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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파란만장한 일생, 주요 어록

by 싯딤 2009. 8. 21.

[한겨레.2009.08.18]

납치·투옥·연금·사형선고…탄압 뚫고 핀 ‘인동초’

굴곡 많은 일대기-〈1〉 출발
대학진학 포기뒤 징용피해 회사 취직
사업가·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급성장’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3년 음력 12월(양력으로는 1924년 1월)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출생연도를 1925년으로 고쳤다고 한다. 하의면은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외진 섬이다. 후광리는 그의 아호 ‘후광’이 됐다.

» 80년대 초는 전.노씨의 전성기였으나 양김에겐 혹독한 시련기였다.

그의 부모는 하의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부들을 상대로 객주업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하의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부모는 아들 교육을 위해 육지인 목포로 이주했으며, 김 전 대통령은 목포제일보통학교(현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목포에서 부모는 여관업을 했다. 학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인 학생들의 텃세로 ‘이지메’(집단 따돌림)에 시달렸다. 그러나 꿋꿋하게 학교를 다녔고, 특히 웅변에 소질이 있어 곧잘 혼자서 연설을 하곤 했다. 1939년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1973.8.14

이어 당시 지역 명문인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상고)에 진학했다. 1학년 때는 입학 성적에 따라 정해지는 반장을 맡기도 했다. 처음에는 취업반으로 들어갔으나 2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진학반으로 옮겼다. 어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같은 또래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그는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명문대였던 만주건국대에 응시했지만 서류전형에서 낙방했다. 그는 재수를 포기하고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45년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나 곧 탈퇴했다. 그해 그는 목포상선회사의 경리관리에 이어 재산관리인으로 선정되고, 11월엔 대표가 됐다. 그의 사업은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전남선박 목포조합장, 대양조선 사장 등을 거쳐 48년 목포일보를 인수해 주필까지 겸하게 된다. 51년엔 목포해운(흥국해운) 사장에 이어 전남해운조합 회장으로 취임했다. 45년엔 미모가 뛰어났던 차용애씨와 결혼해 48년 큰아들 홍일씨를 낳았다.

그의 인생 초반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2〉도전

4전5기끝 의원 당선 사흘뒤 ‘5·16’
‘40대 기수’ 대결서 대선 후보로

» 박정희 정권 시절 3선개헌 저지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 1998.01.01 189호

김 전 대통령은 일찌감치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 도전 초기엔 좌절을 겪었지만,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까지 대체로 화려한 정치인생을 맞았다.

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민의원에 출마한 ‘첫 도전’은 실패였다. 그는 목포의 사업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삼각지에 노동문제연구소를 차렸다. 월간 <사상계>에 노동문제 관련 원고를 집필해 노동운동 평론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58년 4대 총선과 59년 보궐선거에 나갔지만 잇따라 실패했다. 4·19 이후 민주당 바람 속에서 치러진 60년 5대 총선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이 와중에 첫째 부인 차용애씨와 누이동생을 잃고 가산까지 날렸다.

» 김대중 대표와 김상현, 정대철 최고위원 등 민주당 당직자들은 1992년 5월 29일 경기도 평택군 현덕면 도대리에서 모내기를 도와주었다. 이정우 기자

61년 36살에 강원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4전5기’에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5·16 쿠데타가 터져 의원직을 잃었다. 군정 기간 그는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두 차례에 걸쳐 한 달 남짓 감옥생활을 했다. 그즈음 두번째 반려자인 이희호씨와 결혼했다.

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로 옮겨 노동조합의 지지와 목포상고 동창들의 도움으로 당선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생이 펼쳐졌다. 개원 초기 6개월 동안 본회의 13차례 발언, 본회의 최장인 5시간19분 발언 등 여러 가지 기록을 세웠다.

