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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되돌아 본 DJ 치적

by 싯딤 2009. 8. 25.

대결서 협력으로…남북관계 새 역사를 쓰다

[되돌아본 DJ] ① 통일·외교


‘6·15공동선언’ 통일방향 큰틀·경협 토대 마련
김정일 “DJ는 북남관계 돌파구 연 투사”평가

거목의 잎새는 무성했고 가지는 굵었으며 뿌리는 깊었다. 민주화·인권의 상징으로 우뚝 섰지만 3김정치, 지역주의의 굴레도 둘러썼다. 노벨상의 영광을 안긴 햇볕정책엔 퍼주기 비판도 뒤따랐다. 구제금융을 극복하고 복지의 터전을 닦았다는 칭송과 양극화의 그늘을 짙게 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 두루 남긴 족적의 명암과 과제를 분야별로 네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 대결·반목에서 화해·협력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14일 평양 목란관에서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며 밝게 웃고 있다. 평양/청와대사진기자단

2009년으로 분단 64년에 이른 남북관계 역사는 6·15 정상회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원로 언론인 리영희 전 한양대 명예교수가 지적했듯이 2000년 6월15일 이전의 한반도와 그날 이후의 한반도는 이미 같은 한반도가 아니었다. 남과 북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이 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뉴욕 타임스>는 당시 이렇게 썼다. “그의 위상은 ‘근대 한국역사의 거대한 변화의 힘’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두 정상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은 말 그대로 남북관계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한 출발점이었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 원칙이 천명됐고, 통일의 방향에 대한 큰 틀의 합의가 마련됐다. 또 분단의 아픈 상처인 이산가족 문제를 치유하고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개성공단 착공 등 남북 경제협력의 토대가 마련됐다. 그런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대결과 반목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함으로써 통일을 향한 대장정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6·15 공동선언은 30여년에 걸쳐 온갖 음해와 박해를 감수하며 지켜온 그의 오랜 신념이 결실을 맺은 것이기도 하다. 1971년 대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 권력에 도전장을 내민 김대중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통일정책은 ‘폐쇄 전쟁지향’에서 ‘적극 평화지향’으로 가자는 것이다.” “때려잡자 김일성, 물리치자 공산당”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용공·좌익·친북이라는 딱지가 평생 그를 괴롭혔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냉전적 대결과 반목 그리고 불신의 최대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그 자신을 옭아매던 이념과 현실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6년 뒤인 1997년 12월19일 이번엔 대통령 당선자로 첫 기자회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1971년 이래 견지해온 통일의 철학을 햇볕정책에 담았다. 2000년 3월9일 베를린자유대학 연설에는 햇볕정책의 핵심이 담겨 있다. “첫째, 북한의 무력도발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둘째 우리도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셋째 남북이 화해 협력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햇볕정책의 핵심이며 냉전 종식을 위한 주장입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이제 한국의 민주화는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한반도의 통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베를린 연설을 거치며 북한은 정상회담에 최종 합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은 김 대통령에게는 △남북대결 반대 △유엔 동시가입 △평화공존 △평화통일의 일관된 통일 철학을 북쪽에 관철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 6월15일 환송오찬에서 “앞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북남관계의 돌파구를 연 투사로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언론인 겸 역사학자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한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을 “비반미적 민족자주, 비용공적 평화통일, 비폭력적 민주회복론을 제시하고 실천”한 것으로 평가했다. 예컨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할 만큼, 그는 ‘비반미적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9년 한반도는 다시금 수구 냉전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햇볕정책의 옥동자로 불려 온 금강산 관광은 중단된 채 기약이 없고, 남북협력의 미래를 상징해 온 개성공단은 위태롭다. 지난 10여년 쌓아온 화해 협력과 평화 번영의 남북관계 대신 날카로운 군사적 대결의 긴장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이에 맞섰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12월10일 노벨 평화상 수상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시작입니다. 저는 역사상의 위대한 승자들이 가르치고 알프레드 노벨경이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나머지 인생을 바쳐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행동하는 양심’을 외치며 ‘무한한 책임’의 이 맹세를 지킨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

민주적 시장경제의 꿈, ‘절반의 성공’

