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바보 노무현 대통령님”을 쓰다운다 [눈물의 기억] “슬프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황지우 시인은 ‘뼈아픈 후회’라는 시제로 토로한다. 반도의 근대사에서 사랑을 받았다는 정치인이 단 한 명 있던가. 때론 표를 줄지언정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거나…. 5월의 덕수궁은 뼈아픈 후회들로 그렇게 들썩였고, 결결이 주저앉았다.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봉하마을을 찾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말한다. “국민들이 제대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걸 부끄럽게 여기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노 전 대통령을 다시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반토막 진실이다. 시민들은 유가족의 뜻과도 상관없이, 정부의 원천봉쇄를 뚫고 자신들만의 분향소를 덕수궁 앞에 차린다. 정부 지정 분향소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들이 실상 다시 알게 된 건, 비주류의 죽음으로 연명하는 주류 정치학의 폭력이다. 촛불만 켜지면 ‘잠정적 소요사태’로 규정하고, 상여마저 뒤집을 무자비 정치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마련한 덕수궁 일대를, 영결식이 열리기까지 일주일간 배회했다. 회한은 자책에서 슬픔으로, 슬픔은 분노에서 증오로 치올라, 서울 복판은 내내 비등했다. 만나는 이마다 이름은 오열씨요, 분노씨다. 결국 애도문마저 격문과 구호가 되고, 고즈넉한 돌담길 두른 만장이 깃발 되어간다.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침묵의 민란이다. “조문하며 그분께 마지막으로 전한 메시지가 있습니까?” “다음 생에도 꼭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어달라고 말했습니다.” 5월23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결국 또 그리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다시금 거리로 불러모았으니, 어쩌면 그가 저승에서도 갚지 못할 신세가 될 모양이다. 대통령에 당선되던 2002년 겨울,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며 그에게 실망했다던 2003년, 그러나 탄핵은 안 된다며 100만 촛불을 들었던 2004년,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며 끝내 등을 돌리겠다던 2007년, 거리는 언제나 ‘노무현’을 불렀다. 퇴임 뒤 봉하에서도 그리 불러세웠다. “지난해 12월 봉하에서 따뜻한 봄날 다시 인사 나오시겠다던 그 말씀 끝으로 정녕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당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많이 울었는데 이렇게 오늘도 많이 울리십니다.” 대한문 앞 분향소 첫날, 굵은 펜 꾹꾹 눌러 조의록을 채운 맹미란씨에게도 노 전 대통령은 가늠 못할 신세를 진다. 충격은 헤아릴 수 없다. 정부도, 어느 조직도 충격 대처 요령을 알리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이날 오전 김아무개(44)씨가 “오후 4시, 대한문 앞에서 추모를 위해 모이자”는 제안을 포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 올린다. 한예진(18)양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친구가 보내준 휴대전화 문자로 (서거 소식을) 알게 됐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왔다”고 말한다. 자꾸만 흔들린다. 조문을 위해 달려온 최초의 여고생. 160cm가 안 돼 보이는 작은 체구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맺힌다. “그분 원래 안 좋아했는데…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거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경찰도 일찌감치 대한문 앞마당에 전경 40여 명을 심어뒀다. 도롯가는 전경차로 막았다. 예정했던 분향소는 30분이 지나 차려진다. 대신 경찰은 사방을 에워싸, 대한문 앞으로 추모객들이 진입하는 것을 원천봉쇄한다. 비 오면 어떡하냐며 들여놓으려던 천막은 진입 시도 2분 만에 경찰이 부순다. 서 울던 이들 나앉고, 비명을 지른다. “예우로 모신다며! 조문도 무섭냐, 이 ××들아.” “오늘은 조문만 할게요, 조문만….” 욕도 애원도 젖어 있다. 오후 6시 남짓, 정동길 쪽은 전경 대신 버스 3대로 틀어막으려 한다. 전경단에 밀려 깔린 한여민(고2)양의 왼쪽 무릎에 핏빛이 든다. 그사이 서울시청역 쪽 전경 한 명이 서거 관련 호외를 읽는다. ‘울지 마라’ 지휘 명령이 없는 한, 그라고 왜 애타지 않고 충격이 없겠는가. 저녁 7시 남짓, 광화문 방향 출구를 터주기까지 추모객들은 대한문 앞마당에서 병자인 양 격리되었다. 차라리 게토 안에서 자유롭다. 열 발톱에 연두색으로 화장한 젊은 여성도, “한 달 전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충격적”이라는 40대도, “언론에서 600만달러 어쩌고 의혹을 키워서 노인들은 그게 600억원인 줄 아는 경우가 많다”던 78살 노인도 떨며 꽃 한 송이 놓는다. 저녁 8시20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더 큰 영정이 도착한다. 달빛 아래, 그림자도 발 디딜 틈 없다. 어느새 10명씩 합동 분향을 한다. 더 크게 웃는 그 앞에서, 시민들은 더 크게 더 많이 운다. 그리 또 신세진다.
