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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제1부. 신학이란-기독교교리(1)/김효성

by 싯딤 2009. 4. 25.

출처:기독교 교리 <김효성 지음>

저자 김효성: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B.A.). 총신대학 신학연구원 졸업(B.D. equiv.).

미, 페이스(Faith) 신학교 졸업(Th.M.). 미, 밥죤스(Bob Jones) 대학교

대학원졸업(Ph.D.). 계약신학대학원 교수, 합정동교회 담임목사

 

제1부 신학이란

1.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1) 신학의 개념

신학神學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학學이란 “체계적 연구에 의해 얻어진 사실이나 원리에 대한 지식” 즉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된다. 이것을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신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조직신학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인 성경에만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고 서술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을 단순히 신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 경험의 학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개념을 배격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객관적 성경 말씀에서만 찾는 것이 바른 태도이며 역사적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찰스 핫지는 말하기를, “(신학의 목적은) 성경의 사실들을 체계화하고 그 사실들이 내포하는 원리들이나 일반 진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학은 교의학敎義學(dogmatics)이라고도 불린다. 교의는 니케야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같이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진술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교의란 교리( doctrine)와 구별된다. 교리는 말로 표현된 진리이며 진리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교의는 보다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진술이다. 그러므로 교의학은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진술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된다.

 

천주교회는 교의가 교회의 회의나 전통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는 교의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확신한다. 반틸은 말하기를, “교회의 신조들은 그 내용에 관한 한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교의는 성경 진리의 체계적 진술이므로, 교의학은 내용적으로 신학 혹은 조직신학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교의학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학문적 체계”로 정의했고, 박형룡 박사는 “바른 교의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의 질서 있는 논술을 제출하기를 추구한다... 교의학은, 즉,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이다.” 라고 말했다. 즉 신학, 조직신학, 교의학은 다 동의어로 사용된다.

 

교회 역사상, 기독교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을 위해 여러 가지 용어들(sententiae, summa, loci communes, institutio)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2세기에 아벨라드(Peter Abelard)에 의해 처음으로 ‘신학’이라는 말(데올로기아 theologia)이 이런 용어로 사용되었다. 종교개혁 후 ‘신학’이라는 말이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 점차 많이 사용되었다. 17세기부터 ‘교의신학’이라는 말도 사용되었으나 오늘날 ‘조직신학’ 이라는 말이 ‘교의신학’ 혹은 ‘교의학’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많이 말해지는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그 연구방법에 있어서 조직신학과 달랐다.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주제별로, 논리적으로 정돈하려고 하지만, 성경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역사적으로, 연대순으로 정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둘은 다 성경의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조직적’ 신학이었고, 그것이 성경만을 자료로 삼고 성경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성경적’ 신학이라고 불리울 것이다. 그러나 성경신학 개념은 즉시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채용되었고 그들에 의해 교의학과 대립하고 그것을 비평, 수정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오늘날 성경신학들은 때때로 성경의 중심 주제도 파악하지 못한 채 초보적 단계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 주제는, 조직신학이 정리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조직신학은 구원이라는 주제 아래 왜 구원이 필요하였는지,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 구원받은 자들의 삶과 소망은 무엇인지 등을 논하였다. 성경은 구주 예수에 대해 증거한다(요 5:39).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썼다(딤후 3: 15). 성경 내용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오늘날, 신학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교회사나 목회학에도 역사신학이나 실천신학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또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 소위 상황신학의 개념들이 유행하고 있고 심지어 통일신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학’은 어떤 특정 주제 혹은 분야에서의 하나님의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이라는 말의 정확한 용법은 아니다.

 

2) 신학의 성격

신학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신학의 몇 가지 성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신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신학은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경에서 그리고 성경에서만 나와야 한다. 성경 밖의 자료들은 단지 성경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보조물에 불과하다.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적인 신학만이 참신학이다.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논하는 모든 개념들과 사상들은 바른 신학이 될 수 없고 오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의 기초인 성경을 불신임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작부터 잘못이었고 그 결론도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성경이 파괴되는 곳에서 신학을 논할 수 없고, 성경 없이 논의되는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을 성경에 기초시키는 대신 신학의 문화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혹시 어떤 시대의 철학적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한 용어들은 표현 형식에 불과하고 그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은 순전히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어야 하며, 어느 시대, 어느 문화의 사상을 혼합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느 신학이든지 비성경적 사상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평하고 배제하여 순수한 성경적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신학은 교회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비록 처음에 개인이 깨닫고 믿고 고백하기 시작할지라도,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구약의 이스라엘이든지 신약 교회이든지 간에--공동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선언하고 체계적으로 진술할 권세를 주께로부터 받았다.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딤전 3:15). 이 교훈의 권세는 단지 어느 시대까지의 교회나 교회 회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교회 회의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어떤 개인의 사사로운 견해에 그쳐서는 안되며 교회의 공동적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학의 교회적 성격은 그것의 공동적 신앙고백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역사적, 전통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신학적 활동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오늘 우리들이 가진 신앙 고백들은 전시대의 신앙 선조들의 기도와 수고의 결실이며, 그 배후에 성령의 섭리적 지도와 후원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역사적 신조들과 신앙 고백들을 중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바른 신학의 정립과 성실한 전달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신학들이 난립하며 성경적 신학이 없는 것과 같이 보이는 오늘날 시대에, 성경적 믿음과 확신이 없고 신실함과 충성심이 없어 보이는 이 시대에, 바른 신학의 정립과 전달은 더욱 절실한 과제이다.

