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성경에 대하여
1. 성경의 정경正經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뿐이다. 이 66권은 신앙생활의 규범이라는 뜻에서 ‘정경正經(canon)이라고 불린다.
(1) 구약의 정경성
정통적 유대교에 의하면, 구약 39권은 최종적으로 주전 5세기경 에스라와 대공회원들에 의해 수집되고 결정되었다. 주후 1세기 경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증거하기를, 에스라의 생존시 아닥사스다 롱지마누스 통치 때(주전 464-424년) 정경이 완성되었고 그 이후엔 선지적 말씀 사역이 중지되었으므로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책들이 없었다고 했다. 탈무드는, “후기의 선지자들인 학개, 스가랴, 말라기 후 성령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셨다”고 기록한다.
우리는 정통 유대교의 전통을 받아들인다. 에스라 시대는 율법들과 선지서들과 성문서들을 다 수집하기에 적합한 때이었다. 또 ‘율법에 익숙한 학자’(스 7:6) 에스라는 성경을 수집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주후 100년경 잠니아 회의에서 정경성의 문제가 토론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구약 정경이 그 때까지 확정되지 않았다는 추측은 타당하지 않다. 정경성을 의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정경이 확정되지 않은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교가 구약 39권만 정경으로 확정한 것은, 그것들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들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의 말씀들을 받았고 그 말씀들을 신실하게 전달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와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셨다(민 12:6-8). 선지자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말했다(왕상 22:14).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명백히 구분되었다. 참선지자는 경건한 자들에 의해 즉시 인정되었고 그의 글은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즉시 인정되었다. 거기에는 오랜 사색과 변론이 필요치 않았다. 신약 교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증거가 추가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구약 39권 외에, 외경外經(Apocrypha)이라고 하는 13권의 책들이 있다. 그것들은, 토비트, 유딧, 에스더, 지혜서, 집회서, 바룩, 세 아이들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마카비 1서, 마카비 2서, 에스드라 1서, 므낫세의 기도 등이다. 외경은 대략 주전 300년부터 주후 100년 사이에 기록된 것들이다. 외경은 신구약 중간 시대의 유대교 사상을 반영한다. 거기에는 우상숭배의 사라짐, 유일신 신앙의 성장, 메시야 소망, 부활과 미래의 보상과 형벌에 대한 신념 등이 나타나 있다.
천주교회는 종교개혁 후 트렌트 회의에서 1546년 구약의 에스드라 1, 2서와 므낫세의 기도를 제외하고 모든 외경들을 정경에 포함시켰고, 제외된 3권은 부록으로 포함되었다. 1870년 천주교회의 제1 바티칸 회의는 트렌트 회의의 결정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외경들을 영감된 성경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은, “보통 외경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성경의 정경(正經)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도 갖지 못하며 다른 인간적 글들보다 다른 것으로 인정되거나 사용될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하였다.
개신교회가 외경들을 정경에서 제외시키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정통 유대교는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치 않았으므로 히브리어 성경은 외경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주후 2세기 유대인의 탈무드 바바 바드라(Baba Bathra)는 거룩한 책들의 목록에 오늘날 우리의 39권만 포함하였다. 주후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아피온 반박에서 동일한 목록을 언급하였다(I. 8; Green, pp. 119-120).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정통 유대교의 정경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 권위 있게 인용하셨다(마 4:4; 22:29; 요 5:39; 10:35).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다고 말했고(롬 2:1-2) 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성경으로부터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셨으나, 외경으로부터는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았다.
셋째로, 초대 교회는 구약 39권만을 영감된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주후 2세기, 사르디스의 감독 멜리토는 오늘날 우리의 구약 39권과 거의 같은 목록을 증거하였다. 단지 에스더서가 생략되어 있다. 같은 시대에, 옛 수리아어역은 오늘날 우리의 39권만 가지고 있다(Green, p. 162). 주후 3세기, 헬라 교부 오리겐은 우리와 같은 구약 정경을 증거하였다(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VI, 25). 윌리암 그린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우리는 2세기와 3세기에 멜리토에게서와 옛 수리아어역에서 동방 교회의 증거들과, 오리겐에게서 헬라 교회의 증거와, 터툴리안에게서 라틴 교회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다 합쳐서 개신교회의 정경을 인정하고 외경을 배제한다”고 하였다(Ibid., p. 164). 4세기 이후에는 증거들이 더 풍부하다.
넷째로, 외경은 내용상 역사적 진실성, 성경과의 조화, 도덕적 표준 등에 있어서 결함을 가지고 있다. 토빗과 유딧은 지리적, 연대적 오류들을 가지고 있다. 그 책들은 미신을 조장하고 거짓말을 정당화하며, 구원과 죄 용서를 공로적 행위에 의존시킨다. 솔로몬의 지혜는 유출설(流出說)과 영혼들의 선재, 선재하는 물질로부터의 세상 창조 등을 주장한다. 집회서는 구제가 죄를 속한다고 말하며 노예에 대한 잔인함이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한다. 바룩에는 잘못된 역사적 진술들과 하나님께서 죽은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이 있다. 마카비 1서에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들이 있고, 마카비 2서에는 전설과 우화, 또 자살의 정당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들과 예물 등이 나온다(Green, pp. 195-200; Unger, Introductory Guide, pp. 108-12).
외경 외에 가경假經(Pseudepigrapha) 혹은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s)이라고 하는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은 대략 계시, 전설, 시, 교훈 등으로 분류된다. 계시에는 에녹서, 바룩의 계시, 모세의 승천, 이사야의 승천, 스바냐의 계시 등이 있고, 전설에는 아담의 언약, 열두 족장의 언약, 욥의 언약, 솔로몬의 언약, 노아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등이 있다. 시에는 솔로몬의 시 등이 있고, 교훈에는 모세의 마술서, 마카비 3서, 마카비 4서 등이 있다. 그러나 가경이라는 책들은 교회 안에서 권위 있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2) 신약의 정경성
사복음서들과 바울 서신들 등 신약의 대다수는 기록된 즉시 신적 권위를 가진 영감된 책들로 인정되었으나 어떤 책들은 전체 교회의 인정을 받는 데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그 책들을 직접 받지 않았던 지역들에서 그것들의 사도적 저작성 혹은 승인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2세기 이전에 수리아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인 페쉬타 수리아어역은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책(22권)을 포함하였다. 또한 2세기의 옛 라틴어역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3권만 생략하였다. 주후 325년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정경 문제에 관계된 책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① 보편적으로 인정된 책(호모로구메나)-네 복음서들, 사도행전, 바울 서신들, 요한일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 ② 논쟁된 책(안티레고메나)-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③ 거짓된 책(노다)-바울의 행전, 베드로의 계시록, 바나바의 서신 등 많은 수의 외경 복음들, 사도행전들, 서신들, 계시록들(Eusebius, III, 25). 그러나 주후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모든 서방 교회들은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수납하고 확인하였고, 주후 500년경 동방의 모든 교회들도 그러하였다.
교회가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근거는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내용이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며 그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그는 구약 예언들의 성취로 오셨다. 구약의 특별계시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약 예언들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내용인 신약은 하나님의 책으로 인정되었다.
