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비록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지만 철저한 비주류였습니다. 가난해서 상고를 졸업했던 비주류. 죽어라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고시에 합격했지만 거기서도 역시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에는 최루탄 터지는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재야로 살아도 거기 역시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습니다. 야당 국회의원을 해도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으며, 대통령을 해도 비주류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 대통령이 되어 지방군수 출신을 행자부 장관에 임명하고 여성에게 법무부 장관이나 총리를 맡기는 걸 보면서 이 나라 주류들은 속이 많이 상했을 겁니다. 그 자체가 재벌 권력이며 자기가 권력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이유인 주류 신문과 맞짱을 뜨려 하는 모습이 가소로웠을 겁니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도 균형 있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을 때 중심에 있는 이들은 마땅치 않았을 겁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보고는 반드시 내쫓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였을 겁니다. 틈만 나면 지역중심 정치구조를 혁파하겠다고 하고, 청렴하게 살겠다고 하는 걸 보며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비웃었을 겁니다.
[하니뉴스] 아주 떠나지는 말아요
속물에 의한, 속물을 위한, 속물의 정치, 스노보크라시가 정치의 본질이라는 걸 현 정권은 얼마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게 정치이고 그래서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지금 얼마나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런 권력을 당신은 권력기관에 하나씩 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참 바보 같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사회를 민주화하는 일에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경제를 민주화하는 일에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유화의 길로 가게 내버려 두면서 현실 정치의 한계를 절감하였을 겁니다. 현실적인 면에서는 그것이 우리 전체의 한계라는 걸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신에 대한 실망스러움이 더 컸습니다. 현실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둔 자리에 서 있는 나는 관전평이나 하고 편하게 욕이나 하면서 몇 년을 보냈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는 분명히 이성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류의 존재의 이유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사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런 따위가 아닙니다. 그건 정치를 모르는 순진한 비주류들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주류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당신이 더 철저히 놀림거리가 되지 않고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당신을 죽이면 주류 정치인이 다 죽는다는 경험을 탄핵사건 때 한 적이 있어서 잠시 눈치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여론의 흐름을 천천히 다른 곳으로 돌리기 시작할 것이고 당신의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시골로 내려와 농사짓고 동네 뒷산 지키는 환경운동 하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여기서 당신의 생이 끝나고 만 것이 가슴 아픕니다. 이 나라 역사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주류가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역사에 그래도 덜 부끄러운 기록들이 있다면 그것은 비주류가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만들어낸 순간들이 있어서입니다. 당신이 떠난 뒤에도 당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여전히 남아 다른 바보들이 그걸 실현하고자 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바보 같은 당신, 당신이 부엉이 바위 근처 어디에서 밤이면 부엉이처럼 눈을 뜨고 어두운 세상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주류들이 모여 있는 국가원수 묘역으로 가지 말고 봉하마을 뒷산에 머무시기 바랍니다. 그게 당신에게 더 어울립니다. 작은 묘비 하나로 있는 게 더 보기 좋습니다. 더러운 땅은 더러운 이들에게 맡기고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도종환/시인*
[문정인 칼럼]한겨레신문
외교 대통령, 노무현을 기리며
중국 베이징에서 국제회의 참석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일정을 중단하고 바로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과 연을 맺은 이래 그와 가졌던 수많은 공·사석의 외교안보 현안 토론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더욱 그랬다.
2차 북핵 위기와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 결정을 둘러싸고 고뇌하던 지도자 노무현의 모습, 일부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분서주의 행보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을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시키고 반가워하던 그의 환한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10·4 정상선언을 성사시킨 후 감회에 젖던 노 전 대통령, 그는 분명히 성공한 외교 대통령이었다.
그는 외교안보의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타고난 전략가였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협력과 통합의 동북아라는 큰 그림 속에서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유럽 통합 모델을 면밀하게 비교검토하고 다자협력을 기본 축으로 하는 동북아 공동체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는 세력균형 결정론이라는 냉전적 사고를 뛰어넘어 한국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발상이었다.
