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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by 싯딤 2009. 8. 21.

한겨레.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43분 서거했다. 향년 85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1시35분께 심박동이 정지했다가 40분께 다시 돌아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서거했다.

» 김대중 전대통령이 6일 광주시 서구 상무지구내에서 열린 김대중전시컨벤션센터 개관기념 오찬장에서 귀빈들에게 격려의 말을 하고 있다./광주 전남사진기자단 / 2005.9.6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87년, 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가 29일 오전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헌화를 마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김 전 대통령도 통곡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김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 수감되고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80년에는 5월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때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해 7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1973.8.14
92년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95년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네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듬해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공조를 앞세워 9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건국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사회를 구현했으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1980년 군사법원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과 관련, 재판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씨의 모습.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60년대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현실정치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른바 `3김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연합) ***

김대중 전 대통령 연보

▲1924년 전남 하의면 출생

▲1943 목포상고 졸업

▲1946 차용애 여사와 결혼.슬하에 홍일.홍업 두아들 둠

▲1948 목포일보 사장

▲1952 흥국해운 사장

▲1951 한국 해운조합연합회

▲1954 3대 민의원 선거 목포출마.낙선

▲1957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1959 4대 민의원 재선거 강원도 인제 출마.낙선

▲1960 민주당 기획위원겸 대변인.차용애 여사 사망

▲1961 제5대 민의원

▲1962 이희호 여사와 결혼

▲1963 제6대 국회의원

▲1965 민중당(민정.민주 통합야당) 대변인

▲1967 제7대 국회의원

▲1970 신민당 대통령 후보.경희대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1971 제7대 대통령 선거 출마.낙선.제8대 국회의원

▲1972 일본 동경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1차 망명)

▲1974 민족회복 국민회의 참여

▲1976-1978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

▲1978 가석방 후 가택연금

▲1979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1981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

▲1982 미국 망명(2차 망명)

▲1983 재미한국 인권문제연구소 창설

▲1985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7 4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1987 10월 평화민주당 총재 겸 대통령 후보

▲1988 제13대 국회의원

▲1991 신민당 총재

▲1992 제14대 국회의원.14대 대통령 선거 낙선.정계은퇴 선언

▲1993 영국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

▲1994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 이사장

▲1995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1997 제15대 대통령 당선

▲1998 제15대 대통령 취임

▲2000 새천년 민주당 총재.남북정상회담.노벨평화상 수상

▲2002 새천년 민주당 탈당

▲2003 제15대 대통령 퇴임.김대중도서관 개관

▲2004 내란 음모사건 재심 무죄 선고

▲2006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2009 서거

***

서거 2시간 전까지 가족과 ‘눈빛 이별’

긴박했던 마지막 순간
박지원 의원 “마지막 모습 평화로워…편안히 가셨다”
박창일 원장 “심폐소생술 의미없어…조용히 보내드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가 18일 저녁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김 전 대통령 영정에 헌화한 뒤 오열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서거하셨습니다.”

18일 오후 1시43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9층 중환자실. 10여년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진료해온 주치의 정남식 연세대 교수(심장내과)가 애통한 목소리로 사망 선고를 했다. 장준 교수(호흡기내과)가 김 전 대통령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떼냈다.

숱한 투옥과 고문, 살해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던 의지와 신념이 육체를 갉아드는 병마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곁을 지키던 부인 이희호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휠채어에 앉은 김홍일 전 의원 등 세 아들은 오열했다.

김 전 대통령의 병세는 전날 밤 11시부터 혈압이 떨어지며 급격히 나빠졌다. 의료진이 새로운 혈압상승제를 사용해 두 시간 만에 고비를 넘겼지만, 18일 새벽 다시 상태가 악화됐다. 아침 6~7시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오전 10시38분에는 산소포화도가 80%대로 떨어졌다. 산소宅?뎬?90% 이상을 유지해야 생명에 지장이 없다.

의료진은 김 전 대통령의 상태가 악화되자 산소포화도를 높이기 위해 최대 농도의 산소를 투여하고, 혈압상승제도 최대 용량을 사용했다. 그러나 호흡과 혈압은 나빠지기만 했다. 오후 1시20분께 수축기 혈압은 85, 산소포화도는 60%까지 떨어졌다. 장준 교수는 “혈압상승제, 산소 농도 등을 최대치로 사용했지만, 수치가 좋아지지 않아 임종하시기 두 시간 전부터는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서거 두 시간 전부터는 의료진은 24시간 지속해오던 혈액투석도 멈췄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입원에서 서거까지

서거 30여분 전인 오후 1시10분께 의료진은 “이제 곧 운명하실 것 같다”고 가족들에게 전했다. 오전 10시부터 20층 브이아이피실과 9층 중환자실을 오가며 곁을 지키던 이희호씨와 세 아들과 손자, 박지원 민주당 의원, 권노갑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들이 모두 병실로 내려왔다. 저마다 “여사님을 잘 지켜 드리겠다”, “저희가 잘 알아서 (정치)하겠다”는 등의 고별인사를 했다.