② 경제


구조조정·공기업 민영화 통해 외환위기 늪 벗어나
“투기자본 방어막 사라져 신자유주의 심화” 비판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1년 8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자금 상환기념 만찬’에서 이한동 당시 총리(왼쪽 둘째) 등 참석자들과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말 속에는 관치와 독재가 지배하던 세상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정치인 김대중의 삶과 사상 자체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나타났던 관료-재벌의 유착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내고, 그 자리에 중소기업을 키우고 공정한 시장경쟁 질서를 만들겠다는 게 바로 김대중 경제학의 뼈대다. 디제이노믹스를 형성하고 차츰 살찌우는 데 보탬을 준 경제 자문그룹인 ‘중경회’(김대중 경제를 사랑하는 사람들) 학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 역시 이것이다.


국민의 정부 5년은 디제이노믹스의 숨가뿐 실험장이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맛봤다. 시작은 성공에 가까워 보였다. 오랜 기간 이론과 사상으로 다져진 디제이노믹스는 97년말 닥친 외환위기를 계기로 현실의 정책 무대로 올라서게 된다. 건국 이래 최대 국란이라던 외환위기 극복을 핵심 과제로 내세우며 갓 등장한 김대중 정부에서, 디제이노믹스는 곧 위기 극복 전략의 첫 단추였다. 하루아침에 경제정책의 주권을 사실상 잃어버렸던 당시, 국제통화기금의 거센 구조조정 압력 앞에서 디제이노믹스는 노동·공공·금융·재벌 등 ‘4대 부문 개혁’이라는 형태로 차츰 구체화됐다.

정권 초기에 이뤄진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은 빠른 성과를 내기도 했다. 64조원의 공적자금을 쏟아부었던 금융부문 개혁에선 부실 은행이 대거 퇴출됐다. 외국에서 고리의 단기자금을 마구 들여와 돈놀이에 열중하던 은행들이 잇따라 문을 닫는 운명을 맞았다. 재벌 집단간 ‘빅딜’을 통한 불합리한 투자 조정을 거치면서 한때 500%에 이르던 대기업의 부채비율은 100%대로 낮아졌다. 문어발식 경영을 일삼던 재벌도 잠시나마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공기업 민영화도 속도를 냈다. 정부의 우산 아래 방만 경영을 일삼던 공기업들은 이제 ‘시장’이라는 큰 물에서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야 했다. 이런 노력을 쏟은 결과, 국제 금융자본의 신뢰를 다시 획득한 국내 금융시장으론 외국인의 투자자금이 밀려들었고 위기 당시 39억달러에 그쳤던 외환보유액은 몇 년만에 2천억 달러대로 불어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김대중 정부는 집권 2년차인 99년8월15일을 맞아 ‘외환위기 극복’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노동 부문 개혁에서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이라는 디제이노믹스의 비전은 그 열매를 맺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일종의 사회적 대타협 논의기구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노사정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뿌리깊게 남아있던 대립적 노사관계의 전통을 넘어 생산적 복지의 기틀을 처음 마련하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정보통신(IT) 산업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된 것도 디제이노믹스의 성과로 꼽힌다. 김대중 정부 초기부터 주목받았던 벤처산업은 정보통신 산업의 등장이라는 시대적 조건과 맞물려 재벌체제의 대항마로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정보통신강국’의 주춧돌을 놓은 셈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도 따르는 법. 나라 안에서 작은 열매를 맺었던 디제이노믹스에게도 시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세계적으로 몰아친 닷컴 신화 붕괴와 때맞춰 터진 9·11 사태는 비운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모두에게 ‘신경제’라는 환상을 심어준 채 야생마처럼 질주하던 세계경제는 하루아침에 급속도로 곤두박질쳤고, 국내 경기 역시 맥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정권 초기 구조조정 과정이 남긴 상처는 내수 침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디제이노믹스가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한국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처방전으로 출발했던 디제이노믹스는 온데간데 없고, 단기 땜질처방식 경기부양책만이 쏟아졌다. 김대중 정부 말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부동산 거품과 카드사태는 바로 이 과정에서 무리한 내수 부양책이 안겨다준 혹독한 상처로 두고두고 우리 경제사에 남아있다.

