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 |
지역주의 타파,끝내 못이룬 '필생의 과업'
부산시장 선거, 총선 잇단 고배 '바보 노무현'
대통령 되고서도 선거법 개정, 전국정당 꿈
긴장관계’를 택했다. 특히 그가 정치 역정 내내 보여준 보수언론과의 치열한 공방은 그를 가장 ‘노무현답게’ 만든 동력인 동시에, 그의 정치 행보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노 전 대통령과 <조선일보>와의 악연은 정치 입문시기부터 줄곧 계속됐다. 그는 ‘요트를 소유한 자산가’로 자신을 묘사한 1991년 10월 <주간조선> 기사를 왜곡보도라 반발하며 법정 소송 끝에 재판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이듬해 3월 국회의원 선거와 1995년 지방선거에서 경쟁후보들의 공격 자료로 활용되며 그에게 패배의 고배를 안겼다. 2001년 11월 조선일보의 대선주자 릴레이 인터뷰를 거부한 그는 불매운동까지 선언하며 조선에 맞서는 ‘대담한’ 정치행보를 이어갔다.
<동아일보>와의 관계도 순탄치 못했다. 2002년 2월 인천지역 경선 합동연설에서 “동아일보가 내게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 소신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지만 나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고 말해 동아와 대립했다.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도 김대중 정부 시절 언론사 세무조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정치인도 노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보수언론과의 싸움은 역설적으로 보수언론에 염증을 느끼던 지지세력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김유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보수언론과 타협하지 않고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사례란 점에서 의의가 크지만, 그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고 평가했다.
당선 후 노 전 대통령은 법·제도 개선을 통해 보수언론 중심의 공고한 언론구도에 균열을 시도했다. 2005년 1월 신문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신문시장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제어하는 기틀을 놓았고, 신문유통원과 신문발전기금·지역신문발전기금을 만들어 작은 언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정책 혼선 등과 맞물려 그에게는 ‘언론개혁의 전도사’보다는 ‘언론과 무차별적으로 싸우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어졌다. 2007년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은 애초 의도와 달리 ‘참여정부 대 보수언론’의 전선을 모든 언론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4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임명했을 땐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종원 선문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권력화된 언론은 견제하고 약한 언론을 키우며 새 언론질서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기자실 통폐합’에서처럼 기술적인 문제에서 신중하지 못해 ‘소탐대실’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서거 직후 나온 ‘노 전 대통령 언론관’을 평가하는 목소리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민언련은 서거 당일인 23일 성명을 내어 “수구족벌신문과 싸운 최초의 대통령”이라 표현하며 그를 애도했다. 반면 <조선일보> 24일치 사설은 “노 전 대통령 시절부터 홍위병에 가까운 세력들이 시민단체를 가장해 대통령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언론에 전방위 공격을 퍼부었다”며 참여정부 시절을 가시 돋친 언어로 회고했다. 이문영 권귀순 기자*
분권 법치 탈권위..'제왕적 대통령' 청산 온힘
국정원, 검찰 등 권력가관 정치 중립화 추진
MB 취임뒤 과거 회귀
친노 진영을 겨냥한 검찰의 전방위 수사가 진행되던 올해 초, 봉하마을을 찾은 참여정부 한 수석비서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검찰을 그냥 풀어두신 게 잘한 것일까요? 후회하진 않으세요?” 잠시 고심하는 듯하던 노 전 대통령의 답은 간명했다고 한다. “그래도 끝까지 손을 안 댄 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참여정부에서 ‘정치적 독립’을 구가하던 검찰이 자신과 측근들에 대해 ‘먼지털이 수사’를 벌이고, 그 때문에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막힌 현실을 고려할 때 노 전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재임중 집착에 가까운 소신으로 추진했던 ‘탈권위 행보’의 성과를 끝내 부정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임기 5년이 ‘제왕적 대통령제’로 상징되는 권위주의 정치 청산을 위한 고단한 행군이고, 검찰 중립화는 ‘상징코드’였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는 최고 권력자’를 자청했다. 취임 직후 당정분리를 감행했다. 대통령의 집권당 총재직 겸임을 거부했고, 국회의원 공천권과 당직 임명권도 당 지도부에 돌려줬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조성래 변호사를 추천한 것 외에 일체 공천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총선 뒤에는 아예 정무수석실을 폐지했다. 제왕적 대통령이 당 총재로 당무·공천·선거에 전면 개입해 당을 청와대의 하청기관으로 삼았던 권위주의 정치와 결별하고, 당·청이 자율권을 회복하는 새시대를 열겠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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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과 검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화도 추진했다. 측근인 청와대 비서관들조차 “정권기반이 취약한 데 권력기관을 풀어놓는 것은 위험한 승부수”라고 반대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고집스레 그 소신을 관철했다. 국정원장의 주례독대보고를 폐지하는 방식으로 정보기관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법관 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장관에 발탁해 검찰 문민화를 추진하고, 기수파괴 인사 등을 통해 상명하복의 조직문화 개선에 나섰다. 재임중 검찰로부터 대선자금 수사를 받고, 친형과 측근들이 사법처리되는 불명예를 자초했지만 검찰 중립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와대가 ‘내각 위의 내각’으로 군림하는 관행을 거부하고, 청와대를 대통령의 참모 기관으로 바꿨다. 국무총리가 장관 임명 제청권과 내각통할권을 행사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통해 대통령의 권력을 총리와 나눠 행사했다. 대통령이 행정관 등 청와대 하위직 직원과 직접 소통하고, 장관들과 맞담배를 피며 대화하는 관행도 정착되는 듯 했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과거 어느 대통령도 그 권위를 버리겠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노 전 대통령은 과거를 부수기 위해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고 했던 인물”이라며 “새 시대를 열지는 못했지만 구시대의 문제의식을 극복하고자 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탈권위 실험은 절반의 성공일 뿐 한계도 뚜렷했다. 정치는 분리하되 정책은 일치시켜 당·청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당정분리는 당청 엇박자,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립으로 ‘당·청 따로’라는 부작용도 드러냈다.
