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국민장]추도사-한명숙, 추모 칼럼

by 싯딤 2009. 7. 28.

[한명숙 전총리 영결식 추도사]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말고 ‘바보’로 살지 마세요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그리고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꽃피우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한명숙

들찔레꽃 당신, 어려운 길만 골라 갔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며 / 도종환

날은 흐리고 바람도 없는데 찔레꽃 하얀 잎이 소리 없이 지는 오월입니다. 부엉이 바위를 향해 걸어 올라가던 산길에도 찔레꽃은 지고 있었을까요? 야생의 들찔레같이 살다 간 당신을 생각하니 나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비록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지만 철저한 비주류였습니다. 가난해서 상고를 졸업했던 비주류. 죽어라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고시에 합격했지만 거기서도 역시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에는 최루탄 터지는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재야로 살아도 거기 역시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습니다. 야당 국회의원을 해도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으며, 대통령을 해도 비주류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 대통령이 되어 지방군수 출신을 행자부 장관에 임명하고 여성에게 법무부 장관이나 총리를 맡기는 걸 보면서 이 나라 주류들은 속이 많이 상했을 겁니다. 그 자체가 재벌 권력이며 자기가 권력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이유인 주류 신문과 맞짱을 뜨려 하는 모습이 가소로웠을 겁니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도 균형 있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을 때 중심에 있는 이들은 마땅치 않았을 겁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보고는 반드시 내쫓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였을 겁니다. 틈만 나면 지역중심 정치구조를 혁파하겠다고 하고, 청렴하게 살겠다고 하는 걸 보며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비웃었을 겁니다.

[하니뉴스] 아주 떠나지는 말아요

속물에 의한, 속물을 위한, 속물의 정치, 스노보크라시가 정치의 본질이라는 걸 현 정권은 얼마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게 정치이고 그래서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지금 얼마나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런 권력을 당신은 권력기관에 하나씩 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참 바보 같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사회를 민주화하는 일에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경제를 민주화하는 일에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유화의 길로 가게 내버려 두면서 현실 정치의 한계를 절감하였을 겁니다. 현실적인 면에서는 그것이 우리 전체의 한계라는 걸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신에 대한 실망스러움이 더 컸습니다. 현실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둔 자리에 서 있는 나는 관전평이나 하고 편하게 욕이나 하면서 몇 년을 보냈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는 분명히 이성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류의 존재의 이유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사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런 따위가 아닙니다. 그건 정치를 모르는 순진한 비주류들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주류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당신이 더 철저히 놀림거리가 되지 않고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당신을 죽이면 주류 정치인이 다 죽는다는 경험을 탄핵사건 때 한 적이 있어서 잠시 눈치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여론의 흐름을 천천히 다른 곳으로 돌리기 시작할 것이고 당신의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시골로 내려와 농사짓고 동네 뒷산 지키는 환경운동 하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여기서 당신의 생이 끝나고 만 것이 가슴 아픕니다. 이 나라 역사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주류가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역사에 그래도 덜 부끄러운 기록들이 있다면 그것은 비주류가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만들어낸 순간들이 있어서입니다. 당신이 떠난 뒤에도 당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여전히 남아 다른 바보들이 그걸 실현하고자 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바보 같은 당신, 당신이 부엉이 바위 근처 어디에서 밤이면 부엉이처럼 눈을 뜨고 어두운 세상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주류들이 모여 있는 국가원수 묘역으로 가지 말고 봉하마을 뒷산에 머무시기 바랍니다. 그게 당신에게 더 어울립니다. 작은 묘비 하나로 있는 게 더 보기 좋습니다. 더러운 땅은 더러운 이들에게 맡기고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도종환/시인*

[문정인 칼럼]한겨레신문

외교 대통령, 노무현을 기리며

중국 베이징에서 국제회의 참석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일정을 중단하고 바로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과 연을 맺은 이래 그와 가졌던 수많은 공·사석의 외교안보 현안 토론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더욱 그랬다.

2차 북핵 위기와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 결정을 둘러싸고 고뇌하던 지도자 노무현의 모습, 일부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분서주의 행보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을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시키고 반가워하던 그의 환한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10·4 정상선언을 성사시킨 후 감회에 젖던 노 전 대통령, 그는 분명히 성공한 외교 대통령이었다.

그는 외교안보의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타고난 전략가였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협력과 통합의 동북아라는 큰 그림 속에서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유럽 통합 모델을 면밀하게 비교검토하고 다자협력을 기본 축으로 하는 동북아 공동체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는 세력균형 결정론이라는 냉전적 사고를 뛰어넘어 한국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발상이었다.