둘째는 사도성이다. 주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사도들은 그로부터 말씀 전파에 대한 특별한 명령을 받았고(마 28:16-20) 또 주께로부터 성령에 대한 특별한 약속을 받았고(요 14:26; 16:13) 또 주께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특별한 능력의 표를 받았다(마 10:1). 사도들의 역할과 권위가 이러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한 내용들과 그들이 기록한 책들은 신적 권위를 가졌고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는 사도들이 직접 쓰지 않았지만, 사도들의 인정을 통해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베드로의 동역자였다(벧전 5:13). 전해진 바에 의하면, 그는 베드로의 통역자였다. 마가는 또한 바울의 동역자이기도 하였다(딤후 4:11).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 역시 바울의 동역자였다(골 4:14; 딤후 4:11). 오리겐에 의하면, 마가는 베드로가 그에게 설명한 대로 복음서를 썼고, 누가복음은 바울이 추천한 복음서이었다(Eusebius, VI, 25). 그들의 책들은 베드로와 바울의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히브리서는 확실히 사도 바울의 권위 아래 받아들여졌다. 히브리서 13:23에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는 말씀은 히브리서 저자가 디모데와 가깝고 따라서 바울이거나 바울이 잘 아는 인물임을 보인다.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것 같다(마 13:55). 그렇다면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이었고 사도적 인물이었다(행 15:13; 갈 1:18- 19). 바울은 갈라디아서 2:9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라는 표현을 하였다. 유다서의 저자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하였다(유 1). 그 책은 야고보의 권위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이, 신약은 사도들이 직접 썼거나 그들의 인정을 받은 책들이었다.
셋째는 영감이다.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어 성령으로 가르치고 전파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교훈과 글들은 사람의 견해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들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40에서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했고 고린도전서 14:37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15-16에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바울의 편지들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의 책들로 간주했음을 보인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2:18-19에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썼다. 주후 95년경 로마의 클레멘트는 기록하기를, “복된 사도 바울의 서신을 들고 보라.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에 그가 무엇을 너희에게 썼는가? 그는 참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너희에게 썼다”고 하였다.
넷째는 보편성이다. 초대 교회들은 신약 책들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몇 권의 책들이 어떤 지역들에서 변론되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일찍부터 인정을 받았고, 4세기말에 와서 서방 교회는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인하였고 500년경 동방교회도 그러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보편적 인정은 2천년의 시대적 간격을 가진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이, 신구약 66권의 책들은 교회에서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규칙으로 인정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0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에 의해 모든 종교상의 논쟁들이 결정되어야 하며, 그에 의해 모든 회의들의 작정들, 고대 저자들의 견해들, 사람들의 교리들, 개인의 정신들이 검토되어야 하며, 그의 선고를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최고의 심판자는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뿐이시다.”
2. 성경의 본문(Text)
성경 원본의 무오성無誤性의 교리는 성경 본문(text)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특히 신약성경의 본문에 있어서 오늘날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다.
(1) 본문의 자료들
사본들
신약성경의 원본은 아마 두루마리 형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후 2세기 전반부에 파피러스 묶음인 책 형태가 나타났다. 이것을 코덱스(codex)라고 부른다. 사본 재료로는 1-4세기에는 파피러스를 사용했고, 4세기 이후에는 송아지나 영양의 가죽(vellum)이나 양과 염소의 가죽(parchment)을 사용하였다. 사본의 서체는 초기에는 투박한 대문자(Uncial 혹은 Majuscule)만 사용되었으나, 점차 미끈한 소문자(Cursive 혹은 Minuscule)가 사용되었다.
신약 사본은 2001년 현재 파피러스 사본 116개, 대문자 사본 300개, 소문자 사본 2,818개, 성구집 사본 2,281개로 도합 5,515개이다.
파피러스 사본들 중에는, 체스터 베티(p45, p46, p47)와 보드머(p66, p72, p75)가 가장 관심을 끌고 있다. p45는 4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일부이며 주후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p46은 바울서신 사본으로 주후 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p47은 요한계시록 9:10-17:2의 사본으로 주후 3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p66은 요한복음 사본으로 주후 200년경의 것이다. p72는 베드로전후서와 유다서 사본으로 주후 3, 4세기의 것이다. p75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사본으로 주후 3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자 사본들 중, 시내산 사본(א, Codex Sinaiticus)은 신약 전체의 사본으로 주후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바티칸 사본(B, Codex Vaticanus)은 신약의 거의 전부(히 9:13 이하, 딤전후, 딛, 몬 없음)의 사본이며, 주후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리아 사본(A)은 신약성경 전체의 사본으로 주후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마태복음 1:1-25:6; 요한복음 6:50-8:52; 고린도후서 4:13-12:6이 빠져 있다. 에브라임 사본(C)은 데살로니가후서와 요한이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책의 사본으로 주후 5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베자 사본(D)은 4복음서, 사도행전, 요한삼서 일부의 사본으로 왼쪽 면은 헬라어 본문, 오른쪽 면은 라틴어 본문으로 되었고, 5-6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역본들
옛 라틴어역(이탈라 it)은 주후 2세기경에 번역되었다고 보며, 약 30개 이상의 사본이 있다. 복음서 사본들 중, ita는 4세기, itb d e ff2 g ith i k등은 5세기 것으로 본다. 라틴어 벌케이트역(vg)은 주후 4세기 말 제롬에 의해 번역되었고, 오랫동안 서방교회의 표준적 성경이 되었으며, 8,000개 이상의 사본이 있다.
수리아어 페쉬타역(syrp)은 수리아 교회의 표준 성경으로서 주후 2세기경에 번역되었다고 보며, 250개의 사본이 있다. 수리아어 시내산 사본(syrs)과 큐레토니안 사본(syrc)은 4세기 것으로 본다.
콥트어 사히딕 역(copsa)(남부방언)과 콥트어 보하릭 역(copbo)(북부방언)의 연대는 주후 4-5세기로 본다. 보하릭 역은 애굽 교회의 공식 성경이다. 아르메니아어 역(arm)도 아마 주후 3, 4세기에 번역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사본들은 주후 4-5세기의 것으로 본다.
교부들의 글들
2, 3세기의 교부들 가운데서, 헬라어 저자들 중에, Irenaeus (2세기), Diatessaron of Tatian (2세기), Clement of Alexandria (215년 이전), Origen (253/254년) 등과, 라틴어 저자들 중에, Tertullian (220년경), Cyprian (258년) 등이 중요하다고 본다.
두 종류의 본문
신약성경의 헬라어 본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전통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평본문이다.
전통본문
전통본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헬라정교회]가 옛날부터 사용해온 본문으로서 비잔틴 본문 혹은 다수 본문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이 본문은 주로 9세기부터 11세기의 사본들에 근거해 있다. 현존하는 5,000개 이상의 사본들 가운데서 최소한 85% 이상이 여기에 속한다.
중세시대가 끝나고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인쇄술이 발명되었을 때 교회 안에서도 원문성경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1516년 에라스무스는 최초로 헬라어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 후, 로버트 스테파누스가, 또 그 후에 칼빈의 제자 데오도르 베자가 이어서 헬라어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 후, 스테파누스의 제3판(1550년)과 제4판(1551년), 및 베자의 제4판(1598년)은 표준적인 전통본문 헬라어 성경이 되었다. 영어 킹제임스역(KJV)성경(1611년)은 이런 헬라어 성경들에 근거하였다.
1633년에 엘저비어의 헬라어 성경이 나온 이후, 그 본문은 Textus Receptus(TR)(Received Text), 즉 공인(公認)본문 혹은 전수본문이라고 불리었다. 스테파누스판, 베자판, 엘저비어판의 본문은 본질적으로 같으며, 로마서 16:25-27과 요한일서 5:8 등 몇몇 곳의 두드러진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헬라어 다수사본의 본문(Majority Text)과도 본질적으로 같다. 우리는 이 전통본문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과 그들의 인가(認可)를 얻은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신약성경의 원본의 본문이라고 믿는다.
비평본문
비평본문은 시내산 사본(א)이나 바티칸 사본(B) 등 소수(小數)의 고대사본들에 기초한 본문으로서 현대본문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라크만, 트레겔레스, 티쉔도르프,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의해 제안된 본문이다. 그들은 공인본문(TR)을 버리고 소수의 고대사본들을 선호하였다. 1881년 영국교회의 감독인 웨스트코트(B. F. Westcott, 1825-1901)와 캠브리지 대학의 호트(F. J. A. Hort, 1828-1892)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에 근거하여 헬라어 신약성경 개정판을 출판하였다. 그들은 신약성경의 공인본문(TR)을 약 5,337곳, 영어성경(RV)으로는 36,191곳을 고쳤다.