셋째로, 신학은 권위적이다. 신학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또한 권위적이다. 기독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른다. 성경의 신적 권위성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의 신적 권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신학도 당연히 신적 권위를 가진다. 만일 신학이 성경의 진리들을 바르고 충실하게 제시하고 반영한다면, 그 신학은 성경과 같이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듯이, 성경적 신학은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직 성경만 최종적 권위를 가짐을 믿는다. 우리는 신학이 성경과 달리 오류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오류에 떨어진 부분들은 언제든지 성경에 의해 교정될 수 있고 교정되어야 함을 믿는다. 오직 성경만 교회의 오류 없는 최종적 권위이다. 그러나 신학이 성경에 충실하고 그 진리를 바르게 제시하는 한, 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존중하듯이, 신학도 신적 권위의 진술들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신학은 불변적이다. 물론 신학의 불변성은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것이고, 그 정돈 방식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의 정돈 방식은 변할 수 있으며 역사상 실제로 변해 왔다. 신학적 방식의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신학적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주후 2세기는 기독교 변증학의 시대이었고, 3세기와 4세기는 신론, 5세기는 인간론과 기독론, 그리고 중세 시대에 이어 종교개혁기에는 구원론과 교회론, 그리고 오늘날에는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많다. 이런 과정들을 통하여 신학의 정돈 방식은 다듬어져 왔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보다 촬스 핫지의 조직신학은 더 정리되어 있고, 핫지의 책보다 루이스 벌코프의 것은 더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한,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가진 한, 그것은 또한 불변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의 내용이 변할 수 없듯이, 성경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기본 내용은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 말에도 초대 교회의 사도 신경이나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믿고 고백하며, 17세기의 정통적 신앙고백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믿고 고백하며 사랑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칼빈과 핫지 등의 정통적 개혁 신학자들의 글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행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 시대마다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신학의 근본적 내용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 진리들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것은 실로 이단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불변적임과 같이, 성경적 신학은 그 기본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신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진리의 정돈 방식 즉 신학의 제시 방식은 변할 수 있을지라도, 그 근본 내용들은 결코 변할 수 없다.

3) 신학의 필요성

신학은 왜 필요한가? 첫째로, 사람에게 있는 체계적 지식에 대한 기본적 욕구 때문에 신학이 필요하다. 지식의 체계화는 사람의 기본적 욕구이며,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의 단편들뿐 아니라 그 전체를 알기 원한다.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을 추구하므로, 그것은 모든 진지한 성도들의 기본적 욕구에 충족이 된다. 반틸은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진리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도할 때나 처음 믿는 자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논리정연하다. 그것들은 앞뒤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논리 정연한 제시는 설교나 강의를 더욱 힘 있고 효과적이게 만들 것이나, 혼란한 개념이나 모순된 논리는 그것의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록 단순히 사람의 논리로만 활동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논리를 거스려 활동하신다고 상상해서도 안 된다. 건전한 설교와 교훈은 반드시 건전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훌륭한 설교가 촬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대 신학자들이 있기 전에는 대 전도자들이 결코 있지 못할 것입니다. . . . 천박한 학생들 중에서 영혼을 움직이는 대 전도자들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셋째로, 교회의 사상적 일체성을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교회의 일체성은 유형적이기 전에 먼저 영적이며 교리적이다. 교회는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서 한 몸을 이룬다. 정통 신앙을 가진 자와 이단자가 하나를 이룰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은 “다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하였고(고전 1:10), 또 “믿음은 하나이요”라고 말했다(엡 4:5). ‘같은 믿음’(딛 1:4, 코이네 피스티스, common faith)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연합의 기초이다.

비록 신학들의 불완전함과 상호 간의 차이가 교파 형성의 주요 원인이 되었지만, 참된 신학은 교회의 일체성의 방해물이 아니고 오히려 그 매개물이요 접착물이다. 사실, 사상적 일치가 없는 외형적 일치는 공허하며 위선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신학적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사도신경,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과, 촬스 핫지, 루이스 벌코프, 박형룡 등 교회의 인정된 조직신학들은 교회의 일체성의 표시요 증거이다.

넷째로, 이단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사실, 이 목적은 역사상 신학 정립과 발전에 매우 중요하였다. 이단들은 성경의 일부분을 부정하거나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단들이 성경을 완전히 저버리는 경우는 쉽게 식별할 수 있겠지만, 성경을 가지고 잘못 해석하여 강조하거나 적용할 때 그들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인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단들의 교묘한 오류를 분별하고 폭로하고 배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단들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진리들의 부분적 지식이 아닌, 체계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목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체계적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 즉 신학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2. 신학의 방법, 분야들, 역사

(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완전하고 무한하신 분이시며 사람은 피조물이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 욥기에 소발이 “내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하고(욥 11:7) 엘리후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한 것은 정당한 말이다(욥 36:26). 아다나시우스는 “사람은 능히 하나님의 옷자락을 알 뿐이요, 그 나머지는 그룹들이 날개로 가리웠다”고 말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제한되고 왜곡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6- 27), 그리고 이제 성경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하여, 비록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했고(호 6:3), 이사야 선지자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예언했다(사 11:9). 주 예수께서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하는 칸트의 지식론이나 인간이 진리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불가지론자들의 사상은 정당하지 못하다. 특히 회의주의자들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자신들의 지식에 대해 신념을 가지는 것은 자기모순적이다.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그들의 신념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사상에 반대된다.

(2) 신학의 방법--세 가지 원리들

신학의 방법, 즉 하나님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흔히 세 가지 원리로 표현된다. 첫째는 ‘존재의 원리’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자신과 온 세계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학자 중에 학자시요 과학자 중에 과학자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시다. 사람의 모든 지식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일반 학문도 그러하지만, 신학은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닮은 지식이요, 그 지식을 조금 나누어 가진 부분적 지식에 불과하다. 사실상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를 떠나서는 그에 대해 확실하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예수께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또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복음 진리]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했다(고전 2:10).

둘째는 ‘지식의 외적 원리’이다. 이것은 성경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유일한 원리로 보나(Francis Turretin, Herman Bavinck 등), 다른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일차적 혹은 중심적 원리로 그리고 자연 계시, 하나님의 섭리, 그리스도인의 경험 등을 신학의 부수적 원리로 본다(B.B.Warfield 등).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여러 특별한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내용을 성경에, 성경에만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그 유일한 저장소인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객관적 원천이다.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든 못하든 간에,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객관적 형태로, 완전하게 제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또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했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성경을 떠나서는 기독교 진리를 논하거나 기독교 신학을 정립할 수 없다.

