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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제4부. 인간론-기독교교리(5)/김효성

by 싯딤 2009. 4. 25.

제4부. 인간론

인간론(Anthropology)은 사람과 죄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인간론의 주요 주제들

1. 사람의 기원

2. 사람의 본질

3. 죄의 본질

4. 죄의 구별

5. 하나님의 법

6. 죄의 형벌

7. 하나님의 언약

1. 사람의 기원

하나님께서 창조하심

구약 창세기 1, 2장은 사람의 기원에 관하여 밝히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증거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창세기 1, 2장의 진실성을 부정하고 성경의 창조 기사를 비역사적인 신화로 본다. 자유주의 신학의 한 예는 소위 ‘문서설’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 창세기 2:5, 7, 19, 22을 비교하면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들이 창조의 순서에 있어서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들을 하나님의 종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한 감동 가운데 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후대의 익명의 저자들이 쓴 소위 J, E, D, P 등의 문서들에 의해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우리는, 비록 모세가 전승된 구전口傳들이나 토판土版들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창세기가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서들 중의 한 부분이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모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책을 전달받았고, 여호수아 24:2-4에서 그는 창세기의 내용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언급하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사람의 기원에 관한 바른 진리를 증거한다. 그 내용들은 서로 보충적이다. 1장은 우주 창조 전반에 관해 증거하였고, 2장은 사람의 창조, 특히 남녀의 창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증거하고, 또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처음 명령에 대해 기록하였다. 사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다.

사람 창조에 있어서 몇 가지 특별한 점들이 있다. 첫째로, 사람은 삼위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의논 속에 창조되었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둘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 손길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21,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셋째로, 사람은 몸과 영혼이 다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고, 또 영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는 말씀은 사람의 영혼의 창조를 보인다. 창세기 2:7은 창세기 1:27에 대한 좀더 자세한 보충적, 추가적 설명이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고 해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다르고 신적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하나님은 범죄할 수 없는 영이시다. ‘생령’이라는 원어(네페쉬 카야)는 ‘생명체, 산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창세기 1:20과 24에서 물고기와 땅의 짐승에게도 사용된 ‘생물’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고 또 직접 영혼을 창조하여 그 코 속에 생명의 기운으로 넣으셨고 그래서 사람은 산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로, 여자는 남자에게서 창조되었다. 창세기 2:21,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돕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여자의 역할을 증거한다. 남자를 돕는 자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이었다. 여기에 남자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인류의 단일성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류의 시조는 하나이다. 맨 처음에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인류의 부모가 되었다. 온 인류는 한 부모로부터 나왔고, 넓은 의미에서 한 가족들이며 친척들이다.

인류의 단일성에 대한 성경 진리에 반대하여, 아담 이전에도 세상에 사람들이 있었다거나, 아담과 동시대에 사람들이 다른 곳들에 또 있었다거나, 아담이 인류의 시조가 아니고 유대인의 시조에 불과하였다는 추측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다는 사실과 그가 결혼할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창 4:14, 17) 등에서 그런 추측의 근거를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인류의 단일성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사실이며 특히 원죄의 교리에 기초가 되므로 중요하다.

성경은 여러 구절들에서 인류의 단일성을 증거한다. 창세기 1:27,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창세기 9: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창세기 10:32,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성경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 학문들도 여러 각도에서 인류의 단일성에 대하여 증거한다.

첫째로, 역사학은 여러 인종들의 전설들에 근거하여 인류가 공통적으로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하였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유럽의 민족들은 아시아로부터 이주(移住)한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동부 아시아의 몽고족 중에서 폴리네시아(오스트렐리아 동북부 태평양의 섬들)를 경유하거나 알류시안 군도(알래스카와 러시아를 잇는 베링 해협의 섬들)를 밟아서 이주하였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둘째로, 비교언어학은 인류의 언어들의 공통적 기원을 증거한다. 특히, 고대 언어들의 어근의 유사성이 그것을 확증한다. 예컨대, 곰은 애굽어로 뎁, 히브리어로 돕, 알메니안어로 뎁바, 아라비아어로 둡이라고 한다.

셋째로, 심리학은 인류의 영혼들의 공통적 특질들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인류는 공통적으로 식욕과 성욕 등의 본능적 욕구들과 더불어 도덕성과 종교성 등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 인간은 공통적으로 신을 찾고 신에게 기도하며 또 영생을 소망한다.

넷째로, 생리학은 인류가 단일 종류임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① 모든 종족들의 두뇌, 골격, 치아의 성질이 같다. ② 종족들 간의 결혼과 자녀 출산이 가능하다. ③ 몸의 온도, 맥박수, 혈액의 특질이 같다.

다섯째로, 생물학은 인류의 단일성을 증거한다. 진화론 학설을 발표했던 다윈 자신도 그 사실을 시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오늘날의 인류가 하나 이상의 부부들로부터 발생하였다고 말하게 할 아무 증거도 없다고 믿는 자들 중의 하나다. 나는 하나 이상의 인종이 있다고 믿을 만한 아무 좋은 근거도 혹은 아무 유지될 수 있는 증거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인류는 한 부모의 자손이다.

인류의 연대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지구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세상의 많은 과학자들은 진화론적 신념을 가지고 지구와 인류의 오랜 연대를 상상하고 주장한다. 지구의 나이를 수십억년 그리고 인류의 연대를 수십만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와 인류의 참된 연대가 아니다. 성경은 지구와 인류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성경에 근거한 지구와 인류의 연대를 계산해보자. 우선, 천지 창조를 문자적 6일 창조로 보면, 아담의 창조는 지구의 창조와 같은 해이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자손들의 수명이 나오는데, 그것들에 근거하여 그들의 연대를 대략 계산할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아담은 930년까지 살았고, 노아는 아담 후 1056경에 출생하여 2006년경에 죽었고,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은 노아 600세 때 즉 아담 후 1656년경에 있었다. 물론 이런 연대들은 숫자를 그대로 더하거나 뺀 것이므로 대략적인 것이다.

창세기 11장에는 또한 셈의 자손들의 수명이 나오는데, 그것에 근거하여 그들의 연대를 계산할 수 있다. 셈은 아담 후 1558년경에 출생하여 2158년경에 죽었고, 데라는 아담 후 1878년경에 출생하여 2083년에 죽었다. 창세기 11:26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증거했는데, 그것이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는 뜻이면, 아브라함은 아담 후 1948년경에 출생하였고 175세를 살았으므로(창 25:7) 아담 후 2123년경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 75세이었으므로(창 12:4) 그 때 데라는 145세로서 아직 죽기 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창 11:32 비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담 후 2048년경에 출생하여 180세를 살았고(창 35:28) 아담 후 2228년경에 죽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아담 후 2108년경에 출생하여(창 25:26) 147세를 살았고(창 47:28) 아담 후 2255년경에 죽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간 나이가 130세이었고(창 47:9) 그 때는 아담 후 2238년경이었다.

출애굽기 12:40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에 애굽에서 나왔다고 증거하고 있으므로, 출애굽 사건은 아담 후 2668년경에 있었다. 또한, 열왕기상 6:1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 시브월 곧 2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연대는 아담 후 3148년경이다. 그런데 솔로몬의 통치 연대는 세속 역사와 비교하여 주전 970- 931년경으로 어느 정도 확정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성전 건축의 연대인 아담 후 3148년경은 주전 967년경이 되고, 따라서 아담의 창조 연대 및 세상의 창조 연대는 3148년+967년 즉 주전 4115년경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근거한 지구와 인류의 창조 연대는 주전 4천년 남짓하며, 인류의 역사는 이제까지 6천년 가량임을 알 수 있다.

17세기 영국교회 대주교 제임스 어숴는 신구약의 연대기라는 책에서 아담의 창조 연대를 주전 4004년으로 보았다. 근대에 보수적 구약 학자이었던 바톤 페인(J. Barton Payne)은 인류의 창조 연대를 주전 4175년으로 보았다. 이들은 다 성경에 근거하여 인류의 연대를 계산한 것이었다.

성경에 근거한 이런 짧은 연대와 다르게,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와 인류의 오랜 연대를 상상하고 주장한다. 그들의 연대 측정의 대표적 방법은 우라늄(U-238)에 의한 측정 방법과 방사성 탄소(C-14)에 의한 측정 방법이 있다. 전자는 암석의 연대 측정에 주로 사용되고, 후자는 생물체의 연대 측정에 사용되는데, 그 두 방법의 원리는 동일하다. 방사성 탄소에 의한 측정 방법은 리비(W. F. Libby)가 발표한 방법으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화석이나 오래된 생물체의 연대를 측정하는 거의 유일한 과학적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방사성 탄소에 의한 연대 측정 방법은 다음과 같은 원리에 근거한다:

① 우주에서 지구로 밤낮 없이 들어오는 높은 에너지의 미립자와 그 방사선들-그것을 우주선이라 부름-은 공기 중에 있는 질소(N-14)에 흡수되어 방사성 탄소(C-14)를 만들어 낸다.

② 이 방사성 탄소는 공기 중에 있는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CO2)가 되어 동물들과 식물들 속에 들어간다.

③ 그런데 생물체들이 죽으면, 그 생물체들 속에 있던 이 방사성 탄소는 매우 천천히 붕괴되어 그 양이 줄어들게 되며, 그 양이 반으로 줄어드는 기간[반감기]은 약 5,700년이다. 따라서, 이 반감기에 근거하여 어떤 생물체의 화석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사성 탄소에 의한 연대 측정 방법은 두 가지 증명할 수 없는 가설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① 지구에 들어오는 우주선의 양, 공기 중에 있는 질소의 양, 그리고 그들 간의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방사성 탄소의 양이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옛날의 생물체들 속에도 오늘날과 똑같은 양의 방사성 탄소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는가?

