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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노무현의 죽음 -검찰, 언론

by 싯딤 2009. 7. 27.

[시사in]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해 말부터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라며 크게 낙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이명박 정부의 정치 보복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사람들은 모두 검찰이 대통령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검찰이 잘못한 거 맞다. 그렇지만 검찰은 행동대원에 불과하다. 핵심에는 청와대와 언론 권력이 있다”라고 말했다.

특별기획 2부에서는 누가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심층 취재했다. 우선 노 전 대통령에게 직접 칼을 휘두른 검찰 수사에 대해 파헤쳤다. 현직 검사들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보수 언론과 맞섰다는 이유로 노 전 대통령이 당했던 무자비한 비판과 조롱도 취재했다.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검찰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제도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는지 살펴보았다. 한국처럼 외부 견제를 받지 않는 검찰은 드물었다. 전·현직 국가원수가 자살한 외국 사례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와 검찰, 언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이끈 책임이 있다는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의 글을 게재했다.

검찰은 항복선언 요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검찰 책임론은 야당은 물론 한나라당에서도 일고 있다. 검찰 수사가 표적 수사이자 과잉 수사라는 점은 검찰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수긍한다. 특검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갈수록 설득력을 얻어간다.
5월25일 서울 역사박물관 분향소에서 조문을 한 임채진 검찰총장.
지난 1월 설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배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측근들에게 봉하마을에 오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런데 수석 비서관 등 지인이 찾아오자 노 전 대통령은 떡국을 먹으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대통령 때 잘했다고 생각했다.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었고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확실한 진전이 있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거대한 물줄기는 거역하지 못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되돌아갔다. 검찰·경찰·국세청·국정원 등 권력기관이 다시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실패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노 전 대통령의 말은 무려 6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참모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참여정부 수석 비서관은 “대통령이 깊은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스스로 실패했다고 자책했다”라고 말했다. 진광현 전 청와대 행정관은 “대통령은 젊은 검사들의 양심을 믿었다. 그런데 검찰이 앞장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봉하마을 상가에는 슬픔이 깔려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분노가 터져나왔다. 대통령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것이 이명박 정부의 정치 보복 때문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수구 언론에 대한 질책도 컸다.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을 직접 압박한 검찰의 정치적인 수사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봉하마을에서 만난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검찰이 대통령을 너무 괴롭게 했다”라고 말했다.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정권을 위해 수사하는 검찰은 문제가 있다. 검찰이 사람을 엮어 넣으려고 백정 노릇을 한다”라고 비난했다. 김남수 전 청와대 비서관은 “퇴직 후 지인 회사에 취업했는데 세무조사에 검찰 조사가 이어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친노 인사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백수가 됐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에 역사상 가장 큰 선물을 준 대통령이었다. 참여정부에서 검찰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대폭 강화되었다. 정보기관을 통해 검찰을 견제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파견된 검사들도 되돌려 보냈다. 검사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정치 검사’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검찰은 이를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검찰과 참여정부는 날카롭게 대립했다. 노 전 대통령 집권 초인 2003년 대검 중수부는 대선자금 수사에서 측근인 안희정씨와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구속했다. 노 전 대통령은 큰 아픔을 겪었다.

검찰, 촛불집회 이후 총공세 펼쳐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노 대통령은 권력기관을 이용하지 않고 정치하는 것이 법치라고 생각했다. 표적 수사·표적 사정·청탁 세무조사를 한 번도 지시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충성하겠다는 검사들이 없어서 우리가 검찰권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국민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검찰을 국민에게 군림한 채로 풀어준 것은 실수였다”라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추진하자 검사들이 ‘큰 정치 하실 분이 검찰과 척을 지면 안 된다’며 우회적인 협박을 계속했다”라고 덧붙였다.

현 정부 들어 사회적으로 중요한 국면마다 검찰이 청와대의 뜻을 받들어 설거지를 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정치 검찰’이라는 단어가 부활했다.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검찰 수뇌부 인책론이 일었다. 일부 검찰 최고위 인사는 부인까지 동원해 자리 지키기에 나섰다. 대구 출신 한 실세 정치인은 “신라호텔 행사장에 검찰 최고위급 간부 부인이 찾아와 ‘검찰이 열심히 하고 있다. 조금만 지켜봐달라’고 하는데 보기 안쓰러웠다”라고 말했다.

