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신론
신론神論(Theology)은 하나님과 그의 사역들에 관해 논한다.
1. 하나님이 계신 증거
2. 하나님의 속성
3. 삼위일체
4. 예정
5. 창조
6. 섭리
7. 후대 기적의 문제
1. 하나님이 계신 증거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말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다면, 그에 대한 모든 논의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다(히 11:6).
(1) 이성과 경험의 증거
역사상,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여러 가지 합리적 논증들이 제시되어 왔다. 첫째는 우주 혹은 자연만물 자체에 근거한 논증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떤 원인의 결과이며 어떤 결과가 존재하면 그 원인도 존재한다. 우주의 궁극적 원인 즉 제1 원인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우주가 존재하듯이 그 원인이 되는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이것을 우주론적 논증(the cosmological argument)이라고 부른다(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제시함).
둘째는 우주 혹은 자연만물의 목적성에 근거한 논증이다. 집이나 시계 같은 모든 설계된 작품들은 그 설계자의 존재를 증거한다. 우주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떠한 작품보다 더 탁월하고 놀라운 작품이며 그 놀랍고 신비한 질서와 적응성, 예컨대 천체의 질서나 동식물과 사람의 구조 등은 그것을 만드신 지혜로우신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것을 목적론적 논증(the teleological argument)이라고 부른다(소크라테스, 키케로, 필로 등이 제시함).
셋째는 하나님의 개념에 근거한 논증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개념은 완전자라는 개념이다. 자연만물과 사람은 다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완전’이라는 개념 속에는 ‘존재한다’는 성질이 포함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이것을 본체론적 논증(the ontological argument)이라고 부른다(안셈이나 데카르트 등이 제시함).
넷째는 사람의 양심 곧 도덕적 분별력에 근거한 논증이다. 사람 속에는 양심 곧 도덕적 분별력이 있는데, 그것은 그것을 주신 도덕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뿐만아니라, 인류가 역사 속에서 경험한 바대로 선한 자는 잘되고 악한 자는 천벌을 받는다는 관념도 도덕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것을 도덕적 논증(the moral argument)이라고 부른다(칸트 등이 제시함).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이상 네 가지의 합리적 논증들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촬스 핫지(Charles Hodge)는 “[그것들은] 소크라테스 때로부터 현대까지 가장 지혜로운 자들에 의해 건전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말했고(Systematic Theology, I, 203),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우주론적, 목적론적, 본체론적, 도덕적 변론들은 개방되고 편견없는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Studies in Theology, p. 82). 박형룡 박사도 “유신논증들은 큰 가치를 가진 것이다. 성경과 기독교 경험에 의하면, 성령이 사람의 심령(心靈)에 확신(確信)과 회심(回心)을 산출하시는 과정에 논증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논증들 자체들은 아무 사람도 중생시키지 못하나 오히려 전도의 과정에 기구(器具)로 되어 왔다”고 말했다(교의신학: 제2권 신론, 32쪽).
(2) 성경의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전제하고 선포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나 이러한 전제와 선포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시다. 온 우주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이 세상의 어느 것 하나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논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 1:1에 계시되고 선포된 하나님은 무엇에 의해 존재케 되신 자가 아니고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자, 즉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된 원어(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는 직역하면 “나는 ‘나는 있느니라’이니라”이다. 이 말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뜻일 것이다. 헬라어 70인역은 “나는 있는 자니라”(에고 에이미 호 온)라고 번역했고, 영어 성경들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직역하였다("I am that I am"). 한글성경에 ‘여호와’로 번역된 하나님의 히브리어 명칭(예호와)은 ‘있다’라는 동사(하야의 고어 하와)에서 나온 말로서 ‘존재하시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논증들을 인정한다. 시편 19편의 저자는 고백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다(시 19:1-4). 시편 94편 저자는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말했다(시 94:8, 9).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했고(행 14:16, 17) 또 “그[하나님]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다(행 17:24-28). 또 그는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했다(롬 1:19, 20). 히브리서 3:4은 말하기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이런 합리적 논증보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즉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들이 아닐 수 없다. 신명기 4:32-35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神)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 속의 본성의 빛 자체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명백히 선포하지만, 그의 말씀과 성령께서만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를 충분하게 또 효력있게 계시하신다”라고 대답했다(제2문답).
비록 부수적으로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기도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증거한다. 사무엘하 22:47, “여호와는 생존(生存)하시니.” 시편 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예레미야 10:10, “오직 여호와는 참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디모데전서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다. 성도들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산다. 특히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응답하신다. 예레미야 29:12, 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그러므로 비록 부수적 증거이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3) 무신론의 어리석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많은 증거들, 즉 합리적 논증들과 성경의 증거들과 경험의 증거들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래서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했다. 무신론은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무슨 증거를 제시하는가? 무신론은 단지 어리석은 사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인 죄악이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큰 죄악이며 또 그것은 인간의 윤리적 죄악들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시편 14편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말했고(시 14:1) 잠언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난다고 했다(잠 16: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죄악 가운데 내버려두셨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롬 1:28).
2.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속성들에 의해 그를 묘사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속성들(attributes)이란, 하나님께나 그의 하시는 일들에 돌려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는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을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답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열 가지 속성으로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십니다”라고 하였다.
(1)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사람이 그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은 그의 영성靈性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거나 그런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간주된다.
성경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표현이 나오지만(출 3:20; 6:6; 사 37:17),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적 표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그런 표현을 오해하는 것이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했다(요 1:18).
성경은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였다고 기록한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한다(출 24:9, 10).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표현(마 5:8)도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밝아진 영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살아계신 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어떤 개념이나 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영이시다. 그는 인간이 만든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참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라고 증거했고(렘 10:10)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다(딤전 6:16).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상징적 표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심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인격적 존재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우주의 완전자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그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가 사람과 같이 지정의知情意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자이심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감정을 가지시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셨고 사람이 그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를 내어쫓으셨다. 하나님은 역사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손과 팔, 귀와 눈 등의 표현들도 그의 인격성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엡 1: 11). 하나님의 분노와 보응도 그의 인격성의 당연한 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외적인 의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바른 지식과 믿음의 마음, 죄를 미워하고 통회하는 마음, 거룩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2)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체가 무한하심을 증거한다. 시편 145:3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재어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편 139:7-10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오리이까?”고 고백한(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은 옳은 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했고(사 66:1),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증거했다(렘 23:2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라는 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다 품으실 수 있다는, 그러나 그것들을 초월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물질적 몸을 가진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으므로 한 장소에 있으면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신다. 그는 어디에나 계시고(遍在)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無所不在).