② 방사성 탄소의 반감기는 어떤 환경 조건에서도 항상 동일하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이 두 가지 가설들은 객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없는 것들이므로, 이 연대 측정 방법은 객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

더구나, 이 측정 방법이 불확실하다는 과학적 증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살아 있는 달팽이 껍질이 2,300년 된 것으로 나타난다거나, 산 나무의 일부가 10,000년 된 고목으로 나타난다거나, 갓 잡은 물개가 1,300년 된 것으로 나타나는 우스광스러운 결과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방사성 탄소의 생성 속도와 붕괴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어떤 이는 “대기 중으로 유입되는 우주선의 양, 물리적 압력, 화학 결합 상태, 전기 및 다른 외적 요인들에 의해서도 방사성 탄소를 포함한 모든 방사성 원소들의 붕괴 속도가 달라짐을 입증하였다”고 한다

다른 한편,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과학적 증거들도 여러 가지 제시되어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들어보자.

첫째는 지구의 자기磁氣 능률의 감소이다. 나침판의 지침이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데서 입증되듯이 지구는 하나의 자장磁場인데, 지구의 자기 능률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그 붕괴 속도의 반감기가 1,400년임이 알려졌다. 그러나 자장의 붕괴시 높은 온도가 생기므로, 만일 지구의 연대를 2만년으로 가정할지라도 큰 자장의 붕괴를 상상해야 하고 그 때의 고온 때문에 지구는 액체로 변했을 것이며, 100만년을 가상한다면 지구는 완전히 기체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자장이 크면 클수록 우주선의 유입은 작아진다고 하며, 그렇다면 수천 년 전의 방사성 탄소(C-14)의 생성량은 오늘날에 비해 매우 작았을 것이다.

둘째는 지구의 회전 속도의 감소이다. 지구의 회전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고 알려졌다. 만일 지구의 연대가 10억년이고 그 때의 자전 속도를 현재와 같이만 보아도, 현재 지구의 자전은 멈추었을 것이고, 만일 지구의 현재 자전 속도에서 거꾸로 더해가면 10억년 전의 지구는 상상할 수 없이 빨리 돌아 지구의 모양은 구형이 아니라 빈대떡 모양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우주진宇宙塵의 두께이다. 우주진(cosmic dust)이란,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미세한 석질石質 혹은 철질鐵質 미립자들[먼지들]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우주진이 지구에 연간 약 1,400만 톤이나 떨어진다고 한다. 특히 니켈의 함량은 지구의 물질 속에 있는 것보다 매우 많다고 한다. 만일 지구의 나이가 10억년이라면, 지구는 지금 약 15m 이상의 우주진으로 뒤덮혔을 것이지만, 현재 지구와 달에 있는 우주진의 양은 단지 몇 천년의 역사에 해당한다고 한다.

넷째는 방사성 탄소(C-14)의 생성 속도와 붕괴 속도의 차이이다. 방사성 탄소의 생성 속도와 붕괴 속도는 다르며, 그 차이를 계산한 결과 지구는 약 8,000년 전에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다섯째는 지구상의 지표흙의 두께이다. 지구상의 평균 지표흙의 깊이는 약 20센티미터라고 한다. 여러 실험 조사에 의하면, 지표흙이 2.5센티미터 쌓이는데 약 300-1,000년이 걸린다고 추산되는데, 이 추산에 의하면, 지구의 나이는 수천년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구와 인류의 연대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 과학자 헨리 모리스는 말하기를, “어숴의 일반적 방법, 즉 성경의 자료들에만 의존한 방법은 창조의 때를 결정하는 유일 합법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 사실, 전통적인 주전 4004년 연대의 완전한 불가능성이나 불합리성은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연대를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화론 비평

오늘날 유행하는 진화론은 사람의 기원에 관한 성경 진리를 대항하고 도전한다. 진화론의 영향은 교회 안에도 매우 커서, 많은 신학자들과 청년들이 그 영향 때문에 창조의 기본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 세상과 교회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진화론은 도대체 무엇이며 과연 확실한 이론인가?

진화론이란 영국의 박물학자 촬스 다윈(1809-1882)의 종들의 기원이라는 책에 의해 널리 퍼진 생각이다. 다윈은 그의 책에서 다음 몇 가지 점들을 가정하였다:

① 생명은 무생물에서 자연 발생하였으며, 그것은 역사상 단 한번만 일어났다.

② 바이러스, 박테리아, 식물들, 그리고 동물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③ 단세포 동물(아메바 등)에서 모든 동물이 진화되어 나왔다.

④ 무척추 동물에서 척추 동물이, 척추 동물에서 양서류(물과 육지 양쪽에서 사는 것들, 개구리 등)가, 양서류에서 파충류(뱀 종류)가, 파충류에서 조류나 포유류가 진화되어 나왔다.

⑤ 사람은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기번 등 소위 유인원類人猿의 자손이거나 그들과 공통의 조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론은 불확실한 가설에 불과하다. 그것은 확실한 객관적 사실들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확실히 증명된 것도 아니다. 다윈의 가정들을 살펴보자.

다윈이 가정했던 생명의 자연발생설에 대하여, 오늘날 과학자들은 오히려 부정적이다. 1862년 파스테르는 실험을 통해 생명체의 자연발생론을 반박하고, 생물은 생물에게서 생긴다는 소위 ‘생물발생론’이 타당성을 증거하였다. 또 가장 간단한 생명체 하나가 우연히 생성될 확률은 한계점인 10의 50제곱분의 1보다 휠씬 작다고 하고 이 사실은 그것의 불가능성을 보인다. 더욱이,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다고 오늘날 알려진 DNA의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와 작용은 고도의 지적인 존재, 즉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증거하고 있다.

생물학적 변론에 대하여, 다윈이 가정하는 대로 바이러스, 박테리아, 식물들, 동물들, 그리고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이하는 것은 결코 생물학적으로 관찰되지 않는다. 어떤 종이 그 종 안에서 가지는 작은 변이[그것을 ‘소진화’라고 함]는 보통 인정되지만,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이[그것을 ‘대진화’라고 함]는 결코 생물학적으로 관찰되지 않는다.

또한 후천적으로 얻어진 형질들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세기 말, 바이스만은 생쥐꼬리 실험을 통해 후천적으로 얻어진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돌연변이의 유전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같은 종 안에서는 변이의 유전은 가능하지만, 종과 종 사이의 유전 변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멘델은 돌연변이가 결코 새 종이 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또한, 뮬러는 돌연변이가 대부분 해로운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러한 사실들과 결론들은 진화의 개념과 반대되는 것이다.

또한, 생물들 간의 유사성, 특히 해부학적 유사성이나 태생학적 유사성은 진화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 유사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으로 얼마든지 설명된다. 또한 그것은 물건들이나 기계들의 유사성이 서로간의 진화를 증명하지 않는 것과 같다. 특히, 최근의 혈액 시험은 사람의 피와 동물의 피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또 퇴화 기관들이 진화의 증거라는 주장도 타당치 않다. 오래 전에는 학자들이 사람의 신체에서 180여개의 퇴화 기관들을 말하였으나, 최근에는 모두 6개뿐이라고 한다. 그것은 의학의 발달로 그 기관들의 기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주장된 퇴화 기관들은 그 기관들의 기능들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잘못된 가정들이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맹장이 쓸데 없다고 생각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창자에 염증이 생기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석학적 변론에 대하여, 화석학적 증거들은 전혀 진화론을 증명하지 못한다. 화석이란 퇴적암 지층에 보존되어 있는 생물의 유해나 자취를 말한다. 화석들의 연대를 측정하는 한 방법에 의하면, 이미 생물들의 긴 시대 동안의 진화를 가정하고 화석들을 여러 지층으로 분류하고, 어떤 지층에 있는 화석의 종류에 따라 그 지층의 연대를 측정한다. 이것은 순환적 논리이므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특히, 종과 종 간의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는 중간 형태의 생물들의 화석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진화의 화석학적 증거는 없다.

유인원과 사람의 중간 형태라고 주장된 화석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무엇을 증명하지 못했다.

① 인도에서 발견된 1,400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된 라마피테쿠스는 몇 개의 치아와 턱 조각들인데, 예일 대학의 데이빗 R. 필빔은 그것이 멸종된 원숭이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② 동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200-300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대해서,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 솔리 로드 쥬커만은 그것이 원숭이에 불과하다고 진술하였다.

③ 쟈바에서 발견된 50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된 쟈바인 혹은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직립 원인)는 그 뼈들을 발견하고 발표했던 듀보아 자신에 의해 긴 팔 원숭이라고 선언되었다.

④ 북경 부근 주구점에서 발견된 북경인 혹은 신안트로푸스 페키넨시스는 치아 두 개를 제외한 모든 자료가 분실되어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이다.

⑤ 미국 서부 네브라스카에서 발견된 네브라스카인 혹은 헤스페로피테쿠스 헤롤드쿠키는 치아 한 개에 근거하였는데, 후에 그것은 멸종된 멧돼지로 판명되었다.

⑥ 영국 필트다운 근처에서 발견된 50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된 필트다운인 혹은 이안트로푸스 도소니는 턱뼈와 두개골의 일부에 근거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완전히 조작된 작품임이 드러났다.

⑦ 독일 뒤셀돌프 부근 네안데르 계곡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혹은 네안데르탈렌시스는 관절염으로 인한 불구와 및 비타민 D 부족으로 인한 곱추병 환자이었거나 미토콘드리아 DNA가 오늘날의 인류와 전혀 다른 것을 보면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⑧ 독일 마우어에서 발견된 25만년 전의 것으로 주장된 하이델베르그인은, 그러한 턱뼈를 가진 종족이 오늘날에도 뉴 칼레도니아 지방에 있고, 그러한 두개골 형태를 오늘날의 흑인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으므로 유인원이라 볼 수 없음이 판명되었다.

⑨ 프랑스 크로마뇽의 바위 밑에서 발견된 크로마뇽인은 현대인으로 밝혀졌다.

