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부분적으로 생략,요약한 곳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조병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1. 예수의 출생과 등장
1) 예수의 출생
(1)출생
마태복음은 세 가지 표제어를 사용하여 예수의 출생을 세 가지 면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책" (마 1:1)이라는 표제로 계보를 중심으로 설명하며 (마 1:1-17),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은 이러하니라" (마 1:18)는 표제로 부모를 중심으로 설명하며 (마 1:18-25), 셋째로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출생하셨다" (마 2:1)는 표제로 상황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마 2:1-23).
계보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왕국이 끝난 시점에 출생하셨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국은 세 단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왕국의 성립 단계로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이다 (마 1:2-5). 둘째로 왕국의 존립 단계로서 다윗부터 포로시대까지이다 (마 1:5-11). 셋째로 왕국의 멸망 단계로서 포로시대부터 예수까지이다 (마 1:12-16). 그런데 마지막 시점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 예수께서 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계획가운데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한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창 13:15; 삼하 7:12ff.), 아브라함과 다윗에 의하여 이 약속이 깨어질 뻔 하였을 때 (하갈의 사건과 밧세바의 사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여주셨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오시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만일에 예수께서 사람을 통로로 삼아 오시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구세주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멀리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사람들이 사는 곳에 거하셨다 (요 1:14). 예수는 철저하게 도시의 사람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 자라고 도시에서 죽었다. 도시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가득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이시다 (롬 15:12).
예수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이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마 1:19).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리킨다. 요셉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성육신에서 중요한 것은 동정녀 탄생이다. 예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갈 4:4). 예수의 구원은 성 구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셔야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없이 태어나셔야 했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다. 이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 15:14). 예수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아담의 원죄의 유전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 동정녀 탄생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성령의 잉태와 출생으로 가능하였다 (마 1:18,20; 눅 1:35).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놀랍고 비상한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다. 인간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출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식이다 (임마누엘).
예수께서는 헤롯이 통치할 때 탄생하셨다. 이때 동방에서 먼 길도 마다치 않고, 고급한 신분에도 아랑곳없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리도, 신분도, 염치도 버리고 예수를 찾아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헤롯은 예수께서 나신 것을 몰랐다. 메시야가 오실 것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오신 것을 알았을 때 헤롯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염치없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물었다. 동방박사와 헤롯대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방식을 취했지만 목적은 크게 달랐다. 동방박사는 예수를 경배하기 위하여 찾았고, 헤롯대왕은 예수를 살해하기 위하여 찾았다. 하나님께서는 별을 통하여 동방박사를 도우셨고, 천사를 통하여 헤롯대왕을 방해하셨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멸시를 받는다 (삼상 2:30).
(2) 도피, 귀환과 성장
예수께서는 부모의 손에 의하여 애굽으로 도피하였고, 헤롯이 죽은 후에 갈릴리로 돌아와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 2:19-23).
(3) 소년기
누가복음은 12살 예수에 대하여 진술한다 (눅 2:41-52). 예수께서는 소년시절에 부모의 신앙에 순종하여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소년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였고,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존중히 여겼다. 이런 신앙적인 계승 속에서 예수의 신앙은 부모의 신앙을 뛰어넘었다.
2) 예수의 등장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고 있을 때 등장하였다. 예수에게는 본격적인 활동이전에 두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세례와 시험이다.
(1) 세례
먼저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다. 이것은 사제관계나 경쟁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연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공통성이 드러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마 3:15). 또한 요한은 예수께 세례를 줌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냈다. 구속사가 진전 속에서 요한의 준비와 예수의 완성이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례이후에 예수께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소리가 들렸다.
(2) 시험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시험의 순서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다르게 진술되어 있다.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시간적인 순서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의 세계에는 시간적인 순서가 없다. 사탄의 시험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시험한 것이다. 사탄은 시험을 통하여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신분을 깨뜨리려 하였다. 사탄은 떡의 시험으로 예수를 초인간적인 능력자로 인정해주는 것처럼 하면서 떡에 매인 인간적인 연약자로 만들어버리려는 무서운 간계를 꾸몄다. 또한 사탄은 성전과 성경을 곡해시키는 시험을 하였다. 이것은 성전과 성경을 하나님의 영광표현을 위한 목적보다 인간의 능력과시를 위한 목적으로 오용하게 하게 하는 시험이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예수에게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주어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결국 예수를 짧은 시간 안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락시키려고 하였다. 사탄의 시험 앞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증명하셨다. 매번 하나님을 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마 4:4;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마 4:7;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0).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2. 예수의 활동
예수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말씀하심과 치료하심이다 (마 4:23; 9:35).
