조금 더 잘해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이 희망을 말하고, 그 중심에 저희들이 있을 때 가십시오." 평안하게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미련과 회한 없이 훌훌 털고 가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지만 결국 헛된 희망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영전에서 더 처연해지는 심정을 가눌 길 없습니다. 이제 대통령님과 이별할 때입니다. 지난 2005년 어렵던 시절 열린우리당 당 의장을 맡아 당신을 찾았을 때 대통령님은 저희들에게 "당신들이 나의 후계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바쳐 감히 당신을 잇겠다고 말하겠습니다. 당신은 떠나셨지만, 온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세계인은 당신의 세계평화에 대한 기여와 한국정치에 대한 헌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마음을 모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희호, 권양숙 여사 '같은 슬픔' 부둥켜 안고 오열
슬픔에 잠긴 권양숙씨, 이희호씨 위로 18일 밤 9시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와 아들 노건호씨, 사위 곽상언 변호사가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았다. 문재인·이병완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노 전 대통령의 측근 30여명도 함께였다. 눈물이 맺혀 충열된 눈과 화장기 없는 창백한 모습으로 도착한 권씨는 심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너무 가슴 아프고 슬픕니다”라고 말한 뒤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손을 잡고 장례식장을 들어선 권씨는 김 전 대통령의 영정에 분향과 목례를 한 뒤 이희호씨와 만나 서로 부둥켜안은 채 오열했다. 권씨는 이씨의 손을 맞잡고 “대통령께서 계실 때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기운 잃지 마십시오. 겹쳐서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사님 흔들리지 마십시오.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씨는 “감사합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 멀리서 오신 것 아시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정반대의 처지로 다시 만난 두 전 영부인의 모습을 최경환 공보비서관은 “(두분께서)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말씀을 거의 나누지 못했다”고 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족과 참모들은 지난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나타낸 각별한 애도를 떠올리며 남다른 슬픔을 전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다. 목숨 바쳐 지켜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억울하고 분하다”며 이명박 정부를 꾸짖었다. 또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부인 권양숙씨의 손을 부여잡고 통곡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변호사는 “나라가 어렵고, 남북관계가 큰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처럼 경륜 있는 지도자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셔야 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까지 서거하시니 정말 비통하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알려졌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국민 모두가 힘든 시기에 나라의 큰어른이 서거하시니 정말 슬프다”고 애도를 표시했다. 천호선 전 홍보수석은 “노무현·김대중 두 분의전직 대통령을 함께 잃은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고, 어깨도 무겁다”며 “이제 두 분의 뜻을 이어 민주주의와 평화를 완성해야 하는 남은 자들의 몫이 크다”고 말했다. 김지은 신승근 기자*
“생가 둘러보며 눈시울 붉히던 모습 선해” | |||||||||||
비통에 빠진 고향 하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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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휴가철을 맞아 김 전대통령의 생가를 찾았다가 서거 소식을 들은 계선유씨는 방명록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다. 생가 관리인 양재윤(51)씨는 “주말과 휴일엔 30~50여명의 외지인들이 김 전 대통령의 생가를 찾아왔다”며 “지난달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하신 뒤 방명록엔 쾌유를 비는 글이 많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한문을 깨쳤던 덕봉강당을 지키는 김도미(58)씨도 “지난 4월 하의도를 방문해 ‘관리를 잘 해달라’라며 손을 꼭 잡고 인자한 미소를 짓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형렬(61·후광1구) 이장은 “마을회관에 모여 김 전 대통령의 생가를 찾을 참배객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신안군은 하의면사무소 2층 회의실과 김 전 대통령의 생가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종친들과 마을주민 50여명이 분향소 설치를 도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4월24일 생전에 마지막으로 고향 하의도를 찾아왔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부인 이희호씨와 함께 하의도 대리 선산의 묘소에 참배한 뒤,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후광리 생가를 찾았다가 어릴 적에 공부했던 방을 둘러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생인 박홍수(87·하의면)씨는 “지난 4월 고향 방문 때 잠깐 만났을 때 건강이 괜찮아 보였는데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박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이 일본인 교장의 횡포에 맞서 연판장을 돌렸다가 미수에 그쳤던 일을 회고하며 “김 전 대통령이 당시 일본인 교장에게 야무지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
DJ, 잇단 우파 집회에 "내집 앞이라고 할 말 못하게 하면 쓰겠냐"
"중복엔 경비대에 늘 삼계탕 회식… 올해는 지키지 못한 약속돼"
마당에서 뛰어놀다가 걸핏하면 대문 밑으로 머리를 내밀었고, 그때마다 보초는 근무 수칙상 앞을 응시하면서 강아지를 도로 들여보내느라 애를 먹었다.
이런 일이 두세 달 계속되자 비서실에서 강아지들에게 목줄을 달아 마당 한 켠에 묶었다. 이를 본 김 전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더니 "말 못하는 짐승도 자유롭게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한 법"이라며 "강아지들을 당장 시골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동교동 담당' 정보형사 김모씨가 전한 일화다. 50대 중반의 김 형사는 올해로 14년째 서울 마포구 동교동 일대를 맡아 김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봐 왔다.
김 전 대통령은 손자 뻘인 전경들도 격의 없이 대했는데, 한 번은 평소 즐기던 세발낙지 얘기가 나오자 "낙지는 젓가락에 돌돌 말아 고추장을 푹 찍어 먹는 게 제 맛"이라며 젓가락 들고 신나게 시범을 보여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는 좀더 깊숙한 '첩보'를 들려달라는 요청에는 "직무상 취득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 것이 정보형사의 철칙"이라며 말을 아꼈다.
김 형사는 김 전 대통령이 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정계 복귀할 무렵부터 동교동을 담당했는데, 대통령 퇴임 이후가 오히려 힘들었다고 했다. 우파 단체들이 사저 앞에서 '대북 옹호 망언' '무차별적 퍼주기' 등을 주장하며 확성기를 동원한 집회를 자주 열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맞불 집회라도 여는 날엔 주변이 북새통이 됐다.
하루는 그가 "(김 전 대통령이) 심기 불편하지 않으시냐"고 묻자 비서관들은 "편치야 않으실 텐데 늘 '나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하고 싶은 말 다했는데 내 집 앞이라고 하고 싶은 말 못하게 하면 쓰겠냐'고 하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직접 얼굴 뵙고 선물 전하겠다"고 떼 쓰는 지지자들을 대할 때도 난감했다고 했다. "선물을 대신 받아 전하기도 했는데 한 할머니가 이희호 여사를 위해 정성스럽게 만든 골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한국일보. 이훈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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