진화론은 이같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으로 반박되고 있다. 특히 진화의 개념은 물리학의 열역학 제1, 2 법칙에 배치된다. 열역학(thermodynamics)이란 다양한 형태들의 에너지(힘)와 그 변화에 관한 학문인데, 열역학의 제1 법칙은 보통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든지 복잡한 기계이든지 한 조직체 속에 있는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파괴될 수 없고, 단지 한 조직체에서 다른 조직체로 이전되거나,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될 수 있을 뿐이며, 에너지의 총량은 불변적이라는 법칙이다. 이 법칙에 의하면, 최초의 물질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진화론으로는 최초의 물질의 존재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열역학의 제2 법칙은 보통 ‘에너지 감소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에너지의 질적 쇠퇴 현상을 말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은 그 자유 에너지를 가장 낮은 상태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열 에너지는 자연적으로 더 뜨거운 것으로부터 더 차가운 것으로 흐른다. 증기 기관에서의 열 에너지의 일부는 주위의 차가운 것들에 이전되므로 연료의 모든 열 에너지가 기계적 에너지로 변환되지 못한다. 이 때 감소된 에너지의 양을 ‘엔트로피’(entropy)라고 부른다. 이 ‘엔트로피’는 물체의 내적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열역학 제2 법칙에 의하면, 우주는 시간이 감에 따라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감소되고 ‘엔트로피’가 증가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주는 낡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성경 말씀에 정확히 일치하지만, 진화의 개념에는 정면으로 반대된다. 시편 102:26, 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동일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무엇보다, 진화론은 성경 진리에 명백히 반대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증거한다(창 1:1). 또한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식물들, 물고기들, 동물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을 10번이나 반복하여 증거한다. 특히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흙으로 만드셨고 그의 영혼을 직접 창조하셨음을 증거한다(창 2:7). 성경의 이러한 증거에는 진화의 여지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또한 성경은 사람의 몸과 동물의 몸이 질적으로 다름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죄의 형벌을 선언하실 때에도, 동물의 상태로 돌아가라고 하시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3:19,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근래에는 ‘유신 진화론’有神進化論,(heistic Evolutionism)이라는 사상까지 나타났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진화의 방법으로 하셨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창조와 진화를 조화시켜 보려는 생각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흔히 무기물과 유기물 사이에, 또 비이성적 동물들과 이성적 인간 존재 사이에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신론적 진화론은 진화론도, 창조론도 아닌 괴이한 잡종이며, 성경을 믿는 교회들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기원했음을 성경의 증거대로 바로 믿고 확신하자.

2. 사람의 본질

사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계시된 사람에 대한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첫째로 사람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둘째로 사람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몸과 영혼으로 구성됨

역사상 사람의 구성 요소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사람이 몸과 영과 혼의 세 실체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삼분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사람이 이성적 영, 동물적 혼, 그리고 몸의 세 실체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초대 교회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 다메섹의 요한 등의 교부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였다. 삼분설은 초대 교회의 어떤 이단자들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그노시스주의는 사람의 영이 신적 본질의 일부분이므로 범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고, 아폴리내리스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혼만을 가지셨고 신적 로고스가 그의 영을 대신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구성 요소에 대한 다른 한 견해는 사람이 몸과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다는 ‘이분설’이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초대 교회의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중세의 안셈,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와 칼빈 등은 다 이 견해를 가졌고 그 후 개신교회들의 절대 다수가 이 견해를 취하였다.

이분설의 근거는 영이라는 말(루아크, 프뉴마)과 혼(네페쉬, 프쉬케)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데 있다. 확실히, 성경에서 그 두 말은 한 실체를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에 불과하다.

첫째로, 성경은 인간 전체를 묘사할 때 어떤 때는 몸과 영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몸과 혼이라고 말함으로써 영이라는 말과 혼이라는 말을 구별하지 않는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5:3, 5,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둘째로,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묘사할 때 어떤 때는 영이 떠난다고 표현하고 어떤 때는 혼이 떠난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사도행전 7:59, “주 예수여, 내 영혼[영]을 받으시옵소서.” 창세기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셋째로, 성경은 죽은 자의 회생回生을 묘사할 때도 어떤 때는 영이 돌아온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혼이 돌아온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8: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열왕기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넷째로, 성경은 죽은 자를 묘사할 때도 어떤 때는 죽은 자들의 영들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때는 죽은 자들의 혼들이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12:23,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요한계시록 6:9, “죽임을 당한 영혼들[혼들].” 요한계시록 20:4,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

다섯째로, 흔히 삼분설에 의하면, 영은 보다 더 고상한 기능을 하고, 혼은 보다 더 저급한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지만, 성경은 동물에게도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하나님께도 혼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영]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11:5, “여호와는 (악인을) . . . 마음[혼]에 미워하시는도다.” 이사야 1:14, “내 마음[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이사야 42:1, “내 마음[혼]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예레미야 6:8,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혼]이 너를 싫어하고.” 예레미야 9:9, “내 마음[혼]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아모스 6:8,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자기의 혼으로] 맹세하였노라.” 또한, 성경은 사람의 종교적 활동들을 영에게만 돌리지 않고 혼에게도 돌림으로써 영과 혼의 기능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누가복음 1:46, 47, “내 영혼[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성경에 삼분설을 가리키는 듯한 구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그리고 보다 명확한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은 인성人性 전체의 성화를 강조하면서 영과 혼을 반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히브리서 4:12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깊은 곳을 꿰뚤어 감찰하심을 강조하면서 영과 혼을 반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영혼의 활동

그러면 영혼의 활동은 무엇인가? 몸은 비생명적, 물질적 실체이며, 영혼과의 결합으로만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한다. 죽음은 몸에서 영혼이 떠나는 현상이며, 죽은 몸은 몸의 특질을 잘 나타낸다. 영 혹은 영혼의 특질은 생명과 인격성이다. 사실, ‘영’이라는 원어는 ‘영’이라는 뜻 외에 ‘호흡, 생명의 기운’을 의미하며, 또한 ‘혼’이라는 원어도 ‘혼’ 외에 성경에서 빈번히 ‘생명’을 가리킨다. 인간의 생명 원리인 영혼은 또한 인간의 인격적 요소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영혼의 활동은 마음(레브, 카르디아 καρδία)이라고 표현된다. 사람의 마음은 지식, 감정, 의지의 요소들로 구성되며, 그것에 양심이 덧붙여질 수 있다. 영혼은 어떤 외적 세력에 억압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가진다.

양심이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도덕적 분별력과 선한 경향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에 심겨진 하나님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의 법정法庭이다. 로마서 2:14, 15, “양심...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 그러나 양심은 선하고 깨끗한 마음이지만 더러워질 수 있고 심지어 완전히 마비될 수도 있다(고전 8:7; 딤전 4:2).

마음은 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지식은 뇌와 감각 기관들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감정도 대개 몸의 감각 기관들과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몸과 분리된 영혼의 순수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육의 결합 상태에서의 영혼의 활동을 의미한다.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 몸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마음이 기쁘면 몸도 힘이 나고 마음이 슬프면 몸도 약해진다. 잠언 18:14은 “사람의 심령은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한다. 또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지 쉽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잠 15:13).

특히, 사람이 구원받은 후 성화聖化의 불완전함은 단순히 중생한 영 자체의 문제이거나 몸의 문제가 아니고, 몸과 결합된 영혼 즉 영육의 통일된 인격의 문제이다. 로마서 7:25,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중생한 자의 심령은 본성의 남은 부패성과의 끊임 없는 싸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성도는 조금씩 선한 인격으로 변화된다. 성도는 영적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

개인 영혼의 기원

각 사람의 영혼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교회 역사상, 개인 영혼의 기원에 관해 세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 개인의 영혼이 세상에 출생하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보았다. 이것을 선재설先在說이라고 한다. 이 견해를 취하는 자들은 보통 각 개인의 영혼이 이전 세상(前世)에서 범죄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선재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성경에 반대된다. 말라기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더욱이, 선재설은 인류의 단일성과 원죄의 교리에 충돌한다. 사도행전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더욱이, 사람은 전세(前世)에 대한 아무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범죄에 대한 기억도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할 때, 선재설은 명백히 잘못이다.

둘째로, 어떤 이들은 개인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출생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을 유전설이라고 한다. 유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에는 자손들이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영혼이 조상에게서 유전됨을 암시한다. 창세기 46:26, “이는 다 야곱의 몸(야레크, 넓적다리, 허리)에서 나온 자며.” 히브리서 7:9, 10,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오스퓌스, 생식기관의 자리)에 있었음이니라.” (2) 성경에는 자손들이 죄 중에 출생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개인 영혼의 기원과 그것의 죄악성이 부모에게서 나옴을 보인다. 욥기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요한복음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 외에도, (3) 자녀의 출산은 사람에게 맡겨졌다. 창세기 1:27, 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4) 성경이 하와의 영혼 창조에 대해 침묵한다.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고린도전서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5)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창조의 6일 이후 중지되었다. 창세기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 . . 마치니.” (6) 가정의 정신적 특성들은 자손들에게 유전된다.

그러나 이러한 그럴 듯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유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들이 있다. (1) 개인의 영혼의 전달 방식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자녀의 영혼이 부모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가? 부모가 자녀 영혼의 창조자인가? 혹은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으로부터 물질처럼 분할되는가?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 안에 선재(先在)하였는가? 그 어느 대답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들의 영혼들의 창조자가 아니다. 또 인간의 영혼이 물질처럼 분할될 수 있다는 생각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또 자녀의 영혼이 부모의 영혼 안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2) 인류가 첫 사람 아담 안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은 불합리해 보인다. 사람은 부모나 자식의 마음을 아는 공통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각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독립적 인격이며, 성경이 원죄에 대해 말할지라도 선조들의 누적된 죄책의 전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서 마리아의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을까?

셋째로, 대다수의 개혁신학자들은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 창조되었다고 본다. 이것을 창조설이라고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동방교회의 견해이었고, 서방교회도 제롬과 힐러리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이 견해를 수납하였다. 중세교회도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취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자들 대다수는 이 견해를 가졌다.

