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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제3부. 신론(2)-사도시대후 기적의 문제-기독교교리(4)/김효성

by 싯딤 2009. 4. 25.

제3부. 신론(2)

7. 사도시대 후 기적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사도 시대에 주셨던 기적들을 그 후의 시대에도 계속 주셨는가? 기적들은 신약 교회 시대에 계속되었는가? 오늘날도 기적은 가능한가?

(1)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속적인가?

후대 기적의 문제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전반의 영속성 문제와 관계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란, 고린도전서 12:8-10에 열거된 대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등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로마서 12:6-8에 증거된,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勸慰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소위 자연적 은사들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졌지만(고전 12:7),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과 확증을 위하여 주어졌다. 예를 들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방언, 방언 통역 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에 관계되고, 병고침, 능력 행함 등은 그 특별계시의 확증에 관계된다.

성경 역사에서 말씀과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주된 방법들이었다. 그것은 구약 시대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잘 증거되고 신약 시대에 사도들에게서도 그러하다. 특히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진리임을 확증하는 의미가 있었다(출 4:8, 30; 요 20:30, 31). 마가복음 16:17-20에 증거된 대로, 주께서는 귀신을 쫓아냄이나 방언이나 뱀을 집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이나 병 고침 등의 기적들을 통해 사도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진리성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2:3, 4은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표적’(sign)이라고 불린다.

사도행전 2:43과 5:12에 보면, 기적들은 주로 사도들을 통해 일어났다. 사도들은 신약 교회의 기초를 닦는 자들이었다(엡 2:20). 주께서는 그가 세우신 사도들에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많이 주셔서 자신의 뜻을 밝히 전달하고 확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2:12은 기적 행함을 사도들의 표라고 말한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별히 사도들의 증명서이었다. 그것들은 교회를 설립하는 하나님의 권위적 도구들로서의 사도들의 신임장의 일부분이었다”라고 했다.

그런데, 사도 시대에 충만했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교회 역사상 일찍이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역사상 사라졌다는 것은 교회가 경험한 바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가 되었다. 주후 4세기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수장(首長, Patriarch)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설교에서 방언은 이미 그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주후 5세기초 유명한 어거스틴도 요한일서 설교에서 방언은 유대 기독교인에게 주신 초기 표적이었고 이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고 가르쳤다. 칼빈도 사도행전 10:44 주석에서 “방언의 은사와 및 그 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했다.

교회 역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사도 시대의 특징이며 오직 사도 시대 교회에 속하고 그 후시대에는 그것들이 사라졌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사도 시대와 함께 끝났음을 인정하고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러므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누구든지 고린도전서 12-14장 같은 성경말씀에 근거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대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그렇게 섭리하셨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그 독특한 목적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독특한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이었으며 그 목적은 사도 시대에 신약성경이 다 기록됨으로써 성취되었다. 요한계시록 22:18, 19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성경에 충족하게 기록되었음을 증거하기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더 이상 주어질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을 거두어가셨다는 말이다. 워필드의 표현대로, “그것들의 기능이 그것들을 특별히 사도 시대의 교회에 제한시켰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 이것은 과거 수천년 동안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후에 그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구약성경이었다. 모세에게 주셨던 기적들은 그 후시대에 반복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단지 모세에게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시대에 전달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둘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보인다. 그 은사들은 영속적인 무엇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며 초보적이었다.

고린도전서 13:8-12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이런 성격을 자세하게 증거하였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질 것임이니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같이 내가 알리라”(직역). 특히, 이 은사들은 ‘온전한 것’이 오면 사라질 것이었다. 여기에 이 ‘온전한 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과 관계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충족하고 온전한 계시인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곧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은 자연히 폐지되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건물을 지을 때 비계목들을 설치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비계목들은 건물을 짓기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건물이 완성되면 비계목들은 철거되어야 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도 그러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나무의 지지대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만일 과수원에 나무를 심는다면 흔히 그 곁에 큰 지지대를 세워 붙들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과거 50년 간 있었던 사과나무를 지지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기적과 이상異像의 지지가 필요치 않는 나무다. 여러분은 이상보다 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과 신구약성경 말씀과의 관계는 마치 유치원과 대학교의 관계와 같다. 성령의 그 은사들과 기적들은 마치 유아들을 위한 것이나 유아시절의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신구약성경의 충만한 계시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러한 일시적, 초보적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은 마치 대학생이 유치원에 등록하여 무엇을 배우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을 구할 것이 아니라, 신구약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함으로써 그 말씀에 정통하고 충만하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2)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하여

