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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인간 노무현/이정우 외

by 싯딤 2009. 7. 27.

가까이서 본 인간 노무현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대통령 정책실장)

청와대에서 2년6개월간 매일 본 노 대통령은 대인이었다. 소탈하고 꾸밈없으며 인간적이고 유머가 넘쳤다. 불의한 강자에게는 강했고 약자에게는 따뜻했다. 실수에는 관대했고 거짓말에는 불호령을 내렸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참여정부에서 2년6개월간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씨(오른쪽)는 “노 대통령은 항상 정책으로 국민에게 내실 있는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라고 말한다.

지난 1주일은 ‘국민 눈물’ 주간이었다. 울어도 울어도 자꾸 눈물이 났다. 지금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믿을 수가 없다. 더구나 그분은 워낙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이라 더욱 실감이 안 난다. 평생을 양심적으로 살아온 분으로서 마지막 한 달에 겪었을 심적 고통, 그 억울함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유서에 남긴 대로 원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분은 주로 말실수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 진정한 모습을 알고 나면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적 매력으로 가득 찬 분인데, 한두 마디 격한 표현이 그분의 전체인 양 잘못 알려졌다. 인간 노무현의 원칙주의, 불의를 보고는 못 참는 성격,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등은 이미 많이 알려졌기에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분의 인간적 면모를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2002년 8월 대선 때였다. 지지도가 10% 남짓으로 떨어졌을 때다. 선거 캠프에서 일하던 어느 교수의 권유로 정책회의에 참석해서 노무현 후보와 첫 대면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두어 가지 정책 건의를 했고, 정책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나 했다. 말씀을 줄이고 과한 표현을 삼가시라고 건의한 것이다. 초면에 큰 실례였다. 노 후보를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해버린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분 나빠서 다시는 안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얼마 뒤 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옹졸하지 않고 대범한 성격이다. 한마디로 큰 그릇이다.

노무현 후보를 만난 건 정책회의 세 번이 전부였다. 그런데 하고 많은 영웅호걸을 제치고 왜 초면에 그런 무례한 이야기를 한 나를 인수위에 불렀고, 왜 정책실장이라는 중책을 맡기셨는지 늘 궁금했다. 청와대에서 2년6개월 동안 매일 뵈면서도 한 번도 그걸 여쭈어보지 못했다. 바쁜 대통령에게 한가한 개인적 질문을 해서야 되겠는가. 언젠가 노 대통령이 한가해지면 한번 여쭈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의문은 영원한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초면에 ‘무례’ 범한 사람 중용
노 대통령의 통 큰 모습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청와대 직원들의 근무시간도 그렇다. 전통적으로 수석회의는 아침 8시에 시작했고, 그 회의를 준비하느라 직원들이 7시까지 출근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찍 회의를 할 필요가 있는지 논의한 끝에 노 대통령은 수석회의를 9시에 열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직원들의 출근시간이 한 시간 늦추어졌다. 과로에 시달리는 직원들에게 한 시간의 단잠은 능률과 사기를 높이는 묘수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쉬운 게 아니다.

그 전에 청와대에서 일한 어떤 분의 이야기로는 과거 대통령들은 수시로 참모를 주말에 불러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정말 긴급한 일이 아니면 주말에 참모들을 부르지 않았다. 녹초가 된 몸에 주말 휴식은 참으로 가뭄에 단비였고, 그것 없이는 도저히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격상 노 대통령은 별로 일도 안 하면서 괜히 호들갑 떨고 떠벌리는 걸 아주 싫어했다. 국민에게 겉으로 보여주기보다는 항상 정책으로 내실 있는 도움을 주기 원했다.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정치인이 흔히 그렇듯 전국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악수하고 행사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정책을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토론 공화국’이라 비아냥거렸고, 국민은 살기 어려운데 토론만 한다고 섭섭해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대통령이 일 많이 하는 척하며 전국을 다니는 것보다는 정책에 내실을 기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청와대를 나온 뒤 한·미 FTA 문제가 불거졌다. 나는 많은 고민 끝에 대통령에 대한 충성보다는 나라에 대한 충성이 더 무겁다고 판단해서 한·미 FTA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 함께 일하던 정태인 비서관은 한 술 더 떠서 전국을 돌며 반대 강연을 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모시던 사람으로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반란이라면 반란이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호기를 만난 듯 ‘배신’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물론 대통령은 많이 섭섭하고 괘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대통령이 사석에서 “그래도 정태인·이정우가 애국자야”라고 말씀했다는 것을 간접으로 전해 들었다. 그런 말도 쉬운 일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소탈하고 꾸밈없는 성격이었다. 인간적이고 유머가 많았다. 긴장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수시로 농담을 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자연스레 탈권위주의를 실천한 분이었다. 불의의 강자에게는 참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약자에게는 늘 따뜻했다. 운전기사나 식당 일하는 사람에게도 하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대통령 앞에서 발언을 하게 되면 누구나 긴장해서 틀릴 수도 있는데, 노 대통령은 실수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했고, 오히려 농담으로 감싸주기까지 했다. 그 대신 적당히 덮고 지나가려 하거나 거짓말로 모면하려 하면 가차 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뒤끝이 없는 시원한 성격이라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모시고 일하기 편한 대통령이었다.