창조설을 지원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민수기 16:22, “모든 육체의 생명[영들]의 하나님이여”(민 27:16도 같음).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사야 42:5,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영]을 주시는 하나님.” 스가랴 12:1, “사람 안에 심령[영]을 지으신 자.” 히브리서 12:9, “모든 영의 아버지.” 예레미야 38:16, (시드기야 왕의 말)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아사 )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이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셨다고 증거한다. 욥기 31: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 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시편 100:3,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사람의 몸뿐이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몸만 창조하셨고 그들의 영혼들은 부모로부터 나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창조설에도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들이 있다. (1) 창조설은 죄의 책임에 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영혼을 창조하실 수는 없으나 깨끗한 영혼을 창조하여 즉시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갖는 죄인이 되게 함으로써 죄악의 간접적 책임자가 되시는 것은 아닌가? (2) 창조설은 원죄의 진리와 조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창조된 영혼은 어떻게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게 되는가? 특히, 원죄의 부패성은 부모에게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그것이 단지 자녀들의 몸에만 전달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자녀들의 영에도 전달된다면, 언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3) 가정의 정신적 유전도 어려운 문제의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개인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 선재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고 성경 진리들에 배치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으나 유전설과 창조설은 둘 다 상당한 성경적인 또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창조설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녀의 출생 과정에서 하나님과 인간 부터의 역할이 신비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형상

사람은 몸과 영혼의 두 요소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1:26, 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은 의미상 차이가 없다(창 1:27; 5:1; 9:6; 고전 11:7; 골 3:10; 약 3:9).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특성은 지식과 도덕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2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을 부여하셨고”라고 진술한다.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아는 것을 말하며 그 지식을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땅의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지식과 지혜가 있음을 증거한다. 과연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의 지식과 지혜를 잘 나타내 보였다(창 2:19, 20).

도덕성이란 이성적 판단과 의지적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사람이 본래 가졌던 거룩과 의이다. 흔히 이것을 ‘본래의 의’(original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전도서 7:29은 증거하기를,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하였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도덕적 중립 상태에 있었다는 추측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담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지켰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 동안 그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이었다. 첫 사람은 얼마 동안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인 지식과 도덕성은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되었다. 사람이 다른 생물들에 비해 여전히 지혜롭고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인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사람에게 참지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도덕성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사람은 본래의 그 거룩과 의를 다 잃어버렸다. 사람은 지금 심히 죄악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지식과 의의 회복을 포함한다. 골로새서 3:10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말씀했고, 에베소서 4:24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증거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성경은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창세기 9:6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한다. 또 고린도전서 11:7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말하고, 야고보서 3:9은 “이것[혀]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고 말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단지 지식과 도덕성뿐 아니라 그 외의 요소들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사람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점들일 것이다. 그것들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성, 인격성, 양심 등을 포함하며 영혼의 활동 기관 혹은 표현 기관으로서의 몸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특히 창세기 9:6에 살인을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것으로 정죄한 것을 보면, 몸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또 창세기 1:26-28이 하나님의 형상과 생물 통치권을 연관시키는 것을 보면, 생물 통치권도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역사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성, 의지의 자유 등 자연적 재능들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모양은 사람의 욕망들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 헬라 정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이성적 성질뿐이며 도덕성은 제외된다고 본다. 루터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본래의 의뿐이라고 본다. 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이성적 성질, 의지의 자유, 및 종교적, 도덕적 성질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람의 본래의 상태

사람의 본래의 상태 즉 타락 전 사람은 성숙한 인격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어린 시절이 없는 성인이었고, 불멸적 영혼을 가진 존재이었다. 그들은 지정의를 조화 있게 조절하는 인격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동안 그들은 확실히 하나님과 더불어 충만한 기쁨과 평강을 누렸을 것이다.

또한 타락 전 아담과 하와의 몸은 완전하고 아름답고 건강하였음에 틀림 없다. 그들의 몸에는 허약과 피곤과 질병과 고통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범죄한 이후 형벌로 내려진 것들이었다. 또 비록 죽음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몸은 죽지 않을 수 있는 몸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몸으로 에덴 동산에서 얼마 동안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건강한 몸으로 생물들을 다스리는 그의 직무를 잘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하기 전 사람의 본래의 상태는 최종적으로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의 의는 이미 그들이 미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상태는 예비적 시험 단계이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그 시험하신 첫 명령(창 2:16, 17)에 순종하였다면, 그들은 더 큰 존귀와 영광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다시는 범죄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본래의 상태에서 떨어졌다.

3. 죄의 본질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본래의 상태의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냄을 받은 후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은 후 아담이 130세에 셋을 얻었기 때문에, 아담의 무죄 상태는 최대한 100년 내지 110년 가량을 넘지 못할 것이다(창 4:1-3, 25; 5:3).

천사들의 타락

세상의 악은 궁극적으로는 천사들의 타락에서 기원하였다. 에덴 동산에 들어와 하와를 유혹한 뱀은 사탄이었다(계 12:7-9). 천사는 언제 타락하였는가? 성경은 천사들이 언제 타락하였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계시해 주지 않으나, 천사들의 타락이 인류 역사의 초기에 있었다는 암시가 신약에 있다. 요한일서 3:8는 증거하기를,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하였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마귀는 인류의 역사 초기에 범죄하였고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는 데 성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의 타락이 천지 창조의 6일이 끝나기 전의 어느 때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천사의 세계를 포함하여 천지 만물이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보며, 창조된 세계는 모두 선하였기 때문이다(창 2:1; 1:31).

천사는 어떻게 타락하였는가? 천사들의 타락은, 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되어진 일이지만, 하나님께 직접적 원인이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이 악의 창조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타락은 그 자신들 밖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사탄의 죄를 교만이라고 암시한다. 디모데전서 3:6,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그렇다면, 천사 타락의 원인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다수의 천사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서 6절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이사야 14:12-15과 에스겔 28:12-16의 말씀을 사탄의 타락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 구절들은 바벨론 왕과 두로 왕에 대한 예언일 뿐이라고 본다.

타락한 천사들(영들)은 사탄과 그의 사자들로 분류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의 두목이다. 그는 ‘사단’(욥 1:6, 대적자), ‘마귀’(계 12:10, 디아볼로스 διάβολος, 참소자), ‘바알세불’(마 12:24, 더러움의 주), ‘벨리알’(고후 6:15, 무가치한 자, 악한 자), 아바돈 혹은 아폴뤼온 (계 9:11, 파괴자), ‘귀신[들] (demons)의 왕’(마 12:24),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악한 자’(요일 5:19), ‘큰 용, 옛 뱀’(계 12:9; 20:2) 등의 명칭들로 불린다.

그 외의 타락한 천사들은 ‘그[마귀의] 사자들’(마 25:41),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 혹은 빈번히 ‘귀신들’로 불린다. ‘귀신’(다이모니온 δαιμνιον)이나 ‘악한 천사’나 ‘악한 영’은 다 동일한 존재를 가리킨다.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는 이미 지옥에 던지워져 있는 것 같다. 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타로스 τάρταρος)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그러나 나머지 천사들은 지금도 사탄의 지휘 아래 하나님을 대항하여 활동하고 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요한계시록 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쫓기니라.”

타락한 천사들의 활동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혼란시키고 대항하는 것이다. 그들은 온 세상에 사상적 오류들, 정신적 문란 및 도덕적 불결을 일으킨다. 타락한 천사들은 본래의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성품을 잃어버렸고 더럽고 악하고 거짓된 영들이 되었다. 마태복음 10:1,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며.” 열왕기상 22:22,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디모데전서 4:1,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속이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요한일서 4:1, 3,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 시험하라...적그리스도의 영.”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또 타락한 천사들은 육체의 질병들과 환경적 재난들도 일으킨다. 욥기 1, 2장을 보면, 욥에게 임한 재난들, 즉 재산의 큰 손실과 자녀들의 죽음과 몸에 난 악창은 사탄이 준 것들이었다. 누가복음 9:42,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영]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간질병으로부터] 낫게 하사.” 누가복음 13:11, 16,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연약의 혹은 질병의 영을 가지고]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고린도후서 12:7,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모든 타락한 천사들은 최종적으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마태복음 8:29, “[귀신들이 가로되]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마태복음 25:41,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들의 어두운 미래의 상태는 고정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 천사의 타락과 사람의 타락은 성격상 크게 다르다.

인류의 타락

인류의 타락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진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불신앙적 신학자들은 아담의 첫 범죄를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매우 잘못이다. 창세기 3장은 역사적 문체文體로 기록된 역사적 내용을 담은 책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전체와 분리시켜 비(非)역사적 내용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히 부정당하다. 또 신약의 여러 구절들은 첫 사람의 범죄 사건을 언급한다. 로마서 5:12, 18, 19,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한 범죄로...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고린도전서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디모데전서 2: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러한 말씀들은 창세기 3장 사건이 역사적 사건임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위에 인용된 신약의 구절들은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또 성경은 인간의 죄와 마귀가 실제로 관련이 있음을 가르친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만일 창세기 3장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면, 죄와 마귀의 관련은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대로, 죄와 마귀는 관련이 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이었다. 하와는 뱀[사탄]의 유혹에 빠져, 그리고 아담은 아내의 권함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창 2:16, 17)을 어겼다. 창세기 3:6, 11, 17,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그러나 첫 사람의 불순종의 행위는 교만과 불신앙에도 관계가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마귀의 말은 인간의 교만을 부추키는 말이었다. 하와는 마귀처럼 교만의 죄에 빠져들어갔다. 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뱀[마귀]의 말을 따랐고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아내의 말을 따른 것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과 불신임이었다. 교만과 불신앙은 불순종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적 공식(公式)과 같다. 불순종은 교만과 불신앙에서 나오며, 순종은 겸손과 신앙에서 나온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첫째로, 아담과 하와는 창조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지혜와 지식과, 거룩과 의를 잃어버렸다. 그들의 본성은 죄악된 경향성 곧 부패성을 갖게 되었다. 둘째로, 그들은 그들에게 본래 없었던 죄 의식과 수치감을 갖게 되었다. 창세기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3:7,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8,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셋째로,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는 크게 손상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자가 되었다. 창세기 3:8,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실 수밖에 없으셨다. 창세기 3:23, 24,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넷째로, 그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수고와 고통을 경험하리라는 선언을 들었다. 창세기 3:16, “내가 네게[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창세기 3:17, 19, “너는[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다섯째로, 땅은 그들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 창세기 3:17, 18,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여섯째로, 그들은 마침내 죽으리라는 선언을 받았다. 창세기 3:19,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사탄의 시험을 허용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허용치 않으셨더라면 인류의 불행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계적으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셨다. 시험 자체는 악이 아니다. 더욱이, 사람은 이 시험에서 자발적으로 순종하였다면 더 영광된 상태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범죄를 허용하셨는가? 그는 주권으로 그 일을 막으실 수도 있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를 허용하셨다고 대답할 수 있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9:22,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그의 모든 일은 다 정당한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하나님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로마서 9:14, 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말대답]하느뇨?”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