물론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下鑑하신다’고 말했다(신 26:15).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신다’고 말했다(왕상 8:30). 역대하 30:27은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성경은 때때로 그가 땅에 내려오셨다고 표현한다(창 11:5). 또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증거되었다(히 11:5; 왕하 2:11). 또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가셨다(행 1:9). 이러한 말씀들은 분명히 그들이 하늘 위로 장소적 이동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영광의 한 처소를 두셨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히 11:16).
하나님은 또한 그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완전하심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무한하시고 선하심이 무한하시다. 즉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점에 부족이 없는 완전충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완전하심은 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그는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가장 사모할 만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영감 중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73:25). 욥기 35:6-8,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홀로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해 완전충족하셔서,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영광도 끌어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향해, 그리고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 위에 지극히 주권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또는 그것들 위에 행하신다.
(3)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셋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것은 그가 시간적으로도 무한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동시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존재하셨던 그는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신다. 천지창조 이전에 존재하신 그는 영원하시다. 욥기 36:26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모세는 시편 90:2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시간은 피조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사실상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시며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약을 받으시지 않고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이며 비시간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90:4은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전前도 없고 후後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찰스 핫지는 말하기를,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그에게 동등으로 또는 항상 현재이다. 그에게 ‘기간’(duration, 시간 흐름의 과정)은 영원한 현재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그가 시작이 없이 영원히 스스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인 혹은 궁극적 원인이시다.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는 자신 이외에 없으시다. 사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여호와’(예호와 혹은 야웨)라는 그의 이름도 그의 영원자존하심을 나타낸다. 이 말은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왔고 그 의미는 출애굽기 3:13, 14의 말씀대로 ‘그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일 것이다.
(4)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넷째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다’라고 말했는데, ‘여상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이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 1:17은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비활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 즉 그가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그의 본체와 속성들의 불변하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뜻과 계획과 작정의 불변하심을 의미한다. 시편 33:11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증거한다. 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증거했다(사 14:24). 하나님은 그가 뜻하신 바를 변경함 없이 다 성취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뉘우치신다,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간혹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예들 들어, 출애굽기 32:14은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했고, 사무엘하 24:16은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했다. 또 요나 3:10은 “하나님이 그들[니느웨 사람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인간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 즉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이며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하심에 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손상시킬 것이다.
무한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은 피조물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독특하신 점들이다. 실상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인간은 영원자존하시는 그 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를 항상 인정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5)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크심은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경도 그의 크신 지혜와 지식을 증거한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욥 12:13), 하나님을 ‘지혜(다임, 지식)가 온전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욥 37:16).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했다(삼상 2:3). 시편 139:1, 2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표현하셨다(마 10:30).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하였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대상은 현실적인 것뿐 아니라 가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은 직각적이며(욥 34:23) 독립적이고 총괄적이며 동시적이며 개별적이고 명확하고 완전하며 불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지식은 그 범위가 전포괄적이므로 전지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며 원형이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본받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사람의 지식의 성격은,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과 달리, 점진적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이고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며 가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식과 구별되는 지혜는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을 응용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최선의 목적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그를 속이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인간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완전하심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6)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여섯째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엘 혹은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있으시고 그의 능력은 전능(全能)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능자’(솻다이)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 , 창 17: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고(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했다(렘 32:17).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눅 1:37).
하나님의 전능은 측량할 수 없는 무제한적 능력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스스로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성질에 모순된 일들을 행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죽으실 수 없고 변하실 수 없고 범죄하실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고(딤전 6:16) 또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으며(딤후 2:13)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라고 말했다(삼상 15: 29).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주권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말(아도나이 )이다(창 15:2). 모세는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고백했다(신 10:17). 다윗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했고(대상 29:11), 여호사밧은,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고 말했다(대하 20:6).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구원에 관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 26).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크신 능력을 믿으며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잠잠히 그를 바라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7)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일곱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모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했다(출 15:11).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카도쉬)는 ‘구별됨, 분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모든 피조세계와 구별되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이 엄위하심은 모든 피조물이 그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시 22:3), 이사야의 환상 가운데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쳤다(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의義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이 도덕적 성결은 인간의 도덕적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8)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여덟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라고 증거했고(스 9:15),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라고 말했다. ‘의로운’(찻디크) 혹은 ‘의’(체다카 )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어떤 기준에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며,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에 항상 일치하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그가 제정하신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할 때 의로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했다(신 6:25).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의로우시다. 그는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행위들을 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이것을 ‘통치적 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의로운 통치자시며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고백했고(시 9:8),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다(딤후 4:8).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보응적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5-8).
특히,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은 복음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 요소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공의의 속성이 없었다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구주 예수께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적 의’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증거했다(갈 3:13).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매우 분명히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땅은 그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죽음과 온갖 불행을 맛보게 되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그 후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성의 유황불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이었다. 그 외에도,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형벌을 가르치고 있다. 그 대표적 몇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레미야 30:23, 24,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진노하신 날에...노하사... 맹렬한 진노로...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 1:2,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9) 하나님은 선하시다
아홉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 106:1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씀했다. ‘선하다’는 개념은 ‘이상理想에 맞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철학자들이 표현했던 대로, ‘최고선’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랑, 은혜, 인자仁慈와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선하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마 5:45).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로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데서 나타났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했고(롬 3:24)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의 형벌과 고통 중에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헤세드, 자비, 인자)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또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자비롭고(라훔)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다(출 34:6).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불순종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그는 자신을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출 34: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썼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물들에 대해서도 선하시다. 그러므로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만유[모든 생물들]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중생(모든 것들, 모든 피조물들)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라고 했다(시 145:9, 15).