5월24일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필부들 맺힌 눈물방울에 2003년 5월25일이 비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 진영과의 마찰에 “대통령 못해먹겠다” 말한다. 어쩌면 외로움이었을 테지만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조차 의심한다. “인간 노무현은 믿고 좋아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고, “권위주의적으로 변했다”며 탈퇴를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조차 참여정부 때 나선 시위가 가장 많다. 정확히 6년이 지난다. 대한문을 찾은 한 여성은 “더 믿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한다. 충격 뒤 자책은 죽순처럼 솟는다. 뿌리가 깊다. 경기 광명에선 시장이 시민 분향소를 치우라 해 마찰이 일었으나, 그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지못미 신드롬’은 덕수궁을 지나 광주와 대구 시민 분향소도 건너고 봉하에 가닿는다. 덕수궁 돌담길, 서울시청역사, 대한문전 바닥에 가슴 치며 눌러썼을 조의문이 가득하다. 지못미, 지못미, 믿지 못해 미안해요…. 자책은 원망으로 이어진다. 5살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덕수궁을 찾은 강아무개(30대·서울 청량리동)씨는 말한다. ”우리나라 국민은 더 당해야 해요. 무능력한 것보단 낫다며 지금 정권을 뽑았잖아요. 그렇게 당하고도 몰라요. 정말 화가 납니다, 제 자신한테도.” 5월23일 오전 내 울었다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기자 앞에서 펑펑 운다. 대한문 영정 앞 국화꽃이 수북하다. 자원봉사자들이 추모객에게 나눠준다. 유족 없는 ‘장례’에 이날 하루에만 모인 조의금 400만원이 꽃값이고 물값이다. 분향 첫날, 국화가 부족해 두세 차례 사용되었을 뿐, 5월28일엔 1천만원이 답지한다. 지난해 넘쳐나던 양초의 출처를 캐물었던 이명박 정부는 유족과 협의해,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한다.
