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되돌아 본 노무현 [시사인]

by 싯딤 2009. 7. 27.

시사인 [90호]

[사진으로 보는 노무현의 삶]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대장정


지독한 가난 딛고 입지전을 쓴 희망의 시기’,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한 ‘열정의 시기’, 결단을 내린 용기의 시기’, 농촌으로 돌아온 ‘새 도전의 시기’를 사진으로 살폈다.
지독한 가난 딛고 입지전을 쓰다

Ⅰ. 희망의 시기(1946~1980년)
[90호] 2009년 06월 01일 (월) 11:57:42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국민장장의위원회

판사직을 7개월 만에 그만둔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내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말이 달리는 모양처럼 생긴 바위산이 있다. 옛날에 봉화를 올렸다 하여, 이름이 봉화산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 봉화산 아래 봉하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순조롭게 넘어간 기억이 없었다. “어릴 때는 동그랗고 뽀얀 얼굴이어서 집안 사랑을 독차지했다”라고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주장하곤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마에 깊이 아로새겨진 한일자 주름, 푹 파인 볼이 신산했을 그의 성장기를 추측하게 했다. 훗날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처음 하게 된 대정부 질문에서 그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사는 세상이다”라고 말했다. 가난을 뼛속 깊이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나이 서른에 이르러 입지전을 새로 썼다. 상고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딛고 1975년 늦깎이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아내 권양숙씨는 노 전 대통령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7개월간의 짧은 판사 생활 끝에 변호사로 전업한 그는 제법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전문 분야(조세)가 탄탄하고 승률도 제법 높았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그는 ‘개천에서 용 난’ 세속적 성공 모델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장장의위원회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아들 건호군, 딸 정연양과 가족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국민장장의위원회

노 전 대통령과 아들 건호군이 선산에 앉아 장난감총으로 장난을 치는 모습.

ⓒ국민장장의위원회

변호사 생활 초기만 해도 노 전 대통령은 취미 생활을 즐기고 개인 안위를 추구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

ⓒ국민장장의위원회

부산상고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노무현 전대통령.

Ⅱ.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아는-열정의 시기(1981~2002년)
[90호] 2009년 06월 01일 (월) 11:58:18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동아일보

1988년 이른바 5공 청문회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은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그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대표적인 용공 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였다. 이전까지 그는 시국 문제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해 온몸이 멍으로 뒤덮인 대학생들을 본 순간, 그는 “분노로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훗날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국민에게 ‘원칙 없는 정치에 왜 분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정치인이 거짓말했을 때 ‘아니, 정치 지도자가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해야 하고, 정치인이 원칙을 저버렸을 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화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정치인이 말 바꿨다고 화내는 사람이 있습니까?”

돌이켜보면 그가 ‘청문회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노사모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아는’, 정치인으로서는 드문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양민을 학살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5공 세력의 뻔뻔함에 분노했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3당 합당으로 정치적 신의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배반의 정치에 분노했으며, 그럼에도 “무조건 DJ는 안 되니 YS를 찍어야 한다”라는 식의 눈먼 지역감정에 분노했다. 비겁한 다수의 침묵에 “이의 있습니다”를 외칠 줄 아는 그의 열정은 사람들을 서서히 감염시켰고, 급기야 선거 4수생이 대통령이 되는 기적을 창출했다.


ⓒ민주당 제공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직후 모습.

ⓒ사진가

‘부림 사건’ 변론 이후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던 노 전 대통령(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

ⓒ한겨레신문

3당 합당을 거부한 뒤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내리 네 번 낙선했다. 왼쪽은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나선 모습.

ⓒ민주당제공

퇴진을 외쳤던 정권과 손을 잡는 정치적 야합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Ⅲ. 용기의 시기(2003~2007년)- 인간 노무현의 고뇌 대통령 노무현의 결단
[90호] 2009년 06월 01일 (월) 11:58:48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2003년 2월26일 취임식에서 노 전 대통령은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사회를 이제 끝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보통사람의 시대가 도래한 것에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통령 노무현은 외로웠다. 좌우로부터 협공을 당했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진 사람은 때로는 여론이 마다하는 일, 시끄러운 일도 감당을 해야” 했다(<KTV 특집 인터뷰-대통령, 참여정부를 말하다>, 2007년 11월). 그것이 대통령의 숙명이었다.

이라크 파병은 그의 지지자들을 실망시킨 대표적인 정책 결정이었다. 지지자 중 절반이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임기 말까지도 이 결정에 후회가 없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을 공개 반대한 청와대 참모에게 은밀하게 ‘고맙다’고 말한 그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대통령 자리가 참 어렵고 무겁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다고도 했다.

한·미 FTA를 추진한 것 또한 그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심각하게 무너뜨렸다. 대연정 제안은 치명적이었다. 남아 있던 지지자의 절반이 또다시 등을 돌렸다. 그는 무참해했다. 나라의 정치·경제 틀을 격상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고자 했던 자신의 ‘진심’이 통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소통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도 했다. 그는 용기 있는 지도자였다.


노사모가 보여준 헌신적 지지는 그나마 노 전 대통령을 지탱한 정신적 힘이었다.