1) 예수의 말씀
첫째로 예수의 말씀부터 살펴보자. 예수의 말씀에는 사람과 관련하여 제자들에 대한 설교와 대화가 있고, 유대인들과의 논쟁이 있다. 하나님과 관련하여는 기도가 있다.
(1) 설교
예수의 설교는 선포 (케리그마)와 교훈 (디다케)으로 복합적인 구성을 가진다 (마 4:23; 9:35). 보통 선포는 교회의 대외적인 것이요, 교훈은 교회의 대내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포와 교훈은 설교의 양면이었다. 이것은 후에 사도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행 5:42).
예수의 설교가운데는 아주 짧은 설교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 "화있을진저" 설교 (마 11:20-24), 고난예고 (마 20:17-19), 예루살렘에 대한 설교 (마 23:37-39)이다. 이에 비하여 아주 큰 설교들도 있다. 이 가운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섯 가지 설교는 유명하다. 그것은 산상설교 (마 5-7장), 제자파송설교 (마 10장), 비유설교 (마 13장), 교회설교 (마 18장), 종말설교 (마 24-25장)이다. 이 설교들은 종결될 때마다 "예수께서 말씀 (명령, 비유)을 마치시매" (마 7:28; 11:1; 13:53; 19:1; 26:1)라는 어구가 나온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고별설교 (요 14-16장)도 긴 설교에 속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설교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가운데 하나는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예수의 비유는 여러 종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가장 간단한 것은 직유와 은유로서 이것은 격언이나 표어처럼 똑똑 떨어지는 말이다. 직유는 "...과 같다"라는 말을 지닌다 ("저희가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하였다" 참조. 마 9:36/막 6:34). 은유의 예를 들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마 10:6)이라는 표현이다. 직유와 은유가 조금 더 발전되어 보다 복합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비유를 직비유라고 부른다. 이것은 직유를 기본으로 하여 발전한 것으로써 그림처럼 다소 서술적이며 상세한 내용을 지닌다. 예를 들면 잃은 양의 비유를 말할 수 있다 (눅 15장). 예화는 직비유가 좀더 실제적인 이야기로 발전한 것이다. 예를 들면 탕자의 비유를 말할 수 있다 (눅 15장).
예수의 비유가 드러내는 내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공간적인 의미로 나타난다. 이것을 위하여 공간성을 뜻하는 전치사들 (안에, 안으로)이 자주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사용된다 (마 5:19,20). 천국의 공간성에 대하여는 신학적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으나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천국비유에서 인격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주 "사람"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행위자로서의 사람을 강조하거나 (좋은 씨와 가라지 비유 마 13:24), 성격명사 (장사꾼, 왕, 집주인)와 함께 사용되거나 (진주장사 비유에서 "진주 구하는 한 사람 장사꾼" 마 13:45; 회계하는 왕 비유에서 "한 사람 왕" 마 18:23; 포도원 비유에서 "한 사람 집주인" 마 20:1; 혼인잔치 비유에서 "한 사람 왕" 마 22:2), 또는 비유 중에 "사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겨자씨 비유에서 "한 사람이 취하여 자기 밭에 뿌린 겨자씨" 마 13:31; 누룩 비유에서 "한 여자가 취하여 가루 서말 속에 넣은 누룩" 마 13:33; 보화 비유에서 "한 사람이 발견하고 숨겨둔 보화" 마 13:44). 이렇게 비유에서 자주 "사람"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성품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천국비유를 통하여 천국이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마치 다윗의 나라는 다윗 왕의 성품을 나타내고 이루어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이루어간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의 성품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종말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 종말론 또는 종말론적 현재이다.
