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개혁’마저 서민의 전설이 되다 | 탈권위주의와 탈지역주의, 그리고 서민 정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대 무기이자 최고 업적이다. 노 전 대통령의 노력으로 서민은 푸른 하늘을 잠깐 한 뼘쯤 구경’했다. | | | [시사인 90호]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 |
| | 6월 항쟁 뒤 구성된 13대 국회의 노동위원회에서 초선인 노무현 의원을 처음 만났다. 여당 4선 의원이던 나는 야당의 노동위 3총사라는 노무현·이해찬·이상수 의원을 점잖게 대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노 의원은 마치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을 연상케 하는 그런 반항아였다.
정부 노동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언성을 높여서 거듭 항의하던 끝에 책상 위에 쌓인 서류뭉치를 내던지고 의원 직을 사퇴하겠다며 퇴장하기도 했다. “그놈의 성깔머리…”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그래서 그의 가정·학교교육 등 훈육(upbringing)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다. 잠적 한 달쯤 후에 한국일보 기자가 추적해 속리산에서 노 의원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는데 거기에 나에 대해서는 좋게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 | | 1990년 노무현 의원(오른쪽)이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와 담배를 피우고 있다. | 대통령 후보 당시 강원룡 목사 평화포럼에서 후보 초청토론회가 있었다. 그때 내가 노 후보에 대한 주 질문자 역할을 맡게 되어 미국이 우리에게는 거의 절대적이니(어느 학자의 표현을 빌려, 우리는 ‘미국의 한계’ 안에 있으니) “반미면 어떻고…”와 같은 말은 삼가라고 충언했다.
대통령이 된 후 딱 한 번 여럿과 함께 만났는데 나는 작심하고 사회 기강이 너무 풀리면 안 되니 약간 조일 것, 북방정책과 관련해서는 병자호란 전에 광해군이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평가이니 그 광해군 외교를 참고하라고 조언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어느 평론가는 프랑스식 표현으로 ‘누벨바그’라고 했는데 정말 한국 정치에 새 물결이 밀려왔다. 반골·반항아·이단자·소수파·검은 오리새끼 등등 표현을 동원할 수 있는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우리 사회에서 그 두께가 엄청날 수밖에 없는 기득권층·보수층은 처음부터 백안시할 수밖에 없었다. 왕따다. 그리고 악감정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가운데 상승 확대되어 혐오가 증오가 되고 말기에는 분위기가 살벌했다.
거대 언론과의 싸움이 치명타 자기 순정만 믿고 덜 정제된 이론과 확신으로 전방위에 걸쳐 개혁전선을 벌인 게 화근이다. 단계적이고 전략적이어야 했다. “정치가 최고 이상을 열망할 때, 역사는 최대 실패를 기록해왔다”라고 영국 보수 원조 이론가 에드먼드 버크는 말했다. 그에 비하면 DJ(김대중)는 노련했다. 아마 <군주론>의 원리를 몸으로 터득한 듯하다. MH(노무현)는 정말 너무나도 단순했다.
| | | 1988년 노동관계법 공청회에 참석한 13대 국회 초선 의원 노무현(맨 오른쪽). |
탈권위주의, 그것은 옳았다. 그러나 좀 더 좋은 정치 접근을 위해 활용하지 못한 채 그가 가진 수단을 그냥 모두 버리기만 했다. 하기는 그러니까 지금도 그의 탈권위주의가 업적의 첫 순위로 꼽히는지 모른다. 탈지역주의. 정치 초입부터 YS(김영삼)에서 DJ로 계보를 바꾸어가며 그가 도전한 것이 지역주의이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이란 애칭도 얻게 된 것이지만 그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영남 출신 정치인이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DJ의 법통을 따랐으니 영·호남 모두에게서 확실한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그가 힘이 약했던 제1 요인일 것이다. 그래도 시시포스(시지프스)의 신화처럼 그의 탈지역주의 노력은 귀중하며 모든 정치인이 귀감 삼을 만한 일이다.