오늘날 기독교회에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이 교회 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20세기 초엽에 오순절 교단들을 형성한 자들뿐 아니라 전통적 교단들 내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기독교계 안의 이러한 움직임을 통틀어 은사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운동은 다음 몇 가지 요점으로 비평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됨

첫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계속 존재한다거나 회복되었다고 주장함에 있어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과연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셨고 또 주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누구에게 계시하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있는지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시대 후 1,800년 동안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믿고 행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로운 계시 활동들을 통해 동일한 성경의 내용을 또다시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책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눅 16:31). 또한 앞에서 인용한 요한계시록 22:18, 19도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분명히 증거한다. 성경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에 대하여 엄중한 징벌이 선언되어 있다.

물론, 아무도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교회 역사상 거두신 은사들일지라도 다시 주실 수 있음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1,800년 동안 거두어 가신 은사들의 계속성이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을 반대하는 일이 된다.

사도 시대 이후의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파한 역사이었다. 사도 바울은 증거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다(고전 1: 22, 23). 물론 중생과 회개 같은 내면적 기적은 늘 일어났지만, 외적인 기적들은 교회 안에서 오랫 동안 사라졌었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이나 선교지에서 신기한 일들을 체험하는 것 등은 예외적이게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말씀으로 그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새 생활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성실한 순종이다.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됨

둘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 역사상 계속 존재하였고 오늘날 교회에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교회들은 성경에 증거된 계시와 예언, 방언, 병고침 등의 모든 은사들을 역사상 계속 경험하였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신실한 성도들과 종들에게 그런 은사들을 항상 주셨는가? 또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교회 역사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오히려 반대되는 것 같다.

첫째로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경 외의 계시와 예언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책의 내용 외에 다른 것을 더하지 말라고 엄히 명령한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 외에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역사상,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는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장하였으나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8세기 에드워드 어빙이 세운 카톨릭 사도교회는 모든 사도적 은사들을 주장했고 예언도 했으나 어떤 예언들이 성경과 충돌하고 또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정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안식교, 몰몬교, 및 신비주의 집단들이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들을 말했지만, 다 이단들로 간주되었다.

둘째로 방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을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방언이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 은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이었으나, 오늘날의 방언 현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글로싸 gλώσσα 는 단순히 ‘언어’를 가리킨다. 또한 이 단어는 빈번히 글로싸이 gλώσσαι 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방언들이 여러 개의 언어들임을 나타낸다.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들이 사도행전에 증거된 방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추측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방언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 사실들과 동시대의 현상이며, 따라서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방언 은사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대체로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 같다. 도날드 버딕은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들을 열거하기를,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두드러지게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방언의 영어 통역 시 주로 17세기 초의 킹제임스 역 문체가 사용된다고 하였다. 미쉬간 대학교의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 관계의 유진 나이다 등의 언어학자들도 오늘날의 방언들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 언어와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방언 같은 현상들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이단적 종파들 속에도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초대교회의 몬타누스파는 방언을 했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방언 현상은 교회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면서 방언을 했다. 이단적인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의 장로들도 미국 유타주의 그들의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했다. 그러므로 방언 같은 현상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오늘날 은사운동에서 인위적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마귀적이다. 예를 들어, 1987년 7월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모인 ‘성령과 세계전도에 관한 북미 대회’에 관한 한 보도에 의하면, 한 저녁 집회 후 성령세례 받을 자들을 위한 집회에서 인도자는 자기의 ‘기도 방언’을 따라하게 함으로써 참석자들로 하여금 방언 현상을 체험케 했고 그들에게 그것이 성령세례이며 하나님이 주신 방언임을 믿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제재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 사례들은 결코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사도 시대의 신자들은 성령이 오신 표로서 방언을 하는 경험을 했었다. 그러므로 방언 훈련은 명백히 성경의 모범을 벗어난 행위요, 성령의 은사를 인간적 훈련으로 받게 하려는 거짓되고 마귀적인 행위이다. 그런 행위가 하나님의 일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물론 그것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주신 방언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 시대 이후 1,800년 동안 거두어 가셨던 은사들을 그 후에 정말 다시 주실 것인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방언 비평가들은 현대의 방언 현상들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가짜(위조품)거나 혹은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날 방언 현상들의 비(非)언어적 성격이나 방언운동 안의 인위적 요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보인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서도 그렇게 불같이 일어나는 것은 악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무슨 영의 역사이겠는가?