ⓒ국민장장의위원회

노사모를 만난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는 모습.

ⓒ국민장장의위원회

격무와 보수·진보 협공에 시달리면서도 소탈하고 유머 넘치는 노 전 대통령의 성품은 여전했다. 위는 뉴질랜드 공군 항공으로 오클랜드에 가던 중 기압 탓에 막힌 귀를 뚫는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

ⓒ국민장장의위원회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끊임없이 외로운 결단을 요구했다. 왼쪽은 2007년 나이지리아에서 한국인 3명이 피랍됐다는 전화를 받은 직후 모습.

ⓒ국민장장의위원회

2004년 자이툰 부대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훔치는 노 대통령.

Ⅲ. 용기의 시기(2003~2007년)
[90호] 2009년 06월 01일 (월) 11:58:48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2003년 2월26일 취임식에서 노 전 대통령은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사회를 이제 끝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보통사람의 시대가 도래한 것에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통령 노무현은 외로웠다. 좌우로부터 협공을 당했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진 사람은 때로는 여론이 마다하는 일, 시끄러운 일도 감당을 해야” 했다(<KTV 특집 인터뷰-대통령, 참여정부를 말하다>, 2007년 11월). 그것이 대통령의 숙명이었다.

이라크 파병은 그의 지지자들을 실망시킨 대표적인 정책 결정이었다. 지지자 중 절반이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임기 말까지도 이 결정에 후회가 없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을 공개 반대한 청와대 참모에게 은밀하게 ‘고맙다’고 말한 그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대통령 자리가 참 어렵고 무겁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다고도 했다.

한·미 FTA를 추진한 것 또한 그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심각하게 무너뜨렸다. 대연정 제안은 치명적이었다. 남아 있던 지지자의 절반이 또다시 등을 돌렸다. 그는 무참해했다. 나라의 정치·경제 틀을 격상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고자 했던 자신의 ‘진심’이 통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소통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도 했다. 그는 용기 있는 지도자였다.
노사모가 보여준 헌신적 지지는 그나마 노 전 대통령을 지탱한 정신적 힘이었다.
ⓒ국민장장의위원회
노사모를 만난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는 모습.
ⓒ국민장장의위원회
격무와 보수·진보 협공에 시달리면서도 소탈하고 유머 넘치는 노 전 대통령의 성품은 여전했다. 위는 뉴질랜드 공군 항공으로 오클랜드에 가던 중 기압 탓에 막힌 귀를 뚫는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
ⓒ국민장장의위원회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끊임없이 외로운 결단을 요구했다. 왼쪽은 2007년 나이지리아에서 한국인 3명이 피랍됐다는 전화를 받은 직후 모습.
ⓒ국민장장의위원회
ⓒ국민장장의위원회
농촌으로 돌아온 최초의 서민 대통령
Ⅳ. 새로운 도전의 시기(2008~2009년 5월)
[90호] 2009년 06월 01일 (월) 11:59:29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국민장장의위원회
퇴임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노 전 대통령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람객을 맞느라 바빴다. 오른쪽은 관람객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손녀 서은양.
‘시민과 함께 걷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던 그는 퇴임 후 약속대로 서민의 곁으로 돌아왔다. 귀향해서 농촌에 정착한 최초의 전직 대통령이 됐다. 농촌이 사람 돌아오는 곳이 돼야 한다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일을 벌이는 그를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통령님, 나와주세요”라고 외치면 사저 밖으로 나와 기념사진도 함께 찍어주고 ‘하트남’ ‘쩍벌남’처럼 민망한 동작도 스스럼없이 취해주는 전직 대통령을 사람들은 오래된 벗인 양 편안해했다.

그러나 퇴임 이후 오히려 되살아난 대중적 인기가 독이 됐다. 그뿐인가. 그는 좀처럼 도전을 멈추려 들지 않았다. 진보적 시민민주주의, 시민주권론 같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가 하면 인터넷 토론 사이트를 만들어 국민과 직접 소통을 꾀했다. 살아 있는 권력의 역린(임금의 노여움)을 건드린 셈이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어쩌면 “정치라는 게 기술이 아니다. 경제 하나로 다 되는 게 아니다. 역사적 과제에 대한 인식·자각을 갖고 역사적 과제를 맞닥뜨려 풀기 위해 도전해나가는 것이 정치다”라는 그와 현재의 권력은 애초부터 출발점이 달랐는지도 모른다. 퇴임을 앞둔 2007년 11월 노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대통령의 권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습니다.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그 사회에 정치 세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가치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흐름을 만들어야 합니다.”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의 실현을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겨주고 떠났다.

ⓒ국민장장의위원회
조카손자 돌잔치에서 형님 건평씨와 함께 아이를 안고 있는 노 전 대통령.
관람객들이 기념 촬영을 원하면 노 전 대통령은 ‘쩍벌남’ 포즈라도 기꺼이 취해주곤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오리를 이용한 친환경 농법으로 벼를 직접 수확하기도 했다.
ⓒ국민장장의위원회

인근 농가를 방문한 노 전 대통령이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