셋째는 ‘지식의 내적 원리’이다. 그것은 믿음과 이성을 가리킨다. 죄인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 믿음은 거듭남의 증거이다. 누구든지 참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참지식의 시작이다. 마태복음 11:27,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믿음의 지식은 성령의 내적 활동에 의해 생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말씀과 함께 활동하셔서 그러한 지식을 주신다. 성령의 내적 활동이 없이는 아무도 참된 믿음과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기독교 신앙과 지식은 단순히 인간에게 내어 맡겨진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역이다. 성도의 확신의 근거도 성령의 내적 활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에서 온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다(요 16:13).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고(고전 2:12), 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고전 12:3). 사도 요한도,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말했다(요일 2:27).

그러나 이미 믿은 자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이성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첫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이해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백치白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만한 지식을 갖기 어렵다.

둘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성령의 증거는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을 배제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전도할 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2-3)고 하였다. 바울은 다른 곳들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행 18:4; 19:8; 20:7). ‘강론하다, 증명하다’는 말은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 등 이성의 활동을 가리키거나 내포한다.

핫지는 말하기를, “성경은 도무지 상당한 이유에 의함이 없이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워필드(B. B. Warfield)도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요 불합리할지라도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불합리한 믿음, 즉 정당한 이유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셋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정돈한다. 하나님의 진리들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학문은 정돈된 지식 혹은 지식의 체계화이며, 이성의 작용과 활동이 없이는 어떤 학문도 있을 수 없다.

(3) 신학의 잘못된 방법들

기독교 역사상 신학의 몇 가지 잘못된 방법들이 있었다. 첫째로, 신학의 잘못된 방법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교권주의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방법이다. 그 대표적 예는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이다. 로마 교회는 이론적으로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함께 권위 있게 여기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를 성경보다 더 권위 있게 본다. 그들은 교회(교황과 회의들)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진리의 최종적인 무오한 해석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교회 혹은 교황이 무오하다는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교황들은 실제로 무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말씀하셨고(마 15:3), 또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기도 하셨다(마 16:23). 이 말씀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을 범할 수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을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실상 천주교회의 역사는 교황 무오의 교리에 반대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가 마리아의 무죄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가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으나 이것들은 다 비성경적이다. 또 그레고리 1세(590-607)는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으나, 보니페이스 3세는 607년 그런 칭호를 받았다. 또 씩스투스 5세(1585-90)는 성경 읽기를 권장했으나 피우스 7세(1800-23) 등 여러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했는데 이런 모순된 선언들은 어느 한쪽이 분명히 오류이다.

교회의 권위는 무오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영감과 배려로 사도들을 통해 신약을 오류 없이 기록되게 하셨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훈은 스스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성경적일 때만 권위를 가진다.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권위이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교회와 교회의 교훈들의 권위에 의존해서는 안되고 오직 성경의 권위에 의존해야 한다.

둘째로, 신학의 또 하나의 잘못된 방법은 이성주의이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을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성은 진리의 최종 판단자로서 이성에 맞는 것은 진리요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비진리가 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잘못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짐에 있어서 사람이 최고 권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지만 사람은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다. 사람이 우주와 우리 자신의 구조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주와 사람의 창조자이신 완전자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욥기 11:7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했고,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책망하셨다(마 22:29).

더욱이, 자연 이성 즉 타고난 대로의 인간 이성은 죄로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의 바른 원천이 될 수 없다.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고(고전 1:21), 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고 했다(고전 2:14). 또 그는 말하기를, “저희[이방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고 했다(엡 4:18).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사실, 이성주의는 신학을 철학화한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셋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경험주의이다. 이것은 사람의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것이다. 이성주의와 정반대로, 이 견해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진리에서 제외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나머지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슐라이엘마허는 신학을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경험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릿츨은 신학을 사람의 종교 도덕적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잘못이다. 유한자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겸손히 의존해야 한다. 또 사람은 현재 하나님의 진리들을 다 경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천지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 밖의 과거의 특별계시의 일들, 그리고 장차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 등을 경험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7-29)라고 하셨다.

더욱이, 사람의 종교적 경험이나 감정은 진리와 오류,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 아닌 것을 혼동하기 쉽다. 이방 종교인들도 매우 종교적일 수 있다. 구약의 바알 숭배자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열왕기상 18:28에 보면,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고 말했다. 아덴 사람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사도행전 17:22에 보면,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고 말했다. 종교적 감정이 종교에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단순히 종교적 감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사람의 도덕 의식도 그러하다. 양심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의 양심은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무디어졌기 때문에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 의식에 기초한 도덕적 신관, 도덕적 종교는 완전치 못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다(롬 3:10-12). 실상, 신학의 경험주의적 방법은 신학과 종교 심리학을 혼동하고 있다. 경험주의가 종교 심리학은 될 수 있으나, 신학은 될 수 없다.

넷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신비주의이다. 이것은 경험주의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을 신학의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하시고 전달해 주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내적인 빛 혹은 내면적 음성이라고 부른다. 교회 역사상,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했다(딤후 3:16). 또 이사야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사 8:20). 신비주의는 이성의 정당한 기능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하고 정상적인 인식과 판단의 도구이다. 덧붙여, 신비주의적 방법에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명확히 분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빈번히 탈선하는 데로 나아간다.

(4) 신학의 분야들

넓은 의미에서 신학은 다섯 분야로 나뉜다. 첫째로, 구약 분야는 구약원어(히브리어, 아람어), 구약개론, 구약강해 등이 있다. 둘째로, 신약 분야는 신약원어(헬라어), 신약개론, 신약강해, 본문비평학 등이 있다. 셋째로, 교리 분야는 조직신학, 현대신학, 이단종파비판, 기독교 윤리 등이 있다. 넷째로, 역사 분야는 교회사, 교리사 등이다. 다섯째로, 실천 분야는 목회학, 설교학, 기독교 교육학, 교회헌법, 선교학 등이다. 구약과 신약은 성경 자료를, 그리고 교회사는 역사 자료를 제공하여, 교리와 윤리의 체계적 지식을 확립케 한다. 또 구약, 신약, 교리, 역사는 이론적 분야이고, 목회학 등은 실천적 분야이다.