사태를 악화시킨 데는 그의 경솔한 언행도 문제였지만 거대 언론과의 싸움이 치명적이 아닌가 한다. 자유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대 언론을 어찌할 것인가. 거대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우나 고우나 서로가 인정하고 참으면서 나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논의가 덜 되었지만 중요한 사실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개혁·진보 세력이 대비책을 마련하면서 마주치는 어려움이 아니었나 싶다. 느낌은 분명히 있는데 정책 수단으로 뚜렷이 떠오르는 게 마땅치 않다는 고민이다. MH가 딜레마에 빠지고 또한 혼선을 빚었던 것은 비단 MH의 문제만이 아니라 개혁·진보 세력 거의 모두가 부닥친 딜레마이자 혼선이었다. 한마디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데도 절절매는 형편이다. 일자리가 계속 감소하고 노동 계층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공세적으로 크게 치고 나가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영국에서 머리가 좋은, 같은 변호사 출신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도 오죽했으면 보수당의 이른바 대처리즘을 거의 그대로 복사하다시피 소화하면서 ‘제3의 길’ 운운하고 시치미를 떼는 형편에 이르렀겠는가. MH도 오죽 몰렸으면 ‘좌파 신자유주의’ 운운하며 자가당착적 어법을 썼겠는가.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그런 말까지 하게 된 그 심정은 이해할 만하다. 그렇게 되자 진보 진영에서마저 MH를 버리고 맹비난하게 되었는데 진보 진영으로서는 차별화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겠지만, 심정적으로는 그때 어떻게든 도와주었어야 했다.
보수층이 가장 반발한 것은 한·미 관계와 남북 관계에서이다. 한·미 관계에서 “반미면 어떻고…”가 너무 못이 박혔기에 그렇지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등 한·미 유대는 굳건했다. 다만 그 진행 과정에서 논란이나 승강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 시일이 지나 비밀 자료가 공개되면 밝혀지겠지만, 지금 짐작해도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적 밀어붙이기가 더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부시의 안하무인식 억지는 전 세계적으로 비판을 받지 않았던가.
노무현은 한국의 체 게바라? 남북 관계는 좀 까다롭다. 얼마 전 백낙청 교수가 한겨레(신문)가 주는 통일문화상을 받았을 때 축사를 했다. 거기서 거듭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의 화전론과 삼학사의 주전론이 모두 의미 있는 것이며 문제를 대할 때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음을 말했다. 그러면서 햇볕정책으로 북한에 많은 지원을 했음에도 핵실험을 부른 데 대해 보수 측 인사들이 격분하는 것을 화전론자들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대할 때 강온 모두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서민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 홍길동과 임꺽정이 있다. 그들이 마치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떠받들고 아주 친근하게 느끼기도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MH는 한국 정치 개혁의 여러 명제를 제시하고 줄기차게 도전했는데 그 미완의 작업은 앞으로도 우리 정치의 숙제로 남는다. 그러나 서민으로서는 “아! 그런 정치도 있을 수 있구나”하고 모처럼 그들을 위한 정치가 있었음을 잊지 못할 것이다. 외국 어느 정치가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서민들은 잠깐 푸른 하늘의 한 뼘쯤을 구경했다 할 것이다. 큰 성과가 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민을 위해 애쓴 모습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체 게바라의 전설이 거의 전 사회적으로 퍼져 있다. 바보 노무현은 사상에서 체 게바라와는 다르다. 다만 그 반항정신과 행동이 그를 방불케 하는 데가 있다.
자살은 절대 예찬할 수 없고 또 찬미해서도 안 된다. “그놈의 성깔머리…” 하고 처음 만났을 무렵 새어나온 말이 다시 부지불식간에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나, 체 게바라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백범 김구나 죽산 조봉암도 불의의 죽음으로 전설이 되었다.