(10)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열째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진실이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참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중심과 외적인 표현, 그의 말과 행위가 항상 동일하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참되시다. 그에게는 어떤 거짓도 없으시다. 또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시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함은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기쁨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호와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말했다(신 7:9).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말했다(시 36:5). 시편 89:14은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시편 92:2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했고(롬 3:4) 또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라고 말했다(딤후 2:13). 히브리서 10:23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였다. 심지어 이방인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민 23:19).
이와 같이, 영이심,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이다. 이 열 가지 중,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 즉 하나님의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속성들, 즉 영이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피조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어 주신 속성들, 즉 하나님의 ‘공유적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본받을 수 없지만, 공유적 속성은 우리가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것들이며 또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 등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을 본받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되신 하나님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답은 “하나님께는 세 인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신데 이 셋은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고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한 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1) 한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신구약성경은 온 세상에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6:4,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사야 44:24,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문답은 “한 분 이상의 하나님들이 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해, “살아계시고 참되신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은 그의 본체 혹은 본질의 단일성이라고 이해된다. 하나님의 본체 혹은 본질이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과 활동들의 공통적 주체가 되는 객관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 말에 본체와 본질은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가지는 것 같다. 본질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비교적 추상적 개념이며 본체는 그러한 본질을 가진 구체적 존재를 가리키는 맛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본질 혹은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초대교회의 니케야 신조는 성부와 성자는 같은 본질을 가지신다고 진술했다. 촬스 핫지의 논평대로, 니케야 신조의 ‘같은 본질의’(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은 단지 종류적 동일성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수적인 동일성(numerical identity)도 의미하는 것이며, “만일 호모우시오스가 종류적 동일성의 의미로 해석된다면, 니케야 신조는 삼신론(Tritheism)을 가르칠 것이다”(Hodge, I, p. 460). 또한 초대교회에 작성된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아버지는 영원하시고 아들은 영원하시고 성령은 영원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영원자들이 아니고 한 영원자이시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전능하시고 아들은 전능하시고 성령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전능자들이 아니고 한 전능자이시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2) 세 인격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이 계시며 이 삼위(三位) 혹은 세 인격은 서로 구별되신다. 인격(person)이란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는 이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있는 세 인격은 서로 구별되는 세 개체적 존재이다. 칼빈은 “내가 의미하는 인격은 신적 본체 안의 한 실존 즉 다른 둘과 관계되어 있으나 함께 나눌 수 없는 특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실존이다”라고 말했다(기독교 강요, 1. 3. 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한 하나님 안에 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세 인격 즉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별된 세 인격이시다. 마태복음 3:16, 17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증거한다. 또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본체는 동일하게 세 인격들에 공통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하나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본체는 인격적 특성에 의해 구별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셋이다. 그러나 세 인격은 하나님의 본체와 나란히 있는 어떤 존재들이 아니고 그 본체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본체의 존재 양식이다. 아버지는 참하나님이시요 아들도 참하나님이시요 성령도 참하나님이시다. 각 인격은 하나님의 본체와 동일하고, 만일 두 인격을 합한다 할지라도 하나보다 더 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인격에 하나님의 본체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을 부정한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사벨리우스주의 혹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불리웠다.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소위 ‘성부 수난설’은 이런 사상에서 나온 오류였다.
(3) 아버지
아버지는 세 인격을 대표하는 분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그는 아들과 관계하여 아버지로 언급된다. 요한복음 1:14, “아버지의 독생자.” 요한복음 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요한복음 8:54,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에베소서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4) 아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신성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그것이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에라도 그것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존재적 관계에서 아들이시다.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특히 ‘독생자’(모노게네스 μονοgενής)라는 명칭은(요 1:14, 18; 3:16, 18; 요일 4:9), 비록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외아들이나 외동딸에게도 사용되었지만(눅 7:12; 8:42; 9:38),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다른 여러 구절들도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암시한다(마 11:27; 요 5:18-25 등). 신성은 인격성을 내포하고,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인격적 관계에서 가장 잘 이해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의 ‘말씀’(로고스 λόgος)은 인격성을 가진 신적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 가장 잘 이해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아들은 참된 신성을 가진 자로 이해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아들의 출생은 영원하다고 이해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라고 진술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요 17:5). ‘창세 전’은 시간 세계 이전이며 영원이라는 말로만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영원 전의 출생이라는 생각은 하나님만큼이나 신비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간 세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들의 신성에 결함을 주고 결국 그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출생 관계는 영원적이라고 표현되어야 하며 아들의 영원 출생을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들의 참된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들에게 돌려지는 신적 명칭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이사야 9:6, “그 이름은 . .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요한복음 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디도서 2:1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5:20, “그는 참하나님이시요.”
둘째로, 그가 가지신 신적 속성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셋째로, 그가 행하시는 신적 사역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 외에도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그러하다.
넷째로, 그가 받으시는 신적 존영이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요한계시록 5:12, 13,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이처럼 성경에 풍성히 증거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초대교회 시대의 아리우스주의나 오늘날의 일위신론一位神論(Unitarianism)이나 자유주의는 명백히 이단이다.
(5) 성령
제3위이신 성령은 성경에서 ‘영,’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으로 불린다. ‘영’(루아크, 프뉴마 )은 바람같이, 호흡같이 일하시는 그의 사역의 양식을 나타낸다. ‘성령’은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낸다. 그는 거룩하시며 거룩한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영원함같이,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도 영원적이라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성령의 참된 신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참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의 영이 하나님이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령의 참된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령은 하나님과 동일시되신다. 사도행전 5:3, 4, “네가 성령을 속이고 . .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사도행전 28:25,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둘째로, 성령께서 가지시는 신적 속성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고린도전서 2: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히브리서 9:14, “영원하신 성령.”
셋째로, 성령은 신적 사역을 하신다. 창세기 1:2,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욥기 26:13, “그 신[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넷째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교회 역사상,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령께서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며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내포한다. 더욱이 그의 인격성은 성경에서 그에게 사용된 인격적 명칭과 인격적 특성에서 확증된다.