위의 다섯 분야 중에서, 본래 신학이 의미했던 조직신학은 일곱 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첫째로, 서론은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방법, 계시, 성경의 정경, 신적 권위성, 본문 문제, 명료성, 해석 원리들, 영감, 무오성 등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되는 성경에 관해 논한다. 둘째로, 신론은 하나님의 속성들, 삼위일체, 예정, 창조, 섭리, 기적 등에 관해 논한다. 셋째로, 인간론은 인간의 기원, 구성 요소, 행위언약, 죄의 본질, 구별, 형벌, 은혜언약 등에 관해 논한다. 넷째로,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일인격성一人格性, 그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그의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 등에 관해 논한다. 다섯째로,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혜, 부르심, 중생重生, 회개와 믿음, 칭의稱義, 성화聖化, 성도의 견인堅靭과 영화榮化 등에 관해 논한다. 여섯째로,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 속성, 참 교회의 표, 교회의 권세와 임무, 조직과 정치, 은혜의 수단, 성례 등에 관해 논한다. 일곱째로, 종말론은 육체적 죽음, 죽음 후의 상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천년왕국, 마지막 심판, 천국과 지옥 등에 관해 논한다.

(5) 신학과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신학과 다른 학문들과 관계는 어떠한가? 신학과 변증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변증학의 성격에 의해 설명된다. 벤쟈민 워필드 같은 학자는 변증학이 신학체계의 서론적 분과로서 하나님, 종교, 계시, 성경 등 기독교의 기초적 원리들에 대한 이성적 변호의 학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 같은 학자들은 변증학이 기독교 진리들에 대한 공격에 대항한 성경적 답변의 학이라고 이해하였다. 이 견해에서는, 신학의 내용이 변증학에 그대로 활용될 수 있다.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철학과 신학은 우주의 근원, 인간의 존재 의미, 도덕적 선 등의 공통적 주제들을 취급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 경험, 혹은 직관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한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에게 어떤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양심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영생의 존재를 논증하였다. 또한, 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우주의 기본적 난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신학과 심리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심리학은 사람의 행위의 동기와 방식 등 사람의 심리 작용을 연구한다. 심리학도 종교 경험의 현상을 연구할 수 있으나, 빈번히 종교 현상을 단순히 자연적 현상으로 해석하며,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죄악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 진리들과 일치하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은 신학의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과 윤리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윤리학은 사람의 바른 행동 원리를 연구한다. 이것은 무엇이 선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와도 관계된다. 칼빈이나 촬스 핫지나 로버트 댑니 등의 신학자는 교리적, 신학적 논술에서 십계명의 해설 등 윤리적 주제들을 다루기도 하였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조직신학은 윤리학과 구별된다. 조직신학은 믿음의 내용을 논하고 윤리학은 행위의 원리를 논한다.

(6) 신학의 역사

1) 구 카톨릭 시대

3세기 초 오리겐의 제일 원리들에 관하여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신학적 문서라고 생각된다. 그가 다룬 주제들은 1권에서 하나님, 말씀, 성령, 및 천사, 2권에서 세계와 사람, 3권에서 죄와 구속, 4권에서 성경 및 전체 요약 등이다. 그러나 오리겐은 대 학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에는 영원 전의 창조, 인간 영혼의 선재先在 및 선재 상태에서의 범죄, 사탄의 회복을 포함한 보편구원론 등 많은 이단적 요소들이 있었다. 또 그의 풍유적(allegorical) 성경해석법은 후대에 큰 해를 끼쳤다.

4세기의 어거스틴은 사상적으로 대체로 건전하였다. 비록 그가 교회에 관한 감독주의적 견해를 가졌고 성례를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로마 천주교적 사상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의 죄악성과 은혜의 구원에 관한 그의 사상은 매우 성경적이었다. 그러므로 신학에서 어거스틴주의는 원죄, 인간의 전적 부패성,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 사역을 믿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는 라우렌티움을 위한 안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관하여(Enchiridion ad Laurentium: De Fide, Spe, et Caritate)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믿음의 제목 아래 믿음의 주요 조항들을 논했고, 소망의 제목 아래 기도를, 사랑의 제목 아래 윤리 문제들을 각각 논하였다. 이 외에도,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등 교리적 저술들을 남겼다.

8세기 중엽의 다메섹의 요한은 고대 동방교회의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정통신앙정해는 동방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책이었다. 이 책은 그의 지식의 원천이라는 책의 제3부인데, 그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하나님과 삼위일체; 2권-창조, 사람의 본질; 3권-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음부에 내려가심; 4권-그리스도의 부활, 다스리심, 믿음, 세례, 성상 숭배. 그의 책은 고대 동방 교회의 특징을 반영하는데, 사색적이며, 신학적으론 반半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설이며, 성례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2) 중세 스콜라 신학 시대

1세기 말의 안셈은 이태리 출생으로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이었으며 ‘스콜라 신학의 시조’ 또는 ‘제2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경건과 지식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독백과 대화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관해 논한 책이다. 이 외에도, 그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를 다룬 삼위일체의 믿음과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라는 책과, 예정론을 다룬 조화에 관하여, 그리고 속죄론을 다룬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나? 등의 저서를 남겼다.

12세기 중엽의 피터 롬바드는 이태리 출생으로 파리의 대주교를 지낸 자로서 서방 교회의 최초의 대 교의학자이었다. 그의 선언서(Sententiarum Libri IV)라는 책은 스콜라 시대의 최초의 주요한 교의학서로서 중세 시대 여러 세기 동안 신학 교본으로 사용되었다. 그의 책의 주제들은 1권-하나님(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 삼위일체 등); 2권-창조 세계, 천사; 3권-기독론, 구속; 4권-성례(최초로 일곱 성례로 분류함), 종말 등이다. 13세기의 알렉산더의 신학대전은 롬바드의 선언서에 대한 주석으로서 많이 읽혀졌다.