부엉이 바위에서의 낙하로 바보 노무현의 전설은 서민 사이에 오래도록 떠돌게 되었다. ‘강부자 정권’ 운운하는 분위기도 있다. 추모 열기에서 느껴진다. 보수층에서는 계속 이단시할 것이고…. 본래 서양의 로빈 후드나 라틴아메리카의 체 게바라나, 우리의 임꺽정 모두는 상류층에게서 대접을 받은 게 아니지 않는가.* |
[시사인photo] 3보1배 하듯 떠난 그를 추모하다 | | | | | 김은남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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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슬픔의 해일이 대한민국을 집어삼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5월23일부터 국민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진 5월29일까지 온 나라가 슬픔으로 휘청거렸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한반도 상황도 애도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만은 아니었다. 서울 덕수궁 앞에 차려진 시민 분향소에서 분향하기 위해 세 시간을 기다렸다는 누군가는 그 시간이 3보1배를 할 때와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애통함, 분노, 설움, 미안함, 증오 따위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일지만 종국에는 내 안의 나를 돌아보며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되는 3보1배마냥, 분향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내 안의 노무현’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명에 간 전직 대통령을 우상화하려는 말은 아니었다. 서너 시간이 넘게 분향을 기다리는 동안 추모객들은 거리에 시민들이 설치한 전광판에서 열정에 찬 어조로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고인의 동영상을 보며(사진), 덕수궁 돌담을 뒤덮은 동시대 사람들의 추모글을 보며 잊었던 또는 억눌렸던 우리 안의 소중한 가치를 떠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절통함 속에서 희망은 그렇게 새로이 피어나고 있었다. | | |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가 열린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쓴 시민들은 노제를 마친 운구차가 서울역까지 이동하는 동안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망자의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길 가는 중간중간 노란색 풍선과 종이 비행기가 하늘을 날았다. |
| | | 국민장 기간에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은 어떻게든 망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분향소로 향하는 길에 매달린 노란 추모 리본에도, 운구차를 가로막고 올리는 큰절에도 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노건호씨는 유골로 변한 아버지를 5월30일 새벽 경남 김해 봉하마을 사저 뒷산에 있는 정토원에 안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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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선 모두가 노무현이었다 |
운구차는 좀체 마을 어귀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제는 조문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마을 주민처럼 보이는, 길게는 일주일째 봉하마을에 눌러앉아 떠날 줄을 모르는, 하나같이 피로에 전 얼굴의 지지자들이 운구차를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5월29일 새벽 6시. 막 발인을 끝마치고 영결식을 위해 서울로 향하려던 때였다.
| | | 서거 다음 날인 24일 오후,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쏟아졌다. 한 시간 동안 퍼부운 비를 맞으며 많은 조문객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애국가를 대신했던 노래, 2004년 17대 총선 당선자들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에서 나왔다는 그 노래다. 일국의 대통령이 마지막 가는 길에 ‘공식적인’ 애국가 대신 거리의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띄우며, 지지자들은 “내 인생 단 하나의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박자도 음정도 어지간히 엉망이었다. 후렴구 가사가 들리기 전까지는 무슨 노래인지도 알기 힘들었다. 군데군데 흐느낌이 뒤섞여 의도치 않게 돌림노래가 돼버렸다. 노무현을 떠나보내려 6박7일을 함께한 봉하마을의 조문객은, 노래 못 부르는 것마저 그렇게 노무현을 빼닮았다.
“이 시대의 제사장들이 다시 예수를 죽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일주일간, 봉하마을은 그런 공간이었다.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2㎞ 남짓한 거리를 걸어서 들어가는 길은 낮이면 만장이 펄럭이고 밤이면 촛불이 끝도 없이 늘어서는 순례길이었다. 그 길 끝에 ‘순교자’가 있었다. 한 조문객은 방명록에 “이 시대의 제사장들이 다시 예수를 죽였다”라고 썼다. 초지일관한 지지자든 한때 그에게서 등을 돌렸던 이든 간에, 순례길을 걸어 봉하마을에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노무현이 됐다. 특권을 혐오했고, 권력과 언론과 싸우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좌우 모두와 척을 졌다. 필요하면 언제나 자발적 참여로 대응했지만, 신념이 지나쳐 때로 거칠기도 했고, 개인에 대한 애정과 민주주의의 염원을 뒤섞기도 했다. 장점과 단점을 가릴 것 없이, 과연 ‘노무현스러웠다’.