첫째로, 성령은 인격적 명칭으로 불리우신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6:14). 영은 헬라어에서 중성명사이지만, 여기 ‘그가’라는 말은 남성 지시대명사이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라고 말했다(엡 1:14). 여기의 ‘이는’ 남성 관계대명사이다. 이 말들은 성령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둘째로, 성령은 인격적 특성들을 가지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15:26).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말씀하심을 증거한다(행 8:29; 10:19; 13:2). 사도행전 16:7은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말한다. 바울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했고(롬 8:16) 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했다(롬 8:26). 또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교훈했다(엡 4:30).
초대교회는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 and from the son) 나오신다는 사실에 대해 논쟁하였다. 이것은 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영’ 혹은 ‘아들의 영’으로도 불리우신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1:19,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요한계시록 5:6, 어린양의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
(6) 세 인격 간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시는가? 세 인격은 신적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고 그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지만, 그 인격적 특성과 사역에 있어서 어떤 종속적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삼위 간의 논리적 순서는 아버지-아들-성령이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하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하신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고(요 3:17), 또 성령에 관하여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라고 표현하셨다(요 15:26).
세 인격은 사역에 있어서도 구별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신다. 낳으시는 일은 성부만의 독특한 사역이다. 아들은 낳으심을 받을 뿐이다. 또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신다. 성령은 그들로부터 나오신다. 또한 세 인격은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도 구별되신다. 아버지께서는 만세 전에 택자들을 예정하셨고, 아들께서는 2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택자들의 구속을 이루셨고, 성령께서는 그 구속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셔서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신다. 중생과 성화는 주로 성령께 돌려진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 진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기독교 체계의 중심과 같아서 신학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이 진리가 버림을 당한다면, 속죄와 중생 같은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큰 손상을 당할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은 항상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부정하는 자력 구원사상과 같이 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매우 신비하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적 진술은 하나님의 신비를 만족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라기보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단일신론, 양태론, 삼신론 등)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이것을 믿음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신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교의신학, 2권, 202쪽).
4. 예정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고 또 하시는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은 예정과 창조와 섭리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 중, 예정豫定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과 특히 사람들의 구원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1)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예정하심
하나님은 만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들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의 계획에 의해 모든 일어날 일들을 자유롭고 불변적이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이지 않으시며 피조물의 의지가 침해되지도 않으며 또한 제2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함이 제거되지도 않고 오히려 확립된다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불변적 작정과 의지에 대해 명백하고 충분하게 증거한다. 시편 115:3,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이사야 14:24,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37:26,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萬代)를 명정(命定)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이사야 46:10-1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내가 말하였으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다니엘 4: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성격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우선,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적이다. 창조와 섭리는 논리적으로 작정 후에 그리고 시간 세계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그것은 피조물의 어떤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절대적 행위이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확고히 정해진 계획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도덕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행하신 어떤 전횡적 행위가 아니고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고 선한 뜻에 근거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지극히 거룩하고 선하다.
하나님의 작정의 진리는 세상의 숙명론 혹은 결정론과 다르다. 숙명론은 세상의 모든 일이 미리 결정된 어떤 운명이며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그것을 변경할 수 없다고 믿는 매우 소극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사상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작정은 인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들과 그것들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에스겔 36:37,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요한계시록 22:12,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또 성경은 사람편에서 볼 때 세상에 우연한 일들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룻기 2:3, “[나오미의 며느리 모압 여자 룻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열왕기상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아합]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범위
하나님의 작정의 범위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작정은 우주의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로마서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심지어 인간의 죄 문제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죄와의 관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성경은 사람들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시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과 작정 밖에 있지 않다.
창세기 45:8, [요셉이 형들에게 말함]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사무엘상 2:25,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누가복음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로마서 9:17, 22,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은 흔히 ‘허용적 작정’이라고 표현된다. 이 말은 피조물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 속에 있으나 죄의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음을 나타낸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의 원인자가 되실 수는 없다. 죄는 오직 피조물에게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존재와 그 활동들도 그의 예정 속에 두셨으나, 마귀를 마귀되게 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마귀 자신이다. 마귀는 스스로 타락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셨으나 그 허물과 책임은 하나님께 돌려질 수 없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목적
하나님의 작정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작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사야 48: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1:6, 12, 14, “[예정과 구속과 중생은] 그의[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창조와 구속과 심판의 궁극적 목적도 그러하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2) 사람들의 구원을 예정하심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사람들의 구원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 4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었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었다,” “이렇게 예정된 이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불변적으로 계획되어진 것이며 그들의 수는 매우 확실하고 명확해서 더해지거나 감해질 수 없다.”
선택
사람들에 대한 예정은 선택과 버리두심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 예정의 첫 번째 요소는 선택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5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중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을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은밀한 계획과 기쁘신 뜻에 따라 오직 그의 값 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고; 신앙이나 선행들이나, 혹은 그것들 가운데서 끝까지 견딤이나, 혹은 피조물 안의 다른 어떤 것을 조건들로나 그를 그것으로 이끄는 원인들로 미리 아심이 없이 하셨으며;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셨다.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밝히 증거한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 . .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주신’이라는 헬라어들은 완료시제이며 하나님의 선택이 확정되어 있음을 보인다.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작정된 자’(테타그메노이 τεταgμένοι)라는 헬라어도 완료시제이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에베소서 1:3-5,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 .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성격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행하신 일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 . .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선택은 불변적이다. 요한복음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하나님의 선택은 또한 주권적, 무조건적이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예수께 오는 자 곧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께서 예수께 주시는 자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께 주시는 자 곧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가 예수께 나아와 믿는다. 요한복음 10:26,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양이 아닌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서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로마서 9:15, 16,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만일 선택이 사람들의 회개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 아심(豫知)에 근거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된 많은 구절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말씀이나, 베드로전서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라는 말씀은 소위 예지 예정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명백한 구절들이 주권적 선택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선택 안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구원의 수단들도 포함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셨을 때 그의 뜻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계획에 의해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택하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救贖)되고; 정한 때에 활동하시는 그의 영에 의해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養子)가 되고 거룩해지고 그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된다. 오직 선택된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救贖)되거나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양자(養子)가 되거나 거룩해지거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특히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디모데후서 1:9,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택은 택함받은 죄인들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사역과 인간편에서 전도, 회개와 믿음, 순종 등의 자발적 행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해 오해하기도 한다.