또 다른 목소리도 있다. 공정한 시장경제의 기틀을 만드는 작업이 외환위기라는 피할 수 없는 ‘제약조건’ 아래 진행되다보니, 결국 외국자본에 알짜 기업들을 넘기는 결과만 낳았다는 비판도 뒤따르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시장의 빗장은 되레 더욱 확대됐고, 전세계를 넘나드는 투기적 자본 이동에 아무런 방어막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논란거리다.


무엇보다 김대중 정부 아래 계층간 경제적 불평등 정도가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는 현실은 결국 디제이노믹스를 거치면서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를 되레 심화시켰을 뿐이라는 일부 진보진영의 비판을 낳았다. 어렵사리 관치가 물러난 자리에 냉혹한 ‘시장독재’가 들어섰고 디제이노믹스야말로 바로 그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취임 직전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재벌의 시대는 끝났다”고 자신있게 외친 그였지만, 결국 그의 임기 동안 재벌의 시장지배력은 사실상 더욱 확대되는 현실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디제이노믹스가 미완성 작품이자, 아직 ‘절반의 성공’으로만 남아있는 이유다. 최우성 기자***

민주화·정권교체 ‘빛’ 뒤 3김정치 ‘그림자’

(3)정치


반독재 민주화운동 아시아권에도 파급효과 커
50년만의 첫 수평적 정권교체로 민주주의 진전
집권뒤 정체성 논란…지역편중인사 시비 휘말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기수였지만 정당정치의 측면에선 그늘도 짙었다. ‘3김’으로 표현되는 지역정치, 제왕적 보스정치의 주역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3김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2001년 11월8일 당시 심재권 민주당 총재비서실장(오른쪽 사진 왼쪽 네번째)이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열린 당무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고 있다. 김 전 대통령(왼쪽 사진)이 다음날 총재직 사퇴를 철회해 달라는 민주당 당무위원회의 결의를 거절한 뒤,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정우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으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삶의 궤적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분리해 기술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는 컸다. 그러나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행적 곳곳에 ‘3김 정치’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 있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민들이 군사독재에 시달리던 시절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져 희망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그는 1972년 10월18일 박정희 정권이 유신과 계엄령을 선포하자 신병치료차 머물던 일본 도쿄에서 곧바로 유신반대 첫 성명을 발표한다. 이어 미국 워싱턴에서 유신헌법 처리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발표한 것을 비롯해 망명객 신분으로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73년 8월 ‘도쿄 납치 살해 미수사건’으로 귀국하자마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한다. 그러나 그는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며, 1976년에는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한다.

이 시절 그는 군사정권에 의해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됐다. 숱한 투옥, 망명, 연금을 당하며 1980년에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도 받았다. 그 시절에는 김대중이란 이름조차 언론에 보도될 수 없었다. ‘재야 인사’ ‘동교동’으로 불려야 했다.

국민들과 함께 벌인 민주화운동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은 상당한 결실을 일궈낸다.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냄으로써 전두환 군사정권의 연장을 차단한 것이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정치학)는 “민주화운동을 김 전 대통령 혼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군사독재의 탄압이 김 전 대통령한테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는 선두에 서서 목숨을 거는 형태로 훨씬 강도 높게 싸워야 했다”고 말했다.

이 시기 민주화의 진전은 국제적 의미도 있었다. 한국이 민주화된 이후 다른 아시아 나라들도 더이상 독재로 회귀하지 못하는 등 아시아권에서의 파급효과가 컸다. 서구 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을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부르며, 아시아 민주인권 지도자로서 그의 존재감을 평가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가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뒤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다시, 김대중을 위하여>(김옥두 전 민주당 의원)


1997년 대선 승리는 50년만의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정치사적 의미가 컸다. 권력을 평화적으로 넘겨주고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주의의 진전을 의미했다. 특히 진보 또는 리버럴 정치세력으로의 정권교체는 유럽 나라들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정권교체를 통해 국가권력을 담당하는 세력의 질적 전환이 이뤄졌다는 점도 중요했다. 김영삼 정부의 출범이 군사정권 세력과의 연합을 통한 변형 집권이었던 것과 달리, 국민의 정부 출범은 민주화운동의 맥을 좀더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조희연 교수(성공회대 사회학)는 “1961년 이래 30여년에 걸쳐 반독재 민주화운동 세력이 제기했던 의제들이 국가정책 의제로 실천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하거나 여성부 신설 등을 이런 맥락에서 꼽을 수 있다. 국가인권위 설치는 선례가 세계 몇 나라 되지 않는 일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대선 때 공약한 대로 합법화됐다.