이 전통을 받아 내려온 것이 오늘날 네슬레(Nestle) 27판 개정판(1993년; 수정 및 파피러스 99-116 보충 8쇄, 2001)과 연합성서공회(UBS=United Bible Societies) 4판 개정판(1993년; 파피러스 98-116 보충 5쇄, 2001년)이다. 이 성경은 편집자들의 판단에 따라 계속 수정되어 온 본문이다. 1881년의 영어개역성경(RV) 이후, 영어 번역성경들은 거의 전부가 이 비평본문에 근거하고 있으며(ASV, RSV, NASB, NIV 등), 한글 개역성경(1938)도 여기에 속한다.
두 본문의 검토
우리는 전통본문이 신약성경 원본의 본문이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전통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존된 본문이다.
첫째로, 전통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교회에서 보존된 본문이다. 그것은 교회에서 옛날부터 사용되어온 인정된 본문이다.
(1) 신약성경의 본문에 관해서는 교회 역사상 논쟁된 적이 없었다.
교회 역사상, 여러 교리들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신약성경의 본문 문제에 관해서는 19세기 말 이전까지 오늘날같이 이질적인 두 견해로 대립되어 변론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교회 역사상 신약성경의 본문 문제에 관해 교리적 논쟁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의 타당성과 권위성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헬라어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은 교회에서 이의 없이 인정되고 확고하게 보존되어 내려온 본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에 관해 유대인의 장점 중에 첫 번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롬 3:1-2). 같은 원리가 신약성경에도 적용될 수 있다. 헬라어 신약성경의 본문에 관한 한, 우리는 헬라어를 사용해온 헬라교회의 권위와 역할을 인정하고 중시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보존해왔듯이, 헬라어를 사용한 동방교회(오늘날의 헬라 정교회)는 신약성경을 보존해 왔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라는 중요한 말씀이 신약성경의 맨 끝에 기록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계 22:18-19), 우리는 신약성경이 어떻게 조심스럽게 보존되어 왔을지 알 수 있다.
(2) 전통본문은 현존하는 헬라어 사본의 절대다수가 지지한다
우리는 또한 다수 사본들의 지지를 중시해야 한다. 현존하는 신약성경의 절대 다수의 사본들은 전통본문을 증거한다. 비평본문은 소수의 사본들의 지지만 가진다. D. A. 웨이트는 파피러스 사본 88개 중 13개(15%)는 비평본문에 맞고 75개(85%)는 전통본문에 맞으며, 대문자 사본 267개 중 단지 9개(3%)만 비평본문에 맞고 258개(97%)는 전통본문에 맞고, 소문자 사본 2,764개 중 23개(1%)만 비평본문에 맞고 2,741개(99%)는 전통본문에 맞고, 성구집 사본 2,143개 중 100% 전부가 전통본문에 맞고, 종합하면 신약성경 사본 5,255개 중 단지 45개(1%)만 비평본문에 맞고 나머지 5,210개는 전통본문에 맞다고 말한다. 또한, 전통본문과 비평본문 간의 차이점들에 비하면 전통본문 사본들(Byz) 상호 간의 차이점은 매우 적다. 전통본문은 현존하는 절대 다수의 헬라어 사본들이 지지하는 본문이므로 상당한 객관성과 안정성을 지닌다. 비평본문의 입장에서 보면, 신약성경의 정확한 본문을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전통본문의 입장에서 보면, 신약성경의 본문은 거의 확정적이다.
(3) 전통본문은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 신앙에 맞는다.
더욱이, 전통본문은 보수적인 개혁교회의 성경 축자영감逐字靈感과 무오 신앙에 맞는다. 우리는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무오를 믿으며,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법칙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본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축자적으로 영감하셨으나 그 본문을 훼손되거나 상실되게 내버려두셨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무오를 믿는 모든 성도는 성경본문의 건전한 보존을 믿을 수 있고 또 믿을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성도의 기본적 믿음이다.
장로교회의 표준적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옛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이었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기록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직접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들[원어 성경]에 호소하는 것이다.”
비평본문 이론에 의하면, 교회는 신약성경의 원본의 정확한 본문을 4, 5세기 이후 1500년 동안 잃어버렸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온전하게 회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본문에 관하여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를 믿어야 한다. 신약성경의 본문 문제는 교회 역사상 논쟁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은 교회에서 인정된 본문이었다. 또 그것은 우리의 성경 축자영감과 무오의 신앙에 맞다. 하나님께서 축자영감으로 기록하신 신적 권위의 성경본문을 혼란 중에 내버려두셨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이라고 본다.
2. 전통본문은 충분한 고대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둘째로, 전통본문은 충분한 고대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결코 웨스트코트와 호트의 주장대로 후대의 사본들에 근거한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비잔틴 사본들이 주로 9-11세기의 후대 사본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본들에 있는 본문이 후대의 본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통본문의 고대성은 2, 3세기의 고대 파피러스 사본들과 역시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보이는 고대 수리아어, 라틴어, 콥트어 역본들, 또한 2, 3세기의 초대 교부들(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클레멘트, 오리겐 등)의 성경 인용문들에서 충분히 확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1) 전통본문은 때때로 אB 본문보다 더 많은 고대적 증거를 가진다.
마 5:22,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까닭 없이”--Byz D W ita b d h k vgmss syrp c s copsa meg bo arm Irenaeuslat Cyprian
(위의 구절이 생략됨)--UBS p64 א* B vg Origen
마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Byz W ita b h k vg syrp s copsa meg bo arm
“구원하소서”--UBS א B C copbo-mss
마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먹었다”--Byz p70 C D W ita b d h k vg syrp c copsa meg bo arm Diatessaron
“그들이 먹었다”--UBS א B
마 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그러나 예수께서”--Byz C W ita b ff2 h vg syrp copmeg arm
“그러나 그가”--UBS א* B copsa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네게 죄를 범하거든”--Byz UBS D ita b d e ff2 vg copmeg bo-pt
“죄를 범하거든”--א B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입으나 적은 사람이 택함을 입음이니라”-- Byz C D W itb d e ff2 h n vg syrp c s copmeg bo-pt arm
(위의 구절이 생략됨)--UBS א B copsa bo-pt Diatessaron
마 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왕이라면”--Byz A ita b ff2 h vg syrp s copmeg bo arm Origenlat
“왕이로다”--UBS א B D itd copsa
마 27: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다른 이가 창을 취하여 그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더라” --א B C vgmss copmeg
(위의 구절이 생략됨)--UBS Byz A D W ita b d ff2 h vg syrp s copsa bo arm Origenlat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러나 한 가지가 필요하다”--UBS Byz p45 75 A C* vg syrp c copsa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א B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א B itd vgmss
(위의 구절이 생략됨)--UBS Byz p75 A W ita b e ff2 i vg syrp c s copsa bo arm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주의 말씀”--Byz p45 A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하나님의 말씀”--א* B
(2) 전통본문은 때때로 2, 3세기 파피러스 사본들의 지지를 가진다.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러나 한 가지가 필요하다”--UBS Byz p45 75 A C* vg syrp c copsa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א B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Byz p45 A itb d e ff2 i vgww st syrp c s arm Diatessaronsyr Tertullian
“그 나라”--p75
“그의 나라”--UBS א B D* ita copsa bo
요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큰 무리가”--Byz (p66*) p75 A
“그 큰 무리가”--UBS א* B*
행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버리고]”(δε)--Byz p46 A C
“[너희가 버리고]”(δε 생략)--א* B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주의 말씀”--UBS Byz p45 A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하나님의 말씀”--א* B
고전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UBS Byz p46 itd vg syrp copsa bo Irenaeuslat
“주를 시험하지 말자”--א B C arm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A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Byz p46 C vg syr(p) arm Origenlat Tertullian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UBS B itd copsa bo Origengr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들”--א* (Clement)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UBS Byz p46 itd vg syrp arm Clement1/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א* B A copsa bo Clement1/2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내가 거룩하니”(ειμι 생략)--Byz p72 A C
“내가 거룩하니”(ειμι)--[UBS] א B
벧전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감독의 직무를 수행하며 [양무리를 치되]”--Byz p72 A vg (syrp) copbo arm
“[양무리를 치되]”--א* B copsa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UBS Byz p72 A vg syr(p) copsa-ms bo arm
“그리스도 안에서”--א (B) copsa-ms
(3) 전통본문은 5세기 이전의 교부들의 글들에서도 많이 인용된다.
