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내 마음에 묻힌 노무현/각계 인사들의 회고

by 싯딤 2009. 7. 27.

한겨레 .09.05.24-27

내 마음에 묻힌 노무현

» 4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장애인 차별금지법 서명식 및 2007 국민과 함께하는 업무보고"에서 장애인 차별금지법재정 추진연대 박경석공동대표가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자 유시민장관등이 제지하고 있다.

다시 할 수 있을까, 대통령 앞 기습시위
펼침막 펼치자 차분하게 “시간 드릴게요”

박경석 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야속함도 없지 않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장애인 인권을 위한 가장 중요한 법률 세 가지가 참여정부 때 통과됐습니다.”
» 박경석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

2007년 4월4일 박경석(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기습 시위를 벌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서명하던 이날, 박 대표는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는 서명식 도중 미리 준비한 ‘장애인 교육지원법 제정하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펼쳐 들었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고 얘기하지만 장애인은 교육조차 못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굶고 있습니다”라며 큰 소리로 호소했다.

이 돌발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은 두 차례나 “잘 알겠습니다”라고 차분하게 답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의견을 말할) 시간을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말씀하실 만큼 시간을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소동이 정리된 뒤 노 전 대통령은 “장애인 정책은 매우 중요하며 장애인이 적응을 할 수 있도록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박 대표는 기억한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사흘째인 25일, 박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이 있을 때 이 문제가 조금이라도 더 다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그는 “요즘은 노 전 대통령 시절에 비하면 가혹하다고 느낄 정도”라며 “다시 청와대에 갈 기회가 있더라도 그런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친구의 전화를 받고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알았다는 박 대표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다가 물러나 정치권의 무서움과 야비함을 느끼게 되면서 결국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 노무현 대통령이 3일 제주시 봉개동 소재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린 ‘58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 행사를 마치고 관계자 및 유가족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제주 산딸나무 피는 5월에 오라더니…
공식사과로 유족 한 풀어준 정치인

이중흥 4·3유족회 제주시지회장

“꽃피는 5월에 오라고 하셨는데….”

이중흥 4·3유족회 제주시지회장

이중흥(62·사진) 4·3유족회 제주시지회장은 말끝을 잇지 못했다. 이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는 순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48년 4월3일 제주에서 일어난 4·3 사건으로 고통을 받아온 유족들에게 노 전 대통령은 특별하다. 2003년 10월 노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4·3’이라는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한 것은 반세기 넘게 맺혔던 제주도민들의 한을 쓸어주기에 충분했다.

이 회장은 유족회 회원 등 15명과 함께 지난해 8월 봉하마을에서 노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 “4·3문제 해결에 대한 고마운 말씀을 직접 드리고 싶었는데, 애초 면담시간인 10분을 넘겨 30분이나 만나주셨다.”

이 회장 등이 고마움을 전하자, 노 전 대통령은 “4·3사건의 아픔을 덜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노력했을 뿐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해놓은 것을 나는 열매만 따먹었습니다”라며 겸손해했다고 이 회장은 전했다.

이 회장 등 유족들은 지난해 11월 제주산 산딸나무를 갖고 봉하마을을 찾았다. 유족들이 “5월 말이면 산딸나무는 꽃을 피우고, 그 빨간 열매는 4·3의 아픈 마음을 상징한다”고 설명하자,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씨는 “꽃이 피는 5월에 오세요”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제주/허호준 기자*

노동자가 죽던 날, 바람처럼 나타난 사람
부산·경남 노동계 든든한 조력자

백순환 대우조선노조 부위원장

1987년 8월22일 경남 거제의 옥포관광호텔에서는 대우조선 노사 대표가 단체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백순환 대우조선노조 부위원장