어떤 사람은 잠시 살지만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잠시 죽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다. 노 대통령의 일생은 항상 후자의 길이었다. 마지막 가신 길 역시 그러했다. 이제 노 대통령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 정신은 국민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졌다. 전국적인 추모의 물결, 어두운 봉하 시골길을 한밤중까지 인산인해로 만드는 사람의 물결이 그 증좌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긴 행렬에 동참해서 국화꽃 한 송이 놓는 어린아이의 눈망울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한다. 하오니 임은 이제 모든 분노, 모든 시름 놓고, 불의와 번뇌 없는 저세상에서 편히 쉬소서. ***

“대통령은 평생 거짓말을 몰랐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키려고 싸웠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시길 빈다”라고 대통령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장례준비팀 제공
5월23일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앞줄 오른쪽)과 참여 정부 인사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을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봉하마을로 운구하고 있다.
‘노무현의 남자’ ‘좌희정’으로 불리는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을 만났다. 그는 2002년 대선 직후 감옥에 가면서 노 전 대통령을 가장 많이 울린 사람이기도 했다. 봉하마을 빈소를 지키던 그에게 인간 노무현에 대해 물었다.

대통령이 떠났다. 심경은 어떤가?
슬퍼야 될 것 같은데 슬픔에 앞서서 분노가 인다. 슬픔과 분노를 국민도 느낄 것이다.

대통령이 희정씨라고 불렀나?
‘희정씨’ 이렇게 부르시다가 술 한잔 하셔서 기분 좋으시면 ‘희정이’ 이랬다.

노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왔을 것 같은데 첫인상이 어땠나?
그냥 시골 사람 같았다. 아주 촌스러웠다. 정말 촌스러웠다. 정말 시골 동네 가면 볼 수 있는. 정신적으로는 늘 스승 같고 아버님 같았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표현하기 참 어렵다. 시골 아저씨였다. 딱 느낌이. 여느 정치인에게 볼 수 없었던 솔직한 인간다움을 보았다.

시골 아저씨와 인생에서 한 배를 타겠다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
그분이 가지고 있는 정치 노선과 개혁 이런 것들도 참 좋았다. 그것은 논리적 틀이었다. 1988년 12월 감옥에서 나와 통일민주당 의원의 아르바이트 비서관을 했다. 잘나가는 의원이었다. 그 방에서 근무를 하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대학교·고등학교 동기들이 와서 밥 사고 용돈도 주었다. 그런데 그분이 1990년 3당 야합을 해버렸다. 그때 노 대통령은 안 따라간 국회의원, 나는 안 따라간 당직자로 ‘꼬마 민주당’을 만들었다. 1994년 노무현 대통령이랑 연구소를 하는데 1년이 다 가도록 밥 한 끼 사주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아! 한국 사회가 이런 거구나. 그것이 나를 굉장히 놀라게 했다. 전태일 형제를 잃으면서 한국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있는 줄 알았는데, 힘없는 사람 편에 서면 후원자도 밥 사는 사람도 없었다. 거기에 서 있는 노무현 대통령 옆에 서 있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일했다.

어렵고 힘든 길이었다.
대통령 모시면서 명함을 참 많이 갖게 되었다. 지방자치연구소 사무국장, 선거 컨설팅 회사 사장, 선거 홍보기획사 사장…. 보험사 지점 명함도 있었다.