5월25일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5월23일부터 매일 이곳을 찾는다는 이들에게 낮·밤 구분이 의미 없다. 북은 핵실험을 전격 강행했다. 산 자들의 ‘인정 투정’, 망자 앞 곡소리보다 크지 못하다. 대한문은 분향소가 차려진 날부터, 경계란 경계는 모두 흐린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 있다. 낮·밤, 생사, 자책과 분노, 하물며 “<시티홀>의 김선아, 너무 재미있더라”며 조문하러 가는 20대 여성 둘의 폭 큰 감정선까지. 정동영 의원 지지 모임 회원인 이아무개(33·여)씨는 5월27일까지 모두 네 차례 대한문에 들른다. 조문만 두 번을 했다. 그는 “이틀을 안타까워만 하다, 깨고 보니 분노가 치민다”고 말한다. 이념과 지지의 경계도 흐릿하다. 한밤 추모 행렬이 낮보다 길다. 밤 10시30분께, 서울시의회 입구에서 한쪽 추모 행렬의 끝이 겨우 보인다. 김기연(경기 남양주)씨와 기성태(서울 종로)씨가 양손에 촛불과 국화를 들고 줄 끝에 선다. 한 명은 지난 대선 때 “경제는 책임져줄 거란 생각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뚜껑을 까보니 정말 실망스러웠다”고 하지만, 한 명은 “경제 잣대로만 투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선진국이 되긴 힘들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쉰 살, 그들은 친구다. 봉하의 자살은 이 사회 ‘쉰 살’이 따르기엔 지나치게 엄격한 순결일지 모른다. 둘은 “그의 죽음이 없었다면, 개인의 성찰이 이렇게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잊고 살던 ‘노무현’과 뒷짐만 지고 보던 ‘이명박’이 되살아난다.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조금씩 영정 앞으로 다가선다. 한발 두발 성찰 같다. 분향까지 2~3시간은 넘게 걸릴 거라 했더니, 김씨는 “오늘 회사에서 자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5월26일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불 속 회한이 광장의 민장을 통해, 성찰이 되고 바투 공분을 빚어내고 있었다. 서울시청역 지하보도로 이어진 추모 행렬은 맞은편 프레스센터 앞까지 닿는다. 땅 아래에서 국화꽃 들고 또 울고 있다. 지하 공간 인파는 제 몸의 열들로 숨이 막힌다. 6시간을 기다리고 헌화해야, 겨우 위로받을 울분들. 경찰이 끌고, 정부가 부추기는 꼴이다. 전날까지 서울 전역에 104개 중대, 대한문에만 9개 중대가 배치됐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덕수궁 통제 이유로 소요사태 우려를 든다.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은 “차벽이 병풍 같아서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는 분들도 있다”고 말한다. 슬픔은 증오로 적분된다. 전날부터 이명박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를 위한 서명이 본격화했다. ‘지못미’는 저마다 정치나 소외층에 무심했던 개인적 회한이지만, 증오는 그 틈을 악용한 일방통행 정부를 공식으로 겨눈다. 한국에서 3년을 산 미국인 영어강사 조지프 리트(25)는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일은 모든 시민의 큰 슬픔이다. 놀랍고 역사적인 일인데 경찰은 도리어 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고 말한다. 밤 11시20분, 중년 남성 6~7명이 거칠게 내뱉는다. “서울역에 세운 건(정부 공식 분향소) 허깨비여~.” 군데군데 둘러서고 앉은 이들, 시국 토론 중이다. 서울시청역 1번 출구,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이명박 데스노트 - 민주주의, 서민경제, 용산 철거민, 화물연대 노동자 박종태,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 다음은 당신의 이름일지 모릅니다….” 차마 다 읽지 못한다. 원망 말라던 영정 앞에서 자꾸만 싹을 틔우는 원망은 누구의 책임인가.