타락과의 관계
선택과 타락의 관계는 어떠한가?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창세 전이므로 타락 전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셨을 때 그들을 죄 없는 상태의 사람들로 보셨는가, 아니면 타락할 자들로 보셨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선택을 창조와 타락의 허용보다 앞에 두어,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셨을 때 그를 무죄 상태의 사람들로 보셨다는 견해를 전택설(前擇說, supra-lapsarianism)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선택하지 않고 버리심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간주한다. 이 견해는 바울의 토기장이의 비유(롬 9장) 등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진리에 근거하며 그 진리에 비추어 다른 견해보다 더 논리적이게 보이고 천사들의 경우에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이 견해는 죄 없는 사람들의 일부를 영원한 멸망에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조화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다른 한편, 선택을 창조와 타락 허용의 작정 후에 두어,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셨을 때 그를 장차 타락할 자로 보셨다는 견해를 후택설(後擇說, infra-lapsarianism)이라고 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선택하지 않고 버리심은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간주된다. 이 견해는 선택이라는 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의 선택이므로 타락을 전제해야 한다는 본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에 비추어 논리적으로 약해 보이는 점이 있으나 전택설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후택설을 취하는 것 같다. 3:7,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지나쳐버리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작정하셔서.” 개혁파 신학의 주류는 후택설이다. 그러나 전택설과 후택설의 문제는 하나님의 깊은 신비에 관계되는 것 같다.
다른 파들의 견해
선택에 대한 다른 파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루터파는 루터의 바른 견해를 저버렸다. 루터 자신은, 칼빈과 동일하게, 인간의 전적 부패와 더불어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을 믿었다. 그러나 루터파 전통은, 그들의 일치신조에 진술된 대로, 어거스틴의 절대 예정의 교리도, 신인(神人)협력설(semi-Pelagianism)도 부정한다. 루터파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중생에서의 성령의 주권적, 단독적 사역을 긍정하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이 은혜를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17세기 초 화란에서 정죄된 알미니우스파(Arminianism)는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이었던 신인협력설로 돌아갔다. 그 파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부정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 후에 나타난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Wesleyan Arminianism)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긍정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 사역으로 인해 모든 사람의 원죄의 죄책과 무능력이 제거되어 이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구원 사역과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무조건적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다.
(3) 버려두심
하나님의 예정의 두 번째 요소는 버려두심(reprobation)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그의 피조물들 위에 가지는 그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지나쳐버리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욕과 진노에 이르도록 작정하셔서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송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
버려두심의 교리는 천주교회, 루터교회의 다수, 알미니우스주의, 웨슬리주의 등의 심한 반대를 받아왔으나,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도르트 신조 등이 밝히 주장하였다. 칼빈의 설명과 같이, “선택 자체는 버려두심과 대조시키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기독교 강요, 3. 23. 1).
증거
선택은 논리적으로 버려두심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가 나머지 사람들을 내버려두셨다는 것을 내포한다. 뿐만아니라,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성경의 많은 말씀은 버려두심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다. 출애굽기는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고 증거한다(출 4:21; 7:3; 9:12; 10:27; 11:10). 신명기 2:30, “여호와께서 그[헤스본 왕 시혼]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여호수아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사무엘상 2:25, “그들[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니라.” 이사야 6:9-10,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 6번이나 인용되었다.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태복음 13:11,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로마서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데살로니가후서 2:11-12,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2:8,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다서 4,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정죄]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두 측면
버려두심에는 두 측면이 있다. 즉 지나쳐 버리심과 정죄하심이 그것이다. 지나쳐 버리심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정죄하심은 적극적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지나쳐 버리신 자들을 그들의 죄에 대해 공의로 정죄하시고 벌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적(法廷的) 행위이며, 그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은 그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게 된다. 사실상,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었으나,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되고, 나머지는 그들의 죄 가운데 그냥 버려져서 그 죄의 형벌을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할 것밖에 없고, 하나님의 지나쳐 버리심을 받고 정죄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의 영광이, 버려진 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이 드러난다.
유기의 진리는 두려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불평거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다 버리셨을지라도 인류는 불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의 진리는 비록 기쁨을 주는 진리가 아닐지라도 모든 신자가 마땅히 믿어야 할 진리이다
결론적으로, 예정의 교리는 사람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사람 자신에게서 나왔느냐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느냐라는 근본적 문제에 관계된다. 역사적으로 이 문제는 어거스틴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 체계와 기타 신학 체계들을 구분하는 주요 논점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색적 문제나 지엽적 문제가 아니고, 실제적 문제요 근본적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어떤 이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가? 구원의 능력이 참으로 하나님께 있는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또한 이 심오하고 신비한 교리가 바르게 가르쳐지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정의 진리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준다. 이 진리는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게 하고 하나님의 공의 앞에 두려움을 가지게 하며 또 그에게 참된 겸손과 흔들리지 않는 위로를 준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한 결심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불변적 예정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한 삶을 위해 부지런하고 성실히 힘써야 한다.
5. 창조
(1) 창조주 하나님
세상 창조는 우주와 인류 역사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대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창 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1은 진술하기를,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태초에 육일 동안에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간에 다 무(無)로부터 창조하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다 매우 좋았다”라고 하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 1, 2장은 시(詩)나 비유의 문체가 아니고 명백히 역사적 서술이며, 또한 역사적 서술의 책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는 이성이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깨닫고 믿어야 할 주제이다.
창조주-“하나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이었다. 삼위 하나님은 창조에서 함께 활동하셨다. 천지 만물은 성부에 의해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성경이 창조의 사역을 주로 성부께 돌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성자와 성령께도 돌린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창세기 1:2,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조하신 때-"태초에"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라는 히브리어(베레쉬드)는 단순히 ‘맨 처음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우주와 인류 역사의 시작을 가리킨다. 우주와 인류 역사는 창조로부터 시작되며 인간의 시간 개념도 창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다. 태초 이전은 시간의 시작 전이며 그것은 곧 영원이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세계는 ‘시간 안에서’ 창조되었다기보다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다.