검찰 등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이나 법치주의 확립 시도는 대통령 개인의 의지와 진정성, 권력기관 내부의 민주주의 확대와 자발성에 기대는 한계 때문에 이명박 정부 취임 뒤 급속히 과거로 회귀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한 핵심 측근은 “검찰·국정원·경찰 등 권력기관 내부의 반발과 정치권의 반대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나 국정원의 보안사범 수사권 폐지 등 정치적 독립을 강제할 제도 개선을 이루지 못한 게 한스럽다”고 말했다.신승근 기자*
‘좌파’ ‘신자유주의’ 협공당한 경제 운용 | |
기득권층 “분배 앞세워 성장훼손” 진보진영선 “신자유주의만 심화” |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복지재정과 사회투자를 꾸준히 늘렸다.”
지난해 2월 발간된 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경제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른바 ‘개방형 복지국가’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 기조는 기득권 계층에게는 ‘분배를 앞세우는 좌파정책’이란 신날한 공격을 받았고, 일부 진보세력한테는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용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은 참여정부의 실용주의 경제정책이 처했던 좁은 입지를 상징한다.
정부 출범 초‘신용카드 사태’는 노무현 정부의 운신 폭을 크게 제약했다. 김대중 정부 때 폭증한 신용카드 대출이 부실로 이어진 것이다. 참여정부는 금융시스템을 신속히 안정시켰지만, 그 후유증으로 2년간 내수가 침체해 자영업자를 비롯한 서민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신용카드 사태로 어려움을 겪은 뒤부터 참여정부는 규제완화와 개방을 통한 성장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법인세율을 낮추고, 수도권 규제 및 환경규제를 완화했다. 반발을 무릅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밀어붙이는 등 동시다발적인 자유무역협정도 추진했다. 적극적인 수출지원 정책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2002년 1626억달러에서 2007년 3705억달러로 5년 만에 갑절 넘게 늘었다. 수출기업들의 실적 호전은 정부 출범초 600대에 머물던 코스피지수를 2007년10월 2000까지 끌어올린 힘이 됐다. 경제성장률도 임기 말엔 5%를 회복했고, 경상수지 흑자기조가 정착됐으며, 원화가치가 회복돼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빈곤층이 늘고 양극화가 심화하는 흐름은 이어졌다. 제조업의 좋은 일자리는 계속 줄고, 서비스업의 저임금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가계 소득이 중위소득의 50%를 밑도는 계층의 비율을 뜻하는 상대적 빈곤율은 2003년 12.1%(비농가 2인 이상 가구)에서 2007년 13.4%로 올라갔다. 비정규직 보호법을 도입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촉진하고 차별을 고치려는 시도를 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시장 흐름에 대응해 참여정부는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역대 어느 정부보다 적극적으로 복지 지출을 늘렸다.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지니계수를 낮춘 정도를 보면, 참여정부 출범 첫해인 2003년에는 0.016에 그쳤으나 참여정부가 마지막으로 짠 예산이 집행된 2008년에는 0.030까지 커졌다. 재분배 정책을 지속한 결과, 2008년 들어 가처분 소득 기준으로 소득분배 지표가 마침내 개선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참여정부가 뿌린 씨앗이라 할 수 있다. 개인회생제도와 이자상한선을 낮춘 것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것이다. 지지층의 기대에는 못미쳤으나,“지난 시기 성장 제일주의, 승자독식이 만들어낸 양극화 문제를 국민적 의제로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최초의 정부”라는 참여정부의 자평에 값하는 부분이다.