5월27일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새벽 2시, 30대 여성 둘이 1시간째 대자보를 쓰고 있다. 38살, 36살 올케 시누이 사이다. 1시간가량 기다려 조문을 마치는데, 누군가 대자보를 부탁했다 한다. “낮에는 국화, 밤에는 촛불로!” “이명박 정권 끝장내자, 5월 정신 계승하여 민주주의 사수하자! 제2의 6월항쟁의 횃불을 들자! 독재 타도!” 이들은 “집단행동은 애도 기간이 끝나고 해도 괜찮지 않겠냐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며 “나도 이런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다른 방식의 애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실상 전날 오후부터 많아진 문구들이다. 노조나 시민단체의 플래카드도 는다. 40대 남성은 자유발언을 통해 “울면 끝이냐. 이제 뭐든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외친다. “제 마음속에도 비가 내립니다.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일 우리의 몫으로 알고 끝없는 부패 정권 단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조의록엔 ‘고2 김민규’가 적혀 있다. 하지만 한목소리일 리 없다. 추모가 중반으로 접어들며, 국가 원수에 대한 예우로 대한문을 찾은 이도 상당수다. 무엇보다 김아무개(30·여)씨는 “지난해 ‘촛불’을 들었다 연행이 돼 추모 촛불을 드는 것도 무서웠다”고 말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줄을 서 헌화하면 이윽고 저녁 허기가 몰려온다. 자원봉사자들이 컵라면을 나눠준다. 아이 손에 쿠키칩을 쥐어준다. 건장한 택시기사,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봉하마을 갈 승객들을 호객한다. 왕복 15만원이다. 김밥을 파는 김아무개(66)씨는 “어제 와서 추모하는데 김밥을 판다는 게 정말 민망했다. 하지만 장사하는 사람들은 또 그렇게 먹고살아야 하지 않냐고 해줘 기운이 났다”고 말한다. 새벽 5시, 가로등이 꺼진다. 30분가량 지나자 퇴근길 조문이 출근길 조문으로 바뀐다. 네온사인도 하나둘 꺼지고 커다란 해 하나 촉광을 높인다. 위아래 하얀 옷을 걸친 김강석(45·서울 상계동)씨는 안개꽃을 들고 50여 명 줄의 끄트머리에 선다.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마친 뒤 꽃집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오는 길이다. “퇴근길 택시비로 꽃을 샀으니, 이따가는 지하철 타야죠.” 계속되는 삶, 그것만이 진리다. 하지만 이젠 어떻게? 분노는 폭발할 듯 끓지만, 풀 길을 알지 못한다. 그의 죽음이 ‘짐’처럼 남긴 숙제가 된다.
5월28일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깊은 슬픔, 날선 분노는 구술되기 어렵다. 침묵은 길어지고, 말 대신 눈물로 다진 몇 글자 겨우 시청사, 대한문 앞 광장 바닥에 ‘시’가 되어 붙는다. 첫날부터 겹겹이 붙은 비문들로, 덕수궁 돌담은 거대한 비석이 된다. 13살 아이는 “바보 노무현 대통령님”을 쓰다 앙앙 운다. ‘미안 마라’ 하여 미안하고, ‘원망 마라’ 하여 원망스럽다. 죽음이 시도 살린다. 일대가 ‘시의 광장’이다. 22살 여대생은 컴퓨터 프린터로 정결하게 글을 추려 덕수궁 돌담길에 붙인다. “무지한 제자들을 위해 몸을 던져 진실을 보여주신 것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공부도 못하고 머리도 좋지 않지만, 적어도 깨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의 영원한 대통령님, 나의 스승님.” “나 좀 치료해주세요. 머리가 텅 빈 것 같아요. 눈물이 계속 나와요, 목이 메어 숨을 쉴 수가 없네요, 가슴이 미어져 답답해요. 많은 조문객들 보면 미소가 나요. 난 요것으로 괴로운데 바보 노통은 천배, 만배 힘들었어도 주변분 걱정하셨네요.” 5월26일 방송사는 29일까지 예능 프로를 모두 멈추겠다고 발표한다. 온라인 게임 회사는 게임 서비스를 잠시 중단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사표를 냈다가 반려된다. 수감 중이던 강금원 회장은 울며 출소해 봉하를 찾는다. 시민들은 그게 자신들 ‘시’의 힘이라곤 생각지 못한다. 이날 덕수궁 추모 인파는 50만여 명으로 그간 일일 최대치를 이룬다. 50만 시구가 더 붙을지 모른다. “이렇게 가실 줄 알았더라면 제 삶을 그리 탕진하진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살던 것을 리셋하고… 죽어서 당신을 만날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겠습니다.”(유주영) 작은 비석을 세워달란 유언이, 거대한 ‘시의 민란’을 도발한 셈이다.