창조하신 때를 영원 전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창조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태초에’ 창조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 전에 오랜 세월 동안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신 상태로 계셨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단순히 시간의 무한한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無)시간 혹은 비(非)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신다.
창세기 1장에 언급된 창조의 6일은, 비록 어떤 이들이 지질학의 진화론적 가설들의 영향 아래 그것들을 ‘긴 시대들’로 보았지만, 24시간의 ‘하루들’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 이유는, 첫째로 ‘날’(욤)이라는 말의 기본적 의미가 24시간의 하루이며, 둘째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6번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24시간의 하루에 가장 적합하며, 셋째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제7일이 문자적 하루이므로 그 전의 6일도 문자적 하루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창세기 1장의 6일을 24시간의 문자적 하루들로 해석한다면,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 사이에 긴 시대적 간격이 없으며 따라서 창세기 1:1의 ‘태초에’라는 시간은 성경에 근거한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해 추정될 수 있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생애는 아담 후 1948-2123년경이라고 추정된다. 야곱이 130세에 애굽에 내려갔으므로(창 47:9) 그 때는 아담 후 2238년경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었므로(출 12:40) 그 때는 아담 후 2668년경이다. 열왕기상 6:1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요,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 시브월 곧 2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증거했으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의 시작은 아담 후 3148년경이 된다. 솔로몬의 통치 연대를 보통 주전 970-931년경으로 보기 때문에, 솔로몬 통치 4년은 주전 967년경이 된다. 그렇다면 세상의 창조 연대는 거꾸로 계산하면 3148년과 967년을 더한 숫자 곧 주전 4115년경이 된다. 이렇게 계산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는 주전 4115년경이다.
창조의 방법-"무無로부터의 창조"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이었다. 무로부터의 창조란 하나님께서 아무 기존 재료의 사용 없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아무것도, 아무 재료도 없었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세계는 그 자체가 영원하거나 다른 어떤 영원한, 물질적인 것에 의해 존재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 때문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증거한다. 예레미야 10:12,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로마서 4:17,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은 무로부터 온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시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1:3, 6, 9, 11, 14, 20, 22, 24, 26, 29) 혹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1:28)라는 표현이 11번이나 나온다.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말씀]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초두에 ‘말씀’(로고스 λόgος)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창조의 대상-"천지 만물"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단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제목이 아니고, 창조의 시작이다. 즉 그것은 제1일 창조에 포함된다. 원문 2절 초두에 웨 (‘그리고, 그런데’)라는 말과 또 2절에 언급된 땅과 물(‘수면’)은 창세기 1:1의 말씀이 단지 제목이 아니고 첫째날의 실제 창조에 대한 언급임을 증거한다. 또 창세기 1:1을 3절 이하와 분리시켜 생각할 것도 아닌 것은 성경이 천지 만물을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출 20:11).
어떤 이들은 창세기 1:1에 창조된 천지가 천사들의 타락으로 파괴되어 2절의 언급대로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므로 3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재(再)창조 혹은 회복 하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것을 ‘회복설’(restoration theory)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6일을 살펴보면,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하늘 공간, 땅의 원소들과 물, 그리고 특히 빛을 창조하셨다. 아마 천사들도 이 날 창조되었을 것이다(욥 38:4, 7). 창세기 1:2의 땅의 혼돈과 공허, 흑암, 수면 등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처음 상태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먼저 빛(오르)을 창조하셨다.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궁창 곧 하늘을 창조하셨다. ‘궁창 위의 물’이라는 말씀은 오늘날 과학적으로도 이해할 만하다. 지구 대기층에 있는 수증기의 양은 약 54조 4,600억 톤이며, 지구면에 내리는 비와 눈의 매년 총량은 약 30만 km3이어서 지구면을 3미터 깊이로 덮기에 충분하다고 한다(박형룡, 신론, 374쪽).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와 각종 식물들을 창조하셨다. 식물들은 풀과 채소와 과목果木으로 분류되었다. “각기 종류대로“(레미네후 ) 혹은 ”그 종류대로“(레미네후 )라는 표현이 3번 반복된다.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 광명들(메오로드, ‘빛들’) 즉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 어떤 이들처럼 천체天體가 첫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과학적 ‘가설들’에 조화시키려고 성경의 단순한 보도들을 수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물고기들과 하늘에 새들을 창조하셨다. “그 종류대로”(레미네후, 혹은 레미네헴)라는 표현이 2번 더 나온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땅에 각종 동물들, 즉 가축들, 기는 것들, 들짐승들을 만드셨다. “종류대로”(레미나흐 4번, 레미네후 1번)라는 말이 5번 더 나오며, 이와 같이 창세기 1장에서 그런 표현은 모두 10번이나 반복해 사용된다. 모든 동식물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다.
창세기 1장의 내용과 2장의 내용은 서로 충돌되거나 모순된 것이 아니고 서로 보충적이다. 1장은 천지 만물의 창조를 전체적으로 서술하고, 2장은 사람의 창조에 초점을 두어 그것을 자세히 서술한다. 또한 2장은, 1장에 보충하여, 사람 뿐만 아니라 각종 들짐승들과 새들도 흙으로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7, 19절).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의 창조 사역을 다 마치셨다. 창세기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세기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 사역은 다 끝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오늘날도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다.
천사들
천지 만물은 영과 물질의 세계를 다 포함한다고 본다. 시편 148:2, 5은 천사들도 창조되었음을 보인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라고 말한다(골 1:16). ‘보이지 않는 것들’은 천사들의 세계를 가리키고 ‘보좌들, 주관들, 정사들, 권세들’이라는 명칭들도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천사들은 하늘의 거주자이므로 아마 첫째날 하늘과 함께 창조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실 때 천사들은 이미 하나님 주위에서 찬양하고 있었다. 욥기 38:7,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천지 창조 이전은 영원이므로, 천사들이 창조의 6일 이전에, 즉 영원 전에 창조되었다고 볼 근거나 이유는 없다.