» 71년 대통령선거에서 40대 기수 김대중이 보인 위력은 박정희를 불안하게 했다. 1998.01.01 189호

야당의 ‘재정통’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대변인, 정책위의장 등을 지냈다. 양복 상의에 붉은색 손수건을 꽂고, 백구두를 신고 다니던 그는 정가의 멋쟁이였다.

67년 7대 총선에서 박정희 정권은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정권 차원의 ‘낙선운동’을 벌였지만, 또다시 당선돼 이름을 날렸다.

는 야당 안에선 장면, 박순천 등이 이끄는 민주당 신파에 속했다. 그는 70년 당내 세대교체 구호인 ‘40대 기수론’에 힘입어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1차 투표에선 1위 김영삼 후보에 밀려 2위에 그쳤다.

» 김대중 총재가 아침 7시 15분 당사를 떠나면서 구인에 항의하는 당원들에게 손을 들어 "염려 말라"며 자제를 당부하고 있다. 한겨레 1989.08.03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이철승 후보와 연합한 그는 구파인 김영삼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안팎의 예상을 깨고 승리하며 대선 후보를 차지했다. 71년 대선에서 그는 ‘박 대통령의 영구집권 음모’를 폭로하고,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안전보장안을 제시하는 등 박 대통령을 위협했다. 결과는 95만표 차이의 패배였다.

〈3〉시련

박정희·전두환 정권 눈엣가시…수차례 죽을 고비

» 1971년 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김영삼 후보를 극적으로 따돌리고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후보로 선출된 김대중 후보의 환호하는 모습.

박정희 대통령과 맞선 1971년 이후 10여년 동안은 그야말로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위협적 존재로 확인된 정치인 김대중을 그냥 두지 않았다. 대선이 끝난 뒤 총선 지원유세를 다니던 김 전 대통령은 타고 있던 승용차가 대형 트럭에 받히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의문의 사고였다. 그는 고관절 변형증으로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1973.8.14

그는 72년 일본에서 10월유신을 맞았다. 귀국을 포기한 그는 미국과 일본에서 한국민주통일연합(한민통)을 조직해 반유신운동에 나섰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엄청난 공작을 기도했다. 73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도쿄 시내 호텔에서 그를 납치해 대한해협에 수장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동교동 집에 가둬놓고 철저히 감시했다.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74년 12월 가택연금 도중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7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뒤 다시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택연금과 투옥의 연속이었다.

79년 10월 정적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죽자 그는 잠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12·12 군사 쿠데타와 5·18로 권력을 쥔 전두환 신군부는 그에게 이른바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씌웠다. 신군부는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대법원은 81년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한 신군부는 무기징역으로, 다시 20년형으로 감형한 뒤 82년 미국으로 강제 출국시켰다. 미국에서도 그는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하고, 김영삼 총재 단식투쟁 전미비상대책위를 구성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 박정희 정권 시절 3선개헌 저지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 1998.01.01 189호

이 시기, 그의 신분은 ‘재야인사’였다. 그는 이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를 재야인사로, ‘민주화의 상징’으로 만든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박정희, 전두환 두 군 출신 대통령이었다