대우조선 노동자 3000여명은 “김우중 회장 나오라”고 소리치며 호텔로 향했다. 갑자기 경찰의 최루탄 사격이 이어졌다. 최루탄은 한 젊은 노동자의 오른쪽 가슴을 맞고 튕겨나와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쓰러진 사람은 대조립부 외업반에서 일하던 이석규(당시 21살)씨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본 게 그 직후였어요. 노 전 대통령은 배를 타고 거제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어찌 됐느냐’고 물었죠.” 백순환(49·사진) 대우조선노조 부위원장은 당시 직장에서 쫓겨난 해고 노동자였다. 백 부위원장과 ‘노무현 변호사’는 택시를 타고 곧장 숨진 이석규씨가 안치된 옥포대우병원으로 향했다. 노 전 대통령은 고 전태일씨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 이상수 전 의원(당시 변호사) 등과 함께 ‘이석규 열사 민주노동자장’의 장례위원회를 구성했고, 연이어 이씨의 사인 규명에 나섰다. 하지만 검찰은 그를 노동쟁의조정법의 독소조항인 ‘제3자 개입 금지’ 혐의로 구속했고, 그는 차가운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백 부위원장은 “노 전 대통령은 부산·경남 노동계의 든든한 법률적 조력자였다”고 회상했다.

백 부위원장도 노 전 대통령에게 법률적 도움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백 부위원장이 대우조선을 상대로 낸 해고 무효 확인소송의 담당 변호사였다. “노 전 대통령을 찾아가 주례를 부탁했는데, 자기는 젊어서 안 된다며 웃으며 손사래를 치더군요. 엊그제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먹먹했어요. 그렇게 돌아가실 분이 아닌데….” 남종영 기자*

“이라크파병 반대 표명에 훗날 고마워해”

사시 동기·민변 회원들이 본 노무현


“솔직하고 타협없는 스타일…허리띠 풀어 뱀장수 흉내도”
“정치 말렸는데 고집 못 꺾어…대통령된 뒤 짓눌리고 경직”

아주 떠나버리지는 말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이기도 했다. 그를 아는 법조계 인사들은 법조인 시절 노 전 대통령이 “정치인일 때보다 더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다”고 회고했다. 1년을 못 채운 짧은 판사 생활에 이어 부산의 ‘운동권 변호사’로 변신한 탓에 법조계 인맥은 넓지 않았다.

법조계에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1975년의 사법시험 17회 동기생들과, 한때 자신이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원들이다.

노 전 대통령은 ‘8인회’라고 이름 붙여진 동기생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자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994)에는 이렇게 썼다. “연수원 초기 아는 사람이 없어 점심도 혼자 먹어야 했는데, 내가 외톨이란 걸 눈치챈 몇몇이 자기 패거리에 끼워줬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연수원 시절 내내 가깝게 지냈고, 지금도 만난다.”

법무법인 화우의 대표인 강보현 변호사와 이종왕 전 삼성그룹 법무실장, 정상명 전 검찰총장, 이종백 전 서울고검장, 조대현·김종대 헌법재판관, 서상홍 정부법무공단 이사장 등이 그와 특별히 가까웠던 동기생들이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와 퇴임 직전 이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내고, 거나한 술자리도 마련했다. 퇴임 뒤에는 봉하마을에 초청도 했다. 이들 중 한 동기생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우리랑 함께 부엉이바위에 올랐을 땐 이런 비극이 벌어지리라 상상도 못했는데 …”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어 “그때 정치하겠다는 걸 말렸어야 했다”며, 1988년 정계 입문 당시를 떠올렸다.

“출마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뜯어말리러 부산까지 내려갔었지. 당시 노 변호사가 집 한 채를 마련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내가 형수(권양숙씨)를 만나 ‘조금 있으면 분명히 이 집도 팔아먹자고 할 겁니다’라며 겁을 줬고, 형수도 반대를 많이 했는데 결국 그 고집을 못 꺾겠더라고 ….”
검찰 출신의 한 동기생은 연수원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판사 출신인 연수원 교수들이 수업하다가 ‘어이, 상고 출신 노무현이 대답해봐’ ‘나이 많은 노무현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식으로 짓궂은 질문을 많이 했다. 시보를 나가서도 ‘(상고 출신이라서)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 너 뭘 배웠냐’ 식의 구박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지나치게 경직된 법조계의 분위기를 못 견뎌 했고, 그래서 판사도 짧게 하고 말았다.”

그의 운명은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뒤바뀌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운동권 출신인 문재인 변호사와 같은 사무실을 쓰게 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문 변호사는 “당시 함께 사무실을 쓰려 했던 사람이 판사에 임용돼 가버리자, 노 변호사가 나한테 찾아와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를 했다”며 “나는 다음해 좋은 조건으로 서울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그의 솔직하고 타협 없는 업무 스타일에 반해 눌러앉았다”고 전하기도 했다.