노 대통령이 선거에 계속 떨어지니까 그런 명함을 갖게 된 것인가?
당선되고도 계속 팠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편들고 없는 사람 편드는, 그것도 적당히 편드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없는 사람 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후원금 안 들어온다. 후원자도 안 생긴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팠다.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명함은 생수회사 ‘장수천’ 사장이었다.

돈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당의 부총재나 리더라면 지구당에 돈을 내려 보내줘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해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구당 위원들이 “변호사님이 보증 좀 서주십시오”라고 하면 덜컥덜컥 서주셨다. 돈을 떼이다 못해 발목까지 잡혀버린 게 장수천이다. 노 대통령이 1996년 총선에서 떨어졌는데 달랑 남아 있는 아파트 한 채에 압류가 들어왔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6년 만에 국회의원이 되셨는데 대통령의 고민을 해결해드리는 것이 장수천을 맡는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나서서 그 일을 해보겠다 해서 생수 사업에 뛰어들었다. 기업인 모임에 가면 “나도 기업 좀 했어요” 이렇게 얘기한다.

궁핍한 생활, 가난한 정치였다. 돈 없이 정치하는 게 어떤 것인가?
사모님(권양숙 여사)이 늘 그런 것 때문에 어려워하셨다. 대통령이 대전에서 판사를 끝내고 1978년인가, 변호사 개업을 하셨다. 2~3년은 부산에서 굉장히 잘나가는 조세 전문 변호사였는데 갑자기 이호철
2008년 7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한 안희정 최고위원(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다.
전 민정수석 등을 만나서 데모하고 다니면서 사모님한테는 그야말로 ‘고생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있던 집 한 채마저 생수 사업한다고 보증을 서서 다 떼먹혔으니 사모님 입장에서는 굉장히 힘드셨을 것이다.

노 대통령과 정치를 하면서 언제 가장 기뻤나?
2002년 대선 후보 경선할 때 광주에서 노 후보가 이겼을 때.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와, 대통령 선거에서 이겨서 대통령 취임식에 갔을 때가 가장 기뻤던 날이다.

대선 승리를 함께 지켜보았다.
여의도에 있는 한 호텔방이었다. 그때 대통령은 “나는 잘란다. 너희가 봐라” 하고는 방에 들어가서 주무셨다. 우리만 응접실에 남아서 개표 방송을 봤다. 당선 직후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당선되자마자 대선자금 문제로 감옥에 갔다.
2003년 4월과 6월 두 번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그런데 2003년 12월에 공개 소환당했을 때에는 구속을 면하기 어렵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소환 전날에 전화를 드렸다. 걱정하실 것 같아서. “제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참 아무 말씀도 못하고 “알았네. 알았네”라는 소리만 하셨다….

감옥에 다녀와 만났을 때 대통령께서 뭐라 하던가? 많이 울었다고 들었다.
아니다. 제 앞에서는 잘 안 울었다. 경상도 사람이다. 자기 감정을 얘기 잘 못하신다. 국무회의 때나 청와대 보좌진 회의 때는 제 얘기를 하면서 “희정씨 문제는 내 문제인데” 이러면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나가서 기자회견 하겠다는 것을 청와대 보좌진이 말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참 솔직한 사람이었다.
2002년 대선 때 대선 후보 토론을 하는데 이회창 후보가 먼저 하고 그 다음 날이 노무현 후보 차례였다. 옥탑방을 물어봤는데 이회창 후보가 “옥탑방이 뭐죠”라고 되묻는 바람에 귀족 후보로 엄청나게 공격당했다. 다음 날 노무현 후보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때 노무현 후보가 자기도 모른다고 대답을 했다. 내가 놀라서 “아니 서민 후보라며 그걸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내가 어제 몰랐다는 사실을 건호가 알고 있어서. 그런데 다음 날 내가 아는 척을 하면 그거 거짓말 아니냐. 그래서 나도 모른다고 대답했다”라고 하시더라. 그런 분이다.

대통령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최측근조차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이야기했다.

유시민 전 장관이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한 것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동일한 구조에서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정부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여론이 안 좋다. 차기 정권을 창출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실패한 정부가 되는 건 아니다.