〈4> 집념
대통령·노벨상 영광뒤…‘행동하는 양심’ 일깨워

대권 향한 도전과 좌절…‘3전4기’ 정권교체 신화

그는 1985년 2·12 총선 직전 미국에서 귀국해 71년 대선 패배 이후 타의에 의해 중단했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는 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욕심은 분열을 낳았다. 그는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87년 12월 대선에 도전했지만 ‘3등’에 그치는 치욕을 당했다. 하지만 4개월 뒤 소선거구제로 바꿔 치른 13대 4·26 총선에서 제1야당을 차지해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호남표의 결집에 따른 의외의 결과였다. 믿을 수 없는 강도로 결집하기 시작한 호남표는 다른 지역의 반발을 불러와 그의 앞날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제1야당 총재였던 그는 90년 1월 3당 합당 때까지 정국을 주도했다. 노태우 정권의 합당 제의를 거절한 그는 92년 3·24 총선을 앞두고 ‘꼬마 민주당’과의 통합에 성공했다. 민주당은 92년 총선에서 97석을 차지했다. 야권 단일후보라는 명분을 쥔 그는 92년 12월 대선에서 ‘영원한 동지이자 맞수’였던 김영삼 후보와 정면승부를 벌였다. 하지만 지역감정의 벽은 완고했다. 200여만표 차로 패배한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영국에 6개월 동안 머문 뒤 귀국한 그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통일 연구에 몰두했다. 집도 아예 동교동에서 일산으로 옮겼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95년 지방선거 지원 유세는 그에게 정계 복귀의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민주당은 서울시장을 차지했고, 그는 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96년 4·11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겨우 79석을 차지해 그의 정치적 생명을 위협했으나, 97년 5월 당내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으로써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과거와 전혀 다른 전략을 세웠다. ‘지역연합론’을 바탕으로 자민련의 김종필·박태준씨와 손을 잡은 것이다. 여기에 여당 후보의 분열, 외환위기 충격이란 상황에 힘입어 마침내 대통령 선거 3전4기의 신화를 완성했다.

이유주현 송호진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 어록

50년 정치 인생을 마감하고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궤적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이 수놓아져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치밀한 논리와 핵심을 찌르는 표현으로, 때로는 화려한 수사로 좌중을 압도한 달변가이자 뛰어난 대중연설가였다.

군사정권 시절 그가 남긴 말들은 쉽사리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옥중서신' 등을 통해 재야 및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갔다.

이후 사면.복권으로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87년 이후 쏟아진 거침없는 발언들은 그를 지탱해준 최대의 정치적 무기였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 봐야 한다" 등은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문구들이다.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는 표현은 그가 몸담았던 한국 현대 정치사의 역동성을 대변하며 지금까지도 정치권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92년 대선운동 과정에서는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이라는 감성적 수사로 표심을 자극했다.

97년 `준비된 경제대통령'이라는 구호로 대권 도전 4수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햇볕정책', `제2의 건국' 등으로 자신의 통치철학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언급해가며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운 주제를 하나씩 추가해 나가는 `얼레(reel) 화법'을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음은 주요 어록.

▲"3선 개헌은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독재 국가로 만들어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 좌익독재뿐 아니라 우익독재도 똑같다"(69년 7월19일 효창운동장서 열린 `3선개헌 반대 시국대강연회에서)

▲"4.19는 5.16의 안티 테제다. 4.19가 정의이면 5.16은 불의이고, 4.19가 민주이면 5.16은 반민주인 것이다"(80년 4월18일 동국대 4.19 기념강연회에서)

▲"민주주의의 회복은 우리의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절대적인 선행조건이다"(85년 3월8일, 민추협 공동의장직을 수락하며)

▲"민주주의는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있다. 무슨 말을 해도 3당 통합은 비민주적이고 반국민적이고 반역사적이다"(90년 2월27일 국회 평화민주당 대표연설에서)

▲"이제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92년 12월 대선패배 후 정계은퇴 발표에서)

▲"세번 나와 대통령 선거에 떨어진 사람이 네번 나와 국민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93년 11월5일 출입기자단 만찬에서 정계복귀설을 부인하며)

▲"북한의 핵문제 해결에서 최고 요체는 김일성의 체면을 세워주는데 있다 "(94년 5월12일, 미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제로 남이더라"(95년 6월14일 서울산업대 강연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우리가 남이가' 발언을 꼬집으며)

▲"정계은퇴시에는 정치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95년 7월 정계복귀 선언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을 둘이나 잡아넣을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런 건 못한다"(96년 5월23일 진주 경상대 초청 강연에서 집권 후 보복정치 여부에 대한 질문에)

▲"신한국당 최고지도자가 `우리가 남이가'라고 하는데 여러분도 나를 남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도 김해 金씨로 경상도 사람이다. 나의 두 며느리도 부산에서 태어났다"(97년 11월20일 부산일보 대선후보 초청강연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3당 합당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호랑이는 잡지 못하고 본인이 호랑이가 됐다" (97년 12월3일, 김영삼 대통령의 3당 합당을 비난하며)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97년 12월19일, 김대중 당선자 기자회견)