셋째로, 병고침(신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순히 병고침의 현상들이 그것들이 성령의 은사임을 확증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병고침의 현상들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신비주의 연구가 쿠르트 코흐(Kurt Koch)는 악령에 의한 신비적 치료의 많은 사례들을 제시한다.

더욱이, 성경에서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는데, 오늘날의 병고침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이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고침의 특징들을 열거하기를, ① 한마디의 말씀이나 한번의 만짐으로 치료하셨다(막 8:22-26에서 소경에게 두 번 안수하신 예외적 경우는 있었으나), ② 즉시 치료하셨다, ③ 완전히 치료하셨다, ④ 모든 사람을 치료하셨고 치료하실 수 있었다, ⑤ 신체 기관의 질병들도 고치셨다, ⑥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병고침과 신유의 은사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킴

크게 셋째로, 은사운동은 성경적 기독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 불만족하며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즉 은사운동은 체험적 기독교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의 중심을 성경 교훈의 실천보다 신비 체험에 둔다. 강조점이 말씀에서 경험으로 이동된다. 성경말씀으로 만족하던 신앙생활이 경험의존적인 신앙생활로 변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옛길이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인 건전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영성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이지, 어떤 은사 체험이나 은사 시행이 아니다. 은사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이 사실에 대한 성경의 예는 고린도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경험하고 소유한 교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7)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와 같이, 1987년과 1988년에 미국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미국의 짐 배커와 지미 스웨거 같은 어떤 은사주의 T. V. 전도자들의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생활들은 기독교계의 수치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은사 경험에 있지 않고 거룩한 인격과 생활에 있음을 많은 이들에게 다시 깨닫게 하였다.

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附從)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 직역).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알지 못했으니-원문]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린도전서 13:1-7은, 성령의 어떤 은사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랑의 인격과 생활임을 밝히 증거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3:8-12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초보적이고 부분적이며 어린아이 시절의 것이고 장차 ‘온전한 것’이 올 것을 증거하였다. 신구약성경은 바로 그 온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크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구하지 도 말고 그것들을 사모하지도 말고, 오직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알자. 오늘날 성경의 교훈을 믿지 않는 자들은 비록 기적을 볼지라도 믿지 않을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6:31).

교회연합운동과 함께감

넷째로, 은사주의자들은 전통적 교회의 목사들이 체험치 못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체험했고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바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은사운동은 오늘날 배교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우상숭배적인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는다. 은사운동은 오히려 오늘날 모든 세계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1987년 성령과 세계전도에 관한 북미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하였다. 이 미혹의 예언은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은사주의자들도 분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적 순복음 강남 신학원 교수진에는 자유주의적 한신대, 감신대, 연대신대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은사운동은 오늘날 잘못된 교회 연합 운동의 촉매로서 나타나 그 운동을 촉진시킨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 주신 부흥의 표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오늘날 교회의 영적 무지와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 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아야 한다. 성경은 신자의 삶이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성령 충만한 삶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러나,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이라는 증거를 갖지 않는다. 도리어, 그 운동의 여러 가지 잘못된 요소들과 경향들은 그 운동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게 만든다. 은사운동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현대 교회의 영적 부흥의 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대 교회에 불어닥친 추가적 영적 혼란의 일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과 신자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만일 현대 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이 아니라,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특히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죄악을 용납하고 죄악과 타협하는 죄악된 삶에 기인한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왔음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 경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들에 있지 않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성경 말씀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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