북한과 주변 4강에 대한 정책도 이런 대전략 아래 세워졌다. 미국과 일본에서 이탈하여 중국에 편승하는 섣부른 정책으로 매도되었던 균형자론도 이 대전략의 큰 틀에서 만들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이 군사력과 같은 물리력에 의한 경성 균형자(hard balancer)가 될 수는 없지만 역내 국가 모두와 선린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자협력을 주도하는 연성 균형자(soft balancer) 구실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미래를 보고 여는 정책적 포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결코 반미친북을 표방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한-미 동맹을 단기적으로 우리의 생존을 담보해주는 필수적 전략 자산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이라크 파병, 용산기지 평택 이전,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 등 중요한 한-미 현안들을 과감히 해결했던 것이다. 미국이 노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한-미 동맹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영속적 평화를 가져오기는 힘들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동맹은 본질적으로 공동의 적과 위협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안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미 동맹의 기조하에 유럽과 같은 다자안보협력체제를 동북아에도 구축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임기 내내 악몽처럼 노 전 대통령을 괴롭혔던 2차 북핵 위기만 해도 그렇다. 그의 예지, 담력, 그리고 결단이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군사적 충돌이라는 재앙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북에 대해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 6자회담을 통한 협상타결 방안을 도출했고,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로 6자회담이 파국의 위기에 몰리자 정상회담의 의전 관행을 깨면서까지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압박해 사태의 반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2006년 10월 북의 핵실험 직후 대북 제재방안을 논의하러 방한했던 당시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미국 책임론으로 응수해 부시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유도하기도 했다. 승부사의 기질로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떠나간 후에 그의 외교적 업적이 더 커 보인다. 왜 그럴까. 지난 정부의 외교 구상을 전면 부정하고 큰 그림 없이 즉흥적 임기응변 외교로 일관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무모한 대결을 통해 우리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현 정부의 암울한 행보 때문이 아닐까.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내가 설계한 사저가 아방궁이라니…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며 정기용/건축가

 5월 23일 토요일 하루 종일 찌푸린 하늘아래 가랑비가 흩뿌린다. 비극적 소식을 접하고 하루 종일 가슴이 애린다. 끊임없이 눈물이 고인다.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이 큰 슬픔과 놀라움 속에서 하루가 지난 오늘새벽까지도 부엉이바위는 내 눈앞에 나타나 나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하고, 지금 떠나서는 안 되는 분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경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오늘 나는 고백해야만 한다. 그동안 가슴속에 꾹꾹 참아왔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야만 하겠다.

 지난 2년 반 동안 나는 노무현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를 설계하고, 봉하마을 계획들을 옆에서 거들어 오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대통령은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훌륭한 건축주이셨다. 집짓기를 위한 회합을 거듭할수록 계획안은 점점 나아졌고, 서로 간에는 드디어 신뢰와 공감이 생겨났고, 퇴임 후 사저로 입주한 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찾아뵙고 또다시 봉하마을 생활 속에서 피어난 꿈의 계획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두 가지를 마지막 가시는 길을 위해 밝혀야만 한다. 한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TV카메라에 비친 모습만 바라보는,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저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귀향한 한 농촌인으로서 농부 노무현이 꿈꾸던 소박한 세계를 알리는 것이다. 오늘의 이 비통함과 가슴 저리는 심경 속에서 우리가 갖춰야 되는 최소한의 예의는 고인에 대해서 끈질기게 널리 퍼뜨렸던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봉하마을의 사저는 내가 설계했기 때문에 건축가인 내가 제일 잘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봉화아방궁이라는 말로 날조해서 사저를 비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악의마저 엿보이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는 대통령에게 내가 나서서 기자회견을 해야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소용이 없으니 참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다 밝혀질 일이지만 내가 설계한 대통령의 사저는 재료로 말하자면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리고 아방궁이 아니라 불편한 집이다.