딘 버건(Dean Burgon, 1813-88)의 거룩한 복음서들의 전통본문 옹호(Traditional Text of the Holy Gospels Vindicated)라는 책에 의하면, 주후 400년 전에 죽은 76명의 교부들의 4,383개의 인용문들 중에, 전통본문의 인용은 2,630개(60%)이었고 비평본문의 인용은 1,753개(40%)이었다. 즉 전통본문과 비평본문의 인용 비율이 3대 2이었다. 이것은 전통본문이 결코 후대의 본문이 아님을 입증한다.
3. 비평본문은 매우 허약하고 주관적이다.
셋째로, 비평본문은 매우 허약하고 주관적이다. 전통본문이 교회에서 인정된 권위 있는 본문이요 고대적 증거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충분히 논증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평본문이 과연 믿을 만한 본문인지 검토해보자.
(1) 고대 사본들 간에 차이점들이 많다.
고대 사본들의 본문들 간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시내산 사본(א)의 본문과 바티칸 사본(B)의 본문은 서로 많이 다르다. 또 그것들과 파피러스 사본들의 본문들 간에도 그러하고, 파피러스 사본들의 본문들 상호 간에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보자.
א 본문과 B 본문은 서로 많이 다르다. 허만 호스키어는 א과 B이 마태복음에서 656곳, 마가복음에서 567곳, 누가복음에서 791곳, 요한복음에서 1,022곳, 합하여 네 복음서들에서만 3,036곳에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파피러스의 본문도 אB 본문과 많이 다르다. 그 증거로, 다수본문 헬라어 성경의 마가복음 비평각주들에서 p45나 p88(4세기) 본문이 אB 본문과 다르고 Byz 본문과 같은 것들이 17개이며, 누가복음에서 p45나 p75 본문이 אB 본문과 다르고 Byz 본문과 같은 것들이 24개이며, 요한복음에서 p66이나 p75나 p45 본문이 אB 본문과 다르고 Byz 본문과 같은 것들이 23개이며, 사도행전에서 p45 본문이 אB 본문과 다르고 Byz 본문과 같은 것들이 23개이다.
파피러스들의 본문들 간에도 서로 다른 점들이 많다. 그 증거로서, 다수본문 헬라어 성경의 요한복음 비평각주에서, p66, p75, p45의 본문들이 서로 다른 경우들은 총 98구절이다.
(2) 고대 사본들이 부정확해 보이는 경우들이 많다.
또한, 고대 사본들이 부정확해 보이는 경우들도 많다. 물론 우리가 확정적으로 무엇을 말하기 어렵지만, 어느 고대 사본이 홀로 떨어져 있고 대다수의 다른 고대 사본들과 증거들(역본들, 초대 교부들의 인용문들)이 다른 편에 있을 때, 우리는 그 고대 사본의 본문이 부정확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UBS 헬라어 성경의 마태복음 비평각주들에서, א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곳은 적어도 14개이며, B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곳은 적어도 20개이다. 누가복음 비평각주들에서는 א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곳이 12개, B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곳이 11개, 그 둘이 함께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곳이 14개라고 하며, 요한복음에서는 א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곳이 18개, B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곳이 10개, 그 둘이 함께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곳이 10개라고 한다.
이상의 예들은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중립본문이라고 그렇게 선호했던 א와 B의 본문이 부정확하고 신뢰할 수 없는 본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보자.
[א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께로 가기 위해 물 위로 걸어가되”--Byz D ita b d e ff2 vg syrp copmeg copbo Origen
“물 위로 걸어갔고 예수께로 가되”--UBS B C*vid syrc s arm
“예수께로 가기 위해 물 위로 걸어갔고 그러므로 갔더라”--א*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하늘로 올리우시니”--Byz p75 A B C W vg syrp copsa bo arm
(위의 구절 생략됨)--א* D ita b d e ff2 syrs
고전 7:15,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우리를”--Byz p46 B D itb d vg syrp copsa fay arm Tertullian
“너희를”--א* A C ccpbo
[B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Byz UBS p66 75 A C ita b e ff2 vg syrp copsa bo arm Irenaeuslat Origen Tertullian
(위의 구절이 생략됨)--B*
요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성령을”--Byz A D ita (d) vg syrp copsa bo Origenlat
“그가 성령을”--UBS p66 75 א C* itb e Origengr
(위의 구절이 생략됨)--B*
요 9:6,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바르시고”(ἐπέχρισεν)--UBS Byz p66 75 א A C D ita b d e ff2 vg syrp s copsa bo arm Irenaeuslat
“두시고”(ἐπέθηκεν)--B Diatessaron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마리아”(Μαρια)--Byz p66 א A D W cop
“마리아”(Μαριαμ)--p6vid B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주여 주께서”--Byz p66 75 א A C D ita b d e ff2 vg syrp cop arm
(‘주여’가 생략됨)--B syrs
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아버지의[당신의] 이름을”--Byz p66 75 א A ita b e ff2 vg syrp s copsa arm
“나의 이름을”--B
[אB 본문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마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 . . 먹지”--Byz p70 C D ita b d vg syrp c copsa bo Diatessaron
“그들이 . . . 먹지”--UBS א B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네게 죄를 범하거든”--Byz UBS D ita b d e ff2 vg copmeg bo-pt
“죄를 범하거든”--א B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주의 말씀”--Byz p45 A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하나님의 말씀”--א* B
마 23:23,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버리지”--Byz C D W ita d e ff2 h vg arm Origenlat
“버리지”(오자인 듯. 그런 단어 없음)--א B
[파피러스 사본들의 본문들이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예들]
막 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생일에”(εν τοις gενεσιοις)--p45
“생일에”(τοις gενεσιοις)--그 외의 모든 사본들, 역본들
눅 11: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떡”(αρτον)--p45
“알”--그 외의 모든 사본들, 역본들
눅 11:27,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이 (말씀)”--그 외의 모든 사본들, 역본들
“(그 말씀)”--p75
눅 12:24,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너희는”--그 외의 모든 사본들, 역본들
“너희는”--p75와 소수의 사본들
파피러스 사본들이 명확히 부정확하게 보이는 곳들은 Nestle 27판의 비평각주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본문에 있어서 상호 간의 차이점들이 많고, 또 명확히 부정확해 보이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본들은 신빙성과 정확성과 권위성을 가지지 못한다. 비평본문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이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UBS 4판은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많이 포기하였다. UBS 4판이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함께 가진 본문을 버린 곳이 마태복음에서만 18개나 된다. 이것은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원본에 가장 가까운 중립본문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이것은 후대의 본문비평학자들이 그 두 사본의 부정확함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소위 고대 사본들이 원본의 본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단지 어떤 사본의 연대가 이르다는 사실이 그것이 원본에 가깝다고 단정할 충분한 이유가 아니며 아주 초기 사본이라 할지라도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부정확하고 변질된 사본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3) 비평본문은 매우 주관적이다.