5월29일 “운명이다.” 오전 11시5분, 덕수궁에선 시민들끼리 따로 영결식을 연다. 정부가 주재하는 장례식을 거부한 셈이다. 노란 모자와 노란 머플러, 노란 풍선과 노란 종이비행기를 든 사람들로 서울시청 앞은 물든다. 운구차가 덕수궁을 지날 때 “나의 대통령”을 연호하며 울부짖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이다. 불볕에 눈물이 타들어가고, 그도 이미 화장된다. 경복궁에서 서울역을 이글거리는 거대한 민장이다. 공식 영결식 때 이명박 대통령이 등장하자, 덕수궁은 야유로 들썩인다. 곡소리는 ‘반정부’의 다른 말이다. 시민단체는 전날 서울시청 광장에서 추모제를 열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하지만 5월29일 운구차가 서울을 빠져나간 뒤, 시민 추모객들은 마침내 서울광장 일대를 거대한 촛불로 뒤덮는다. 서거 이후, 사실상 지난해 촛불 정국 이후로도 처음이다. 두 가지가 보인다. 이제 ‘촛불’은 전통적 시민단체가 더는 주도하지 못한다는 것과 앞으로 촛불 또한 그와 무관하게 전망된다는 것이다. 노제가 끝난 뒤에도 시민들은 대한문전에서 분향을 했다. 49재까지 지속될 참이다. 그때마다 촛불이 불탈지는 알 수 없다. 일주일 동안 100만 명 이상이 덕수궁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아프게 만났다. 시인 허수경은 ‘불취불귀’ 봄의 이별을 노래한다.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잘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하지만 제(祭)란 무릇 죽음과 삶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 이제 그를 놓아보내야 한다. 1980년 5월, 1987년 6월 그리고 또 오늘. 반도의 오뉴월은 분노의 계절이다. 슬픔의 계절이다. 반도의 민주주의는 오뉴월이 만들었다. 이제 연령을 넘고 시대를 넘어, 그 시절 동참했던 모든 이들, 잔인한 정권 앞에 눈물지었던 모든 이들을 ‘오뉴월 세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반도의 내일은 그들 손에 놓였다. 이제 추모는 끝나고 저마다의 ‘촛불’이 남는다. 그에게 바치는 수많은 ‘시’로, 이제 살아남은 자가 어둡고 어지러운 내일을 모색하는 다짐이 된다. 조종 소리 아직 들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화보
진보의 눈물은 왜 진한가 | |||||||||||||||||||||||||||||||||||||||||||||||||||||||||||||||||||||||||||||||||||||||
[눈물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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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 같지 않던 “아는 사람이 비판하니…”
“민주화 이후 최대의 비극”(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함께 운동하는 동지가 죽었단 느낌”(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 “잘되기를 기대했고, 희망했고, 실망했고… 억울한 사람, 노무현”(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한국 운동사회의 영원한 ‘위원장’ 박석운 진보연대 공동대표가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에 박 대표는 고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 안의 노동상담소에서 일하고 있었고, 부산의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도 노동상담소가 있었다. 그는 상담소 교육을 위해 부산에 자주 들렀다. 거기서 젊은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 국회의원’이 되고도 교류가 많았다. 박 대표는 “우리는 의원실의 노동정책에 도움을 주고, 우리에게 들어오는 노동상담은 의원실에 많이 소개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소개한 인물들 중에는 나중에 노무현 캠프에서 일하다 청와대에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다시 박석운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것은 탄핵 정국이 끝난 뒤에 대통령이 진보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였다. 박 대표는 “그때 노 대통령이 ‘알 만한 분들이 비판하니 더욱 속상했다’고 말하는데 남에게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그러나 비판의 강도는 더해져 박 대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에 앞장서다 투옥됐다. 옛 동지의 정권에서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그래도 그는 “대통령 본인이 양극화 해소에 누구보다 앞장서기를 바랐을 텐데, 얼치기 전문가들에게 둘러싸여…”라며 여전히 진정성을 믿는다. 그렇게 애증의 세월을 보낸 박석운이 기억하는 노무현은 “시대의 풍운아”이자 “솔직담백해서 매력투성이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좋은 재목이 어쩌다 그런 상황까지 갔는지… 억울하다”고 탄식한다.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도 동시대인 노무현과의 20년을 추억한다. 88년에서 89년으로, 전교협이 전교조로 발전하던 당시 노무현은 전교조의 법률자문을 해주던 인권변호사였다. 이 최고위원은 “당시에 ‘교사가 노동자냐’ 논란이 있었다”며 “교사가 노동자가 아니란 악법은 깨어서 고쳐야 한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처지가 바뀌었다. 그는 탄핵 정국 당시에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이 최고위원은 “탄핵이 끝난 다음에 만나니 자신은 솔직히 변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대통령이 되고 보니 야당 의원 시절처럼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실제 자신의 생각도 변했다는 것이다. 이 최고위원은 “비정규 노동자가 아카시아 나무에 목을 매고, 용산의 철거민이 불에 타서 숨지는 것과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하나로 보인다”며 “사람을 절벽으로 밀어내는 한국 사회의 야만성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애통해했다.