▲"이제 재벌의 시대는 끝났다"(98년 2월23일, 독일 `데어 슈피겔'지와의 회견에서 재벌중심의 경제체제 개혁을 주장하며)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시키겠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98년 대통령 취임사)

▲"지역주의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대통령을 못하면 못했지 절대로 동서분단을 방치할 수 없다"(98년 6월30일 인촌강좌 특강에서)

▲"햇볕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감싸기도 하지만 음지에 있는 약한 균들을 죽이는 것도 햇볕이다"(98년 6월30일 고려대 명예경제학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빅딜이건, 작은딜이건 기업을 개혁해야 한다"(98년 6월14일 방미 귀국 기자회견에서)

▲"나도 실업계 고등학교 나왔어요. 실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결정해야지, 학교를 가지고 차별하면 안된다"(98년 9월3일 경남도청 업무보고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지고, 계층간에 대립하고, 세대간 에 갈등해서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99년 12월2일, CBS 비전21 대회에서)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가지고 (평양) 방문길에 오르고자 한다"(2000년 6월13일 서울출발 평양행 대국민 인사말에서)

▲"여러분이 보고싶어 이곳에 왔다"(2000년 6월13일, 평양 도착성명에서)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제 가능성을 보고 왔다는 것 뿐이다"(2000년 6월15일, 방북성과 대국민 보고에서)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책임의 시작"(2000년 12월10일,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훌륭한 대통령을 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혼신의 노력을 다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것을 확신한다"(2001년 10월29일 민주평통 해외자문위원 초청 다과회에서)

▲"정권에는 임기가 있지만, 국정에는 임기가 없다"(2001년 10월30일 부산시 업무보고자리에서)

▲"앞으로도 저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며 살아가겠다"(2003년 2월24일 퇴임인사에서)

▲"여러분이 본전을 놓쳐서는 안되고 정당정치는 내 기본세력을 금쪽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2005년 11월8일 열린우리당 지도부 면담에서 `전통적 지지표 복원 노력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며)

▲"이제 정치를 떠났고 더이상 개입하지 않는다"(2005년 9월6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개관식에서)

▲"그것에 여당의 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2006년 10월9일 경향신문 특별인터뷰에서 열린우리당 분당을 언급하며)

▲"포용정책이 왜 죄인가"(2006년 10월11일 북한 핵실험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전화 주신 김에 한마디 하겠다"면서)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50년 동안 잃어버렸던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찾은 10년'이다"(2007년 6월9일 성공회대성당에서 열린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한나라당의 `잃어버린 10년' 주장에 대해 반박하며)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진 것은 처음"(대선 참패 직후인 2008년 1년1일 신년인사회에서)

▲"통일부를 없애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가"(2008년 1월24일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촛불집회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인터넷.휴대전화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된 중대 변화"(2008년 6월4일 미국산 쇠고기 파동 와중에 통합민주당 원내대표단 면담에서)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를 의도적으로 파탄내려하고 있다"(2008년 11월27일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평생의 민주화 동지를 잃었고 민주정권 10년을 같이했던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듣고)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경제, 남북관계의 3대 위기에 처해 있다"(2009년 1월1일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나라도 그런 결단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2009년 5월2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울역 분향소를 조문한 자리에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惡)의 편이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지 말자"(2009년 6월11일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 강연에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며)

▲"여간한 인연이 아니다. 전생에 무슨 형제간 같다"(2009년 6월11일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 강연에서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며)

▲"우리가 북한에 `퍼주기' 했다는 것은 거짓말"(2009년 7월10일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대북지원금이 핵무장에 이용된 의혹이 있다'는 이명박 대통령 발언에 반박하며) 송수경 기자 (서울=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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