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풍산培豊山
배풍산은 우리 동네를 아늑하게 품고 있는 나즈막한 산(110m)이다.
옛적 서해안을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뒤집혀서 생긴 산이라 해서 '배풍산'이라 불려지게 됐다는 말이 전해오
기도 하지만 '培豊山'이란 한자어에서 보듯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배풍산에 올라 놀며 자랐다. 봄에는 딱지를 캐고,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 누워 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을 읽었고, 가을에는 밤, 산딸기를 따 먹고, 겨울에는 연을 날렸다.
산 꼭대기에 오르면 바위를 깎아 낸 듯한 절벽 두 개가 병풍처럼 나란히 펼쳐져 있고, 바닥은 평평하여 뛰어놀기
에 좋았다. 주변 군데군데 바위에는 총알 자국이 나 있었는데, 이로 보아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때 전투가 벌어
진 것 같은데 어릴 적엔 아무 것도 모른채 그저 뛰어놀기에 바빴다.
산 밑자락은 고운 잔디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라고, 오를수록 아카시아, 상수리, 떡갈나무, 밤나무, 소나무 등이
섞여 자란다.
가을이 다가오면, 아직 영글지도 않은 밤(栗)을 따러 산에 올랐다.
밤송이에 찔려가며 밤을 까서 떫은 부위을 긁어내고 오물오물 먹었다.
산 주인이 온다는 말에 줄행랑을 쳐 정신없이 산을 내려 와 헐떡이며 호주머니를 뒤적이노라면 밤 알은 모두 새어
나가고 겨우 몇 개만 남아 있곤 했다.
어른이 되어 어쩌다 고향을 찾기라도 하면 배풍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고 말없이 반겨준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처가 가는 길, 고향을 지나칠 때면 차 안에서 배풍산을 보려고 두리번거리곤 한다.
배풍산은 변치 않을 줄 알았는데 산 정상에 회색 건물과 전봇대가 박힌 모습이 생소하게 눈에 들어오고, 뛰어놀던
반질반질한 잔디 위에도 이름모를 억새풀과 가시덩쿨로 덮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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