“아버지 잘 계시냐.” 2000년대 중반, 당시 김창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만난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였다. 그들은 88년 뜨거운 ‘무쇠 바람’ 부는 울산의 하늘 아래서 만났다.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당시 현대중공업 파업 때문에 내려온 노무현 의원과 함께 다녔다”며 “그 뒤로 국회의원직을 내던진다고 하고 울산에 왔을 때는 둘이 술을 마시며 그에게 무슨 운동을 그렇게 즉흥적으로 하냐고 쓴소리를 했던 적도 있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김 위원장이 구속됐을 때 변론은 문재인 변호사가 맡았다. 문 변호사는 나중에 노무현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다. 김 위원장은 “아버지가 석방운동에 앞장서달라고 당시 노무현 의원에게 찾아가 호소했다”며 “그런 인연으로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렇게 각별한 인연에도 진보정당 활동가인 그는 노무현 정권에 “따뜻한 눈길보다는 냉정한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래서 더욱 눈물이 흐른다”고 말했다. 서거 소식을 들었던 다음날 그는 부인과 함께 봉하마을로 달려갔다. 지금 그는 “진작에 봉하에 가서 만났어야 하는데…”라며 회한을 삼킨다. 침묵 끝에 그는 “민족이 전쟁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지금, 10·4 남북 공동선언만 생각해도 재평가를 받을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 전근대성과 싸웠던 이로서 공감대
비록 생전에 말하지 않아도, 비주류의 공감대는 저변에 흐른다. 1990년대 초반 한국노동당부터 2000년대 후반 민주노동당까지 진보정당 운동에 헌신해온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록 양김씨의 정치적 도움을 받았지만 개혁 진영 정치가 중에는 가장 독자적 행보를 걸었던 사람”이라며 “비록 방법론은 달랐지만 지역주의 극복을 필생의 목표로 했던 이로서 남다른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렇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했던 정치인 노무현은 자신보다 왼쪽에 선 운동가들에게도 “우리의 고민을 이해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과 싸웠던 이로서 공감대다. 김창현 위원장의 말처럼 “어느 자유민주주의자의 고통”에 진보 인사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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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도 “사실은 동료 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 노 대표도 인간 노무현을 두 번 기억한다. 최초의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둔 1994년, 당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대표였던 노회찬씨는 낙선 의원 처지인 노무현씨를 ‘모시고’ 지자체에 관한 강연을 열었다. 노 대표는 “자신에게 선을 긋지 않고 불러줘서 고맙다며 강사료도 사양하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둘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노씨 스타’로 만났다. 그는 “서민으로 출발해서 서민으로 돌아갔던 최초의 대통령”이라며 “현실의 공과를 넘어서 노무현이 상징했던 시대정신에 공감했던 이들이 다 함께 슬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직선제 이후로 뽑힌 대통령 가운데 가장 젊은 대통령이 가장 먼저 숨졌다”고 되새겼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 시대의 비극이란 것이다. 그는 “자신은 구시대의 막내를 자임했지만, 우리는 그가 새 시대의 맏이가 돼줄 것을 기대했다”며 “그래도 노무현 시대는 낡은 정치가 더 낡아 보이는 진전은 이뤘다”고 평가했다.