더욱이, 비평본문은 매우 주관적이다. 현재의 UBS 4판의 본문과 비평각주를 검토해보면, 우리는 비평본문이 매우 주관적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비평본문은 많은 경우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선호하지만, 또 많은 경우 그 본문을 버리고 비잔틴 사본의 본문을 택하기도 하며, 또 고대적 증거들(헬라어 사본이나 고대 역본들이나 초대 교부들의 인용문들의 증거들)이 엇비슷한 경우들에도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버리고 비잔틴 본문을 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UBS가 고대적 증거들이 매우 약한 본문을 택한 경우들도 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마 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많은 무리”--UBS Byz C D W itd syrp copsa-ms bo arm Origen
“많은 사람”--א B ita b ff2 vg (syrc s)
마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UBS Byz C W it(e) ff2 syrc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א B D itb d vg syrp arm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UBS Byz A ite vg syrp copsa pbo arm
(생략)--p66 א* B C* D ita syrs copbo-pt Tertullian
요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του θεου)--[UBS] Byz
“하나님[께로서]”(θεου)--p5 א* A ita b e vg syrp s arm Origenlat Tertullian
“아버지[께로서]”(του πατρας)--B C* D itd copsa pbo bo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입으리라”--UBS B copsa
“입자”--Byz p46 א A C D itd vg syrp copbo Irenaeus
UBS 4판의 본문이 마태복음에서 א과 B의 본문을 함께 버린 곳은 18개나 되며, 본문의 근거가 매우 약한 곳이 적어도 10개나 된다.
또 연구자들에 의하면, UBS 4판이 누가복음에서 א과 B의 본문을 둘 다 버린 경우가 7번, 고대적 증거들이 매우 약한 경우가 5번이며, 요한복음에서는, א나 B의 본문을 택하지 않은 경우가 14개이며 그 중에 그 두 사본의 본문이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버린 경우가 8개나 된다고 한다.
이상의 고찰들을 통해, 신약성경의 비평본문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너무 확실하다.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약 본문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신약성경의 본문은 아주 초기부터 사본상의 크고 작은 차이들이 발생했고 그것이 수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널리 퍼졌다. 그러나 사본들 간의 차이들은 내용상으로 교리적, 윤리적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정도이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본문을 사용하더라도 대체로 정통적 기독교가 확증된다고 본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이었다고 믿는다.
2. 웨스트코트와 호트 이후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바, 전통적 비잔틴 사본들의 본문이 후대에 수정된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발견된 체스터 베티와 보드머 같은 3세기의 고대 파피러스 사본들과 옛 라틴어역, 옛 수리아어 페쉬타역, 콥트어역 등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추측되는 고대 역본들과 또 4세기 이전의 고대 교부들의 성경 인용문들을 통해 전통본문의 고대성이 충분히 증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증한 대로, 전통본문에 대한 고대적 증거가 시내산-바티칸 본문보다 압도적이게 많은 경우도 많이 있고, 충분히 있는 경우는 풍성하고, 파피러스 사본들의 본문이 시내산-바티칸 대신 전통본문을 지지하는 경우도 많다. 또 전통본문에 대한 고대적 증거가 약간 있는 경우는 많이 있고, 전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3. 그러므로 헬라교회가 2천년 동안 사용해온 신약의 전통본문은 신약성경의 원본의 본문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것을 수정할 아무런 타당한 이유가 없다.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고대 사본들 특히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이 원본에 가깝다는 잘못된 생각에 근거하여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을 과격하게 수정한 것은 대단히 큰 실수요 신약성경 본문의 혼란의 시작이었다.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은 오류가 많은 사본임이 충분히 증명되었다. 오늘날 비평본문 편집자들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많은 구절들에서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본문을 버렸다. 비평본문은 결코 원본에 더 가까운 본문이 아니고 오히려 더 먼, 때때로 심각히 손상된 본문이다.
비평본문 이론은 처음부터 전통본문을 버림으로 신약성경의 본문을 혼란시켜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에 의하면, 많은 교회들은 오랫동안 신약성경의 바른 본문을 갖고 있지 않았고 또 지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본문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경건한 성도에게는 신성모독적이게 들린다.
비평본문과 전통본문에 대한 검토의 결과가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확실하고 믿을 만하지 못한 비평본문을 단호히 버리고, 교회가 옛날부터 인정해왔고 오늘날까지도 헬라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전통적 헬라어 본문, 즉 비잔틴 다수본문을 유지하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본문의 회복은 이 문제를 인식하는 주의 종들의 사명이며 성경적 교회의 시대적 주요 과제이다.
[특주] 흠정역(KJV) 영어성경이 무오한가?
오늘날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반작용하여 1611년에 번역된 흠정역 영어 성경(AV 혹은 KJV)만 무오한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개역판(RV, 1885년, 신약은 1881년에 번역됨)과 그 이후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과 한글 개역성경을 이단적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주장이며 과격한 정죄라고 생각된다.
1611년에 번역된 흠정역 영어성경은 어떤 무오한 사본에서 번역된 무오한 성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최선의 사본들에 근거하며 주교 성경(the Bishops' Bible, 1568년)을 기본으로 삼고 그 전에 나온 틴데일 성경(Tyndale Bible), 매튜 성경(Matthew Bible), 대성경(the Great Bible), 제네바 성경(the Geneva Bible) 등을 참고하면서 번역된 가장 잘 번역된 성경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옳은 생각일 것이다. 흠정역 영어성경을 번역할 당시에 갖고 있었던 신약 헬라어 사본들은 제한되어 있었다. 오늘날까지 신약성경 원본을 무오하게 반영하는 헬라어 사본은 없다. 하나님은 교회에 무오한 사본을 주지 않으셨다. 비잔틴 다수사본들 간에도 약간의 차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흠정역 영어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믿음일 뿐 아니라, 또한 잘못된 믿음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신약의 전통본문이나 비평본문이 둘 다 전체적으로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에 충돌하지 않는다고 본다. 비록 그것들 상호간의 차이점들이 어떤 부분들에서는 크지만, 전체적으로 그것들은 교리적으로 치명적 결함이 없다. 한글 개역성경에 근거한 성경의 교리 체계 혹은 신학은 흠정역 영어성경에 근거한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성경본문이 내용적으로 전혀 다른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신약의 전통본문이든지 비평본문이든지 간에 그것을 죄인들의 구원과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사용하셨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비평본문을 이단적이라고 말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동안 행하신 많은 구원과 은혜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은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제까지 귀히 사용된 한글 개역성경에 대한 과격한 비난과 정죄는 삼가야 할 것이다. 한글 개역성경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성경의 바른 본문을 확인하고 확증하는 것이 건전한 태도일 것이다.
3. 성경의 속성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성경에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은 기록 혹은 저장이라는 관계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만큼 취사선택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성경에만 기록되었다. 성경과 같은 성격의 또 다른 책은 세상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유일한 저장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은 동일시된다.
(1) 성경의 필요성
성경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진술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한 뜻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굳게 세우시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그 동일한 진리를 온전하게 기록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하게 만든다.
위의 진술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계시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기 위해 필요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물론 성경이 없었더라도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사람의 기억력과 구전(口傳)을 통해 어느 정도 보존되고 전파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인간의 연약과 실수로 그리고 사탄의 방해로 많이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경책에 명확히 기록됨으로써 그것은 더 잘 보존되고 더 잘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율법들을 책에 기록하였다(출 24:4; 신 31:24). 또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책에 기록하였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계시들을 책에 기록되게 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 성경은 또한 인간의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한 뜻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고 위로하기 위해 필요했다. 우리는 육신의 부패성을 가지고 있고, 이 세상에는 사탄의 활동과 세상의 악한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기록하신 명확한 말씀이 없었더라면 구원받은 자들은 더욱 빈번히 흔들리고 낙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의 말씀들을 기록해주심으로 우리는 그것을 통해 더욱 견고히 서고 많은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누가는 자기가 기록한 복음서의 목적을,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표현하였다(눅 1:1-4). 사도 바울은 성경이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사실을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했다(롬 15:4).