역사상,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죄를 물질적 몸의 특질, 진화되지 못한 동물성, 존재의 부정 혹은 제한, 단순한 결핍, 실재(實在)하지 않는 착각, 정신의 불건전한, 병적 상태, 선에 대한 필요한 대립 원리, 사람의 이기심, 하나님 의식에 대한 인간 자아 의식의 투쟁,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등으로 보는 것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죄에 대한 바른 개념은 오직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이었다.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라는 히브리어(핫타트)는 ‘표적을 맞히지 못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문답,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은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commission)이나 그 법을 지키지 못한 것(omission)이나 둘 다 실상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을 반영하므로, 죄는 그 성격상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사악성과 심각성이 있다. 창세기 39:9,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시편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또한 죄는 항상 적극적 성격을 가진다. 소극적 죄, 불이행과 태만(ommission)의 죄도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가 된다. 또한, 죄와 죄 아닌 것 간의 선이 분명하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둘째로, 죄는 죄책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더 분석하면, 그것은 첫째로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이다.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된 성질(죄성), 죄를 향한 경향성 혹은 연약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나는 죄인이다’고 느끼는 것은 이 부패성 때문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셋째로, 말과 행동 뿐만 아니라,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도 죄로 간주된다. 특히 이 점에서 잘못된 견해들이 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죄가 항상 인간 의지의 의식적 행동이어야 하며 부모에게서 유전되는 죄악된 성질과 습관은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의 죄악된 욕구(concupiscence)는 죄의 기회일 뿐이며 그 자체가 형벌 받을 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알미니우스주의도, 죄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인간의 자발적 행위라고 보며, 비자발적 범죄는 인성의 자연적 결과로서 죄책을 돌릴 수 없으며 엄밀히 말해 죄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 견해들은 공통적으로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을 죄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도 죄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잠언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은]... 다 죄니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마태복음 5:22,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5:19, 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7:17, “내 속에 거하는 죄.”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사람은 이 죄에서, 즉 죄책과 부패성, 그리고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4. 죄의 구별

모든 사람들의 죄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로 구별된다.

원죄

원죄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죄책과 부패성을 가리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3, “그들은 모든 인류의 뿌리이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일반적 법으로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에게 이 죄의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로 인한 그 동일한 죽음과 부패성이 전달되었다.”

죄책의 전가

우선,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돌려졌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죄책을 가진 죄인의 신분으로 출생한다. 아담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은 로마서 5장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정죄되었고 많은 사람이 죄인 되었음을 강조할 때 밝히 증거되었다. 15, 17절,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16, 18절,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뿐만 아니라, 성경과 경험이 증거하는 죄의 보편성, 정죄의 보편성, 그리고 죽음의 보편성은 그 사실을 확증한다.

죄는 보편적 현상이다. 열왕기상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욥기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전도서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않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로마서 3:10, 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죄의 보편성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도 인정된다. 플라톤, “눈 멀고 머리 많은 맹수와 같은 만가지의 악이 네 속에 있다.” 이방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고행이나 금욕주의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괴테, “나는 나 역시 범하지 않을 수 있는 허물을 보지 못한다.”

또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 아래 있다. 로마서 3:19,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2:3,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정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한 모든 인간이 죽는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심지어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없어 보이는 유아들까지도 죽는다.

죄의 전가의 사실은 분명하지만, 죄의 전가의 방식에 대해서는 역사상 일치된 이해가 없었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아담 안에 존재하였고 그가 범죄하였을 때 그 안에서 함께 실제적으로 혹은 실체적으로 범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실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의 공통적 실체’라는 개념은 성경적 근거와 합리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또한 로마서 5장에서의 원죄와 칭의의 대조가 실재론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가 실체적 관계라기보다 언약적 관계라고 생각된다. 또 아담의 최초의 범죄 외의 다른 죄들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인간으로서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은 실재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로, 다른 이들은 모든 인간이 출생할 때 아담의 부패성을 전달받으며 그 부패성에서 실제적 죄가 나오므로 죄책이 전가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간접 전가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패성의 전달은 죄책이 이미 전가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죄책의 전가가 없이 부패성의 전달이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또 로마서 5장은 모든 인간의 죄와 정죄와 죽음을 한 사람 아담의 죄에 기인한다고 말하지, 그 자손들의 실제적 죄에 기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로마서 5장의 원죄와 칭의의 대조는 이 견해에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즉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로운 성질을 전달받아서 의롭게 살므로 받는 의가 아니다.

셋째로, 대다수의 개혁신학자들은 아담이 모든 인간의 언약적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으므로 아담의 죄책은 모든 인간에게 즉시 전가되었고 부패성은 그 자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직접전가론’ 혹은 ‘언약론적 견해’라고 부른다.

이 견해의 근거들은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 아담의 죄와 많은 사람들의 죄와 정죄와 죽음이 직접 관련된다는 점과 아담의 죄의 전가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직접 대조된다는 점에 있다. 또 성경에는 이러한 연대적 책임과 형벌의 예들이 있다. 출애굽기 20:5, 6,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민수기 14:33,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여호수아 22:20,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신명기 24:16에 아버지의 죄로 아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으나, 그것은 사회의 공적 재판 규례를 가리킨 것이며, 에스겔 18:4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 것도 죄 없이 죽는 법이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들은 성경 다른 곳에서 증거된 죄의 전가의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부패성의 전달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부패성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부패성은 흔히 전적 부패성과 전적 무능력이라 불린다. 원죄로 인해, 사람은 지정의(知情意) 전체에 있어서 전적으로 부패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사람은 때때로 사람의 표준에서 선하게 보이는 일들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믿음이나, 구원에 이르게 할 선과 의를 행하기에 무능력해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은 말하기를, “이 죄(원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졌고, 그래서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으며, 영혼과 몸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에 있어서 전적으로 더러워졌다”고 했다.

성경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을 밝히 증거한다. 대표적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아누쉬 שׁ㰘?אָ, '절망적이게 사악한'[KJV], ‘치료할 수 없는’[NIV]) 것은 마음이라.”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 에베소서 4:18, 19,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성경은 또한 사람의 전적 무능력도 증거한다. 구약의 역사 전체가 이 사실을 증거한다. ① 창세기는 노아 시대의 세상이 결국 홍수 심판으로 멸망했음을 증거한다. ②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계속 하나님을 불신앙했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순종했음을 증거한다. ③ 사사기는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반복된 실패의 역사를 증거한다. ④ 왕국의 역사서들은 이스라엘의 왕국이 결국 멸망했음을 증거한다. 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시 범죄했음을 증거한다. ⑥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의 맨 마지막 때까지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했음을 증거한다.

특히, 다음의 여러 성경 구절들은 사람의 전적 무능력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斑點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만일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비교] 신명기 30:11, 14,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 . .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다’는 말은 ‘네가 이를 행하도록 [네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8:7, 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로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싫증나며 무능력하며 반대하게 하고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본래의 부패성에서 모든 실제적 범죄들이 나온다(6:4).

사람은, 죄의 상태로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대한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어버렸으므로; 본성적 사람으로서는, 그 선을 완전히 싫어하며 죄로 죽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그것을 위해 자신을 준비시킬 수 없다(9:3).

본성의 이 부패성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중생한 자들 안에 남아 있고;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되고 극복된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와 그것의 모든 활동들은 참으로 그리고 정확히 죄다(6:5).

펠라기우스주의

초대 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하였다.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① 아담은 본래 도덕적 중립 상태로 창조되었다.

② 아담의 타락 후에도, 모든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본성적 능력, 즉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 “만일 내가 해야 한다면, 나는 할 수 있다(If I ought, I can).”

③ 죄는 사람의 의지의 개별적 행동이며, ‘죄악된’ 성질이나 습관이라는 것은 없고,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책임을 진다.

④ 원죄나 부패성의 유전 같은 것은 없다.

⑤ 어린아이는 죄 없이 출생하므로 유아세례는 죄씻음과는 상관이 없고 단지 유아를 하나님께 드리는 표일 뿐이다.

⑥ 죄의 보편성은 죄악된 본本에 의한 것이다.

⑦ 육체적 죽음은 죄의 형벌이 아니고 자연적 현상이다.

⑧ 사람은 누구나 죄 없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필요하지 않다.

한마디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건전하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종교개혁 시대에 소시너스에 의해,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명백히 비성경적이요 이단적이다.

자범죄

자범죄(自犯罪)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와 자범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첫째로, 그 둘은 인과(因果) 관계가 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4은 “우리로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싫증나며 무능력하며 반대하게 하고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본래의 부패성에서 모든 실제적 범죄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개이다. 둘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인식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빈번히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물론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죄 의식을 많이 잃어버렸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죄를 동물성의 잔재(殘在)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 정도로 생각한다. 셋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의 죄이며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

자범죄들은 다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그 종류에 따라 죄책의 경중(輕重)이 있다. 모든 죄가 다 죽음의 형벌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죄가 다 똑같이 극악한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50문답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모든 범죄들이 똑같이 극악한 것은 아니고, 어떤 죄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고 몇 가지 더 가중된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죄들보다 더 극악하다”고 하였다. 성경은 죄와 심판에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고(눅 12:47, 48) 또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표현하셨다(요 19:11).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사도 바울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한다(롬 2:6).

자범죄들은 죄책의 정도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알지 못하거나 연약하여서 짓는 죄이다. 레위기 4:2,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레위기 4:22,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不知) 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레위기에서 여러 번 ‘그릇’ 혹은 ‘부지 중에’ 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비쉐가가)는 ‘실수로, 부주의하여, 무심코, 부지 중에’ 등의 뜻이다. 누가복음 12:47, 48, “주인의 뜻을 . . .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둘째는 고의적으로 짓는 죄이다. 민수기 15:29, 30, “이스라엘 자손 중 본토 소생이든지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든지 무릇 그릇 범죄한 자에게 대한 법이 동일하거니와,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짐짓’이라는 히브리어(베야드 라마)는 문자적으로 ‘높은 손을 들고’라는 말로서 ‘뻔뻔스럽게, 도전적이게, 반항적이게’라는 뜻이다. 시편 19:13, “주의 종으로 고범죄(故犯罪)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여기에 ‘고범죄’라는 말도 ‘뻔뻔스런 죄,’ ‘고의적인 죄’를 가리킨다.

