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동아일보 1988년 이른바 5공 청문회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은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
그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대표적인 용공 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였다. 이전까지 그는 시국 문제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해 온몸이 멍으로 뒤덮인 대학생들을 본 순간, 그는 “분노로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훗날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국민에게 ‘원칙 없는 정치에 왜 분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정치인이 거짓말했을 때 ‘아니, 정치 지도자가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해야 하고, 정치인이 원칙을 저버렸을 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화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정치인이 말 바꿨다고 화내는 사람이 있습니까?”
돌이켜보면 그가 ‘청문회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노사모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아는’, 정치인으로서는 드문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양민을 학살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5공 세력의 뻔뻔함에 분노했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3당 합당으로 정치적 신의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배반의 정치에 분노했으며, 그럼에도 “무조건 DJ는 안 되니 YS를 찍어야 한다”라는 식의 눈먼 지역감정에 분노했다. 비겁한 다수의 침묵에 “이의 있습니다”를 외칠 줄 아는 그의 열정은 사람들을 서서히 감염시켰고, 급기야 선거 4수생이 대통령이 되는 기적을 창출했다.
| | | ⓒ민주당 제공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직후 모습. |
| | | ⓒ사진가 ‘부림 사건’ 변론 이후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던 노 전 대통령(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 |
| | | ⓒ한겨레신문 3당 합당을 거부한 뒤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내리 네 번 낙선했다. 왼쪽은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나선 모습. |
| | | ⓒ민주당제공 퇴진을 외쳤던 정권과 손을 잡는 정치적 야합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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