천사는 영적 존재, 즉 영이다. 히브리서는 모든 천사들이 봉사하는 ‘영’이라고 증거한다(1:14). 천사는 영이므로 물질적 몸이 없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남녀의 구별도 없고 결혼하는 일도 없다. 누가복음 24:39,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골로새서 1:16,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마태복음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물론 이 말씀은 사람이 영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상 천사가 때때로 사람처럼 나타나 말하고 행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임시적,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또 천사는 제한된 공간 안에도 많은 수가 들어갈 수 있다. 마가복음 5:9,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그 귀신들이 한 사람에게서 나와 2천 마리 돼지떼 속에 들어간 것을 보면, 한 사람 속에 2천 명의 천사들이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천사들은 뛰어난 지혜와 지식을 가지며 도덕성을 가진다. 이성적, 도덕적 성격은 영의 특질이다. 마태복음 24:36,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누가복음 4:34,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베드로전서 1:12,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마가복음 8:38,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에베소서 6:12,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특히 천사들은 능력이 많다. 시편 103: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베드로후서 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데살로니가후서 1:7,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실 때.” 사도행전 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사도행전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 . .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에베소서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엡 3:10; 골 1:16도 비슷함). 에베소서 2:2,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요한계시록 13:2, “용[사탄]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천사들의 수는 매우 많다. 그들은 천군天軍 즉 하늘의 군대이다. 요한계시록 5:11,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그들은 몇 부류로 나뉘는 듯하다. 그룹(케룹)은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로 나타난다. 창세기 3:24,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출애굽기 25: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시편 18: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스랍(세라핌 )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로 나타난다(사 6장).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드로노이 θρόνοι, 퀴리오테테스 κυριότητες, 알카이, 엑수시아이) 등의 명칭들(골 1:16)은 천사 세계의 어떤 권위의 등급을 보이는 것 같다. 가브리엘과 미가엘 등은 천사들 가운데 어떤 개인을 가리키는 듯하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직무를 가진 듯하며(단 8, 9장; 눅 1장), 미가엘은 천사장으로 불리운 자로서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 천사로 나타난다(단 10장; 유 9; 계 12:7). 요한계시록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천사의 직무는 첫째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일이다. 이사야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또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을 한다. 시편 103:20-21,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특히, 천사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다. 스가랴서에는 여러 번 ‘내게 말하는 천사’라는 표현이 나온다(1:9, 13, 19; 2:3; 4:1, 4-5; 5:5, 10; 6:4). 또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 창세기 19:1,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창세기 19:13,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려 보내셨나니.”
또한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한다. 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봉사하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시편 34: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편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마태복음 18:10,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사들이 성도들을 위한 봉사자이므로 사람이 그들을 숭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한계시록 22:8-9,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2)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완전 충족하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통해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영광을 온 우주에 나타내기를 원하셨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60:21,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피조물들의 행복, 특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행복은 단지 창조의 부수적 목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라는 목적만이 실제로 창조 세계의 현실에 맞다. 피조물들의 일부는 현실적으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은 피조물의 행복과 불행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은 각각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의 영광을 나타낸다.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해서, 창조가 단순히 하나님의 이기적 행위이거나 그의 어떤 결핍을 보충하는 행위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완전 충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창조를 부정하는 이론들
창조를 부정하는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첫째로, 물질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는 생각이 있다[물질영원설]. 우주의 근원을 물질에서 찾는 유물론이나 우주에 하나님 혹은 정신과 물질의 두 영원한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이원론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신적이지도 자존적自存的이지도 못한 물질이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이성적으로도 불합리하다. 성경은 물질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밝히 가르친다.
둘째로,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포함하여 우주가 신에게서 유출되었으며 그 둘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있다[유출설]. 그러나 하나님과 피조 세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한자와 유한자의 차이는 무한하다. 유출설은, 만물이 신이라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에 불과하다.
셋째로, 물질영원설에 근거하여 생명이 자연 발생하여 가장 단순한 종류로부터 점점 더 복잡한 종류들로 진화되었다는 생각이 있다[진화론].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물질영원설은 이성적으로도 불합리하며, 또 생명의 자연 발생이나 진화의 생각들은 결코 확실한, 객관적 근거를 가진 과학적 이론이 아니고 가설적 신념들에 불과하다. ‘종種들의 기원’에 관한 촬스 다윈의 명제들은 어느 것 하나도 증명된 것이 없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는 가정은 단 하나의 실례도 없다. 더욱이, 인간의 독특성인 인격성, 도덕성, 종교성 등은 진화의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우주와 생명들의 기원과 그 움직임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큰 신비이다(박형룡, 352쪽).
넷째로,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자연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진화론을 둘 다 믿어보려는 타협적 생각이다. 이것을 유신진화론有神進化論(, theistic evolutionism)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는 진화의 개념과 결코 조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화론 자체도 증명되지 않은 혹은 증명될 수 없는 순전한 가설에 불과하다. 유신진화론이란 박형룡 박사의 표현대로 ‘매우 위험한 잡종’에 불과하다(박형룡, 385쪽). 우리는 성경을 믿고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창조를 믿는다.
6. 섭리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1문답은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위들에 대한 그의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1은 진술하기를, “만물의 크신 창조자 하나님은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해 그의 무오한 예지豫知와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적인 계획을 따라 모든 피조물들과 그 행위들과 일들을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붙드시고 지도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셔서 그의 지혜와 능력과 의와 선과 자비의 영광을 찬송케 하십니다“라고 하였다.