13세기 후반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신학자로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최대의 인물이며, 천주교회의 대 권위자이다. 그의 신학은 천주교회의 표준적 신학이었다. 그의 신학대전(Summa Totius Theologiae)은 미완성 작품이었고, 그것의 성례와 종말에 관한 부분은 다른 곳의 그의 글들 중에서 발췌하여 추가한 것이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1권-하나님과 그의 사역들; 2권-사람, 윤리학; 3권-그리스도, 은혜의 수단 등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의 신학의 형식으로 삼았고, 어거스틴주의를 그의 신학의 기본적 내용으로 삼았으나 중요한 많은 점들에서 그것을 수정하였다.

3) 종교개혁 및 신조 작성 시대

16세기 중엽의 죤 칼빈은 마틴 루터와 마틴 부처의 영향 아래 어거스틴주의를 부흥시켰다. 사도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핵심으로 하는 성경적 정통 신학은 고대에 어거스틴을 거쳐 칼빈에게서 밝히 정리되었다. 그의 기독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는 개혁교회의 ‘대전’(쑤마)라고 불리웠다. 그의 책에는 특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이 강하게 흐르고 있고 교리와 윤리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의 책의 주요 주제는 1권-하나님; 2권-그리스도; 3권-성령과 구원; 4권-교회와 성례 등이다. 칼빈은 또 많은 성경 주석들을 남겼다.

라이덴 대학의 네 명의 교수들이 쓴 순수신학개요라는 책이 개혁 교회의 세계에서 많이 읽혀졌다. 17세기 후반의 이태리 출신 스위스 신학자 프란시스 투레틴의 신학은 권위 있는 정통 개혁파 신학이며 그 후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에서 계승되었다. 그의 논변신학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iae)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중요한 신학 참고서가 되었다. 칼빈의 개혁파 정통 신학의 흐름은 투레틴과 같은 인물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다. 17세기 후반의 코체유스는 전통적 개혁파 신학의 형식과 내용으로부터 이탈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들을 중심으로 진리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프랑스의 소우물 신학교의 아미랄더스는 가설적 만인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개혁교회는 그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하지는 않았으나 경계할 오류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견해를 아미랄더스주의 혹은 소우물 학파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화란에서는 기스베르트 보에티우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청교도적 대 신학자 죤 오웬과 리차드 백스터 등이 있었다. 죤 오웬은 가장 엄격하였으나 ‘신학자들의 신학자’로 알려진 자이었고, 리차드 백스터는 가장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다 경건하고 정통적인 신학자였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개혁파 신조들로는 스위스의 제1 스위스 신앙고백(1536년)과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 화란의 벨직 신앙고백(1561년)과 도르트 신경(1619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영국 교회의 39개 신조(1563년),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1647년) 등이 있다.

16세기 후반의 필립 멜랑톤은 루터의 제자이었고 그의 저서 신학통의通義(Loci Communes)는 최초의 루터교 신학서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서의 순서를 따라 기독교 교리 체계 속에 성경의 기본 구절들과 그 해석을 모았다. 초판은 루터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어거스틴주의적이었으나, 그 후의 판들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변질되었다. 17세기 초의 죤 게하르트는 17세기 루터파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로서 신학통의라는 책을 썼다. 그는 멜랑톤의 입장에 반대하였고, 루터의 사상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초판(1530년)의 사상인 어거스틴주의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루터파 신조들은 루터의 요리문답(1529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 일치 신조(The Formula of Concord, 1577년) 등이다.

17세기의 에피스코피우스는 화란 라이덴 대학교의 신학교수 제임스 알미니우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설했으나 실상 그의 선생보다 더 나아갔다. 그는 신학강요라는 책을 썼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돌트 대회의 결정들에 항거하였으므로 항론파(Re- monstrants)라고 불리웠고 후에는 알미니우스파로 불리웠다. 파우스터스 소시너스의 라코 요리문답(1605년)은 소시너스주의의 신학서이다. 그는 삼위일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 타락과 원죄 등을 부정하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적 사랑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는 근대 유니테니안파(Unitarians, 일위신론자들)의 선조였다.

추기경 로버트 벨라민(1542-1621년)은 이 시대에 로마 천주교회의 대변자이었다. 기독교 신앙 논쟁에 관한 변론이라는 그의 책은 로마 카톨릭 신학의 완성된 해설서이었다. 그는 교황지상주의를 옹호했고 인간의 죄와 구원에 관하여는 반 펠라기우스적이었다.

4) 근세 시대(18세기 이후)

19세기 중엽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구 프린스톤 신학교의 조직신학자로서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871-73년)은 오늘까지 개혁파 신학의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1권-서론, 1부(신론); 2권-2부(인간론), 3부(구원론; 기독론 포함); 3권-3부(계속)(구원론 계속; 성화론에 십계명 해설과 성례론을 포함함), 4부(종말론) 등이다. 에이 에이 핫지(A. A. Hodge)는 신학 개용(Outlines of Theology, 1879년)라는 그의 책에서 부친 촬스 핫지의 신학 사상을 이어 받아 신학을 평신도들을 위해 평이하게 문답식으로 정리하였다.