(2) 대화
예수께서는 자주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셨다. 이것은 주로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시는 경우가 있다 (인자, 마 16:13-20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예수께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천국에서 큰 자 마 18:1이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용서 마 18:21-35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종말현상 마 24:3이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세례자 요한의 질문 (마 11:2-19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과 서기관의 질문도 있다 (마 19:16-30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어떤 사실을 두고 답변하신 경우들도 있다 (문둥병자 치병 마 8:2-4; 백부장 하인 치병 마 8:5-13; 제자도 마 8:18-22; 폭풍진정 마 8:23-27; 가족 마 12:46-50; 오병이어 마 14:13-21 [마 15:32-39]; 간질아들 치병 마 17:14; 가나안 여자의 딸 마 15:21-28; 누룩 마 16:5-12; 베드로의 만류 마 16:21-28; 엘리야 마 17:9-13; 하나님 나라의 자리 마 20:20-28; 소경개안 마 20:29-34; 바리새인 마 23:1-36; 성전파괴 마 24:1-2; 향유 마 26:6-13; 만찬 마 26:17-29; 부활예고 마 26:31-35; 선교 마 28:16-20;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 3:1-21).
(3) 논쟁
또한 예수의 말씀가운데는 논쟁이 있다. 이것은 주로 상대방이 논쟁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답변으로 주신 말씀이다. 예수의 논쟁의 대상은 주로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서기관, 제사장). 논쟁의 쟁점은 유대인의 규례와 교리에 관련되었다. 규례에 관한 논쟁에는 죄인식사 (마 9:9-13), 금식 (마 9:14-17), 유전 (마 15:1-20), 안식일 (막 2:23-28; 마 12:1-8; 참조. 마 12:9-21), 성전세 논쟁 (마 17:24), 세금논쟁 (마 22:15-22) 등이 있다. 교리에 관한 논쟁에는 구원 (눅 10:25-37; 18:18이하), 하나님나라 (눅 17:20-21), 이혼 (마 19:3-12), 부활 (마 22:23-33) 등이 있다. 때때로 질문없이 (그러나 내심질문)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사죄권세 (마 9:1-8), 귀신논쟁 (마 12:22-37), 표적 (마 12:38-45; 참조. 마 16:1-4), 고향 (마 12:53-58), 권세출처 (마 21:23-32), 율법조항 (마 22:34-40) 등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질문하심으로써 논쟁을 일으킨 경우도 있다 (다윗자손 마 22:41-46).
(4) 기도
예수께서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하셨고 (눅 3:21), 기도로 마치셨다 (마 26:36-46). 예수께서는 결정적인 전환점들에서 항상 기도하셨다. 예수의 기도는 특히 누가복음에 자세하게 진술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마 3: 눅 3:21), 열두 제자를 부르시기 전에 (눅 6:12), 베드로가 신앙고백하기 전에 (눅 9:18),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면서 변화산에서 (눅 9:28이하), 수난 전에 (눅 22:40-44), 십자가 위에서 (눅 23:34,46). 예수께서는 홀로 (눅 5:16; 9:18; 11:1), 산에서 (눅 6:12; 9:28; 22:39,41), 들에서 (눅 5:16), 오랫동안 (눅 6:12), 무릎을 꿇고 (눅 22:41,44) 기도하셨다.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뢰와 고집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눅 11:5-8,9-13), 기도를 경시하거나 중지해서는 안될 것을 가르치셨다 (눅 18:1; 21:36). 예수의 대표적인 기도는 복음사역 중에 드린 감사기도 (마 11:25-27), 제자들을 위하여 드린 중보기도 (요 17장), 고난을 앞두고 드린 수난기도 (마 26:36-46)를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하여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다 (참조. 조병수, 하늘과 땅을 엮는 사람들. 주기도문 해설, 도서출판 하나 1998, 103쪽). 주기도문은 기도의 잘못된 내용을 교정한다.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방지한다. 중언부언은 기도응답이 사람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신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기도에 대한 회개요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주기도문은 주님의 관심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는 분으로서 기도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이다. 기도를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천상적인 세계에 참여하며, 하나님이 사람의 지상적인 생활에 참여하신다. 이것이 기도의 영광이며,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영광이다. 기도를 통하여 사람은 세상과 인생을 다르게 보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생활에 참여해주시는 사람으로서, 영광된 신분을 가지고 세상과 인생을 본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광된 하나님의 위치에서 비참한 인간의 형편을 바라본다 (변화산 하산 눅 9:37-43).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 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있는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간의 비참을 치료하는 일에 능력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2) 예수의 병 고침
둘째로 예수의 치료하심을 보자. 예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질병과 죽음이 예수에게 굴복하였다. 예수께서 치료하시는 주요동기는 사람의 비참함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며 (마 9:36), 주요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요 9:3). 예수께서는 치병기적으로써 구약성경을 성취하신다 (마 8:17). 예수께서는 치병시에 자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마 9:27 등등). 이것은 예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인 통지자로서의 다윗의 아들인 메시야 상을 깨뜨리고 인간적인 치료자라는 새로운 메시야 상을 설립하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의 치병기적은 주로 십자가에서 죽음당하실 것을 예언하시기 전의 시간에 몰려있다. 물론 십자가에서 당하실 죽음을 예언하신 후에도 병을 고치시기는 하였다 (마 17:14; 19:2; 눅 22:51). 그러나 치병기적의 비중은 십자가 죽음예언 이전에 무겁게 놓여있다. 이것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예수사건을 구속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실현된 동반사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예수의 제자
