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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김대중과 박정희, 김영삼, 노무현

by 싯딤 2009. 8. 24.

박정희와 김대중-탄압맞선 저항 ‘18년 악연’


박, 71년 대선 이긴뒤 납치·고문 등 탄압
DJ, 비난 삼가…재임땐 박 기념관 지원

»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움직임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 사복 경찰에 연행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 사진).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 소장의 모습. 보도사진연감
그를 인권과 민주의 기수로 키운 건 역설적이게도 박정희의 모진 탄압이었다. 그가 탁월한 정치인으로 우뚝선 데는 김영삼과의 40년 애증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민주정권 10년의 새역사를 함께 만든 노무현은 그에게 ‘몸의 절반’이었다. 김대중과 박정희, 김영삼, 노무현의 얼키고설킨 인연은 그대로 우리의 현대사다.

김대중과 박정희, 두 사람은 단둘이 만나 눈빛을 나눠본 적이 없다. 말을 길게 섞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역사의 자기장 양극에 서서 상대의 ‘존재’를 겪었다. 한 사람은 언덕 아래로 끊임없이 바위를 떨어뜨렸고, 또 한 사람은 한결같이 그 바위를 밀어올려야 했다. 상대방의 음모로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던 한 사람은 살았고, 다른 한쪽은 스스로 파멸을 향해 치달았다.

충돌의 시작은 71년 대선이었다. 69년 3선개헌을 통해 독재의 기반을 다진 박 전 대통령은 혜성처럼 나타난 김대중에 당혹해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회고록에 70년 9월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에 역전승을 거둔 날의 박 전 대통령을 이렇게 묘사했다. “표정은 시푸르덩하였고 앞엔 한두번 빨다가 비벼끈 담배꽁초들이 재떨이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김대중은 시퍼렇게 날선 현직 대통령 박정희의 서슬에 주눅들지 않았다. 1960년대를 ‘개발을 빙자한 독재시대’, 70년대를 ‘희망에 찬 대중의 시대’라고 당차게 선언했다.“박정희씨! 당신은 30원짜리 미나리 도둑은 구속해도 50억, 500억원의 거대한 도둑놈들을 처단하지 못하는 이유를 묻고 싶다”고 공개 비난했다. 또 “국내 정치를 악용만 하려하지 말고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부 좀 하라”고 일갈했다. 박 전 대통령으로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박정희 연구의 일인자인 고 전인권 박사는 “선거에 임하는 양쪽의 입장이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는 정책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통령이 대결적 안보체제를 강조한 반면, 김 전 대통령은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전쟁억지 보장, 예비군제 폐지, 남북교류 추진 공약을 들고 나온 것이다.

선거는 94만6천표로 박 전 대통령이 승리했지만, 부정투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으로 근무했던 강창성 전 한나라당 의원조차 뒤에 “원칙대로 투·개표를 했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른다”고 증언했다.


» 탄압맞선 저항 ‘18년 악연’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빼앗긴 지도자’로 인식되며 박정희체제의 대항마로 떠오른 반면, 71년은 박 전 대통령에게 ‘최악의 해’였다. 공안부 검사가 현직 판사들의 구속영장을 청구한 데 항의해 서울지방법원 판사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는 사법파동이 벌어졌고, 대학가엔 연일 반독재 타도 시위가 열렸다. 고 전인권 박사는 “횡적인 관계와 타협이 무능했던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 선언·유신이라는) 멈출 수 없는 기차에 타게 됐다”고 짚었다. 박 전 대통령이 바짝 조인 독재의 고삐는 곧 김 전 대통령의 수난으로 이어졌다 .
73년 8월 도쿄 납치사건은 정권 차원의 ‘김대중 죽이기’ 완결판이었다.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지만, 김 전 대통령이 살아서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놀란 사람은 아마 박 전 대통령과 당시 이후락 중정부장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구속·가택연금을 반복하며 정치적으로 매장당하게 된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저항의 칼날을 벼렸다. 1978년 9월 고문과 투옥으로 쇠잔해진 김 전 대통령은 병실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못으로’ 편지를 쓰면서도 “올 가을이 중요한데, ‘물가 내려라’, ‘농민들의 곡가를 보장하라, 폭풍피해를 완액 보상하라’ 같은 국민 생활에 밀접한 이슈로 싸워라’”라는 내용을 빼곡히 적었다.

박 전 대통령은 죽이고 싶을 만큼 김대중을 미워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인간 박정희’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설훈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정권의 정책은 반대했지만,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건 높이 샀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정치공학적 판단에 의한 위선’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지원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4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동교동 자택을 방문해 “그동안 아버지 시절에 많은 피해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말하자 “과거 일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드린다”고 화답했다. 한홍구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은 ‘착한 남자 콤플렉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생 용서·화합을 강조했는데, 이 때문에 철저한 과거사 청산으로 이어지지 못한 한계도 있다”고 지적했다.