4월30일 검찰 출두를 위해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를 나선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은 전방위 공세에 나섰다.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기업가와 지인 대부분이 수사의 제물이 됐다. 김남수 전 청와대 비서관은 “친노 인사 상당수가 검찰 수사로 구속되었거나 검찰 수사 중이다. 심지어 대통령이 자주 가던 식당마저 세무조사의 표적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 공격했다. 귀향 넉 달 만인 지난해 6월부터 이명박 정부는 ‘노 전 대통령이 무단으로 국가 기록물을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관과 행정관 7~8명을 수사하면서 압박했다.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8개월간 출국정지가 계속되었다”라고 말했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봉하마을에 내려오자마자 이명박 정부는 우리가 대통령 기록물을 도둑질해 간 것으로 몰고 갔다. 참 야비한 정권이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검찰에 출두하겠다며 정면 돌파를 시도하자, 결국 검찰 수사는 유야무야됐다.

지난 7월 국세청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해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표적 사정’이었다. 대통령의 후원자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도 수개월에 걸친 세무조사와 검찰 조사를 받았다. 지난해 12월 형 건평씨가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돼 구속되자 노 전 대통령은 그즈음부터 칩거하다시피 했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형님을 믿는다’ ‘지켜보자’고 하던 대통령이 형 건평씨가 구속되자 급격하게 무너졌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노 전 대통령은 잘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계속해서 노 전 대통령을 옥죄어 왔다.

노 전 대통령은 권 여사가 박연차 회장 돈을 받은 것을 정말 몰랐다고 한다. 검찰에 나가면서 노 전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몰랐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하던 고시원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저택 위에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아주 오랫동안 박 회장을 보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고 한다. 김해 출신 진광현 전 청와대 행정관은 “대통령께서는 박 회장은 상종 못할 인간이다. 조심하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라고 말했다.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사실은 권 여사가 돈이 없어서 용돈 받아 쓴 것이다. 대통령은 구질구질하게 거짓말하고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검찰의 더러운 게임에 말려들었다”

그런데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을 파렴치하고 치졸한 사람으로 몰고 가는 작전을 썼다. 노 전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며 거짓말하고 있다는 소리를 계속 흘렸다. 언론은 이를 확대 재생산했다. 노 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씨 뒤에 숨는 모습으로 언론이 몰고 가는 것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대단히 자존심 상해했다고 한다. 사실 이에 대한 비판은 한나라당에서도 제기됐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4월 라디오 인터뷰에서 “검찰이 매일매일 수사진행 상황을 브리핑하다시피 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소환 직전 박연차 회장에게서 1억원짜리 시계를 회갑 선물로 받았다는 말을 흘렸다. 수사의 본질과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를 뇌물이라며 노 전 대통령을 압박했다. 한 측근 인사는 “권 여사는 사건이 불거지자 놀라서 시계를 망치로 부숴버렸다고 한다. 검찰에서는 시계를 버렸다는 식으로 진술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검찰은 언론에 ‘권 여사가 1억원짜리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식으로 알렸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보도에 대해 분노했다고 한다. 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검찰의 더러운 게임에 말려들었다. 시계 사건 이후에는 전혀 손을 쓸 수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외출은 지난 4월30일. 검찰 출두였다. 이날 5시간20분 동안 서울행 버스에 올라 검찰에 도착했다. 방송 3사는 헬기를 띄워 생중계로 노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어 날랐다. 노 전 대통령은 “내 인생에서 최악의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날 노 전 대통령은 검사들의 물음에 성심껏 상세히 답했다고 한다. 모르는 일이 있을 때는 주변에 물어서 답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검사들은 노 전 대통령을 검사 앞에서 불리하면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언론에 흘렸다. 차성수 청와대 전 시민사회수석은 “검찰이 언론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을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보이게 한 것에 대해 못 견뎌했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죽기 직전까지 검찰의 압박에 괴로워했다. 한 참여정부 청와대 수석은 “검찰 주변에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 수준으로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만이 구속을 피하는 길이라고 했다. 권 여사가 구속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사실상 항복 선언을 요구했다”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핵심 측근 가운데 이를 수용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통령이 버텼다. 대국민 사과 문제는 서거 직전 노 대통령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였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검의 한 관계자는 “검찰에서 사과를 요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대통령 주변 법조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논의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고향에 내려와 농사짓는 사람을 못살게 만들었다. 이 죽음을 계기로 검찰은 깨달아야 한다. 유서의 의미심장함을 검찰은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화 세력의 대부 격인 함세웅 신부는 “마지막 14줄의 글로 불의한 검찰을 무릎 꿇게 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라고 말했다.