 처음 만남에서 농촌으로 귀향하는 이유를 대통령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사도 짓고 마을에 자원봉사도 하고, 자연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도심아파트 같이 편하게 살아서는 안 되고, 옛날 우리조상들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어 살았듯이, 한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서 이동하는 방식의 채 나눔을 권유하였다. 한 공간에서 모든 것이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는 도시의 집과 달리 식사를 하거나 집무실로 이동할 때마다 봉화산을 바라보거나 공기 내음을 맡으면서 농촌에 살고 있음을 환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대통령은 흔쾌히 동의 하셨다. 흙집에다가, 도시 사람으로는 살기에 불편한 집. 그러나 품위가 있고 자연과 조화로운 집, 그런 집을 결과적으로 원하신 셈이다. 그리고 경호원들과 비서진들의 공간은 너무 떨어뜨리지 말고 한 식구처럼 생활하도록 주문하였다. 집이 다소 커져 보이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경호동을 안채와 붙여서 비서진들과 경호원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나는 중정형의 집으로 화답한 셈이다.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나라에서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확장한 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다. 건축가는 안다. 건축주가 누구이며 집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는지.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지붕 낮은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봉하마을 주민들의 농촌소득 증대사업을 유기농법으로 전환시키고, 봉화산과 화포천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치유하며,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생태교육의 장을 만들고자 하셨다. 재임시절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인 농촌의 문제를 스스로 몸을 던져 부닥치려는 대통령의 의지는 퇴임 후 일 년 내내 쉴 새 없이 지속되었다. 앞으로 마을뒷산 기슭에 ‘장군차’도 심을 예정이었고, 마을 마당 앞뜰에는 마을특산물매장도 꾸리고 노무현표 브랜드 쌀도 팔 계획도 세웠다. 특히 장터 지하 쪽에 작은 기념도서관 건립도 꿈꾸고 계셨다. 민주화운동시절 당신이 가까이했을 수밖에 없었던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 당시의 젊은이들의 양식이 되었던 모든 책들을 모아 작지만 전문적인 민주주의 전문도서관을 구상하고 계셨다. 농사도 짓고, 자연과 생태를 살리고, 나아가서는 작은 동물농장을 봉화산자락 부엉이 바위 밑에 만들어 청소년들과 함께 하려는 생각들이 바로 인간 노무현대통령이 꿈꾸던 소박한 꿈들이었다. 그리고 틈틈이 폭넓은 독서에 빠져 통치시절을 정리하며 집필 작업에 임하셨다. 독서와 토론은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즐기던 값진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대통령은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것은 내 탓이다. ‘산은 멀리 바라보고 가까운 산은 등져야한다’는 조상들의 말을 거역하고 집을 앉힌 내 탓이다. 봉화산 사자바위와 대통령이 그토록 사랑하던 부엉이 바위 가까이에 지붕 낮은 집을 설계한 내 탓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노무현 대통령이 목숨을 던져 우리들에게 남긴 질문들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애통함 속에서 한 마디의 단어, 그것은 ‘순교’이다. 한국 현대사 속에 심연처럼 가로놓인 질곡들, 멍에들, 허위의식들, 인간의 탈을 쓴 야수성들. 이 모든 것을 안고 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나는 순교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 나는 부엉이 바위 밑에 작은 동물 농장의 그림을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킨 채 지금 봉하마을로 내려간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도 바로 거기에 계시므로.정기용/건축가 *

[김선주칼럼] 한겨레

못다 쓴 유서를 쓰자

» 김선주 언론인
신문도 텔레비전도 보기 싫었다.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숨을 쉬기도, 말을 하기도 갑갑했다. 그런 열흘이 지나갔다.

고인이 남긴 유서를 읽고 또 읽었다. 말과 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길 즐겼고 또 자료로 남기길 원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너무나 짧은 유서를 읽고 또 읽는다. 행간에 혹시 다른 해석이 가능한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게도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했던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딴지에도 숱하게 걸려들었다.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갑자기 시시비비 가리기를 멈추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 그가 이다지도 짧은 유서를 남겼다.

신문과 방송이 쏟아내는 말들과 추모영상이 거짓말 같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인가. 무엇이 고맙다는 말인가. 무엇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인가.

일인당 국민소득 6000달러가 넘으면 민주주의 국가가 전체주의 국가로 변질되는 역사적 사례는 없다고 정치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단언했다. 오판이다. 그의 퇴임 뒤 나는 “노무현 시대를 거치면서 절대권력의 시대를, 그 강을 건넜다”고 썼다.(2008년 3월5일치 ‘노무현씨 나와 주세요’) 취소한다. 임기를 끝낸 대통령이 봉하마을의 이장쯤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나의 바람이었다. 안이한 생각이었다.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6000달러가 넘었으면서도 전체주의 국가로 변해가는 역사를 지금 써가고 있다.

박경리 선생이 만년에 쓴 시를 모은 유고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었다. ‘…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 우리 식구는 기피인물로 살았고/ 유배지 같은 정릉에서 살았다./ 수수께끼는 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뼈가 으스러지게 눈앞에서 봐야 했던 태평양전쟁과 육이오를 겪었지만 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 악은 강력했고 천하무적이었다/ 역적은 삼족을 멸한다는 옛날 관념에 사로잡힌 친지들도 우리를 뿌리치고 가는 …/’ 바로 그런 시대로 우리는 돌아가고 있다.