신약은 또한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 말한다. 이것들은 고의적 범죄의 극단적 형태라고 생각된다. 모든 고의적 죄가 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래의 네 구절들에 언급된 죄는 특별한 죄로 보인다. 마태복음 12:31, 32,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히브리서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10:26, 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헤쿠시오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요한일서 5:16, 17, “. . .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위의 네 구절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① 어떤 이들은 성령 훼방의 죄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동안에만 사람들이 범할 수 있었던 죄로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기적 행하심을 사탄의 일로 돌린 죄만을 가리킨다고 보았다(제롬과 크리소스톰). 그러나 성경 다른 곳에 나오는 죄, 예를 들어 요한일서 5:16의 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② 어떤 이들은 위의 죄들을 ‘끝까지 회개치 않는 죄’라고 보았다(어거스틴과 찰머). 그러나 위의 네 구절에 나타난 죄들은 일반적 성격의 죄가 아니고 특수한 성격의 죄를 가리킨 것 같다.

③ 다른 이들은 이것을 거듭난 사람들이 범하는 죄라고 보았다(후기의 루터파 신학자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도 죄를 범하지만 그들의 범죄를 성령에 대항하는 죄 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④ 우리는, 칼빈이나 투레틴과 더불어, 위의 네 구절의 죄가 다 동일한 죄로서 성령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멸시하고 훼방하는 죄, 혹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며 대항하고 참된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배교(背敎)의 죄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단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5. 하나님의 법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법儀式法과 재판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덕법(moral laws)

도덕법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도덕법은 인간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세의 율법으로 성문화(成文化)되었다. 그것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는데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십계명의 구분에 대하여, 역사상 몇 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2을 제1계명으로,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2계명으로 보았다. 천주교회와 루터교회는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1계명으로, 그리고 우리의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9계명으로, ‘네 이웃의 아내 등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10계명으로 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현재 우리의 구분대로 구분한다.

십계명에 대한 간략한 해석

십계명의 해석 원리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9문답에 잘 진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①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된다. 즉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5-10계명은 사람에 대한 의무를 보인다. ② 같은 종류의 죄들을 대표적으로 간결히 표현하였다. 십계명은 도덕법 전반의 요약이다. ③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금지를 다 고려해야 한다. 즉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④ 행위 뿐만 아니라, 또한 생각과 마음에도 적용된다. 율법은 영적이다(롬 7:14).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1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무신론은 물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과 우상을 인정하는 모든 생각을 정죄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리아와 성인들과 천사들에게 기도하고 종교적 경의를 표하게 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정죄한다.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물질적 존재로 형상화하는 것은 큰 오류요 죄악이다.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상이나 그림을 만드는 것도 비록 그것이 제2계명을 어기는 죄는 아닐지라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예배당 안 강단 뒷벽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런 것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3계명은 우리가 일상 생활이나 종교 의식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고 명한다. ‘망녕되이’라는 말은 ‘헛되이, 함부로, 무의미하게’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와 기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 구절을 농담거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큰 죄이다.<![endif]>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제4계명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에 대해 명령한다. 구약시대에는 한 주간 가운데 제7일을 안식일로 성별하여 지키라고 명령되었다.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미리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야 했다(출 16:23).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나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다(출 31:14, 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낼 때 안식일에 나무가지를 줍던 한 사람은 실제로 죽임을 당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 계명이 문자 그대로 유효한가?’라는 문제는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 도덕법인가 의식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루터나 칼빈은 안식일 계명을 도덕적 교훈을 가진 의식법으로 보았다.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儀式的) 부분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교회의 공식적 집회와 휴식을 위한 필요성은 오늘날도 유효하며 따라서 신약 교회는 열심히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기독교 강요, 2. 8. 28, 31-34).

1618-19년 화란에서 열린 개혁교회의 도르트 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은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 그 날은 이미 원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하여 “. . .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으며, 성경에서 주의 날로 불리우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구별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도 시대에 이미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 구별되기 시작하였고 집회의 날이 되었다. 주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그 다음 주일에 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 20:19, 27). 성령께서는 주일에 처음으로 제자들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2:1-4).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날은 주일이었다(계 1:10). 드로아의 성도들은 주일에 모여 떡을 떼며 바울의 설교를 들었다(행 20: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매 주일 정기적으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 2).

사도시대 직후의 교부들도 주일 집회에 대해 증거했다.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킨다”고 썼다(15). 익나시우스는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주일]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 9). 순교자 저스틴도 “그 도시에 사는 자들뿐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자들도 다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에 성경 읽기와 기도와 권면과 성찬을 위해 모이곤 하였다. 그 회중은 일요일에 모였는데, 그것은 이 날이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날이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트리포와의 대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모범과 장로교회의 예배 모범대로 주일에 온 가족이 세속적 직업의 일들을 중단하고 매매를 금하며 오락을 금해야 할 것이다(느 13:15-22; 사 58:13, 14). 신약 성도들은 복음적 자유를 가지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되 구약 성도보다 못하게가 아니고 더 풍성한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5계명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친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물론, 또한 노인과 청년,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피고용인, 정부와 국민의 관계 등 연령적, 지위적 상하 관계에도 적용된다.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베드로전서 2:13, 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6계명은 사람의 생명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결투, 폭동, 자살, 낙태, 안락사 등의 모든 살인 행위를 금한다. 출애굽기 21:22- 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또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요일 3:15).

그러나 사형, 정당 방위, 정당한 전쟁, 동물의 살해 등은 성경적으로 허용된다. 출애굽기 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7계명은 사람의 순결성 곧 정조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부부 관계를 벗어난 모든 성 행위는 간음이다. 또 행위로 간음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으로 정죄된다(마 5:28). 또한 간음의 이유 외의 이혼와 중혼(마 5:32), 근친 상간, 동성애 등의 모든 부당한 성적 탈선 행위를 정죄한다.

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8계명은 사유 재산의 권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절도, 강도 뿐만 아니라, 또한 사기, 횡령, 과분한 빚, 땅이나 집 등의 계약 위반, 거짓된 저울과 되, 투기, 고리 대금 등의 부정당한 경제 활동을 금한다. 레위기 19:35, 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시편 15:5, “변리로 대금치[고리대금하지] 아니하며.”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9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다른 이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거짓된 비난, 중상 모략, 위증, 불공정한 판결, 아첨, 과장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거짓말을 금한다. 출애굽기 23:1-3,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endif]>

10계명: “네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기타 소유물을 탐내지 말지니라.”

제10계명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의 죄의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탐심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더 가지려는 욕심은 그 여러 죄들의 뿌리이다. 야고보 1:15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씀했다. 모든 불평과 불만, 색욕이나 부정한 욕망, 그리고 물질로 인한 지나친 근심 등도 탐심의 결과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의 죄라고 말한다(골 3:5).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결국 물질이나 육신의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이다. 성도는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 처지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도덕법의 목적

도덕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도덕법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둘째, 도덕법은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준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로마서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도덕법은 마치 거울과 같다. 셋째, 도덕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παιδαgωgός, 교사)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도덕법의 영속성

도덕법은 영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오늘날도 폐지되지 않았다. 성화의 목표는 의(義)와 거룩, 즉 죄 없는 성결의 상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구원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구원받은 자에게도 유익하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마태복음 5:17, 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 .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5, 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법은 모든 사람들, 즉 다른 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도, 영원히 그것을 순종할 의무 아래 두는데; 그것은 단지 그것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또한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생각해서도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이 의무를 해제하지 않으시고, 크게 강화하신다.

비록 참신자들이 행위언약으로서의 법 아래 있어서, 그것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정죄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활의 규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 줌으로, 그들이 그에 따라 행하도록 지도하며 속박하고; 또한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의 죄악된 부패성들을 드러냄으로, 그들이 그로 인해 자신들을 살펴 죄를 더 깨달으며, 죄 때문에 겸손해지며, 죄를 미워하게 하고; 그것들과 함께,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순종의 완전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중생한 자들이 그들의 부패성들을 제어하는 데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를 금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의 경고들은, 비록 그들이 법 안에 경고된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지라도, 심지어 그들의 죄들도 마땅히 무엇을 받아야 하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것들 때문에 어떤 고난들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것의 약속들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그것을 행한 경우에, 비록 행위언약으로서의 법에 의해 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서는 아니지만, 어떤 복들을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법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지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은 그가 법 아래 있고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는 아니다.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s)

둘째로, 의식법은 할례, 성막 제도, 제사들, 절기들,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 십일조 등에 대한 법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은 의식법에 대해 다음과 말했다:

보통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 외에, 하나님께서는 미성년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몇 가지 모형적 규례들을 담고 있는 의식법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시(豫示)하는 예배에 관한 것들과; 부분적으로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제시하는 것들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의식법들의 한 부분은 예배에 관한 것들인데,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들을 예표한다. 예를 들어, 성막 제도에서 번제단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물두멍은 그의 성결함을, 떡상은 그가 생명의 떡 되심을, 촛대는 그가 세상의 빛 되심을, 향단은 그의 중보 기도를, 속죄소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예표한다. 제사들에서 번제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속죄 사역을, 소제는 그가 자신을 즐거이 드리심을, 화목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심을,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의 속죄 사역을 예표한다.

절기들에서 안식일은 그가 우리에게 참안식을 주셨음을, 유월절은 그가 친히 우리에게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보리 초실절은 그의 부활을, 맥추절은 그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의 열매들이 맺힘을, 나팔절은 그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전파함을, 속죄일은 그의 십자가 단번 속죄의 사역을, 수장절은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감을, 안식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참안식을, 희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만물의 회복을 예표한다. 도덕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며,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은 죄 씻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법은 또한 도덕적 교훈도 준다. 예를 들어, 할례는 언약에 당연히 내포된 성결과 순종을 교훈한다. 제사들은 일차적으로 속죄를 예표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삶도 교훈한다. 절기들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하며, 또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한다. 정 부정의 음식에 관한 법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교훈한다.