부동산 정책은 노무현 전 대통령 스스로가 ‘실패’를 인정한 부분이다. 세계적인 저금리로 은행들이 차입을 늘리고, 가계 대출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가운데 집값이 폭등했다. 혁신도시·기업도시 등 참여정부가 추진한 지역개발정책들은 땅값 상승을 불러왔다. 참여정부는 뒤늦게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와 금융 규제를 통해 집값의 추가 폭등을 어느 정도 막았지만, 집없는 이들의 박탈감을 달랠 수는 없었다.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는 등 보유과세를 현실화하는 정책은 투기 차단에는 기여했지만,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을 샀다. 정남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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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청문회 스타서 ‘서민대통령’으로
“마을 주변에 작은 비석을 세워달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23일 자신을 키운 ‘봉하산’, 바로 그곳으로 돌아갔다. 평지 위에 우뚝 말머리 처럼 솟은 그 산 바위에서 해질 때까지 친구들과 뛰어 놀았고, 소년 노무현이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던 그곳이다. 그가 평생 삶의 항로로 삼아온 ‘도덕’과 ‘원칙’을 기루고 자란 그곳에서 스스로 다시 묻었다. 육체의 소멸보다 고통스런 마지막 삶의 편린들이, 정신의 죽음이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가난’이 키운 산골 소년의 꿈
“지난 일은 언제나 아름답게만 보인다지요”. 노 전 대통령이 1975년 고시계 7월호에 쓴 사법고시 합격기 첫 줄이다. 30세 만학도의 기억을 되감으면 수마에 할퀸 낙동강변의 초가에서 시작된다. 그처럼 ‘가난’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 열쇠였다. 어머니의 치맛자락 속 돈을 훔쳐 하모니카를 사고, 물려받은 누님의 찌그러진 필통이 부끄러워 숨기던 두메 산골 소년은 눈물을 훔치며 ‘가난’을 일기로 썼다. 어찌해볼 길 없는 가난을 원망하면서도,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썼다. 소년은 독학으로 판사가 됐고, 먼훗날 어릴 적 꿈에 없던 대권을 쥐었다. ‘노천재’(유년기)가 ‘돌콩’(어린시절)으로 바뀌고, ‘노변’(청년기)이 ‘노짱’(정치인)이 된 63년의 삶이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우며 자신을 던질 줄 았았던 승부사 노 전대통령은 ‘오뚝이 신화’를 창조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9월1일(음력 8월6일) 봉화산에 안겨 있는 경남 진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노판석(1976년 작고), 어머니 이순례(1998년 작고)씨의 3남2녀 중 막내였다. 아버지가 43세에 본 늦둥이였다.
노 전 대통령이 태어난 봉하마을은 어머니가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게 없다”고 탄식하던 깡촌이었다. 한학을 한 아버지는 “배고파 죽어도 방법을 몰랐고”(형 건평씨), 고구마순과 딸기를 이고 30∼40리 길 마산까지 내다 판 어머니의 생활력이 일곱 식구를 지탱했다. 어려서부터 키가 작았던 노무현은 머리가 좋았다. 6살 때 천자문을 다 외우고 반듯하게 써 읍내까지 유명해졌다. 남이 먹던 밥을 안먹고, 숟가락도 자기 것만 쓰던 응석받이 때다. 노무현은 초등학교 1학년 2등, 2학년 1등, 절대평가로 바뀐 3∼5학년은 우등상, 졸업식날엔 교육감상을 탔다.
성격은 당차고 맹랑했다. 5학년때 교내 붓글씨 대회에선 2등상을 반납했다. 교사였던 아버지 도움으로 시험지를 한 장 더 쓴 학생이 1등을 차지한 것을 거부한 것이다. 6학년때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된 구호는 “작은 고추가 더 맵심더”였다. 학적부에 ‘성인답다’는 표현이 나오고, “사고가 깊고 주관이 강했다”(6학년 담임 신종생씨)는 술회다.
중학교 입학금이 없던 노무현은 “농사나 시키라”는 교감의 비아냥에 입학원서를 찢었다. 자존심 강한 소년이 몸살을 앓은 가난이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부산대 법대)을 나온 큰형 영현씨(1973년 작고)의 담판으로 중학에 들어간 노무현은 1학년 말 다시 학교를 발칵 뒤집었다. 3·15 부정선거를 얼마 앞두고 ‘우리 이승만 대통령’ 작문을 시키자 ‘백지(白紙) 동맹’을 주동, 교무실에 끌려가 반성문 쓰기를 거부하다 1주일 정학을 받은 사건이다.