말을 좀 아끼셨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그 얘기는 더 솔직해지지 말라는 충고와 똑같다. 남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진실 앞에 그걸 좀 적당히 가장하고 예의와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좀 더 적절하게 거짓말하면서 살 기회를 사람들은 원했을지도 모른다. 역대 대통령 어떤 분들의 어록과 녹화 테이프와 비교해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무슨 품격 없는 말을 하고 가벼운 분이신지. 그분을 공격했던 우리 사회의 핵심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편한 진실 앞에 그분이 솔직했기 때문에 그렇다.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고 많이 놀랐을 것 같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내려오면서 슬픔을 떠나 정말로 화가 났다. 사람 하나 이렇게 잡는구나. 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누가? 사람들은 다 검찰이라고 이야기한다. 검찰이 잘못한 거 맞다. 그렇지만 검찰은 행동대원에 불과하다. 핵심에는 청와대와 언론 권력이 있다.

영정을 들고 운구했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서울에서 내려와 부산대 병원에 가서 운구했다. 저 마을회관에 운구를 마쳤을 때까지도 아무런 느낌을 못 가졌다. 수많은 분들이 와서 통곡하고 슬퍼하고. 제 손을 잡았다. 평범한 아주머니, 아저씨가 대성통곡할 때 그때 참 고통스러웠다. 그분의 죽음이 실감났다.

대통령이 말년에 많이 외로웠던 거 같다.
대통령 자신으로 인해 자기의 일가, 관계자들이 모두 다치지 않았나. 강금원 회장부터 이광재 의원, 이강철 수석, 정상문 비서관…. 이분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괴롭힘을 당했다.

마지막 만났을 때 대통령은 어떤 얘기를 했나?

지난 4월30일 검찰에 소환되던 날이었다. “면목이 없네. 자네들한테.” 그래서 제가 그랬다. “무슨 면목이 없습니까. 대통령께서 대통령 권력을 가지고 무슨 부정을 저질렀습니까? 비리를 저질렀습니까. 대통령께서는 권력을, 권력형 부정비리를 저지른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자기 부모로부터 수백억, 수십억씩 물려받거나 아니면 자기가 열심히 돈 벌어서 그 재산 가지고 정치를 못한 죄밖에 없는 겁니다.” 오랜 후원자한테 자기 가사일을 도움받은 것이다. 법률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국민 앞에서 면목이 없다고 사과했는데 그 사과한 대통령의 말을 또 뒤집기 위해서 공격을 하고, 그것이 거듭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생살을 오려내는 압박이 있었다. 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공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무현과 함께해온 가치, 시대정신 자체가 역사에 수장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가치를 인격적으로 모욕하면서 역사의 바다에 수장하려는 그 순간에 대통령은 바위에서 떨어져서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주진우 기자

대권 도전 결심 처음 털어놓던 날

정희상 기자가 만난 노무현 전 대통령

2002년 3월16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후보와 환호하는 노사모 회원들.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했는데 내가 선물 하나 드리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갑니다.” 2000년 5월7일 저녁, 민주당사 사무실 구석방에서 기자와 마주한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 민주당 지도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3주일여 전 치른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다가 끝내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한 직후였다. 기자가 먼 길 다녀왔다는 말은 그날 오전 대전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한 호프집에서 열린 ‘바보 노무현 팬클럽 모임’을 탐방하고 왔다는 뜻이다. 노사모가 결성되기 전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인터넷 노무현 팬클럽 회원 대표 40여 명이 연락해 이날 처음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다. 정식 노사모 결성을 논의하는 자리에 기자가 참석한 뒤 저녁에 서울에서 낙선자 신분의 노무현을 만난 것이다.

비록 낙선했지만 행복하겠다고 노사모 결성 덕담을 건네자 “한편으로는 정치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자유조차 속박당하는 것처럼 짐이 무거움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선거 패배 직후라서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기삿거리 선물을 주겠다며 ‘대권 도전’ 의사를 처음으로 밝히는 순간만은 눈에 생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언론계 최초로 노무현의 대권 도전 선언이 <시사저널> 제551호에 커버스토리로 큼지막하게 실렸다. 16대 대선을 2년 반이나 앞둔 시점이라 너무 때이른 감은 있었지만, 그는 다른 모든 정치적 약속을 지킨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약속도 지켰다. 그날 오전 잉태된 노사모의 사랑을 등에 업고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기자의 인연은 20년 전 그가 청문회 스타로 부각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진보 월간지 <말>에서는 청문회 스타 노무현 의원을 포함해 개혁파 소장 정치인을 자주 초청해 시국 방담을 다뤘다. 각종 방담 섭외 및 사회자 관계 등으로 <말>에서 노무현 의원과 알게 된 뒤 기자는 한때 그로부터 비서진으로 합류해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도 받았다.