(1) 섭리의 요소와 범위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두 요소는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보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단순히 자연법칙에 맡겨두시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또 계속적으로 보존하신다. 느헤미야 9:6은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또 시편 36:6은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라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고 말씀하시고(마 5:45), 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고 말씀하신다(마 6:26, 28). 사도 바울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고(골 1:17), 히브리서 1: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연 만물을 통치하신다. 구약성경에서 빈번히 하나님을 ‘주’ 혹은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주권과 통치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잘 증거한다. 시편 103:19은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모든 것]를 통치하시도다”라고 증거한다. 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예수의 말씀(마 10:29)은 심지어 보잘 것 없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지극히 작은 일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되지 않는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특히, 하나님의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행위들과 일들을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신다. 다니엘 4:17은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한다. 잠언 16:9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2) 섭리의 방식
일반 섭리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필연적 법칙들과 인간들의 자유와 심지어 우연한 일들까지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2은 진술하기를, “비록 모든 일들은 제1원인이신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과의 관계에서 불변적이고 무오하게 일어나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 그는 제2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것들을 필연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혹은 우연하게 일어나게 정하십니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자연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8:22). 잠언 10:4의 증거대로,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 또한,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종 바울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뱃사공들을 사용함으로써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다(행 27:31).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계획과 소원과 행동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사람들은 기계가 아니고 자유로운 인격자들이다. 잠언 16:9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잠언 21:1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洑, 강)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한다. 또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고 말한다(빌 2:12-13).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우연한 일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룻기 2:3은 모압 여자 룻이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고 말하는데, 그로 인해 룻은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 또 열왕기상 22:34에 보면,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왕 아합의 갑옷 솔기를 쏘았는데, 그로 인해 아합은 죽고 엘리야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자연적 수단들이나 사람들의 자유로운 계획과 소원과 행동이나 심지어 우연한 일들까지도 사용하여 섭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은, 자연 법칙들만 믿는 생각(자연신론)이나 모든 일을 우연으로 돌리는 생각(우연론)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한 생각들에는 인격적 하나님이 없다. 또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맹목적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운명론)과도 전혀 다르다.
기독교는 결코 소극주의나 정적주의靜寂主義가 아니다.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자발적 노력과 하나님의 섭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기도하며 일하고, 일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지만, 또한 동시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 우리는 주 하나님을 믿는 동시에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아는 자의 태도이다.
특별 섭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특별한 방식으로 섭리하기도 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3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반적 섭리에서 수단들을 사용하시지만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것들 없이, 그것들을 초월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역행하여 자유롭게 활동하십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 섭리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즉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물질세계에서 제2원인들이나 자연 법칙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일을 가리킨다.
기적은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기적은 결코 이상하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단지 기적이 자연 법칙을 어긴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려치 않는 잘못된 생각과 태도이다. 비록 현재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기적이 어떤 미지의 고등한 자연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많은 기적들을 증거한다. 기적을 표현하는 성경의 세 단어는 능력과 기사와 표적이다. 사도행전 2:22,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능력’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신적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이며, ‘기사(奇事)’는 사람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엘리사는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왕하 6:6).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 던지웠으나 불이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옷 빛도 변하지 않았고 불탄 냄새도 없었다(단 3:27).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다(마 14:18-21). 이것들은 다 자연 법칙들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놀라운 일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상 기적들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표적’(표, sign)이라는 말의 뜻대로,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명기 4:35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리고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기적들을 주신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증거한다. 사도행전 2:22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이었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도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일들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2:4은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복음을] 증거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주로 네 시대들에 기적들을 주셨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시대로서 이스라엘 종교와 구약 교회의 기초가 확립된 시대이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들을 주셨고 그것들을 책들에 기록하게 하셨다.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들은 구약성경의 기초가 되었다. 둘째는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로서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 배교(背敎)했던 시대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심히 쇠약해졌고 이방인들이 의지하고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널리 유행하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참하나님 되심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하셨다. 셋째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시대로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다 나라가 멸망하여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생활하던 시대이었다. 또 다시 하나님의 지식이 쇠하고 이방인들의 신들이 참하나님보다 크게 보였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자신이 온 세상의 주관자요 참신임을 증거하셨다. 마지막인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시대로서 하나님께서 구약에 예언하신 메시야를 보내신 시대이다. 메시야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셨다. 이보다 더 큰 계시는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었다. 또 그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그에 관한 사실들, 즉 그의 신성과 속죄 사역이 기록되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 하나님의 기적들이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 섭리와 죄 문제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관계된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다(마 10:29).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사람들의 죄까지도 섭리하신다. 이 사실은 신비한 일이어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서 인간의 죄 문제까지도 섭리하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창세기 45: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출애굽기 4:21, “그러나 내가 그의[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열왕기상 22:23,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욥기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죄의 책임이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므로 결코 죄의 조성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들을 그의 주권적 섭리로 허용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들의 책임을 둘 다 긍정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4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이 그의 섭리에 크게 나타나, 섭리는 심지어 최초의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다른 모든 죄들에까지 미치는데, 단순한 허용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와 함께 자신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다양한 처리 방식으로 지극히 지혜롭고 강력하게 그것들을 제한하시고 다른 경우들에는 그것들을 정하시고 통치하심으로써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고 의로우셔서 죄의 조성자나 승인자이시지도 않고 이실 수도 없습니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6은 이렇게 말한다:
의로우신 심판자로서 하나님께서 이전의 죄들 때문에 어둡고 강퍅케 하신 저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에 관하여는, 그가 그것으로 그들의 이해를 밝히시고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셨을지도 모를 그의 은혜를 단지 그들에게 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은사들을 때때로 거두어 가시고 그들의 부패성이 죄의 기회로 삼는 대상들에게 그들을 드러내시며; 게다가 그들을 그들의 정욕들과 세상의 시험들과 사탄의 권세에 내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들 아래서도 자신들을 강퍅케 하는 일이 생깁니다.
(4) 섭리의 목적
하나님의 섭리는 일차적으로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속죄 사역을 이루게 하셨고 성령으로 그들을 부르셔서 중생케 하시고 회개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심령으로 거룩하게 되도록 변화시키신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때때로 성도의 죄를 허용하심도 그의 유익을 위함이다. 성도는 이러한 죄와 실수를 통해 자신의 죄악성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더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한다. 택함받은 자들의 구원과 영적 성장이 가장 큰 선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연합체인 세계적 교회를 완전하게 세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의 교회를 보살피며 모든 일을 그것에 유익하도록 처리하신다. 로마서 11:25, 26은,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놀라운 예언을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포함한 하나님의 세계적 구원 계획을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계적으로 모든 택한 자들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섭리의 중요한 한 목표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세계와 인류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의 구원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1:36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세상의 모든 일은 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한다. 잠언 3:5, 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16:3, 9,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범사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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