진보 진영에도 뇌쇄적이었던 스타일
동시대 진보뿐 아니라 젊은 진보가 느끼는 슬픔도 깊다. 이지안 진보신당 부대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철들고 나서 받은 최대의 충격”이라며 “그분의 서거는 정치적 존엄사”라고 표현했다. 이 부대변인은 때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비판 성명을 쓰기도 했다. 그는 “큰 틀에서 보면 지향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정책이 못 미치거나 단계별로 방법론이 달라서 강하게 비판도 했다”며 “예전에 썼던 성명을 다시 읽어보니 어떤 부분은 야박했단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밑에는 말할 필요가 없는 공감대도 있었다. 그는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그의 말도 노무현 정권의 한계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한계”라며 “우리가 함께 남은 숙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인 노무현의 스타일은 진보 진영에도 매혹적이었다.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는 “정치인 노무현은 한 번도 한국 정치의 정해진 길을 가지 않는 반정치의 정치를 했다”고 평했다. 그에겐 그렇게 뇌쇄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단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이 겪었을 영육의 분리에 슬픔도 느낀다. 엄 활동가는 “빈농의 아들로 험난한 정치 인생을 걸었던 그는 통치자로서 자신조차 비극적 위치에 놓였던 사람”이라며 “대통령이 된 뒤에는 ‘내 영혼은 당신들과 같이 있지만 통치자로서 나는 당신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의 서거를 통해 왜 그리스 비극이 인간 삶의 보편성을 상징하는지 새삼 생각한다”며 “퇴임 뒤에 고향에 내려가 비로소 분열에서 벗어나 비극성을 벗었던 그를 검찰 수사로 다시 끌어내 죽게 만들었으니 분노가 끓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했을까. 그의 영혼이 왼쪽으로 기울었다면, 그가 발딛고 선 땅은 신자유주의 영토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국의 수구세력에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위협이 되었던 유일한 사람, 노무현은 기억된다.
권김현영 국민대 강사(여성학)는 ‘한국 아저씨’ 노무현의 최후에 우리네 아버지 생각이 겹쳐서 더욱 슬프다. 권김 강사는 “그는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경상도 아저씨였지만,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선 변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며 “그것은 전후 세대 아버지들이 열심히 세상을 사는 모습을 닮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피부에 내장된 가치관을 넘어서 새로운 것에 귀를 열었던 그를 미워하긴 어려웠다”고 돌이켰다. 노 전 대통령은 1994년 발간한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렇게 노무현은 끊임없이 고백하는 인간이었다. 아내를 때렸단 과거도, 자신이 변했단 말도, 나를 버리란 글도, 고백할 용기가 없으면 나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투신으로 그는 자신의 진심을 끝까지 고백했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응시하며 산 사람이다. 권김 강사는 “자신 아닌 무엇, 이른바 국가와 시대를 빌려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아저씨들이 너무나 많은 사회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끝없이 물었던 예외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그는 다른 민주화 세력 아저씨들과도 다르게 자신의 권력을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단 것이다. 그렇게 진짜 보통 사람 노무현은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캬~ 좋다” 말하는 모습이 어울렸다.
다시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세상 아닌가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왜 진보가 슬퍼하는지를 묻는 것이 슬프다”며 “좌든 우든 생각은 달라도 자신의 논리 안에서 철저하고 결백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 슬픈 것이 정상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드물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다.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걸었던 빈농의 아들은 자신의 몸을 고향 뒷산에 던지는 ‘투신 공양’으로 잠든 민주주의를 다시 깨웠다. 그렇게 개천에서 났던 용은 개천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그것은 마지막 용의 도전일지 모른다. 지금 여기는 다시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세상이 아닌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이들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진하다.
신윤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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