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두 사람의 악연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박 전 대통령이 낙인찍었던 ‘빨갱이’ ‘호남 지역주의의 대변자’라는 꼬리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역설적이게도 김 전 대통령을 ‘역사의 큰별’로 만든 자양분은 박 전 대통령이 안겨준 시련이었다. 김형욱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가 김대중의 성장을 결과적으로 도왔다. 박정희란 인물은 어지간한 정적쯤은 눈아래로 보고 상대조차 안하거나 아니면 돈으로 매수하거나 폭력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김대중은 돈에 매수되지도 않았고 폭력에 굴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박정희는 김대중을 없애려들었지만 그럴수록 김대중은 더욱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말았다.” 이유주현 기자*

김영삼과 김대중-민추협 시절 ‘연애같았던’ 40년 애증

민추협 시절엔 ‘연애하냐’ 오해샀을 정도
YS, 조문 뒤엔 “감정 봄눈 녹듯 스르르”

» 김대중, 김영삼. (1996년 6월 18일 수집) 3.6전면 해금조치로 5년만에 동교동에서 만난 김대중 김영삼씨가 활짝 웃으며 포옹하고 있다.
“두 사람을 한 시대, 한 무대에 세운 보이지 않는 손의 장난이 참으로 얄궂기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는 자서전 ‘동행’에서 남편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인연을 이렇게 적었다.

경남 거제의 갑부집 아들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야당의 주류로 탁월한 ‘감’을 지녔던 김영삼. 전남 외딴섬 하의도 소작농의 아들로 자수성가해 뛰어난 언변과 분석력을 지녔던 김대중. 두 사람의 인연은 모질고 깊었다. 40년 가까이 경쟁하고 협력하며, 다투고 질시했다. 한국 현대사의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첫 대결은 신파의 김대중과 구파의 김영삼이 겨룬 68년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이었다. 김영삼의 승리였다. 두번째 대결인 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은 이철승과 손잡은 김대중의 역전승이었다. 김영삼은 당시 당선 수락 연설문까지 준비했을 정도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유세에도 참여했다. 이희호씨는 회고록에서 “이름다운 패자의 모습”이라고 회상했다. 경쟁의 관계였다.

박정희 치하에서 두 사람은 서로 약점을 채워가며 함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동지적 관계였다. 김대중 납치테러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73년 9월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 본회의에서 “전모를 밝히지 못하면 김종필 국무총리 등 내각이 총 사퇴해야 한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서로 너무나 달랐지만 사이는 참 좋았어요. 와이에스(김영삼)가 종종 디제이(김대중)에게 ‘니는 도대체 쉬운 것도 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노?’ 하고 농을 걸었고, 그럼 디제이는 ‘자네는 말이여, 매사를 너무 쉽게 생각한당게~’라고 맞받았죠.”박찬종 전 의원의 회고다.

전두환 신군부 등장 뒤에도 두 사람은 각각 해외 추방과 가택 연금 상태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84년 9월엔 힘을 합쳐 민주화의 요람이 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꾸려 공동의장이 됐고, 85년 1월엔 신민당을 함께 창당해 공동의장을 맡는다. 이해 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귀국하면서 두 사람의 반독재 투쟁 협력은 복격화한다. 박종웅 전 의원은 “당시 민추협 사무실이 청계광장 근처에 있었다. 매일 회의하며 보는 데도 가끔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걸어가시다가 두 분이 마주치면 서로 손을 흔들며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악수하곤 했다. 오죽했으면 비서들끼리 ‘두 사람이 동성연애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87년 시민들과 함께 쟁취해낸 대통령직선제를 두고 갈라졌다. 대선후보 단일화 실패 뒤 틈새는 더욱 커졌다. 다툼과 질시의 관계가 시작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김대중이) 단일화 대신 신당(평민당)을 창당해 뒤통수를 쳤다”고 맹비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당시 어른께 양보하시라고 어렵사리 권유했으나 어른은 ‘김대중이 되면 군부가 어떤 식으로든 발호한다’는 신념이 매우 확고했다”고 말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 쪽은 앞선 자질을 내세웠다.

결국 그해 12월 대선에 각각 나선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각각 633만여표와 611만여표를 얻어 828만여표의 노태우 후보에게 어렵게 얻은 직선제의 열매를 고스란히 넘겨줬다. 결과론적이지만 불과 1% 포인트(22만표) 차에 불과한 팽팽한 세력관계가 두 야당 지도자의 눈을 멀게 했고, 결국 둘의 운명도 갈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거 뒤 “국민들의 염원을 위해 양보했어야 했다”고 회한에 젖었다고 한다.