‘부림사건’으로 ‘운동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5월28일 창립한 민변 회원들과도 교류를 맺게 된다. 당시 부산 민변의 핵심은 문재인 변호사였다.

조용환 변호사는 민변 창립총회에 참석했던 노 전 대통령을 이렇게 기억했다. “직전 총선에서 민변 출신 중 강신옥, 김광일, 노무현 세 사람이 국회의원에 당선돼 참석을 했는데, 노 변호사가 인사말을 하며 ‘그 선거라는 게 사람을 참 미치게 만들더군요. 표만 준다면 지나가는 개한테 절이라도 하겠더라고요’라고 말해, 모두 웃었다.”

청와대 국민참여수석을 지낸 박주현 변호사도 “술자리 같은 데서 허리띠 풀어 머리에 묶고 약장수, 뱀장수 흉내를 내가며 굉장히 흥을 잘 돋우는 분이었다”며 “대통령이 된 뒤에도 몇 차례 그런 장면이 있었지만 예전에 비해 항상 짓눌려 있고, 경직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민변 원로인 한승헌 변호사는 1987년 가을, 옥포 대우조선소 노동자 이석규씨 사망 사건과 관련해 구속됐던 노 변호사의 모습을 또렷이 떠올렸다. “구속됐다는 말을 듣고 부산 해운대경찰서 유치장에 가서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노 변호사를 접견했지. 노 변호사가 거제도에서 있었던 일을 자필로 경위서를 썼는데, 기록이 얼마나 자세하고 꼼꼼하던지 마치 생방송 보듯이 써놨더라고. 표정은 담담했지만 기질은 강직했고.”

한 변호사는 탄핵재판 때의 기억도 되살렸다. “대통령과 변호인단이 청와대에서 저녁을 먹으며 대책을 상의했는데, 당시 한나라당 쪽과 보수언론에서 대통령이 헌재 심판정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어. 노 대통령이 ‘나가죠. 못 나갈 것 뭐 있냐’고 공세적으로 나오더라고. 변호인단이 만류했지. 문재인 변호사가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변호인단한테 할 말이 있냐’고 했어. 그랬더니 벌떡 일어나 ‘저 대통령 다시 하게 좀 해주십시오’라며 허리 굽혀 인사를 해. 감성적인 그런 표현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아.”

박주현 변호사도 노 전 대통령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을 전했다. “제가 이라크 파병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그때 언론에서 청와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다고 시끄러웠거든요. 그런데 파병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저한테 나중에 고맙다고 격려금까지 주셨어요. 상황에 밀려 파병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내준 제게 고마우셨던 거죠.” 석진환 송경화 기자*

“틀박힌 보고땐 역정…나중에 정중히 사과”
참모들이 기억하는 노무현
딱 한번 허문 인사 철칙…그 이유는 ‘인간적 아픔’
인사청탁 비판보도 나자 절차 확인뒤 무한한 신뢰
기자실통폐합 만류에 ‘원칙 지키자’ 강한 질책
분향소에서 눈물을 훔치는 국민들 마음에 새겨진 ‘노무현의 의미’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참여정부 5년 동안 노 전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했던 청와대 핵심 참모들은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 인물”로 규정하면서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른 ‘대통령 노무현’을 추억했다.

박남춘 전 인사수석은 인사추천위원회의 결정을 엄격하게 수용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2006년 5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인사수석을 하면서 수많은 인사안을 올렸지만, 대통령은 딱 한 번 2순위자를 선택했을 뿐 항상 인사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했다.” 박 전 수석은 노 전 대통령이 한 정부 산하기관 감사 임명안에서 2순위자를 낙점하던 때를 회상하며 “그 이유도 너무 인간적이었다”고 말했다. 박 전 수석은 “대통령이 ‘이 사람이요, 선거 때 부인이 투신자살한 아픔이 있는 사람이에요. 박 수석, 이번 딱 한 번만 날 봐서 2순위자를 해주면 안 되겠소’라고 부탁했다”며 “내가 인사수석을 할 동안 인사추천위 결정에서 1순위를 배제한 유일한 사례”라고 말했다.