중학내내 우등상을 탄 노무현은 3학년 1학기 휴학계를 던졌다. “학교엔 몸이 안좋다고 말했으나, 돈 문제가 더 컸다”(고향친구 조용상씨)고 했다. 복싱도 맛들이고, 법률책도 만지작거렸던 그는 전국에서 35명을 뽑는 ‘김지태(당시 부산일보 사장) 장학금’에 응시, 스스로 복학의 길을 뚫었다.
3년 장학금을 받고 유학길에 오른 부산상고는 노무현의 표현대로 “촌놈의 방황기”였다. 1학년때 상위권에 있던 성적은 2학년때 취업반에 들어가며 뒷걸음쳤다. 담배도 배우고, 기말고사때 머리를 자르러 다닌 훈육주임을 피해 도망친 일도 있었다.
인권 변호사의 길
1968년 3월 노무현은 공부를 접고 군에 입대, 원주 1군사령부와 원통의 최전방 을지부대(12사단)에서 근무했다. 당시 대대장 노무식씨(예비역 소장)는 “철야 정보상황병도 하고 대대장 당번병도 했다. 까막눈 동료들과 잘 어울리며 먹물티를 안냈다”고 했다.
제대한 노무현은 다시 고시에 매달렸다. 할아버지 간병차 고향에 내려온 권양숙씨에게 청혼하고, 유명한 ‘담요데이트’ 놀림도 받았다. 공부방으로 가져갈 새 담요를 들고 권씨와 둑길을 걸었는데, 누군가 그걸 보고 “쟤들은 담요들고 데이트한다”고 소문낸 것이다.
‘부역 혐의로 옥사한 장인’과 ‘불투명한 고시생’ 문제로 얽혀 양가가 티격태격한 결혼도 “판사 안하면 어떠냐”는 노무현의 ‘엄포’로 풀렸다. 권씨의 뱃속에 아들이 자라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는 고시에 3차례 낙방했다. 9년간 벗삼던 책상을 물리고 60명의 고시합격자 명단에 실린 날(1975년 3월27일), 집안은 울음바다가 됐다.
77년 첫 부임지는 대전지법이었다. 형사합의부 배석판사로 일하며 호기로운 술자리도 익숙해진 시절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무현은 8개월 만에 법복을 벗었다. 김학만 변호사(당시 부장판사)는 “‘부산가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겝니다’라며 사표를 고집했다”고 말했다. 평생 그와 함께한 측근이자 동료 변호사인 문재인 전비서실장은 “노변은 처음부터 변호사 뜻이 컸고, 가족들도 바랐지만 혹시 아내가 장인 문제로 상처받을까봐 임관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부산에서 개업한 노무현은 한때 1백억원대 소송도 연달아 수임하며 잘나간 조세 전문 변호사였다. 동아대 동아리 학생들과 광안리에서 요트를 배울 당시다.
그러나 1981년 10월 ‘대타’로 맡은 부림사건(대학생 독서서클 검거)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처음 시국사건을 접한 그는 교도소에서 57일간 고문을 당한 한 학생의 시퍼런 몸과 겁에 질린 눈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끔찍하다. 우리 아들도 멀지않아 대학가는 데 이런 사회는 안된다”. 부인 권씨가 전한 그날 밤 남편의 흥분된 목소리다. 사회과학책을 탐독하며 벌인 6개월의 긴 항전 끝에 그는 다음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 참여하며 투사로 탈바꿈했다. 부림사건이 ‘비주류 노무현’의 출발선이 된 것이다.
정치인 ‘바보 노무현’
6년이 흐른 1987년 9월 부산의 반독재시위를 이끌던 노무현은 거제 대우조선 파업에 뛰어들었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석규씨의 사체부검에 나섰다가 근로자들의 임금협상을 지원, 3자개입 혐의가 적용됐다. “잘못했다고 하면 불구속시킬 수 있다”는 검사에게 “정치적 억압”이라고 버티다 구속됐다. 변호사 노무현은 23일 만에 풀려났으나, 그해 11월 검찰의 재차 불구속 기소로 변호사 업무가 정지됐다. 무료 상담을 하며 겉돌던 그는 통일민주당 공천(13대)에 응했다. 그를 추천했던 김광일 변호사는 “재야 몫으로 처음 남구를 제의받은 노무현이 ‘기왕이면 허삼수와 붙겠다’며 동구를 역제의해왔다”고 말했다.
퇴임 1년만에 도덕성 상처 ‘비극’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은 노동위원회에서 성가를 올렸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으로 시작된 ‘격한’ 현대중공업 파업 연설도 현장을 즐겨 찾던 그 당시다. 그는 1989년 봄 답답한 의원 생활에 회의를 품고 사직서를 냈다가 잠적 17일만에 ‘결론없이’ 돌아오기도 했다.