(2) 성경의 명료성
성경은 내용이 명료한 책이다. 성경의 명료성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할 만하게 명료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목적은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참지식을 줌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며 구원을 위한 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성경이 결코 어려운 책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에 있어서 똑같이 명백한 것은 아니고 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분명한 것도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성경의 이곳 혹은 저곳에 분명히 제시되고 드러나 있어서, 유식한 자들뿐 아니라 무식한 자들도 일반적 수단을 적절히 사용함으로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성경은 두 가지 점에서 명료하다. 첫째로,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알아야 할 내용에 있어서 명료하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말하기를, 그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요 20:31). 바울은 증거하기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다(딤후 3:15). 사실, 성경은 구원 진리의 기초가 되는 진리 전반에 있어서 명료하다. 시편 19:7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합 2:2). 예레미야는 장차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4).
둘째로,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는 생활 교훈에 있어서 명료하다. 그러므로 시편 119:105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했다. 불분명한 교훈은 결코 빛이 될 수 없다. 또 바울은,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말했다(딤후 3:16-17).
(3) 성경 번역의 필요성
원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일진대, 성경은 마땅히 모든 나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옛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이었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기록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은 직접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들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 성경들을 읽을 권리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것들을 읽고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원어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성경들은 그것들이 들어가는 모든 나라의 통속적(vulgar)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방식으로 그를 예배하고 인내와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경 번역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로, 축자(글자) 영감의 진리에 맞게, 성경은 가능한 한 충실하게 직역(문자적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의역(dynamic equivalence)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로, 신약 헬라어(코이네 κοινή)가 통속적, 대중적 언어이었듯이, 성경은 쉬운 대중적 언어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고려하여 성경은 가능한 한 품위있는 말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우리 나라에서는 신약의 전통사본(비잔틴 다수사본)의 본문을 따르고 기존의 개역성경의 본문을 가능한 한 유지하는 새 번역 성경이 필요하다.
(4) 성경 해석의 원리
성경은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만일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지 않는다면, 성경의 목적이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며 성도들은 성경책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 해석에는 몇 가지의 건전한 원리들이 있다.
첫째로, 성경은 문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문법적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들의 뜻과 어순과 문맥 등이다. 문법적 해석은 많은 경우 문자적 해석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상식적인 해석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학자들에게 주신 책이 아니고 일반 성도들에게 주신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대부분 단순한 문법적 해석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에 상징적, 시적 표현들이 있지만, 성경의 모든 부분에 대한 영적,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은 잘못이다. 교회 역사상 초대 교회의 오리겐 이후 이런 해석 방식이 항상 있어 왔고 오늘날도 적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은 성경의 순수한 뜻을 혼란시키고 성경의 불확실하고 주관적인 해석들만 남긴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해석을 삼가야 한다.
둘째로, 성경은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들, 아마 절반 이상은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계시들을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주셨다. 그러므로 역사 지식은 성경 해석에 많은 도움이 된다. 따라서 성경 해석자는 성경 역사와 더불어 동시대의 세속 역사에 대해서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역사 지식이 많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대체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뜻을 파악하기에 어렵지 않다고 본다.
셋째로, 성경은 신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참된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성경 어느 곳의 좀 불분명한 의미는 성경 다른 곳의 보다 분명한 의미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은 바르게 진술하기를, “성경 해석의 정확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의미가 여럿이 아니고 단 하나인 어떤 성구의 참되고 완전한 뜻에 관해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보다 더 명백하게 말하는 다른 곳들에 의해 그 뜻을 찾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과 신약 계시의 최종성을 인정하면서,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그리고 신약 계시 안에서, 신약 계시를 넘어서지 말고 해석되어야 한다. 또 신약은 구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 계시는 구약 역사의 터 위에 주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체 내용은 천지 창조와 인류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의 선택과 거역 및 멸망과 회복이라는 성경 역사의 전체적 맥락에서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더욱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복음은 구약 율법을 통해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과 무능력이 증거됨으로써 밝히 제시된다. 그러므로 성경 진리를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한 바른 신학에 의해 성경이 해석될 때, 성경 모든 부분의 뜻은 밝아지고 탈선된 해석은 방지될 것이다.
(5) 성경의 충족성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충족히 전달하는 책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 6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거나 혹은 건전하고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그 하나님의 뜻에 어느 때든지 성령의 새로운 계시들이나 사람들의 전통들에 의해 아무것도 첨가될 수 없다.
구약은 모세 때로부터 그 충족성을 스스로 증거해왔다. 모세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했다(신 4:2). 율법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그것의 불충족성을 의미할 것이다. 구약의 핵심은 율법이며, 선지서와 성문서는 율법에 무엇을 첨가한 것이라기보다 율법을 설명하고 확증하고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고 증거하였다(시 19:7). 또 이사야 선지자도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모세의 율법]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이는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직역)고 증거하였다(사 8:20). 예수께서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구약의 충족성을 증거하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눅 16:31).
신약도 구약의 진리와 다른 무엇이 첨가되었다기보다는 구약에 예언되고 증거된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고 해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관한 일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과 시편’에 예언되어 있음을 증거하셨다(눅 24:27, 44; 요 5:39). 성경의 중심 인물과 대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의 창설자들인 사도들은 구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르쳤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특별계시이시다. 히브리서 1:1, 2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도들을 통하여 밝히 계시되고 해설되고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단언하였고(갈 1:8-9) 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전해 들은 내용들]을 지키라”고 말했다(살후 2:15). 주께서는 종말 예언까지 충족히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은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엄숙히 경고한다.
이제 사도들을 통해 기록된 신약은 충족한 계시로서 더 이상 무엇이 첨가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그의 모든 뜻을 다 성경에 기록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신약으로 완성되고 종결되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가 일시적일 것을 말한 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고 증거하였다(고전 13: 8-10).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관한 한, 그 ‘온전한 것’은 곧 성경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완성된 후 성경 외에 또 다른 특별계시들을 주실 필요가 없으셨다. 모든 사람은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깨닫고 믿고 마음에 새기고 바라고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성도는 성경으로 만족해야 한다.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도, 성경 교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담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이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므로, 우리는 성도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추론할 수 있다. 또 미니 스커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자들이 아담한 옷을 입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딤전 2:9), 우리는 미니 스커트가 여성도에게 합당한 복장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6) 성경의 신적 권위성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진 책이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전적으로 그것의 참저자이신 하나님께 의존하며 그에게로부터 나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적절히 진술하기를, “그것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믿고 복종해야 하는 바 성경의 권위는 어느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의 저자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1:4).
성경의 권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첫째는 역사적 권위이다. 그것은 성경이 역사적으로 진실하고 믿을 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역사적 권위, 곧 그것의 신빙성은 다음과 같이 확증된다.
첫째로,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다. 예수께서는 증거하시기를, “[마귀는] 처음부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다(요 8:44). 영생과 영벌의 엄숙한 구원 진리를 증거함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요구되는 덕은 진실이다. 만일 성경의 증거가 진실하거나 믿을 만하지 않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 아니고 마귀의 책일 것이며, 거룩한 책[聖書]이 아니고 심히 악한 책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마귀의 책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마귀가 마지막 때에 영원히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25:41; 계 20:10).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거짓을 정죄하시며, 거짓 증인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9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고 명하셨다(출 20:16). 잠언 6:16-19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거짓] 증인과”라고 말했다. 성경 마지막 부분에도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선언되어 있다(계 21:8).
셋째로, 예수께서는 친히 구약의 사건들을 언급하심으로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진실하고 믿을 만함을 증거하셨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대해 언급하셨고(눅 17:26-29), 모세 때에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떡인 만나에 대해 말씀하셨고(요 6:32), 엘리야와 엘리사 때의 일들을 증거하셨고(눅 4:25-27),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실을 증거하셨다(마 12:39-40).