이백만 전 홍보수석은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부모와 같이 나를 배려한 따뜻한 대통령”으로 기억했다. “어느 날 내가 학교 후배를 문화부에 인사청탁했다는 게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대통령이 나를 불러 ‘이 수석이 청탁했소’라고 물었다. 그러곤 민정수석실에 강도 높은 조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 전 수석이 청와대 인사추천위와 협의를 거쳐 문화부와 논의하는 등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게 확인되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조사 뒤 대통령은 ‘언론에 흔들리지 말아요. 청와대와 정부가 그 정도 인사 협의도 못해 어떻게 일을 합니까’라며 믿어줬다.” 이 전 수석은 “‘지금 집 사면 낭패’라는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는 대통령이 새벽 5시에 직접 A4용지 두 장짜리 편지를 써 ‘당신 메시지가 잘못 전달됐다. 국민감정에 어긋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엄히 질책하면서도 ‘내가 시킨 일을 한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은 “정치 경험이 없는 홍보수석을 노심초사한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박재호 전 정무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을 “계산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옳다고 생각한 원칙을 훼손하면 격정적으로 반격하는 원칙주의자”로 기억했다. “퇴임을 앞둔 마지막 해 단행된 기자실 통폐합에 대한 비판여론이 드셀 때, 대통령에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만 싸우시라’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지만, 나는 그대로 내 원칙을 지킨다’며 나를 심하게 질책했다.” 박 전 비서관은 “지금 보면 꾀바른 정치인이 아닌 분에게 너무 어리석은 말을 했던 것 같다”고 후회했다.

천호선 전 홍보수석은 “장관과 참모들에게 항상 창조적 사고를 주문했다”고 말했다. 그는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나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틀에 박힌 보고나 대책을 내놓으면 역정을 냈고, 그렇게 혼이 난 장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며 “하지만 나중에 국무위원들이 지켜보는 데서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하는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전해철 전 민정수석은 “보고자의 직책보다는 내용을 더 중시해, 배석한 행정관도 내용만 좋다면 공식회의에서 발언을 할 수 있도록 했다”며 “또 참모들의 안사람에게 항상 따듯한 말을 건넬 줄 아는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신승근 기자*

선진규 정토원장이 본 노 전대통령

“호미 든 관음상, 사춘기에 영향 줬을 것
올초 책 선물하자 세심하게 ‘각주’ 조언”

» 선진규(85) 정토원장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골과 위패가 봉안될 예정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화산 정토원의 선진규(85·사진) 원장은 노 전 대통령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선 원장은 “노 전 대통령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후배인데다, 내 막내동생 또래여서 어려서부터 나를 무척 따랐다”고 회고했다.

선 원장이 50년 전인 1959년 ‘불교의 사회적 구실’을 내세우며 봉화산 정상에 개혁의 상징으로 ‘호미를 든 관음성상’을 봉안했을 때 노 전 대통령은 진영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때 그 관음성상을 본 노 전 대통령이 “부처님이 절 밖으로 나와 호미를 들고 민생구제에 나섰는데 난 봉화산 봉수대에서 횃불을 들고 개혁의 선봉이 되겠다”고 말했다는 것을 노 전 대통령의 친구들에게서 들었다고 그는 전했다. 선 원장이 기억하는 당시 ‘소년 노무현’은 ‘저항적이면서 사고력과 기획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서거 직전에 경호관이 그를 찾아왔던 일을 떠올리며 “마지막 가는 길에 법당에 봉안돼 있는 부모 위패에 절을 올리고 내 안부도 확인하려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며 “‘그때 왜 밖으로 뛰어나가 말리지 못했나’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족들이 49재를 어느 절에서 올리기로 결정하든 애초부터 개인적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노 전 대통령의 49재는 별도로 우리 절에서 올리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토원이 노 전 대통령의 49재를 맡게 된 데 대해 ‘대통령이 주신 마지막 선물’ 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월 ‘호미를 든 관음성상’ 봉안 50돌을 기념해 <부처님의 삼대 선언>이란 소책자를 만들어 노 전 대통령에게 선물했을 때, 노 전 대통령이 “‘범천’이란 용어를 풀이해주는 각주를 넣으면 좋겠네요”라는 지적을 해준 것을 기억했다. 그는 “보통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책 잘 썼네요’라는 인사말로 그쳤을 텐데 대통령은 어디에 각주가 필요한지까지 살필 만큼 세심한 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조언대로 각주를 달아 책을 다시 펴냈다.