‘정치인 노무현’이 여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것은 1989년말 5공 청문회였다. 정주영 현대 회장을 몰아붙이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5월 광주 자위권 발동’ 연설때 명패를 팽개치며 세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것이다. 말그대로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 ‘청문회 스타’의 탄생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하고, 1991년 통합민주당 대변인 시절 당지도부 만류를 뿌리치고 그의 재산을 ‘과대 보도’한 주간조선에 맞서 이긴 송사도 파장이 컸다. 강자와 대세에 주눅들지 않는 그의 성정이었다. 그때부터 긴 암흑기였다. ‘거리의 투사’로, ‘노변’으로 돌아간 노무현은 부산에서 3차례의 총선과 시장선거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늘 막판에 ‘DJ 깃발’을 들고 맞은 지역바람의 역풍이었다. 그러나 서울 종로(보선)의 금배지를 버리고 4번째 나선 2000년 4·13 총선은 그가 ‘전국적 인물’로 부상한 분기점이 됐다. 낙마후 정치를 떠나려 했던 그에게 찾아온 예상 못했던 반전이다. ‘바보 노무현’이란 애칭과 팬클럽 ‘노사모’가 생긴 것이다. 가슴을 쓰다듬으며 우연히 다시 읽은 ‘링컨 대통령’은 다시 그의 빛이 됐다. 고학으로 변호사가 돼 남북의 반목을 풀어낸 링컨의 길을 한국에서 가겠다는 욕구였다.
‘새 시대의 맏형’이고 싶었던 대통령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친 뒤 2002년 3월 이인제 고문과 맞선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그는 국민참여 정치의 새 길을 열며 대세론을 깬 주역이 됐다.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을 거치며 바닥까지 꺼진 노풍은 7개월의 긴 ‘당내 도전’을 딛고 11월25일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로 부활했다. “갈 사람은 가라”며 버틴 승부사의 역전극이었다. 그의 우직스런 원칙 정치에 ‘바보 노무현’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어린 아들과 딸의 손을 잡은 민초들의 ‘희망 돼지’가 손에서 손으로 감동을 전하면서다. 그는 원칙의 정치인, 도덕성의 정치인, 그리고 정치를 바꿀 정치인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결국 그는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의 깃발을 들고 대선전을 내달린 끝에 2002년 12월19일 16대 대통령선거 가도의 최후의 승자가 됐다. “국민들에게 진 빚을 꼭 갚겠다. 나는 당신들의 소망을 안다”는 약속을 실현할 기회가 ‘노무현’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후는 환희 보다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곧잘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에 양 어깨에 걸린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자, 좌·우로 갈린 한국 정치현실속에서 ‘비주류 정치인’으로서 그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었다.
대선자금 연루 문제와 지지층의 이반 등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2004년 3월 그는 거대 야당들에 의해 헌정사상 국회에서 탄핵당하는 첫 대통령이 됐다. 이는 오히려 야당들에게 역풍으로 작용,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이은 18대 총선에서 과반의 압승을 거두는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우리사회 전 분야에서 이어진 그의 정치 실험은 그의 정치를 점점 힘겹게 만들었다. 여권의 잇단 재·보선 참패에 이은 2006년 지방선거 참패로 그의 정치실험의 동력은 점점 사라져 갔다. 각종 개혁정책속에 민심은 ‘개혁 피로증’을 호소했고, 그 와중에 부동산 가격 급등과 북한의 핵실험 사태까지 이어지면서 국정은 난맥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잇단 청와대발 충격 발언은 민심 이반과 지지율 급락으로 이어졌고, ‘레임덕’이 운위됐다. 급기야 2005년 7월엔 “임기를 단축할 수도 있다”는 충격 발언과 함께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거부 당했다.
여당에서 탈당론이 제기되고, ‘참여정부 실패론’속에 과거 ‘정치적 동지’들은 등을 돌렸다. 2007년 10월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10·4 남북정상회담이 마지막 업적으로 남았다.
말 많고 시끄러운 5년이었지만, 돈 없는 선거를 만든 정치개혁과 ‘깨끗한 정부’는 그리도 그의 ‘상징’으로 남았다. 재임기간 내내 도덕성에 대해선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과 자부심을 보인 결과였다.