‘비주류 정체성’은 정치인 노무현과 그 지지자를 이어주는 가장 확고한 코드다. 빈소 맞은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빈소에서 노무현을 보내고 돌아선 조문객들은 촛불을 들고 스크린 앞에서 다시 그를 마음에 담는다. 그렇게 순례가 완성된다. 늦은 밤, 삼삼오오 모여든 100여 개 촛불을 상대로, 스크린 속 노 전 대통령이 특유의 사투리 억양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고,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거리의 투사가 했을 법한 얘기지만, 2002년 대통령 출마 연설의 한 대목이다. 마치 선거유세장처럼 “옳소!” 하는 외침과 박수소리 사이로, 여기저기서 새어나오는 흐느낌이 기묘하게 교차한다.
| | | 정치인들은 조문객의 거센 분노에 직면했다. 물벼락을 뒤집어쓴 김형오 국회의장. |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 유시민 전 장관도 영상 속에서 한마디 거든다. 역시 2002년 대선 당시다. “민주 세력의 적자라는 운동권 출신들이 왜 노무현을 무시할까? 솔직히 말하면, 노무현이 대학을 안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 운동권도 주류다.” 또다시 열광적인 박수. ‘주류’라고 부르는 순간, 적과 아군이 명확해진다.
대학 안 나오고, 영남 출신으로 ‘호남당’에 몸담고, 그 호남당 깃발 틀어쥔 채 부산에서 ‘맨땅에 헤딩’을 하고, 야당 내에서조차 변방이었던 노무현은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조문객에게 ‘나의 대통령’이 됐다. 창원에서 개인 사업을 하다가 “요즘은 그냥 논다”라는 이상건씨(51)는 물통에 옮겨 담은 소주를 기자에게 권했다. 여기 와서는 하루 세 병을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는다며 하소연이다. 그는 서거 당일부터 일주일째 봉하마을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져서 밤을 보냈다. “나도 경기고 나오고 서울대 나와서 우리 사회의 밀알이 되고 싶었고, 그게 안 돼서 큰일을 못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그런 거 없이도 해냈다. 지난 100년에 저런 분 없고 앞으로 100년 동안도 없을 거다. 그러니 이렇게 서민들, 없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 아닌가.” 거의 울먹거리며 말하던 이씨는 빈 물통에 다시 소주를 채우며 기자를 한참이나 놓아주지 않았다.
MB·검찰·언론은 ‘봉하 3적’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서거는 ‘비주류의 상징을 기득권 동맹이 살해한 사건’이다. 이명박 정부가 기획하고 검찰이 각본을 썼으며 언론이 집행을 했다. MB·검찰·언론은 ‘봉하 3적’이었다. “미안하다”라는 정서는 그래서 나온다. ‘내가 죽였다’는 수세적 회한이라기보다는, ‘저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는 공세적 자책에 더 가까운 ‘미안함’이다. 한명숙 공동장례위원장도 5월29일 영결식 조사에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며 원문에도 없던 표현을 덧붙였다.
| | | 조문객에게 막혀 난감한 표정의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위 가운데). | 서울에서 일하는 직장인 차영진씨(37)는 5월26일 저녁 7시 버스로 봉하마을까지 내려왔다가 2시간만 머물고 서울로 올라가는 일명 ‘12시간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직장인에게는 더없이 ‘빡센’ 코스인데도 지원자가 몰려 주최 측이 버스를 급히 늘릴 정도였단다. 차씨는 “산소가 있는 곳에서는 산소의 고마움을 몰랐다. 노무현을 지키지 못한 우리 탓이다. 버스 안에서는 ‘누가 죽인 건지는 다 아는 거 아니냐’는 말이 많이 나왔다”라고 말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지금은 “잊지 않겠다”라며 칼을 가는 30~40대 화이트칼라 앞에, 노 전 대통령의 유서까지 인용하며 화해를 외치는 보수 언론의 프레임은 먹혀들 여지가 많지 않아 보였다.
기득권 세력의 협공에 ‘내 대통령’을 잃었다는 슬픔은 가장 격앙된 첫 이틀간의 절규로 터져나왔다. 이틀간 곳곳에서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서거 당일인 5월23일, 한 조문객은 방송 카메라에 대고 거칠게 항의하다가, 이를 만류하는 배우 문성근씨를 붙잡고 “오늘 하루만 카메라를 치울 수 있는 거 아니냐.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한테 이게 무슨 무례냐”라며 통곡을 했다.