하지만 그는 “지난 4일 생가 복원공사 상량식날 사저를 찾아갔을 때는 대통령이 별 말씀을 하지 않았다”며 “평소 말 잘하시던 분이 얼마나 심적 고통이 컸으면 저럴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 대통령을 본 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해/신동명 기자*

윤태영 “탄핵 연상시키는 유폐생활”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


“담배·책·글이 마지막 삼락”노무현 전 대통령을 항상 가까이서 지켜온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28일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시작된 뒤 노 전 대통령이 겪은 고통을 “5년 전 탄핵의 봄을 연상시키는 유폐생활”로 묘사했다. 그는 이날 ‘대통령의 외로운 봄’이라는 글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그 봄날을 서글프게 전했다. 다음은 윤 전 대변인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4월 중순, 대통령의 사저는 생기를 잃어가면서 적막감마저 휘감고 돌았다. 그 안에 선 대통령은 유난히 머리가 희어 보였다. 특유의 농담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형님 문제가 불거졌을 때부터 대통령은 지인들의 사저 방문을 적극 만류했다. 그리고 4월, 봄이 되면 재개될 것으로 생각했던 방문객 인사는 고사하고 대통령은 오히려 사저 안으로 안으로만 갇힐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탄핵의 봄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유폐생활에 대통령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진보주의 연구’ 등에 대한 생각에 천착하고 다듬어 나가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작업은 예상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내가 이걸 계속할 수 있겠나?’, ‘이렇게 된 내가 이 이야기를 한다 해서 설득력이 있겠나?’라는 회의를 스스로에게, 때로는 참모들에게 던지곤 했다.

길고 고독한, 그 피폐한 시간들, 독서가 대통령의 문제의식을 더욱 치열하게 했다. (그러나) 책과 글에 대한 집념이 건강을 갉아먹는 악순환의 늪으로 대통령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건강은 금연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작년 말부터 시작된 상황은 대통령의 손에서 담배가 끊어지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담배, 어쩌면 그것은 책, 글과 함께 대통령을 지탱해준 마지막 삼락(三樂)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남긴 글에서 말했듯이 책 읽고 글 쓰는 것조차 힘겨워진 상황에서는 대통령이 기댈 수밖에 없는, 유일하지만 허약한 버팀목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담배로는 끝내 태워 날려버릴 수 없었던 힘겨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의 모습이 다시금 보고 싶어진다. 미치도록….” *

나는 그를 남자로 좋아했다

두번 만나 노무현에게 반했던 김어준, 책상 위에 담배 한갑을 올리다

김어준

1. 그날은 재수학원 대신 당구장에서 종일을 보내던 중이었다. 청문회가 한창이었지만 그 시절 그 신세의 그 또래에게, 5공의 의미는 쿠션 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건 순전히 우연이라 하는 게 옳겠다. 수구 앞에 섰더니 하필이면 티브이와 정면이었으니까. 사연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웬 새마을운동 읍네 지부장 같이 생긴 이가 눈에 들어 왔다. 그가 누군지 알 리 없어 무심하게 시선을 되돌리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스쳤다. 다시 등을 폈다. 어, 정주영이네. 거물이다. 호, 재밌겠다. 타임을 외치고 티브이로 달렸다.

 일해 성금의 강제성 여부를 묻는 질의에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다 답함으로써 스스로를 군사정권의 일방적 피해자로 둔갑시키며 모두에게 공손히 ‘회장님’ 대접을 받고 있던 당대의 거물을, 그 촌뜨기만은 대차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몇 놈이 터트리는 탄성. “와, 말 잘 한다.” 그러나 내게는 달변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경제권력 앞에서 모두가 자세를 낮출 때, 그만은 정면으로 그 힘을 상대하고 있었다. 참으로, 씩씩했다. 그건 가르치거나 흉내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를 알았다.