수사 절차·방식 ‘문제투성이’
4월30일 노 전 대통령이 조사받는 옆 방에서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왼쪽)이 웃고 있다.

검찰 수사가 표적 수사이자 과잉 수사라는 점은 검찰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수긍한다. 덕수궁 대한문 앞 시민 분향소에 나온 한 검사는 “대검의 검사들조차 권 여사라면 모를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공소 유지가 힘들다고 했다. 사돈에 8촌까지 그리고 아들을 다섯 번 부르는 수사에 대해 표적 수사 비난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검사는 “가족과 봉하마을에 문상을 다녀온 검찰 식구도 여럿 있다. 검사로서 자괴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대검 한 관계자는 “이번에 대검이 너무했다. 젊은 검사일수록 그런 정서가 많다”라고 말했다.

한 검사는 “반듯하던 검사들이 중수부에만 가면 출세욕에 사로잡혀 오버를 한다. 수사 대상자가 다시 자살하면서 대검 중수부가 사람 잡는 부서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대검 검사들은 BBK 검사가 모두 좋은 자리로 간 것을 의식한 점도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는 절차와 방식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검찰의 피의 사실 공표 혐의다. 기본적으로 수사기관은 수사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를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이번 수사에서 대검 홍만표 수사기획관은 거의 매일 마이크를 잡고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대검 중수부 고위 관계자는 수사 과정을 청와대에 직보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친여 매체에 흘려주면서 노 전 대통령 진영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두 번째는 검찰이 특정 금융거래 정보의 비밀누설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점이다. 지난 4월 검찰은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금융 자료를 통해 건호씨와 정연씨의 금융거래 내역을 언론에 공개했다. ‘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수사기관은 금융정보분석원장에게 금융기관 등이 보고한 정보를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으며, 이를 외부에 누설할 수 없다. 만약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다.

봉하마을에서 만난 이해학 목사(민주개혁국민연합 공동의장)와 효림 스님은 “노 전 대통령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또 검찰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히 밝혀내는 것이 고인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특검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죽는 나라에 평화는 없다
현대 역사에서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례는 많다. 대부분 그 나라의 비극적인 시대상, 건강하지 못한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위)은 죽은 뒤에 칠레 국민으로부터 재평가를 받았다.

현직 대통령이나 퇴임한 지 얼마 안 된 대통령이 자살하는 사례는 그 나라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국가인지를 대변해준다. 현대 역사에서 국가원수가 자살한 몇몇 사례에는 모두 그 시대의 어두운 상황이 담겨 있다.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이야기다. 1970년 남미에서 최초로 민주적 선거로 집권한 좌파 아옌데 정부는 1973년 미국 CIA의 후원을 받은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쿠데타군이 대통령궁까지 몰려오자 아옌데는 국방장관에게 항복을 명령한 뒤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AK47 소총으로 자살했다.

한동안 그가 자살하지 않았고 쿠데타군에게 사살됐다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이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칠레에 다시 민주 정권이 들어선 이후, 여러 조사가 이뤄졌지만 자살이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엇보다 현장에 남았던 아옌데 측근이 최후를 목격했다. 유족도 자살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살아남아서 피노체트에게 당할 굴욕을 생각하면 그가 자살을 선택했을 법하다. 피노체트는 쿠데타 성공 이후 정치범 3000명 이상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고문했다.

아옌데와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좌우 모두에게 공격받았고 무력한 정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옌데 정부의 사회주의 개혁은 기득권층의 저항과 인플레이션으로 실패했다. 미국은 구리값을 폭락하게 해 칠레의 수출 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1972년 파업에는 노조와 대학생이 가담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경찰을 동원해 노조 파업을 막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고 이런 일련의 사건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됐다.