봉하마을에서 그가 겪었을 천하무적의 악은 무엇이었을까. 강한 것에 약하고 약한 것에 강한 사람들 마음 밑바닥의 비겁함이었을까.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고 전화와 이메일이 도청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을까. 촛불시위로 사면초가가 되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봉하마을의 그를 언론에 먹잇감으로 내준 것일까. 그가 돌려준 권한을 정권이 바뀌자 제발 우리를 주구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권력에 갖다 바친 검찰일까.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고졸 출신의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대통령직을 물러나 낙향을 하자 이것 또한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손녀를 태우고 논두렁길을 달리는 그의 평화로운 노년도 눈꼴시어서 보아줄 수 없었다. 이제 그의 자살도 질투를 한다. 먹잇감이 없어졌으니까. 그의 화장과 작은 비석 하나도 질투를 한다. 가진 것이 많아서 자기들이 못하는 짓이니까. 그 정점에 수구 기득권 언론이 있다.
누가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가. 죽은 권력에 난도질을 하고, 시정잡배로, 길거리 건달로, 그가 사는 흙집을 아방궁으로 묘사하며 모욕했던 언론이 제일 먼저 나서서 화해와 용서를 말한다. 죽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려는 짓이다. 화해를 먼저 청하는 것은 속이 뜨끔한 세력들이다. 그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간여했던 세력들이다. 천하무적의 악이다. 언론법을 빨리 처리하지 않는다고 안면 몰수하고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선 그들이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그가 못다 쓴 유서를 국민의 힘으로 써야 한다. 정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면. 김선주 언론인 *

“국화피는 가을에 다시 오시겠다더니…”

노 전 대통령 방문으로 인연맺은 ‘황토와 들꽃세상’ 김요한 목사
“당신은 우리에겐 너무 큰 사람…스스로 농부된 그의 뜻 이을것”

» 전남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마을에 있는 생태휴양지 `황토와 들꽃세상‘(www.htflower.com) 운영자 김요한(66) 목사는 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작년 7월 전남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마을 생태 체험관인 ‘황토와 들꽃 세상‘을 찾아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2008년 7월 전남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마을 생태 체험관인 ‘황토와 들꽃 세상‘을 찾아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

너무 슬픕니다.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은 벌거벗고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잘사는 전직 대통령들도 많은데

아직도 할 일이 많은 분을 이렇게 추모하는 것이,

돌이켜보면 당신은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작은 땅에서 살면서도 틈만 나면 영남, 호남 편가르기에 열중하는 우리에겐

당신은 너무 큰 사람이었습니다.

아파트시세에 지지 여부를 결정하는 우리네 천박함에 비해 당신은 너무 무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모르고 사는 야생의 우리에게 당신은 너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셈이 밝아 자신에게 이익이 안 되는 일엔 눈길도 안주는 처세의 달인인 우리에게 당신은 너무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떨치지 못하셨을 서운함과 아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역사가 우리의 무지를 가르치고 당신의 아픔을 치유하리라 믿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이툰 부대 군인

저는 자이툰부대 출신자 입니다.

향수를 뿌리치고 멀고 먼 타지 이라크라는곳에서 7개월을보냈죠

해외 다녀오신분들은 누구나 아시겠지만 3개월지나면 향수병에 걸리게 됩니다.

전 그랬습니다. 해외에 놀러간게 아니라 내 한목숨걸고 자랑스러운 태극기

어깨에붙여 나라에서 보내준 파병이었으니까요 근데 4개월쯔음 파병생활을 하고 있을때였습니다.

정말 힘들었죠 부모님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리웠죠 근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저희 자이툰을 방뮨해주셨습니다.

많은 격려와 찬사를 쏟아주셨죠 그러던 와중 어떤 자이툰 장병한명이

단상으로 올라가 노무현 대통령님께 '아버지!'라고 외치며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래도 일개나라의 대통령입니다 군인신분으로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자리입니다.

경호원들도 어쩔줄 몰라했었죠..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는 손짓한번으로 재빠르게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막으시고
그 장병을 꽉 껴안아주시며 '그래 아들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군들이 울기시작합니다. 감동으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전 그때를 그순간을 잊을수가없네요.

노무현 전 대통령님 존경합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꼭 끌어안으며 '아버지'라 불렀던 이 글의 주인공.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번쩍 들어올린 자이툰 부대원이 중위가 되어 돌아와 영정을 들었습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