은폐된 현대사 비극과 민중 수난사 추적 발굴 보도에 집중하던 기자의 활동에 주목했는지 그는 기자에게 정치 현실에서 개선할 대안 정책 마련도 중요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당시 기자는 ‘언론에 남아서 진보 개혁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계속 연대하겠다’는 말로 고사했지만 이후 정치인 노무현이 걷는 길에서 실제로 서로 공유한 가치가 많았다. 1990년대 중반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소신을 지키며 ‘꼬마 민주당’을 지켰던 고 제정구 의원, 김원웅 의원 등과 한때 ‘하로동선’이라는 식당을 공동 개업했을 때도 기자는 세 사람을 만나 취재 과정에서 드러난 인권과 개혁적 가치를 대안 정책으로 추진하는 문제를 상의하곤 했다. 친일파 재산 처리 문제와 은폐된 민간인 학살 문제였다.

학살 피해자의 눈물 닦아준 대통령

특히 16대 대통령에 당선한 뒤 노무현 대통령이 내건 숙원 과제 중 하나가 ‘굴절된 과거사 청산을 통한 국민 화해’였다. 이는 지난 20여 년간 기자가 취재 현장에서 각종 학살사건에 대해 연쇄 발굴보도를 내보내며 정부가 지금이라도 국민에게 국가의 본분을 다하라고 촉구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참여정부 아래에서 여야 합의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제정했고, 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해 한국전쟁 전후 은폐된 민간인 학살사건 등을 발굴하고 그들의 해원과 명예회복 작업을 계속 벌이고 있다. 퇴임 전인 2007년 여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법통을 계승한 지도자로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자행된 국가범죄라 할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함으로써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화해의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10년 좌파정권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민주적인 제도와 가치, 인권정책 등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역주행 의도를 드러내 보였다. 봉하마을로 퇴임한 노 전 대통령은 현 정부의 이런 역주행을 특히 염려했다고 한다. 비록 비운에 갔지만 그가 지키려고 했던 가치는 여전히 살아서 뒤에 있는 자들의 몫으로 남은 현재 진행형 숙제인 셈이다. ***

만날 때마다 새로운 비전 제시

이숙이 기자가 만난 노무현 전 대통령

ⓒ시사IN 이숙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국 총영사관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

5월26일 독일 프랑크프루트 총영사관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유럽에 잠시 머무르는 사이 독일 땅에서 노 전 대통령의 영정과 마주하게 될 줄이야. 내 손에 들린 카메라에는 며칠 전 스페인의 한 플라멩코 공연장에서 발견한 노 전 대통령 부부 사진이 담겨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스페인을 국빈 방문했을 때 그 플라멩코 공연장을 찾아 찍었다는 기념사진. 언젠가 봉하마을에 놀러가면 화젯거리 삼아 내놓으려고 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늘 외로워 보였다. 15대 총선(1996년)을 앞두고 ‘꼬마 민주당’에서 처음 만난 그는 최고위원이라는 직함과 달리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촌스러운 외모에 투박한 사투리, 어쩌다 입을 열라치면 ‘정치인답지 않게’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통에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꼬이지 않았다. ‘청문회 스타’라는 별칭이 무색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을 그나마 챙기던 이가 당시 김원기 대표였는데, 그래서일까 노 전 대통령은 이후 김 대표를 ‘정치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한 2002년 12월18일 밤은 고집 세기로 유명한 정치인 노무현이 소신을 접은 몇 안 되는 날이다. 당시 다급해진 선거대책위 간부들이 일제히 정몽준 대표를 찾아가 사과해야 한다고 노 후보를 압박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잘못한 게 없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 되면 뭐 하느냐’는 게 이유였다. 원칙론자인 노 전 대통령 처지에서 보면 ‘노선’이 다르고 ‘깜냥’이 안 돼 보이는 정몽준 대표에게 머리를 조아리느니 대통령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여긴 듯했다. 굳게 닫힌 후보 방 안에서 끊임없이 고성이 오갔다. 밖에서는 “이제 게임은 끝났다”라는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버티던 노 후보를 결국 정몽준 대표 집 앞으로 이끈 이가 김원기 대표다. “그래도 대통령이 되어야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설득이 주효했다.