19세기 후반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조직신학자이었다. 조직신학강의(Lectures in Systematic Theolo- gy, 1871년)라는 책은 그의 사후에 그의 강의록을 정리한 것이다. 윌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도 탁월한 조직신학자이었다. 그의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 1888-94년)은 1권-서론, 성경론, 신론; 2권-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성례론 포함), 종말론; 3권--보충 설명 및 교리사적 참조 등을 다루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개혁파 교의학(1895-1901년)은 지금까지 화란에서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훌륭한 조직신학(Systematic Theo- logy, 1939년)을 썼는데, 그것은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벌코프는 전통적, 정통적 개혁 신학을 그의 선배들보다 잘 정돈하여 전달하였다. 헤르만 훽스마(Herman Hoeksema)는 미국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의 학자로서 개혁파 교의학(Reformed Dogma- tics, 1966년)이라는 깊이 있는 개혁파 신학서를 남겼다

박형룡 박사(1897-1978년)는 벌코프의 책을 기초로 하여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참조하여 교의신학(7권, 1964-1973년)이라는 역작을 남겼다. 그는 그의 책 서문에서 그 책의 성격을 ‘편집’이라고 겸손히 표현하였지만, 그의 책은 실로 편집서 이상이다. 그 책은 한국의 장로교회를 위해 남겨진 신앙의 귀한 유산이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소위 ‘경건주의’라는 한 운동이 일어났다. 스페너, 프랑케, 랑게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교의학을 스콜라주의적 형식에서 해방하여 성경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세기 초의 쉴라이엘마허는 근대 자유주의의 시조로서 사람의 종교적 감정, 자의식, 경험을 교리체계의 기초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종교에 관한 강연과 신앙의 교리 등의 책을 썼다. 19세기 후반의 릿츨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교리 체계의 기초로 삼으려 했으며, 윤리적 기독교를 주창하였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했고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 도덕감화설을 취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기독교의 칭의와 화목의 교리다.

프란시스 피이퍼(Francis Pieper)의 기독교 교의학(Christian Dogmatics, 1950년)은 보수적 루터파 조직신학이다. 루이스 쉐이퍼(Lewis S. Chafer)는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이며 그의 조직신학(1947-48년)은 세대주의적 입장을 반영한다.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시조로서 교회 교의학(13권, 1936-62년) 등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객관적 기록으로 보지 않으며, 성경의 유오성有誤性을 주장하고,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틸리히는 매우 자유주의적 신학자로서 조직신학(1963년)을 썼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개념은 매우 철학적이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정하며, 하나님을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라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 그리스도의 성육신 등을 명백히 부정한다.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의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 1983-85년)은 가장 최근에 복음주의 진영에서 쓰여진 조직신학1이다. 그는 신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해 왔다. 그의 입장에 맞게, 그는 그의 책 첫 페이지에서 그 책을 신복음주의자 버나드 램과, 자유주의자 윌리암 호던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에게 바친다고 썼다.

3. 하나님의 계시

(1) 종교와 신학

1) 종교와 계시

참된 신학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연구해야 한다. 즉 신학은 경건하고 종교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요 시작이다(잠 1:7). 경건 없는 신학은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 종교(religion) 혹은 경건이란 하나님을 알며 두려워하고 그를 믿으며 높이고 그를 섬기며 순종하는 것이다. 칼빈은, 종교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진 신뢰심이며 그에게 대한 합당한 예배를 포함한다고 말했다.

인류 초기의 경건한 선조들은 경건한 삶을 살았다. 아벨, 셋의 자손들, 에녹, 노아 등의 삶이 그러하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렸다(창 4:4). 셋의 아들 에노스 때의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창 5:22). 노아는 의인이며 당세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방주를 짓고 거기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하였다(창 6:9, 22).

경건한 선조들의 종교는 하나님의 최초의 계시에서 기원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계시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주셨다(창 3:21). 그것은 그가 그 옷을 위해 짐승들을 죽였음을 의미하며 거기에 짐승 제사의 어떤 암시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렸고(창 4:4), 오랜 후 노아도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 번제로 단에 드렸다(창 8:20).

2) 종교의 두 요소

종교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째로, 종교는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 그리고 예배 의식들을 가진다. 이것은 종교의 객관적 요소이다. 구약에서 이런 요소는 ‘율법’(토라)이라는 말로 요약된다(신 1: 5). 그것은 또한 ‘말씀,’ ‘명령,’ ‘법도,’ ‘규례’ 등 여러 말로 표현된다. 구약의 율법은 도덕적 계명들과 교훈들 뿐 아니라, 또한 제사 의식들과 성전 예배 등을 포함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신 10:12-13). 신약에서 종교의 객관적 요소는 ‘복음’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것은 ‘말씀,’ ‘진리’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에베소서 1:13은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말했다. 신약의 복음은 또한 세례와 성찬 의식을 포함한다(마 28:19; 고전 11:23-26).

둘째로,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두려움과 경건을 포함한다. 이것은 종교의 주관적 요소이다. 구약에서 이런 요소는 ‘경외하다’는 말로 요약된다(잠 1:7). 그것은 ‘사랑하다,’ ‘듣다,’ ‘행하다,’ ‘지키다,’ ‘섬기다’ 등으로도 표현된다. 신약에서 종교의 주관적 요소는 ‘믿는다’는 말로 요약된다(요 3:16). 그것은 ‘예배하다,’ ‘섬기다’(요 4:24; 행 13:2; 롬 12:1; 딤전 4:7; 약 1:27)는 말로도 표현된다.

3) 종교의 좌소

종교 특히 경건의 좌소(座所, 자리)는 어디인가? 철학자 칸트는 종교를 사람이 그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주된 행위로 보았다. 헤겔은 종교를 포함하여 사람의 전全생애를 단지 사상 혹은 관념의 과정으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의 시조 슐라이엘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감정으로 보았다. 이처럼 종교의 본질을 어떤 이들은 의지의 면에, 어떤 이들은 지식의 면에, 다른 이들은 감정의 면에 치우쳐 이해하였다. 그러나 참된 종교 혹은 경건은 단순히 사람의 지식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세 요소 전체를 가진 ‘마음’(heart)에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했다(신 6:5).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도의 믿음을,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롬 6:17). 또 그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했다(롬 10:9-10). 마음에서 우러나온 두려움과 믿음이 참된 종교요 참된 경건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단순히 지식주의도, 감정주의도, 도덕주의도 아니요,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세 요소를 다 포함하는 마음의 문제 즉 전 인격의 문제인 것이다.

(2) 종교와 신학의 관계

종교는 삶의 문제요 신학은 사상의 문제이므로, 종교의 범위는 신학의 범위보다 더 넓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참된 종교는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종교가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맹목적 종교 혹은 미신(迷信)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기려는 자는 그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고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또 베드로 사도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권면하였다(벧후 3:18).