 

 2. 이후, 난 그를 두 번 만났다. 부산에서 또 실패한 직후인 2000년 봄, 백수가 된 그를 후줄근한 와룡동 사무실에서 만난 게 처음이었다. 낙선 사무실 특유의 적막감 속에 팔꿈치에 힘을 줄 때마다 들썩이는 싸구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때 오갔던 말들은 다 잊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기억나는 건, 담배가 수북했던 모조 크리스털 재떨이, 인스턴트 커피의 밍밍한 맛, 그리고 한 문장뿐이다.  

 “역사 앞에서, 목숨을 던질 만하면 던질 수 있지요.”  

 앞뒤 이야기가 뭔지, 왜 그 말이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말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그의 웃음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저만의 레토릭이 있다. 난 그런 수사가 싫다. 같잖아서. 저 하나 제대로 건사해도 다행인 게 인간이다. 역사는 무슨. 주제넘게. 너나 잘하셔. 그런 속내. 그가 그때 적당히 결연한 표정만 지어줬어도, 그 말도 필시 잊고 말았을 게다. 정치인들은 그런 말을 웃으며 하지 않는 법이다. 비장한 자기연출의 타이밍이니까. 그런데 그는 웃으며 그 말을 했다. 그것도 촌뜨기처럼 씩씩하게. 참 희한하게도 그게 정치적 자아도취 따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심으로 내게 전해진 건, 순전히 그 웃음 때문이었다. 난 그때 그렇게, 그에게 반했다.

 두 번째 만남은 그 이듬해 충정로 해양수산부 장관실에서 대선후보 인터뷰로 이뤄졌다. 그 날 대화 역시 잊었다. 기억나는 건 이번엔 진짜 크리스털이었다는 거, 질문은 야박하게 했다는 거 - 그게 그에게 어울리는 대접이라 여겼다. 사심으로 물렁한 건 꼴불견이니까. 그런 건 그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 그리고 이 대목이다.  

 “시오니즘은 국수주의다. 인류공존에 방해가 되는 사고다.”  

 놀랐다. 그 생각이 아니라 그걸 말로 해버렸단 사실에. 정치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안전하지 않은 건 눙치고 간다. 그런데 그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게 현실 정치인에게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닌데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통쾌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이런 남자가 내 대통령이면 좋겠다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그 후 대통령으로 내린 판단 중 지지할 수 없는 결정들, 적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씩씩한 남자였다. 스스로에게 당당했고 같은 기준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난 그를 정치인이 아니라, 그렇게 한 사람의 남자로서, 진심으로 좋아했다.

 

 3. 그래서 그의 투신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 가장 시답잖은 자들에게 가장 씩씩한 남자가 당하고 말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억울하건만, 투신이라니. 그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종일 뉴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담배 한 대를 찾았다는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났다. 에이 씨바… 왜 담배가 하필 그 순간에 없었어. 담배도 없이, 경호원도 없이,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혼자가 되어, 그렇게 가버렸다. 그 씩씩한 남자를 그렇게 마지막 예도 갖춰주지 못하고 혼자 보내버렸다는 게, 그게 너무 속이 상해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러다 어느 신문이 그의 죽음을 사거라 한 대목을 읽다 웃음이 터졌다. 박정희의 죽음을 서거라 하고 그의 죽음을 사거라 했다. 푸하하. 눈물을 단 채, 웃었다. 그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졸렬함이라니. 그 옹졸함을 그렇게 자백하는 꼴이 가소로워 한참이나 웃었다. 맞다. 니들은 딱 그 정도였지. 그래 니들은 끝까지 그렇게 살다 뒤지겠지.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게 해줘서. 한참을 웃고서야 내가 지금 그 수준의 인간들이 주인 행세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뼛속 깊이 실감났다. 너무 후지다. 너무 후져 내가 이 시대에 속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4. 내가 예외가 없다 믿는 법칙은 단 하나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거. 그가 외롭게 던진 목숨은, 내게 어떻게든 되돌아올 것이다. 그게 축복이 될지 부채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만한 남자는, 내 생애 다시 없을 거라는 거.  

 이제 그를 보낸다.

 잘 가요, 촌뜨기 노무현.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PS - 사진 한 장 출력해 붙이고 작은 상 위에 담배 한 갑 올려놨다. 언제 한번 부엉이 바위에 올라 저 담뱃갑을 놓고 오련다.

 

글 김어준·사진 박미향 기자*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