언론은 특히 분노의 표적이었다. 배우 명계남씨는 “조선·동아 기자들 내 눈에 띄지 마라” 하고 절규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는 장내 방송을 통해 조·중·동 기자의 프레스카드 번호를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은 조·중·동만이 아니라 언론 자체였다. 조문객들은 임시로 마련된 야외 기자실을 둘러싸고 “자기들끼리는 누가 조·중·동 기자인지 알면서 감싸주는 거다. 다 똑같은 것들이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겨레·경향이 뭘 잘했는데? 어차피 검찰 얘기나 받아써서 ‘노짱’ 죽인 건 똑같다”라는 말이 곳곳에서 나왔고, 한 온라인 진보 매체 기자는 조문객이 생수통을 던져 물벼락을 맞았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방송사와 조문객의 승강이는 너무 잦아서 나중에는 취재진의 관심조차 받지 못할 지경이었다. 임기 막판, 기자실 폐쇄 문제를 두고 모든 언론과 전쟁을 벌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을, ‘봉하의 노무현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 | | 분노한 조문객들의 타깃은 조·중·동만이 아니었다. 봉하마을에서 쫓겨난 후, 빈소 대신 황소 곁에 중계석을 편 KBS. 논 너머 멀리 봉하마을이 보인다. |
정치인은 여야와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불신의 대상이었다. 좌우 양쪽에서 공격을 받던 ‘비주류 대통령’ 노무현에게, 조문객들은 한껏 감정이입을 했다. 제도화된 정당보다 ‘노무현’이라는 압도적인 캐릭터에 이끌려 정치의 장으로 들어선 노무현 지지자들은 그 정치적 동원의 통로가 어느 날 사라진 이후, 분출구를 찾아 헤매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갈 전망이다. 모든 정당, 모든 정파가 욕을 먹거나 쫓겨났던 봉하마을의 지난 일주일은 그 단초를 보여준다.
한나라당 인사는 물론이고 현재는 당적이 없는 김형오 국회의장까지도 조문을 거부당했다. 대선후보 시절 ‘노무현 색깔 지우기’에 앞장섰던 정동영 의원은 민주당 출신이면서도 입구에서 막혔다. 첫날 봉하마을을 찾은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조문단은 저지당하지는 않았지만 쓰레기 세례와 함께 “배신자!”라는 외침을 들었다. 진보 정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찬 대표 등 진보신당 조문단은 큰길을 통과하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라는 조문객의 외침에 밀려 인파 뒤편으로 돌아서 들어가야 했다. 딱 조문까지만 간신히 허락해준 셈이다. 이들의 뒤통수에 “너거도 노무현이 때가 좋았던 거 인제 알겠제?”라는 야유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은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이 보낸 조화는 마을을 들어서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서 불탔고, ‘살인자 이명박’이라고 쓰인 손팻말과 메모가 봉하마을을 빙 둘러치다시피 했다. 고인의 유언 중에서도 “원망하지 마라”는 말 앞에서만은, “죄송합니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조문객이 대다수였다.
“내가 말하는 게 노무현 정신 아닙니까?”
빈소 주위에서는 또 다른 소란이 자주 벌어졌다. 명사들이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새치기’를 할 때다. ‘봉하의 노무현들’은 이런 사소한 특권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서거 이틀째인 5월24일 오후, 한 조문객이 줄을 건너뛰고 조문하려는 명사를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왜 새치기를 합니까? 이 많은 사람이 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장례 진행요원이 저지하자 그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 “왜 말리는데요? 내가 말하는 게 노무현 정신 아닙니까?” 아마도 그는,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반드시 청산돼야 합니다”라는 노 전 대통령의 2003년 대통령 취임사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3시간을 기다려 300명이 한꺼번에 30초만 조문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노사모 사무국장은 단 15분간의 대화 와중에도 밀려드는 지원 물품을 처리하느라 두 번이나 자리를 비우며, 운구차가 빠져나간 직후 눈물도 채 닦지 못한 조문객이 마을광장에 버려진 노란 종이비행기를 치우는 곳. 대통령 개인의 매력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확신과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대책 없을 정도의 신뢰가 교차하는 곳. “우리가 정의”라는 강력한 자기 확신이 유발하는 명과 암을 동시에 보여주는 곳. 지난 한주간의 봉하마을은 아주 많은 사람이 운영하는 아주 작은 참여정부였다. 그곳에는 노무현 100만명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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