총기 자살 사례 많아

그 밖에 자살로 세상을 떠난 대통령은 많다. 제툴리오 바르가스 전 브라질 대통령은 ‘브라질의 박정희’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20년 장기 집권을 하며 독재자라는 평도 얻었다. 손쓸 수 없는 경제 위기와 정부 내 돈과 관련된 스캔들로 1954년 재임 중 권총으로 자살했다.

1982년 권총 자살한 도미니카 대통령 안토니오 구스만도 비슷했다. 도미니카 역사상 최초로 1978년 선거로 집권에 성공한 그는, 바르가스와 마찬가지로 경제가 나빠진다는 비난과 거대 야당과의 갈등에 지쳐 있었다. 태평양의 작은 나라 팔라우공화국 3대 대통령이었던 라자루스 살리이는 1985년 정치자금 문제로 조사를 받다가 총으로 자살했다.

대통령은 아니지만 프랑스 전 총리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자주 언급된다. 그는 1993년 5월1일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한 달 만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가난한 비주류 출신이었다는 점과 평소 부패 척결과 도덕성을 강조했다는 점이 노 대통령과 닮았다. 그는 파리 주택 구입비조로 친구에게 100만 프랑을 빌렸으며 1995년까지 갚기로 했지만, 이자가 없다는 이유로 언론과 정치권의 비난을 받았다.

보수 언론은 예의를 지켜라
한때의 최고 통치권자조차 자살로 이끄는 한국 정치권력을 문제 삼지 않고, 보수 언론 스스로 비극의 공모자임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이후 전개될 정국에서 대다수 국민이 이들에게 바랄 기대치란 정말 없다.
이광석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외래교수)
보수 신문 조·중·동 은 노 전 대통령 서거 관련 기사 대신 북한 핵실험 기사를 머리기사로 다뤘다.

봉하마을과 덕수궁 대한문 앞 모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 위한 추모 행렬이 끝이 없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시민에게 광장을 여는 데 불안해하며 경찰 병력과 버스로 틀어막는다.

마음이 강건한 이는 오히려 불명예와 모욕을 견딜 수 없어서 쉽게 부러진다고 했던가. 비극적 길을 택한 우리의 전임 대통령이 그랬고, 그래서 검찰과 언론 듀오의 ‘모욕주기’의 죄질이 더욱 치졸하고 무겁다. 그런데 KBS는 그와 상관없다며 억울해한다. 조선·중앙·동아 보수 언론마냥 KBS도 봉하마을에서 쫓겨났고, 분향소 앞 시민에게 위협까지 당했다고 푸념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관제방송꼴로 떨어진 데 대해, 분통한 시민의 원성이 담겨 있음을 KBS는 몰라도 한참 모른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과 관련한 KBS의 ‘하찮은’ 오보(노 전 대통령 실족사 오보와 국민장 대신 가족장 결정 오보)를 예서 조목조목 따지고 싶지는 않다. 이병순 사장 체제 이래로 관제화하고 연성화하는 KBS 시사 뉴스 보도의 권력 기생성에 국민이 진저리 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보수 언론의 사설과 칼럼은 여전히 ‘정치적 타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고사하고 ‘제2의 촛불’ 경계론을 펼치며 사건이 일파만파 확산되는 것을 걱정한다. 북한 핵실험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내환”이요 “갑작스러운 악재”란다. 조선일보식 화답이요, 조선답다.

권력과 보수 언론은 국민의 저항 두려워해
조선일보의 ‘묻지 마’ 갈등 봉합론에 따르면, “사회·정치적 분열과 갈등을 유발하면 우리 경제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들의 사설은 시장과 경기 회복을 위해 어지간한 것들은 모두 덮고 가자 한다. 중앙일보는 “추모 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일부 세력을 경계한다. 슬픔에 빠져 있는 국민(중앙일보는 이에 앞서 “간혹 슬픔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라고 걱정한다)의 감정선을 앞서서 예단하는 꼴이다. 결국 권력과 보수 언론이 두려워하는 것은 국민의 분노와 저항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유발자’로, 분노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집중되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운 듯하다.