예수께서는 활동의 처음부터 제자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눅 6:13,17에 보면 예수의 제자그룹에 대한 사분법적인 표현이 나온다. 제자들 (눅 6:13), 열두 제자 (눅 6:13), 제자의 큰 무리 (눅 6:17), 백성의 큰 군중 (눅 6:17). 예수는 열두 제자가운데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측근으로 두었다. 예수께서 특히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
예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눅 14:26-35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와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눅 14:26,27,33 "능히 나의 제자일 [ ] 수 없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수의 제자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가?
1) 미워하는 사람 (눅 14:26)
첫째로 예수의 제자는 미워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일 수가 없다" (26)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미움을 가르치신다. 이 말은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께서 부모를 미워하라니. 예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째 계명을 포기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후에 영생을 얻는 길에 관하여 묻는 관원에게 다섯째 계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려주셨다 (눅 18:20). 예수께서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일이나 가족을 멸시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면 예수께서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예수의 제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목숨에 절대성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들을 상대화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절대성을 오직 예수에게 두어야한다. 미워하라는 말은 덜 사랑하라는 말이다. 예수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와의 결속 외에 다른 모든 결속은 "미움"아래 놓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타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목숨을 예수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서 있는 모든 관계들은 "주안에서" 비로소 그 권리와 의미를 얻는다". 모든 관계를 예수로부터 이해하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왜 그런가? 첫째로 예수로부터 사람을 이해하면 인간의 연약함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에 의하여 인간의 필요와 부족과 비참함이 드러난다. 이때 예수의 제자는 이 연약한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의 제자는 실제로 완벽하게 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예수에게 의존할 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완전하게 실현된다. 둘째로 예수로부터 사람을 이해하면 예수의 마음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보면 사람이 그처럼 사랑스럽고 귀하게 보인다 (특히 이것은 생명의 존엄이 땅에 떨어진 우리 시대에 중요한 일이다). 예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게 된다. 인간의 작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큰 사랑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결은 예수에게 절대성을 두는 것이다.
2) 십자가를 지는 사람 (눅 14:27)
둘째로 예수의 제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지 아니하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일 수가 없다" (27)고 말씀하신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로마에 반역한 노예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처참하게 십자가형을 당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의 노예인 스파르타쿠스 (Spartacus)가 주전 73-71년에 일으킨 반란에서 결국 그의 추종자 6,000명을 로마의 장군 크라수스 (Crassus)가 로마에서 카푸아 (Capua)로 가는 길인 비아 압피아 (Via Appia)에서 십자가에 달았다. 노예들이 당한 십자가처형은 전설적인 이야기로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임을 의미했다. 십자가는 처형의 표시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처형의 길에 서 있는 죄인을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죽음에 처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자주 십자가를 진다는 표현을 쓴다. 자녀의 문제나 사업의 실패나 육체의 질병 등을 만나면 우리는 종종 "이것은 내 십자가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의 고통스런 짐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예수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진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때문에 죽음를 당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얻은 자들이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은 예수의 제자들은 이제 예수 때문에 손해를 당한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 순교. 예수의 제자들은 목숨을 잃는 순교를 각오한 자들이기에 일상생활 중에서도 순교의 길을 간다. 목숨을 잃는 큰 순교 앞에서 이익을 잃는 작은 순교를 받는다. 죄악을 멀리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불결을 제거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 예수의 제자들은 의를 뿜어낸다.
이것이 예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예수의 제자들의 능력은 신비로운 행위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손해를 보는데 있다. 이 세상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놀라는 것은 그들이 기적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위하여 손해를 본다는데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자들로서 예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하지 못할 일이 없다.
