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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

고무신 집

by 싯딤 2009. 11. 26.

고무신 집

 

 

 

 

 

 우리 동네 상원이네 집은 고무신을 파는 부잣집으로, 머슴 들까지 두고 5일장을 돌며 장사를 하였다.

 

 동이 틀려면 아직 한 두시간은 더 있어야 할 깜깜한 새벽, 신발을 산더미처럼 싣고 5일장으로 향하는 상원이네 말구루마의 딸그락 딸그락 말발굽 소리에 선잠을 깨면 가까이 들려오다가 이내 멀어져 갔다.

 

 우리 고향은 흥덕(4,9), 부안면(5,10), 줄포(1,6), 정읍(2,7), 고창장(3,8) 5일장이 열렸는데, 상원이 아버지는 읍내 장터의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고무신, 운동화를 팔았다. 상원이 어머니는 고무신 장터 한 쪽에서 국수를 끓여 팔았다.

 

 아버지는 장날, 고무신을 사오기라도 하면 신 앞부분 코를 낫으로 오려내 표시를 했다. 학교가서 잃어버리면 찾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국민학교 6년 동안 신발을 잃었던 기억은 없다.

 

 상원이 집은 양철 지붕에 길다란 일본식 주택으로 방이 여러 칸이었고, 넓은 안마당에 우물이 있고 집채 크기의 고무신 창고가 별도로 딸려 있었다.

 

 상원이 할아버지는 갓을 쓰고 긴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팔았다. 어머니가 말아 피던 봉초를 사러 가면, 방 안에선 동네 노인 몇 분들이 화투놀이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담배 들어오는 날, 값 싼 봉초 한 봉지라도 먼저 사려고 가면 이미 다 팔린 날이 대부분이었다.

 

 상원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상여나가던 날은 흥덕읍내에 큰 구경거리였다.

 상여 앞 뒤로 몇 줄 길게 늘인 흰 천을 교인들이 줄지어 잡고 찬송하며 뒤따랐다. 맨 앞에서는 고등학교 밴드부가 찬송가를 연주하며 나아갔다.

 

 설날, 우리는 상원이네 집에 몰려가 세배를 하고, 맛보기 힘든 귀한 음식을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한 번은 상원이랑 고창 읍내로 영화를 보러 갔는데생전 처음 군만두와 짜장면을 먹었는데, 노릿하고 바삭한 군만두를 외간장에 찍어 먹었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상원이는 초등학교 상급생이 되자 서울로 전학을 갔다이 후 방학이 되면 상원이가 내려왔는데 나는 궁금해서 먼발치에서 기웃거렸다. 상원이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보기가 힘들었다. 해가 거듭되면서 차츰 소원해졌고나는 농고를 졸업한 이듬해 인천의 직장에 취직하게 돼 올라가게 되었다.

 인천에서 직장 다니던 때상원이가 대학 다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보고 싶었다.

 

 어느 해인가, 고향 친구의 부친 상에 내려갔다가 상원이 집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상원이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수소문 끝에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다. 20여년 만이었다. 부잣집 아들로 귀하게 자란 모습은 그대로였다.

 그리곤 다시 20여 년이 흘렀다.

 상원이 부모님은 아버지가 계신 인천에 가끔 오시곤 했다. 내 결혼식 때도 오셨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2000년 이후에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지, 흰머리가 하나 둘 늘어가는 요즘 상원이 생각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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