90년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정당, 공화당과 3당합당을 하며 민자당-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여당의 길을 택했다. 그 결과 92년 14대 대선에서 먼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눈물의 정계은퇴 선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복귀 뒤 97년 대선에서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대선을 두달 앞두고 불거진 이른바 ‘디제이 비자금’ 사건의 수사를 대선 뒤로 유보하겠다고 발표해 김대중 전 대통령 대선 행보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해줬다. 두 사람의 화해 가능성이 엿보인 대목이었다. 그러나 한보비리 사태로 구속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의 사면 문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급랭했다. 이후론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너무 달랐다. 이희호씨는 “독재 앞에선 동지였으나 그 밖의 문제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고 회고록에 썼다. 박찬종 전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각 분야의 담당에게 일을 전폭 일임하며 책임감을 실어주었다면, 엄청난 독서가로 여러 분야에 해박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식과 논리의 카리스마로 참모들을 휘어잡았다”고 말했다.

이제 한 사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40여년 애증의 인연은 끝을 맺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일주일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병상을 찾아 “이제 화해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한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여의도연구소부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어른이 그러시더군요 ‘너무 기분이 이상하다. 조문해 이희호 여사를 만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갖가지 감정들이 봄눈 녹듯이 녹더라. 큰 역할을 한 인물인데 이렇게 가니 너무나 안타깝고 아쉽다’고요.” 성연철 기자*

노무현과 김대중-민주정부 10년 합작한 서로의 ‘반쪽’

3합당 맞서 20년 동행…MB정권 후 ‘고통’
지역·보스 정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충돌’

»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2년 12월23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와 청와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 모두 계승”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87일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떠난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은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숙성시키며 ‘민주정부 10년’ 역사를 함께 썼다. 그러면서도 호남의 현실주의자인 김 전 대통령과 영남의 이상주의자인 노 전 대통령의 관계는 존경과 연민 속에서도 긴장과 갈등을 지속하는 미묘한 궤적을 그려왔다.

두 사람은 출신지역도, 정당도 달랐다. 1988년 가을까지 옷깃 한번 스친 적 없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였고,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맞수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 13대 국회에 입문한 상태였다.

먼저 다가선 것은 김 전 대통령이었다. 5공화국 비리 청문회를 통해 초선 국회의원 노무현의 잠재력을 확인한 김 전 대통령은 그해 가을 국회 의원식당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라며 극찬했다.

두 사람을 정치적 동반자로 만든 것은 90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 결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정치적 야합”이라고 비판했고,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했다. 91년 9월16일 야권 통합이 이뤄지면서 두 사람은 통합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다.

지역정치와 보스정치의 가운데에 서 있던 김 전 대통령과 지역정치, 보스정치 극복을 정치적 이상으로 간직한 노 전 대통령은 끊임없이 충돌했다. 호남 출신이 주류를 형성한 통합민주당에서 노 전 대통령은 ‘영남 민주세력’의 지분 확보와 당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김 전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14대 총선 후보 공천에서 주류 쪽 최고위원들이 비주류인 이해찬 의원을 배제하려 하자 노 전 대통령은 강력히 저항했다. “최고위원님들, 뭐가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습니까. 김대중 대표님 당권이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길어야 1년입니다. 이해찬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하면 난 탈당하겠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침묵했고, 결국 이해찬 의원을 공천했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에게 모질게 말한 뒤 ‘내가 너무 심하게 한 것 아니냐’며 걱정이 많았지만, 대개 김 전 대통령이 양보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전했다. 영남 출신이면서도 호남기반 정당에 몸담은 노 전 대통령의 의지와 소신을 김 전 대통령이 평가해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 전 대통령은 결정적인 갈림길에선 김 전 대통령 편에 섰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정계복귀를 선언한 김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노 전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배신을 용납할 수 없다”며 합류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대선이 임박하자, 결국 김 전 대통령 진영에 합류했다. “3김 청산이 소신이지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게 더 중차대한 임무”라는 이유였다.

김 전 대통령은 정권교체 뒤 낙선을 각오하고 부산 출마를 거듭한 노 전 대통령을 신뢰하며,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하는 등 정치적으로 배려했다. 박선숙 전 청와대 대변인은 “김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종로를 버리고 영남에 출마하는 노 전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을 높이 평가하면서 항상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전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의 아들과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여당인 민주당의 재집권 전망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 ‘차별화’를 꾀하지 않고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계승하겠다”고 외쳤다. 결국 대선후보로 확정됐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둘 사이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햇볕정책’과 차별화된 대북정책을 추진했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민주당의 호남 지역편중을 극복하려 했다. 동교동계는 “배신자 노무현”을 성토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삼갔다.

두 사람의 오해는 2006년 11월 노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 방문을 계기로 해소됐다.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 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김 전 대통령은 100년에 한번 나올 훌륭한 지도자다. 김 전 대통령도 어쩔 수 없었을 지역적 한계를 보지 말고, 그가 이뤄낸 큰 산을 보라’며 ‘내가 먼저 김 전 대통령이 어떻게 사시는지 챙겨드리고 싶다’며 사저 방문을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10년 좌파정권 종식’을 외치며 등장한 이명박 정부에서 두 전직 대통령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지난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자 김 전 대통령은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민주정부 10년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생애 마지막 석달을 불살랐다. 신승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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