기독교는 단순히 감정주의 혹은 신비주의나 도덕주의가 아니고, 전인격적 마음의 종교이다. 이와 같이, 참된 종교는 반드시 건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바른 지식 없이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론, 바른 지식이 곧 믿음과 봉사는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른 지식 없이 바른 믿음과 바른 봉사는 불가능하다. 교회 목회의 경우도, 목사가 신학 지식만 가지고 목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바른 신학 지식 없이도 바르고 충실하게 목회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른 한편, 건전한 신학은 참된 종교 혹은 경건으로 나타나야 한다. 신학은 단순히 지식 활동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죽은 개념들만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종류의 신학 활동을 요구하거나 기뻐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구약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셨다(마 15:8).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지식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신학이 참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종교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만일 신학이 참된 경건과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신학은 이미 신학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잃은 것이다. 경건 없는 신학은 형식주의와 위선에 불과하다. 죽은 자가 어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해하며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건전한 신학은 반드시 참된 종교와 참된 경건으로 표현되며, 건전한 신학자는 먼저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2) 잘못된 계시 개념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되며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을, 즉 자신의 속성과 뜻을 나타내시는 행위이다.

역사상, 계시에 대해 잘못된 생각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자연신론(Deism)이다. 이것은 이신론理神論 혹은 초연신론超然神論이라고도 불린다. 자연신론이란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자연질서를 간섭지 않으시고 오직 자연만물을 통해서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인정하나 그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국 하나님의 기적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 등 하나님의 초자연 계시나 특별계시를 부정하고, 자연 계시나 일반계시만 인정한다. 초기 자유주의 신학은 대체로 이런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연신론은 성경의 계시개념과 명백히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가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그는 역사상 수없이 많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때때로 초자연적 기적들을 통하여 자연질서 속에 직접 개입하셨고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다른 하나의 오류는 범신론(Pan- theism)이다. 범신론이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 속에 충만히 내재해 계시며 자연만물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생각이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자연만물 곧 우주를 동일시한다. 또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자연만물의 일부, 즉 하나님의 일부로 보고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해 알 수 있고 논할 수 있다고 본다. 범신론은 자연신론과 달리 하나님의 초월성 대신 그의 내재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자연신론과 같이 범신론도 하나님의 자연계시나 일반계시만 인정하고 초자연계시나 특별계시는 부정하고 만다. 범신론에서는 엄격한 의미에서 인격적 하나님의 계시를 생각하기 어렵다. 오늘날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범신론적이다. 그러나 범신론은 성경의 계시 개념과 명백히 충돌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충만하시지만 동시에 세상을 초월해 계신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다(단 2:18; 3:26). 그는 세상이나 인간과 본질상 무한한 차이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결코 피조세계와 동일시 될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본성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3) 일반계시

하나님의 계시들에는, 그 방식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자연 계시’와, 하나님께서 기적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초자연 계시’가 있고, 계시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자와 일반적 섭리자로 나타내시는 ‘일반계시’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의 구주로 나타내시는 ‘특별계시’가 있다.

일반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자와 일반적 섭리자로 나타내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였다(시 19:1). 사도 바울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했다(롬 1:20). 또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셨다고 말했고(행 14:17), 그가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했다(행 17:27-28).

하나님은 또한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 혹은 생각과, 하나님의 도덕성을 반영하는 양심이 있다. 이런 것을 ‘종교의 씨앗’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했다(롬 1: 19). 또 그는 양심을 가리켜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롬 2:15). 뿐만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신다. 대체로,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징벌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상 전쟁이나 천재지변,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질병이나 경제적 고난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결과이다.

이와 같이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의와 선 등을 어느 정도 나타낸다. 그러나 일반계시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지 못한다. 뿐만아니라, 자연만물은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혼란과 부패 속에 있다. 땅은 저주를 받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7- 18). 저주받은 땅에는 자연적 재해들과 질병들이 가득하다. 피조세계는 지금 허무한 데 굴복하며 탄식하고 있다(롬 8:20-22). 그러므로 자연만물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매우 불완전하고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사람의 마음은 죄로 인해 어두워져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표현하였다(사 9:2).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묘사하기를, “저희 총명[이해력]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했고(엡 4:18)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고전 1:21).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죄로 인해 어두워져 있어서 일반계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제한된 지식조차도 가지지 못하며, 빈번히 헛된 우상숭배에 떨어진다(롬 1:21-23). 이런 점에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지극히 부수적 혹은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일반계시에 근거한 하나님의 지식을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과 피조물 간에 ‘존재적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학에서는 일반계시에 근거한 자연신학이 신학의 한 본질적 부분이다. 즉 천주교 신학은 이층 구조인데 1층은 자연신학이며 2층은 계시신학이다.

사람이 중생하기 전에는 영적으로 어두워 있어서 일반계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중생한 후에는 성령의 지혜와 깨달음을 받으므로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 일반계시에 근거한 자연신학은 불가능하지만, 중생한 자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회의 생각과 달리, 기독교 신학에서 자연신학은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보조적일 뿐이다. 또한 일반계시는 그 해석이 과장되거나 그 적용이 잘못되기 쉽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취급되어야 한다. 일반계시는 항상 특별계시인 성경의 빛 아래서 통제되어야 한다.

4) 특별계시

기독교 신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한다. 특별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의 구주로 나타내시는 행위를 가리킨다.