노 전 대통령이 ‘자존심’을 접으면서까지 대통령이 되어 이루고자 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운 좋게도 ‘노무현의 정치적 소망’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난 후 전국을 돌며 강연 정치를 하던 무렵, 노 전 대통령에게서 막걸리나 한잔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가 ‘정치적 동지’라 부르는 안희정 비서(현 민주당 최고위원)와 함께였다. 종로의 한 선술집에서 노 전 대통령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지역주의 극복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는 이미 온몸으로 지역주의의 폐해를 경험하고 있었고, 일찌감치 지방자치연구소를 내 대안 마련에도 열을 올렸지만, 대선 주자로서는 아직 잠룡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 된 2002년 3월 광주 경선장에서 만난 노 전 대통령의 관심사는 ‘권위주의 청산’과 ‘언론 개혁’으로 옮아가 있었다. 경선 후보들의 정견 발표가 모두 끝나고 선거인단의 투표가 진행되는 시간, 후보 대기실에서 만난 노무현 후보는 여전히 혼자였다. 멀찌감치 유종필 공보특보의 모습

2002년 11월15일 노무현·정몽준 대선 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한 뒤 포장마차에서 ‘러브샷’을 하고 있다.

만 오락가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언론과 정치권의 시선은 온통 ‘이인제 대세론’에 쏠려 있었다. 겨우 서너 시간 뒤에 불어닥칠 ‘노풍’과 ‘광주의 이변’을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후보 대기실 소파에 걸터앉아 정치개혁과 족벌 언론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가던 그는 어느 순간 구두를 벗더니 신고 있던 ‘발가락 양말’을 스스럼없이 내보였다. “무좀이 심해서 영 불편하다”라는 투정도 곁들였다. 잔뜩 무게를 잡아야 할 대선 후보의 돌발 행동에 순간 당혹스러웠지만, 그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동네 삼촌마냥 아무 얘기나 주고받을 수 있을 것처럼 친밀감이 느껴졌다.

‘노풍’에 힘입어 민주당 공식 후보로 선출된 뒤에는 노 전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가 여의치 않았다. 경호원이 붙고, 사람들이 몰리고, 스케줄도 빡빡했다.

대선을 고작 1~2주일 남겨놓은 어느 날, 지방으로 가는 유세 열차에 동행하는 행운을 얻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노 전 대통령은 이번에는 ‘권력 분산’과 ‘책임 총리제’ 얘기를 꺼냈다. 집권하면 검찰·경찰·국정원 같은 권력기관을 모두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까지 짜놓고 있었다. 이때는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성사되어 집권 가능성이 상당히 높던 시점이었다.

기자에게는 늘 매력적인 취재원

이처럼 노 전 대통령은 만날 때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그 꿈을 성사시키려 애쓰곤 했다.

아쉬운 것은 그 꿈을 풀어가는 방식이었다. 에둘러 가기보다 화끈하게 풀어내는 노 전 대통령의 화법은 한편으로는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위태로웠다. “장인이 좌익 활동을 했다고 아내를 버리란 얘기냐” “조선·동아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는 식의 직설 화법은 후보 때는 먹혔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외면당했다. 참모들마저 언제 어떤 발언이 튀어나와 사안의 본질을 흐릴지 노심초사했으니까.

광주 이변, 노사모, 희망돼지, 단일화, 단일화 파기, 대북송금 특검, 검사와의 대화, 대선자금 수사, 탄핵, 수도이전 위헌심판, 국보법 폐지 논란, 한·미 FTA, 대연정 시도, 기자실 폐지 등…. 얼핏 헤아려도 이처럼 많은 뉴스를 생산한 노 전 대통령은 호불호를 떠나 무척이나 매력적인 취재원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죽음으로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갑지가 않다. 대신 마지막 가는 길에 또다시 노 전 대통령 혼자였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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