북한과 주변 4강에 대한 정책도 이런 대전략 아래 세워졌다. 미국과 일본에서 이탈하여 중국에 편승하는 섣부른 정책으로 매도되었던 균형자론도 이 대전략의 큰 틀에서 만들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이 군사력과 같은 물리력에 의한 경성 균형자(hard balancer)가 될 수는 없지만 역내 국가 모두와 선린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자협력을 주도하는 연성 균형자(soft balancer) 구실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미래를 보고 여는 정책적 포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결코 반미친북을 표방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한-미 동맹을 단기적으로 우리의 생존을 담보해주는 필수적 전략 자산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이라크 파병, 용산기지 평택 이전,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 등 중요한 한-미 현안들을 과감히 해결했던 것이다. 미국이 노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한-미 동맹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영속적 평화를 가져오기는 힘들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동맹은 본질적으로 공동의 적과 위협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안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미 동맹의 기조하에 유럽과 같은 다자안보협력체제를 동북아에도 구축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임기 내내 악몽처럼 노 전 대통령을 괴롭혔던 2차 북핵 위기만 해도 그렇다. 그의 예지, 담력, 그리고 결단이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군사적 충돌이라는 재앙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북에 대해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 6자회담을 통한 협상타결 방안을 도출했고,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로 6자회담이 파국의 위기에 몰리자 정상회담의 의전 관행을 깨면서까지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압박해 사태의 반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2006년 10월 북의 핵실험 직후 대북 제재방안을 논의하러 방한했던 당시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미국 책임론으로 응수해 부시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유도하기도 했다. 승부사의 기질로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떠나간 후에 그의 외교적 업적이 더 커 보인다. 왜 그럴까. 지난 정부의 외교 구상을 전면 부정하고 큰 그림 없이 즉흥적 임기응변 외교로 일관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무모한 대결을 통해 우리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현 정부의 암울한 행보 때문이 아닐까.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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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설계한 사저가 아방궁이라니… | |||||||||||||||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며 정기용/건축가 5월 23일 토요일 하루 종일 찌푸린 하늘아래 가랑비가 흩뿌린다. 비극적 소식을 접하고 하루 종일 가슴이 애린다. 끊임없이 눈물이 고인다.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이 큰 슬픔과 놀라움 속에서 하루가 지난 오늘새벽까지도 부엉이바위는 내 눈앞에 나타나 나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하고, 지금 떠나서는 안 되는 분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경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오늘 나는 고백해야만 한다. 그동안 가슴속에 꾹꾹 참아왔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야만 하겠다. 지난 2년 반 동안 나는 노무현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를 설계하고, 봉하마을 계획들을 옆에서 거들어 오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대통령은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훌륭한 건축주이셨다. 집짓기를 위한 회합을 거듭할수록 계획안은 점점 나아졌고, 서로 간에는 드디어 신뢰와 공감이 생겨났고, 퇴임 후 사저로 입주한 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찾아뵙고 또다시 봉하마을 생활 속에서 피어난 꿈의 계획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두 가지를 마지막 가시는 길을 위해 밝혀야만 한다. 한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TV카메라에 비친 모습만 바라보는,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저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귀향한 한 농촌인으로서 농부 노무현이 꿈꾸던 소박한 세계를 알리는 것이다. 오늘의 이 비통함과 가슴 저리는 심경 속에서 우리가 갖춰야 되는 최소한의 예의는 고인에 대해서 끈질기게 널리 퍼뜨렸던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봉하마을의 사저는 내가 설계했기 때문에 건축가인 내가 제일 잘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봉화아방궁이라는 말로 날조해서 사저를 비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악의마저 엿보이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는 대통령에게 내가 나서서 기자회견을 해야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소용이 없으니 참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다 밝혀질 일이지만 내가 설계한 대통령의 사저는 재료로 말하자면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리고 아방궁이 아니라 불편한 집이다. 처음 만남에서 농촌으로 귀향하는 이유를 대통령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사도 짓고 마을에 자원봉사도 하고, 자연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도심아파트 같이 편하게 살아서는 안 되고, 옛날 우리조상들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어 살았듯이, 한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서 이동하는 방식의 채 나눔을 권유하였다. 