넷째로, 성경의 인간 저자들, 특히 신약의 저자들은 ‘증인들’로 불리웠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사도들은 자신들을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자처하였다(행 10: 39). 성경에는 ‘증인,’ ‘증거,’ ‘증거하다’는 단어가 200회 이상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증거한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았고, 마침내 스데반이나 야고보처럼 순교의 피로 그 증거를 확증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교적 증언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힘있는 증거이다.
성경 권위의 다른 한 측면은 규범적 권위이다. 이것은 역사적 권위보다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측면이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란, 성경이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대해 규범이 됨을 의미한다. 물론, 성경의 규범적 권위가 성경의 모든 내용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역사적 내용들의 경우, 규범적 권위는 그 내용들에 담긴 진리에만 적용될 수 있다. 또 구약의 율법의 경우, 도덕법은 그 성격상 영속적이지만,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으로 신약 아래서는 폐지되었고 재판법도 오늘날 세속 국가들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여기에 성경에 대한 건전한 해석과 적용의 필요성이 있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는 모든 참된 교회들의 기본적, 공통적 신앙이다. 종교개혁의 세 전통인 루터교회와 영국교회와 개혁교회는 성경의 신적인 권위 즉 성경이 유일한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권위를 가진다고 믿는다. 루터교회의 일치신조는 “모든 교의들과 모든 박사들이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할 유일한 규칙과 규범은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적이고 사도적인 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도 “무엇이든지 [성경에서] 읽을 수 있고 그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그것을 신앙의 조항으로 믿도록 요구되어서는 안 된다”고 진술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도 진술하기를, “성경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명칭 아래 현재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규칙이다”고 하였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성경자체이다. 이것을 ‘성경의 자증自證, autopistos)’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가 교회나 전통 등의 외적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대한 증거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가장 잘 제시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증거는 성경 자체에 의해 가장 잘 제시되는 것이다.
성경의 규범적 권위에 대한 성경 자체의 증거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에서 열거한 대로,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첫째로, 성경의 내용은 천적天的이다. 성경은 단순히 땅의 일들이나 사람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곧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일들에 관하여 증거하고 기록한다.
둘째로, 성경의 교훈은 효력이 있다.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교훈들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성도들을 새롭게 하는데 효력이 있고 적응성이 있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이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삶을 산다.
셋째로, 성경의 문체는 장엄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등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그 누구도 감히 이런 표현으로 인간의 사상을 전달할 수 없으며, 만일 누가 거짓으로 그런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매우 악한 일이 될 것이다.
넷째로, 성경의 교훈들은 서로 일치한다. 성경은, 1500여년 간 30여 명의 인간 저자들에 의해 저술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일치된 교훈을 증거한다.
다섯째로, 성경 전체의 가장 고상한 목표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떤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증거하고 사람을 미화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경은, 경건한 왕 다윗의 악하고 부끄러운 간음과 살인의 죄를 그대로 기록하였고(삼하 11장), 주의 귀한 종 바울이 주를 알기 전에 행했던 교회 핍박의 일을 세 번이나 자세히 기록하였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인간적인 책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거룩한 책이다.
여섯째로, 성경은 사람들의 구원의 유일한 길을 충족하게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에 대하여 명확하고 풍성하게 증거하고 있다. 세상에 성경 외에 참구원의 길을 증거하는 책은 없다. 죄인들은 이 책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넉넉히 발견할 수 있다.
일곱째로, 성경은 그 외에도 많은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완전하다. 성경은 윤리적으로 탁월하다. 또 성경은 기적들과 예언들의 성취를 통해 그 신적 권위를 스스로 증거한다. 성경은 율법, 역사, 예언, 시, 교리, 윤리, 종말 예언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완전하여 교리나 윤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증거를 통해 올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시고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하였고(고전 2:12) 요한도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했다(요일 2: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은 적절히 진술하기를,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으로부터 온다”고 하였다.
4. 성경의 영감과 무오
(1) 성경의 영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영감(inspiration)이란, 성경의 인간 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을 잘 이해하고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독특한 감동과 간섭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경 저자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을 때보다 그것을 기록할 때에 받았던 성령의 감동을 말한다. 성경 영감의 교리는 초대 교회 때로부터 있었던 전통적, 정통적 견해이었다.
구약 영감의 증거는, 첫째, 구약을 기록한 모세와 선지자들의 권위와 역할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견해를 전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민수기 12:6-8,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열왕기상 22:14,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셨거나 성경을 기록하도록 섭리하셨다. 출애굽기 34: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신명기 31:24,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예레미야 30: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성경을 기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기록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지도하실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의 기록을 실수투성이의 인간에게 맡겨두셨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를 주실 때와 같이 그 내용을 기록하게 하실 때도 성령의 비상한 감동과 지도하심을 주셨다고 판단한다.
둘째, 예수께서는 친히 구약의 영감성을 증거하셨다. 그는, 당시의 정통 유대인들과 같이, 구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영감된 책으로 확신하셨다. 마태복음 4:4, “기록되었으되.”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마태복음 22:43, “(시편 110:1을 인용하시면서)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구약의 영감을 증거하였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 θεόπνευστος)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이라는 뜻으로 성경의 영감, 신적 기원 및 신적 권위를 보인다.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사도행전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사도행전 4:25,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히브리서 3:7,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신약 영감의 증거는, 첫째,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신약의 성격이다. 구약과 신약은 예언과 성취라는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예언도 영감되었으면, 성취는 얼마나 더 영감되었겠는가?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둘째, 신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이 신약의 영감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시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특별계시이시다. 히브리서 1:1, 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마태복음 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셋째, 사도들의 역할과 권위는 그들이 쓴 신약의 영감을 증거한다.
(1) 사도들은 주께로부터 말씀 사역에 대한 특별한 명령을 받았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2) 사도들은 주께로부터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에 대한 특별한 약속을 받았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3) 사도들은 주께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았다.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고린도후서 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그러므로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라고 불리웠고 신자들은 그들의 전하는 말씀을 잘 지켜야 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고린도전서 7:40,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린도전서 14:37,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데살로니가전서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어떤 이들은 성경 영감의 증거가 성경의 영감을 성경 자체에 의해 증거하려는 순환논법이라고 반론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하나님 자신에 의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증거되듯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인 성경도 그 자체에 의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증거된다.
성경 영감의 범위는 성경 전체, 성경의 모든 책들, 또 각 책의 모든 부분, 심지어 글자까지도 포함한다. 이것을 ‘완전 영감’(plenary inspi- ration) 혹은 ‘축자 영감’(verbal inspiration)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번도 안나오는 에스더나, 겉보기에 남녀 간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 또 은혜의 복음 진리와 충돌되는 듯이 표현된 야고보서나, 매우 개인적 편지같이 보이는 빌레몬서 등도 영감되었다고 본다. 또한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내용뿐 아니라, 역사적, 지리적, 혹은 과학적 사실들까지도 영감되었다고 본다. 또 성경의 단어까지도 영감되었다고 본다. 사상은 단어들을 통해 표현되고 전달되기 때문에, 성경 영감은 반드시 글자 영감이어야 할 것이다. 단어의 오류는 결국 사상의 오류를 초래할 것이다. 성경에서 글자의 오류를 허용하면 결국 성경의 신적 권위성이 파괴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8). ‘일점일획’이라는 말은 지극히 작은 부분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의 י 요드나 ו 와우 같은 글자를 가리킨다. 비록 이 말씀이 과장적 표현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하신 말씀의 분명한 뜻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도 하나님의 섭리와 영감 가운데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주라 칭한 사실을 언급하셨고(마 22:43), 또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다’는 시편을 인용하셨다(요 10: 34). 이러한 언급은 성경에서 한 개의 단어도 중요함을 보인다. 즉 성경 영감이 단어에까지 미침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했다(딤후 3:16). 모든 성경은 성경의 모든 책과 각 책의 모든 부분을 포함한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네 자손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시고 ‘네 자손’이라고 표현하셨음을 언급했다(갈 3:16). 이것은 성경의 단어가 단수명사냐 복수명사냐 하는 문제까지도 중요함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의 영감이 글자에까지 미침을 증거한다.