국민의 정부 당시에는 이러한 민주화 조처들이 크게 체감되지 않았다. 당시로선 워낙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까닭이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 위기를 극복한다거나, 남북 정상회담 등의 다른 거대 쟁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집권기간중 ‘조급증’과 ‘제한된 민주화’의 한계 등도 분명했다. 개혁의 대상이어야 할 재벌과 관료가 신자유주의 구조 개혁의 전도사로 부활했다. 경제민주화의 호기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을 만 했다.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나가는 데 있어서의 미숙함도 나타났다. 인사문제를 두고선 첫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구여권 출신인 김중권씨를 기용한 것을 두고 정권의 정체성 논란을 빚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호남 편중 인사 시비가 벌어졌다. 정권이 박정희 기념사업 지원에 적극 나선 것을 두고도 찬반 논란이 격렬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과거사 진상 규명은 다음 정부로 미뤄졌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도 인권단체들이 전향적 조처를 꾸준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창식 선임기자***

‘생산적 복지’ 개혁 심혈…양극화 막기엔 힘부쳐

④ 복지·노동


기초생활보장법 제정해 생계비 지급대상 4배↑
의보 통합·국민연금 확대로 ‘복지 형평성’ 높여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상충…소득격차는 커져

»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10월6일 경기 부천시 원미동의 한 오디오 생산업체를 찾아 추석연휴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부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절대다수 국민이 중산층이 되도록 힘쓰겠다. 중산층 육성과 서민생활 향상을 목표로, 인간개발 중심의 생산적 복지정책을 적극 펴나가겠다.”(1999년, 김대중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보건·복지 분야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역대 정권 가운데 처음으로 복지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며 사회복지 제도를 손질하고 복지 수준을 대폭 확대했다. 김대중 정부를 지나면서 우리나라도 제도 면에서 유럽과 같은 복지국가 초기 단계로 진입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학계에서는 김대중 정부 복지정책의 성격을 두고 “국가 복지의 확대”라는 견해와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이라는 견해가 맞서 이례적으로 실명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그만큼 복지가 정부의 주요 정책으로, 큰 변화를 겪었음을 반증한다.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은 ‘생산적 복지’로 일컬어진다. 이를 두고 당시 ‘대통령비서실 삶의 질 향상기획단’은 “빈곤층 가운데 근로능력이 없는 사람은 기초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생산적 복지를 이룩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다”, “정부가 소외계층과 저소득층의 생활을 지켜 소외계층들이 ‘이 나라가 나를 버리지 않고 있다. 이 나라가 내 나라다’라는 생각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등 복지정책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 김대중 정부 복지정책 성과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의지가 반영된 정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과 의료보험 통합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는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등 45개 단체들이 1998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추진 연대회의’를 만들어 끊임없이 도입을 요구해온 제도다. 그러나 당시 정부 부처들은 모두 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반대했다. 복지부조차 “절대 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이 99년 지방순회 도중 울산에서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방침을 밝힌 이른바 ‘울산 발언’은 이 제도 도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기초생활보장법은 순전히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00년 기초생활보장법 도입으로, 97년 이전 37만명이던 생계비 지급 대상자는 2001년 155만명으로 4배 이상으로 확대됐고 지급액도 월평균 13만8000원에서 20만4000원으로 늘었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는 “생활보호법이 없어지고 기초생활보장법이 생기면서 수십년 동안 시혜의 관점에서 이뤄지던 사회복지가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법적 권리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의료보험 통합도 김 전 대통령의 성과 가운데 하나다. 98년 지역·직장·공교(공무원·교직원) 등으로 나뉘어 있던 의료보험을 하나로 통합하는 법안이 통과됐고, 2000년 7월부터 ‘건강보험 시대’가 열렸다. 의료보험 통합에는 재계와 야당, 한국노총 등이 강하게 반대했고, 여당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의료보험 통합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의료보험 제도는 소득 수준이 낮은 농어민이나 영세기업 노동자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아 의료 서비스가 더욱 필요한데도 이들이 속한 의료보험 재정이 열악해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 김대중 정부 주요 보건·복지정책 일지
당시 여당 보건의료정책 전문위원을 지냈던 이상이 제주대 의대 교수는 “의료보험이 건강보험으로 통합되면서 전국민이 같은 의료 혜택을 받게 되는 등 형평성을 확보했고, 동시에 의료보험 조직 통합으로 효율성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김대중 정부는 88년 시작된 국민연금 제도를 99년 도시 지역 자영업자들에게도 적용하는 등 ‘전국민 연금시대’를 열었다. 또 의약품 오·남용과 의약품 채택 리베이트 등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2000년 의약분업을 시행했다. 이 때문에 당시 전국 의사들이 파업에 나서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에서 보건·복지 분야의 많은 정책이 새롭게 시행됐지만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시 노동자 가구 상위 20%와 하위 20% 소득계층의 평균소득 차이를 나타내는 소득배율이 경제위기 이전인 97년 1분기 4.81에서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1분기에는 5.4로 벌어졌다.