진정제 때문에 줄곧 수면상태였던 김 전 대통령은 서거 두 시간 전쯤에 잠에서 깨어나 가만히 눈을 뜨고 가족들과 눈을 맞추기도 했다고 의료진은 전했다.

오후 1시36분, 심장이 마지막 순간을 예고했다. 심전도 기계의 그래프가 평평해졌다. 심장이 멎었다는 신호였다. 잠시 뒤 약하고 불규칙한 심장박동이 돌아왔지만, 7분 뒤인 1시43분 심전도 기계는 다시 한번 심장이 정지했음을 알렸다. 의료진은 더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박창일 연세대의료원장은 “서거 당시에는 이미 다발성 장기부전이 온 상태여서 심폐소생술은 큰 의미가 없었으며, 조용히 보내드렸다”고 말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검을 실은 운구차가 18일 오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지하에서 안치실로 이동하고 있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지난달 13일 폐렴 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은 37일 동안 병마와 싸우다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인 박지원 의원은 “마지막 돌아가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평화로우셨다. 아주 편안하게 가셨다”고 임종 순간을 전했다. 박수진 정유경 기자***

세브란스 병원 김전대통령 주치의 문답

김 전 대통령 주치의였던 연대 세브란스 병원 호흡기내과 장준 교수와 신장내과 최규헌 교수, 심장내과 정남식교수는 이날 오후 4시 30분 병원 교수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거 당시 상황을 설명햇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은 17일 밤부터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임종 때에는 아주 편안하게 가셨다"라고 말했다.

또 "임종 1~2시간 전까지 가족들과 눈을 마주치는 등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이 있었다"고 전했다.

다음은 주치의들과의 일문일답.

<장준 교수>

-- 서거에 이르기까지 상황을 시간대별로 본다면.

▲ 어제(17일) 오후 11시께부터 나빠지기 시작해 혈압상승제 양을 늘렸다. 오늘(18일) 오전 6~7시께 다시 환자 상태가 진행(악화)한다는 것을 알았고, 오후 1시 43분 임종했다.

--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 혈압이 떨어졌다. 적절한 산소포화도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하는 상승제와 산소 공급 양을 늘렸다. 어제 오후 11시부터 혈압이 떨어져 우리가 개입해 상황이 좋아졌는데, 서거 직전에는 그런 조치가 통하지 않았다.

-- 의식이 있던 것은 언제까지고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시점은.

▲ 임종 1~2시간 전에도 눈빛으로 가족들과 의사소통이 됐다. 멍하니 눈을 뜨는 것과 눈을 (가족들과) 마주치는 것은 분명히 다르므로 금방 판단할 수 있다. 말로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 오후 1시35분께 심정지를 했다는 것은.

▲ 35분에 나타났던 것은 완전한 심정지는 아니다. 사망 전에 1~2분 전에 심전도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심전도가 평평하다가 다시 회복된 것이다.

-- 자발호흡은 언제까지 했나.

▲ 폐색전증 이후로는 완전한 자발호흡을 하지 못했다. 임종 시까지 인공호흡기 부착했다.

<정남식 교수>

-- 심폐소생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이희호 여사와 상의한 것인가.

▲ 심폐 소생술은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경우에 한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고 김 전 대통령은 아주 편안하게 가셨다.

-- 이희호 여사의 반응은 어땠나.

▲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의 반응은 누구나 똑같을 것이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오열했다.

-- 회생이 어렵다고 생각한 시점은.

▲ 운명하시기 2시간 전부터 심폐소생술이 도움이 안 되고 회생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 다발성 장기부전이 사인인데 상한 장기는.

▲ 폐와 혈액계통, 간 등이다.

-- 김 전 대통령이 더 살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나.

▲ 가족들과 눈맞추는 일만 했다.

-- 편안하게 가셨다고 하는데. 김 전 대통령은 병실에서 어떻게 지냈나.

▲ 심장이 매우 튼튼했고 의사의 지시를 아주 잘 따랐다. 필요없는 약이나 증명되지 않은 약은 전혀 드시지 않았다.

임형섭 기자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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