2003년 10월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그룹으로부터 11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내가 모른다고 할 수 없다”면서 ‘재신임’이란 승부수를 던지고, 정치권을 혼돈속으로 몰아 넣은 대선자금 수사 때도 “불법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친 것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이권 개입이나 인사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 시키겠다”거나, 친형인 건평씨의 청탁 의혹에는 “힘 없는 시골 노인에게 머리 조아리지 말라”고 일갈했고, 2007년 변양균 전정책실장·정윤재 전비서관의 수뢰 의혹엔 “요즘 깜도 안되는 의혹이 춤추고 있다”고도 했다. 그 연장선에서 임기말 ‘참여정부 실패론’에 대해선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게 없다”, “이 정도면 괜찮은 대통령인데, 국민이 영 눈이 높아 안쳐준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비리의 블랙홀에 빠진 말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대통령 퇴임후 그의 정치인생의 후원자 였던 ‘박연차 게이트’와 함께 허물어졌다. 그의 모든 것을 삼킨 ‘비리의 블랙홀’이었다. 지난달 7일 부인 권양숙 여사의 금품 수수를 고백하면서 “구시대 막내”의 회한은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나타났다. 도덕성 하나로 정권을 만들고, 그것이 권력을 지탱한 뼈대였지만, 결국 ‘검은 돈’이란 한국 정치의 비극적 사슬에 묶인 것이다. 국가 지도자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치명상을 입었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가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그 자신도 지난달 30일 결국 검찰의 ‘포토라인’에 섰다.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에 이어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는 세번째 대통령의 오명이다.
또 친형은 검은 돈을 받아 정치에 까지 개입한 혐의로 영어의 몸이 됐다. 안희정·이광재·서갑원 등 그가 “동지”라며 애정을 보였던 386 측근들이나, 박정규 전민정수석 등 참모들도 모두 비리의 덫에 걸렸다. ‘도덕성’이란 그의 마지막 자존심 마저 무너진 것이다.
결국 그는 검찰 출두에 앞선 지난달 22일 “더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내린 정신적·정치적 사망선고였다. 한때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권력에서 떠난지 불과 1년3개월만에 그는 지상에 그의 거처 한칸을 찾지 못한채 떠났다. “원망 하지 말라”는 마지막 회한이자 당부와 함께 였다.<김광호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서거 했다. 사진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연대별 모습. 위에서부터 어린시절, 변호사 시절, 국회의원 시절의 민주화 투쟁, 5공 비리조사 특위 청문회 활동, 해양수산부장관 장관 재임 시절, 2002년 대선 민주당 후보시절 유세, 16대 대통령 취임식, 국회 탄핵소추 가결 때 청와대 관저에 서, 대통령 재임시절 부산 APEC에서 정상회담, 2007년 평양 남북정상회담, 퇴임 후 사저가 있는 봉하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모습, 박연차게이트 사건 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집중된 후 사저에서 고민하는 모습, 지난 4월 30일 조사를 받기위해 검찰 출두, 23일 오전 투신한 봉하마을 사저뒤의 부엉이 바위. <연합뉴스> *
전 세계 언론들은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긴급 뉴스로 보도했다. 해외 매체들은 대부분 노 전 대통령이 수뢰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아온 사실을 전했으며, 일부 언론은 인권변호사로 출발해 국가지도자에까지 올랐으나 결국 비극적으로 마감한 노 전대통령의 인생역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 역시 서울발 뉴스를 통해 부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던 노 전 대통령이 벼랑에서 추락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신문은 “무명 기업인과 관련된 노 전 대통령의 의혹은 스캔들로 얼룩진 한국 정치에서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보였다”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한국 최대 재벌에게서 수억달러를 수수한 혐의로 구속됐다”고 지적했다.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 등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은 현충일(메모리얼데이) 연휴를 앞둔 금요일 저녁식사 중 급보를 전해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중국 = 중국 매체들은 관영 신화통신이 이날 오전 9시6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타전한 이후 속보를 시시각각 전하고 있다. 신화통신은 노 전 대통령이 이날 새벽 등산하면서 산 아래로 떨어져 병원으로 이송된 뒤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노 전 대통령의 인생역정을 별도 기사로 소개하기도 했다. 일간 신경보는 노 전 대통령이 지난달 ‘수뢰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면서 검찰 수사와 자살이 연관돼 있음을 시사했다. 중국 중앙텔레비전(CCTV)은 이날 뉴스 시간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주요 기사로 내보냈다. 바이두, 시나닷컴 등 대표적 포털사이트들도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다뤘다. 그동안 해외 돈 세탁 혐의로 수감 중인 천수이볜 전 대만 총통과 노 전 대통령을 비교하며 노 전 대통령 수사를 비중있게 보도해온 대만 언론도 서거 소식을 주요 기사로 전했다.
◇일본 = 일본 언론은 이날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일제히 긴급 뉴스로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노 전 대통령이 경남 김해시 외곽의 자택 인근 산에서 추락,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서거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아사히신문은 “노 전 대통령이 등산 중 추락해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경찰이 서거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그는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로 대검 수사를 받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공영방송 NHK는 “노 전 대통령이 자택 인근 산을 오르다가 추락했다”고 서거 사실을 전한 뒤 “노 전 대통령은 친족이 후원자로부터 부정한 자금을 받은 혐의로 지난달 30일 검찰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TBS, 후지TV 등 민영방송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보도했다.