특별계시의 목적

사람이 일반계시만으로는 참하나님과 자신의 죄악의 심각성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필요하였다. 여기에 특별계시의 목적도 있다. 즉 특별계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하나님을 바로 알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계시, 곧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계시인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2-35).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은 그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6).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이렇게 진술한다:

비록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므로 사람들로 핑계할 수 없게 하지만, 그것들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는 데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특별계시의 방식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신현神現, 말씀, 그리고 기적이라는 세 가지의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는 영이시지만(요 4:24; 딤전 6: 16), 사람들에게 종종 자신의 모습을 직접 나타내셨다. 우리는 이것을 신현(神現, theophanies) 혹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고 부른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과 매우 친근히 교제하셨다. 그는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셨다’(창 3:8).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부르셨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2). 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달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불 가운데서 시내산에 내려오셨다(출 19:18).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만들어 드렸을 때도, 구름이 그것을 덮었는데,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표현하였다(출 40:34).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했을 때도 구름이 그 곳에 가득하였다(왕상 8:10).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천사 혹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창세기 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 이 세 사람 중 한 분이 하나님이셨다(10, 13절; 19:1 비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한 후에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증거했다(창 32: 24, 29, 30). 선지자 호세아는 그 사건에 대해 ‘야곱이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고 언급한다(호 12:3-4).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증거한다(요 1: 14).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주시기를 요청하는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바울도 디모데전서 3:16에서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전통사본)고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는 말씀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은 하나님을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모세는 자주 그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음성으로 ‘모세야’라고 말씀하셨다(출 3:4). 시내산 앞에서도 ‘모세가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셨다’(출 19:19). 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여호와께 말씀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다’(민 7:89).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하시기를,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였다’고 하셨다(민 12:8).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빈번히 꿈이나 이상異象으로 말씀하셨다. 그러한 현상들은 정신 없는 혼미한 상태에서 일어난 애매모호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명확한 계시 사건들이었다. 창세기 15: 1은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다’고 증거한다. 야곱은 꿈에 ‘여호와께서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창 28:12-13).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였다”고 말씀하셨다(민 12:6). 신약 시대에도 꿈과 이상은 종종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마 1:20; 행 9: 10).

하나님께서는 더욱 빈번히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말씀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전달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증거했다(벧후 1:21). 우리는 선지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특별한 감동의 방식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구별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등의 표현을 빈번히 사용하였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 시대의 우림과 둠밈도 이와 관련이 있다. 사무엘상 28:6은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증거한다. ‘우림과 둠밈’의 말뜻은 ‘빛과 완전함’이다. 그것은 대제사장 아론의 판결 흉배 안에 넣어두는 어떤 물건이었던 것 같다(출 28:30).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지닌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영의 깨닫게 하심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절정적 사건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었다. 히브리서 1:1-2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특별계시이며,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는 ‘기사,’ ‘능력,’ ‘표적’이다. ‘기사’(奇事, wonder)라는 말은 그것이 사람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능력’(power)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기적을 위해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표적’(sign)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는 표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세 단어 중, 표적이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적[표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셨다(신 4:34-35). 요한은, 자신이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몇 가지 증거하는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요 20:30-31).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다’고 말한다(행 2:22).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으로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셨다’고 표현한다(히 2:4).

성경에서 기적들이 일어난 시대는 주로 네 시대이었다. 각 시대마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확증하였다. 첫 번째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의 율법의 전달, 기록 및 확증을 통해 구약 계시의 기초를 확립한 시대이다. 두 번째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참종교가 심히 쇠약하고 거짓된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심히 왕성했던 배교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을 통해 참된 경건과 진리의 지식을 확증하셨다. 세 번째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의 포로 시대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망하고 이방 나라들의 권세가 극히 우세했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여전히 세상의 왕이요 주권자이심을 증거하셨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가 오신 시대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과 완성의 시대이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주신 것은 매우 합당하였다. 그 시대에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완전하고 충족한 기록물로서 완성되었다.

특별계시의 성격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몇 가지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그것은 언어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 수단은 인간의 언어이었다. 비록 사건 계시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건의 설명이 뒤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특별계시를 주심으로 우리로 그 계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여기에서 인간의 언어의 인식적認識的(cognitive) 기능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만일 누가 인간 언어의 인식적 기능을 부정하고 언어의 불완전성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불신하고 부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신정통주의라고 불리는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기록될 수 없고 단지 주관적으로만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불신임하고 결국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신정통주의는 계시를 단지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다. 신정통주의는 단지 하나님의 인격적-경험적 계시를 주장하고, 그의 언어적-명제적命題的,(proposi- tional) 계시를 부정한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의 이러한 계시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인격적-경험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언어적-명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그 말씀들을 객관적으로 명확히 성경책에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불신하는 근본적 오류다. 그것은 명백히 이단적 사상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모든 특별계시는 역사적 계시사건들이었다. 성경의 절반 가량은 역사이다. 또한 역사가 아닌 내용들, 즉 예언들, 시들, 서신들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주어졌다. 예컨대, 이사야가 본 이상異象과 받은 예언의 말씀들은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주어졌다(사 1:1). 또 에스겔이 처음 하나님의 이상을 본 것도 ‘제30년 4월 5일에 그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었을 때’이었다(겔 1:1). 하나님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계시 사건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상적 역사(Historie)가 아니고, 하나님의 세계의 사건의 역사 혹은 초월적 역사(Geschichte)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 차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혼동시키고 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초월적 역사란 역사가 아니다. 초월적 역사로서 계시 사건들을 긍정하는 것은 성경의 사건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의 객관적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요 실상 그 사건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점진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은 구약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또 특히 구약과 신약을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예를 들어 ‘뱀의 머리를 밟으실 여자의 후손’으로(창 3:15), ‘아브라함의 씨’로(창 12:7; 22:18), 성막 제도와 제사의 규례들로(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다윗의 씨’로 예표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점점 계시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약 시대가 되어, 그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로 최종적으로, 절정적으로 밝히 계시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있어서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이며, 구약은 약속이요 신약은 성취이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걸쳐 점진적으로 더 확실하고 풍성하게 계시된 것이다.

특별계시의 종결성과 계속성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끝났는가 혹은 오늘도 계속되는가라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주신 특별계시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그 계시들이 충족한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상 당신의 뜻을 충족히 계시하셨다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충족성을 말씀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6:31). 이것은 구약의 충족성을 잘 증거한다. 히브리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한다(히 1: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인 신약 계시가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계시에 첨가할 또 다른 어떤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거한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맨 끝부분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엄숙히 말하였다(계 22:18-19). 이것은 이 마지막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 예언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상의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충족히 주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별계시의 종결성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엄격히 말해 특별계시의 이전 방식들의 종결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 이상 계시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과거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의 특별계시의 수단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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