그러나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은 성경의 원본(autographa)을 두고 하는 말이며 사본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완전영감이 성경 원본에만 적용되고 사본들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본들에는 실제로 여러 가지 부정확함과 오류들이 있다면, 이런 영감의 교리는 실상 무가치하지 않는가라고 반론하였다. 그러나 성경 원본의 완전영감은 성경의 신빙성과 직접 관계된다. 성경 원본이 완전하게 영감되었다면 사본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지만, 그 원본이 완전하게 영감되지 않았다면 성경의 신빙성과 권위성은 확립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성경 사본들 간의 차이점들이란 실제로 매우 작은 것들이며 특히 전통적 다수사본들에 근거하면 원본의 본문은 거의 확정된다.
성경 영감의 방식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 그것은 때때로 ‘유기有機영감’(organic inspiration)이라고 표현된다. 유기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을 사용하실 때 단순히 받아쓰는 도구가 아니고 인격체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성경 저자들은 때때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썼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단지 기계적으로가 아니고 인격적으로 사용하셨고 그들의 문학적 활동들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록한 성경들은 그들의 독특한 문체, 성격, 타고난 재능, 교육 정도 등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기록한 내용은 하나님의 생각을 반영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
성경은 스스로 유기 영감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말과 지식에 능한 모세를 사용하여 처음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하게 하셨고, 시적 재능과 지혜를 가진 다윗과 솔로몬을 사용하여 시편, 잠언, 아가 등을 기록하게 하셨다. 구약의 성문서들(율법과 선지서들 외의 책들)은 인간 저자들의 참된 시들이요 기도들이요 찬양들이었다. 또 성경 저자들은 때때로 다른 기록들을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는 보조 자료로 참조하거나 인용하였다. 예를 들어, 민수기는 ‘여호와의 전쟁기’라는 기록물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고(21:14) 또 어떤 시인의 시의 내용을 인용하였다(21:27- 30). 역대기에는 족보들을 언급한 후 “이는 다 옛 기록에 의지한 것이라”고 표현했다(대상 4:22).
어떤 이들은, 모세오경과 이방 법전들의 내용의 유사성을 모세가 이방 법전들을 참고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그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성과 영감성에 충돌하는 생각이라고 본다. 모세의 법들과 이방 법들의 유사성은, 아마 모세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공통적 법들에 기인할 것이다.
신약의 경우에도, 누가는 누가복음 초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하여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다”고 증거했고(눅 1:3) 그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그의 의학적 지식과 의사다운 세심한 성격을 반영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지식과 논리적 재능을 가진 바울을 사용하여 많은 서신들을 쓰게 하셨는데, 그의 재능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같은 서신들에서 잘 증거된다. 또 빌레몬서에서 가장 잘 나타나듯이 그의 서신들은 실제의 편지들이었다.
(2) 성경의 무오
성경 영감의 결과는 성경의 무오이다. 성경 무오의 교리는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이단을 구별하는 기본적 잣대가 되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성경에 오류들이 많이 있다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생각은 기독교의 근본을 파괴하는 이단 사상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진리임을 믿는 것이다.
성경 무오는 무슨 의미인가? 첫째로, 성경 무오는 일차적으로 성경 원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경의 사본들에는 상이점들이나 부정확한 점들이 있지만, 성경의 원본은 무오하고 그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로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 하나님의 백성의 모국어이었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기록될 당시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은 직접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으며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保存)되었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종교상 모든 논쟁들에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그 성경에 호소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본이 원본의 본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원본의 본문은 사본들의 비교 연구를 통해 거의 대부분 확인될 수 있다. 실상 사본들의 차이점들은 매우 작은 것이어서, 그것들이 성경의 교리나 윤리의 윤곽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둘째로, 성경은 모든 역사적, 교리적, 윤리적 진술에서 무오하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은 성경계시의 기본적 내용이므로, 만일 그것들의 정확성과 신빙성이 부정된다면, 그것에 근거한 성경 교리도 파괴되고 말 것이다. 성경의 교리들과 윤리들도 무오하다. 사도 바울은 ‘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증거하였다(행 24:14). 또 그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전해 들은 내용들]을 지키라”고 말했다(살후 2:15).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다 믿고 다 지켜야 한다.
셋째로, 성경에 오류처럼 보이는 난해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다른 부분과 외형적으로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없지 않다. 이것들을 성경의 난제들이라고 부른다. 오류는 단순히 오류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명확히 잘못이라고 확인되고 증명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난제들에 어떤 가능한 설명들이 있다면, 그것은 오류라고 단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에 증명된 오류는 없다.
성경 무오의 증거는 무엇인가? 첫 번째 증거는 성경의 신적 권위이다.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진 책이다. 예수께서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선언하셨다(요 10:35). 바울은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말했다(살후 2:15). 성경의 신적 권위성은 성경의 무오성을 증거한다.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진다면, 그것은 오류가 없어야 할 것이다. 오류 있는 책은 결코 신적 권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성경의 아무리 작은 한 부분의 오류를 말한다 할지라도, 일단 성경의 오류를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성경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며, 성경의 신적 권위는 여지 없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이것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해온 바이다. 성경의 오류를 말하며 출발한 자유주의 신학은 단순히 성경의 지엽적 사실들을 파괴한 것이 아니고, 결국 성경의 근본적 사실들과 교리들을 부정하였다.
두 번째 증거는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영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 3:16). 사도 바울은 성경의 영감이 한 단어에 미침을 증거했다(갈 3:16). 성경이 작은 부분까지 영감된 책이라면 그것은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할 것이다.
세 번째 증거는 성경의 독특한 목적이다. 성경의 목적은 한마디로 죄인의 구원이다. 구원은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와, 거룩하게 되는 성화를 포함한다. 구원은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일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중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성경을 주셨다.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디모데후서 3:15, 16,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이 구원을 위한 책일진대, 그것의 교리적, 윤리적 교훈들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워필드는 적절히 말하기를, “계시는, 만일 그것이 무오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半)계시뿐이요, 또 만일 그것이 무오하게 기록되지 않는다면 반(半)전달뿐이다”고 했다.
성경 무오의 교리는 역사적 교리이다. 주후 1세기 로마의 클레멘트는, “너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성경을 자세히 상고하였다. 너희는 거기에 아무 불의하거나 거짓된 것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고 썼다. 어거스틴은 제롬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성경]의 저자들의 어느 누구도 어떤 점에서나 기록상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매우 확신합니다”라고 썼다(Letters, 82).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도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를 믿었다. 개혁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규칙이다”(1:2),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활동으로부터 온다”고 하였다(1:5).
성경에 실제적으로 오류가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자연 현상에 대한 어떤 서술을 과학적 오류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욥기 37:18에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이라는 표현을 오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과학적 서술이 아니고 통속적 표현이며 오류라 할 수 없다. 또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많은 역사적 오류들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 대다수가 고고학적 발굴로 반증되었고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이 증거되었다. 현재의 매우 제한된 역사 지식으로 성경을 비판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성경에 기록된 야곱의 일부다처의 생애, 노예 제도,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함, 시편의 저주시들 등을 도덕적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옛 시대의 도덕적 정도를 보고 임시로 허용하신 것과 그가 선이라고 인정하신 것과는 서로 다르며 또 개인적 보복과 하나님의 공의의 선언과 시행도 서로 다르다. 또 어떤 이는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자유롭게 인용하거나 해석한 것을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인용과 해석이 원문의 참된 의미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류라고 볼 수 없다. 또 어떤 이는 성경의 역사적 보도의 불일치를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것이 전체적 서술과 부분적 서술의 차이, 자세한 서술과 간략한 서술의 차이, 혹은 강조점의 차이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류라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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