이태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은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으나 경제정책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을 선택하면서 비정규직이 늘고 양극화가 심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막지 못했다”며 “또 경제위기에 발목이 잡혀 복지예산을 큰 폭으로 늘리지 못했던 점도 한계”라고 말했다.김소연 기자, 김양중 의료전문기자***

노사정위원회 구성 ‘사회적 합의틀’ 마련

자본의 파트너로 노동계 인정
‘비정규직·정리해고 확대’ 한계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노동정책에 개입했다. 처음 한 일이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해 사회적 합의틀을 만드는 것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수행하려면 산업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98년 1월15일 첫 회의를 연 노사정위는 한 달도 채 안 된 2월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노사정은 △정리해고 도입 △근로자파견제 시행 △공무원·교원 노조 결성권 허용 △사회보장제도 확충 등에 합의했다. 고용의 유연성과 공무원노조 등의 합법화를 주고받은 것이다.

평가는 엇갈린다. 민주노총은 이후 ‘2·6 사회적 대타협’을 정리해고의 원죄로 보고 노사정위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원적 노동시장과 양극화를 낳은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의 단초가 됐다”며 “현재 노동문제의 원죄는 김대중 정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최영기 경기개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이미 판례를 통해 확보돼 있던 정리해고를 법으로 명문화했을 뿐”이라며 “대내외에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 의지를 과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노사정위로 대표되는 사회적 대화 체제는 이후 김대중 정부 노동정책의 근간이 됐다. 노동정책의 일방주의는 이때서야 종언을 고했다. 민주노총은 물론 한국노총도 노사정위에서 등을 돌렸지만, 김대중 정부 때 비로소 노동계가 재계의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재야운동으로 인식되던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정책 참여자로 등장한 점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전교조가 합법화됐고, 공무원직장협의회도 허용돼 훗날 공무원노조로 발전했다.

사회·실업 안전망을 갖춘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치적으로 평가된다. 김대중 정부 시절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주요 노동관계법 적용 대상이 1인 이상 사업장으로까지 확대됐다. 특히 고용보험 가입 범위가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되고, 실업급여 최저급여액은 최저임금의 50%에서 70%로 올랐다. 실업자 지원을 위해 대폭 늘린 고용안정센터는 지금까지도 고용지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실업안전망 구실을 하고 있다. 그 결과 99년 2월 8.6%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2002년 말 3%로 줄었다.

사실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은 외환위기라는 외생 변수 아래 놓여 있었다.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운동은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한편에선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체제가 안착됐다. 김금수 전 노사정위원장은 “김 전 대통령은 노동자·민생 문제에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노동계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를 비켜가진 못했다”고 평가했다. 남종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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