◇유럽·남미·아랍 = 영국 BBC 방송 인터넷판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머리기사로 배치하고, 노 전 대통령의 인생역정과 한국 및 해외 주요 인사들의 애도 메시지도 함께 전했다. 프랑스 최대 민영방송 TF1 등은 노 전 대통령 서거가 한국 사회에 미칠 파장에 주목했다. 러시아의 관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과 브라질 일간 폴랴 데 상파울루 등도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속보로 전했다. 아랍권 방송 알자지라는 인터넷판에서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기자 도널드 커크의 말을 인용해 “노 전 대통령은 북한과의 화해를 위해 투쟁했다”면서 “그는 재임 중 경제상황 때문에 인기가 없었지만,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큰 애도의 물결이 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농사 짓고…손녀와 자전거 타고
ㆍ盧전대통령의 봉하마을 15개월
ㆍ32년만의 귀향 첫날 “야, 기분좋다”
ㆍ관광객 몰려…건평씨 구속후 칩거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열심히 했습니다…. 야, 기분좋다.”
지난해 2월25일 퇴임한 뒤 봉하마을에 내려 온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 주민, 관광객 1만2000여명 앞에서 한 인사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온 대통령이다. 197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고향을 떠난 지 32년 만이다.
손수 농사를 짓고, 손녀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며,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등 소탈한 모습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관심과 인기를 얻었다. 이 같은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기 위해 봉하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줄을 이었고, 마을은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됐다. 최대 하루 2만명이 찾아오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매일 오후 관광객에게 연설을 하거나 함께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2월29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라는 첫 글을 올리며 세상과 공식적인 소통을 시도하기도 했다.
고향인 봉하마을로 귀향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자전거 뒤에 매단 수레에 손녀를 태우고 마을 주변을 달리고 있는 모습(위)과 주민들과 함께 봉하마을 앞 하천에 들어가 집게로 쓰레기를 집어내는 장면. 사람사는세상·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월22일 “앞으로 시간나는 대로 글 올리겠습니다”라며 인터넷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것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수사가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4월7일에는 박 전 회장 로비 의혹과 관련, 홈페이지에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후 권양숙 여사가 부산지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고, 노 전 대통령은 인터넷을 통해 적극 반론을 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러나 4월30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세 번째로 검찰에 소환됐다.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에서 10여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은 노 전 대통령은 밤을 새워 아침 봉하마을로 돌아왔다. 언론에 공식적으로 드러난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난 23일 새벽 노 전 대통령은 고향 뒷산 부엉이바위 위에서 투신, 스스로 세상을 하직했다.
서거 직전까지 ‘민주주의·진보’ 고민하고 연구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는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도, 촛불도, 정권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중략) 결국 세상을 바꾸자면 국민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거 직전까지 민주주의와 진보 등의 주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연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가까운 참모·학자들과 함께 공동연구를 위한 인터넷 카페를 만들기도 했다.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비서관은 27일 국민장 장의위원회 인터넷게시판에 올린 ‘노 대통령, 최근까지 치열한 연구의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히고 인터넷 카페에 올린 노 전 대통령의 글 일부를 공개했다. 양 전 비서관은 “성경륭·김병준·조기숙·이정우·윤태영 등 가까운 참모 및 학자들과 함께 공동연구를 해보자고 제안해 올 초부터 회원전용 비공개 인터넷카페를 운영했다”고 말했다. 또 “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치열한 주제의식과 문제의식을 담은 글 수십개를 의욕적으로 내놓았다”면서 “이런 주제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 활력이 넘쳤다”고 전했다.
이날 공개된 노 전 대통령의 글은 ‘민주주의 역량의 부족에 관한 이야기 자료가 있을까요?’(3월9일)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 ‘세계는 진보의 시대로 가는가? 진보주의의 미래?’(이상 4월13일) 등의 제목이 달렸다. 노 전 대통령의 최근 관심사는 ‘진보주의’였다. 양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은 역사발전에서 국가의 역할과 그 속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 같은 한국사회의 근원적 문제에 깊이 관심이 있었다”면서 “지난해 말부터 진보주의 문제에 천착했다”고 밝혔다.