한 공간에서 모든 것이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는 도시의 집과 달리 식사를 하거나 집무실로 이동할 때마다 봉화산을 바라보거나 공기 내음을 맡으면서 농촌에 살고 있음을 환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대통령은 흔쾌히 동의 하셨다. 흙집에다가, 도시 사람으로는 살기에 불편한 집. 그러나 품위가 있고 자연과 조화로운 집, 그런 집을 결과적으로 원하신 셈이다. 그리고 경호원들과 비서진들의 공간은 너무 떨어뜨리지 말고 한 식구처럼 생활하도록 주문하였다. 집이 다소 커져 보이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경호동을 안채와 붙여서 비서진들과 경호원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나는 중정형의 집으로 화답한 셈이다.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나라에서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확장한 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다. 건축가는 안다. 건축주가 누구이며 집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는지.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지붕 낮은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봉하마을 주민들의 농촌소득 증대사업을 유기농법으로 전환시키고, 봉화산과 화포천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치유하며,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생태교육의 장을 만들고자 하셨다. 재임시절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인 농촌의 문제를 스스로 몸을 던져 부닥치려는 대통령의 의지는 퇴임 후 일 년 내내 쉴 새 없이 지속되었다. 앞으로 마을뒷산 기슭에 ‘장군차’도 심을 예정이었고, 마을 마당 앞뜰에는 마을특산물매장도 꾸리고 노무현표 브랜드 쌀도 팔 계획도 세웠다. 특히 장터 지하 쪽에 작은 기념도서관 건립도 꿈꾸고 계셨다. 민주화운동시절 당신이 가까이했을 수밖에 없었던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 당시의 젊은이들의 양식이 되었던 모든 책들을 모아 작지만 전문적인 민주주의 전문도서관을 구상하고 계셨다. 농사도 짓고, 자연과 생태를 살리고, 나아가서는 작은 동물농장을 봉화산자락 부엉이 바위 밑에 만들어 청소년들과 함께 하려는 생각들이 바로 인간 노무현대통령이 꿈꾸던 소박한 꿈들이었다. 그리고 틈틈이 폭넓은 독서에 빠져 통치시절을 정리하며 집필 작업에 임하셨다. 독서와 토론은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즐기던 값진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대통령은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것은 내 탓이다. ‘산은 멀리 바라보고 가까운 산은 등져야한다’는 조상들의 말을 거역하고 집을 앉힌 내 탓이다. 봉화산 사자바위와 대통령이 그토록 사랑하던 부엉이 바위 가까이에 지붕 낮은 집을 설계한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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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피는 가을에 다시 오시겠다더니…” | |
노 전 대통령 방문으로 인연맺은 ‘황토와 들꽃세상’ 김요한 목사 |
» 전남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마을에 있는 생태휴양지 `황토와 들꽃세상‘(www.htflower.com) 운영자 김요한(66) 목사는 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작년 7월 전남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마을 생태 체험관인 ‘황토와 들꽃 세상‘을 찾아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2008년 7월 전남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마을 생태 체험관인 ‘황토와 들꽃 세상‘을 찾아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
너무 슬픕니다.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은 벌거벗고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잘사는 전직 대통령들도 많은데
아직도 할 일이 많은 분을 이렇게 추모하는 것이,
돌이켜보면 당신은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작은 땅에서 살면서도 틈만 나면 영남, 호남 편가르기에 열중하는 우리에겐
당신은 너무 큰 사람이었습니다.
아파트시세에 지지 여부를 결정하는 우리네 천박함에 비해 당신은 너무 무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모르고 사는 야생의 우리에게 당신은 너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셈이 밝아 자신에게 이익이 안 되는 일엔 눈길도 안주는 처세의 달인인 우리에게 당신은 너무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떨치지 못하셨을 서운함과 아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역사가 우리의 무지를 가르치고 당신의 아픔을 치유하리라 믿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이툰 부대 군인
저는 자이툰부대 출신자 입니다.
향수를 뿌리치고 멀고 먼 타지 이라크라는곳에서 7개월을보냈죠
해외 다녀오신분들은 누구나 아시겠지만 3개월지나면 향수병에 걸리게 됩니다.
전 그랬습니다. 해외에 놀러간게 아니라 내 한목숨걸고 자랑스러운 태극기
어깨에붙여 나라에서 보내준 파병이었으니까요 근데 4개월쯔음 파병생활을 하고 있을때였습니다.
정말 힘들었죠 부모님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리웠죠 근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저희 자이툰을 방뮨해주셨습니다.
많은 격려와 찬사를 쏟아주셨죠 그러던 와중 어떤 자이툰 장병한명이
단상으로 올라가 노무현 대통령님께 '아버지!'라고 외치며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래도 일개나라의 대통령입니다 군인신분으로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자리입니다.
경호원들도 어쩔줄 몰라했었죠..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께서는 손짓한번으로 재빠르게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막으시고
그 장병을 꽉 껴안아주시며 '그래 아들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군들이 울기시작합니다. 감동으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전 그때를 그순간을 잊을수가없네요.
노무현 전 대통령님 존경합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꼭 끌어안으며 '아버지'라 불렀던 이 글의 주인공.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번쩍 들어올린 자이툰 부대원이 중위가 되어 돌아와 영정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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