때마침 북한 핵실험과 이명박 정부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라는 극한 한반도 정세가 보수와 관제 언론에게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관련 기사들을 대신할 메인 뉴스거리가 호사를 누린다. 시민사회의 성숙도와 비교하면, 보수 언론의 보도 태도는 이렇듯 심히 부끄럽고 후진적이다. 대한문 앞 분향소에 늘어나는 조문객을 위해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이 나서서 장시간 기다리는 이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준다고 한다. 또한 누리꾼은 인터넷 커뮤니티 내에 빈소을 꾸미고 추모의 뜻을 전하며, 추모 노래와 동영상을 만들어 공유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대다수 국민이 느끼는 슬픔과 상처를 장례를 통해 대강 봉합하려는 시도는 더 큰 사회 위기를 부른다. 한때의 최고 통치권자조차 자살로 이끄는 한국 정치권력을 문제 삼지 않고, 보수 언론 스스로 비극의 공모자임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영결식 이후 전개될 정국에서 이들에게 대다수 국민이 바랄 기대치란 정말 없다.

말려죽일 작정으로 덤벼든 거 아닌가
이명박 검찰’과 ‘이명박 언론’이 손을 잡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들이댄 칼날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야비하고 날이 서 있었다. 현 정권의 실정을 가리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인가?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2004년 6월21일 시민단체 회원들이 이라크 파병 반대 및 피랍된 김선일씨 석방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몇시간 뒤면 경복궁에서 고인의 영결식이 열린다. 영결식에 참가하고 난 뒤 이 글을 썼으면 좋겠지만, 언론 매체의 ‘마감’이라는 십장(什長)은 그런 개인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다. 동트는 창가의 컴퓨터 앞에서, 한때 나를 매혹했고, 낙담시켰고, 끝내는 내 누선(淚腺)을 사납게 건드리며 나를 공황 상태로 몰아간 어떤 개인을 되돌아본다.

2002년 12월19일 밤이 생각난다. 방송 매체의 출구조사는 노무현의 승리를 내다보았지만, 워낙 박빙의 선거였던 터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자정 무렵 노무현의 승리가 확정됐을 때, 나는 ‘하이(high)’ 상태가 되었다. 친구들과 나는 광화문 일대를 쏘다니며 술을 마셨다. ‘쏘맥’의 달콤씁쓸함과 낙지볶음의 매콤함은 나를 ‘하이이스트(highest)’ 상태로 밀어붙였다. 문득 시간이 정지돼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김대중과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의 대한민국!

나는 ‘노사모’도 아니었고 끝내 ‘노빠’에도 끼이지 못했으나, 2002년의 내 글쓰기 중심에는 노무현이 있었다. 그에 대한 애정과 기대에 휘둘려, 내 ‘시사비평’은 분석이 아니라 선동이 되기 일쑤였다. 그해에도 나는 <시사IN>의 전신인 <시사저널>에 시평을 쓰고 있었는데, 6월쯤 필진에서 떨려났다. 당시 편집장은 내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 글이 너무 편향적이어서 싣기가 부담스럽다고. 대선이 끝난 뒤 필진에 다시 합류하라고. 나는 그의 말을 납득했다. 내가 보기에도 내 글은 편파적이었고, 그것은 공정성에 관한 그 잡지의 명성을 해칠 수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노무현에게 홀렸다.

노무현에 대한 내 열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아마 그의 지지자 가운데 가장 먼저 이탈한 그룹에 속할 것이다. 그가 취임한 지 서너 달도 지나지 않아, 내 글에는 그에 대한 불평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이라크 파병에서 시작된 내 비판적 논조는 그의 퇴임일까지 계속됐다. 노무현 시대 다섯 해 동안 내가 쓴 정치 칼럼을 되돌아보면, 수구복고 세력에 대한 비판과 조롱 못지않게, 노무현에 대한 투덜거림이 많았던 것 같다. 그것은 언론의 탈을 쓴 수구냉전 정치세력의 십자포화 아래 놓인 정치인에게,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린 화살인 셈이었다.

오랜 친구끼리의 사적 금전 거래였다면?

나는 지금 그것을 후회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노무현은 그를 청와대로 들여보낸 지지자 대다수의 뜻을 거슬러 행동했다. 가장 나쁘게 얘기하면 그는 지지자들을 배신한 셈이었고, 좋게 보아도 그는 지지자들을 충분히 대표하지 못했다. 그의 정서는 한나라당 사람들이나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정서와 맞지 않았겠지만, 그가 수행한 정책은 흔히 한나라당이 대표하는 세력의 이익에 부합했다. 어쩌면 그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힘이 달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이쯤에서 입을 다물련다.