이날 공개된 4월13일자 글에서 노 전 대통령은 ‘한국 진보주의의 역사’를 짚어보자고 제안하면서 말미에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는 진보 정권이었는가? 제3의 길, 유럽의 진보주의 기준으로 평가해 보자”라고 썼다. 다른 글에서는 “국민의 생각을 바꾸는 데는 미디어가 중요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영향력 있는 미디어는 돈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했다. 이 글에서 노 전 대통령은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막강한 돈의 지배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짜내고 이를 지혜롭게 조직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6일 ‘이제 제가 더 끌고 가기는 어려울 것 같지요?’라는 글을 올렸다.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은 지 일주일이 채 안된 때였다. 노 전 대통령은 “자책골을 넣은 선수는 쉬는 것이 도리일 것이고, 또 열심히 뛴다고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 하지 않고는 버티기가 어려워서” 생각나는 대로 자료를 올리겠다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연구 주제와 관련된 짧은 글을 올렸다. ‘수소경제, 스마트 그리드’ 관련 자료를 찾아보자는 지난 15일자 글이 이 카페에 올린 마지막 글이 됐다.
양 전 비서관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에게 독서와 사색, 연구와 글쓰기는 “생활의 중요한 낙이자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최근까지도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와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읽었다고 한다.
양 전 비서관은 “그러나 거친 상황이 닥치면서 마음이 번잡한 탓에 집중력이 떨어져 독서와 글에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을 힘들어 했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지난 23일 생을 마감했다.
울고 웃고… 생전의 盧대통령 사생활 담은 사진 공개
1 지난해 1월30일 권양숙 여사의 환갑잔치에서 하트모양의 장미꽃을 선물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2 2007년 1월9일 개헌 제안 특별 TV 담화를 준비하며 담배를 피우는 노무현 전 대통령.
3 ‘희망돼지’ 저금통 모금이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리자 2006년 8월27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사모 핵심 멤버와 비공개 오찬을 열고 “힘들다”며 눈물을 짓고 있다.
4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월3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행사를 마친 뒤 잠시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5 2005년 6월14일 청와대 녹지원 행사 도중 아이스크림을 먹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6·7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9월13일 청와대 잔디밭에서 손녀에게 과자를 주는 척 하다가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면서 장난치고 있다. | 국민장 장의위원회 제공
<김진우·김종목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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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에 도착한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대통령을 못 지켰으니 죄인이 됐다”고 자책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진실이 있는데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전직 대통령을 마치 시정잡배처럼 몰아붙였다”며 “그가 자신의 진실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은 그것뿐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부산대병원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마자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만 흘렸고,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이명박 정부가 너무 잔인하다”고 말했다.
이기명 전 후원회장도 “더러운 정치가 한 나라의 대통령을 잡아먹었다”며 “보이지 않는 괴물에 의한 타살”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내가 20년간 곁에 있었는데, (노 전) 대통령은 돈 받을 사람이 아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죽음으로 정치에 엄중 항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오랜 후원자로,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소식을 접하고 “서럽게 통곡했다”고 임정수 변호사가 전했다. 임 변호사는 “‘돈 욕심이 전혀 없던 노 전 대통령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런 선택을 했겠느냐’ ‘이런 세상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강 회장이 접견 내내 울었다”고 전했다.
측근들 사이에서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성격이 곧고 여린 면도 있는 분이시라 이런 치욕을 겪으며 잘 견디실까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까지 될지는 예상 못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허 전 장관은 또 “5월 말쯤에 (측근 가운데) 나이 든 몇 명이 봉하마을에 내려가 보자고 얘기했는데, 너무 아쉽고 경황이 없다”고 말했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서 돌아가신 분한테 너무나 죄스러운 마음”이라며 울먹였다. 김 전 실장은 “오전에 측근들끼리 통화를 했는데 서로들 놀라서 사실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들 울기만 했다”고 말했다.
부산지역 친노 인사들도 충격에 빠졌다. 최인호 전 청와대 비서관은 “너무 큰 충격이라 지금 당장 할 말이 없다. 눈물밖에 안 나온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또 “(노 전 대통령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겠나.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윤원호 전 열린우리당 의원도 “너무 충격적인 소식이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부산지역 전 열린우리당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들의 모임인 ‘희망부산 21’의 강용호 대표는 “오죽했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겠느냐”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과 20년 남짓 정치적 인연이 있는 강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이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고 그런 분이 아닌데 마치 그런 사람인 것처럼 비치니까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이라며 “침통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국외에 머물고 있는 참여정부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충격 속에서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중국을 방문중인 이해찬 전 총리는 이날 오후 인천공항으로 들어와 바로 봉하마을로 향했고, 외국 출장중인 서갑원 민주당 의원도 귀국길에 올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에서 연수중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착잡하다”며 귀국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인 박선원 전 청와대 비서관은 “비통한 심정이다. 유서까지 준비했다니 하실 말씀도 많았을 텐데…”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박 전 비서관은 “비서관으로 재직중 미국에 2007년 12월 마지막 출장을 와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퇴임 후 활동을 정리한 책을 구해 노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처럼 퇴임 뒤에 소박하지만 봉사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했다”고 회고했다. 김수헌 기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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