3) 재물을 멀리하는 사람 (눅 14:33)
셋째로 예수의 제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모든 재물을 떠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가 없다" (33)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기본적인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물건을 소유하지도 않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물질을 상대화시키라는 말이다. 물질주의적인 사고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거나, 물질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비유 중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눅 12:16-21)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 (눅 12:21)이다. 자기를 위하여 지식을 쌓아두고, 자기를 위하여 재능을 쌓아두고, 자기를 위하여 명예를 쌓아두고,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들이 이와 같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는 물질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라" (눅 12:33).
예수의 제자는 미워하고 십자가를 지고 재물을 멀리한다는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는 자신의 신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라는 존재의식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동인이 된다. 신분에 대한 의식이 사회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끝끝내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누가 큰 자인가. 좌우편 보좌 다툼 마 20:20-28).
4.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수 사건에서 최고의 절정은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막 8:31 "당해야만 한다"는 신적 당위성). 예수의 부활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실현하는 것이다 (고전 15:4; 참조. 눅 24:44-49).
1) 죽음
예수의 죽음은 일찍부터 예고되었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이후로부터 (마 16:21)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죽음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죽음에 관해서 거의 동일하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1) 입성
예수의 죽음은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예언대로 (슥 9:9)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마 21:1이하).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함을, 빌린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가난함을, 예언대로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순종함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선지자로 입성하시지만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가지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만들기 위하여 낮아지시고,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들기 위하여 가난해지시고, 사람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하여 종이 되셨다.
(2) 만찬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만찬을 베푸셨다.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을 베푸신 곳은 빌린 다락방이었다 (막 14:15). 이것도 역시 예수의 겸손함과 가난함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떡으로는 몸을 상징하시고, 잔으로는 피를 상징하셨다. 이것은 언약제정이었다. 예수께서는 잔을 주시면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막 14:24). 예수의 언약만찬은 살과 피를 내놓는 사랑과 은혜의 만찬이었다. 이 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예수의 사랑과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수난
배신. 유월절 만찬에서 한 제자가 예수를 배신할 것이 예고되었다 (막 14:7-21). 이것은 가장 가깝고 중요한 사람에 의한 배신이었다. 예수께 가장 가까이 있던 유다가 발꿈치를 들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체포. 예수께서는 감람산에서 체포당했다. 예수께서는 이때도 무력과 폭력에 대한 경고하였다 (막 14:48-49). 사랑은 폭력에 의해서 횡포를 당하지만, 폭력은 사랑에 의하여 용해된다.
도망.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였다. 예수는 홀로 남아 고독한 상태에 있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한 사람이 되셔야 했기 때문이다 (요 11:50; 고후 5:14). 예수는 한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야 했던 것이다.
(4) 심문
예수께서는 헤롯과 빌라도에게 각각 심문을 받고 결국 바라바를 택한 백성에 의하여 버림을 당했다. 정치가는 본래 자신의 뜻보다 백성의 뜻에 좌우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고, 인간은 원래 의인보다 강도를 좋아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심문을 당하고,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버림을 당한 것이다.
(5) 처형과 매장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른 두 죄수와 함께 처형을 당하고 몇 시간만에 절명하여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죽음과 싸우셨다. 예수의 죽음은 사망에 대한 대결이다. 예수께서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철저하게 죽였다.
2) 부활
예수께서는 안식일 첫날에 부활하셨다. 이로써 기독교인은 안식일 준수대신에 주일을 성수하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무덤을 비게 만들었다. 여자들이 제자들보다 먼저 빈 무덤을 방문하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부활의 몸을 가지고 폐쇄적인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을 전하시며 성령을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하늘에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시고 만유의 주로 다스리신다.
5.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고백
초대교회는 이러한 예수사건의 도식과 함께 예수에 대한 분명한 고백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예수의 활동을 받아들일때 자연적으로 결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고백적인 반응은 선포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고백을 가지고 다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게 된다. 기독론은 예수를 이해시키고 예수를 승인하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 기독론은 이러한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비록 예수께서 지상의 생애 중에 한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기독론적인 칭호들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인자칭호), 그의 활동과 설교는 이미 기독론적인 칭호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예수를 고백하고 선포하는데 적합한 기독론적인 칭호들을 (하나님의 아들, 주님,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인자 등)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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