세간의 여론 한 가닥은 이명박이 노무현을 죽였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 보복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은 좀 이상하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정치적으로 박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명박은 제 실정(失政)을 가리기 위해, 전임자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한 것 같다. 그 뜻을 받들어 전직 국가원수에게 칼을 들이댄 대한민국 검찰을 생각하면 욕지기부터 난다. 더구나 그 국가원수는 대한민국 역사상 검찰에게 가장 큰 자율성을 부여한 이였는데 말이다. 현직 대통령의 뜻에 반해 검찰이 자율적으로 전임 대통령의 ‘비리’를 사막에서 사금파리 찾아 헤매듯 뒤지고 다녔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테다. 그 검찰이라는 고용 무사(차라리 자객) 앞에서 풍악을 울려댄 악사는 악취 나는 대한민국 언론이었다.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의 노무현 쪽 라인을 살펴보면, 도대체 왜 이게 ‘사건’이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문제가 된 600만 달러 수수(그 대부분은, 한쪽 주장에 따르면, 순수한 경제적 차원의 ‘투자’였다)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그런 일마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돈이 검찰 주장대로 뇌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 그 돈은 오랜 친구들끼리의 단순한 사적 금전 거래였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러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 거래에 이권이 개입됐다는 것을 검찰이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돈이 남아도는 부자인데, 내 오랜 친구인 공직자 누구의 부탁으로 돈을 빌려줬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를 구성하는가? 그 돈거래가 사적 우정에 기초한 것이고, 내가 그 거래로부터 취한 이득이 아무것도 없다면 말이다.

물론 내가 모르는 사실을 검찰이 밝혀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검찰은 그 사실을 밝힌 바 없다. 피의사실공표죄를 저지르는 것이어서? 그렇다면, 하이에나 언론에다 날이면 날마다 찔끔찔끔 흘린 ‘혐의’ 사실들은 뭔가? 이명박 검찰과 이명박 언론이 손을 잡고 노무현에게 들이댄 풍악 속의 칼날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야비하고 날이 서 있었다. 검찰은 노무현을 소환 조사한 뒤에도, 그가 고인이 될 때까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사법처리 여부와 방식을 결정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노무현을 말려죽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럴 수는 없다.

검찰은 언론과 협력해 노무현을 파렴치범으로 몰았다. 박정희와 전두환조차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나 내란음모자로 몰았지, 파렴치범으로 몰지는 않았다. 염치에 관한 한 자기들도 자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노무현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합의할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염치에 관한 한, 이명박이든 이명박 검찰이든 이명박 언론이든 노무현의 발끝도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인이 비극적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대서가 아니다. 이런 비극이 없었더라도, 이명박과 그 주변은 노무현에게 염치 얘기를 할 처지가 못 된다. 그것은 지지난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다. 그런데도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는 데 ‘염치’라는 무기를 사용했다. 정말 염치 좋은 사람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6공 초기로 후퇴시킨 MB
삼성 앞에서 그렇게 고분고분했던 검찰과 언론이 ‘죽은 권력’ 앞에서는 어쩌다 이렇게 ‘정의롭고’ 용감해졌는가?(아쉽고 짜증나는 것은, 그 삼성 앞에서 재임 중의 노무현마저 고분고분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치매에 걸렸는지 증오에 눈이 멀었는지, 일부 극우분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로 고인을 모욕하기까지 했다.

고인의 유지가 화해와 화합이었다며, 이 비극적 사건을 슬그머니 덮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좋다. 평화와 화합은 공동체 내부에서도 고귀한 가치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취임 1년6개월도 안 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6공화국 초기로 후퇴시켜놓은 이명박의 진지한 반성과 노선 변경이 그것이다.

지금 가장 절망에 차 있는 사람들은 고인의 유가족일 것이다. 고인의 동료 가운데, 유가족보다 더 격정을 내뿜으며 고인을 ‘사유화’하려는 듯한 이가 보였던 건 유감스럽다. 정책적 공과야 어쨌든, 노무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께 깊은 조의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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