의식법들이 보이는 도덕적 교훈들은 신약 아래서도 여전히 중요하고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드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섬겨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소득의 십분의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소득의 십일조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헌금에 대한 최소한의 규정이다. 구약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 자체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고 그것은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을 속박하지 않는다. 신약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들의 의무 아래 있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특히 신약 히브리서는 의식법의 폐지, 더 정확히 말해, 율법 제도의 폐지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다.

히브리서 7:18, 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 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전통사본]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 명령된 바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유월절만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고 10가지의 절기들에 대해 다 명령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할례와 제사에 대해서도 명령하였다. 우리가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신약 교회에서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며 무의미한 일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성경에 명령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가지는 신앙적 의미와 유익 때문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맥추절은 겨울이 지난 후 처음 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하는 모든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성탄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그런 절기들은 교회들이 스스로 정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재판법(judicial laws)

셋째로, 재판법은 신정(神政)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서의 민법, 상법, 형법 등 사회 생활에 관한 법들이다. 출애굽기 21:1의 ‘율례’라는 원어(미슈파팀)는 ‘판단들’이라는 뜻으로 재판법을 의미한다. 재판법의 한 예는 출애굽기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죽이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구약의 어떤 법이 도덕법에 속하는지, 재판법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구약의 어떤 법이 신약에서 인정되거나 혹은 그 이유가 영구적이면 신약에서도 유효한 도덕법이라고 보고 그 외에는 재판법으로 볼 수 있다(박형룡, 인간론, 312쪽).

구약의 재판법들은 신약 아래서 역시 폐지되었다. 신정 국가에서 사용되었던 법들은 오늘날 세속 사회들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4, “또한 한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그들에게, 그는 여러 가지 재판법들을 주셨는데, 그것들은 그 백성의 국가와 함께 끝났고, 지금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것들의 일반적 정당성이 요구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세의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등 세 가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중, 도덕법은 사람의 죄를 확정한다. 자범죄는 도덕법을 어긴 죄들이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그것들은 곧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죄, 하나님을 첫째로,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죄,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지 않은 죄, 이웃을 미워한 죄, 사람을 죽이는 죄,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범죄들, 남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죄, 거짓말 하는 죄, 남의 것들에 대해 탐심을 품는 죄 등이다.

성경에서 도덕적 죄들을 열거한 대표적 두 구절을 들어보자. 로마서 1:29-31, “곧 모든 불의, 음란(전통사본),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전통사본) 무자비한 자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간음과(전통사본)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전통사본)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6. 죄의 형벌

형벌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가? 죄의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죄인들의 개선을 위함인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목적이 그들의 개선을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서 사형 반대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과 징계를 혼동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징계 혹은 권징은 죄에 대한 벌이기는 하나 그 정도가 약하며 대략적이다. 그것은 징계받는 죄인들의 개선을 위할 것이다. 징계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위해 유익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은 다르다. 그것은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함일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하나님의 최종적 지옥 심판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일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물론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 사건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도덕적 교훈이 되며 그들의 회개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심판 당한 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이 죄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범죄의 예방을 위함인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목적이 사람들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혼동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당하는 본인들에게 앞으로의 범죄 예방을 위해 유익이 있을 것이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당사자들에게 최종적이다. 심판 받아 죽었는데 무슨 범죄 예방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물론, 죄의 형벌이나 징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범죄 예방의 효과와 유익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한 대답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형벌은 더 이상 범죄 예방과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이 범죄 예방을 위함이라는 생각도 바른 생각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함

성경에 밝히 계시된 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므로 죄는 엄격한 공의의 처벌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에서 보이신 의는 엄격한 보응의 의이었다. 출애굽기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신명기 19:21, “네 눈이 [그 거짓 증인을]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하나님의 공의는 적당한 형벌로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9장에서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12, 17, 21절). 또 예레미야는 대언하기를,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라고 했다(렘 23:19, 20; 30:23, 24). 또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시편 62:12,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나이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5, 6,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리라.” 이러한 말씀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행위임을 나타낸다.

형벌의 내용-죽음

그러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역사상 인간의 죄에 대한 여러 가지 형벌을 내리셨으나 그것들은 죄에 대한 엄격한 형벌이 아니었다.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을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에게 처음 명령을 주실 때에 하신 경고의 말씀 속에 들어 있었다.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였으며 그 결과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린도전서 15:21, 22,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죄에 대한 형벌은 한마디로 죽음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한 것이다(롬 6:23). 그런데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영적인 죽음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우선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영적 죽음 혹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사람에게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아무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하나님과 단절된 자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대언하기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하였다(렘 2:13).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 곧 생명의 근원이시다. 또 주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람이 주 안에 거하지 못하면 마치 포도나무에서 잘리운 가지와 같이 생명이 없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요 15:4, 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누가복음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여기에서 처음 말씀하신 ‘죽은 자들’은 일반 사람들을 가리켰다. 또 탕자의 비유에서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가 돌아온 그 아들을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표현하셨다(눅 15:24). 또 주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거듭날 것을 의미하셨다고 생각된다(요 5:25).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1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했고, 또 에베소서 2:5에서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 영적으로 이전에 죄 가운데서 죽어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4:18에서는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했다. 구원받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떠나 있고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섬길 줄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있다. 사람의 정신적인 모든 문제들, 예를 들어 양심의 가책과 고통, 공허함, 우울증, 슬픔, 공포 등은 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영적 죽음의 결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육체적 죽음

둘째로,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물론 육체적 죽음을 포함한다. 육체적 죽음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창 35:18; 왕상 17:22; 눅 8:55). 그것은 본래 결합되었던 흙과 생기가 분리되어 흙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창 2:7; 3:19; 전 12:7).

인간의 육체적 죽음은 어떤 불신앙적 학자들의 주장대로 자연적 현상이 아니고 인간의 범죄함 때문에 왔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언하시기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다(창 3:19). 그것은 그가 아담에게 첫명령을 주시면서 이 명령을 어기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던 말씀 그대로이었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 때문에 왔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아담의 후손들의 명단을 기록하면서 ‘죽었더라’는 말을 8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하신 말씀대로, 즉 죄의 형벌로 죽게 되었음을 증거하였다. 아담의 범죄로 그와 그 후손들은 다 죽게 되었고 그 죽음은 육체적 죽음을 포함했다. 로마서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육체의 노쇠, 각가지 질병들, 자연적 재난들로 인한 육체의 고통들 등은 육체적 죽음의 전조(前兆)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지옥 형벌-'둘째 사망'

셋째로,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성경에 의하면, 이 정도가 아니고 또한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이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영혼은 육체가 죽을 때 멸절(滅絶)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인들의 부활이나 악인들의 지옥 형벌은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 10:28). 이 말씀은 첫째로 영혼의 불멸성을 증거하며 또한 둘째로 지옥의 교리를 증거한다. 지옥 교리는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진리이다. 이것이 왜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이 교리를 변경해서는 안 되는이 하는 이유이다.

지옥 교리는 마가복음 9:43-49에서 가장 강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증거되어 있다. 특히 한글개역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44절과 46절은 전통본문에는 분명히 들어 있고 이 구절은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의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43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절,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5절,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전통사본]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6절,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7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의--전통사본]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절,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절,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endif]>

주께서는 또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지옥의 영영한 불에 대해 증거하셨다. 41절,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6절, “저희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영생과 대조되는 영벌 곧 영원한 형벌은 지옥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 영원한 멸망에 대해 증거했다. 1:8, 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여기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은 지옥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지옥에 대해 밝히 증거했다. 요한계시록 19:20, “짐승[적그리스도]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0:10,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20:13-15,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와 같이,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첫째로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과 그 결과로 오는 영원한 생명의 상실과 온갖 정신적 문제들을 포함하며, 둘째로 육체적 죽음 곧 육체의 생명 원리인 영 혹은 영혼이 육체를 떠남으로 육체가 생명을 잃는 것을 포함하며, 셋째로 영원한 지옥 형벌 곧 ‘둘째 사망’을 포함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는 바로 이러한 죽음이었다. 우리는 원죄와 자범죄를 가진 죄인으로서 이런 죽음을 죽어야 했었다. 특히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롬 10:4; 고전 1:30).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고후 5:21).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다(갈 3:1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롬 3:23-26).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구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함을 얻는다. 구원받은 자는 죄로부터의 구원,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7. 하나님의 언약

행위 언약

사람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한 명령을 주신 것이었다.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독특한 명령이었다. 이것은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순종 혹은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임을 증거한다.

첫 명령의 언약성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은 언약(계약)의 방법이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즉 언약의 책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인데,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처음 명령을 흔히 ‘행위언약’이라고 부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2은 말하기를, “사람과 맺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는데, 그 언약에서 아담 자신의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그와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첫 명령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 명령이 언약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명령에는 언약의 두 당사자, 언약의 조건, 언약의 내용, 언약의 벌칙 등이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 6:7은 “저희가 아담처럼(케아담) 언약을 어겼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 첫 명령이 하나의 언약이었음을 증거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을 전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즉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의 실패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한 로마서 5:15-21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는 행위언약을 전제하며 행위언약의 개념을 증거한다. 그 구절은, 한 사람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였으므로 그의 죄가 온 인류의 죄가 되었으나, 한 사람 그리스도가 모든 택함받은 자들을 대표하였으므로 그의 의의 행위가 모든 택함받은 자들의 의가 되었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즉 한 사람 아담이 온 인류의 대표의 위치에 있었던 사실은 행위언약을 증거하는 것이다.

행위언약의 요소들

행위언약의 요소들을 좀더 살펴 보자. 언약의 두 당사자는 하나님과 아담이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명령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조치이었다. 행위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삼중적이었다. 피조물인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이것은 본질적 관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본질적 관계 위에 약속의 한 명령을 주심으로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으로써만 가능한 관계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에, 비록 이성적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로서 그에게 마땅히 순종할 의무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기를 기뻐하신 하나님 편에서의 어떤 자원적인 낮추심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에게서 나온 어떤 성과도 그들의 행복과 상급으로 결코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아담 개인과의 언약이 아니고, 인류 전체와의 언약이었다. 아담은 이 언약에서 온 인류를 대표한 언약의 대표자로 서 있었다.

언약의 조건은 순종이었다. 그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순종이어야 하였다. 이 원리는 구약의 도덕법에서 다시 강조되었고 신약에서도 다시 확증되었다.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 순종의 명령은 시험의 일정한 기간에 제한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 시험이 일정한 기간에 제한되지 않았다면, 아담은 비록 그 기간 동안에 범죄치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장차 누릴 것과 같은 영생 즉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영생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시 잃어버릴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을 주시기를 의도하였음을 보이며, 그 의도는 일정한 시험 기간을 요구한다.

언약의 내용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것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벌칙의 경고 속에 암시되어 있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정하신 시험 기간 동안 하나님의 금하신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살았을 것이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아담이 본래 소유한 생명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된 생명이 다시 범죄하거나 죽을 수 없는 생명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생명은 아담이 이미 소유한 생명보다 더 영광스러운 생명이었다.

언약의 벌칙은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대로,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 분리됨과, 육신적 죽음 곧 영혼과 몸의 분리와, 영원적 죽음 곧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지옥 형벌을 다 포함한다.

언약의 표는 생명나무이었다. 동산 중앙에 있었던 생명나무는 약속된 생명을 상징하였다. 생명나무의 열매 자체가 어떤 효능을 가졌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사람이 타락 전에 그 열매를 먹었는지도 단정키 어렵다.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창세기 3:22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혹은 풍유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행위언약의 영속성 문제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은 오늘날도 유효한가? 행위언약의 영속성의 문제는 이중적으로 관찰된다. 우선, 행위언약은 구원의 방법으로서는 폐지되었다. 세상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믿는 자는 이제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로마서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러나 다른 한편, 행위언약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으로서는 영원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순종의 기본적 의무를 보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 즉 택함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의 정당성을 증거해 준다. ‘죄의 값은 죽음이라’는 대 명제는 폐기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짊어지셨고 우리를 위해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 그 공의의 법은 믿지 않는 죄인들, 회개치 않은 죄인들을 심판할 것이다. 죄인들은 그 공의의 법에 따라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은혜 언약

모든 사람은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며 죄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중에 일부분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고 그 구원의 방법은 은혜의 언약이라는 방법이었다. 은혜언약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그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3, “사람은 타락으로 그 언약[행위언약」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주께서는 은혜언약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언약을 맺기를 기뻐하셨는데, 그 언약으로 그는 죄인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작정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이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과 구원을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신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이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새 언약--전통사본」의 피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됨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일은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어진 것이었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3:11, “곧 「복음의 은혜는」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획하신 영원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택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17:2, 4,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디도서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셨음을 나타낸다. 학자들은 이것을 ‘구속언약’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대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택자들을 위해 구속 사역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이 일을 위해 아들께서는 죄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율법에 복종하시고 택자들의 죄의 형벌을 받으심으로 완전한 의를 이루셔야 하였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갈라디아서 4:4, 5,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로마서 5:18, 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5:8, 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통해 얻을 복은 택자들의 영생이었다. 요한복음 6:38-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또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일을 이루셨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다.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은혜언약의 요소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택자들을 은혜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은혜언약의 당사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사람들이다. 은혜언약의 조건은 택하신 사람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결코 구원을 위한 공로가 아니고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과 방편에 불과하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믿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모든 자 위에--전통사본」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언약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은혜언약에 담긴 약속의 내용은 택자들의 영생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영생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에 근거한다. 인류는 아담이 범죄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어졌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레미야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에스겔 36: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계시록 21:3, 7,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은혜언약의 두 측면

은혜언약에는 법적 측면과 생명적 측면이 있다. 은혜언약에는 법적 측면이 있다. 신자의 자녀들은 구약시대에 합법적으로 은혜언약 안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할례의 규례에서 잘 증거된다. 창세기 17:7, 10, 1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 . .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신명기 29:10-12, “오늘날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은혜언약의 이러한 법적 측면은 신약 아래서도 계속 유지된다. 사도행전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법적 측면에서 볼 때 은혜언약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진실히 믿는 성인들이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이고, 셋째는 법적으로 언약 안에 들어와 있는 비중생자들이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형식적 교인들이거나 위선자들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이스마엘이나 에서나 불신앙적 유대인들은 다 은혜언약의 규례들에 참여하고 그 언약의 책임 아래 있었고 어느 정도 그 언약의 특권을 누렸으나 참된 의미에서 은혜언약의 백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은혜언약에는 생명적 측면이 있다. 참으로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은 중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실제로 새 생명을 얻고 새 삶,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산다. 형식적 교인들과 중생한 성도들은, 비록 우리가 그들을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행위를 통해 확인된다. 데살로니가전서 1:3, 4, “너희의 믿음의 역사(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 . .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단지 법적으로만 아니고 생명적으로 언약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은혜언약의 시대들

은혜언약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다르게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약의 집행 방식의 차이일 뿐이며, 두 언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먼저, 구약시대를 살펴보자. 은혜언약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뱀 곧 사탄에게 하신 선언에서 제일 처음 암시되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구절은 죄인들의 구원을 암시하는 ‘원시 복음’이라고 보통 불린다. 어떤 이들은 ‘여자의 씨’를 인격체적 의미가 아니고 비인격체적, 집합체적 의미로 보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된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4:4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원시 복음을 염두에 둔 것이 확실하다. 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가죽옷을 입히신 것(창 3:21)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표하는 것이 분명하다. 구약의 짐승 제사는 이 때 계시되었을 것이다.

은혜언약은 또한 노아와의 언약에서도 나타났다. 노아와의 언약은 두 가지이었다. 첫 번째는 홍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의 약속이었다(창 6:17, 18). 그 구원은 방주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 방주는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을 예표한다. 두 번째는 홍수 심판 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더 이상 홍수로 멸망시키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창 9:8-13). 그 언약의 표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주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후손들 및 모든 생물들과 맺으신 언약이었고 흔히 ‘자연 언약’이라고 불린다. 이 자연적, 전세계적 복(福)은 은혜언약의 첨가물이었다.

은혜언약은 또한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도 아주 명료하고 충분하게 나타났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진다.

① 이 언약은 하나님과 정식으로 맺어졌고 그 표로서 할례의 규례가 주어졌다(창 17:9-14). 이로써 할례는 언약 백성의 공식적 표가 되었다.

② 이 언약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에 근거하였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것은 이 언약이 은혜언약임을 잘 증거한다.

③ 이 언약은 민족적이며 또한 세계적이었다. 창세기 12:2, 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④ 이 언약은 물질적이며 또한 영적이었다. 이 언약의 영적 성격은 그것이 신약 교회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창세기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로마서 4:16,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은혜언약은 또한 시내산 언약에서도 나타났다. 시내산 언약은 구약을 대표한다. 구약(옛언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으로 정의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그 책을 백성 앞에서 낭독하였으며 그 책을 ‘언약서’라고 불렀고 또 제물의 피를 백성 앞에 뿌렸는데 그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불렀다(출 24:1-8).

시내산 언약은 율법[법]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은 도덕법, 재판법, 의식법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서 특히 도덕법과 의식법이 중요하였다.

도덕법은 외적으로는 행위언약적 요구를 강조하는 듯하였다. 도덕법의 요구는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도덕법의 의도는 행위언약의 갱신이 아니고 은혜언약을 위한 보조이었다. 사람이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한편,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구속의 은혜를 증거한다. 예를 들어, 제사 제도와 성막 제도, 특히 지성소의 법궤와 속죄소의 규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예표하였다. 여기에 시내산 언약 혹은 구약의 은혜언약적 성격이 증거된다. 레위기 4:20, “제사장이 그것[속죄 제물]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5, “그들[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완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었다.”

신약(새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예레미야 31:31은 신약시대를 예언하였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에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 누가복음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고린도전서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를 ‘구약’과 ‘신약’(새 언약)이라는 말로 구별하였다. 고린도후서 3:6, 14,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구약을 읽을 때에.”

신약시대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구약에 예표되고 암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 사역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히브리서 7:27,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브리서 9:11, 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러므로 구약은 예표적, 그림자적, 임시적, 가변적이었다면, 신약은 성취적, 실체적, 최종적, 영원불변적이다.

둘째로, 구약은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강조되었으나, 신약은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었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로마서 3:21, 22, “이제는[신약시대에] 율법 외에[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나 율법은 신약 아래서도 유익하다.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가 아노라.”

셋째로, 구약은 외적이고 의식적인 면이 많이 있었으나 신약은 내적이며 영적이다. 예레미야 31:31, 33,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고린도후서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儀文「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성령]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성령은 살리심이니라].”

넷째로, 구약은 민족적이었으나 신약은 세계적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되었던 선민選民 사상은 사라졌고, 은혜의 복음이 온 세계의 모든 나라들과 족속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물론 신약에도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여전하고 오히려 더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다.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로마서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구약과 신약의 본질적 동일성

역사상 교회 안에는, 구약과 신약을 전혀 별개의 언약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소시너스파는 구약에는 영생의 약속이 없었고 구원의 조건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재세례파도 구약에는 복음의 내용이 없다고 보았다. 오늘날 어떤 세대주의자들도 구약과 신약의 시대적 특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구약과 신약을 대립시키고 구약의 은혜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선,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중보자 혹은 구주가 동일하시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동일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창 15:6).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었다. 구약의 의식법, 특히 제사와 성막 제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속죄 제물로 구원얻는다는 사실을 잘 증거한다. 구약의 성도들은, 히브리서 11장이 증거하는 대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들도 의인이 믿음으로 살 것을 말씀하였다. 이사야 7:9,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박국 2:4,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약들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한 언약, 즉 은혜언약의 두 가지 표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6, “본질이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들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양한 시행들 아래 있는 동일한 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은혜언약으로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리고 유일하신 중보자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약시대에는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시대에는 오신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완전한 의 안에서 의의 삶을 구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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